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장 데미안 (1)
필라체는 인구 30만이 채 안 되는 도시 국가다. 필라체라는 국명보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종합 학술원 익시움이 더 유명했다.
익시움에 소속된 교수나 직원을 포함하면 익시움에서 생활하는 인구는 7만이 넘어가고, 파생 고용 인력까지 포함해서 거의 15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익시움을 중심으로 생활했다. 학술원 익시움은 필라체의 국가사업이었다.
최고의 교육을 받고 최고의 인맥을 쌓기 위해서 익시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고가의 등록금을 지불하고 상당한 생활비를 소비했다. 그 돈의 일부는 학술원의 시설과 교수진에 대한 투자금이 되었다. 최고의 자리를 놓지 않으려는 익시움의 질적 향상이 꾸준하자 학생이 더 몰려드는 선순환 반복 구조가 이어졌다.
올해 열다섯 살의 크리스는 6년짜리 준심화 과정을 수료하기 위해서 익시움에 입학했다. 준심화 과정은 준비 학년의 3~4학년 과정과, 본 학년의 1~4학년 과정을 합한 것이다.
익시움의 교육 과정은 나이와 수준에 따라서 예비 학년, 준비 학년, 본 학년 과정으로 각 4년씩 총 12년 과정을 기본으로 하며 학생들 입맛에 맞추어 서로 결합하거나 쪼갤 수 있었다. 크리스는 입학한 지 1년 차로 준비 학년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익시움의 학습 과정은 대단히 어렵지만 성적이 바닥을 기어도 졸업장은 무조건 주었다. 거액 수업료를 받아 수익을 챙기는 학술원의 머리 굴리기였다. 대신 과정을 이수했다는 수료증은 일정 성적 이상의 학생에게만 주었다. 이런 시스템을 잘 모르면 졸업장만으로 학술원 과정을 훌륭히 마쳤다고 대외적으로 내세울 수 있었다.
불행히도 크리스의 부친은 이런 교묘함을 잘 알고 있었다. 크리스를 익시움으로 보내면서 졸업장만 받아올 경우 발가벗겨 가문에서 내쫓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3학년을 마무리하는 크리스의 성적은 간신히 턱걸이였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 계절 학기를 추가로 수강하지 않고 집으로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교정을 지나던 크리스는 학생들의 술렁임에 시선을 돌렸다. 교내 화제의 인물이 지나가고 있었다. 청년이라 하기에는 어리고 소년이라 하기에는 성숙한 흑발의 소년이었다.
‘하늘은 불공평해.’
크리스는 데미안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사내 녀석들만 우글거리는 시커먼 학술원에서 데미안은 수천 명 중에서 확 눈에 띌 정도로 발군의 외모를 지녔다. 그뿐인가. 단 한 번도 수석 자리를 내놓은 적이 없는 무지막지하게 머리 좋은 녀석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저 여우는 대체 뭐냐고.’
데미안이 데리고 다니는 짐승이면 더 사납고 거대한 쪽이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런데 늘 발치를 따르는 샛노란 털의 여우는 조막만 했다. 신기하게도 여우는 한낱 짐승 주제에 굉장히 도도해 보였다. 가끔은 사람들의 시선에 으쓱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크리스는 기분 탓으로 돌렸다.
‘여전하군.’
데미안은 오늘도 학생들의 흘끔거리는 시선을 완전히 무시했다. 으스대는 모양새가 아니라 그야말로 아무 관심이 없었다.
‘…아무리 봐도 닮았단 말이야.’
크리스는 데미안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크리스의 고국 제논에서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이었다.
크리스는 올해 신년 파티를 사교계 공식 데뷔 무대로 삼았다. 대부분 귀족들은 왕실에서 주도하는 신년 파티를 데뷔 무대로 삼았다. 규모가 크고 많은 귀족이 참석하기 때문이었다. 크리스의 집안이 가난하지는 않지만 부친은 따로 데뷔 파티를 여는 일에 돈 쓰는 것을 싫어했다.
그 자리에서 크리스는 부부 동반으로 참석한 타란 공작 부부를 처음 보았다. 타란 공작의 외모적 특성은 꽤 유명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직접 본 감상은 상상했던 모습과 꽤 달랐다.
타란 공작을 둘러싼 소문이 무시무시해서 거칠거나 무서운 사람일 줄 알았는데 연미복을 갖추어 입은 타란 공작은 대단히 준수한 외모에 기품 있는 귀족이었다. 인상적이었던 타란 공작의 모습은 계속 눈앞에 동동 떠다녔다. 그래서 익시움에서 데미안을 보자마자 충격이 머리를 내리쳤다.
크리스는 소문에 밝은 편이 아닌데도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데미안의 소문을 들었다. 기숙 과정에 재학 중인 괴물 같은 천재. 수석을 놓친 적이 없으며 교양으로 익히는 검술 실력마저도 교수와 수십 합을 나누어 겨룰 정도라고 했다. 정말 세상에는 천재가 있다는 사실을, 크리스는 데미안을 보며 실감했다.
‘나랑 아예 종족이 달라.’
워낙 격차가 나서 그런지 부럽지도 않았다. 그런 것보다 크리스는 타란 공작과 데미안의 연관성이 궁금했다.
‘혈연관계가 아니고서야 저렇게 닮을 수가 없어.’
익시움 내에서는 불분명한 데미안의 신분을 추측하는 여러 가지 말이 떠돌았지만 누구도 타란 공작을 언급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의아했으나 이제는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다들 말조심을 하고 있었다.
‘타란 공작에게 저런 큰아들이 있다고 하기엔……. 너무 젊지.’
크리스는 데미안의 정확한 나이를 몰랐다. 겉으로 보면 최소한 크리스 자신과 같은 나이거나 더 많아 보였다.
‘타란 공작가에 공녀가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아들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이야.’
아들이 아니면 친척인가? 멀어져가는 데미안을 붙들고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니지?”
뒤돌아서던 크리스는 거슬리는 목소리에 다시 몸을 돌렸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광경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런 놈들이 시비를 거는 꼴을 보면 타란 공작과 아무 상관없는 것 같기도 하고…….’
바닥에는 데미안이 들고 있던 책이 떨어져있고, 데미안의 앞을 두 소년이 가로막고 서있었다.
‘또 저 녀석들이네.’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두 녀석은 데미안만 보면 시비를 걸지 못해 안달이었다.
‘저런 녀석들과 같은 고국에 적을 두고 있다는 게 수치라니까.’
데미안은 신분은커녕 어느 나라 출신인지도 불분명했다. 익시움의 수업료를 감당할 만큼의 돈은 있지만 기숙 과정을 다니는 것을 봐서 아마 귀족은 아닐 거라고 사람들은 추측했다. 데미안에게 시비 건 녀석들에게 아무 불이익이 없자 데미안의 신분이 역시 별것 아니라는 생각은 굳어져갔다.
귀족이건 귀족이 아니건 그게 왜 시빗거리가 되는지 모르겠다. 은근히 데미안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점도 크리스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우연히 동기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다가 데미안을 고깝게 보는 시선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데미안은 어떤 경우에도, 누구 앞에서도 주눅이 드는 법이 없었다. 그런 태도가 건방지다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건방지다.’라고 하지는 않았으나 그런 뜻이 다분한 말을 하는 동기들이 정말 한심했다.
‘오늘도 저러다 말겠지.’
곧잘 보는 광경이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없었다. 맞부딪쳐야 소리가 나는 법. 데미안은 아예 상대하지 않았다. 그러니 시비 걸던 놈들도 씩씩대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는 무시를 택하는 데미안의 대처법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녀석들이었다.
‘또 너네냐.’
데미안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놈들은 유치한 짓을 지칠 줄 모르고 끈질기게 시도했다. 그런 근성으로 책을 한 줄 더 읽으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데미안의 눈에 싸늘함이 감돌았다. 자신이 누군지 밝히면 바닥에 엎드려 발이라도 핥을 녀석들이었다.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데미안은 수년 전에 겪었던 정원 파티의 기억을 잊지 않았다. 나이 든 어른이 모두 지혜롭지 않다는 사실을 배웠다. 학술원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녀석들은 아직 덜 성숙한 어린아이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인간의 속과 겉이 다른 비겁함이 나이와 상관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껍데기도 갖지 못하고 오직 실력만 지닌 한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내세웠을 때 주변의 태도가 어떤지 봐두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조용히 학술원을 다니고 있었다.
원하는 시타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실력만으로는 불가능했다. 철저하게 정치적인 자리였다. 나 혼자 힘으로 해내겠다는 건방진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타란 공작가의 이름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이용할 것이다. 내년 중에는 공작가 후계의 신분을 밝힐 생각이었다.
학술원에 데미안을 아는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재학생 중에는 북부 출신이 몇 있었다. 그들은 대충 짐작했겠지만, 데미안이 입을 다물자 알아서 말조심했다. 덕분에 비밀은 잘 지켜졌다.
캬악.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아샤가 털을 곤두세우고 이를 드러냈다. 그러나 아샤는 다 자란 몸으로도 발길에 채이면 날아갈 만큼 작았다. 시비건 소년들 역시 가소롭게 여우를 비웃고 있었다.
“아샤.”
데미안이 이름을 불러 제지했다. 아샤는 온순한 눈으로 데미안을 올려보다가 데미안의 뒤로 물러났다. 데미안은 혹시라도 아샤가 휘말려 다칠까 봐 걱정했다. 아샤는 어머니가 주신 선물이자 데미안의 첫 친구였다. 아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버지의 당부를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
“학술원에서 사람은 죽이지 마라.”
데미안이 시비를 받아주지 않는 이유는 귀찮아서였다. 화가 나야 화를 내지. 데미안은 이번에도 말없이 몸을 숙여 책을 그냥 집어 드는 쪽을 택했다. 탁, 들어 올리려던 책이 밟혀서 다시 바닥에 깔렸다. 데미안이 그 발을 따라 시선을 올리자 갈색 머리의 소년이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사람 말 안 들려? 앞 똑바로 보고 다니라고.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해야 할 거 아냐.”
오늘은 좀 과하다. 데미안의 붉은 눈이 물끄러미 갈색 머리의 소년을 응시했다. 왜 이런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있나. 고요한 데미안의 눈빛을 받으며 시비를 건 소년이 오히려 울컥했다. 소년은 데미안의 눈빛에서 자신을 한심한 눈으로 보며 비웃는 형의 모습을 발견했다.
“너!”
“그만해.”
보다 못한 크리스가 끼어들었다.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왜 시비야?”
“넌 뭔데 끼어들어.”
갈색 머리의 소년은 불쾌해하면서도 크리스가 누구인지 알기에 조심했다. 아무리 국적과 신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익시움이라고 해도 결코 배경을 무시할 수 없었다. 크리스는 갈색 머리의 소년과 같은 출신국의 잘나가는 후작가 아들이었다.
“일을 시끄럽게 만들지 말라는 소리야. 넓은 길을 놔두고 일부러 부딪쳐놓고, 누가 봐도 시비를 걸고 있잖아.”
“누가 일부러 부딪쳐!”
둘이 실랑이하는 사이에 데미안은 주섬주섬 떨어진 책들을 주워서 일어났다. 그리고 코트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책에 난 발자국을 닦아냈다. 이번에는 다소 짜증이 났다. 특별한 책이었다.
좋은 책이 나왔다며 어머니가 보내주신 선물이었다. 아까 녀석이 ―데미안은 녀석들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밟았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아마 크리스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한 대 쳤을지도 모른다.
데미안에게 시비 건 두 녀석 중 다른 하나, 잿빛 머리의 소년이 데미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공격이라기보다는 자신 쪽으로 몸을 돌리게 하려고 어깨를 잡으려던 움직임이었다.
약간 예민해져 있던 데미안은 반사적으로 물러서며 거세게 손을 쳐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책으로 목을 겨눴다. 모든 동작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검술 동작이었다. 데미안이 주춤 손을 내렸지만 이미 잿빛 머리의 소년은 화가 나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씩씩대던 잿빛 머리의 소년 눈에 하얀 천이 눈에 잡혔다.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사실 소년은 그렇게까지 악질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거 네 것이냐, 물으려는 순간 데미안의 동요하는 눈과 마주쳤다.
무감정한 눈으로 무기질 생명체를 보듯 하는 데미안의 시선은 언제나 속을 뒤집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데미안의 동요가 잿빛 머리 소년의 심사를 비틀리게 했다. 삐죽하게 심술이 났다.
“돌려줘.”
어머니가 수를 놓아 보내주신 손수건이었다. 데미안이 손을 내밀며 한 발 내딛자 잿빛 머리의 소년은 그만큼 뒤로 물러섰다. 데미안이 손을 뻗자 휙 손을 움직여 손수건을 잡지 못하게 했다. 그걸 몇 번 반복하자 데미안의 눈동자가 더욱 붉어졌다.
잿빛 머리의 소년은 은근한 즐거움을 느꼈다. 보란 듯 손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데미안에게 시선을 고정해 만족스럽게 웃으며 손수건을 발로 밟아 천천히 짓이겼다. 데미안의 눈동자가 확 타올랐다.
퍽, 갑작스러운 강한 힘을 받으며 고통을 느낀 잿빛 머리의 소년이 나동그라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잠시 얼떨떨했다. 얼얼한 입가를 손으로 만져서 살피자 피가 묻어나왔다.
“해보자 이거지?!”
자신이 맞았다는 사실을 인식하자마자 그대로 주먹 쥐고 달려들었다. 거기 가세하려는 갈색 머리의 소년은 크리스가 가로막았다. 성질을 내며 내지르는 주먹을 살짝 피하면서 크리스도 주먹을 뻗었다. 그런데 정말 제대로 주먹이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둘이 붙기 시작했다.
“악! 이 여우 새끼가!”
아샤까지 가세해서 주인의 적을 응징했다. 작은 몸으로 날렵하게 요리조리 몸을 피하며 팔이나 발을 물었다. 그 와중에도 크리스는 공격하지 않아서, 적과 아군을 구별하는 영민함을 드러냈다.
익시움에서 보기 드문 진풍경이 발생했다. 네 명의 소년과 한 마리의 짐승이 치고받는 광경을 구경하려고 몰려든 학생들이 주변에 둥글게 원을 그렸다. 질서 유지관이 달려와서 힘으로 뜯어말려 놓은 후에야 개싸움은 막을 내렸다.
성적 문제나 교사를 모욕한 행위가 아니면 학생에 대한 1차 징계권은 회의 권한이었다. 회는 질서를 깨뜨린 네 명에게 징계권을 발휘했다.
반성문 작성, 3일 수업 정지, 태도 점수 반영이었다. 그리고 유독 데미안에게는 7일 정학 처분이 내려졌다. 데미안이 먼저 주먹을 휘둘렀으며 기르는 애완동물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사람을 공격하게 했다는 이유였다. 물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데미안을 제외하면 모두 신분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시비 건 두 명의 지인이 회원이었다.
“이건 말도 안 돼!”
크리스는 분노했다. 지극히 불공정한 처사였다. 저쪽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 저열하고 유치했다.
“이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항의를 해! 공식적으로 소청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하라고!”
1차 징계권 행사에 불만이 있다면 소청위원회에 재판을 신청할 수 있었다. 데미안은 자신의 기숙사 방까지 찾아와서 길길이 날뛰고 있는 크리스를 무표정하게 보다가 짧게 말했다.
“됐어.”
무릎에 올라와있는 아샤의 털을 쓰다듬는 손길은 느긋하고 부드러웠다.
“되긴 뭐가 돼!! 그 자식들이 먼저 시작했잖아!”
크리스는 이번 일로 데미안의 나이를 처음 알았다. 최소한 자신과 동갑인 줄 알았는데 열두 살이라는 나이를 알고 경악했다. 그 녀석들은 각각 열다섯 살, 열여섯 살이다. 한참 어린 상대에게 시비를 걸고 그리 괴롭혀댄 것이다.
“익시움에서 일주일 정학이 얼마나 큰 벌인 줄 알아? 네 학적부에 빨간 줄을 긋는 거라고!”
데미안은 태연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사고 치지 말라고 한 적이 없었다. 퇴학이 아닌 어지간한 일로는 뭐라고 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학적부에 빨간 줄이 가든 말든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 정도 빨간 줄은 시타가 되는 길에 장애가 되지도 않았다.
“너는?”
“뭐가?”
“나 때문에 괜히 끼어들었으니까. 네 학적부도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수업 정지 정도는 괜찮아. 처음이라 거의 경고 수준이니까.”
데미안은 얼결에 ‘아는 사람’이 된 크리스를 보며 대체 이 녀석은 왜 자신의 일에 나섰는지를 고민했다. 딱히 전에 어떤 교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기억에 없던 녀석이었다.
“고맙다.”
씩씩대던 크리스는 놀라 데미안을 보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은 표정이었다.
“뭐… 뭐가……?”
“그때, 도와주려고 한 것. 나설 필요는 없었지만.”
입이 히죽 벌어지던 크리스는 덧붙인 말에 울컥했다. 잠시 데미안을 노려보았지만 이내 풀었다.
“정말 이의 신청 안 할 거야?”
“안 해.”
“정학이면 통지서가 집으로 갈 텐데.”
“…….”
그건 몰랐다.
데미안은 관리처를 방문해 처리 상황을 알아보았다. 직원이 한발 늦었다고 말했다.
“정학 이상의 징계는 이의 신청 여부와 상관없이 징계 즉시 통지서를 주소로 발송합니다.”
데미안의 주소는 북부도, 수도의 저택도 아닌 필라체에 있었다. 데미안의 호위 겸 제반 사항 처리, 보고 등을 위해 소공자 담당 처리 사무소가 필라체에 있었다. 그 사무소가 공식적으로 등록된 데미안의 주소였다.
담당 관리는 이곳에서 익시움에서 발송하는 모든 서류를 받아서 작성한 보고서와 함께 공작에게 전달했다. 즉, 일차적으로 모든 서류는 일단 사무소에서 먼저 받았다. 데미안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사무소를 찾아가려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어차피 아버지가 받아 보시니까.’
아버지는 퇴학 아닌 며칠 정학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거라고 데미안은 생각했다. 데미안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익시움에서 정학 통지서를 발송하기 전에 벌써 데미안의 정학 소식이 휴고에게 보고서로 올라갔다. 보고서를 받은 휴고는 감흥 없이 중얼거렸다.
“정학? 별일이군.”
휴고가 데미안의 학술원 생활에 관심을 둘 이유는 두 가지였다. 데미안이 죽을 만큼 다치거나(혹은 죽거나) 졸업하지 못할 사유가 발생하거나. 그밖에 모든 일은 데미안이 할 나름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튀는 못이 되는 데미안에게 망치질하려고 나대는 녀석들을 내버려두는 것도 그래서였다. 학술원에서 시비 거는 녀석들 정도를 당해내지 못해서는 북부의 주인은 감당 못 할 자리였다.
‘대체 녀석이 무슨 생각인지…….’
데미안은 신분이 불분명한 상태로 학술원에 다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휴고가 의도했다. 처음에 입학시킬 때 데미안이라는 이름만 등록했다. 신분을 알 수 있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당시 데미안은 너무 어렸고 공작가 후계라는 신분에 걸맞지 않게 가진 세력이 전혀 없었다. 신분을 밝혀서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면 예기치 못한 위험한 일이 생길 수 있어서 그렇게 조치했다.
데미안이 나이가 들어서 판단력이 생기고 원할 때 신분을 드러내고자 하면 막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데미안은 아직도 숨을 죽이고 여기저기서 건드리는 시비를 참아 넘기고 있었다. 시비 거는 놈들의 면면을 보면 데미안이 타란 공작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기만 해도 섣부르게 말도 걸지 못할 쭉정이들이었다.
학술원은 어른이 아닌 아이들의 작은 사회이지만, 그래서 더 자기들끼리 서열에 철저했다. 세상에 나오면 신분이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현실에 부딪히겠으나 아직 아이들의 세상은 좁았다. 타란 공작의 아들이 아닌 데미안은 오만한 아이들 눈에는 얼마든지 밟아도 되는 아랫돌로 비칠 것이다.
‘배경을 이용하지 않겠다는 건방진 생각을 품고 있다면 재미가 없겠지만.’
데미안이 공작의 아들이라고 알려져 위상이 높아지면 그건 데미안의 능력이 아닌 타란 공작가의 배경 덕분이다. 데미안이 그것이 싫어서 고집을 부리는 중이라면 휴고는 적잖이 실망할 것이다. 배경도 능력이다. 배경 없이는 절대 어느 높이 이상은 올라갈 수 없는 세상이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두고 보면 알겠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불러서 물어도 되었으나 휴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어줄 생각은 없었다. 강해져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휴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지킬 수 있어야 했다. 원래부터 데미안을 온실 속에서 곱게 기를 생각이 없었지만, 딸이 태어난 이후에는 데미안을 더 강하게 굴리려고 생각 중이었다.
정학은 휴고의 관심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학의 사유가 싸움이라는 점은 관심이 갔다. 어지간한 도발에 드잡이할 녀석이 아니었다. 역시 애는 애인가, 피식 웃으면서 싸움의 경위를 자세히 설명한 첨부 문서를 읽었다.
휴고의 표정이 점점 좋지 않았다. 손수건을 밟아 짓이겼다는 문장에서 문서를 쥔 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어린놈들이 과하군.’
데미안의 손수건을 하나 만들 때 자기 것도 하나 만들라는 휴고의 요구를 그녀는 들어주지 않았다.
‘전에 드린 것이 낡으면 새로 만들어 드릴게요.’
휴고는 아까워서 쓸 수 없었다. 그러니 낡을 일도 없었다. 루시아가 데미안에게 보내는 손수건을 만드는 모습을 그저 볼 수밖에 없었다. 루시아는 에반제린이 태어나면서는 딸이 쓸 물건까지 만드느라 바빴다. 어린 딸의 물건을 만드는 아내에게 내 것은 왜 없냐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휴고는 보고서에 담긴 범인 녀석이 어느 집 자식인지 기억해 두었다. 당장 뭘 어쩌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다른 일로 꼬투리 잡을 일 있으면 그는 이날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뒤끝이 아주 길었다.
* * *
쏟아지는 우편물의 정리는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루시아는 자신에게 온 우편물들을 살폈다. 대부분은 초대장이지만 드물게는 개인적인 서신도 있었다. 기다리는 우편물은 아무래도 데미안의 편지와 가끔 오는 놀만의 편지였다.
손에 잡히는 봉투를 잡고 뜯어 내용물을 꺼내 읽는 루시아의 표정이 점차 미묘해졌다. 그리고 다시 봉투를 살펴 발신인이 누군지 확인했다. 익시움에서 발송했다는 공문 확인 도장이 찍혀있었다.
원래 루시아에게 올 우편물이 아니었다. 오늘은 제롬이 다른 일이 바빠서 서신 분류를 다른 이에게 맡겼는데 실수로 마님의 우편물에 잘못 넣었다. 루시아는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정학…….”
데미안이 정학 7일의 처벌을 받았다는 통지서였다.
“데미안이 정학이라니.”
공문을 몇 번이고 읽었으나 정확한 정학 사유는 나와있지 않았다. 학내 질서를 어지럽히고 규칙을 위반했다고만 쓰여있었다. 착한 아들이 정학을 받을 만큼의 사고를 저질렀을 리가 없었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마침 오늘은 남편이 외출하지 않고 집무실에서 서류와 씨름 중이었다. 루시아는 통지서를 들고 남편의 집무실로 향했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은은한 차향이 퍼졌다. 고개를 들지 않고 일에 골몰해 있던 휴고는 인기척이 사라지지 않자 시선을 들었다. 찻쟁반을 들고 서있는 아내를 발견하고 그의 눈이 커졌다.
“당신이 어쩐 일이야.”
“방해 드렸나요? 시간 내주셨으면 하는데요. 지금, 괜찮으세요?”
“아, 괜찮아.”
휴고는 즉시 일어나서 그녀와 소파에 마주 앉았다. 루시아는 두 잔의 찻잔을 채워서 남편과 자신의 앞에 놓았다.
“사적인 일이지만 공적인 일이기도 해서 여기서 말씀드려도 될 것 같아서요.”
루시아는 들고 온 우편물을 탁자에 올렸다. 휴고가 안에 내용을 무심한 표정으로 확인하며 다시 넣는 과정을 보면서 루시아가 말했다.
“무슨 일인지 당신은 아시죠?”
“별일 아니야. 동기들과 싸웠나 봐.”
“데미안은 다치지 않았어요?”
다칠 리가. 데미안의 검술은 수준급이었다. 정석으로 배운 검술이라 휴고가 용병 노예로 지내면서 익힌 살인 기술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또래에서 적수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보고서에 의하면 서너 살 위의 고학년들도 너끈히 상대해서 승기를 잡는다고 했다. 졸업할 무렵이면 순수한 검술 대결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이다. 타란 혈족의 남자들은 대대로 강골이었다. 타고난 힘에 기술을 갖추면 적수가 없었다.
“멀쩡해.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야.”
안도의 숨을 내쉬는 루시아를 보면서 휴고는 그녀가 데미안을 너무 어린애 취급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녀의 키를 훌쩍 넘은 아들이 뭐가 그리 걱정인지 잘 모르겠다.
“단순히 싸운 일로 정학이라니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상대 아이가 많이 다쳤나요?”
“그런 건 아니고.”
휴고는 어쩔 수 없이 간단하게 현재 데미안이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지내며, 그래서 시비 거는 녀석들이 종종 있고, 데미안이 불합리한 처벌을 받았다는 사실까지. 휴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듣는 루시아의 표정은 점점 굳었다.
“당신 말씀은 데미안이 불합리하고 억울한 처분을 받았다는 거군요.”
“…그런 셈이지.”
“그래서 어쩌실 거예요?”
휴고는 상관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냥 넘어갈 일이었다. 그런데 어쩌긴 뭘 어쩌느냐고 대답했다가는 아내의 눈꼬리가 매섭게 올라갈 것 같아서 휴고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에반제린을 낳아 기르면서 루시아의 모성애는 극에 달해있었다. 학술원에서 데미안이 핍박받는 모습을 떠올리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감히 내 아들을!
“안 그래도 데미안, 그 아이 일을 계속 생각 중이었어요.”
얼마 전이 에반제린의 첫 생일이었다. 휴고는 왕궁의 홀을 빌려서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화려한 생일 파티를 열었다. 참석자들이 셀리나 공주님의 첫 생일 파티보다도 규모가 큰 것 같다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루시아는 밀려드는 축하객을 받으면서 내내 데미안의 빈자리가 마음이 쓰였다.
데미안에게 파티 참석 의사를 물었을 때 데미안은 학기 중이라는 이유로 죄송하지만 어렵겠다고 답을 보냈다. 데미안은 정말로 학기 중에 시간을 낼 수 없어서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루시아는 데미안이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내세우기 꺼려서 그런다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수도 사교계는 데미안의 존재를 몰랐다. 소문에 밝은 자들은 분명히 알고 있겠지만, 타란 공작, 나아가 공작부인의 눈치를 살펴서 입에 올리지 않았다.
루시아는 굳이 데미안을 숨길 의도가 없었다. 다만, 사교계 데뷔를 하지 않은 어린 나이이고 학술원에 가있어서 수도에 없는 데미안의 존재를 말해 봤자 쓸데없는 소문만 더해질 뿐이라서 굳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루시아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계기는 올해 신년 파티였다. 매년 신년 파티에는 많은 귀족 자제들이 사교계에 데뷔했다. 사교계에 데뷔하는 자식들을 조금이라도 여기저기 눈도장을 찍게 하려는 부모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루시아는 갓 데뷔하는 열네댓 살의 어린 소년 소녀들의 인사를 받으며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유난히 눈에 띄는 소년이 있었다. 필리프 후작의 아들 크리스였다. 권세 있는 가문 자제의 데뷔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인사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사를 받았다.
루시아는 당당하고 밝은 미소의 소년을 보면서 데미안을 떠올렸다. 데미안이 후작가 아들 못지않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당당하게 이런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데미안을 정말 졸업할 때까지 기숙 과정에 둘 생각이세요?”
“들어갈 때부터 졸업하기로 약속했어.”
“졸업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에요. 굳이 기숙 과정일 필요가 있나요? 다른 아이들은 방학인데도 데미안은 외출 허락을 받아서 연중 나올 수 있는 날짜가 정해져 있고. 졸업까지 이런 식은 안 되겠어요.”
“당신 생각이 뭔데?”
“과정을 바꿔요. 기숙 과정이 아니라 학술원에 다니는 다른 아이들처럼 방학하면 집으로 오게요.”
“학술원 규칙으로 그게 되는지 모르겠어.”
“당신이 바꾸면 되잖아요.”
휴고는 아내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워서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데미안도 이제 사교계에 소개할 필요가 있어요.”
“왜 갑자기?”
데미안의 사교계 데뷔는 고려하지 않던 일이었다. 데미안이 12년 기숙 과정을 다 마치면 열여덟 살. 그 정도면 학술원에서 배운 것도 있고, 나이도 제법 먹었으니 데리고 다니며 가르칠 건 가르치고. 휴고는 그럴 계획이었다.
“갑자기가 아니라 계속 생각했어요. 데미안이 졸업하면 사교계 데뷔로 너무 늦어요.”
사교계 데뷔는 열다섯 살이 보통이었고 이르면 그보다 한두 살 어리게 데뷔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지간하면 늦게 데뷔하는 예는 별로 없었다. 계승 작위를 지닌 가문일수록 이 원칙을 대개 지켰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사교계 데뷔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야.”
“중요해요. 데미안은 출생의 약점이 있어요. 그래서 차라리 아주 일찍 데뷔해서 당신 후계라고 확실하게 사람들 인식에 심어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타란 가문은 지금껏 수도 사교계에서 별다른 활동이 없이 지냈다. 북부에 틀어박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번 대에 이르러 휴고가 특이하게 활동을 넓혔다. 전례를 보면 수도 사교 활동은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데미안이 이어받으면 앞으로 타란 가문이 어떻게든 변화할 여지가 있었다. 그리고 자녀의 사교계 데뷔는 안주인의 몫이었다. 휴고는 아내의 생각에 반대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번 겨울이 지나기 전에 데뷔 파티를 열고 싶어요.”
“이른 것 같은데.”
“곧 해가 바뀌면 열세 살인 걸요. 나이보다 키도 크고 어른스러우니까 괜찮아요.”
“당신 좋을 대로 해.”
“당신이 이브 생일처럼 홀을 사용할 수 있도록 폐하께 말씀드려 보세요.”
“무슨 홀을 빌려. 어차피 곧 있으면 신년 파티잖아. 그걸로 해.”
“하지만 신년 파티는 데미안이 주인공인 자리가 아니잖아요.”
“처음 데뷔 무대부터 너무 눈에 띄게 하면 안 좋아. 그동안 있는 줄도 몰랐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거잖아.”
“그런가요……. 당신 말씀이 일리가 있어요. 다시 생각해 볼게요.”
휴고가 에반제린의 사교 데뷔 무대를 위해 왕궁의 홀을 빌려서 유례없는 규모의 화려한 파티를 여는 것은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었다.
“그리고 데미안 정학 문제는 당신이 해결해 줄 거죠?”
“…알았어.”
“마침 학기가 끝났으니까 당신이 데리고 오세요.”
“내가?”
“바쁘세요?”
바빴다. 그리고 굳이 직접 가서 녀석을 데려올 필요를 모르겠다. 게이트 이용권도 사줬겠다, 게이트를 타면 학술원에서 공작저까지 마차로 반나절 거리였다.
그러나 휴고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아내 눈빛의 압박을 이길 수 없었다. 틈만 나면 부자 사이가 건조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아내였다. 휴고는 녀석과 자신 사이는 이 정도가 딱 좋은 거리라고 생각했다. 그냥 생각만 했다.
“…다녀올게.”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고 루시아는 홀가분하게 일어났다.
“생각보다 오래 당신 시간을 빼앗았네요. 더 방해하지 않을게요.”
휴고는 빠르게 나가려는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아 낚아챘다.
“여기까지 온 김에 대화 더 하고 가.”
“무슨 대화요?”
휴고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어 품에 밀착하고 한 손이 엉덩이로 내려갔다. 무릎을 그녀의 다리 사이에 넣어 허벅지를 바짝 붙였다. 그녀의 긴 목에 입술을 눌렀다. 루시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미쳤어. 이이가.”
“당신 한정 미쳐있어.”
“일하는 곳이잖아요!”
“처음도 아니면서 뭘.”
루시아의 얼굴이 더 빨갛게 변했다. 오밤중에 시트로 나신을 감싸고 그에게 들려서 2층을 내려오면서 누가 볼까 봐 손끝까지 긴장했던 기억이 났다. 짜릿한 밤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일터에서 그런 난잡한 행위를 했다는 사실이 계속 민망하고 창피했다.
“그땐 낮이 아니었다고요!”
그가 안아 들자 루시아가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휴고는 그녀를 안고 책상 위의 서류를 한쪽 팔로 다 밀어버린 후 책상에 그녀를 올렸다. 일부 서류와 필기구가 바닥으로 떨어졌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휴! 누가 들어와요!”
“죽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안 들어와.”
그녀의 잔소리가 길어지기 전에 휴고는 양손으로 책상을 짚으면서 상체를 숙여 키스했다. 그녀의 도톰한 입술과 작고 부드러운 혀를 맛보는 것은 그의 즐거움이었다. 입술을 포개서 비비고 말랑한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다가 그녀의 입안으로 깊이 혀를 넣었다. 체온이 맞닿아서 열이 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그의 혀가 입안을 간질이고 잇몸을 훑어 내렸다. 서두르면서도 침착하고 타액이 섞여 질척이는데도 깔끔하다. 그와의 키스는 언제나 뜨겁고 기분이 좋았다. 그가 단 꿀처럼 그녀의 타액을 삼키듯 루시아도 그의 입안이 달았다.
혀가 닿으며 미끄러지듯 얽혔다. 그의 손이 루시아의 뒷목을 받치고 그녀의 두 팔은 그의 목을 감았다. 떨어진 입술은 몇 번이고 다시 붙었다. 어느새 루시아는 거의 그에게 매달려서 정신없이 키스에 빠져들었다. 손끝까지 짜릿하면서 허벅지 안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의 손이 치맛자락 안으로 들어와서 속옷을 끌어내리는 손길을 막을 수 없었다. 오히려 살짝 엉덩이를 들어 도와주었다.
“하아… 하아…….”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키스에 숨이 가빴다. 살짝 부풀어 오른 입술로 숨을 할딱이는 그녀를 바라보는 휴고의 붉은 눈이 짙은 욕망으로 일렁거렸다.
그의 손이 허벅지를 더듬고 들어와서 치맛자락을 들치고 벌린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발가벗은 하복부에 차가운 공기가 닿자마자 뜨거운 것이 입구를 문질렀다. 이글거리는 붉은 눈, 타액에 젖어 반들거리는 그의 입술, 야하게 풍겨오는 그의 체취와 그가 줄 쾌락을 생각하자 그녀의 입안에 침이 고여 꿀꺽 넘어갔다.
“흐윽!”
뜨거운 기둥이 속살을 헤집으며 밀고 들어왔다.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잡고 힘차게 안으로 돌진했다. 키스할 때부터 젖어들기 시작한 그녀의 은밀한 샘은 저항 없이 거대한 그를 집어삼켰다. 숨 막히도록 꽉 채운 그가 빠져나가기 무섭게 퍽 퍽 치고 들어왔다. 두 팔을 그의 목에 감고 매달려서 루시아의 몸이 마구 흔들렸다. 두 다리 사이를 묵직하게 파고들어 오는 자극은 순식간에 루시아를 절정에 올려놓았다.
“아앗!!”
루시아는 두 팔을 그의 어깨에 두르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순식간에 깜깜해졌던 눈앞이 다시 환해지자 어깨를 들썩거렸다. 순식간에 밀려온 오르가슴은 강렬했지만 그만큼 짧았다.
그의 것을 감싼 내부 떨림이 잦아들자 그는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다 느꼈어?”
“아!”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쳐올린다. 루시아는 다시 신음을 흘리며 아래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단번에 들어와 어딘가를 건드릴 때마다 몸 안 깊은 곳에서 훅 훅 뭔가가 점점 커졌다. 어서 왔으면 좋겠다가도 오지 않았으면 하는 모순적인 기대와 두려움이 그녀를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