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61화 (62/77)

61장 끝, 그리고 시작 (2)

태어난 공주를 화제 삼아 이야기하면서도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걱정과 다르게 밝은 모습이 그의 기분을 유쾌하게 했다.

“아기 말이야.”

“태어나신 공주님이요?”

“아니. 우리 아기.”

루시아는 귀를 의심했다. 그의 입에서 ‘우리 아기’라는 표현이 나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손대면 쩡하며 깨질 유리처럼 아슬아슬한 표정으로 루시아는 긴장된 숨을 삼켰다.

“당신에게 오래전 말한 적이 있지. 내게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고.”

“…네.”

“아직도 난 그 일을 당신에게 전부 말할 수 없어. 그런데 일부는 당신도 알아야 할 것 같아.”

그리고 휴고는 말이 없었다. 루시아는 그가 이렇게 말하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꼭 말씀하실 필요는 없어요.’라고 루시아는 말하려고 했다. 그때 그가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나는 당신에게 아이를 갖게 할 수 없어. 타란은 저주받은 가문이거든.”

휴고는 적절한 진실과 거짓을 섞어서 그녀에게 설명했다. 일부는 드러내고 일부는 감추었다.

근친으로밖에 이어질 수 없는 가문의 비밀을 밝혔으나 이복누이가 아닌 친척으로 바꿔 말했다. 혈족이 아닌 여자와 자식을 낳기 위해서는 피가 아니라 특수한 약초를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던 루시아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친척뻘 여자와 결혼해야만 아들을 낳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순결한 몸일 때부터 특수한 약초를 먹어야 한다는 거군요. 특수한 약초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공작가의 주치의 필립 경뿐이고요.”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들린다는 거 알아.”

“당신 말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에요. 그럼 데미안의 어머니는 당신과 친척이었군요.”

“…그런 셈이지.”

루시아는 굉장히 혼란스러웠지만, 생각해 보니까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그에게 많은 여자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혼외자가 없다는 사실, 그가 초야부터 피임에 무심했던 점도 이해가 갔다.

‘친척이라고……?’

제논의 법은 육촌 이내 혈족의 혼인을 금한다. 그러나 사촌의 결혼을 허락하는 나라가 제법 많이 있고, 특히 왕실은 근친혼에 관대했다. 친척 간의 결혼에 그가 강한 혐오를 드러내는 사실이 이상했다. 그가 그렇게까지 도덕적인 규율에 민감할 것 같지 않았다.

‘사촌보다 가까운… 근친혼인가?’

루시아는 더 깊이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그가 말하지 않은 일을 파헤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당신과 결혼이 내정된 여자가 있었겠군요.”

“죽었어. 그리고 가문에 그런 여자가 더는 없어. 타란 혈족에 남은 사람은 나와 데미안뿐이야. 그런 여자가 있다고 해도 자식 낳기 위한 결혼은 안 했어. 나를 끝으로 가문 혈통을 끊으려고 생각했으니까. 말했잖아. 저주라고. 이 저주받은 핏줄을 나로 끝내고 싶었어.”

루시아는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가문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강한 환멸을 갖고 있었다. 강철 같은 남자가 사실은 안쪽이 상처투성이였다. 루시아는 안타까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당신은 저주가 아니에요, 휴. 데미안처럼 사랑스러운 아이도 저주일 리 없어요. 당신이 세상에 존재해서 감사하고 있어요. 당신도 세상에 없었으면 절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당신도 당신을 사랑해 주세요.”

휴고는 자신의 얼굴을 감싼 그녀의 두 손 위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아마 그는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를 저주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녀 말대로 살아 있으니까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군요.”

“당신과의 아이가 싫어서가 아니야.”

“네, 알아들었어요.”

루시아는 멍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낳을 수 있으면 당신 아이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

루시아의 눈동자에 반짝 빛이 돌아왔다.

“아이가 싫다고 하셨잖아요.”

“지금도 싫어. 하지만 당신 아이는 괜찮아.”

“그 말씀은 만약 제가 우리 아이를 가졌으면 당신이 기쁘게 받아들였을 거라는 뜻인가요?”

“기꺼이. 진심이야.”

“믿어요.”

비록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그가 아버지가 될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이 루시아의 마음에 크게 와 닿았다. 자식이 싫다는 남자가 당신 아이면 좋다고 했다. 그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고마워요, 휴. 당신을 이해해요. 저는 괜찮아요. 아……. 그러면 데미안도 아이를 가질 수가 없겠군요. 그 애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 와중에 녀석 생각이 나?”

“당연하죠. 전 엄마라고요, 휴. 데미안에게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알아서 할게.”

루시아는 기운이 쭉 빠졌다. 포기했다고 생각했어도 아주 작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그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를 향해서 밝게 웃으려고 했다.

하지만 다 놓아버린 후련함과 어쩔 수 없는 서운함이 뒤섞여 눈물이 나왔다. 루시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애써 웃었다. 몹시 아파 보이는 그의 눈을 보자 루시아도 마음이 아팠다.

“미안해요.”

“왜 당신이 내게 사과를 해.”

휴고는 가슴이 저려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제가 너무 형편없이 약한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휴고는 탄식했다.

“난 당신보다 강한 여자를 본 적이 없어.”

휴고는 소리 없이 우는 루시아를 한참 안고 있었다. 형제의 죽음을 보며 자신의 무력함에 절망하던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 * *

평온한 나날이 빠르게 흘러갔다.

루시아는 티파티에 함께했던 귀부인들과 어울려 시내의 제과점에 들렀다. 새로 문을 연 제과점의 케이크 맛이 환상이라는 어떤 귀부인의 호들갑을 듣고 모두 혹해서 따라나서는 길에 루시아도 합류했다.

요 며칠 이상하게 단것이 자꾸 먹고 싶었다. 루시아는 제과점에서 케이크 두 조각을 먹어치우고 몇 조각을 더 포장했다.

돌아가는 길에 마차의 창문 밖으로 조금씩 눈발이 휘날렸다.

‘함박눈이 되지 않으면 좋겠는데…….’

눈이 쌓이면 마차가 달리기 어렵고 사고도 잦았다. 그가 오늘 늦게 들어온다고 해서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그는 왕이 새로 야심차게 구성한 행정기구 중부의 장을 맡으면서 더 바빠졌다. 자정 넘게 들어오는 날이 부쩍 늘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종종 혼자 먼저 잠자리에 들곤 했다.

평소 남편이 바깥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편이 아니지만, 며칠 전에는 때려치우고 싶다고 투덜거렸다. 그는 루시아가 ‘그만두세요. 당신하고 함께 있을 시간이 부족해요.’ 하고 맞장구 쳐주기 바라는 눈치였다. 모르는 척하자 혼자 구시렁거리던 그를 떠올리며 루시아는 슬며시 웃었다.

올해가 저물기까지 열흘 남짓 남았다. 루시아는 내일 있을 자선파티를 마지막으로 올해의 사교 활동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남은 연말 기간은 집에서 여유롭게 보내다가 신년 파티로 내년을 시작할 것이다.

‘벌써 올해가 끝나는구나.’

루시아는 소소한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수도 사교계의 1년을 뒤돌아보았다. 가장 큰 사건이라면 아무래도 셀리나 공주님이 태어난 일이었다.

어린 공주님은 왕 부부와 오라버니 셋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며 어여쁘게 자라고 있었다.

그다음 사건은 캐서린의 결혼이었다. 캐서린은 구혼을 받아들이고 몇 개월 만에 결혼했다. 루시아가 봤던 미래보다 1년이 이른 결혼이었다. 상대는 외국인이었다. 제논의 동맹국 후작으로 여러 국가에 작위를 가진 국제 거상이었다.

퀘이즈는 1년의 1/3은 제논에서 지낸다는 조건으로 작위를 내리고 결혼을 허락했다.

캐서린은 결혼 며칠 전에 루시아에게 말했다.

‘공작부인이 행복해 보여서 부러웠어요. 그래서 결혼하고 싶었어요. 나도 공작부인처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행복하실 거예요. 제가 기도하고 있어요. 언니.’

캐서린은 놀란 눈으로 루시아를 보다가 환하게 웃었다.

‘고맙구나, 비비안.’

캐서린은 결혼하고 남편을 따라 출국했다. 남편의 고국에서 지내다가 내년 늦봄에 들어온다고 했다.

루시아가 꿈으로 봤던 미래는 많이 바뀌었다. 캐서린의 부군이 되었을 앨빈 백작은 소피아와 결혼했다. 소피아와 결혼했을 데캉 후작은 후작부인이 죽은 후 아직 혼자였다.

루시아는 이제 더는 꿈속 기억을 떠올리지 않았다. 아주 가끔, 기억에 있는 사건이 일어나거나 어긋나는 일이 발생할 때 잠깐 생각하면서 혼자 웃곤 했다. 굉장히 선명했던 꿈속 기억이 점점 흐려진다는 기분도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루시아는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마차를 오래 타서 그런지 유난히 피곤했다.

“…비안!!”

정신을 일깨우는 강한 외침에 루시아는 눈을 번쩍 떴다. 막혀있던 숨이 갑자기 트이는 것처럼 호흡이 밀려와서 가쁘게 숨을 쉬었다. 주변 상황을 살피는 눈동자가 황망하게 흔들렸다.

강한 힘이 루시아의 등을 받혀 상체를 일으켜 어깨를 감싸 안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그녀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휴?”

그는 단단한 가슴과 강인한 두 팔로 루시아를 품에 가두고 서로 심장을 맞댄 상태로 등을 도닥였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괜찮다고 반복해서 속삭였다.

그제야 루시아는 자신이 오한이 드는 것처럼 떨고 있음을 알았다. 어두운 침실과 그의 품.

‘아아. 여기가 현실이구나.’

바닥없는 까마득한 아래로 추락하는 절망은 꿈이었다. 그게 꿈이고 지금이 현실이었다. 떨림이 서서히 가라앉고 잠옷을 흠뻑 적신 땀이 식어서 체온이 내려갔다.

“악몽을 꿨어? 몇 번 흔들어도 깨지 못하더군.”

“…네. 무서운 꿈이었어요.”

열두 살에 보았던 미래의 꿈이 다시 꿈으로 나타난 일은 처음이었다. 메튼 백작가가 멸문하던 날 밤의 기억이었다. 홀로 어두운 비밀 공동에 숨어 숨죽여 떨던 지독히 길던 시간. 왜 새삼 그런 악몽을 꾸었는지 모르겠다.

떨림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으나 덫에 걸려 죽다 살아난 토끼처럼 불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그는 심각한 눈으로 살폈다.

“의사를 부를까?”

“아니에요. 그냥… 조금… 놀라서 그래요.”

“물 가져다줘?”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휴고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화들짝 놀라 그에게 매달렸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지금은… 그냥 이대로…….”

“…가지 않을 테니까 진정해. 옷은 갈아입어야지. 그대로 있으면 감기 걸려. 하녀 부를게. 괜찮지?”

“…네.”

휴고는 줄을 당겨서 하녀를 불러 몇 가지 필요한 것을 가져오게 했다. 루시아에게 미지근한 물을 한 잔 먹이고, 따뜻한 물수건으로 땀에 젖은 몸을 닦아낸 후 마른 잠옷으로 갈아입혔다. 부모가 어린아이 돌보듯 서두르지 않으며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루시아는 행복했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았다. 현실이라 다행이지만, 또한 현실이라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에게 완전히 몸을 맡긴 채 루시아는 그가 눕히는 대로 천천히 침대에 누웠다. 그의 어깨를 베고 등에서부터 허리를 감은 그의 팔이 든든했다.

그의 입술이 정수리와 이마 눈가와 입술을 가리지 않고 부드럽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등을 천천히 더듬어 쓸어내리는 그의 손은 조용한 위로였다.

서서히 조금씩 잠이 밀려왔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그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가 귀에 뭐라고 속삭이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잠들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그의 체온을 느끼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루시아는 눈을 뜨자 바로 보이는 그의 수려한 옆얼굴을 황홀하게 바라보다가 몸을 움직여서 고개를 바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추었다. 눈을 뜨는 그를 보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도 웃으면서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당기며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잘 잤어?”

“네, 당신은요? 저 때문에 새벽잠을 설치셨잖아요.”

“충분히 보충할 만큼 잤어. 당신은 왜 내 오전 시간이 필요했지?”

“네……?”

“아침에 있어달라며.”

“아……. 그게…….”

속으로 생각한 줄 알았는데 입 밖으로 그걸 말했나 보다.

“잠투정이었나 봐요. 신경 쓰실 필요는 없었어요.”

“당신을 주치의한테 진료받게도 해야겠고.”

“진료라니요?”

“어젯밤에 내가 눕는 기척을 전혀 모르고 곤하게 자더군. 새벽에는 잠을 설치지 않나. 아무래도 당신 몸이 허해진 거야.”

루시아는 그가 유난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주치의를 부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 주치의는 꼼꼼하게 이것저것 물은 후 진료하고 아무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루시아는 그것 보라는 듯 남편을 흘겨보았다.

“말씀하신 피로함이나 단것이 드시고 싶었다는 증상은 대개 여인들이 월경 시작 전에 흔히 겪곤 합니다. 곧 달손님 기간이 다가오지는 않으십니까? 이런 월경 증후군을 겪으신 적이 전에는 없으셨는지요?”

두 달 전 새로 고용한 주치의는 아직 루시아의 무월경 증상을 알지 못했다. 주치의를 내보내고 루시아는 자신이 겪을 리 없는 증상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 월경을 다시 시작한 후에는 항상 집에 달콤한 간식을 떨어지지 않게 비치했던 것 같다. 그가 옆에서 추근거리자 생각을 미뤄두었다. 자꾸 가슴 안으로 파고드는 손을 떼어내며 루시아는 그에게 물었다.

“안 바쁘세요?”

“안 바빠.”

“그럼 저요, 침대에서 노닥거리는 거 해보고 싶어요.”

“흐음.”

휴고의 손이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들자 루시아가 화들짝 놀라 그의 팔을 찰싹 내리쳤다.

“그거 말고요! 침대에 누워서 차 마시고 간단히 아침도 먹고. 그렇게 늑장 부리고 싶어요. 당신하고 같이요.”

“나쁠 건 없지. 먼저 한 번만 하자.”

“한 번으로 안 끝내잖아요! 차 마실래요! 아침 먹고 싶어요! 침대에서!”

루시아가 완강히 거부하자 휴고는 항복의 표시로 끈덕지게 그녀 몸을 더듬어대던 손을 뗐다.

“알았어. 가져오라고 해. 당신이 그토록 마시고 싶은 차.”

루시아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하녀를 부르는 줄을 잡아당겼다. 휴고는 소풍 가는 아이처럼 들뜬 그녀를 심드렁하게 턱을 괴어 바라보았다. 맛나게 먹던 사탕을 빼앗긴 것처럼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아내는 여전히 뭘 모르는 아이 같다고 휴고는 생각했다.

대부분 귀족의 생활 방식은 밤늦도록 연회다 모임이다 바빠서 새벽에 잠들어 오전 늦게 일어났다. 침대에서 느긋하게 간단한 아침을 먹고 차를 마시는 일이 일상이었다. 그러나 그 일상이 타란 공작 부부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루시아의 사교 일정은 거의 낮과 오후였으며 늦어봤자 해 질 무렵이면 귀가했다. 휴고도 특별히 바쁜 일만 아니면 저녁에 귀가했다. 휴고의 기상 시간은 해 뜰 새벽 무렵이고 루시아는 오전에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다.

그러니 침대에서 늦은 아침에 식사할 기회가 없었다. 누구나 하는 일상이지만 정작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그걸 루시아는 해보고 싶었다.

은은한 차향이 침실에 가득 퍼졌다. 분주하게 하녀들이 움직이며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루시아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향을 음미했다. 쿠션을 등에 대고 편하게 그와 나란히 기대앉아 차를 마시고 싶었던 소원을 풀어서 그녀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오늘 늦으세요?”

“평소와 비슷해. 당신은?”

“오늘 가는 자선파티가 저녁에 끝날 거예요.”

“그럼 오늘 일정은 자선파티뿐인가?”

“그 전에 티파티 하나가 더 있어요.”

간단한 아침 식사를 차린 간이 테이블이 침대 위로 올라왔다. 벌꿀을 뿌린 신선한 과일, 팬케이크 등으로 먹음직스럽게 준비된 전형적인 아침 식사와 평소와 다른 우유 두 잔이었다.

“오른쪽은 우유를 공급하던 상인이 새로운 가공법을 이용한 신제품이라고 가져왔습니다. 가격 차이가 있지만, 전의 것보다 고소한 맛이 더해서 찾는 분이 많다고 합니다.”

루시아는 오른쪽 우유 잔을 집어 들었다. 한 모금 마시자 고소한 풍미가 입안에 가득 느껴졌다.

“당신도 한 번 맛보세요. 맛있어요.”

휴고는 흘끔 루시아가 내민 우유 잔을 보다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이면서 혀로 핥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개를 들어 어깨를 으쓱했다.

“우유 맛이군.”

루시아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노려보다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고용인들은 알아서 시선을 피하며 못 본 척하고 있었다.

공작가의 고용인들은 주인 부부의 어지간한 애정 표현에는 놀라지 않는 척이 아니라 정말 놀라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보는 눈이 많으니 뭐라 할 수도 없고, 루시아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어…때요? 바꾸는 게 나을까요?”

“당신 좋을 대로 해. 어차피 이 집에서 우유 마시는 아이는 당신뿐이니까.”

“…아이요?”

“아이잖아.”

픽 웃으며 대꾸하는 그를 향해 기가 막혀 눈을 흘겼다. 아까 하자는 걸 거절했다고 그는 심술을 부리고 있었다.

아이라고? 허리와 허벅지를 끈질기게 쓰다듬는 사람이 할 말인가. 다른 사람의 눈에 두 사람은 침대 위에서 사이좋게 붙어 앉아있는 것으로만 보이지만, 그의 한 손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루시아는 이불 속에서 더듬는 그의 손을 잡아서 떼어내고 그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이라면서요.”

휴고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으앗!”

휴고는 버둥거리는 그녀를 가볍게 진압하고 목덜미의 한 곳을 깨물고 빨아들이며 핥았다. 아프고 간지럽고 따끔거리면서 짜릿했다. 루시아는 몸을 움츠리며 끙끙거리다가 그가 놔주자 정신을 차렸다.

그새 두 사람만 남기고 고용인들이 모두 빠르게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눈치 빠른 고용인들은 두 분이 즐거운 시간을 가지라는 것처럼 간이 테이블까지 아예 침대 밑에 내려놓았다.

루시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만행을 비난하는 루시아의 눈빛에도 휴고는 꿋꿋하게 그녀의 목덜미에 남긴 진하고 붉은 흔적을 보며 만족해하고 있었다.

“왜 그래요. 정말!”

두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걸 심드렁하게 보던 그가 가뿐하게 그녀의 손목을 붙들어 위로 올리고 씩씩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삼키며 그대로 덮쳐 눕혔다. 포기를 못 하고 밑에서 버르적거리는 그녀 귀를 혀로 핥으면서 희롱했다.

“하지 마요!”

“싫어.”

약이 바싹 올라 눈을 마주치는 그녀를 보며 휴고는 즐거워했다. 장난 같은 분위기는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아……. 으응…….”

결합하여 뒤섞인 두 몸이 야한 율동을 만들었다. 늘씬한 두 다리가 튼실한 사내의 허리를 감아 그가 허리를 움직이는 대로 따라 흔들렸다. 비음이 섞인 교성이 끊어질 듯 말 듯 계속해서 이어지고 그의 입술은 끈질기게 그녀의 온몸을 탐했다.

시간을 알리는 햇살이 침실 안을 구석까지 밝혀놓았다. 아침의 밝음은 그녀 눈동자의 작은 흔들림조차 확인할 수 있어서 휴고는 만족스러웠다.

성기가 젖은 속살에 파묻히는 감각은 쾌감 그 자체였다. 그는 거칠게 호흡하며 그녀의 안을 비집고 들어갔다. 쫀득한 살점이 달라붙듯 감겨오는 느낌이 짜릿했다. 그는 거칠게 비비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교성에 흐느낌이 섞였다. 건드리면 좋아하는 그녀의 안쪽을 알고 있었다. 그쪽을 강하게 찔러주자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아침의 격렬한 정사로 오전 시간이 훌쩍 넘어갔다. 아침부터 기운을 뺐더니 온몸이 나른하게 늘어져서 루시아는 오늘 하루가 암담했다. 후희가 길어지자 슬그머니 걱정되었다.

“더는… 안 돼요. 준비해서 나가야 한단 말이에요.”

여전히 그는 결합을 풀지 않고 그녀의 몸 여기저기에 입술을 찍었다. 루시아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칭얼거렸다.

“휴.”

“알아들었어.”

마무리처럼 입맞춤을 하고 몸 안 가득하던 그가 천천히 빠져나가는 느낌이 선명해서 그녀는 흠칫했다.

“저녁에 데리러 갈게.”

“그렇게 늦지는 않을 거예요. 저택에서 멀지도 않은 걸요.”

대꾸 없이 그가 침대에서 내려가면서 가운을 걸쳤다.

루시아는 그를 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 앉아서 발치에 널브러진 잠옷을 주워 입었다. 많아 봐야 한 달에 두세 번 있는 저녁 일정이 생기면 그는 꼬박꼬박 데리러 왔다.

그가 데리러 오는 일이 싫어서가 아니다. 아니지만……. 갑자기 그의 손이 턱을 잡아서 들어 올려서 루시아는 움찔 놀랐다.

“번번이 오지 말라는 이유가 뭐야.”

마주친 붉은 눈동자가 차가웠다.

“저번에는 내가 분명 데리러 간다고 했는데 조금 늦었더니 집에 먼저 돌아왔지. 내가 가면 곤란한 일이라도 있나?”

그가 언짢아하는 기색이 확연해서 루시아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소문 때문에 그래요.”

“소문?”

루시아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특별한 자리가 아니면 부부 동반이 아닌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티파티 등 간단한 다과 사교 모임 외에는 외출하지 않았다. 드물게 저녁 모임이라도 있으면 꼭 공작이 데리러 왔다.

그래서 두 부부를 두고 슬금슬금 소문이 돌고 있었다. 정확히는 타란 공작을 겨냥한 소문이었다. 타란 공작이 의처증이 있어서 공작부인을 거의 감금하다시피 한다고 수군거렸다.

원래 소문의 당사자는 가장 늦게 아는 법이라서 루시아는 뒤늦게 누가 넌지시 농담처럼 말해 주어서 처음 알았다.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막혔는지 모른다.

의처증이라니! 감금이라니! 그 무슨 가당치 않은 소린가!

루시아는 사람이 북적이는 장소를 꺼렸다. 그래서 무도회에 잘 참석하지 않는 것이고, 가끔 늦으면 걱정하는 마음으로 남편이 데리러 오는 것뿐인데.

“어떻게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막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분해서 파르르 하는 루시아를 보며 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감금이라.’

할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러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의 머릿속을 읽었다면 루시아는 기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커먼 속내를 입 밖으로 꺼내는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않았다.

휴고는 근래 아내를 곁눈질해 대는 수컷들을 견제하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녀가 결혼한 유부녀이고 남편이 만만치 않은 명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뭇놈들이 그녀에게 접근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공작가를 건드리려는 음모 따위의 거대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로맨스로 연서를 주고받거나 가벼운 공개 데이트를 즐기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그 정도는 불륜으로 치지도 않았다.

루시아는 까맣게 모르는 사실이지만 꽃이나 서신 따위를 건네려는 꽤 많은 시도를 휴고가 모조리 중간에서 차단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괜히 집적대는 놈들을 다 자근자근 밟아놓고 싶었다. 그러나 고작 그런 일로 그런 짓을 했다가는 정말로 의처증 정신병자라고 사교계에서 낙인찍힐 것이다.

아내는 날이 갈수록 만개하는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얼핏 보면 순진해 보이다가 어떨 때는 농익은 여인 같고 어떨 때는 청초한 아가씨 같기도 했다. 최고의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하고 매력을 흘리니 시선이 모이는 것은 당연했다.

휴고는 그녀의 뒷목을 잡아 진하게 키스했다. 입술을 떼면서 흐려진 그녀의 눈을 보고 치미는 욕구를 간신히 참았다.

“하녀는 데려가는 거지?”

“항상 데리고 다니는걸요.”

“두 명.”

“네, 알아요. 두 명.”

건국절 파티 때의 사건 이후 루시아는 항상 하녀를 둘 데리고 다녔다.

“호위도 떨어뜨리지 말고.”

“알았어요.”

“조금 늦을지도 몰라. 기다리고 있어. 딴 놈하고 말 섞지 마.”

“아우, 잔소리.”

루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큰 규모로 열린 자선 파티였다. 루시아는 끊임없이 인사를 건네는 귀부인들에게 아는 척해 주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었다.

“공작부인, 그간 평안하셨어요?”

“백작부인, 오랜만이군요.”

글렌 백작부인은 모친의 병환으로 한동안 수도를 떠나 친정에 가있었다. 백작부인이 돌아왔다는 것은 모친의 병환이 나았거나 잘못되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고 후자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묻자 역시 백작부인은 흐릿한 미소로 대답했다. 루시아는 백작부인에게 위로를 전했다. 인사가 끝나고 백작부인은 제 옆에 있던 젊은 아가씨를 루시아에게 소개했다.

“고향에서 데려온 먼 친척 아이입니다.”

파크 남작의 딸 소니아라는 소개를 듣자마자 루시아의 표정이 굳었다.

‘그 여자다.’

꿈속에서 남편의 아내였던 여자. 고고한 표정으로 사교계에서 활동하던 공작부인을 루시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작부인.”

곱슬머리의 발랄하고 귀여운 미소를 가진 아가씨였다. 꿈속 기억보다 소니아는 수줍게 웃었다. 화려한 파티가 신기해서 눈을 못 떼며 사교 경험이 미숙한 태도를 드러냈다. 꿈속에서 파티장을 휘젓고 다니던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루시아는 손끝부터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메튼 백작을 마주쳤을 때도 이처럼 끔찍한 기분은 아니었다. 다른 미래였지만, 남편이 직접 선택해서 결혼한 여자였다.

꿈속에서 남편이 공작부인과 어떤 관계였는지 영원히 알 길은 없었다. 소문처럼 단순한 계약 결혼이었을 수 있고, 어쩌면 그보다 더 가까운 부부였을 수도 있었다.

현실에서는 벌어질 일 없는 미래일 것이다. 알면서도 루시아는 지독히 입맛이 썼다.

데리러 온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루시아는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

루시아는 고개만 내저었다. 이유 없이 괜히 그가 미웠다. 입을 열면 그에게 짜증을 낼 것 같았다. 자신이 아주 이상한 상태라는 자각은 있었다. 한숨 자면 좀 나을 것 같았다.

“피곤해요. 일찍 올라가서 잘게요.”

휴고는 평소와 다른 아내를 우선 내버려 두었다. 자고 일어난 후에도 계속 뾰족하게 굴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찬찬히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을 번쩍 떴을 때 사방이 어두웠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온몸이 마구 떨렸다. 그가 자신 앞에서 차갑게 몸을 돌려 가버렸다.

꿈이지만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자 날카로운 송곳이 심장을 찌르는 것 같은 통증으로 숨이 턱턱 막혔다. 더듬더듬 침대 위를 기어서 내려왔다.

‘그이를… 그이를 봐야 해. 어디지?’

루시아는 침실 문을 덜컥 열고 오직 그를 봐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달렸다. 누가 그녀를 부르는 것도 같았지만 제대로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집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어 가자마자 측면으로 마주한 책상에 앉아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가 놀라 돌아보는 얼굴을 확인하면서 다리에 기운이 빠져서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달음박질을 쳤던 호흡이 이제야 밀려왔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몇 번 가슴을 들썩이며 크게 숨을 몰아쉬는데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상체를 일으켰다.

“왜 그래?”

순식간에 다가온 그의 체취는 안도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루시아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휴고의 붉은 눈이 크게 흔들렸다. 강한 힘으로 그는 루시아를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야, 응?”

부드럽게 달래는 목소리였다. 루시아는 그의 가슴에 깊이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였다. 휴고는 품 안에서 그녀의 몸이 바들바들 떠는 것을 느끼며 안색을 굳혔다.

“의사 불러!”

우르르 달려와 어쩔 줄 모르며 서있는 고용인들을 보며 휴고는 짜증이 솟아 버럭 소리쳤다. 보이지 않는 제롬을 눈으로 찾다가 제롬이 일이 있어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품에 있던 루시아가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휴고는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의사를 부르지 말라고?”

그녀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고는 한숨을 내쉬다가 그녀의 맨발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옷차림도 그리 두껍지 않은 잠옷만 입은 채였다.

모여있는 자들에게 물러가라 손짓하며 그녀를 보듬어 안아 들어 올렸다. 그녀를 안아 소파에 앉아서 담요를 덮어주고 여전히 그의 품에 고개를 묻고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단단한 팔이 자신의 등을 품으로 누르며 가볍게 토닥토닥 두드려준다. 편안한 압박을 느끼며 루시아는 반쯤 나갔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그런데 다시 흐르는 눈물을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휴고는 눈물로 축축해진 루시아의 볼과 눈시울에 계속 입을 맞추었다. 루시아는 가슴의 통증이 더해지는 것 같아서 몸을 웅크렸다. 눈물은 계속 났다. 아직도 꿈의 잔상이 남아 그녀를 괴롭혔다.

날 버리지 마요! 아아, 정말 죽을 것 같아!

루시아는 밖으로 터지지 못하는 비명을 지르며 가슴을 움켜잡았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말을 해야 알지. 비비안. 울지 말고. 왜 그러는지 말을 해봐.”

가라앉은 휴고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루시아는 그의 품에 고개를 묻고 계속 울기만 하다가 기운이 빠져서 잠이 들었다.

휴고는 아내를 침실로 데려가 눕히려 했으나 불안한 것처럼 그의 옷을 꽉 쥔 그녀의 손을 굳이 풀고 싶지 않았다.

서류를 침실로 가져오라고 지시해서 아내를 한쪽 팔로 가슴에 기대게 안고 다른 손으로 서류를 들어 내용을 살폈다.

늘어져서 그에게 푹 기대고 있던 그녀의 몸에 미세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고 아직 잠이 덜 깨었는지 그녀가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렸다.

루시아는 얼굴을 기대고 있는 곳이 침대가 아니라 그의 가슴이라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생각의 속도가 매우 느리게 돌아갔다.

머릿속이 멍해서 시선을 들어 서류를 읽고 있는 그를 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시선이 마주쳤다. 붉은 눈동자가 따스한 빛을 띠며 그가 루시아의 입술에 키스했다.

“…이상한 꿈을 꿨어요.”

“무슨 꿈?”

“당신 집무실로 달려가서…….”

말을 하면서 루시아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집무실로 달려간 것은 꿈이 아니었다. 휴고는 한숨을 쉬면서 서류를 내려놓았다.

“집무실로 달려가는 꿈을 꾸기 전에 더 나쁜 꿈을 꿨어? 무슨 꿈인데?”

부드럽게 어르는 그의 말투와 목소리는 루시아의 바짝 조이는 가슴 어딘가 답답함을 풀어주었다.

“…당신이.”

“내가?”

“…바람피웠어요.”

“…….”

말로 꺼내자 루시아는 다시 가슴속에서 울컥 뭔가가 치솟았다.

“절 버렸어요. 그 여자에게 갔어요.”

목소리가 떨려오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앞이 흐려져서 눈을 깜빡이자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비비안.”

그의 촉촉한 혀끝이 흘러내린 눈물을 따라 눈시울을 핥았다. 휴고는 그녀를 침대로 눕히면서 그 위로 올라 팔꿈치로 몸을 디디고 가깝게 시선을 마주쳤다.

“사랑해.”

루시아는 그의 짧은 한마디가 제멋대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을 순식간에 평정하는 작은 기적을 경험했다.

“저도… 사랑해요.”

“내가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할 만한, 그런 실수를 했어?”

“…꿈속에 나온 여자가 가슴이 컸단 말이에요.”

휴고는 투정처럼 중얼거리는 루시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그가 가슴 큰 여자 좋아 했다는 소리를 그녀에게 지껄인 게 누군지 알기만 하면 갈아버리고 싶었다.

그가 여자의 큰 가슴을 좋아하는 것은 독특한 취향이라기보다는 그냥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의 가슴이 좋은, 그런 단순한 의미였다.

절대 그녀 이외의 여자가 눈에 들어온 적이 없고 가슴에 눈길을 준 적도 없었다.

“난 당신 가슴을 좋아해.”

나직한 속삭임에 붉어지는 얼굴은 그의 손이 잠옷을 파고들어 가슴을 쥐자 더 붉어졌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이렇게 조금만 만져도 곤두서고.”

그는 가슴 둔덕을 주무르다가 손가락으로 유두 끝을 잡고 부드럽게 빙글 돌렸다.

“혀로 핥아주면 바들바들 떨 정도로 민감하고.”

휴고는 그녀의 가슴을 드러나게 해서 살짝 쥔 채 유륜을 따라 혀로 핥다가 약간 강하게 콱 깨물었다. 움찔,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반응했다.

“당신 가슴을 참 좋아하긴 하는데.”

그의 무릎이 루시아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그의 허벅지가 그녀의 은밀한 곳에 바짝 닿았다. 동그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더 할 수 없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솔직히 여기가 더 좋아.”

휴고는 자꾸 꿈틀거리는 그녀의 두 팔목을 한 손으로 잡아 위로 눌러 고정하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팬티 안쪽을 들어가서 손가락 끝으로 다리 사이 꽃샘을 문질렀다.

촉촉하고 끈적한 액체로 젖어들기 시작하는 안쪽이 그의 손가락이 들어오는 것을 부드럽게 허용했다.

“벌써 이렇게 젖고. 나야말로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당신 몸이 너무 야해서.”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그가 희롱하는 말에 약이 오르면서도 오싹오싹했다. 손목을 누르고 있던 그의 손은 어느새 사라졌지만, 루시아는 여전히 눌리고 있는 것처럼 욱신거려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잠옷이 위로 말려 올라가고 팬티가 벗겨졌다. 그의 두 손이 허벅지를 잡아 열고 그 사이를 빤히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아!”

뜨거운 것이 아래에 닿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비처에 입을 맞추더니 빨아들였다. 그의 혀끝이 안으로 파고든다. 루시아의 허리가 저절로 튀어 올랐다.

“아! 아흣…….”

그의 입술이 더 강하게 움직이며 그녀의 몸에서 흐르는 물을 빨아들이고 그가 혀끝을 세워서 그녀의 내부를 드나들었다. 순식간에 루시아의 눈앞이 점멸하고 절정을 느낀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가 고개를 들어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면서 그녀를 보고 웃었다. 루시아는 도저히 눈을 뜨고 그를 볼 수가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릴 것처럼 쿵쿵거렸다.

휴고는 몸을 일으켜서 바지를 내렸다. 이미 단단히 일어나서 튕겨 나오는 중심을 쥐어 그녀의 작은 주름에 맞추고 단번에 허리를 밀어 올렸다.

“흑…….”

루시아의 몸이 크게 한 번 펄떡거렸다. 몸을 꽉 채우는 그가 너무 커서 숨이 막혔다.

휴고는 신음 섞인 탄성을 흘렸다. 가만히 넣기만 하고 있어도 갈 것 같았다. 아내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꿈을 꾸었다. 이 몸을 두고 바람을 피운다고? 녹아버릴 것같이 뜨겁고 좁은 이 안쪽을 대신할 것이 과연 있기는 할까.

휴고는 천천히 그리고 점점 속도를 높여가며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장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몇 가지 일이 있기는 한데 이미 머릿속에서 날아가버린 지 옛날이었다.

그의 것을 쥐어짜며 파도를 타는 속살이 주는 자극을 느끼고 가느다란 신음과 흐느끼는 교성을 들으며 그는 정수리 끝까지 열이 올라서 어질어질했다.

그녀의 뜨거운 내벽은 마치 그의 심장을 감싸는 것 같았다. 육체적 쾌감을 넘는 충족감에 그는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루시아는 그의 품에서 신음하다가 어느 순간 시야가 암전되는 것처럼 기억이 없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그가 루시아를 등 뒤에서 모로 끌어안고 목덜미를 타고 입맞춤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뒤에서부터 그녀의 안을 채우고 있는 그의 중심이 부드럽고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온몸이 나른한 와중에 은근하게 내부를 문지르는 그의 움직임에 작은 신음이 나왔다. 허리를 감은 그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가고 가슴을 쥔 손가락이 움직였다.

“좀 진정됐어?”

그가 귀를 깨물며 귓불을 빨아들였다. 느릿하지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한층 유혹적이었다. 그의 손이 집요하게 가슴을 쥐고 주물렀다. 루시아는 아까 제가 한 투정을 떠올리며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꿈속의 내가 한 짓 때문에 비난받는 건 아무래도 억울하군. 설마 평소에 날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거야?”

“아니에요. 제가… 이상한 억지를 부렸어요. 미안해요.”

정신이 좀 들고 나니까 루시아는 자신이 부린 추태가 몹시 부끄러웠다.

말도 안 되는 억지투정이었다. 자선파티에서 그 여자를 보고 그렇게 민감하게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 화풀이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꿈속과 다르게 많은 사람의 인연이 바뀌는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지금 그의 아내는 그 여자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당신, 괜찮아? 자꾸 꿈자리가 안 좋은 것 같은데.”

“그러게요.”

생각해 보면 며칠 사이에 부쩍 짜증도 늘어난 것 같았다. 어제는 별것 아닌 일로 하녀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루시아는 평소 자신이 변덕스러운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의 급격한 기분 변화가 당황스러웠다. 어디 아픈 것은 아니고 기분 문제라서 루시아는 이걸 몸의 이상으로 봐야 하는지 아닌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아…….”

뭉근하게 안을 건드리는 그의 움직임에 루시아는 앓는 것처럼 희미하게 신음을 흘렸다. 엉덩이에 그의 허벅지가 마주 붙은 자세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그는 안을 휘젓는 것처럼 둥글게 허리를 움직였다. 짜릿할 정도로 격하지는 않은데 온몸이 늪에 빠진 것처럼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당신이 날 믿지 못하다니. 충격이 커.”

“…잘못했어요.”

“아니야. 내 노력이 부족했어.”

휴고는 그녀의 몸을 엎드리게 하며 위에서 타고 눌렀다.

“앞으로 더 노력할게. 당신이 날 믿을 때까지.”

그가 말하는 노력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루시아는 소리쳤다.

“믿어요. 믿는다고요!”

루시아는 믿는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을 수십 번은 하고 나서야 그에게 한참 시달리고 기진맥진해서 풀려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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