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2)
침실 문이 열리고 산파와 함께 궁에서 파견된 조수가 나왔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휴고를 향해 여자는 고개를 숙였다.
“어여쁜 아가씨께서 태어나셨습니다. 두 분 모두 건강하십니다. 감축드립니다.”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는 휴고를 향해 모두 고개를 숙이고 ‘감축드립니다.’ 하고 축하 인사를 올렸다.
“들어가도 되는 건가?”
“아직 뒤처리가 남았습니다. 조금 더 기다려 주십시오.”
한 시간을 더 기다린 후에 휴고는 드디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침실은 조용했다. 공작이 들어오거나 말거나 제 할 일에 바쁜 자들이 분주하고 조용하게 움직였으나 휴고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곧바로 침대에 누워있는 아내에게 고정해서 흔들림 없이 바로 침대로 다가갔다.
한숨도 자지 못하고 산고에 지친 루시아는 태어난 아기를 잠깐 확인하고, 아직 젖이 돌지 않아도 태어나자마자 젖부터 물려야 한다는 산파의 말에 따라 잠시 젖을 물린 후에 바로 잠이 들었다. 극심한 고통이 사라지자 밀려오는 달콤한 잠의 기운을 이기지 못했다.
휴고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아내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안색이 창백하고 입술이 바싹 말랐다. 이마와 얼굴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서 달라붙어 있었다.
침대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앉아서 그녀의 동그란 이마가 드러나도록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넘겼다. 기절한 것처럼 잠든 아내를 보고 있으니 휴고의 가슴 안쪽이 찌르르 아팠다.
“괜찮은 건가? 정말 무탈한 거겠지?”
휴고의 마음 깊은 곳에는 계속 불안이 있었다. 필립의 은신처에서 찾은 기록을 몇 번을 확인했어도 이마저도 필립이 부린 수작은 아닐까 하는 의혹을 떨칠 수 없었다.
산달이 다가올수록 휴고는 태어날 아기를 만날 기쁨보다 걱정이 더 컸다. 자신이 불안해하면 아내도 불안할까 봐 내색하지 못했을 뿐 그는 새벽에 종종 잠이 깨어서 잠든 아내를 바라보면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초산이라서 마님께서 오래 고생하셨지만, 이만하면 순산입니다. 아가씨를 안아 보셔야지요.”
산파는 공작이 도통 아이를 보자는 소리를 하지 않자 먼저 말했다. 왕실에서 수십 년 아이를 받았지만, 이렇게 아기에게 관심 없이 제 아내 얼굴에서 눈을 못 떼는 부군은 처음 봤다.
산파는 목욕을 마치고 잠든 공녀를 조수에게서 건네받아서 휴고에게 내밀었다. 겉싸개에 둘둘 말린 낯선 생명체를 휴고는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안아 보십시오, 전하.”
산파가 몇 번 재촉하자 휴고는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아이를 받았다. 아이를 안는 자세를 옆에서 산파가 조언해 주었다.
‘이렇게 작아?’
아기를 안은 휴고의 첫 감상이었다. 아내의 배 안에서 그렇게 기운차게 움직인 것치고는 작고 무력했다. 아내의 성격과 식성까지 바꿔버린 아기는 수개월 동안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한 주인공이라고 보기에는 대단히 미약했다.
‘이상하게 생겼군.’
아기는 아직 온몸의 붉은 기운이 빠지지 않았고 얼굴이나 눈가에 붓기가 남아있었다. 그나마 목욕을 해서 깔끔하고 보송보송한 상태이니 망정이지 갓 태어난 모습을 봤더라면 휴고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무척 어여쁘신 아가씨입니다. 자라면 미인이 되실 겁니다.”
수없이 많은 아이를 받은 경험으로 산파는 아직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신생아의 감추어진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갓 태어난 아기치고는 뚜렷한 이목구비와 생김이 아주 고왔다.
그러나 휴고는 산파의 말을 입바른 말로 해석했다. 아무리 봐도 아기는 이상하게 생겼다.
몹시 난감하게 아기를 들여다보는 공작의 표정을 살피며 산파는 웃음을 흘렸다. 아이를 처음 안는 아버지의 반응은 몹시 기뻐하거나, 혹은 당황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열 달을 몸에서 키우며 태동을 느끼는 어머니와 다르게 아버지가 아이를 보자마자 정을 느끼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아가씨의 눈동자가 마님을 닮았습니다.”
산파의 그 말에는 휴고가 반응했다. 아기의 한 줌도 안 될 머리카락은 금발이었다. 그녀를 닮지 않아서 실망했다가 눈동자 색이 같다고 하니까 휴고는 아기 모습에서 아내를 찾아보았다.
조금 더 크면 알 수 있으려나. 아직 아내를 닮은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아기를 다시 산파에게 건네고 휴고는 잠든 아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산파는 끌끌 혀를 차면서 웃었다. 그리고 손짓해서 모두 내보내고 마지막으로 아기를 안고 침실을 나갔다.
눈을 뜨면서 루시아는 가장 먼저 목이 타는 갈증을 느꼈다. 물을 찾으며 중얼거리자 잠시 후에 조심스럽게 등을 받친 힘이 상체를 일으키고 입에 물 잔이 닿았다.
몇 모금 목으로 넘어가는 물맛이 써서 그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루시아는 힘겹게 눈을 뜨고 자신을 부축한 남편을 보며 흐릿하게 웃었다.
“우리 아이……. 보셨어요?”
“봤어.”
“어머니를 닮았어요. 어머니가… 참 예쁜 금발이셨거든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휴고는 그녀의 눈에 입을 맞추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숨이 막히도록 그녀를 꽉 안아주고 싶었다.
아직 몸이 온전치 않은 그녀가 부서질 것처럼 약해 보여서 만지기도 조심스러웠다. 이 작은 몸으로 열 달을 품고 있다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그의 눈에 항상 예쁘지 않은 적이 없는 아내가 오늘따라 더 가슴 뭉클하게 아름다웠다.
“눈이 당신을 닮았대.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저도 잠깐만 봤어요. 잠이 얼마나 오는지 처음 젖을 물리면서 졸았다니까요.”
웃다가 배가 아픈지 얼굴을 찡그리는 그녀의 입술과 얼굴과 콧잔등과 이마에 휴고는 솜털처럼 부드러운 키스를 이어나갔다.
“힘들었지?”
“괜찮아요.”
“당신은 언제나 괜찮잖아.”
“정말이에요, 휴. 당신과 사랑한 증거를 남기고 싶었어요. 그래서 힘들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 잊을 만큼 행복해요.”
루시아는 갓 태어난 어린 딸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대단히 많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 아이가 두 사람의 아이이기 때문이었다.
“저는 우리 아이가 당신의 피를 이어받은 당신의 아이라서 가슴이 저리도록 사랑스러워요.”
휴고는 한참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흐릿하게 웃으며 루시아를 부드럽게 품에 당겨 안았다.
“아기 이름. 생각해 봤는데 당신 외조부님께 지어달라고 할까?”
“할아버님께요……?”
“태어난 증손녀를 봬드릴 겸, 모셔 오려고.”
“네, 저도 좋아요. 고마워요.”
달포 후에 바덴 백작이 공작저를 방문했다. 오랜만에 보는 손녀를 안으며 인사를 나누고, 어린 증손녀를 품에 안았다.
자신의 딸과 손녀를 똑 닮은 호박색 눈동자가 유심히 바라보는 시선에 눈을 맞추면서 바덴 백작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가, 어찌 이렇게 네 할머니를 닮았니.”
흐느낌을 참지 못하는 외조부의 목소리를 들으며 루시아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이름을 지어달라는 과분한 청을 받고 생각을 해봤다. 우리 바덴 가문의 초대 가주께서는 모친이 아니었으면 당신이 존재할 수 없었다고, 모든 존경과 애정을 모친께 바친다고 유언을 남기셨지. 체구가 작은 분이 기개가 대단하셨다고 들었다. 그 이름을 아기에게 주고 싶구나.”
에반제린. 요즘은 잘 쓰지 않는 예스러운 이름이었다.
타란 공작가의 유일한 공녀의 이름이 바덴 백작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멀뚱히 백작을 보고 있던 아기가 방긋 웃었다. 증손녀의 배냇짓을 보며 백작이 껄껄 웃었다.
* * *
찾을 것이 있어서 서랍을 뒤지다가 휴고는 아래 서랍 가장 깊은 곳에서 봉투를 발견했다. 잘 보관해 둔 모습인데 기억이 나지 않아서 봉투를 꺼내 안에 든 서류 한 장을 꺼냈다. 그녀의 필체가 아래 서명란을 채운 친권 포기서였다.
휴고는 묘한 표정으로 서류를 보다가 웃었다. 오래된 듯싶다가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한 그날의 일이 빠르게 기억을 스쳐 지나갔다.
계약 성립의 대가로 받은 서류 중에서 입적 동의서는 데미안을 입적 처리할 때 사용했다. 수도에서 초야만 치르고 다음 날 급히 북부로 떠나면서 제롬에게 챙기라며 건넨 서류는 입적 동의서뿐이었다.
그래서 친권 포기서는 수도 저택의 집무실 서랍에 들어간 그날부터 계속 손을 타지 않고 이곳에 있었다.
‘왜 이것을 챙기지 않았을까.’
친권 포기서가 입적 동의서보다 더 중요했다. 친권 포기서가 없다면 데미안을 입적한 서류상의 모친은 자식에 대한 완전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왜 그때 챙겨서 로암에 가져다 두라고 제롬에게 건네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한 일이지만 당시에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휴고는 서류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 이제 필요하지 않은 서류였다. 데미안과 에반제린은 온전하게 그녀의 자식들이었다. 아이들에 대한 권리를 어떤 이유에서건 그녀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
찢어버릴까 하다가 밖에서 파비안의 목소리가 들리자 책상 옆으로 밀어놓았다.
파비안이 들어와서 보고서를 올리고 몇 가지 특이한 사항을 구두로 보고했다.
“데미안 도련님은 사흘 뒤에 출발하십니다.”
“게이트 탑승 명단에 올리는 일은?”
학술원이 있는 도시 국가 필라체에는 세 개의 게이트가 있는데 학술원의 학생 수에 비하면 하루에 탑승할 수 있는 인원이 극히 적었다. 그래서 왕족이나 고위 귀족이 입학할 때 게이트 이용권도 함께 구매했다.
학술원은 엄청난 가격으로 게이트 이용권을 팔아먹었지만, 그래도 신청자가 폭주해서 제비뽑기를 했다.
학기 중에는 탑승 인원의 여유가 있어서 이용권을 구매하지 않아도 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용자가 몰리는 방학 시작과 끝 무렵에는 탑승자 고정 명단에 올라있는 사람만 이용할 수 있었다.
대부분 학생은 필라체를 빠져나가서 가까운 타국으로 이동해서 게이트를 탔다. 그러면 게이트까지 가는 데에만 최소한 사나흘이 걸렸다.
데미안은 입학할 때 게이트 이용권을 구매 신청하지 않았다. 졸업까지 집에 올 일이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루시아는 방학 기간에 종종 데미안을 부를 생각이었다. 연 외출일수 제한이 있기 때문에 왔다 갔다 하려면 게이트 이용권이 있어야 수월했다.
다행스럽게도 기숙 과정에 있어도 방학 중의 계절 학기는 필수가 아니었다.
“내년에 새 학년이 시작하면 이용권 판매에 들어갈 테니까 신청서를 넣으려고 합니다.”
말로는 제비뽑기한다고 해도 뒷거래가 있었다. 사실은 거의 경매나 다름없었다. 높은 가격을 불러 사겠다고 하면 된다.
“그리고 말씀하신 메튼 백작의 막냇동생 브루노 메튼의 학술원 입학 건에 관해 백작과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휴고가 루시아의 부탁을 받고 이혼한 메튼 백작부인이 아들 브루노를 데려갈 수 있도록 알아보았다.
메튼 백작의 뒤를 이어 작위를 승계한 큰아들은 동생을 친모가 데려간다는 점에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문제는 백작부인이었다.
백작부인은 아들보다도 재혼을 택했다. 휴고는 루시아가 신경 쓸까 봐 백작부인이 친정에 돌아가 재혼한 소식은 전하지 않았다.
휴고는 나름대로 할 만큼 했다. 그런데 비록 꿈속의 일이라지만 아내의 목숨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브루노를 그냥 내버려 두자니 빚을 진 것처럼 찜찜했다.
도울 일이 없나 싶어서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아내의 꿈에서는 브루노가 학술원으로 쫓겨갔다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그 점이 이상했다. 학술원의 등록금은 거금이었다. 메튼 백작이 반항하는 꼴 보기 싫은 아들을 치우려고 거금을 들였을 것 같지 않았다. 조사하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죽은 메튼 백작의 부친이 학술원 설립에 투자해서 아래 삼대까지는 전액 장학금으로 수료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학술원 설립 당시에는 우스웠던 권리였다. 그러나 학술원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엄청난 권리가 되었고, 학술원은 여기저기 뿌려둔 권리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래 삼대까지는 제한 없이 전액 장학금으로 입학할 수 있었던 권리가 오직 세 명으로 제한되었다. 꿈속의 메튼 백작은 어차피 남에게 팔 수 없는 권리니까 브루노를 쫓아내는 데 사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메튼 백작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학술원 입학권을 사이가 소원한 동생에게 쓸 생각이 없었다. 마침 슬하에 아들을 셋 두어서 자식들을 모두 입학시키려고 계획을 잡았다.
휴고가 알아본 바로는 브루노는 머리가 비상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형은 동생의 재능에 관심이 없었다. 거의 방치나 다름없이 내버려 뒀다.
루시아의 꿈속에서 브루노는 비록 쫓겨나다시피 학술원으로 갔으나 아마 메튼 백작이 아버지로서 최고로 잘한 일일 것이다.
‘부모도 형제도 관심을 주지 않는 집에서 지내느니 학술원에서 재능을 키우는 편이 낫겠군.’
휴고는 브루노의 재능을 아까워하는 후원자로 위장했다.
메튼 백작은 아무 대가 없이 막냇동생이 학술원에 다니는 고가의 비용을 전부 대겠다는 정체 모를 후원자를 경계했다. 혹시 이 일로 자신이 무슨 피해를 보는 것은 아닐까 꺼렸다.
죽은 메튼 백작의 아들답게 도량이 좁았다. 천재라는 극찬을 듣는 동생에 대한 자격지심도 얼마간 있었다.
메튼 백작과의 교섭은 생각했던 이상으로 지지부진했다. 휴고는 이놈도 그냥 죽여버릴까 고민했다. 아마 메튼 백작이 조금 더 시간을 끌었다면 제 아버지 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 내년에 입학인가?”
“아닙니다. 후년입니다. 내년 입학은 이미 신청이 마감되었습니다.”
학술원에 입학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점점 몰려들어서 최소 입학 1년 전에 신청서를 제출해야 했다.
“후년이면 몇 살이지?”
“열네 살입니다.”
“열네 살이면 6년 과정으로 들어가는 건가?”
“아닙니다. 본인이 4년의 기본 과정을 원했습니다.”
기본 과정은 학술원의 가장 고학년인 본 학년 과정이었다. 학업 수준도 그만큼 높았다. 대개 열여섯 살 이상이 입학했다.
“수업을 따라갈 능력이 된다고 자신하는 건가? 너무 어린 것 같은데.”
“데미안 도련님도 열네 살부터 기본 과정을 시작하십니다.”
“녀석은 빼고. 내 자리를 받으려면 그쯤은 당연히 해야지.”
절대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파비안은 두말하지 않았다.
“브루노 메튼의 학업 능력을 검증한 결과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럼 본인이 원하는 대로 처리해.”
보고를 마친 파비안이 물러가고 휴고는 잠시 옆에 치워 둔 친권 포기서를 집어 들었다.
그는 일어나려다가 다시 앉아서 또 다른 서랍을 열었다. 누렇게 낡은 작은 봉투가 바닥에 깔려있었다. 제법 큼직한 서랍 안에 들어있는 것을 그거 하나뿐이었다.
그는 굉장히 오랫동안 망설였다. 몇 번이고 서랍 안에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두기를 몇 번.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봉투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큼직한 서류 봉투와 작은 낡은 봉투를 들고 집무실에서 나왔다.
그는 가장 먼저 에반제린의 육아 방으로 들어갔다. 요즘 그녀가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없고 젖 유모가 방을 지키고 있다가 ‘마님께서는 아가씨와 침실에 들어 계십니다.’라고 행방을 알려주었다.
예상과 다르게 침실은 조용했다.
그녀는 아이와 있을 때 굉장히 수다스러웠다. 요즘 에반제린이 입이 트여 옹알이를 시작하자 오히려 그녀가 더 열심히 추임새를 넣었다.
아기가 의미를 알 수 없는 한 마디를 꺼내면 그녀는 그보다 몇 마디를 더 하며 맞장구쳤다.
휴고는 정말 그녀가 정말 말을 알아들어서 대답하는지 궁금했다. 에반제린이 하는 의미 모를 울부짖음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왜 조용한가 했더니 역시 침대 위에 그녀와 아이가 나란히 누워 한창 낮잠 중이었다. 휴고는 곁을 지키고 있는 하녀를 내보내고 침대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그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잠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에반제린의 자는 얼굴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바라보기만 해도 좋아요.’라고 말한 뜻을 그는 이해했다. 그는 그녀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자고 있던 에반제린이 몸 틀기를 하자 그의 시선이 아기에게 옮겨갔다.
‘아침에 봤을 때보다 더 큰 것 같은데.’
그는 태어난 첫날 아기를 본 기억을 떠올렸다. 지난 석 달 동안 무럭무럭 자란다는 말의 뜻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처음 봤을 때 이상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던 휴고는 갈수록 인형처럼 탈바꿈하는 딸의 모습이 신기했다.
뽀얗고 통통한 두 볼이 귀여웠다. 보면 볼수록 가슴 안쪽 어딘가가 간질거렸다. 어서 빨리 커서 자신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들여다보고 있던 에반제린이 입을 오물오물하면서 눈을 깜작거리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휴고와 눈을 마주쳤다.
루시아를 닮았으나 조금 더 노란빛이 감도는 호박색 눈동자가 빤히 휴고를 바라보았다. 휴고는 당황해서 아기와 눈을 마주한 채 굳었다.
“꺄하.”
에반제린이 웃음소리를 내면서 휴고를 향해 손을 버둥거렸다. 웃는 것인지 말을 하는 것인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면서 손발을 움직여 온몸으로 열심히 뭔가를 표현했다.
휴고는 눈을 뗄 수가 없어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휴고를 향해 열심히 안아달라고 버둥거리던 에반제린은 도통 안아줄 기색이 없자 더 큰 소리를 내며 손을 마구 휘저었다. 그리고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이마를 찡그리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에반제린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이브, 착하지.”
휴고는 달게 자는 아내를 깨우고 싶지 않아서 딸을 달래려고 했다. 그러나 에반제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다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침대에서 얼마간 떨어진 곳까지 걸었다.
휴고는 에반제린이 태어난 날 산파가 억지로 안겨준 이후에 몇 번 루시아가 안겨주면 마지못해 안기는 했으나 먼저 안지 않았다. 아기가 작고 약해서 만지다 잘못될까 봐 겁이 났다.
휴고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알고 루시아도 억지로 권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안아본 딸은 생각보다 훨씬 묵직했다. 그가 짊어져야 하는 생명의 무게 같았다.
휴고의 품에 안겨서 공중에 들린 기분이 좋은지 에반제린이 떠들기 시작했다. 휴고는 아내처럼 딸의 말을 알아듣고 싶어서 미간을 찡그리며 열심히 귀를 기울이다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음을 다시 깨닫고 피식 웃었다.
“아가, 이브. 뭐라고 하는 거니.”
한마디 했더니 잠시 조용해진 에반제린이 마치 대답을 하는 것처럼 더 신나게 떠들었다. 휴고는 낮게 웃으면서 보드라운 아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톡 튀어나온 작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루시아는 침대에 앉아서 부녀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딸의 작은 소리에도 깊은 잠에서 확 깨어날 만큼 예민하게 잠귀가 밝은 상태였다. 그래서 이브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금방 잠에서 깼다.
가슴이 뭉클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가 웃다가 아기에게 말을 건넸다. 부녀가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루시아는 침대에서 내려와서 부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휴고는 아내를 보자마자 얼른 에반제린을 넘겨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자세를 잡자 에반제린이 큰 소리를 내며 거부 의사를 표했다. 난감해하는 휴고를 보면서 루시아는 짧게 웃었다.
“당신이 좋대요. 계속 안고 계세요.”
“계속? 언제까지?”
“잘 때까지요.”
다행히 에반제린은 금방 잠들었다. 휴고는 유모를 불러서 아이를 넘겨 내보냈다. 그리고 협탁에 올려둔 봉투를 루시아에게 주었다. 먼저 큰 봉투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루시아의 눈이 커졌다.
“잊고 있었어.”
“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둘 다 당신 아이야.”
“우리 아이죠. 고마워요.”
루시아는 그의 볼에 살짝 키스하고 또 다른 작은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에 들어있는 짤막한 서신을 읽으면서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접한 혼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이럴 수밖에 없었던 나를 이해해 달라고는 하지 않을게. 하지만 믿어줘. 모두 너를 위해서야, 휴. 사랑해. 내 동생. 나의 형.
“죽은 내 형제가 내게 남긴 유일한 유품이야.”
공작 부부의 죽음을 모두 수습하고 휴고는 며칠 만에 들어간 제 방의 책상에서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짤막한 몇 줄은 형제가 남긴 유언이었다.
형제의 시체를 보며 한계까지 차오른 분노가 편지를 읽으며 완전히 터져버렸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 알았다.
녀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 그랬다는 말도 믿을 수 없었다. 죽은 친부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죽은 형제를 증오했다.
편지를 벽난로에 던져 태워 버리려는 시도만 하기를 수차례, 그는 편지를 비밀의 방에 던져두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필립 때문에 비밀의 방을 달달 뒤지다가 빛이 바랜 상태의 편지를 발견했다.
외면하지 못하고 수도로 올 때 가지고 왔다.
“당신에게 하지 못했던 말이 있어.”
휴고는 어떻게 서두를 꺼내야 할까 고민하다가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원래… 이름이 없었어. 언제부턴가 주변에서 날 히우라고 부르기 시작했지.”
휴고는 담담하게 마치 어릴 적 들었던 옛이야기를 전하는 것처럼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어린 짐승 히우가 휴고를 만나서 사람이 되고, 형제의 거죽을 뒤집어쓰며 살아온 날들.
휴고의 이야기가 열여덟 살의 어느 날 벌어진 비극으로 끝을 맺었을 때 루시아는 얼굴이 다 젖을 정도로 울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외로웠던 어린 시절이 안타까워서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다.
휴고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쥐고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당신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는 일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녀의 사랑을 의심해서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최고가 되고 싶은 남자의 자존심이었다.
약한 모습도, 추한 모습도 감추고 싶었다. 만인의 경외를 받는 타란 가문의 주인이 사실은 그럴싸한 흉내를 내는 가짜라는 자격지심을 버리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싶지 않았다.
루시아는 자신의 얼굴을 쥔 그의 양 손등을 감싸 잡았다.
“당신이 누구이든 상관없어요. 저는 제 눈앞에 있는 지금의 당신을 사랑해요.”
“응, 알아.”
루시아는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팔이 그녀의 등을 받쳐 안았다.
“아주버님의 죽음을 당신 탓으로 돌리지 마요. 그분은 당시에 겨우 열여덟 살이었어요. 하나뿐인 형제를 위해서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당신을 사랑한 거예요.”
“…그래. 그런 것 같아.”
차마 입 밖으로 말할 수 없지만, 루시아는 세상을 떠난 또 한 명의 휴고에게 감사했다.
당시에 휴고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히우는 더 많은 상처를 받고 타란 가문의 굴레에 꽁꽁 묶인 불행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자유 의지 없는 인형이 되어 사람답게 사는 행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루시아가 그를 만나서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편지는 제가 가지고 있을게요.”
“…….”
“당신이 가지고 있기는 힘들지만, 버릴 수도 없는 거죠?”
“…음.”
짧은 서신 속의 글씨가 정갈했다. 루시아는 글씨에서 묻어나는 그분의 성품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아주 따뜻하고 다정한 분이었을 것이다. 남편이 얼마나 형제를 사랑했고, 형제의 죽음으로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악마라는 의미로 불렸다는 히우라는 이름은 이제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루시아는 그를 ‘휴’라고 부르면서 ‘사랑하는 내 남자 히우’라고 의미를 붙일 것이다.
그녀가 그만의 비비안이 된 것처럼 그도 이제는 그녀만의 히우였다. 기대고 싶은 든든한 남편이면서 동시에 안아주고 싶은 남자를 그녀는 꼭 끌어안았다.
* * *
수도의 복잡한 거리를 달려가는 마차 안에서 검은 머리의 소년이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응시했다. 소년의 무릎에는 샛노란 털의 여우가 몸을 둥글게 말고 목덜미를 쓰다듬는 주인의 손길을 즐기고 있었다.
처음 보는 수도의 화려한 풍경이 데미안의 시선에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갔다. 수도의 첫 방문은 소년에게 아무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다시 뵙는다는 사실은 특별했다. 그리고 동생을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에반제린……. 이브…….’
어머니의 편지로 들은 누이동생의 이름을 계속 되뇌었다.
‘날 싫어하면 어쩌지.’
아기를 본 적 없는 데미안은 태어난 지 몇 개월 안 된 아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막연하게 어머니를 닮은 꼬마 아가씨를 상상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동생을 가졌다는 소식을 담은 편지를 처음 받았을 때 데미안은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조금 멍했다.
어머니는 누이동생이 태어날 거라고 편지에서 말했지만, 그런 걸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데미안의 불안을 가라앉혀 주려고 일부러 그러셨다고 짐작했다.
태어날 동생이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었다. 동생을 소중히 여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작은 불안은 있었다. 진짜 아이를 가진 어머니가 데미안을 더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까 봐 두려웠다.
어머니가 동생을 더 많이 사랑해도 괜찮았다. 자신을 미워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차가 공작저로 들어섰다. 마차에서 내리는 데미안을 제롬이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오랜만이군요.”
주변에 둘러선 고용인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훈련을 받았음에도 경악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누가 봐도 타란 공작과 완전히 빼닮은 다 큰 사내아이가 나타났다.
이제 혼인한 지 3년이 넘었고, 얼마 전 막 아이를 낳은 공작부인의 소생일 리가 없었다. 조용하던 공작가에 폭풍우가 휘몰아칠 것이다. 비바람을 피할 가림막을 찾아야겠다고 고용인들은 똑같은 생각을 했다.
데미안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루시아가 2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루시아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데미안에게 빠르게 다가가서 꼭 끌어안았다.
“세상에, 데미안. 정말 몰라보게 컸구나.”
3년 만이었다. 여덟 살의 데미안이 열한 살이 되었다. 겉으로는 그보다 서너 살 더 들어 보였다. 키가 루시아보다 커서 시선을 조금 들어야 했다. 어린 모습이 아직 남아있어도 한두 살만 더 나이 들면 누가 봐도 청년이라고 할 만했다.
데미안은 부드러운 어머니의 품에서 가슴 안쪽이 따뜻한 기운으로 차오르는 행복한 충만감을 느꼈다. 어머니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은 변하지 않았다. 안심되고 감사했다.
“어쩌면 이렇게 네 아버지를 닮았니. 갈수록 똑같아지네.”
“평안하셨습니까. 어머니.”
“그럼. 너도 잘 지냈어? 오는 데 힘들지는 않았고? 아샤는?”
“들어오기 전에 집사에게 맡겼습니다.”
“식사는? 점심은 걸렀겠구나.”
“생각이 없습니다. 저녁에 먹겠습니다.”
루시아는 하녀에게 간단한 간식을 챙겨서 2층으로 올리라고 말했다.
“이리 오렴. 이브와 인사하자.”
루시아가 데미안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고 고용인들이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서로 마주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도련님의 정체를 모르겠다. 타란 공작의 아들이라고 보기에는 공작부인의 태도가 굉장히 살가웠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끼리 있을 때 뒤에서 떠들 수는 있어도 대놓고 숙덕이거나 밖으로 말을 옮길 수는 없었다. 집사가 안으로 들어오자 고용인들은 재빠르게 할 일을 찾아 흩어졌다.
루시아는 육아 방으로 들어가서 안에 있던 고용인들을 내보냈다. 데미안의 손을 붙들고 곧바로 아기 침대로 다가갔다.
에반제린은 혼자 떠들면서 놀다가 사람이 다가오자 시선을 마주쳤다. 낯익은 루시아를 보고 웃음을 터뜨리면서 앙증맞은 손으로 손뼉을 쳤다. 루시아도 웃으면서 아이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아…….’
데미안은 커진 눈으로 버둥거리는 아기를 넋을 놓고 보았다. 인형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작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조금만 더 작았으면 요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보송보송한 벌꿀 색의 머리카락은 눈으로만 봐도 부드러울 것 같고, 어머니를 닮은 맑은 눈동자는 싱그러운 기운으로 반짝거렸다. 티 하나 없이 뽀얗고 통통한 볼이 아기가 입을 움직일 때마다 실룩샐룩 움직였다.
“이브, 오라버니에게 인사해야지.”
“꺄, 꺄아.”
“데미안. 이브가 만나서 반갑대.”
“…네?”
데미안은 식은땀이 났다. 어떻게 그 말이 그렇게 해석되는 건가. 몰랐던 새로운 언어의 등장에 당황했다. 어느 나라 말이냐고 묻고 싶었다.
“데미안. 이브를 잠깐 보고 있겠니? 인사도 하고 친해지렴. 내가 잠시 자리를 피해줄 테니까. 혹시 이브가 울면 방 밖에 있는 하녀를 부르면 돼.”
“예? 어머니. 아니 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려 했으나 이미 루시아는 방을 나가버렸다. 데미안은 침대 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려서 침대 안을 들여다보았다.
뭐가 그리 바쁜지 손발을 열심히 움직이던 에반제린이 데미안과 눈을 마주쳤다. 마치 탐색을 하는 것처럼 데미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커다란 눈망울이 반달처럼 휘면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안녕……. 이브.”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어설픈 인사말을 건넸다. 그러자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기가 떠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으나 데미안은 아기가 뭔가 반응하려 한다는 의지는 알아들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볼록한 볼을 살짝 눌러보았다.
‘부드러워.’
갑자기 에반제린이 데미안의 손가락을 잡았다. 작은 손안에 손가락이 꽉 잡힌 채 데미안은 어쩔 줄 몰랐다.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빼려고 했으나 어린 아기의 악력이 제법 강했다. 더 강하게 빼려고 하니까 에반제린이 ‘아우!’ 하면서 큰 소리를 냈다.
데미안은 움찔 놀라서 손을 뺄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서있었다. 손가락 하나가 부드럽고 따뜻한 손아귀에 잡힌 기분이 이상했다.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만나서 반갑다. 이브.”
“기분이… 이상합니다. 가슴이 좀 따끔따끔하고…….”
“데미안. 그건 사랑스럽다는 감정이란다.”
아샤를 처음 품에 안았던 그날의 느낌보다 훨씬 더 가슴 안쪽이 따끔거렸다. 사랑스러웠다. 데미안은 오래전 어머니가 알려준 단어의 뜻을 이제는 완벽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8권에서 계속>
8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