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57화 (58/77)

57장 Ever after (4)

파비안은 건국절 늦은 밤까지 일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줄어드는 휴식 시간만큼이나 늘어나는 수당을 두고 파비안과 그의 아내 앨리스의 희비가 엇갈렸다.

감시하는 주인의 눈이 없으면 파비안은 더 바빴다. 주인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큰일이라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오늘도 안 왔군.’

며칠째 미루어진 수하의 보고서가 신경을 건드렸다. 비밀스러운 임무는 돌발 상황이 많아서 계획이 소용없었다. 보고서 날짜가 며칠 어긋나는 일 정도는 종종 있었다.

그런데 감시 대상이 데이빗이라는 점이 자꾸 걸렸다. 주인과 비교하면 우스워 보여도 데이빗 정도면 거물급 귀족이었다. 더구나 수도와 달리 영지는 데이빗의 영역이었다.

‘두 명을 붙일 걸 그랬나. 이쪽은 별일이 없는데…….’

다른 수하가 올린 팔콘 백작부인 감시 보고서의 결론은 ‘특이사항 없음’이었다. 요즘은 팔콘 백작부인의 동선만 파악하고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정에서 어긋나지 않으면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 백작부인은 매일 주점을 돌며 운영에 관심을 쏟았다.

‘아예 주점 여주인으로 자리 잡을 작정인가. 과도하면 사교계에서의 평판이 바닥을 칠 텐데.’

백작부인의 평판이 어찌 되건 알 바 아니었다. 그러나 파비안은 백작부인을 싫어하는 감정과 별개로 그 여자가 절대 멍청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요즘의 행보를 보면 대체 무슨 생각인지 궁금했다.

파비안은 여전히 데이빗이 주점을 드나드는 이유를 알아내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한 번 꼬리를 붙들면 몸체가 드러날 때까지 절대 놓지 않는다. 이것이 파비안이 일하는 방식이었다.

데이빗이 밀실에서 백작부인과 단둘이 나눈 말은 알 수 없었다. 부족하나마 종업원을 매수해서 조각조각 데이빗이 내뱉은 말을 주워 모았다.

데이빗이 술김에 두어 번 타란 공작부인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는 말을 듣고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그래서 다방면으로 알아보다가 데이빗이 마님께 연서를 건네려다 거절당한 사실을 알아냈다.

‘미친놈. 감히 누굴 넘봐.’

놈이 마님께 괜한 수작질을 하다가 이상한 추문이라도 번지면 주군의 노여움이 폭발할 것이다. 아랫것들은 언제나 상전의 심리 상태에 지대한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파비안은 부르르 떨었다.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문을 두드린 수하가 들어와서 짤막하게 보고했다. 데이빗이 발족한 청년회 모임을 현재 이끌고 있는 해리를 감시 중이었다. 수하는 저녁에 잠깐 데이빗이 해리를 만나고 갔다고 보고하러 왔다.

“뭐? 그자가 표적을 만나러 와?”

“중요한 대화는 없었습니다. 그저 짧게 근황을 묻는 정도…….”

“놈들이 무슨 얘기를 했건 그게 문제가 아니야. 지금!”

‘데이빗이 지금 수도에 있다고? 이런 멍청한 녀석!’

파비안은 데이빗에게 붙여둔 수하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많은 수하를 돌리다 보면 가끔 터무니없는 사고가 터지곤 했다.

파비안은 당장 수하들을 소집했다. 잡혀있을 녀석의 소식을 파악하고 빼낼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라미스 공작이 벌써 불렀을 리는 없고 대체 수도에는 왜 온 거지? 건국절 파티에 오려고? 겨우 그런 일로?’

파비안은 가진 모든 정보를 취합해서 다양한 가능성을 만들었다.

‘건국절 파티라면 데이빗과 백작부인이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가 되겠군. 하지만 은밀한 만남은 주점이 더 낫지. 굳이 파티에서 만날 필요가 있나?’

파비안은 갑자기 등 뒤가 서늘했다.

‘파티에는 마님도 가셨어.’

예감이 좋지 않았다. 로이가 지키고 있으니까 별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로이에게 사람을 보내 주의를 환기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파비안은 서둘러 궁으로 사람을 잠입시켰다.

* * *

외모를 바꾼 아니타는 시녀의 옷을 입은 채 휴게실에서 나갔다. 데이빗에게 불려갔다가 다시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안에서 나오는 낯선 시녀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타는 선수를 쳐서 기사들에게 심각한 낯으로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대체 왜 자리를 비우셨나요. 지금 안에 공주님이 들어계세요. 기사는 어디 갔느냐고 몹시 화를 내셨어요.”

기사들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재수도 오지게 없지. 잠깐 사이에 공주님이 오실 줄 알았겠나.

대체 라미스 백작이 자기들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도움을 받을 일이 있다더니 붙들고 이상한 잡소리만 줄줄 하다가 됐으니 가보라고 했다. 라미스 백작의 핑계를 댔다가 백작이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면 거짓 변명을 했다고 더 치도곤을 당할 것이다.

기사들은 억울했다. 화가 나면 보통이 아닌 캐서린 공주님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공주님은 분명 근위대장을 불러 난리를 칠 것이고, 근위대장은 자기들을 불러 공주님에게 깨진 화풀이를 할 것이다. 눈앞이 노랬다.

“그래서 제가 대충 둘러댔거든요.”

“어떻게 말이오?”

지옥에 빠진 것 같았던 기사들의 안색이 확 살아났다.

“안에 들릴지도 모르니까 이쪽으로.”

기사들은 주저 없이 아니타의 뒤를 따라갔다. 기사들이 문 앞에서 멀어져서 시선이 돌아간 틈을 타고 숨어있던 데이빗이 재빠르게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다.

“근위대장님의 부름을 받은 것 같다고 공주님께 말씀드렸어요.”

“공주님께서 이해하시던가?”

“노기는 조금 풀리셨어요. 근위대장님을 불러서 진위를 확인하실 것 같지는 않아요. 나중에 꼭 공주님께 용서를 빌고 죄를 구하세요.”

“후우, 정말 고맙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언제부터 일하기 시작했나?”

“공주님을 모신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들은 기분 좋게 인사를 나누었다. 위기를 넘기자 기사들은 제법 고운 시녀의 미색에 눈길이 갔다. 일면식이 없는 사이인데도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예쁘기까지 했다. 기사들은 아니타에게 상당한 호감을 품었다.

아니타는 수작을 거는 기사의 말을 적당히 받아주며 눈웃음을 쳤다. 그리고 다시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며 싸늘한 눈으로 픽, 웃었다. 아무튼, 사내란 것들은.

데이빗은 휴게실 안에서 서성거리다가 들어오는 아니타를 보며 움찔했다.

“정말… 백작부인이오?”

“예. 제가 맞아요.”

“허. 정말 다른 사람 같군. 가문의 마도구이지만 실제 사용한 것은 처음 보았소.”

“저도 라미스 공작가 마도구의 신비한 힘에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어찌할 셈이오?”

“제가 시녀인 척 공작부인을 이리로 모셔 오겠습니다.”

“그사이에 다른 누군가 들어오면 어쩌오? 공주님이라도 오시면…….”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기다리세요.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아니타는 절대 휴게실을 나오지 말라고 데이빗에게 당부했다. 그리고 벗어둔 자신의 드레스를 챙겨서 휴게실을 나갔다. 그녀는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저는 공주님 명으로 공작부인을 모시러 가요. 공주님은 공작부인과 중요한 이야기를 나눈다고 절대 안으로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어요.”

“알겠네.”

드레스를 팔에 걸쳐서 이동하는 시녀를 수상하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간혹 음식물로 더럽혀 도저히 드레스를 그대로 입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귀부인들은 급히 드레스를 공수하곤 했다.

아니타는 복도를 따라 걷다가 주변을 살피고 사람 눈을 피해서 창고로 쓰는 방에 드레스를 던져 넣었다.

아니타는 캐서린 공주의 시녀에게 접근했다.

“폐하께서 조용히 공주님을 찾으십니다. 매우 다급한 용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왕비 마마를 급히 뵈어야 해서 가 보겠습니다.”

“알겠네. 그런데 자네는 어디 소속…….”

본 적이 없는 시녀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으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캐서린의 시녀는 제 말만 하고 가버린 안면이 없는 시녀의 태도가 괘씸했으나 왕이, 그것도 다급히 찾는다는 전언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타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서 캐서린을 지켜보았다. 시녀가 캐서린에게 다가가서 귀엣말을 건네고, 캐서린이 자리를 뜨는 모습을 확인했다. 멀리서 뒤를 밟아 캐서린이 탄 마차가 내궁으로 출발하는 것까지 보고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공작부인의 하녀에게 접근했다.

“공주님께서 공작부인과 조용히 나눌 말씀이 있다고 하시네.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다고 공작부인께 말씀을 전해주시게.”

하녀의 귀엣말을 듣고 루시아가 귀부인들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공주의 휴게실로 향하는 복도로 나가자 시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타는 공작부인의 뒤에서 따라오는 로이를 흘끔 보고 고개를 숙였다.

“공주님께서는 급한 일로 잠시 잠시를 비우셨다. 자네가 전한 명이 틀림이 없는가?”

“공주님께서 폐하를 뵈러 가기 전에 급히 공작부인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폐하께서 공주님을 찾은 용건과 관련 있다고 하셨습니다.”

캐서린은 내궁으로 가기 전에 루시아에게 왕을 뵙고 온다고 살짝 귀띔했다. 시녀가 그것을 알고 있자 루시아는 시녀의 말을 믿었다. 의심은커녕 오히려 마음이 다급해졌다. 왕이 공주를 찾은 용건이란 혹시 전쟁터에 있는 그와 관련한 소식은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가세.”

아니타가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적이 드문 복도를 따라 걸었다. 파티장의 왁자한 소란은 이미 저만치 멀어졌다.

휴게실에 도착하자 아니타는 기사들에게 눈웃음을 보였다. 엄숙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면서도 기사들의 입술 끝이 올라갈 듯 말 듯 경련했다.

기사들은 안으로 들어가려는 아니타와 언제든 출입을 허락한다는 공주님의 지시를 받은 공작부인을 당연히 제지하지 않았다.

아니타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문을 닫는 척 자연스럽게 일행의 뒤쪽으로 쳐졌다. 짧은 복도를 지나고 하녀가 중간 문을 열었다. 공작부인이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재빨리 하녀의 손을 꽉 붙들어 독침을 찔렀다.

의아한 눈으로 아니타를 돌아보던 하녀가 빠르게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니타는 일부러 짧게 비명을 질렀다.

“어머나!”

루시아가 다급히 다가와서 쓰러지는 하녀를 부축했다. 아니타는 하녀를 부축하는 척하다가 슬그머니 손에서 힘을 뺐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품에서 향수병을 꺼냈다.

“공작부인.”

아니타는 고개를 드는 루시아의 얼굴을 향해 향수를 뿌렸다. 향수병에 든 내용물은 빠른 시간에 정신을 잃게 하는 마취약이었다. 루시아가 상황을 파악하고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그녀는 하녀를 부축한 채 그대로 주저앉아 의식을 잃었다.

모든 일은 아주 짧은 순간에 벌어졌다. 아니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흥분한 나머지 숨이 가빴다.

“아… 아니. 대체. 어쩌자고 이런…….”

데이빗이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데이빗은 이번 일을 가벼운 마음으로 응했다. 그저 휴게실에서 기다리다가 공작부인과 만나기면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이런 식으로 공작부인에게 실질적인 위해를 가할 줄은 몰랐다.

“더구나 화장실 안에 쓰러져있는 여자는 또 뭐고?”

데이빗에게는 아니타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휴게실 내부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화장실에 속옷 차림으로 쓰러져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옷을 빌리려고 잠시 재워 두었습니다. 공작부인도 잠시 정신을 잃은 것뿐입니다. 도와주세요. 공작부인이 깨어나기 전에 소파로 옮기고 하녀는 안 보이도록 치워야 합니다.”

데이빗의 마음에 갈등이 일어났다.

‘일이 너무 커지는 것이 아닌가.’

이번 일로 자신에게 일어날 어떤 손해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공작부인과의 소문.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타는 망설이는 데이빗의 표정에서 비겁함을 읽었다. 어차피 데이빗의 배포가 고작 그 정도라는 것은 알고 있어서 실망하지 않았다.

데이빗뿐이겠는가. 사내란 족속은 다 그랬다. 제 잇속만 챙기려 들고 조금만 불리하다 싶으면 발을 빼면서 겉으로는 호방한 척 큰소리쳤다.

‘그분은 안 그랬지.’

아니타의 눈에 잠깐의 아련함이 스쳐 지나갔다. 타란 공작. 그 남자만큼 겉과 속이 같은 남자를 만나보지 못했다.

그는 여자의 몸을 취하려고 거짓으로 애정을 속삭이지 않았다. 대놓고 네 몸만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남자의 애정은 바라지도 않았다. 몸뿐만이라도 만족할 수 있었는데.

공작부인을 흘끔 보는 아니타의 눈빛이 스산했다. 이 여자 때문이다.

‘이대로 물러날 수 없어.’

어쩌면 자신은 이번 일에서 완전히 빠져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데이빗이 끝까지 비밀을 지켜준다는 의리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데이빗이 물러나면 시작한 일을 마무리도 못하고 혼자 옴팡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다. 데이빗이 조금이라도 관련되어야 벗어날 틈도 있었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여기서 그만두시렵니까? 저는 각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텐데 참 안타깝군요.”

데이빗의 성격을 봐서 밀어붙여서는 오히려 역효과였다. 아니타는 모든 결정권을 데이빗에게 준다는 것처럼 물러났다.

‘혼자 내빼겠다고? 그렇게는 못 하지.’

아니타는 손바닥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아예 다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데이빗도 죽이고 공작부인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마무리하겠다.

시녀에게 독침을 찌르는 순간부터 그녀는 세상이 가로막은 모든 금기를 다 벗어던졌다. 그건 엄청난 해방감이었다. 살아오면서 꾸역꾸역 쌓였던 마음속의 어둠이 꾹 눌려있다가 단번에 터져 나와서 그녀를 삼켰다.

“음. 여기까지 와서 비겁하게 도망가지는 않겠소.”

데이빗은 중대한 결심이라도 하듯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요사스럽게 웃는 아니타를 보지 못했다. 아마 봤다면 당장 이 휴게실을 박차고 도망가고 싶을 만큼 섬뜩함을 느꼈을 것이다.

“잠시 정신만 잃는다는 말은 사실이오?”

“사실입니다.”

“공작부인에게 해가 가지는 않겠지?”

공작부인에게 미치는 해가 자신에게 돌아올까 봐, 그런 걱정이 데이빗의 진심이었다.

“그럼요. 공작부인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습니다.”

아니타의 눈빛에 감돌던 살기가 자취를 감추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공작부인에게 뿌린 약은 정말 잠시 정신을 잃게 하는 마취약이었다. 하녀와 화장실에 쓰러져 있는 시녀는 아마 죽을 테지만, 그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로이는 휴게실로부터 떨어진 부근에서 벽에 기대섰다. 앞을 지키는 기사들한테 다른 출입문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오래 걸리시려나.’

호위 대상이 눈에 당장 보이지 않으면 찜찜했다.

‘30분만 기다리고. 마님이 무탈하신지 확인해야지.’

저만치에서 다가와서 로이의 앞을 지나가는 시종이 손짓으로 서로 아는 신호를 보냈다. 로이는 자연스럽게 휴게실에서 좀 더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봐, 너. 이리 와.”

저만치 가던 시종이 부름을 받고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로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휴게실을 지키는 기사들 방향으로 등을 돌리고 서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주의 인물이 있습니다.”

로이는 기사들도 다 들으라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가서 뭐 먹을 것 좀 가져와.”

“라미스 백작, 팔콘 백작부인. 두 사람이 혹시 마님께 접근하는지 주의 깊게 살피라는 전언입니다.”

휴게실 문이 열리고 시녀가 나왔다. 시녀는 기사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로이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왔다.

“가져오라는데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이곳에서 술을 드시면 안 됩니다.”

술을 가져오라고 억지를 부리는 기사와 요구에 따르기 곤란해서 쩔쩔매는 시종의 모습이었다. 악평이 자자한 로이라면 충분히 할 만한 행동이라서 아니타는 의심하지 않고 그들의 곁을 지나갔다.

로이는 여자가 앞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뭐야, 이 냄새.’

익숙한, 그러나 불쾌한 냄새. 같은 냄새를 가진 여자를 알고 있다. 그런데 저렇게 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시녀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로이는 집요하게 눈으로 좇았다.

“…누구? 데이빗하고 뭐?”

“팔콘 백작부인입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여자라 이거지.”

로이는 중얼거리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벽에 비스듬히 기댄 몸을 세우고 곧바로 휴게실을 지키고 선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기사들은 갑자기 다가온 로이를 경계했다.

드잡이할 시간이 없었다. 판단을 마친 로이는 양 주먹에 힘을 넣어 주저 없이 양쪽 기사의 복부에 꽂아 넣었다.

“컥!”

다짜고짜 공격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기사들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로이는 그들의 뒷목을 내리쳐 기절시켰다. 로이는 쓰러지는 기사들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시종 차림의 남자에게 턱짓했다.

“문 열어.”

남자는 입을 쩍 벌리고 있다가 얼른 문을 열었다. 로이가 안으로 들어가자 남자는 주변에 본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후 뒤따라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로이는 입구에 두 기사를 내팽개치고 중간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로이는 눈을 부릅떴다. 마님은 소파에 눈을 감고 기대 누웠고, 그 곁에 데이빗이 엉거주춤 서있었다.

생각보다는 행동이 빨랐다. 로이는 순식간에 데이빗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쥐었다.

“마님께 무슨 짓을 한 거야!”

“컥!”

목이 눌려서 데이빗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로이는 약간 힘을 풀었다. 안색이 시뻘게진 데이빗이 제 멱살을 잡은 로이의 두 손을 떼어내려고 힘을 주며 인상을 썼다.

“이 무도한 놈이!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로이는 오히려 멱살을 쥔 채로 흔들면서 사납게 윽박질렀다.

“마님께서 조금이라도 다치셨으면 넌 내 손에 죽는다.”

“공작부인은 무사……. 컥.”

“네놈이 한 짓이냐?”

“아… 아니……. 잠시 정신을 잃……. 이… 이거 놓고…….”

“이 새끼야! 마님께서 왜 정신을 잃어!”

데이빗은 계속 로이가 멱살을 잡고 흔들자 아예 입을 꾹 다물었다. 로이는 씩씩대다가 놈의 말을 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손에 힘을 풀었다. 그래도 데이빗이 보란 듯이 눈을 마주치며 입을 꾹 다물자 로이는 짜증스럽게 멱살을 놔주었다.

데이빗은 몹시 성난 표정으로 구겨진 옷깃을 정리했다.

“너 여기서 뭐 하고 있는지 말 안 해?!”

“무례한 놈! 내가 누군 줄 알고!”

“네놈이 누구건 상관없어. 설명해.”

“네놈이 뭔데?”

데이빗은 코웃음 쳤다.

“나? 마님의 호위지. 그리고 마님께 해를 끼친 놈은 무조건 내 손에 죽어.”

살기등등한 로이의 표정을 보며 데이빗은 움찔했다. 이 무식한 놈이라면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일을 저지르기에 충분했다. 사교계에 자자한 악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난 공작부인을 뵈러 왔을 뿐이다.”

“네놈이 왜?”

데이빗은 비죽이 웃었다.

“그야 공작부인께서 만나자고 날 초대하셨으니까.”

이놈이 미쳤구나. 로이는 생각했다.

“여기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을 텐데. 난 네놈이 여기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어.”

“근데 이놈이 말끝마다.”

데이빗은 로이의 말투에 이를 갈았다.

로이가 데이빗과 실랑이는 벌이는 동안에 따라 들어온 남자는 소파에 기대 누워있는 공작부인의 맥을 짚었다. 남자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눈이 마주친 로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부인.”

남자는 루시아의 팔을 살짝 잡아 흔들며 깨웠다.

루시아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인상을 쓰고 천천히 눈을 떴다. 잔뜩 돌을 얹은 것처럼 머리가 묵직했다. 평소 앓던 두통과 다른 느낌으로 그저 머릿속이 멍했다.

“마님!”

“크로틴… 경?”

“일어날 수 있겠소?”

루시아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는 것처럼 일어나야 한다고 중얼거리며 소파를 붙들고 몸을 일으켰다. 곁에서 남자가 부축하며 도와주었다.

“너 얼른 마님 모시고 나가. 남에 눈에 안 띄게. 뭔가 이상해.”

“예. 서두르십시오. 공작부인.”

루시아는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그런 것을 따질 틈이 없다고 판단했다.

크로틴 경은 그녀의 안전을 위해 남편이 신경 써서 붙여놓은 호위였다. 실력만큼은 믿을 만하다는 남편의 말 속에는 신뢰가 담겨있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무조건 크로틴 경을 믿기로 했다.

약간 어지러웠지만, 몇 걸음 걷자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루시아는 시종으로 보이는 남자를 따라 나가다가 입구에 쓰러진 기사들을 보고 흠칫 놀랐다. 덕분에 멍하던 머릿속이 조금 깨어나는 것 같았다.

시종이 먼저 문을 열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아무도 없습니다. 나오십시오.”

원래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복도였다. 복도를 따라 걸으면서 시종은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살폈다.

“잠시. 누군가 옵니다.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직 휴게실에서 그리 멀리 벗어난 위치가 아니라서 지금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편이 나았다.

루시아는 장식품으로 잔뜩 갑옷을 세워둔 막다른 복도 방향으로 들어가 갑옷 옆으로 숨었다. 시종 차림의 남자는 태연하게 가던 걸음을 옮겼다.

꺾어진 모퉁이를 돌며 나타난 한 무리의 사람들은 열 명 남짓의 귀부인과 그들을 수행하듯 곁에서 걷는 시녀 차림의 아니타였다.

시종은 그들을 자연스럽게 지나쳐 가다가 모퉁이를 도는 척하면서 그들을 흘끔 살폈다. 그들이 가는 방향은 아무래도 공주의 휴게실 같았다.

‘크로틴 경은 괜찮으려나.’

걱정스러워도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남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공작부인을 지키는 일이었다.

시종은 공작부인을 모시고 파티장으로 향해 걸었다.

루시아는 기분 나쁘게 묵직한 기분이 꽤 나아졌다. 시종을 데리고 가는 귀부인처럼 자연스럽게 허리를 세웠다.

“걸음을 늦추게. 서두르는 것처럼 보이니까.”

“예.”

시종이 자기도 모르게 조금 빨라진 걸음을 늦추었다. 그리고 흘끔 공작부인을 보았다.

‘참 침착한 분이군.’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당황해서 우왕좌왕하지도 않았다. 공작부인은 그저 크로틴 경의 말을 따른 것뿐이지만, 명령을 받는 일보다 명령하는 일에 익숙하고 험한 일을 겪어본 적이 없는 귀부인으로서는 대단히 훌륭한 대처 능력이었다.

인적이 드문 복도를 벗어나자 여기저기 사람이 지나갔다. 종종걸음으로 어디론가 바쁘게 향하는 시종과 시녀, 예복을 입은 파티 객이 파티장의 소란스러움을 피해 잠시 나와있기도 했다.

시종은 지나가는 시녀를 불러 세웠다.

“공작부인을 파티장으로 모셔다 드리게. 그리고 의관을 불러주게. 공작부인께서 두통이 있다고 하시는군.”

“예.”

남자는 자연스럽게 공작부인을 시녀에게 넘기고 공작부인의 몸에 이상이 없는지 점검을 위해 의관을 부르게 했다.

루시아는 남자와 짧게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시녀와 함께 파티장으로 향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지만 루시아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계속 호흡을 빨리했다.

시종은 공작부인이 시녀와 함께 가는 뒷모습을 조금 멀리서 지켜보다가 천천히 뒤를 밟았다.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가는듯한 움직임이었다. 지금은 공작부인에게서 눈을 떼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로이는 마님이 완전히 휴게실을 나가는 기척을 확인한 후에 데이빗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넌 오늘 여기서 마님을 뵌 적이 없는 거야. 알아들었어?”

반드시 네놈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겠노라고 데이빗은 이를 북북 갈았다. 무례한 정도가 아니었다. 천한 평민 출신의 기사 따위가 공작가의 후계인 백작을 모욕하고 있었다.

데이빗이 씩씩거리며 로이를 지나가려 하자 로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뭐냐!”

“대답하고 가. 마님은 여기 오신 적이 없는 거라고.”

데이빗은 코웃음 쳤다.

“말하지 않았느냐. 공작부인의 초대를 받아서 왔다고.”

“이 새끼가.”

로이가 으르렁거렸다. 데이빗은 움찔했다가 무식한 기사 놈의 기세에 눌린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입 다물면. 공작부인이 여기를 다녀간 사실이 감추어질 수 있을 것 같으냐? 밖을 지키는 기사들은 어쩔 것이며.”

“기사들은 입단속시키면 돼.”

“나와 기사 외에는 더 아는 사람이 없는 줄 아느냐?”

로이의 눈이 번뜩였다. 데이빗은 로이의 심기를 더 박박 긁고 싶어서 계속 떠벌렸다.

“곧 이리로 사람들이 올 거다. 공주님의 휴게실에 함께 있는 나와 공작부인의 호위기사. 내가 어떤 식으로 이 상황을 설명할지 기대해라.”

“…사람이 와?”

“공작부인을 두고 호위기사와 백작의 치정 싸움이라. 아주 재밌겠어.”

로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야생 짐승의 그것처럼 감정이 담기지 않은 무기질의 눈으로 데이빗과 눈을 마주쳤다.

“…그렇군. 네놈이 꾸민 짓이군.”

로이는 웃었다. 새하얀 광소였다.

데이빗은 소름이 와득 돋았다. 그것은 죽음의 위협에 반응하는 생명의 본능적 감각이었다. 데이빗은 뭔가 말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로이의 두 손이 데이빗의 머리를 잡아 비틀었다. 콰직, 소리와 함께 데이빗의 의식은 그대로 끊어졌다.

로이는 숨이 끊어진 데이빗을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났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휴게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적당히 가볍고 까불거리는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숨을 죽이고 도약 직전에 힘껏 몸을 움츠린 짐승처럼 로이의 주변에 고요하지만 사나운 기운이 맴돌았다.

로이는 지금 사냥꾼으로 돌아와 있었다. 북부에서 야만족을 잡아 죽이던 그때의 감각을 되살렸다.

‘분명히 마님은 하녀와 함께 들어왔지.’

로이는 휴게실 안을 구석구석 살폈다. 화장실에서 쓰러진 여자 둘을 발견했다. 처음 보는 여자는 속옷만 입은 채였고, 또 다른 여자는 마님의 하녀였다. 전형적인 중독 증상을 보이는 두 사람의 입술 색깔이 거무죽죽했다. 살아날 가능성은 그다지 없어 보였다.

‘하녀를 두고 갈 수는 없어.’

혼자서는 얼마든지 흔적도 없이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정신을 잃은 여자를 데리고는 무리였다. 그렇다고 하녀를 두고 갔다가는 무려 공작가의 후계가 죽은 사건에 마님이 휘말릴 것이다.

‘더구나 공범이 있어.’

사람이 온다고 했다. 그러기로 약속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놈을 여기로 끌어들인 자. 분명히 다시 여기로 온다.’

로이는 아까 앞을 지나간 시녀와 계속 신경 쓰였던 기분 나쁜 여자를 동시에 떠올렸다. 다르게 생긴 둘이 같은 냄새를 가졌다. 둘 사이에 뭔가 있었다.

‘누구를 노리고 한 짓이지? 마님? 아니면 주군?’

로이는 1년 넘도록 태자를 호위하면서 제법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웠다. 소문을 만들고 퍼뜨려 적을 상대하는 수도 귀족들만의 전쟁을 목격했다.

처음에는 사내라면 정정당당히 검을 들고 싸워야지 대체 뭔 좀스러운 짓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소문의 효과는 때로는 검보다 치명적이었다.

‘마님은 여자야. 여자한테 소문은 안 좋아.’

누구를 노렸건, 마님께 해가 가면 주군께도 해가 가는 결과로 이어질 터였다.

‘공범을 치워야 해.’

로이는 도망치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뒷정리를 생각했다. 마님이 여기 있었던 흔적을 모두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진정한 사냥꾼은 흔적도 후환도 남겨서는 안 된다.

증인부터 없애야 했다. 시녀와 하녀의 목을 꺾어 죽였다. 안면이 있는 하녀에게는 조금 미안했다.

‘미안. 나중에 지옥 가서 빌게.’

그리고 입구에 널브러져 있는 기사들을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들은 마님이 휴게실로 들어오는 장면을 목격한 증인이었다. 역시 죽여서 잘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기대 앉혀놓았다.

모든 과정은 순식간에 끝났다. 순식간에 여러 목숨이 사라졌으나 로이에게 이것은 사냥이었다. 보통 사람이 살인 후 느끼는 공포와 죄책감은 없었다.

로이는 소파에 앉아서 눈을 감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예민한 그의 감각에 사람들이 무리 지어 오는 소리가 잡혔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걸음이 휴게실 문 앞에 멈추었다.

달칵 작은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는 순간, 로이는 눈을 떴다. 중간 문이 열렸다. 십여 명에 달하는 귀부인들이 안으로 우르르 들어오려다가 로이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로이의 눈이 번쩍 빛났다. 문고리를 쥐고 서있는 시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아니타는 복도에 공작부인의 호위가 보이지 않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휴게실 앞에 기사가 없는 것을 보며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우르르 뒤를 따르는 귀부인들이 어서 빨리 문을 열라고 재촉하는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대로 도망가면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더라도 귀부인들을 안으로 들이고 나서 기회를 봐서 자연스럽게 몸을 빼야겠다고 생각했다.

귀부인들은 절대 제 손으로 문을 열지 않았다. 아니타는 자기도 그런 귀부인이면서 짜증이 났다. 중간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아니타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로이와 눈이 마주쳤다. 뱀 앞의 개구리가 된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너구나.’

로이는 여자가 모든 정황의 중심에 있음을 본능으로 판단했다. 이성보다 몸의 감각에 의존하는 사냥꾼의 기질에 따라 항상 지니고 다니는 단검을 팔등의 감추어진 부분에서 꺼내서 즉시 여자의 목을 향해 날렸다.

루시아는 파티장으로 돌아와 귀부인들 틈에 섞여들었다. 제대로 생각할 시간 없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연속적으로 밀어닥쳐서 가슴이 뛰고 손바닥에 식은땀이 났다.

그래도 겉으로는 말을 걸어오는 귀부인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겹도록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사교 활동을 했던 꿈속 경험은 루시아에게 대단히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음악과 사람들 목소리로 소란스러운 파티장 안으로 캐서린이 다시 입장했다. 캐서린은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않고 곧바로 루시아에게 다가왔다.

캐서린을 보자마자 혼란 상태에 빠져있던 루시아의 기억이 조금씩 질서를 잡기 시작했다. 시작점은 캐서린이 찾는다는 시녀의 말을 듣고 휴게실로 가면서부터였다.

“공주님. 내궁에… 다녀오신 건가요?”

“헛걸음만 하고 왔어요. 폐하께서 찾으신 적이 없으셨어요. 대체 누가 헛말을 전했는지 찾아내서 엄히 죄를 물을 거예요.”

캐서린이 앙칼지게 불쾌함을 표했다.

루시아는 어떤 음모가 자신을 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캐서린을 먼저 거짓으로 유인하고 그걸 이용해서 자신을 휴게실로 유인했다.

‘대체 왜? 누가?’

크로틴 경이 아니었으면 큰일이 날 뻔했다. 아까 휴게실에서의 상황을 떠올렸다. 크로틴 경이 멱살을 쥐고 있던 남자는 분명히 라미스 백작이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르겠어. 라미스 백작이 날 해코지하려고 한 건가?’

다른 무엇보다도 크로틴 경이 어찌 되었는지가 가장 걱정되었다.

“공작부인. 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녀가 다가와 말했다.

“의관이라니. 공작부인, 어디가 불편한가요?”

“예. 머리가 좀…….”

“저런. 그만 댁으로 돌아가 쉬세요. 아무래도 공작부인은 늦은 시간에 활동하는 체질이 아닌 것 같군요.”

사람들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파티장의 넓은 홀에서 이어진 복도로 왕실기사들이 척척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빠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이 공주의 개인 휴게실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알고 루시아는 파리하게 안색을 굳혔다.

한창 즐거운 파티 분위기를 망가뜨릴 수 있는 기사들의 집단 움직임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아무래도 무슨 큰일이 벌어졌나 싶어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오너라.”

캐서린이 시녀를 보냈다. 기사들의 갑옷 소리가 멀어지고 루시아는 휴게실로 가서 의관의 진단을 받았다. 그사이에 파티 분위기는 서서히 돌아왔다.

귀부인들은 캐서린의 주변을 둘러쌌다. 어떤 귀부인이 말했다.

“저희도 언제 휴게실을 구경시켜 주셔요. 공주님.”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래도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몰려갈 수 없겠으나 처음으로 개방하는 공주님 휴게실에 초대받는 영광을 받지 못해 서운했답니다.”

“무슨 말이죠. 내 휴게실을 개방하다니.”

“아까 시녀가 공주님 명으로 부인들을 데려가지 않았습니까? 공주님께서 휴게실을 개방한다고 첫 손님으로 꼽으셨는데요.”

“난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어요. 그럼 지금 내 휴게실에 내 허락을 받지 않은 자들이 가있다는 건가요?”

캐서린이 날카롭게 되받아치자 귀부인들이 당황해서 서로를 돌아보았다.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의관의 진단을 받고 루시아는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캐서린이 심부름을 보낸 시녀도 비슷하게 파티장으로 들어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캐서린에게 귀엣말을 전했다. 캐서린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공작부인, 잠시요.”

캐서린은 루시아를 사람들 사이에서 떨어뜨려 외진 곳으로 데려갔다.

“공작부인. 놀라지 말고 들어요. 아까 기사들이 달려간 일이 뭔지 알아봤더니 사고가 난 모양이에요. 사고라기보다는…….”

캐서린이 말을 잇지 못했다.

루시아은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으나 꼭 쥐고 있는 두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불길한 예감이었다. 섬뜩한 한기가 등을 타고 흘렀다.

제발. 루시아는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크로틴 경에게 나쁜 일이 생겼을까 봐 가슴이 덜컹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어요. 범인이 공작부인의 호위예요. 기사 크로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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