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장 Ever after (2)
“내가 없는 동안 당신 호위는 로이가 맡기로 했어.”
“크로틴 경이요?”
“말썽은 많아도 실력은 확실하니까. 당신에게 무례하게 굴어도 그러려니 해.”
“크로틴 경이 사람을 편하게 대하는 태도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리 나쁜 사람 같지 않은데 왜 그런 무서운 별명이 붙었을까요. 당신도 신뢰하는 기사잖아요.”
루시아는 그에게 청혼하러 찾아왔던 날 목격했던 두 사람 모습이 주군과 기사라는 엄격한 관계보다 편하고 격의 없다고 생각했다.
“그 녀석은 많이 사람 된 거야.”
휴고는 옛 기억을 되살렸다. 로이와 첫 만남은 히우라고 불리던 용병 노예 시절이었다. 일부의 야만 부족은 사람을 납치해서 노예로 부리거나 대가를 받아 풀어주는 짓을 종종 했다. 히우를 노예로 부리던 용병이 납치된 귀족 가문 아들을 구해내는 의뢰를 받았다.
주인 용병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다가 붙잡혀있는 다른 아이들을 보았다. 다른 아이들 처지를 동정할 말랑한 마음 따위는 없었지만, 유난히 독기 가득한 눈의 어린 소년이 눈에 띄었다. 혼자 사지가 묶여 독방에 갇혀 있었는데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아 그리되었다고 했다.
히우는 주인 용병이 자는 새벽에 몰래 숨어 들어가서 소년을 풀어주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변덕이었다.
히우는 아무 말 없이 묶인 줄을 끊어주었고, 소년 역시 히우가 하는 짓을 경계하듯 노려보기만 했다. 자유의 몸이 되자 소년은 히우를 향해 히죽 웃었다.
“은혜는 갚는다.”
그리고 히우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소년과 재회했다.
공작 부부가 형제의 손에 시해되던 무렵, 히우는 휴고가 되어 공작 후계로서 야만족의 침탈이 잦은 국경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국경 지역을 돌아다니며 야만족만 보이면 쳐 죽이는 자가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실력이 대단합니다. 아무리 야만족만 해한다고 하지만, 아무와 교류하지 않아서 위험한 자일까 봐 섣부르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자가 또 나타났습니다! 야만족 여럿과 전투 중입니다.’
휴고는 전투가 벌어지는 근방에 가서 멀찌감치 녀석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야만족 서넛이 녀석 하나를 당해내지 못했다.
휴고는 녀석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위험하다는 주변 만류에도 가까이 다가갔다. 녀석은 다가오는 휴고를 빤히 바라보고 서있었다.
가까이 가서 휴고는 녀석을 기억해 냈다. 어릴 때 야만족의 감옥에서 풀어준 소년이었다. 당시에 인상 깊었던 붉은 머리카락은 여전히 강렬했다.
‘왜 야만족을 죽이고 다니지?’
‘놈들이 내 가족을 죽였으니까.’
‘계속할 건가?’
‘달리 할 것도 없고.’
‘할 일 주면 나와 가지 않겠느냐?’
‘재밌는 건가?’
‘훨씬.’
로이는 어릴 때 봤던 그 웃음처럼 히죽 웃었다. 휴고와 달리 로이는 어릴 때 인연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로암에서 벌어진 비극적 소식을 받고 휴고는 바로 로암으로 출발했고, 로이가 따라왔다. 정신없이 뒷수습하는 동안 로이를 잊고 있었다. 그동안 녀석은 뻔뻔하게 눌러앉아 잘 지내고 있었다.
몇 번 까불기에 힘으로 눌러줬더니 좀 고분고분해졌다. 그리고 실력으로 못 당한다는 것을 알자 몹시 억울해하며 휴고에게 원망을 늘어놓았다.
‘재밌는 일 준다며! 이 사기꾼아!’
툴툴거리면서도 로이는 도망가지 않았다. 사람들과 지내는 최소한의 예절을 익히고 가문의 기사 몇 명과도 곧잘 어울렸다. 어느새 로이는 가문의 기사가 되어 있었다.
휴고는 모든 이야기를 전부 그녀에게 할 수 없지만, 일부분 로이와의 인연을 말해 주었다. 흥미진진하게 듣던 루시아가 감탄했다.
“크로틴 경은 당신에게 특별한 사람이군요.”
“…그런가?”
“그럼요. 크로틴 경이 위험에 처하면 구하러 가실 거잖아요.”
휴고는 로이가 위험에 처하는 일을 상상할 수 없었다. 지옥에서도 살아나올 것 같은 녀석이었다. 제 힘을 너무 믿고 불구덩이에 뛰어들어 위험을 자초하면 모를까. 만약 그런 한심한 경우라면 혀를 차고 고생하도록 놔둘 것이다. 하지만 녀석이 죽도록 두고 보지는 못할 것 같다.
“음, 그럴지도.”
“당신은 참 알면 알수록 신기해요. 뭔가 평범하지 않은 일들이 주변에 많네요. 그럼 집사는요? 어떻게 만나셨어요?”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빛 공격에 넘어갈 뻔했다. 휴고는 그녀를 안은 상태에서 자세를 바꿔 침대에 눕히고 위에서 아래에 누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침대에서는 딴 남자 얘기하지 말랬지.”
“먼저 시작한 사람이 누군데요.”
“내가 해도 당신은 안 돼. 호기심도 보이지 마.”
“정말 억지.”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래서 싫어?”
루시아는 웃으면서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럴 리가 있나요.”
귓가에서 들리는 그녀의 웃음소리는 그의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어디 가든지 호위 떨어뜨리지 말고. 어디서든 혼자 있지 마.”
“제 걱정보다 당신이 걱정이죠. 전쟁터로 가시는 거잖아요.”
“내 걱정은 전혀 할 필요 없어. 당신은 푹 자고 잘 먹어.”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 해도. 당신을 걱정할 거예요. 다치지 않게 조심하셔야 해요.”
휴고는 대답처럼 그녀를 더 꽉 안았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의 자신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그녀라면 휴고가 아닌 히우도 사랑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봉인처럼 꼭꼭 감추어둔 암흑 같은 어린 시절도 그녀의 맑은 색깔로 물들여주지 않을까.
언젠가는 자신의 민낯을 그녀 앞에 모두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올해 안에 오시는 거죠?”
해가 저물기까지 채 두 달이 남지 않았다.
“신년 아침은 당신하고 보낼게.”
* * *
남자는 라미스 백작, 데이빗의 행동반경을 주시하는 임무를 받았다. 대충 어디를 다니고 누구를 만나는지만 알면 되었다.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밀착 감시하는 일을 무사히 수행한 경험이 있어서 이 정도 임무는 아주 쉬웠다.
너무 쉬운 임무라서 불만이었다. 더 위험하고 중요한 임무를 받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그래서 라미스 백작한테서 중요한 뭔가를 알아내면 자신의 경력에 큰 보탬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며칠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점점 더 가까이 표적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가는군.’
데이빗은 영지에 내려오고 나서 빈번히 마을 주점에 들러 술을 마셨다. 영지에는 수도처럼 귀족들만 따로 드나드는 고급 주점이 없었다.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 다니는 허름한 주점에 영주의 아들이 납시면 술을 먹던 모두가 숨을 죽였다.
시끄럽던 주점이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데이빗은 혼자 분위기를 잡으면서 술을 마셨다. 중간에 나가려던 손님 몇이 데이빗의 수행원들에게 치도곤을 당한 후로 아무도 나가지 못하고 그저 숨만 죽이고 앉아있었다.
몰래 지켜보는 남자는 데이빗의 위세가 거북했다. 평민이었던 남자에게는 고향에서 으스대는 귀족 비위를 맞추지 않았다고 곤경을 당해 치를 떨고 고향을 떠난 과거가 있었다.
데이빗이 일어나서 주점을 나가자, 손님으로 위장해 앉아있던 남자도 슬그머니 일어났다. 주점을 나가자마자 재빠르게 시선을 좌우로 돌렸으나 데이빗이 보이지 않았다.
‘그새 어딜 간 거지.’
마을로 들어가는 어두운 길 안쪽에 사람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남자는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퍽!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으며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뭐 하는 놈인지 알아봐.”
쓰러진 남자를 노려보는 데이빗의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수행원들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니야. 일단 감옥에 처넣어. 심문은 내가 나중에 하겠다.”
데이빗은 이를 갈았다. 누가 사람을 붙였는지 대충 짐작했다.
‘날 영지로 내려 보내고 감시까지 하신다는 말이지요, 아버지.’
아니타는 직원으로부터 특실에 귀빈을 모셨다는 말을 들었다. 한껏 요사한 미소를 띠고 특실로 들어갔다. 취기가 오른 붉은 얼굴로 데이빗이 아니타를 보고 호기롭게 외쳤다.
“오, 백작부인. 내가 왔소이다.”
아니타는 눈짓으로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여직원들을 내보냈다.
“먼저 기별을 주셨으면 제가 더 빨리 왔을 텐데요.”
“내가 갑자기 찾아와 불편하시오?”
“그럴 리가요. 각하께서 자주 찾아주시면 최고의 영광이지요.”
신분에 걸맞지 않은 과분한 호칭을 듣고 데이빗은 그저 좋다고 킬킬거렸다.
“역시 날 알아주는 사람은 백작부인밖에 없소.”
“여기서는 백작부인이 아니라 마담 쥬엘이라고 불러 주시라니까요.”
“그랬지, 그랬지. 마담… 마담 쥬엘.”
데이빗은 제 뒤를 밟은 정체 모를 놈을 감옥에 처넣으라 하고 분이 나서 무작정 수도로 올라왔다. 올라오고 보니까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정확한 증거 없이 아버지께 내 뒤를 밟았느냐고 따졌다가는 오히려 호되게 야단을 들을 것이다.
갈 곳을 찾다가 입안의 혀처럼 맞춰주는 백작부인이 생각나서 주점으로 향했다.
데이빗은 영지로 쫓겨 내려가기 전까지 매일 아니타의 주점에 들렀다. 파비안은 대체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했지만, 능력껏 알아냈어도 건질 것이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그저 그동안 친분을 쌓았을 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니타가 데이빗의 신뢰를 얻는 과정이었다.
아니타는 남자의 기분을 띄워주는 화술에 능숙했다. 또한 남자들이 흥미를 갖는 정치, 경제 등에 적당히 넓고 얕은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대부분 남자는 아니타와 대화를 나누면 쏙 빠져들었다.
밤을 함께 보내는 깊은 관계까지 가면서 아니타의 말솜씨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유일한 남자가 타란 공작이었다. 그건 휴고가 순전히 여자와 대화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니타는 타란 공작이 여자가 곁에서 떠들면 성가셔 한다는 것을 알고 되도록 조신하게 입을 다물었다. 휴고는 아니타의 화류계 여성 같은 면모를 알지 못했다. 알아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이제 수도로 올라오신 거여요? 다시 자주 뵐 수 있겠군요.”
“뭐 그렇다기보다는…….”
술에 취한 데이빗은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데이빗이 하는 말은 대부분 다 비슷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 어머니에 대한 슬픔, 그리고 타란 공작에 대한 오기 비슷한 적대감.
공작가의 귀한 아드님답지 않게 데이빗의 속은 상당히 비틀려 있었다. 그래서 아니타는 데이빗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사람일수록 이용하기 쉬웠다.
아니타는 데이빗이 자신에게 마음을 열도록 꾸준하게 신뢰를 쌓았다. 모든 말에 진심으로 동감하는 척했고, 가끔은 술값을 받지 않았다. 당신의 친구가 되어 위로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술김에 슬쩍 신체적 접촉을 하는 데이빗을 밀어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저는 각하와 진실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리석은 믿음이었습니까?’
처음에는 그녀를 주점 여주인으로 대하던 데이빗이 백작부인에게 보이는 예를 갖추기 시작했다.
‘사내 열보다 그대가 낫소. 지금껏 여인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적 없었지만, 백작부인과는 가능할 것 같소.’
아니타의 마음 깊은 곳에는 타란 공작부인을 향한 원망이 점점 커져서 시커먼 어둠처럼 그녀를 삼키고 있었다.
형편없이 추락하는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부정했으나 주점의 여주인 활동을 끊을 수가 없었다. 뭇 사내들에게 웃음을 팔면서 그들의 추앙하는 시선을 받을 때는 살아있다는 실감이 났다.
그러나 그게 자신의 본질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을 이런 바닥까지 끌어내린 공작부인을 탓하며 증오를 품었다.
공작부인과 적대하기에는 자신의 힘은 미약했다. 그러나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문다고 하지 않던가. 아니타는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훌륭한 수단으로 점찍은 사람이 데이빗이었다.
서두를 생각은 없었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일이 수월할 것 같았다. 데이빗이 품은 분노와 질시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날 사람까지 붙여가며 감시할 이유가 뭐겠소! 날 음해하는 자가 있어서 그렇지. 타란 그자가 날 이간질한 거요. 날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것이지!”
아무리 공작가 후계라지만, 이제 겨우 백작인 그를 상대로 타란 공작이 음해 공작을 편다고?
‘그럴 리가 없지.’
아니타는 내심 비웃으면서도 위로해 주었다.
“각하께서도 당하고 계시지 말고 반격을 하세요. 타란 공작을 망신을 주는 일 정도는 저도 할 수 있어요.”
“망신……? 어떻게?”
아니타는 회심의 미소를 감추고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공작부인과 깊은 마음을 나누는 사이라고 소문을 내는 겁니다. 그런 소문이 나도 타란 공작이 각하를 찾아와 따질 수 없지요. 따지러 오면 그건 그것대로 망신입니다.”
데이빗은 망설였다. 공작부인의 평판에 먹칠을 하는 짓은 아무래도 껄끄러웠다. 아무리 타란 공작에게 나쁜 감정이 있어도 데이빗 마음속에 공작부인은 가슴 설레는 풋사랑으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소문은 가끔 진짜가 되는 일도 있답니다. 소문 때문에 만난 남녀가 친밀해지고 서로 의지하게 되기도 하지요.”
데이빗은 공작부인과 제대로 대화를 나눌 기회만 있으면 공작부인이 자신의 매력을 느낄 거라고 자신했다. 소문이 나면 그걸 핑계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빗의 음흉한 마음을 잘 아는 아니타가 틈새를 파고들었다.
“음……. 하지만 가짜 소문을 내면 금방 들통이 날 텐데…….”
“가짜라니요. 진짜를 만들어야죠.”
“어떻게 말이오?”
“소문은 그저 단서만 제공해 주면 됩니다. 남모르게 두 분이 만나고 있는 장면만 사람들 눈에 띄면 소문은 순식간에 번질 겁니다.”
공작부인은 대부분 티파티만 참석하는 얌전한 사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작과 부부금실이 좋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있었다. 범접할 수 없는 대상에 경외심을 느끼면서도 그 대상의 추락에 희열을 느끼는 추악한 마음이 사람의 본질이었다.
영지로 내려갔다고 알려진 데이빗과 공작부인이 은밀하게 만나는 장면을 연출하면 소문은 마른 잎에 불을 붙인 것처럼 순식간에 번져 추문으로 퍼질 것이다. 사교계에 추문은 워낙 많아서 우습다지만, 원래 소문이 많던 자에게 소문이 하나 더 붙는 것과 아주 깨끗한 평판의 귀부인에게 추문이 붙는 것은 파급력이 아예 달랐다.
진위는 상관없었다. 아무리 나중에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져도 ‘그래도 근거가 있으니까 그런 소문이 퍼졌겠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꼭 있었다. 한 번 퍼진 소문은 가라앉힐 수는 있어도 박멸할 수 없었다.
“며칠 후면 건국절입니다.”
새 왕이 즉위 후 처음 맞는 건국절이었다. 공작부인은 무도회에 거의 참석하지 않지만, 건국절 파티는 빠지지 않을 것이다.
“대대적인 파티가 있을 테고 마침 타란 공작은 수도에 없습니다.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지요.”
“가장 큰 문제가 있소. 남들 눈을 피해서 무슨 수로 공작부인과 둘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오?”
“그 기회는 제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음……. 헌데 마담 쥬엘은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것이오?”
아니타는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이 한때 타란 공작의 연인이었고 무참히 버려졌다고 고백했다. 기회가 닿으면 타란 공작에게 작은 복수라도 하고 싶다고 했다.
데이빗은 흥분해서 역시 그자는 무도하고 예의를 모르는 자라고 성토했다.
“각하께서 한 가지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그게 뭐요?”
아니타는 말할 듯 말 듯 애를 태우다가 데이빗이 뭐든 할 수 있는 도움이라면 주겠다고 다짐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라미스 공작가에 모습을 바꾸는 마도구가 있다지요. 잠시 제게 그걸 빌려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 * *
건국절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입궁하려는 모든 마차는 입구에서 잠시 멈추어서 방명록을 작성했다. 타란 공작가의 마차 역시 형식적인 절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차에 타고 있는 인원과 신분을 확인한 근위병이 로이에게 검을 두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기사보고 검을 내놓으라고?”
로이는 근위병을 보고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렸다. 로이의 악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근위병이 움찔하면서 우물쭈물 대답했다.
“궁에서 열리는 파티에는 검을 들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기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근위병은 죄가 없었다. 로이는 투덜거리면서 검을 풀어 건넸다.
어차피 로이에게 무기는 큰 의미가 없었다. 고수는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파티장에 있는 포크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포크도 필요 없었다. 목을 꺾으면 절명이니까.
검을 받은 근위병은 서둘러 마차를 들여보냈다. 미친개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걸어 다니는 살인 무기는 당당하게 입궁했다.
타란 공작부인이 등장하자 주변으로 귀부인들이 몰려들었다. 여자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루시아를 보며 로이는 궁금했다.
‘마님, 인기 좋네. 저 여자들 얼굴을 다 기억할까? 나중에 꼭 물어봐야지.’
로이는 일정 거리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계속 루시아를 주시했다. 귀부인 호위는 곁에서 밀착 경호하는 태자 호위보다 까다로웠다. 호위 대상이 파티 분위기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하므로 지나치게 가까이 붙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눈을 번뜩이며 서있는 로이의 곁을 빙 돌아서 지나갔다. 덕분에 로이는 사람과 부대끼지 않고 널찍한 공간을 차지할 수 있었다. 로이는 가끔 파티장을 넓은 시야로 살피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저 여자.’
로이는 낯익은 여자를 발견했다. 로이가 사람을 기억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좋은 느낌이거나 반대로 아주 불쾌한 기운이거나. 여자는 즉위식 파티에서 봤던 나쁜 냄새를 풍긴 기분 나쁜 여자가 틀림없었다.
로이는 마님을 주시하면서 슬쩍슬쩍 기분 나쁜 여자를 살폈다. 여자는 다른 사람과 어울림이 없이 파티장을 왔다 갔다 하다가 구석에 서서 한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여자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귀부인이 많이 모여있고 무리의 중심에는 마님과 캐서린 공주가 있었다.
‘묘하게 거슬리는데.’
마님 곁에 얼씬하면 저걸 어떻게 해야 하나, 로이는 고민했다. 그런데 여자는 휙 몸을 돌려서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여자가 사라지자 로이는 신발 안에 굴러다니던 모래를 빼낸 것처럼 후련했다. 그러나 곧 다시 거슬리는 자를 발견했다.
‘저놈도 왔군. 하긴 이런 자리에 안 올 녀석이 아니지.’
데이빗 역시 로이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태자를 호위할 때 줄기차게 봤다. 왕비의 남동생이라고 들었다. 그는 로이를 볼 때마다 같잖은 것 보듯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이도 같잖게 시선을 마주해 주었다. 왕비의 남동생만 아니었어도 몇 대 때려주는 건데.
‘웬일로 저러고 있지.’
데이빗은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거의 숨어있었다. 간혹 누군가 아는 척해도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서 떨쳐냈다.
사교계 소식에 관심 없는 로이는 데이빗이 영지로 내려간 사정을 전혀 몰랐다. 잘난 척하며 사람에게 둘러싸여 뿌듯해하던 녀석이 평소와 다르게 죄지은 자처럼 구는 태도가 의아했다. 그리고 로이의 눈이 기이한 빛을 발했다.
기분 나쁜 여자가 다시 나타났고, 데이빗에게 다가가 둘이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주 비밀스럽지는 않아도 어딘지 모르게 주변을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이후 여자가 파티장을 나가자, 데이빗도 뒤를 따랐다.
‘둘이 눈 맞았나?’
기분 나쁜 것들끼리 잘 어울렸다.
‘이상하게 찜찜하네.’
로이는 다시 마님을 지켜보는 일에 집중했다.
아니타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서 공작부인, 그리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공작부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로이를 번갈아 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미친개를 떼어놓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공작부인은 새벽까지 파티를 즐기지 않고 적당히 늦으면 돌아갈 것이다.
‘궁에서 열리는 파티에 기사를 달고 올 줄이야.’
귀부인이 파티장 안까지 기사를 대동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름 모를 남작 여식이 기사를 데리고 다녔다가는 유난스럽다고 웃음거리가 될 일이었다.
공작부인 정도면 대놓고 뭐라 할 수 없어도 출입인의 신분을 엄격히 확인하는 궁에서 열리는 파티에 기사를 데려올 필요가 있나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로이는 무척 눈에 띄었다. 예복을 차려입은 사람들 틈에서 혼자만 경갑옷 차림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공작부인은 무도회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공작부인이 혼자 무도회에 참석할 오늘 같은 날이 또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호위가 따라올 수 없는 곳을 찾자. 화장실이나……. 그래. 휴게실!’
아니타는 공작부인이 캐서린 공주의 휴게실을 이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캐서린 공주가 따로 쓰는 개인 휴게실이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 귀부인이 알고 있었다. 먼저 나서서 사적인 공간을 보여달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귀부인들은 공주의 휴게실에 기회가 닿으면 가보고 싶다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곤 했다.
아니타는 상황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캐서린이 파티장에 있음을 확인한 후 공주의 휴게실로 갔다. 휴게실 위치는 번잡함에서 벗어나려고 파티장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위치는 아주 좋군.’
휴게실 앞은 근위기사 둘이 지키고 있었다. 모르는 척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기사들이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공주님께서 이곳을 이용해도 좋다고 허락하셨어요.”
“공주님께 그런 지시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 안에 시녀가 있으면 불러 주겠어요? 공주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어요.”
기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잠시 후 시녀와 나왔다. 아니타는 재빠르게 시녀의 키와 체격을 가늠했다. 자신과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알자 착착 계획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상하군요. 이 시녀가 아니에요. 다른 시녀는 없나요?”
“안을 지키는 시녀는 더 없습니다.”
아니타는 ‘내가 뭔가 잘못 알았나 보군요.’라고 말하며 돌아섰다.
‘지키는 기사가 둘. 안에는 시녀가 하나라는 말이지. 우선은 기사부터 떼어 내야겠는데……. 라미스가의 도련님 도움을 받아야겠어.’
데이빗은 공주의 휴게실 앞을 지나가다가 기사 둘에게 손짓했다.
“자네 둘. 이리 와보게.”
기사들은 잠시 서로 마주 보다가 데이빗에게 다가갔다. 여느 귀족이라면 말을 들을 이유가 없지만, 데이빗은 라미스 공작의 아들이며 왕비의 동생이었다. 무시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잠시 따라오게.”
“하지만 저희는 여기를 지켜야…….”
“어허, 잠시면 된다니까.”
“그러면 저희 중 한 명은 여기 남겠습니다.”
“두 사람 도움이 필요해서 그러네. 금방일세. 잠깐의 도움도 못 주겠다는 건가? 이거 섭섭하군.”
임무를 위해서는 마땅히 거절해야 옳지만, 그들은 힘없는 근위기사였다. 고위 귀족이 앙심을 품으면 그들은 전혀 자기 자신을 변호할 기회 없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두 기사는 눈을 마주쳤다. 잠시면 괜찮겠지. 어차피 휴게실 안에는 시녀도 있었다. 데이빗이 기사들을 데리고 복도 모퉁이를 돌아가자 상황을 지켜보던 아니타가 재빠르게 휴게실로 들어갔다.
휴게실은 문으로 들어가면 내부가 보이지 않게 열 걸음 정도의 짧은 복도식 통로가 있고 벽을 끼고 돌아서면 중간 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게 되어있었다. 아니타가 들어오자 시녀가 일어났다.
“아까 뵌 분이시군요. 여긴 어찌 들어오셨습니까.”
“공주님께서 내게 이곳을 써도 좋다고 허락하셨네.”
“네? 저는 그런 지시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만.”
“그럼 밖에 기사가 지키고 있는데 내가 여기를 어찌 들어왔겠는가. 내가 거짓을 말한다는 건가?”
아니타가 짐짓 화난 것처럼 몰아붙이자 시녀는 우물쭈물했다.
“정 믿지 못하겠으면 증거를 보여주지. 이리 와보게.”
시녀는 아니타 앞으로 다가왔다. 아니타는 끼고 있던 반지를 돌려서 손바닥으로 향하게 하고 반지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안에서 미세한 침이 나왔다.
아니타는 다가오는 시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흠칫 놀란 시녀가 손을 뺐다가 잠시 후 눈이 돌아가면서 풀썩 쓰러졌다.
빠르게 정신을 잃고 서서히 마비되어 죽음에 이르는 독이었다. 서너 시간 안에 해독제를 섭취하지 않으면 시녀는 죽을 것이다.
아니타는 시녀의 목숨 따위는 상관없었다.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고 나자 자신을 옥죄는 모든 빗장이 풀리는 듯한 은근한 쾌감을 느꼈다.
아니타는 휴게실 옆으로 이어진 화장실로 시녀를 끌어다 눕히고, 벗긴 시녀의 옷으로 재빠르게 갈아입었다. 그리고 데이빗이 건네준 마도구 팔찌를 품에서 꺼냈다.
소문으로만 듣던 마도구는 투박한 은색 팔찌였다. 귀족 가문이 지닌 마도구는 대부분 비밀에 부쳐져 있지만 비밀리에 알려진 것이 몇몇 있었다. 라미스 공작 가문이 소유한 마도구가 그런 공공연한 비밀에 속했다.
아니타는 팔찌를 팔목에 끼웠다. 팔찌에서 은은한 빛이 나면서 팔목에 맞도록 조여들었다. 그리고 거울 속에서 아니타의 모습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색깔이 매우 흐린 갈색으로, 눈동자 색이 흑색에 가깝게 진한 색으로 바뀌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의 골격으로 바뀔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인상이 어딘지 모르게 달라졌다. 아니타와 동일인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외모와 분위기로 변화했다.
마도구가 효과를 발휘하는 시간은 한 시간. 한 번 사용하면 재사용까지 1년 가까이 시간이 필요하다고 데이빗은 말했다. 상관없었다.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7권에서 계속>
7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