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62화 (63/77)

62장 끝, 그리고 시작 (3)

루시아는 어딘지 모를 숲을 걷고 있었다. 숲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나무들로 빽빽했지만, 전혀 어둡지 않았다. 그녀는 맨발이었다. 발에 부드러운 이끼가 닿아 간지러웠다.

홀린 것처럼 숲길을 걸었다. 마치 이리 오라고 길을 열어주는 것처럼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무성한 덤불이나 나뭇가지가 옆으로 비켰다. 그런데 그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아…….’

눈앞에 탁 트인 공간을 보며 루시아는 탄성을 질렀다. 마치 아늑한 보금자리처럼 작은 원을 그리는 공간이었다. 발목을 겨우 넘는 얕은 수풀이 융단처럼 깔렸다. 그리고 한가운데에 단 한 그루의 나무가 내리쬐는 햇볕을 받고 서있었다. 오직 세상에 그 나무 하나인 것처럼 성스러운 광휘가 비치고 있었다.

루시아는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살펴본 나무에는 종류를 알 수 없는 붉은 과실이 탐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모두 따서 치마폭에 담고 싶은데 아까워서 만질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무 주변을 빙빙 돌다가 유난히 붉고 매끈하게 예쁜 열매로 손을 뻗었다. 손으로 잡아 돌렸다. 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져 온전히 손에 잡히는 순간에 갑자기 열매에서 환하게 빛이 뿜어 나왔다.

루시아는 번쩍 눈을 떴다. 아침이 밝아오는 익숙한 침실이었다.

‘꿈……?’

눈앞에 잡힐 것처럼 생생한 꿈이었다. 루시아는 새해 첫날 아침부터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혀 눈을 뜨고 한참을 누워있었다.

* * *

“…님. 마님.”

루시아는 눈을 떴다. 침대 곁에 하녀가 서있었다. 나른하게 감기는 눈에 힘을 주어서 하녀에게 시간을 물었다. 정오까지 두 시간이 겨우 남은 늦은 오전이었다.

요즘 매일 늦잠이었다. 원래 루시아의 기상 시간에서 세 시간은 지났다. 루시아는 오늘 점심에 왕비와 식사 약속이 있어서 어제 하녀에게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깨우라고 말해 놓았다.

“세숫물을 들일까요?”

“음, 그래.”

하녀가 몸을 돌려 나가는 뒤로 루시아는 하품하면서 기지개를 켰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평소에 하녀가 깨우지 않아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눈을 뜨면 항상 늦은 오전이고 그마저도 푹 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며칠 계속 낮잠까지 자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어서 나타나는 춘곤증이라고 보기에는 잠이 많이 늘었다. 더구나 루시아는 예민하게 계절을 타는 편이 아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루시아는 아랫배를 잡고 잠깐 몸을 숙였다. 아랫배가 묵직하게 당기면서 콕콕 찌르는 통증이 있었다. 잠시 후 금방 사라졌으나 허리를 펴는 루시아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며칠 전부터 이렇게 이유를 알 수 없이 배가 아팠다. 오래가는 것은 아니지만, 자꾸 신경이 쓰였다.

‘궁에 다녀와서 의사를 불러야겠어.’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입궁할 준비 하려면 시간이 없어서 주치의를 부르는 일은 오후로 미뤘다. 어디가 특별히 아픈 것은 아니라서 굳이 주치의를 부를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그녀의 건강 문제에 남편이 굉장히 예민했다. 증상을 무시하고 병을 키웠다가는 주치의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안나가 사람은 괜찮았는데.’

안나를 내보내고 이후에 여러 주치의를 겪어보니까 안나가 실력은 물론이고 적극적으로 환자를 치료하려는 자세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들어온 주치의들은 진단을 내리거나 약을 짓는 데 몸을 사리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루시아는 이후에 들어온 주치의들과 고용주와 고용인으로서의 형식적인 관계만 유지하고 있었다.

세수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는 중에 시중을 들던 하녀가 말했다.

“마님. 주인님께서 출타하시기 전에 의사를 불러 진료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루시아는 어젯밤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요 며칠 당신, 미열이 있는 것 같아. 내일 진료받아 봐. 감기가 오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궁에 다녀와서 받을 테니까 주치의에게 일러두렴.”

“예, 마님.”

베스는 왕비궁을 방문한 루시아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두 사람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루시아는 첫 화제로 셀리나 공주의 안부를 물었다.

셀리나는 두어 달 후에 한 살 생일을 앞두고 있었다. 왕이 공주의 첫 생일을 축하하는 성대한 파티를 열 것이라고 널리 알렸다.

왕은 아들들에게는 적당한 부정을 보여준 것과 달리 유일한 딸을 애지중지했다. 얼마나 공주를 어여뻐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공주가 여자아이답지 않게 벌써 말썽을 부릴 조짐을 부려 걱정이에요.”

“지나친 걱정이세요. 아이 때는 조금 말썽도 부려야 건강하게 자란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어릴 때는 꽤 말괄량이였답니다.”

“어머, 공작부인이요?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데요. 공작부인 말을 들으니 좀 안심이네요.”

요리가 하나씩 테이블에 올라왔다. 전채로 와인에 조린 토끼 간 요리가 나왔다.

루시아는 한 조각을 입안에 넣어 씹으면서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와인향과 토끼 간 요리 특유의 피 냄새가 섞여 속이 울렁거렸다.

평소 즐겨 먹는 요리는 아니어도 먹지 못하는 요리도 아니었다. 억지로 한 입 먹고 주스로 입을 헹궜다.

평소에는 좋아했던 달콤한 주스가 너무 달게 느껴졌다. 단맛보다 좀 더 새콤한 맛의 주스가 마시고 싶었다. 집에 가서 레몬즙을 첨가한 주스를 한 잔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새콤한 레몬 맛을 떠올리자 입맛이 돌았다.

이어서 나온 수프를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가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양파 수프 특유의 양파 냄새가 역했다. 양파 수프는 요즘 요리로 내오지 말라고 해서 먹지 않은 지 며칠 되었다.

억지로 먹자면 못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루시아는 겨우겨우 서너 입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스를 마셔서 입안의 양파 향을 씻어 냈다.

주요리는 송로버섯을 얹은 스테이크였다. 오늘 루시아를 초대한 왕비가 요리에 많은 신경을 썼는지 평소에 먹지 않던 고급 요리들이 올라왔다.

입에 넣지 않아도 풍기는 송로버섯 특유의 향기를 맡으니까 속이 메스꺼웠다.

루시아는 차마 스테이크에 입을 못 대고 다시 주스를 마셨다. 빈 주스 잔을 부지런히 채우는 시종의 손길이 바빴다. 석 잔의 주스를 마시며 루시아는 물배를 채웠다.

루시아를 유심히 보던 베스가 시녀에게 명해서 부드러운 빵을 가져오게 했다. 루시아는 시녀가 옆에 흰 빵을 가져다 두는 것을 보며 베스를 보았다.

눈을 마주치며 웃는 베스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빵을 집어 한입 물었다. 다행히 거슬림 없이 먹을 만했다.

식사 후 간단한 간식과 차가 들어왔다. 향이 강한 꽃차가 아니라 곡류를 볶아서 끓인 은은하고 고소한 차였다. 루시아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속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내가 속이 불편할 때 즐겨 마시는 차랍니다. 공작부인 입에도 맞는지 모르겠네요.”

“아주 맛이 좋습니다.”

루시아는 잠시 주저하다가 물었다.

“어떻게 만드는 차인지 알 수 있을까요?”

베스가 웃었다.

“그럼요. 댁에 돌아가는 편에 만드는 법과 만들어둔 것을 가져갈 수 있도록 말해 둘게요. 아무래도 공작부인에게 좋은 소식이 있나 보군요.”

“네?”

“아이를 갖는 초기에는 평소 잘 먹던 음식 냄새가 그렇게 역할 수가 없답니다. 나는 증상이 유별난 편이어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한동안 빵과 차만으로 연명했지요.”

루시아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하자 베스가 놀란 탄성을 질렀다.

“어머, 아직 몰랐나 보군요. 하긴. 공작부인은 연치도 어리고 첫 아이니까 모를 수도 있지요.”

루시아는 겨우 왕비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아닙니다. 그럴 리 없어요.”

“의사가 회임이 아니라고 하던가요?”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말 나온 김에 궁의를 부를까요? 아무래도 초기에는 회임 진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지요. 셀리나가 태어날 때까지 나를 담당한 궁의가 아주 의술이 뛰어나답니다. 타국에서 신비한 의학을 배워왔고 오랫동안 많은 산모를 치료한 경력이 있어요. 손목에 뛰는 맥을 잡아서 임신을 알아내지요.”

루시아는 궁의를 부르는 왕비를 막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묘한 기대감을 버릴 수 없었다. 계속 자신의 몸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프지는 않은데 전체적으로 어딘가 변한 것은 확실했다.

왕비의 부름을 받아 온 궁의는 나이가 지긋했다. 궁의는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고 루시아의 손목을 붙들어 한참 맥을 눌렀다.

“공작부인은 평소 제가 진료하던 분이 아니라서 확신은 드릴 수 없습니다. 여인이 회임하기 전과 후의 맥이 달라져서 평소에 공작부인의 맥을 짚어봤다면 확실하게 알 수 있으나 지금 상태로는 회임의 가능성이 높다고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궁의는 루시아에게 이것저것 증상을 물었다. 마지막 월경일이 언제였느냐는 질문에는 루시아는 대충 지난달이었다고 얼버무렸다. 주치의가 아닌 궁의에게 불임이라는 비밀을 말할 수 없었다. 그 밖에 몸에 나타난 몇 가지 증상을 듣고 궁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형적인 회임 초기 증상들입니다. 보통 회임 증상이 두어 달 후에 나타나는 분도 있고, 예민한 분은 초기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한동안 몸을 조심하시다가 다음 월경을 시작하지 않으면 회임이 틀림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축하해요, 공작부인. 타란 공께서 아주 기뻐하시겠어요.”

베스의 축하를 받으면서 루시아는 겨우 표정 관리를 했다. 기쁨보다도 어리둥절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루시아는 실력이 뛰어나다는 궁의가 오진했을 가능성을 따져보았다. 그러나 상황이 지나치게 딱딱 맞아떨어졌다. 루시아의 몸에 일어난 여러 가지 변화를 임신 증상이라고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루시아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도 계속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문득 한 달 반 전에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깨고 나서도 한참 기분이 이상했고, 대개 꾸고 나면 곧 잊는 다른 꿈들과 달리 그 날의 꿈은 지금도 보일 것처럼 생생했다.

집에 와서 주치의를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불임 증상을 설명했다. 요즘 변한 몸 상태와 궁에서 궁의 진단을 받은 것까지 모두 말했다. 주치의는 한참을 고개를 갸웃했다.

“마님의 증상은 회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궁의까지 진단을 내렸다면 틀림없겠지요.”

“하지만 말했듯이 난 월경을 하지 않네. 그러면 당연히 불임이지 않은가.”

“월경이 없다고 불임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마님은 초경을 하셨고, 약초 섭취로 이상 현상이 나타난 것이지요. 몸은 스스로 치료하려는 성질이 있습니다. 어쩌면 마님께서는 저절로 치료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꿈속에서 필립은 루시아에게 불임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주치의 말대로 몸이 저절로 치료했을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 없었다. 꿈속에서는 아이를 가지려고 시도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꿈속 일이 반드시 현실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니까.

“감축드립니다, 마님.”

주치의는 공작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공작가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고용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두 분의 사이는 좋은 정도가 아니라 갓 결혼한 신혼처럼 뜨거워서 하루라도 한 침실을 같이 쓰지 않는 날이 없다고 했다. 주인님의 침실은 한여름에도 한기가 감돈다고 고용인들은 숙덕이며 웃었다.

“정말… 내가 아이를 가졌다고 보는가?”

주치의는 혼란스러워하는 마님의 반응을 이해했다. 보통 임부는 임신 초기에 기쁨보다는 불안을 느끼고 기분의 변화가 심하며 우울해하는 예가 많았다. 임부는 몸의 보살핌만큼 정신적인 세심한 보살핌도 필요했다.

누구보다도 남편이 도와주어야 임부의 우울증은 더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주치의는 따로 공작을 만나 마님을 위한 주의사항을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거의 확실합니다.”

“거의라는 말은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건가?”

“마님은 흔치 않은 예입니다. 대개 임신은 월경으로 판단합니다. 월경이 없는 상태에서 몸의 이상 증상이 나타나면 임신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여인의 임신은 흔한 현상이지만, 확신하는 진단은 은근히 어려웠다. 임신 증상과 똑같이 월경이 끊기고 배가 나오기 시작해도 임신이 아닌, 상상임신이라는 증상도 있었다. 주치의는 마님의 불안을 가중하지 않으려고 상상임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우선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피로를 느끼지 않게 충분히 많이 주무시고 초기에는 외부 활동도 자제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리고 가장 주의하셔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마님. 부부 관계를 자제하셔야 합니다.”

멍하게 있던 루시아는 얼굴을 붉혔다.

“적어도 지금은 절대 안 됩니다.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확신이 드는 시기, 즉 배가 나오기 시작하는 무렵까지는 자극은 금물입니다.”

주치의가 물러가고 루시아는 침대에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심란했다. 그동안 몸에서 일어난 이상 증상을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두통도 없네. 한 달? 아니야. 한 달 반? 거의 두 달 가까이 두통약을 먹은 기억이 없어.’

똑바로 천장을 보고 누워서 두 손으로 아랫배를 부드럽게 감쌌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아직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 그런데 배 안에 생명이 자라나고 있다고 생각하면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확실히 실감나지 않아서 좋은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임신일 리 없다는 의심을 버리지 못하면서 ‘어쩌면 혹시’라는 기대는 점점 커졌다. 이러다가 임신이 아니라는 진단을 들으면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내 불임 증상은 의사 말대로 기적처럼 저절로 치유되었다고 쳐도. 그이가 한 말에 따르면 내가 임신할 수가 없잖아.’

주치의에게 자신의 무월경 증상은 설명했으나 남편의 비밀에 속하는 타란 가문 사람들의 특이 체질은 말할 수 없었다.

남편도 불임이나 다름없었다. 루시아는 임신할 수 있는 타란 혈족의 여자가 아니고, 그렇지 않은 보통 여자는 순결할 때부터 특수한 약초로 몸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녀는 조건에 해당하지도 않았다.

남편은 루시아에게 아이를 갖게 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 내 애가 아니겠지.”

루시아는 북부에 있을 때 오래전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르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임신 소식을 전하고 그가 만약 같은 말을 또 한다면 슬픔을 넘어서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가 자신의 정절을 의심하면 그가 너무 미워서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아직 임신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에게 말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아직 모르니까 당분간 입 다물고 있어야 하는 건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걱정은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루시아는 침대에서 한참을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다.

휴고는 오늘 일찍 귀가했다. 마중 나온 제롬이 마님께서 낮잠이 들어 아직 주무신다는 말을 전하자 인상을 썼다.

“어디 아픈 건 아닌가? 내가 오늘 의사 진료를 받으라고 했을 텐데.”

“마님 일로 주치의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휴고는 옷을 갈아입기 전에 곧바로 주치의부터 만났다. 주치의는 긴장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마님과 달리 공작은 만날 때마다 긴장했다. 그래서 정말 닮지 않은 두 분이 부부가 되었다고 몇 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마님께서 회임하신 것 같습니다.”

남편에게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한 루시아의 고민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남편에게 아직 말하지 말라고 주치의에게 일러두는 것을 까맣게 잊었다.

주치의는 그동안 마님을 진료하면 꼬박꼬박 결과를 공작에게 고해왔고 이번에도 당연히 공작에게 알리는 쪽으로 생각했다.

곁에서 함께 희소식을 들은 제롬이 웃음을 띠며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휴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뭘 해? 회임? 아이 말인가?”

“확실하지는 않으나 마님의 여러 증상이 대표적인 증거를 보이고 있습니다.”

주치의는 오늘 루시아가 왕궁에서 궁의를 진단을 받은 일부터 요즘 마님의 이상 증세까지 연결해서 거의 임신이 확실하다는 설명을 이었다. 그리고 임신부의 심리 상태와 주의사항을 줄줄이 나열하는 의사를 말을 휴고는 잠자코 들었다.

“회임이 아닐 가능성은?”

주치의는 아이 아버지가 된다는 소식을 들은 보통 사람과 사뭇 다른 공작의 반응에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지나치게 부부 사이가 좋으면 아이의 존재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남편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런 경우인가 생각했다.

“아주 드물지만, 상상임신이라는 증상이 있습니다.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여인이 겪는데 거의 임신 유사 증상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야말로 아주 희박한 일입니다. 마님이 평소에 아이 문제로 조급해하시거나 우울해하신 일이 없어서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휴고의 드러난 표정은 변화가 없었으나 사실은 대단히 당황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서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아내에게 가문의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은 후 아내는 한 번도 아이 이야기를 꺼낸 적 없었다. 그래서 휴고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기억 저편에 밀어두고 있었다.

“아이라고 언제 확실히 알 수 있지?”

“가장 확실한 시기는 아무래도 태동이 있는 5개월 무렵입니다. 현재 마님께서는 길어봤자 회임하신 지 두 달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휴고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확실히 알 때까지 앞으로 3개월. 너무 길었다.

“주의하실 일은 마님께 말씀드렸습니다만, 특히 부부 관계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확실한 안정기가 될 때까지 최소 앞으로 3개월 동안 부부 관계는 안 됩니다.”

“뭐?!”

휴고는 의사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의심스러울 때는 최악을 가정한다. 휴고가 어떤 일을 판단할 때 지키는 원칙이었다. 임신을 최악으로 가정한다는 말은 어폐가 있지만, 휴고는 도저히 발생할 수 없는 현상인 임신을 확실하다고 전제한 후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나씩 짚어 나갔다.

‘아내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상태라고 했지.’

월경이 없어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불임이라고 했다. 동시에 치료법을 알고 있으니까 언제든지 치료할 수 있다고도 했다.

아내의 몸이 치료되었는지는 둘째 문제고 어쨌든 그녀는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보통의 여인이라고 다시 전제했다. 그녀가 임신할 수 있건 없건 그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핵심은 휴고 자신, 타란 혈족의 괴상망측한 혈통이었다.

‘피를 먹어야 한다…….’

휴고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면서 필립이 오래전 했던 말을 곱씹었다. 당시에는 필립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는 가문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해있어서 필립이 말하는 피를 섭취하는 혐오적인 방식이 아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매사 철저한 휴고가 필립이 정말 진실을 말했는지 다시 따져보지 않은 것은 생각하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피라고? 웃기는 소리잖아.’

휴고는 이성에 기초해서 당시의 상황과 필립이 했던 말을 분석했다.

필립은 가문의 비전을 말할 수 없다고 버티다가 뜻밖에 순순히 자백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가문 비밀의 방에도 기록이 없는, 필립의 가문이 대대로 이어오며 지켜온 비밀을 그렇게 쉽게 털어놓을 것 같지 않았다.

필립은 아집이 강한 늙은이였다. 가문의 비밀을 토설하느니 제 목을 바치는 쪽이 어울렸다.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 이거지.’

휴고의 입가에 싸늘한 웃음이 올라왔다.

‘감히.’

화가 나면서 기가 막혔다. 헛웃음이 터졌다. 주치의 따위가 거짓을 꾸며서 그를 속일 생각은 못할 거라고 생각한 오만함이 빚은 결과였다. 휴고가 필립이 조금이라도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으면 진즉 죽였을 것이다.

필립의 가문은 아무리 타란의 혈통을 잇는 유일한 비전을 갖고 있다고 해도 대대로 의사 가문이며 형식적인 작위 하나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오래 타란의 동반자 노릇을 한 것치고 필립의 가문은 오히려 고립되어 있었다.

필립은 가족이 없고 인간관계가 지극히 좁았다. 무슨 비밀이 그리 많은지 조수도 두지 않았다. 고작해야 주치의라고 가볍게 보았다.

필립을 살려둔 것은 휴고 자신에 대한 처벌이었다. 필립은 죽은 형제에 대한 죄책감과 휴고 자신에 대한 혐오를 극대화하는 매개체였다.

죽은 형제의 목숨 빚 문제도 있어서 ‘네놈 목숨을 인위적으로 거두지는 않겠다.’라는 알량한 자비심으로 내버려 두었다.

‘늙은이가 겁을 모르기는 했지.’

복종하는 척, 하고 싶은 말을 다 지껄여댔다. 그래서 필립과 대면하고 나면 항상 기분이 더러웠다. 그걸 꾹꾹 눌러 참아준 것만으로도 휴고는 필립에게 관대함을 베풀었다.

‘왜 거짓말을 했을까.’

토설하지 않으면 평생 감옥에서 살 각오하라고 협박했다. 필립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거짓을 꾸며댄 짓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만한 행동이었다.

감정상으로는 괘씸하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혼자만 알고 있는 비밀을 거짓으로 말한다고 해도 어차피 아무도 모르고, 사실인지 증명할 사람은 휴고뿐인데 휴고는 진저리를 쳤으니까 필립이 거짓을 말했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거짓말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왜 하필 피를 들먹였을까.’

휴고는 필립을 잡아서 끌고 왔던 그때 미치기 직전이었다. 가문이고 뭐고 눈에 보이는 것 없이 극도의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필립이 피를 먹여야 한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에 대한 혐오가 극대화되면서 상대적으로 가문에 대한 분노가 아래로 눌렸다.

만약 필립이 당시 휴고의 정신 상태를 분석해서 일부 계산적으로 거짓을 말한 것이라면.

‘교활하고 머리가 좋아.’

입만 열면 가문의 혈통을 들먹이는 성가신 늙은이라고만 생각했다. 휴고는 필립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위험한 놈일 수도 있겠군.’

휴고는 그리 쉽게 사람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는 자신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필립에게 경계를 풀었다. 휴고의 경계를 사지 않도록 매사 조심했다는 뜻이다.

‘비전이 뭘까. 지금 다시 잡아와 묻는다고 해도 늙은이가 순순히 토설할 것 같지는 않은데……. 비전 따위는 상관없어. 어떻게 임신할 수 있었을까. 늙은이가 무슨 수작을…….’

“저를 찾으실 날이 올 겁니다.”

턱을 괴고 있던 휴고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헛소리로 치부했던 늙은이가 남긴 한마디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로암에서 지낼 때…….’

휴고는 필립이 아내를 치료하겠다며 아내의 주치의를 꾀어 접근하려던 시도를 기억했다.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순수하게 환자를 치료할 목적이었으면 휴고에게 말을 전해도 되었다. 아무리 늙은이가 꼴 보기 싫어도 환자를 치료하겠다는 뜻을 무조건 무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필립은 마치 휴고의 눈을 피해야 한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치료는 핑계였을지도 모르지. 늙은이는 비비안을 만나고 싶었던 거야. 왜?’

혈통을 잇는 필립 가문의 비전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아내에게 시도할 여지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앞뒤가 맞았다. 그러나 시도는 실패했다. 아내가 필립을 만나지 않았으니까.

끈질긴 늙은이였다. 휴고는 다른 건 몰라도 늙은이의 지칠 줄 모르는 타란 혈통에 대한 집착만큼은 인정했다. 필립이 포기하지 않고 수작을 부렸다고 충분히 의심할 만했다.

‘음식?’

음식에 수작을 부리는 짓은 아무래도 힘들었다. 음식재료는 제롬이 철저하게 관리하는데 수상한 것이 끼어들면 제롬이 모를 리가 없었다.

유일한 가능성은 제롬이 필립과 작당하는 것이다. 그럴 여지는 배제했다.

휴고는 사람을 잘 믿지 않지만, 믿으면 배신의 증거를 확인하지 않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신뢰라기보다는 그 사람에게 맡긴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한 신뢰였다.

제롬은 꼼꼼하고 철두철미했다. 제롬의 일 처리 방식을 휴고는 신뢰했다.

‘늙은이가 수작을 부렸다 치고. 늙은이는 성공을 예측했군. 안사람이 임신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저를 찾으실 날이 올 겁니다.”

‘왜 내게 굳이 그런 말을 했을까.’

아내가 아이를 갖는 것이 필립의 바람이라면 잠자코 있어도 목적 달성이었다. 오히려 아내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자백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태어날 아기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아이가 태어나도 데미안의 신부가 필요하다는 필립의 개소리가 실현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걸 필립 또한 알고 있을 테고.

필립이 아기를 어찌할 주제가 못 되었다. 아내의 주변은 철통 보호 중이었다. 필립이 공작저 근처를 기웃거리다가 눈에 띄어 휴고의 귀에 들어오면 거의 죽은 목숨이었다. 그런 무모한 짓을 시도할 늙은이가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만나자는 소리군.’

휴고는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나를 부른 소리였어.’

휴고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살기가 진득하게 묻어나는 광소였다.

“좋아, 늙은이. 네놈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들어 보지.”

휴고는 딘을 불렀다.

“야만족 토벌을 하다가 내가 수도로 급히 올라오기 직전에 진지로 삼은 마을 기억하나?”

“예, 주군.”

“당시 마을에 공작가 주치의가 머물고 있었다. 필립. 기억하겠지?”

“예,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 마을에 머물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없으면 근방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서 끌고 와. 늙은이 사정 봐줄 것 없이 최대한 속도 내서 데려와. 목숨만 붙어있으면 된다.”

명령을 받들어 딘은 즉시 북부로 출발했다.

루시아는 아침 햇살을 보면서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둑해지는 늦은 오후에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니까 아침이었다.

“세상에. 지금까지 잔 거야?”

중간에 한 번 깨지도 않고 푹 잤다. 요즘 계속 피곤했는데 몸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지나친 수면으로 찌뿌둥하기는커녕 머릿속도 가벼웠다. 루시아는 하녀를 불러서 세숫물을 들이게 했다.

“그이는 출타하셨니?”

“아닙니다. 집무실에 들어 계십니다.”

휴고는 아내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침실로 들어왔다. 마침 루시아는 옷을 막 갈아입은 참이었다. 시중을 들던 하녀가 주인을 발견하고 꾸벅 고개를 숙이며 물러갔다.

휴고는 자신을 향해 웃는 그녀에게 곧바로 다가가서 끌어안았다. 루시아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잠시 당황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의사에게… 들으셨어요?”

“들었어.”

휴고는 어제 그녀의 낮잠이 너무 길어져서 걱정했다. 깨워서 뭐든 먹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우려했더니 주치의가 말했다.

‘하루 정도는 괜찮습니다. 마님께서 요즘 피곤하셨다고 하니까 푹 주무시게 두는 편이 낫겠습니다.’

곤히 잠든 그녀를 끌어안고 휴고는 밤새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의 몸은 약간 열이 있어서 따끈따끈했다. 미열은 임신 초기에 흔한 현상이라는 의사 말을 기억하며 휴고는 애써 걱정을 접었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고마워. 그리고… 축하해.”

“…뭘요?”

“…….”

루시아는 쿡, 웃음을 터뜨렸다.

“의사가 그렇게 말하라고 했죠?”

“…음.”

주치의는 그동안 공작에게 괜히 기가 죽었던 지난날을 만회할 기회라도 잡은 것처럼 일장 연설을 했다. 휴고는 주치의의 수다가 몹시 괴로워서 의사를 남자로 바꾸는 일을 잠시 고민했다.

주치의는 휴고에게 임부의 예민한 기분과 우울증에 대해 다양하고 극단적인 증상을 보였던 환자의 예를 들어가며 겁을 주었다.

임신부는 기분 변화가 심하고 예민하므로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상처받기 쉽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말투가 그리 다정하지 않다고 생각한 휴고는 걱정했다.

‘마님은 현재 불안한 마음 상태를 보이고 계십니다. 이럴 때일수록 남편께서 위로하고 진심으로 아이를 환영하는 뜻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주치의가 일러주는 그대로 읊었다. 루시아는 고개를 들어서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당신 말씀에 진심이 없다고요.”

“…진심이 없는 게 아니라 솔직히 잘 모르겠어. 싫은 건 아니야.”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저도 그런걸요. 실감도 안 나고. 어쩌면 임신이 아닐 수도 있고요.”

“궁의가 잘못 진단하지는 않았겠지.”

루시아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담담한 그의 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기 어려웠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덤덤한 남편의 반응을 좋아해야 하는지 걱정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임신했을 리가 없다며 부정하거나 더 나아가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최악의 반응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우리 아이예요.”

그의 눈이 의아한 빛을 띠었다.

“당연하지.”

휴고는 루시아가 말한 속뜻을 읽지 못했다. 남편이 자신의 정절을 의심하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루시아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했다.

휴고는 아예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예전에 자식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던 말을 아내가 아직 신경 쓰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말했지만 당신 아이라면 좋아.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서 얼떨떨해서 그렇지 싫은 건 아니야. 서운하면 미안해.”

“아니에요. 서운하지 않아요.”

루시아는 아주 많이 행복했다. 그리고 그에게 감사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식을 낳기를 거부한 사람이었다. 비록 당신 아이라면 괜찮다고 말하기는 했어도 그때는 태어날 리 없는 아이를 가정해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실로 다가와 눈앞에 현실이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아이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그때 한 말이 루시아를 위로하기 위한 입바른 말이 아니었다.

루시아는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았던 불안이 녹아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는 좋은 아버지가 되어줄 거라는 확신 같은 예감이 들었다.

기쁘게 웃는 그녀를 잠시 보다가 휴고는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루시아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꽤 길고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있어.”

“저도요.”

어떻게 임신이 되었을까. 남편 역시 그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네.”

“왜 어제까지는 괜찮고.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안 되는 건데?”

“……?”

“주치의가 돌팔이가 틀림없어. 당신 임신을 진단했다는 궁의에게 물어 봐야겠어.”

“…뭘 물어봐요?”

루시아는 자신의 말과 그의 말이 어긋나고 있다는 점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표정이 점점 굳었다.

“석 달은 못 한다니. 나를 말려 죽일 셈이 아니고서야.”

“미쳤어요? 어딜 가서 뭘 물어본다고요?”

루시아가 얼굴을 붉히면서 소리 지르며 그의 가슴을 내리쳤다. 휴고는 뭐가 잘못되었느냐는 것처럼 뻔뻔한 표정이었다. 루시아는 그의 가슴을 팍 밀어내며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러기만 해봐요. 침실에 발도 못 들여놓을 줄 알아요.”

밤의 즐거움을 포기해야 하는 것만도 날벼락인데 아내를 만지지조차 못 한다니 그보다 더한 고문은 없었다. 휴고는 그녀에게 다시 팔을 뻗었지만, 아내가 야무지게 팔을 뿌리치며 피하자 충격 받았다.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며.”

“아뇨! 전 다른 생각 중이었어요. 아이가 다치니까 조심하라는 건데 당신은 그렇게 그게 중요해요?”

“다치다니. 내 자식이 그렇게 약할 리 없어.”

당당하게 궤변을 내세우는 그가 얄미웠다. 루시아는 냉랭하게 몸을 돌렸다.

“가서 하시던 일 하세요. 전 쉬고 싶어요.”

“또 자? 뭘 좀 먹어야지.”

“이따가 알아서 먹을게요.”

“비비안.”

침대에 누워서 대꾸도 하지 않는 아내를 바라보다가 휴고는 침실을 나왔다.

‘…몹시 심리 상태가 불안해지고 기분 변화가 심하며 짜증이 늘고…….’

주치의가 강의한 ‘임신부의 심리 상태에 관한 고찰’의 내용을 떠올리며 휴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내는 아이를 가졌다.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주치의는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휴고가 보기에는 틀림없었다. 아니면 순하고 착한 아내가 저렇게 변할 리 없었다.

* * *

휴고는 자다가 옆에서 몸을 흔드는 바람에 눈을 떴다. 루시아가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휴고는 놀라 일어났다.

“왜? 어디 아파?”

“잠이 안 와요.”

“…….”

휴고는 ‘낮에 그렇게 잤으니 잠이 안 오겠지.’라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임신했다는 진단을 받은 날로부터 3주. 루시아는 잠이 늘었다. 과장을 보태서 거의 온종일 잤다. 저녁에 일찍 자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며 낮에는 낮잠도 잤다. 평생 잘 잠을 미리 다 자려는 것처럼 잠에 취해 지내는 생활이었다.

휴고는 요즘 거의 아내의 자는 얼굴밖에 보지 못했다.

“내가 뭘 해주면 돼?”

“그냥 잠이 안 오는 게 아니라 먹고 싶은 게 자꾸 생각나서…….”

“뭐가 먹고 싶어? 제롬에게 말하면 금방 대령할 텐데.”

“말했는데 구할 수가 없대요.”

제롬이 구하지 못하는 음식. 휴고는 조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뭐기에?”

“청포도요.”

“…….”

이제 막 봄이 찾아왔다. 아직도 바깥 날씨는 바람이 매서웠다. 포도나무에는 이파리도 제대로 돋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도 못 구해요?”

그녀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다 뒤져서 찾아줄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맺히지 않은 열매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없었다. 남부 지역 아래로 한참 내려가면 기후가 온화한 나라가 있지만, 지금이 포도 수확 철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대 가득한 또랑또랑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내에게 안 된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는 허세를 부리고 말았다.

“…찾아볼게.”

“와아.”

목을 끌어안으며 품으로 안기는 그녀를 두 팔로 감싸 안으면서 휴고는 식은땀이 났다.

‘큰일 났다.’

퀘이즈는 왕비로부터 공작부인이 회임한 것 같다는 말을 살짝 전해 들었다. 그 말을 들은 후부터 공작부인이 외부 활동이 없어서 아이를 가진 것이 맞겠거니 짐작했다.

그런데 거의 매일 타란 공작과 얼굴을 마주하는데도 한 달 가까이 영 좋은 소식을 전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러다가는 애가 태어나고 나서 태어났다는 말을 들을 것 같다.

퀘이즈는 슬쩍 먼저 말을 꺼냈다.

“공, 곧 아버지가 된다는 소식을 짐이 들었네만.”

“아버지가 된 지는 옛날입니다.”

퀘이즈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타란 공작의 혼외자 아들을 떠올렸다. 무안한 헛기침을 몇 번하고 말을 고쳤다.

“둘째를 본다는 말을 들었지.”

“…예.”

“사람하고는. 좋은 소식은 어서어서 전해야지. 축하하네. 공작부인은 건강하고?”

“예. 큰 탈은 없습니다.”

“다행이로군. 왕비는 공주를 가졌을 적에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해 고생이 많았지. 여인이 아이를 가지면 흔한 증상이라는데 공작부인은 어떤가?”

“크게 고생하지는 않습니다.”

“아이가 공작부인을 닮아 순한가 보네. 공을 닮은 사내아이가 태어날지, 공작부인 닮은 공녀가 태어날지 궁금하군. 짐이 부관과 내기를 걸었는데 말이지. 짐은 아들이라고 걸었네. 짐은 공만 믿어.”

퀘이즈는 아무래도 도박 운은 지독히도 없는 모양이었다. 껄껄 웃는 퀘이즈를 보며 휴고는 속으로 ‘여자아이입니다.’라고 중얼거렸다.

태어날 아이는 반드시 아내를 닮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이런 고생을 하는 보람이 없을 것이다.

휴고는 시간이 날 때마다 공주의 사랑스러움을 줄줄이 늘어놓는 왕의 팔불출 자랑을 대충 들어 넘겼다. 남의 자식의 어여쁨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정작 내 자식은 태어나기 전부터 고뇌를 안겨주고 있거늘.

지난 한 달. 이제 겨우 한 달. 한 달은 정말 긴 시간이었다. 아직 아이가 태어나려면 6~7개월은 더 남았다.

앞뒤로 밑이 까마득한 좁은 능선에 서서 오도 가도 못 하는 암담함이 이와 같을 것이다.

루시아는 음식을 거부하는 입덧 증상이 심하지는 않았다. 강한 냄새가 나는 음식을 거북스러워하지만, 대체로 식사는 곧잘 했다.

임신 기간 내내 거의 물밖에 넘기지 못해서 바싹 마르는 산모의 예를 들며 주치의는 다행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휴고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먹으면 다 토해내는 입덧 증상으로 고생하는 아내를 곁에서 지켜보다가는 태어나지도 않은 애를 미워할 것 같으니까.

그러나 세상에 쉬운 일은 없었다. 입덧은 가벼우나 상대적으로 루시아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래도 남이 봐서 유난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말투가 쌀쌀맞아지고 짜증이 조금 늘어났을 뿐이었다. 그런데 워낙 순한 성격이었던 터라 대조가 되어서 더 극적으로 변한 것처럼 보였다.

특히 아내의 변화를 겪는 휴고의 충격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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