소설리스트

루시아-70화 (71/77)

외전 2장 또 다른 미래 ― 휴고

어둠을 대낮처럼 밝히는 횃불들이 어둠보다 새카만 절망을 드리웠다. 아비규환의 현장이 순식간에 정돈되고 백작가의 식솔들이 줄줄이 묶였다. 수십 명에 달하는 고용인들을 한 군데로 몰아서 병사들이 지키고 섰다. 고용인들은 서로 끌어안고 숨죽여 울었다. 그들이 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모시는 주인이 역모의 죄를 쓰면 생사를 같이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척척, 소리는 마치 죽음으로 이끄는 신호음 같았다. 병사와 그들을 지휘하던 기사가 바짝 긴장하며 몸을 세웠다. 십여 명의 기사들을 거느리고 죄인들을 향해 다가온 사내의 머리카락은 밤에 녹아들 것처럼 어두웠다.

“상황 보고.”

현장 지휘자가 절도 있는 한 걸음을 내디디며 입을 열었다.

“역도의 식솔들은 둘을 제외하고 빠짐없이 추포했습니다.”

“둘?”

되묻는 어조가 사나웠다. 기사는 흠칫하며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역도의 삼남은 현재 학술원에 재학 중으로 확인했습니다. 확인 즉시 체포대가 익시움으로 출발했습니다. 내일 오전이면 소식을 받으리라고 예상합니다. 하오나 역도의 부인만은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고를 듣는 사내의 눈썹이 올라갔다.

“하녀의 증언은?”

“가까이 시중을 들던 고용인은 물론 가족 누구도 모른다고 합니다. 현재 계속해서 저택 전부를 샅샅이 수색하고 있습니다. 저택 바깥으로도 사람을 풀었습니다.”

“저택을 이미 빠져나갔을 가능성은?”

“하녀가 늦은 저녁에 마지막 시중을 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고용인 중에는 자리를 비운 자가 없습니다.”

귀족 여자가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어둠 속에서 혼자 도망갈 수 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역도의 씨를 배고 있어서 빼돌렸는지도 모른다. 그 부분 확인하라.”

“예.”

“저택에 있다면 어딘가에 숨어있겠지. 은밀한 비밀 장소가 있을 터. 딘, 눈썰미 좋은 자들 몇을 추려서 찾아라.”

“예. 주군.”

“억울합니다! 착오가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휴고의 무심한 시선이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폐하를 뵙게 해주십시오!”

손이 뒤로 묶여 꿇려있는 투실투실한 남자의 그림자는 한 마리의 돼지 같았다. 생긴 모습대로 지르는 소리가 귀에 거칠었다.

메튼 백작. 오는 길에 수하에게서 듣지 않았으면 여기가 누구 집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휴고가 날이 밝기 전까지 사냥할 대상 중에서 가장 하찮은 사냥감이었다. 어쩌면 호소대로 억울할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의혹의 대상이 되었고 사냥 목록에 오른 사실만으로 죄다.

짧은 시선만 스치고 휴고는 냉정하게 몸을 돌려서 저택 안으로 향했다. 거슬리는 외침이 더 들려오다가 비명을 끝으로 조용해졌다. 섬뜩한 스산함이 주변을 안개처럼 에워쌌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면서 휴고의 한쪽 입 끝이 살짝 올라갔다. 오늘 밤만큼 자신의 삶에 어울리는 날은 없다고 생각했다.

메튼 백작의 집무실은 이미 한바탕 뒤집어서 엉망이었다. 그러나 휴고에게 보일 몇 개의 문서는 가지런하게 책상 위에 정리되어 있었다. 휴고는 지루한 표정으로 대충 훑었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이 나오리라고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잠시 후 기사가 들어와서 보고했다.

“역도의 부인이 아이를 가졌을 가능성은 낮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하녀의 말에 의하면 불임이라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고 합니다. 확인을 위해서 드나들던 의사를 데려오라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주치의가 없나?”

“고용 비용 때문에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메튼 백작의 짠돌이 기질 덕분에 의사 한 명이 목숨을 건졌다.

“여자를 찾으면 역도들과 모두 처형하라. 폐하께는 따로 보고하겠다.”

들러서 청소할 곳이 몇 군데 더 있었다. 여기서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마무리는 맡겨두고 휴고는 곧 흉가로 변모할 백작저를 나섰다.

일가가 역모죄를 짓고 뜰에서 수십의 사람이 죽은 집을 누구도 사려 하지 않을 것이다. 계속 비어있다가 낡아 흉물스러워지면 헐리고 새집이 지어지기까지 최소 10년은 걸릴 것이다.

피라미인 줄 알았던 메튼 백작의 처리가 지지부진했다. 학술원에 재학 중이라는 역도의 삼남은 용케 타국으로 빠져나갔고 사흘이 지나도록 부인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덕분에 며칠 명줄이 연장된 역도들을 백작가에 그대로 두고 감시하는 일은 인력 낭비라서 모두 감옥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휴고는 딘으로부터 비밀 장소로 통하는 장치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들어가봤나?”

“주군께서 명하신 대로 안을 확인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면서 휴고는 꼭꼭 숨어있는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절대 저택을 빠져나가지는 못했다. 현재 수도의 경비가 삼엄해서 수상한 자는 반드시 눈에 띄었다. 곱게 살아온 귀부인이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숨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휴고는 저택 내부에 비밀 장소가 있으며, 그녀는 그곳에 숨어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만약 찾으면 뒤지지 말고 즉시 보고하라고 일렀다.

기사 몇 명만 데리고 폐가가 된 백작저로 들어갔다. 딘이 장치를 조작해서 드러나는 어둠을 보면서 휴고의 붉은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기사가 횃불을 붙여 어둠을 밝혔다.

휴고는 관심 있게 주변을 살폈다. 전문적으로 잘 만들어진 비밀 장소가 인상적이었다. 한참을 내려가서 벽 전체가 희미하게 발광하는 공동에 다다랐다. 구석에 사람이 누워있는 형태의 그림자를 발견한 휴고가 걸음을 멈추었다.

기사들은 뒤에 세워두고 휴고는 횃불을 든 채 그림자를 향해 다가갔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누워있는 여자에게선 움직임이 없었다. 횃불을 높이 들어서 주변을 비추었다. 여자가 누워있는 간이침대는 모포 몇 겹을 겹쳐 만들었고 주변의 가죽 포대 안에는 건량이 가득 들어있었다. 옷가지를 싼 보따리도 보였다.

‘준비된 피난처인가.’

메튼 백작가 식솔은 이곳의 존재를 몰랐다. 여자가 모두 혼자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 백작가의 몰살을 사전에 미리 알았을 리가 없었다. 여자는 언제 있을지 모르는 만약을 위해서 혼자만 아는 피난처를 만들었다. 도대체 왜?

휴고의 붉은 눈이 곤히 자는 여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재밌군.’

여자의 발버둥이 흥미로웠다. 휴고는 여자의 삶에 대한 열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나 무료하고 지긋지긋한 세상인가. 여자가 애를 가졌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련만 시중을 들던 하녀와 여자의 진료를 전담했던 의사도 불임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틀림없는 불임입니다. 불임이 아니라고 해도 부군이 수 년 전부터 아이를 갖게 할 수 없는 몸입니다.’

의사는 묻지도 않은 메튼 백작의 성기능 장애를 들먹였다. 마치 백작부인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면 목숨을 구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역모에 휘말린 자와 엮이면 절대 좋을 꼴을 못 볼 텐데 의사는 그런 두려움보다 백작부인의 처지를 더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은 성품을 지닌 여자가 남편과 비록 친자식은 아니라고 해도 자식까지 모두 내버리고 혼자 도망갈 길을 찾았다는 것이 모순처럼 느껴졌다. 평생 도망자가 될 신분을 감수하며 택한 여자의 삶은 과연 그렇게 집착할 가치가 있을까.

그는 기억을 더듬어서 메튼 백작부인이라는 여자를 떠올려 보았다. 그는 기억력이 좋았지만, 인상에 남을 만한 대화를 나누지 않고 스쳐 지나간 사람까지 기억하지는 못했다. 메튼 백작부인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휴고는 여자에게서 몸을 돌렸다. 아무 말 없이 주군이 위로 오르는 계단을 밟자 기사들도 말없이 뒤를 따랐다. 비밀 장소를 완전히 빠져나와서 휴고는 명령했다.

“오늘 일은 못 본 것이다.”

기사들은 의문을 품지 않고 대답했다.

“여자 시체를 구해서 귀부인의 옷을 입혀 숲에 버려라. 최소한 머리카락 색깔 정도는 비슷해야겠지.”

휴고는 반역자의 식솔을 살려주는 자비심에 보태서 도망갈 길까지 만들어 주기로 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변덕이었다. 그렇게 살고 싶으면 어디 살아봐라. 곱게 살던 귀부인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냉소적인 마음도 얼마간 있었다.

“하지만 삼남이라는 그놈 추적은 늦추지 말도록.”

자식도 없고 애를 가진 것도 아닌 역도의 여자 하나쯤은 살려줄 수 있으나 자식 놈은 아니었다. 절대 불씨를 남겨두지 않는 것이 그의 평소 지론이었다.

다음 날, 감옥에 있던 메튼 백작 일가가 모두 처형되었다.

약 달포 후 휴고가 파티라는 명칭을 빙자해서 왕이 귀족들을 위협하는 자리에 참석하고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귀족 저택의 그림자를 보면서 갑자기 궁금했다.

‘그 여자. 도망쳤겠지?’

휴고는 마차를 메튼 백작저로 돌리게 했다. 을씨년스럽게 변한 백작저의 풍경은 날이 어두워서 더욱 음울했다. 장치 조작으로 비밀 장소를 열고 아래로 내려갔다. 여러 사람의 인기척을 느낀 작은 생명체가 어둠 속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횃불을 비추어 보니까 사람은 없고 쥐떼만 들끓었다.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면서 휴고는 왠지 허전했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살피다가 불과 며칠 전까지는 사람이 지냈던 흔적을 찾았다.

‘여기서 한 달을 넘게 버텼다고?’

본래 공주였다는 백작부인답지 않은 지독한 인내심과 끈기에 감탄했다. 대체 무엇이 그 여자를 그렇게 강하게 지탱해 주었을까. 그저 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나가는 통로가 있을 거다. 찾아라.”

기사들이 주변을 수색하다가 장치를 조작해서 어두운 통로를 발견했다. 휴고와 기사들은 좁은 길을 따라서 꽤 오래 걸어갔다. 마침내 바깥으로 나왔을 때 기사 중 하나가 이곳이 수도 외곽의 묘지라고 말했다.

날이 어슴푸레 밝아오고 있었다. 새벽의 공동묘지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휴고는 아침 햇살이 묘지를 밝히는 모습을 응시했다.

“추적할까요?”

“…됐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이것으로 되었다. 휴고는 자신답지 않은 짓은 이 정도까지만 하기로 했다. 여자가 이후에 어찌 살아가든지 그의 손을 떠난 문제였다.

마차는 백작저에 있었다. 기사가 탈 것을 가져올 때까지 기다리느니 통로를 따라 다시 되돌아가기로 했다. 뒤돌아서 통로 입구를 들어서다가 휴고는 멈칫 서더니 몸을 숙였다. 무너진 돌 더미를 치우자 아래에 귀부인들이 쓰는 작은 나무 보석함이 나왔다. 덮개를 열고 그는 피식 웃었다. 소복하게 들어있는 반지나 목걸이는 그리 고가의 물건으로 보이지 않았다.

‘도피 자금인가. 패물을 모두 몸에 지니지 않고 숨겨놓았군. 영리한 판단이야.’

다시 덮개를 덮으려다가 휴고의 시선이 자신의 왼쪽 가슴 옷깃에 닿았다. 연미복의 옷깃에는 부토니에가 매달려 있었다. 은을 섬세하게 세공해서 사자의 머리 형상을 만들고 작은 붉은 보석 두 개를 박아서 타란 공작가 가주의 모습을 형상화한 장신구였다.

그는 손으로 잡아 뜯듯 브로치를 떼어냈다. 보석함에 들어있는 반지 몇 개보다는 값나갈 것이다. 미련 없이 함에 던져 넣고 덮개를 닫아 원래 있던 장소에 두고 위에 돌을 덮어 감추어주는 마무리까지 했다.

휴고는 아주 잠시, 무릎을 굽힌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는 묘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일어났다. 주저 없이 어두운 통로 안으로 걷기 시작했다. 기사들도 바로 뒤를 따랐다. 그들의 모습은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3년 후 휴고는 역도의 삼남 브루노 메튼을 잡아서 즉결 처형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추적대를 따돌리며 신출귀몰하게 도망치는 메튼 백작 삼남의 소식은 상당 기간 동안 사교계의 화제였으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렸다. 브루노 메튼의 죽음은 조용히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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