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장 Ever after (5)
주군이 변했다.
“당분간 이 마을을 진지로 삼겠다.”
“예. 주군.”
반짝거리는 눈으로 주군을 바라보며 가장 큰 목소리로 외치는 보리스를 보면서 딘은 생각했다. 보리스는 이번 북부 토벌에 참가한 기사 중에서 가장 어렸다. 그리고 야만족과의 전투를 훌륭히 소화했다.
감정 표현이 많지 않은 엘리엇 단장이 아들의 성장을 흡족해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리고 보리스의 표정에는 가문의 기사로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이라는 자긍심이 가득했다.
보리스가 첫 출격의 충격을 추스르기 쉽지 않을 거라는 딘의 예상을 깨뜨렸다. 주군이 변했기 때문이다.
주군은 야만족과의 전투를 주로 지휘만 했다. 예전처럼 정예 기사만 데리고 무차별적 살육을 하지 않고, 국경을 지키는 기사들도 합류하게 해서 전쟁을 수행했다. 기사들을 불러 모아 전략을 짜고 다양한 전투 방식을 활용했다.
공작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야만족과 싸우는 기사들은 굳은 각오로 전투에 임하고, 뿌듯한 성취감을 누렸다.
‘만약 일시적 변화가 아니라면…….’
딘은 바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정예 기사만 공유하는 어둠이 이제 사라지는 건가. 보리스가 새로운 정예의 시작이 되겠군.’
휴고는 이번 야만족 토벌을 이전과 다른 식으로 진행했다. 적당히 수만 줄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뭉치기 시작하는 부족을 흩어놓고 세력을 줄이고 이간질했다. 되도록 많은 기사를 동원해서 다양한 작전을 수행했다. 뒤처리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빠르게 해결해서 어서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목표를 최우선으로 했다.
그리고 이전처럼 야만족을 봐도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피를 보고 싶다는 살육에 대한 욕구는 아내를 안고 싶다는 갈망에 비하면 성가시기만 했다.
국경 근처의 마을은 항상 야만족 약탈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어서 기사에게 협조적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위험하면서도 마을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고향에 대한 끈질긴 집착 때문이었다.
노인들이 다 죽어 없어질 즈음이면 젊어서 마을을 떠난 자들이 나이 들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했다.
외진 마을에는 언제나 버려진 빈집이 있었다. 개중에 그런대로 튼튼한 집을 하나 골라 대충 청소하고 사령부로 삼았다. 그래 봤자 먼지나 치우고 회의할 널찍한 책상 하나 마련한 것뿐이지만, 휴고는 원래 반지르르한 겉치레를 따지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들어온 보고 전문을 읽는 중에 기사가 들어왔다.
“주군, 마을 의사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마을 의사가 왜.”
“필립이라는 이름을 전하면 아실 거라고 했습니다.”
휴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닌다더니 공교롭게 여기 머물고 있는 줄은 몰랐다. 별로 반갑지 않은 얼굴인데 보지 말까 하다가 피할 이유는 뭐가 있나 싶었다.
“들여보내.”
기사가 잠시 후 필립을 데리고 들어왔다. 휴고는 기사를 내보냈다. 허름한 차림의 필립이 정중히 허리를 숙이는 모습을 말없이 보았다.
“무슨 용건이야.”
“가까이 계시는데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럴 것 없어. 피차 얼굴 봐서 좋을 것 없으니 모르는 척 살자고. 용건 끝났으면 꺼져.”
필립은 유심히 휴고를 살폈다.
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함을 표했다. 자신의 얼굴을 이렇게 대놓고 빤히 보는 인간은 늙은이밖에 없었다.
“끌어내라고 할까?”
“변하셨군요.”
“…뭐?”
“절 보는 눈이 그전과 다르십니다. 전에는 죽일 것처럼 살기를 보이셨지요.”
휴고는 항상 늙은이가 지껄이는 개소리에 기분 좋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늙은이 말에 ‘그런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늙은이를 보면서 예전만큼 속이 뒤틀리고 구역질이 날 것 같지 않았다.
필립은 휴고가 가진 모든 악몽의 흔적이었다. 자신이 더럽고 끔찍한 괴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매개체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끔찍하지 않았다.
“변하시면 안 됩니다. 진정한 북부의 주인으로서 냉정하고 비정해지셔야 합니다. 도련님이야말로 진정한 타란 혈족의…….”
휴고는 한숨 쉬며 읽던 전문으로 시선을 내렸다. 역시 늙은이는 입만 열면 헛소리였다.
“나가.”
“…마님께서는 평안하십니까?”
휴고의 붉은 눈동자가 핏빛으로 선명하게 짙어졌다. 필립이 바라던 대로 살기를 뿜으며 휴고는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더러운 주둥이에 담지도 마. 네놈이 관심 가질 이유가 없어.”
“단지 저는 마님께서 지니신 병증이 아직도 여전하신지 의사로서 염려하는 마음입니다. 지금이라도 필요하시면 치료법을…….”
“필요 없어.”
휴고는 기사를 불러서 끌고 나가라고 명령했다. 기사의 손에 잡힌 채 필립은 계속 떠들었다.
“전 당분간 이 마을에서 머물 생각입니다. 혹시 마님을 치료하기 위해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불러 주십시오.”
휴고는 무시했다. 필립은 밖으로 나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저를 찾으실 날이 올 겁니다.”
휴고는 코웃음 쳤다. 저 늙은이는 만나고 나면 뒤끝이 안 좋았다. 다음에는 절대 보지 말아야겠다.
“주군. 급보입니다!”
기사가 급히 들어왔다. 기사가 건네는 작은 나무통은 수도에서 온 소식이라는 표식을 달고 있었다. 휴고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서둘러 전언을 꺼내 읽었다.
길지 않은 전언을 읽고 휴고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놀라 굳어있는 기사에게 명령했다.
“칼리스……. 엘리엇 경을 불러와. 당장!”
* * *
사흘이 지났다. 광견 크로틴이 저지른 엄청난 사건은 빠르게 수도 사교계에 퍼졌다. 귀족들은 좀처럼 발생하기 어려운 사건을 향해 쥐떼처럼 몰려들었다. 사람이 둘만 모이면 모두 같은 내용을 화제로 삼았다.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큰일이라고 말하면서 모두 남의 집 불구경처럼 즐겼다.
로이는 살인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로이가 체포를 거부하고 달아나면 어쩌나 싶어서 출동한 왕실기사들이 긴장했으나 뜻밖에 순순히 포승줄에 묶였다.
캐서린 공주의 개인 휴게실은 범죄 현장이 되어 철저하게 관계자 이외의 출입을 막고 조사단이 수없이 드나들었다.
루시아는 그날 사건의 진상을 채 알지 못하고 빠르게 귀가했다. 궁 밖에서 기다리던 호위들이 파티장으로 들어와 우선 귀가해야 한다고 청하는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귀가한 이후 다시 한 번 주치의에게 몸 상태를 점검받고 공작저에서 사흘 내내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공작저 주변은 물 샐 틈 없이 삼엄한 비상 경비 중이었다. 공작이 수도를 떠나기 전에 호위대장은 비상사태의 전권을 위임받았다.
마치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공작저는 철저한 보호 상태에 있었다. 몇 번 궁에서 공작부인을 참고인으로 부르려 했으나 공작부인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공작께서 자리를 비우신 중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공작부인만 홀로 입궁할 수 없습니다.”
호위대장의 단호한 거절을 전달받고 왕은 다소 언짢아했다. 그래도 방법이 없었다. 공작부인을 데려오려면 공작저를 보호하는 기사들과 싸워야 하고 그건 타란 공작가와의 전쟁이었다. 퀘이즈는 절대 타란 가문과 척을 질 생각이 없었다.
파비안은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고 즉시 공작에게 급전을 날렸다. 이후 새로운 정보를 얻을 때마다 추가 전언을 보냈다. 공작이 수도에 도착할 무렵에는 자신이 파악한 진상을 공작도 모두 알 수 있도록 조처했다.
현재 타란 가문 정보부는 치열하게 정보를 수집 중이었다. 돈을 아끼지 않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활용했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오늘 파비안은 공작저에 들어왔다. 그간 상황을 마님께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마님께서 식사도 제대로 못 하시고 주무시지도 못 한다고 이러다 큰일 난다고 제롬이 자꾸 보내는 전언을 무시할 수 없었다. 주군께서 돌아오시면 후폭풍을 생각건대 로이 목숨보다는 마님의 건강이 더 중요했다.
파비안은 어젯밤 왕의 특별한 배려를 얻어서 아무도 모르게 몰래 로이를 만나고 올 수 있었다.
로이는 지하 감옥 독방이 휴양지라도 되는 것처럼 느긋했다. 바닥에 옆으로 길게 누워서 팔로 고개를 지지하고 있다가 파비안을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여. 왔소?’
파비안은 갑자기 혈압이 솟구쳐서 이를 악물었다.
‘미친놈아! 왔소? 그래, 왔다! 남은 이렇게 밤낮없이 뛰게 해놓고 넌 뭐가 그리 태평이야?’
‘그럼 울까?’
‘으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내가 너 언젠가 이런 사고 칠 줄 알았다. 쳐도 어지간한 일을 저질러야지. 빌어먹을 놈.’
파비안은 로이에게 실컷 욕을 퍼부었으나 로이는 창살 너머에서 지루한 표정으로 귀만 후볐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더 부아가 나서 파비안은 제 가슴을 두드려야 했다.
로이는 체포된 날부터 지금까지 사건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왕이 파비안을 들여보내 준 것은 조금이라도 설득해서 사건 진상에 관한 정보를 내놓기 바라는 마음이었다.
형식상으로는 흉악한 범죄자로서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으나 그런 것치고 로이는 별다른 험한 대우를 받지 않았다. 아직 본격적인 문초도 없었고, 어디 한 군데도 상한 곳 없이 지하 감옥에서 제때 나오는 밥을 먹으며 잘 지내고 있었다.
‘얘기해 봐. 주변에 듣는 귀 없는 거 확인했으니까.’
로이는 당시 자신이 본 상황 그대로를 파비안에게 가감 없이 전달했다. 정보를 듣고 추리하고 상황을 끼워 맞추는 일은 파비안이 할 일이었다.
‘데이빗은 왜 죽였어? 목숨만 붙여놨어도 이 지경으로 암담하지는 않단 말이다.’
‘살려두면 후환이 되겠더라고. 죽여도 탈이고 살려도 탈이면 죽이는 게 낫지.’
‘잔인한 새끼. 짐승 새끼. 너 같은 놈이 지금껏 햇빛 아래 자유롭게 활보했다는 게 끔찍하다. 이 새끼야.’
파비안은 또 분을 못 이겨 씩씩대다가 말을 이었다.
‘백작부인은 왜 그렇게 증인들 많은 곳에서 대놓고 죽인 거야? 혼자 충분히 몸 뺄 수 있었잖아. 그것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하게 넌 현행범이 됐다고.’
‘그러라고 한 건데.’
‘뭐?’
‘내가 죽였다는 증거를 보여야 다 내가 죽였다고 믿지. 나 혼자 미친 짓한 것처럼 보여야 주군이랑 마님이랑 연결이 안 될 거 아냐.’
이놈은 미친놈이지만, 머리 좋은 미친놈이라고 파비안은 생각했다.
‘주군 밑에는 제대로 정신 온전한 놈이 없어.’
파비안은 제 얼굴에 침 뱉는 한탄을 했다.
‘그 여자는 입 열기 전에 무조건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어. 우와. 근데 되게 신기하데. 그 여자가 죽자마자 모습이 변하는 거 있지. 그건 어떻게 된 거야?’
파비안은 끄응, 신음하며 답했다.
‘마도구야. 라미스 공작가 소유지. 지금은 공작가에서 도둑맞았다고 발뺌하고 있지만.’
죽은 팔콘 백작부인에게 대단히 수상한 점이 많아서 우선 로이를 놔두고 왕실에서는 백작부인 조사에 집중했다.
라미스 공작가에서 잃어버렸다고 주장하는 마도구를 이용해서 시녀 행세를 하고, 캐서린의 휴게실을 무단 사용했으며, 손에 낀 반지에서는 독극물이 나왔다.
이미 죽어서 자백을 받을 수 없으나 백작부인의 저택이며 사업이며 가릴 것 없이 탈탈 털리고 있었다.
‘너 지금 가장 큰 죄가 뭔지 알아?’
‘사람 죽인 거잖아.’
‘그래. 딴사람은 몰라도 공작가 후계를 죽인 일은 문제가 크지. 그것도 그거지만 백작부인 죽일 때 왜 네 무기를 쓴 거야. 넌 허락받지 않고 왕궁으로 몰래 무기를 반입한 거라고. 왕의 시해 미수 혐의를 쓸 수 있단 말이다.’
로이는 턱을 긁적이다가 말했다.
‘그냥 습관적으로…….’
‘…그냥 죽어라.’
파비안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루시아는 급히 침실에서 내려왔다. 근심이 가득한 루시아의 얼굴은 며칠 사이에 까칠해졌다. 파비안과 응접실에 마주 앉아 루시아는 다급하게 물었다.
“크로틴 경은 만나봤나요? 무사한가요?”
‘그놈은 무사하다 못해 아주 잘 놀고 있습니다. 그놈한테 죽은 목숨이 여섯이라고요.’
“예. 별 이상은 없습니다. 지하 감옥의 환경이 그리 좋지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적응하고 있습니다.”
루시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날 캐서린 공주가 로이를 살인범으로 지목했을 때 놀라움보다는 안도감이 컸다. 살인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라는 소리는 최소한 로이가 무사하다는 말이었다.
“크로틴 경은 어찌 되는 거지요?”
루시아는 로이가 데이빗과 팔콘 백작부인을 죽였다는 사실 외에 자세한 정황을 알지 못했다.
자신의 얼굴에 이상한 약을 뿌린 시녀는 마도구로 외모를 바꾼 팔콘 백작부인이었다고 나중에 들었다. 휴게실에 함께 들어갔던 하녀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하녀의 신상에 나쁜 일이 생겼다고 짐작만 했다.
로이에게 죽은 자는 여섯이지만, 그중 화장실에 있던 여자 둘과 기사 둘의 죽음은 수사에 관여한 사람만 알고 있었다.
특히 여자 둘은 중독 상태였고, 죽은 백작부인에게서 독이 발견되어서 로이는 아직 두 사람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고 있었다. 사교계에 퍼진 소문은 데이빗과 아니타, 두 사람을 로이가 죽였다고 되어있었다.
“아직 수사 중입니다.”
“크로틴 경이 살인했다고 결론이 나면 사형을 당할 거예요. 다른 사람도 아닌 공작가 장남을 죽였어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내가 입궁해서 증언하겠어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
“그건 안 됩니다. 마님.”
제롬과 파비안이 동시에 입을 모았다.
“크로틴 경이 왜 지금까지 자기 변론도 없이 입을 다물고 있는지 헤아리셔야 합니다. 마님께서 나서면 마님도 사건의 당사자가 되십니다.”
공작가 하녀의 죽음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로이는 공작부인의 호위였으나 워낙 그동안 미친 짓을 해온 전적이 있어서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였다.
누구도 이번 사건에 공작부인을 연결 짓지 않았다. 그리고 캐서린 공주가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에 공작부인이 자신과 함께 있었다고 증언했다. 덕분에 아예 루시아는 이번 사건에서 배제되었다.
철통의 보안 속에서 저택 안에서 꼼짝하지 않는 것도 평소 활동이 많지 않은 공작부인의 성격으로 미루어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광경을 목격한 귀부인들 여럿이 기절해서 실려 나갔다. 공작부인도 호위기사의 흉악한 짓에 큰 충격을 받았을 거라고 사람들은 이해했다.
파비안은 로이가 모든 관련자를 다 없애버렸기 때문에 아무리 수사를 면밀히 들어가도 로이만 입 다물면 어디서도 공작부인이 거론될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다.
‘미친놈이지만 녀석 방식대로 진짜 깔끔하게 해치우긴 했지.’
파비안은 로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만약 공작부인이 나서서 상황을 반전시키면 주군께서 돌아오시는 날이 자신의 제삿날이라고 생각했다.
‘전 오래 살고 싶습니다, 마님.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고요.’
“마님, 답답하시겠지만 주군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급히 전갈을 보냈고 이미 오고 계시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그럼 나는 이대로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건가요? 그사이에 크로틴 경이 처형되면 어떡해요. 라미스 공작가에서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으니까 염려 놓으십시오.”
왕은 로이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태자 시절에 로이 덕분에 목숨을 건진 적이 꽤 있었다. 분명히 타란 공작이 올 때까지 제대로 취조에 들어가지 않고 시간을 끌 것이다.
정치적인 이득에서도 황혼을 바라보는 라미스 공작보다 한창 젊은 타란 공작과 일을 도모할 미래가 훨씬 길었다.
“크로틴 경같이 좋은 사람이 나를 도우려다 이런 일에 휘말리다니. 크로틴 경이 작정하고 사람을 죽였을 리가 없어요. 라미스 백작이 날 해칠 것 같다고 판단한 크로틴 경이 과하게 대처하다가 사고가 났을 거예요.”
루시아의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눈물이 고였다. 곁에서 재빠르게 제롬이 건네는 손수건을 받아 눈가를 눌렀다.
파비안은 미묘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놈은 미친놈이라고 말할 수 없는 심정이 답답했다.
‘어지간히도 마님께 잘 보였군.’
“자세한 진상은 주군께서 돌아오시면 풀어가실 겁니다. 마님께서 대충 당시 정황을 제게 말씀해 주시긴 했지만, 크로틴 경이 입을 다문 상태라서 아직 정확한 경위를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당분간 답답하셔도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알았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거군요.”
“마님께서 무탈하신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파비안은 로이에게 욕에 욕을 퍼붓고 나왔지만, 마음 한 편에 잘했다는 생각도 있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라미스 백작과 공작부인이 함께 있는 장면을 말 많은 귀부인들이 목격하는 상황을 가정하면 정말 식은땀이 났다.
공작부인을 둘러싼 추문으로 사교계는 들썩일 것이고, 귀환하신 주군 손에 한둘이 죽을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로이는 여섯의 목숨을 앗고, 다른 생목숨을 구했다.
* * *
휴고는 전권을 칼리스에게 일임하고 바로 수도로 출발했다. 중간 중간 말을 갈아타면서 최대한 속도를 내어 쉬지 않고 달렸다. 게이트에서 거리가 멀리 떨어진 최북단이라 게이트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닷새가 걸렸다.
수도 게이트에 도착하자마자 휴고는 다시 말을 몰고 저택으로 달렸다. 복잡한 거리를 질주하는 말 때문에 마차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거리가 혼잡해졌다.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도록 공작 뒤를 멀찌감치 따르는 기사들이 수습했다.
말이 저택 바로 앞까지 도착해 휴고는 말에서 뛰어내려 바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하인이 집사에게 달려가 전했다. 제롬이 서둘러 업무실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2층으로 올라가는 주인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다.
의욕이 조금도 없었다. 루시아는 침실 소파에 기대앉아 멍하게 있었다. 제롬이 자꾸 권해서 뭔가 먹기는 했지만, 뭘 먹었는지 맛을 모르겠다. 루시아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그날의 상황이 반복해서 재생했다.
쓰러지는 하녀, 자신의 얼굴에 뭔가 뿌리는 여자와 눈이 마주친 짧은 순간에 여자의 얼굴에 가득하던 증오와 승리감, 잠시 의식이 끊기고 깨어났을 때의 현기증과 라미스 백작과 드잡이하던 크로틴 경, 나가라고 소리치는 크로틴 경의 목소리.
‘그 여자가 팔콘 백작부인이었다고.’
마도구를 이용해 모습을 바꾸면서까지 대체 무슨 짓을 하려 했던 것일까. 파비안은 아마 공작부인과 관련한 추문을 만들려던 시도 같았다고 말했지만, 루시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짓을 해서 대체 백작부인에게 도움 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루시아는 사람 마음속의 추악한 비틀림을 공감할 수 없었다. 꿈속에서 많은 고생을 했어도 남을 탓해서 격렬한 증오를 불태워본 적이 없었다.
‘…죽었겠지.’
하녀가 어찌 되었는지 자세한 말을 아끼는 눈치였다. 지금껏 소식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죽었을 것이다. 아마 그때 쓰러질 무렵에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루시아는 백작부인이 왜 자신은 해치지 않았는지가 오히려 궁금했다.
루시아는 뜨거워지는 눈을 감았다.
‘가여운 사람이 죄 없이 죽었구나.’
루시아는 하녀의 죽음이 마음 아팠다. 일부러 특정 하녀를 총애하지 않지만, 그 하녀는 우직하고 성실해서 마음에 들었다.
꿈속에서 하녀로 일한 경험 때문인지 한낱 고용인의 죽음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억울한 개죽음이었다. 가족들은 어디다 하소연도 하지 못할 것이다.
고용인이라도 공작가에 소속된 이상 공작가 사람이었다. 루시아가 지켜 주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자신이 무능력한 것 같고, 미안하고, 딸, 혹은 누이를 잃은 가족들의 아픈 마음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갑자기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루시아는 놀라서 눈을 떴다. 침실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을 보며 루시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를 보며 그에게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두어 걸음을 내딛기 전에 이미 그가 빠르게 다가와 품으로 끌어안았다.
“휴……?”
정수리 위에서 나지막한 그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너른 품에 안겨서 그의 팔에 단단히 감겨서 그리운 그의 체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꿈이면 깨고 싶지 않았다.
“다친 곳은?”
선명한 그의 목소리는 환상이 아니었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서 휘청하는 루시아를 그가 부축했다.
휴고는 힘이 빠지는 아내의 몸을 안아서 소파에 앉혔다. 제 몸에 기대게 하고 한쪽 팔로 허리를 감싸 당겨 안았다. 한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쓸어 올리고 젖어들기 시작하는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휴, 크로틴 경이…….”
“알아. 당신은 어떻지? 기절했었다며. 주치의 진료는 받았어?”
“잠시 정신을 잃게 하는 마취약 같은 거라고 했어요. 전 괜찮아요. 다친 곳도 없어요. 근데 저 때문에 크로틴 경이…….”
울기 시작하는 아내의 고개를 품으로 안으며 휴고는 등을 토닥여 주었다. 집까지 달려오는 내내 주체할 수 없었던 불안이 그녀의 무사함을 확인하자 씻은 듯이 사라졌다.
수도에서 전해온 로이의 짤막한 사고 소식을 접하자마자 휴고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아내였다.
사고가 일어난 장소와 죽은 자들의 정보를 접하면서 휴고의 걱정은 점점 커졌다. 호위 중에 일어난 사고였다. 호위 대상인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수도까지 무슨 정신으로 달려왔는지 모르겠다.
전언 내용에 아내가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온갖 불길한 상상에 괴로웠다. 만약 그녀의 손끝이라도 상했다면 관련자를 남김없이 다 죽여 버리겠다고 분노에 차있었다.
“그만. 비비안. 울지 마.”
“어떡해요. 크로틴…….”
“내가 알아서 할게.”
휴고는 그녀의 턱을 잡고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눈물로 젖어 짭짤한 입술에 키스했다.
“얼굴이 상했군. 밥은 제대로 먹었어?”
“저는 괜찮아요. 저택에서 보호만 받았는걸요.”
“그건 당연한 거야.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잘 먹고 잘 자라고 말했지.”
“그건 이런 일이 생기기 전이었잖아요.”
“언제든 다 똑같아. 당신이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
루시아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의 말대로 아무 걱정할 일이 없고 모든 일이 잘될 것만 같았다. 전전긍긍하며 잠 못 이루며 뒤척거린 며칠간 쓸데없는 고생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사건이 벌어진 날 이후 루시아는 처음으로 웃음 지었다.
“당신 손이 차요. 얼굴도 차고.”
“말을 타고 달려오느라. 너무 차가운가?”
“시원해서 좋아요. 머릿속도 맑아지는 것 같아요.”
휴고는 헤실헤실 웃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양 볼을 감싸 쥐고 입술이며 콧등이며 눈가며 마구 키스하기 시작했다.
“휴… 휴! 왜 그래요.”
“확인 중.”
“무슨 확인이요?”
“정말 당신이 내 앞에 있는지 확인 중이야. 며칠 내내 수도로 오면서 눈 감으면 보였다가 눈을 뜨면 사라지더라고.”
휴고는 루시아가 그만 하라고 몇 번을 말하는데도 들은 척하지 않고 수십 번을 여기저기 입술을 붙이고 난 후에 놓아주었다.
“가신 일은 어떻게 된 거예요? 중요한 일이었잖아요.”
“거긴 알아서 하라고 맡겨놓고 왔어. 여기 더 큰 일이 터졌잖아.”
루시아는 시무룩하게 풀이 죽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크로틴 경을 도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요.”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그보다 뒷수습할 사고 한번 치라고 했더니 아주 크게 쳐주셨군.”
루시아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가 이전에 했던 말을 떠올리고 그에게 소리치며 그의 가슴을 내리쳤다.
“지금 그런 농담이 나와요?”
그는 키득 웃으면서 재빠르게 그녀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했다.
“그 정도로 별일 아니라는 거야. 속 끓이지 마.”
“정말 당신에게 방법이 있는 거죠?”
“있어. 녀석은 무사할 테니까 염려 마.”
“크로틴 경은 당신에게 특별한 사람이잖아요. 크로틴 경이 다치면 당신도 마음이 아플 거예요. 당신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휴고는 피식 웃으면서 두 팔을 크게 벌려 루시아를 안았다.
이상했다. 로이를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 했어도 의미를 부여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자꾸 말하니까 정말 녀석이 그런 존재처럼 느껴졌다.
“당신을 다시 봐서 기뻐요. 휴, 보고 싶었어요.”
휴고는 예쁜 말만 골라서 하는 아내의 입술에 다시 키스했다.
루시아는 오랜만에 보는 남편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그의 품에 기대서 소소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잠들었다. 사건 이후 계속 새벽까지 뒤척이는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그가 돌아와서 모든 긴장이 다 풀어졌다.
잠든 아내를 침대에 제대로 눕히고 휴고가 2층에서 내려왔을 때 이미 도착한 파비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파비안은 보고서를 올렸다. 휴고는 이미 오는 중에 계속 정보를 받아서 상황을 대략 파악하고 있었다. 두 연놈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이 유일하게 아쉬웠다. 살아 있었으면 겪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통을 선물로 주었을 것이다.
사건이 벌어진 날로부터 일주일이 훌쩍 지났다. 사건 즉시 휴고가 있었으면 어떻게 해서든 무마할 방법을 찾았을 텐데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다.
로이가 저지른 짓은 아예 기정사실이 되어서 소문을 수습하기엔 늦었다. 왕의 처남인 라미스 백작의 죽음은 사람들 관심에서 쉬 멀어질 화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이번 사건이 어떻게 해결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두 공작가의 전쟁으로 번지는 것 아니냐고 섣부른 추측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어려운 이유는 공작부인을 철저하게 배제하기 때문이었다. 휴고는 이번 일 어디에서도 아내가 언급조차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사교계 소문은 평생 따라다니는 꼬리표였다. 데이빗과 아니타가 공작부인을 해하려고 모의했다는 증거를 세워서 해결하면 아내가 받을 상처가 너무 컸다. 사람들이 온갖 추측성 발언으로 그녀를 짓밟을 것이다.
“녀석을 빼낼 방법은?”
“여러모로 검토했습니다만, 불가입니다.”
로이는 자기 변론은 물론 당시 상황도 설명하지 않았다. 자신의 죄를 정당화할 어떤 이유도 내세우지 않았다. 상황을 설명하려면 공작부인을 반드시 거론해야 하기 때문에 로이는 절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찌해야 할까.’
휴고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떠올렸다. 오히려 데이빗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공작가 장남의 죽음을 정당화할 죄라면 반역밖에 없었다.
‘안 돼. 왕이 협조하지 않을 거야.’
규모가 너무 컸다. 반역으로 몰고 가자면 증거는 만들면 그만이었다. 마침 좋은 먹잇감이 있었다. 데이빗이 자금을 지원하는 청년회 조직을 얼마든지 나라를 뒤집을 역당으로 포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데이빗은 라미스 공작가의 후계였다. 데이빗의 반역은 라미스 가문의 반역이고 데이빗 혼자 죽어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주변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라미스 공작가는 동지만큼이나 정적이 많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져 공작가의 패망으로 끌고 갈 것이다. 그러면 왕비와 왕자들까지 줄줄이 엮일 것이다. 끝이 없었다.
현재 라미스 공작가는 피해자였다. 라미스 공작은 왕의 장인이자 오른팔이었다. 퀘이즈가 아들을 잃은 라미스 공작이 억울하게 반역을 뒤집어쓰도록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빼돌릴 수는 없을까……?’
로이의 방면은 불가능하다고 전제하고 빼돌리는 방법도 있었다. 이 방법은 반드시 라미스 공작가와 척을 지게 되어있었다. 왕이 찬성하지 않을 것이며 결국은 왕에게 맞서는 일이었다.
왕과 싸울 일이 겁나지는 않았다. 북부에는 그만한 저력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명분이다. 전쟁에 임하는 자에게 사기를 불어넣으려면 그들이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기꺼이 타란 가문을 위해 용감히 싸울 것이다.
흉악한 살인죄를 저지른 공작가 기사 하나를 구하고자 전쟁을 시작하면 겉으로 따르는 척해도 승복하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는 필패였다.
수도에 발붙이지 않고 아예 북부에 틀어박혀 지내는 방식을 취한다고 해도 퀘이즈가 가만히 봐주지 않을 것이다. 퀘이즈는 등 뒤에 적을 내버려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언제가 되든 불안요소는 반드시 제거했다.
휴고는 제 한 몸은 언제든 지킬 수 있으나 아내는 약했다. 언제 어떤 빈틈으로 파고들까 봐 평생 마음을 졸이며 살 수 없었다. 아내에게 못 할 짓이었다.
로이를 구하려면 왕의 협조가 필요했다. 휴고는 팔짱을 끼고 등을 기대고 앉아서 장고에 장고를 거듭했다.
주군의 결정을 기다리는 파비안은 숨을 죽이고 서있었다. 파비안은 공작이 어떻게 이번 일을 해결할지 궁금했다.
아무리 고민해도 로이는 버리는 패로 쓸 수밖에 없었다. 공작가 후계를 죽인 일을 기사 하나 버려서 수습할 수 있다면 남는 장사였다.
집무실이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침묵으로 조용했다.
“입궁하겠다. 가서 폐하께 독대를 요청한다고 말을 전해라.”
“예. 전하.”
파비안이 먼저 궁으로 떠나고, 잠시 후 휴고도 궁으로 향했다.
휴고는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입궁했다. 어차피 타란 공작이 돌아온 사실은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금방 알려지겠지만, 가능하면 모든 일을 조용히 처리하는 편이 좋았다.
“허어. 공은 날아온 건가? 얼마 전까지 국경에 있었다더니.”
퀘이즈는 휴고를 보자마자 유쾌하게 말했다. 매사 지나치게 진지하지 않은 점은 퀘이즈가 쓰고 있는 가면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늘 비슷한 태도를 보이면 속내를 읽기가 어려웠다.
“돌아오자마자 불미스러운 일로 뵙게 되는군요.”
“어쩔 건가?”
긴 이야기 할 것 없이 퀘이즈는 본론부터 꺼냈다. 사태가 무르익어서 손 쓸 여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껏 지하 감옥에 가둔 로이를 건드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퀘이즈는 충분한 성의를 보였다. 왕비는 눈물바람이고 장인은 매일 찾아와 서운함을 표했다.
조사한 정황은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팔콘 백작부인이 왜 라미스 공작가 소유의 마도구를 가지고 있었는지, 왜 귀부인들을 캐서린의 휴게실로 몰고 갔는지, 시녀는 옷을 훔치려고 죽였다 쳐도 공작가 하녀는 왜 죽였는지 의문점이 많았다.
데이빗과 모종의 협의가 있었다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었다. 무슨 일을 꾸미고자 했는지도 불분명했다. 백작부인의 집이며 사업이며 모두 털어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주점에 데이빗이 자주 들렀다지만, 그건 죄가 아니었다.
라미스 공작가에서는 마도구를 도둑맞았다고 주장했으며 백작부인과의 관련성을 철저히 부정했다. 영지에 내려가있던 데이빗은 건국절을 집에서 보내라는 부친의 특별한 배려로 올라왔고 순수하게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입궁했다고 주장했다.
관련자들은 로이가 모조리 죽였고, 유일한 당사자 로이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라미스 공작가의 주장을 반박할 증거가 없었다. 데이빗은 억울하게 살해당했고, 로이는 흉악한 살인범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안 좋지. 크로틴 경이 뭐라도 말해야 끼워 맞추지. 그것도 늦었어. 인제 와서는 어떤 말을 해도 뒤집기 틀렸다고. 그나마 라미스 공작가에서 데이빗의 죽음을 타란 공작가의 계획적인 음모로 몰고 가지 않는 것만도 많이 참고 있는 거네. 장인의 요구는 간단해. 크로틴 경을 법에 따라 처형해 달라는 거지. 그거면 넘어가겠다고 했네. 오히려 아들의 죽음 앞에서 대단히 냉철한 태도를 보여서 짐이 놀랄 지경이야.”
“…….”
“크로틴 경의 방면은 힘들어. 크로틴 경이 검을 갖고 있었다는 점도 문제야. 처남을 죽인 일을 어찌어찌 넘기면 장인은 그 문제를 걸고넘어지겠지. 짐을 시해하려는 목적이라고 주장해서 여론을 모으면 정치적 논란으로 비화하여 타란 가문도 휘말려. 짐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네.”
아직 왕의 반 세력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지금, 왕의 가장 큰 힘 둘이 서로 맞서면 적에게 빈틈을 보이는 꼴이었다. 그 지경으로 진흙탕 싸움이 되느니 퀘이즈는 로이를 처형하는 방안을 택할 것이다.
“대체 크로틴 경은 왜 그런 건가? 사건과 관계없이 그냥 궁금해서 잠이 안 오는군.”
“녀석을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지하 감옥 독방은 이중 구조로 되어있었다. 돌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사방을 돌벽으로 만든 방이 있고, 창살로 벽을 세운 또 하나의 방에 죄수를 가두었다. 어찌어찌 창살 밖으로 빠져나왔다 해도 돌문 밖을 지키고 있는 기사를 상대해야 했다. 위험한 범죄자를 가두기 위한 감옥이었다.
로이가 위험인물이 맞기는 하지만, 퀘이즈가 로이를 독방에 둔 것은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였다. 라미스 공작가에서 원한을 갚으려고 죄수를 암살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돌바닥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있던 로이는 돌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며 일어났다. 돌문이 닫히고 두 사람만 남았다.
“상한 데는 없고?”
“멀쩡해요.”
로이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주군의 첫 질문이 안위를 묻는 것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 상황은 파비안에게 전해 들었다. 말하지 않은 일이 있나?”
“없소. 주군 참 빨리 왔네요.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로이는 어쩌면 주군이 오기 전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 죽소?”
로이는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덤덤하게 물었다. 데이빗을 죽이면서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놈의 목을 꺾으면서 어차피 죽음을 각오했다.
아니타를 죽인 것은 처음부터 의도했던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휴게실로 들어서는 시녀를 보자마자 죽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로이의 판단은 옳았다. 만약 아니타가 살아서 잡혔다면 온갖 거짓말로 공작부인을 음해했을 것이다. 루시아는 꼼짝없이 사건 관련자로 묶여서 온갖 추측과 소문의 중심에 놓였을 것이다.
휴고는 인상을 썼다.
“안 죽어.”
휴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네 목을 지키려면 네 명예는 버려야겠다. 네 목보다 명예가 중요하냐?”
“명예?”
로이는 히죽 웃었다.
“그런 껍데기는 가져본 적도 없소.”
휴고는 피식 웃었다.
“그럼 됐다. 조금 더 고생해라.”
휴고는 로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짧게 던지듯 말했다.
“잘했다.”
로이는 히히 웃다가 돌아서는 휴고를 불러 세웠다.
“이만하면 은혜 갚았소?”
휴고의 눈에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나갔다.
“너…….”
히죽거리는 로이를 보던 휴고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게 다시 목숨 빚을 질 테니까 갚으려면 멀었지.”
“우와, 내가 왜 이 지경이 되었는데. 진즉 사기꾼이라는 걸 알았을 때 도망갔어야 했어.”
탄식처럼 주절거리는 로이의 말을 뒷등으로 들으며 휴고는 독방을 나갔다. 그리고 지하 감옥에서 나오면서 파비안을 불러 은밀하게 지시했다.
“사형수를 찾아라. 로이와 비슷한 체격과 머리색을 지닌. 체격이 첫 순위다.”
파비안의 눈이 반짝 빛났다. 대답으로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움직였다. 휴고는 멀어지는 파비안의 뒷모습을 보다가 저만치 보이는 내궁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왕과 협상을 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