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장 사랑합니다 (5)
이튿날, 루시아는 오전에 캐서린이 보낸 전언을 받았다. 오후에 만나자는 초대였다. 캐서린은 어제 파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서 몹시 만족스러워했다. 루시아를 배웅하는 표정에 뿌듯함이 가득했다.
‘조금만 부드럽게 말해도 한결 사람을 수월하게 사귀실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 점이야말로 그분의 매력이지.’
어제 파티에서 어떤 귀부인이 루시아에게 캐서린이 듣지 못하는 곳에서 슬쩍 말했다.
‘캐서린 공주님을 이렇게 편하게 대하는 분은 처음 뵈었어요.’
귀부인은 성격 강한 캐서린을 잘도 견딘다는 직접적인 말을 에둘러 표현했다. 직접 루시아에게 그런 말을 건넨 사람이 극히 드물 뿐, 많은 시선이 루시아를 안쓰러워하거나 대견해했다. ‘잘 참는구나.’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들의 오해를 당장 풀 방법이 없으나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루시아는 캐서린을 견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캐서린은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라서 꺾어진 곳이 없는 사람이었다. 말투가 직설적이어서 듣는 사람의 기분을 불편하게 하지만, 안하무인으로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사랑을 받고 귀한 공주로 자랐다면 그렇게 도도한 공주님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런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굴곡 없이 자라서 세상의 두려움을 모르는 캐서린의 철없는 자신감이 부러웠다. 루시아는 캐서린이 노인이 되어서도 지금처럼 고민 모르고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왕비 마마께서 끼워달라고 전언을 보내셨네요. 둘만의 티타임은 다음 기회를 잡아야겠어요.”
캐서린은 궁을 방문한 루시아를 맞이하며 툴툴거렸다. 두 사람은 왕비궁으로 이동했다. 베스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쾌한 화제는 없어도 소소한 대화가 즐거운 시간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서로 알고 지낸 것처럼 루시아는 두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편안했다.
‘남이 아니라서 그런가.’
사람과의 사귐이 많지 않은 루시아는 두 사람으로부터 느껴지는 편안함이 신기했다. 얼마 전까지 말조차 나눈 적 없는 사이였다.
‘가족이란 이런 걸까.’
사적인 관계로 들어가면 캐서린은 자매, 베스는 올케였다. 그런 관계에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남과는 다른 뭔가가 있었다.
“아까 시녀가 자수통을 들고 나가던데요. 언제부터 자수에 취미가 생기셨어요?”
베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처녀 시절에 나름대로 사교계를 누비며 열심히 놀았던 베스는 자수 같은 정적인 활동을 즐기지 않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평생 취미에 없는 일을 하고 있네요. 폐하께서 손수건에 수를 놓아달라고 하시더군요.”
캐서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손수건에 수를요?”
“이게 전부 공작부인 덕분이지요.”
루시아는 생각지 못한 지적에 놀랐다.
“공작부인 덕분이라니요?”
“공작부인이 타란 공작께 수놓인 손수건을 드렸답니다. 그걸 폐하께서 보시고 나도 하나 가져야겠다고 저보고 만들라고 하시네요.”
캐서린이 깔깔대며 웃고 루시아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걸 어쩌다가 폐하께서 보셨을까.’
그가 이런 선물받았다고 자랑했을 리는 없었다. 그런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어떤 손수건인지 구경해 보고 싶네요.”
“공작부인만 괜찮으면요. 마침 내가 가지고 있어요. 폐하께서 참고하라며 빌려 주셨거든요.”
“어머나, 보고 싶어요. 봐도 괜찮죠?”
캐서린이 눈을 빛내며 허락을 구하자 루시아는 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잘것없는 솜씨로 만든 손수건을 보일 생각을 하자 창피했다.
“댁에 돌아가 부군을 나무라지 마요, 공작부인. 폐하께서 손수건을 빼앗으셨답니다.”
빼앗을 때 타란 공작 표정이 아주 볼만했다고 낄낄대는 남편을 보면서 베스는 ‘남자는 철이 언제 드는 걸까.’라고 생각했었다. 캐서린은 ‘오라버니가 별짓을 다 한다.’라며 또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시녀가 가져온 자수통 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낸 베스는 그것을 캐서린에게 건넸다. 캐서린은 면 손수건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다. 그리고 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은 ‘타란 공작이 이런 걸 들고 다닌다고?’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루시아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수가 귀엽네요. 꽃이라니.”
발그레하던 루시아 표정이 살짝 굳었다.
“…제가 잠시 봐도 될까요?”
“그럼요. 원주인이신데.”
캐서린이 흔쾌히 넘겨주는 손수건을 받아 확인하면서 루시아의 눈이 흔들렸다. 얼마 전에 선물한 그의 이름을 수놓은 손수건인 줄 알았다.
그러나 모서리의 꽃 자수. 서툰 자수 솜씨는 아주 오래전 막 손수건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의 흔적이었다. 데미안에게 보내려고 만든 손수건을 그가 가지고 있었다고? 꽃 자수 손수건이면 수개월은 지난 일이었다.
‘이게… 무슨 의미예요?’
그녀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 * *
퀘이즈는 요즘 돈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왕이 되기 전에는 돈 문제가 이렇게 크게 고민되는 일인 줄 몰랐다. 쓸 곳은 넘쳐나는데 쓸 수 있는 돈에는 한계가 있었다.
“공. 어디서 돈을 벌 좋은 방법 없겠나?”
“언제부터 장사치가 되셨습니까?”
퀘이즈가 아무리 징징거려 봤자 휴고는 경제에 관련해서는 해줄 수 있는 조언이 없었다. 휴고는 경제 전문가가 아니었다. 돈벌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단지, 그런 전문가를 많이 수하로 거느리고 있을 뿐이었다.
휴고는 사람을 등용하는데 있어 능력만 봤다. 신분은 따지지 않았고 능력을 보이면 보이는 만큼 충분히 보수를 챙겨주었다. 그의 밑에는 능력 있는 평민 출신 인재가 많았다.
휴고는 사람을 직위와 능력으로만 구별했다. 그건 그가 신분 체제에 회의를 품어서가 아니었다. 고귀하건 비천하건 목이 잘리면 죽는 건 다 똑같았다. 왕이라고 여벌 목숨이 있는 건 아니다.
휴고는 제게 기어오르지만 않으면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짐이 왕이 된 것인지 장사치가 된 것인지 모르겠네.”
“버는 일이 시원치 않으면 쓰는 일부터 줄이시지요.”
“안 그래도 궁중 예산부터 줄이고 있어. 선왕께서.”
이 말을 하며 퀘이즈는 속으로 이를 아득 갈았다. 이제는 대놓고 망할 노친네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퀘이즈는 부관과의 내기에서 벌써 네 번 연속으로 졌다. 쓸 수 없는 말이 늘어나면서 스트레스도 커졌다.
“워낙 규모 크게 예산을 잡아서 말이야.”
선왕은 씀씀이가 큰 왕이었다. 재물에 욕심이 많으면서도 모으는 일보다 쓰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특이하게도 수하들에게 이런저런 이유로 상을 내리기 좋아했고, 상을 줄 때는 아낌없이 뿌렸다. 변덕이 심하고 국정 운영이 안정적이지 못했던 선왕이 인심을 잃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선왕께서 싸질러놓은 밥벌레부터 치워야겠어.”
부관의 눈이 번뜩였다. 다음 내기에 쓸 단어를 결정했다.
“내 배다른 형제가 몇인 줄 아나? 사내놈들은 대부분 다 죽었으니까 제쳐놓고. 공주만 스물여섯이네. 스물여섯! 이러니 예산이 뻥뻥 구멍이 나지.”
퀘이즈는 씨근덕거렸다. 죽은 노친네의 얼굴도 모르는 자식들을 먹여주고 재워줄 의리는 없었다. 퀘이즈에게 피를 나눈 형제는 누이 캐서린뿐이었다. 요즘 공작부인에게 약간의 관심을 보이고는 있으나 형제의 정을 느낄 만큼은 아니었다.
“다 쫓아낼 생각이야.”
“어떻게 말입니까?”
“각자 외가에서 거두라고 하고. 거둘 데 없으면 결혼시켜야지.”
치졸한 결정이었다. 왕으로서, 혹은 가장 위의 손위 형제로서 너그러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휴고의 생각으로, 퀘이즈에게는 많은 장점이 있었으나 못지않은 단점도 많았다. 대표적인 단점은 쪼잔함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쪼잔함이고 체면을 따지느라 관대한 척하지 않았다.
휴고는 퀘이즈의 쪼잔함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단편적인 기억이 떠올랐다. 아내가 찾아와 청혼한 날 그녀는 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주는 왕실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 팔려나갈 준비가 되어있지요. 적당한 지참금만 받으면 왕실에서는 절 아무 곳에든 시집보낼 겁니다. 팔려나가기 전에… 제가 절 팔고 싶었어요.”
휴고는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다.
공교롭게도 그녀는 어제 만약에 대해 이야기했고, 휴고는 만약이라는 가정은 쓸데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휴고는 만약을 그려보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만약 그가 그녀의 제안을 웃어넘겼다면. 한 발자국만 삐끗했으면 그녀는 지금 휴고 타란의 아내가 아니었다.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여전히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다.’라고 가정하는 일은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휴고는 등 뒤가 섬뜩했다.
왕이 치워 버리려고 하는 밥벌레 중에 그녀가 포함될 수 있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주는 남자와 결혼해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그녀와 어디선가 마주칠 수 있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다른 놈의 여자가 된 아내를 상상하면 속이 뒤집혔다. 그녀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신의 여자였다. 현실을 상기하면 안도감으로 식은땀이 났다.
휴고는 계속 뭐라고 말을 하는 퀘이즈를 흘끗 보았다. 자식을 방치한 죽은 왕도 나쁘지만, 눈앞에 앉은 놈도 나빴다. 오라버니가 되어서 누이들 좀 챙기는 일이 뭐가 그리 어려워서.
휴고는 조금 전까지 퀘이즈의 배다른 형제 내쫓는 프로젝트의 예산 절감 효과에 내심 동조했다. 그러나 본인과 관련되는 순간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밥벌레라니. 생각할수록 불쾌했다. 자신을 사생아라고 칭했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자신을 비하하는 모습을 처음 봐서 휴고는 적잖이 놀랐다. 휴고는 그 개념 속에 그녀를 넣어서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왕궁에서 지낸 생활이 매우 힘들었나?’
휴고는 아내의 어린 시절은 종종 들었으나 왕궁에서 지낸 동안의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시녀가 없어서 직접 일을 했다.
그는 알고 있던 사실에서 새삼스러운 분노를 느꼈다. 그녀는 왕궁에서 지낸 시간을 기억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비참한 생활을 했음이 틀림없었다.
“팔려나가기 전에… 제가 절 팔고 싶었어요.”
당시에는 그 말을 듣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에 대한 깊은 죄책감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를 찾아와 그런 말을 해야 했던 그녀의 비참함과 절망적인 심정을 왜 그때는 헤아리지 못했을까. 죽은 왕에 대한 불쾌함이 다시 치솟았다.
‘그렇게 뒈져도 싸지.’
휴고는 죽은 왕의 수치스러운 사인을 떠올리며 조소했다.
루시아는 집에 돌아와서 제롬에게 꽃 자수 손수건에 관해 물었다. 제롬은 속으로 웃으면서 겉으로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매일 확인하고 챙겨서 가지고 다니십니다.”
“…언제부터요?”
“수개월은 되었지요. 로암에서 지낼 때부터입니다.”
“지난번에 내게 그이에게 손수건을 선물하라고 말할 때는 그런 말 하지 않았잖아요.”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제롬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마님께서 드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님께서 드리지 않았다면 주인님께서 손수건을 어디서 얻으셨겠습니까.”
“…….”
내가 준 적이 없다고, 루시아는 제롬에게 말할 수 없었다. 준 적이 없다고 하면 그가 손수건을 몰래 가져갔다는 상황으로밖에 설명이 안 되었다. 남편의 주인으로서의 권위를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제롬은 이미 알고 있었다. 데미안 도련님에게 보낼 소포 꾸러미를 만들기 위해서 하녀가 바구니에 담아놓은 손수건 몇 장을 주인님이 슬쩍 들고 가는 모습을 무려 직접 목격했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주인이 도무지 할 것 같지 않은 해괴한 짓이었다. 그러나 제롬은 주인이 하는 모든 일에 의문을 품지 않는 충직한 집사였다.
마님께 입 다물었던 이유는 조심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사소한 사건이라도 두 분 사이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어서 제롬은 언제나 말과 행동을 조심했다.
“…단지, 그걸 가지고 다니실지 몰랐다는 말이었어요.”
“한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체면이 있잖아요. 어떻게 그런 것을 들고 다녀요. 누가 보면 웃어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인님께서는 대범하십니다.”
싱긋 웃는 제롬을 보면서 루시아는 새삼스럽게 제롬이 왜 유능한 집사인지 깨달았다. 제롬은 나이답지 않은 능수능란함을 갖추고 있었다. 남편의 뻔뻔함과 억지와 이기적인 면모를 대범함이라는 단어로 포장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했다.
루시아는 손수건의 의미를 깊이 생각했다. 그가 아들에게 보낼 손수건을 몰래 가져가는 장면을 상상하면 믿기지 않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오면서 그가 왜 그래야 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수건이 필요했으면 당당히 달라고 하는 편이 그에게 어울렸다. 그러지 못했던 그의 조심스러운 마음이 따뜻한 기운처럼 그녀의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손수건은 계기였다. 루시아는 그동안 그가 보여준 태도, 말, 표정으로 드러내는 감정을 하나씩 되짚었다. 어쩌면 알고 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니라는 생각으로 강하게 못박았다. 순전히 그녀가 겁쟁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다시 확인했다.
‘그를 사랑해.’
그의 마음을 짐작해 보았다.
‘어쩌면 그도… 나를 사랑해.’
그런데 그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인정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아직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하고 여전히 부정의 단계에 있을지도 모른다.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할까.’
그녀의 앞에 그에게 청혼하기 위해서 공작저를 찾아갔던 그날의 갈팡질팡하던 심정 이상으로 선택하기 어려운 갈림길이 놓였다.
휴고는 귀가하는 마차 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덮을 일이 아니야.’
두 사람의 관계는 지금 아주 평화로웠다. 그러나 불안한 평화였다. 그들이 지금 깊은 호수의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휴고는 외면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 영원하면 좋겠지만, 언제 어디서 돌이 날아올지 알 수 없었다. 더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기 전에 안전장치를 만들어야 했다.
망할 계약 결혼. 당시에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유리한 계약을 했다고 흡족해하던 자신을 두드려 패고 싶다고 먼 훗날 생각하게 될 줄. 그들 결혼은 시작부터 잘못 끼운 단추였다. 바로 잡지 않고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최악의 예는 무수히 많았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을 수도, 그를 미워해서 외면할 수도, 지금처럼 그를 향해 웃어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변해버린 그녀를 보듬으며 인내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를 괴롭히고 힘들게 할지 모른다. 그러면 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다.
휴고는 계약 결혼을 논의하던 그때로 되돌아가 그녀와 다시 속을 터놓고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계약이라는 껄끄러운 문제를 해결할 때가 왔다.
귀가하는 그를 맞이하는 아내를 보며 휴고는 심장이 아릿하게 죄어들었다.
‘이 여자 없이는 안 돼.’
“저녁은 드셨어요?”
“시간이 몇 시인데. 먹고 왔어. 당신은?”
“시간이 몇 시인데요. 저도요.”
휴고는 그녀의 허리를 한쪽 팔로 감싸면서 걸음을 옮겼다. 고용인들은 알아서 흩어졌다. 제롬은 주인께 잡다하게 고하고 결재받을 일이 몇 가지 있었지만, 급하지 않았다.
‘내일 받지 뭐.’
오늘 일을 절대 내일로 미루지 않는 성실한 집사는 이제 예전처럼 시계추 같은 생활을 하지 않았다.
“당신한테 할 말이 있어.”
“지금요?”
“음, 지금이 좋겠어.”
두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갔다. 응접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휴고는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갈등했다. 대화고 뭐고 먼저 한 번 할까. 보드라운 몸이 옆에 찰싹 붙어 있으니까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오늘 입궁했었는데요.”
“응? 아……. 그런다고 했지. 좋은 시간 보냈나?”
“네, 즐거웠어요.”
루시아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어떻게 말머리를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이 내게 결혼하자고 찾아온 날 말이야.”
갑자기 그가 꺼낸 화제가 워낙 의외라서 루시아는 그를 빤히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 나였지?”
“…그걸 이제 물으세요?”
결혼하고 1년 반이 지났다. 그의 질문은 너무 늦었다.
“상관없었으니까.”
처음에는. 상관없을 뿐 아니라 관심도 없었다. 그녀와의 결혼은 계약이었다. 계약이란 유리하면 그만이고 계약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는 두려워서 물을 수가 없었다. 그녀와의 결혼 생활이 아슬아슬한 난간을 디딘 것 같아서 괜스레 계약 결혼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사실 이 문제를 다시는 들추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더 시간이 지나면 늦는다는 위기감이 생겼고, 더불어 그녀가 결혼해 줘서 고맙다고 했던 말이 휴고에게 많은 용기를 주었다. 근래 자신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살가워져서 어쩌면 그녀가 결혼 생활에 꽤 만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상관이 있어요? 어떤 점이요?”
“난 당신의 후보 중 하나였나?”
그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어서 루시아는 그를 말없이 보았다.
“그러니까. 당신 제안을 내가 거절했다면 딴 놈 찾아갔을 거냐고.”
계약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휴고는 그것부터 알고 싶었다. 그 문제를 생각하면 휴고는 은근히 속이 부글부글했다. 그녀가 다른 놈의 여자가 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만 해도 부아가 났다. 벌어지지 않은 일로 그는 속을 끓였다.
루시아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쩐지 웃음이 났다.
“인제 와서 그게 중요해요?”
“중요해.”
“왜요? 제가 그런 후보들이 있다고 하면. 지금 그걸 알아서 어쩌시게요. 그 사람 해코지라도 하시게요?”
그는 마치 긍정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눈동자에 어떤 결심이 엿보였다. 정말 그런 후보가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기세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억지를 보며 루시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존재하지도 않는 누군가를 향해 마치 질투를 하는 것 같았다.
‘질투……?’
루시아는 왕비를 만나러 입궁했을 때, 장미궁에서 벌어진 일을 떠올렸다. 루시아에게 관심을 표하는 라미스 백작에게 그는 상당히 과격하게 반응했다.
사실 그때 루시아는 기분이 이상했다. 단순히 아내에게 접근하는 다른 남자에게 불쾌감을 표현한다고 보기에는 감정적이었다. 그는 감정적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않는 남자였다.
그때는 이것저것 떠오르는 가정들을 애써 무시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혼자만의 망상으로 만들어내서 들뜨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면 망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엿보았다.
“…그런 후보는 없었어요.”
그의 붉은 눈동자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기뻐하고 있었다. 루시아의 막연한 예감이 조금씩 형태를 잡았다. 심장이 쿵쿵 뛰고 입안이 말랐다. 그의 눈을 계속 바라보면서 루시아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거절했으면 아마 전 왕실에 지참금을 낸 누군가와 결혼했겠죠.”
그건 그것대로 또 기분이 별로군. 휴고는 누군지 알 길 없는 그놈이 매우 괘씸했다.
“외출을 나온 날이었어요. 전승 기념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죠. 그날 오후에 기사단 행진을 하는 당신을 봤어요.”
휴고는 그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던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었다. 어쩔 수 없이 했던 광대 짓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 파티가 당신과 첫 만남이었군.”
휴고는 소피아 로렌스와의 일이 떠오르자 찜찜했다. 그녀가 그 일을 다시 떠올리기를 바라지 않아서 슬쩍 눈치를 살폈다.
“저는 당신께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데미안을 온전히 인정하는 결혼을 제시하면 당신이 흥미를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제 생각이 맞았지요?”
“글쎄.”
휴고가 그녀의 제안에 흥미를 느낀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과감하게 데미안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청혼하러 왔다고 말하는 그녀는 제법 앙큼했다. 겉멋 든 자존심을 세우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가 그는 몹시 재미있었다.
“그게 이유 전부인가? 그건 너무…….”
“네. 터무니없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도박이었어요.”
“도박?”
“저는 궁에서 도망치고 싶었고, 보호자가 필요했어요. 당신의 권력과 부. 그게 필요했지요.”
“흐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는 그의 안색을 살폈다. 조금도 불쾌한 빛이 없었다. 그는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기분 나쁘지 않으세요?”
“음? 아, 그런 건 아닌데. 좀 의아해서 말이지. 당신이 그렇게 충동적인 성격은 아닌 것 같아서. 그리고 권력과 부……. 그다지 당신이 그런 걸 탐하는 것 같지도 않고.”
“저도 많이 망설였는데 하라고 적극 권유한 사람이 놀만이었어요.”
“놀만? 그 여류 작가?”
“놀만은 과감한 도전을 좋아했거든요.”
휴고는 내심 그 여류 작가를 살펴주라고 붙여놓은 자들에게 더 많이 신경 써주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권력과 부는 당신 기준이 커서 그래요. 전 의식주만 해결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으음, 의식주. 당신 입에서 그 단어를 듣는 건 참 묘해. 궁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힘들었어?”
“마구 사치를 부릴 수는 없었어도 지낼 만했어요. 사실은 권력과 부 말고도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고…….”
그게 뭐냐는 듯 바라보는 그를 향해 루시아는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당신이 미남이라서.”
그의 표정에 파동이 일었다.
“당신 얼굴을 정말 좋아해요.”
“…칭찬인가?”
“그럼요.”
“고맙군.”
휴고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반짝반짝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그녀의 눈빛은 뭐랄까. 값비싼 보석을 보며 감탄하는, 평소 그녀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물욕에 가득 찬 표정이라 어쩐지 기분이 애매했다.
“운이 좋았어.”
“그러게요. 운이 좋으니 공작부인이 되었죠.”
“당신 말고 나.”
휴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입술만 빨아들이는 가벼운 키스였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행운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당신은 도박에 인생을 걸 만큼 절실했고.”
휴고는 고개를 틀어 다시 키스했다.
“나는 당신 손에 잡힌 패였군.”
처음으로 그는 가진 모든 것에 감사했다. 부와 권력. 사는데 조금 편하기는 하지만, 편리함보다 더 큰 짐을 지우는 지긋지긋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 자만도 비하도 하지 않고 그저 무관심했던 자신의 외모도.
그녀의 선택을 좌우했던 모든 조건. 여자들은 그의 부와 권력을 좋아할 뿐이라고 여겼던 그가, 부와 권력으로 그녀를 얻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운명이 아닌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당신을 도박패라고 표현할 의도는 아니었어요.”
루시아가 변명했으나 휴고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서. 당신의 도박은 성공했어?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같은 도박을 벌일 만큼?”
그는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붉은 입술을 문지르며 쓸었다. 느릿하고 진득한 그의 손길을 느끼며 루시아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집요하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벅찼다. 주변을 떠도는 야릇한 성적 긴장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나른한 눈을 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홀린 것처럼 대답했다.
“네. 몰랐던 옵션이 하나 더 있더라고요.”
“옵션?”
루시아는 와락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에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췄다. 당황해 흔들리는 그의 눈을 보며 루시아는 야릇하게 웃었다.
“정력……?”
“…이 마녀 같으니.”
그가 달려들자 루시아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입술, 눈, 턱, 목 가릴 것 없이 마구잡이로 키스해 대며 짓궂게 깨무는 그의 입술을 피하고 그를 밀어내며 루시아는 숨이 차도록 웃었다.
휴고는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감격스러웠다. 이 웃음을 절대 잃고 싶지 않았다. 결혼해 줘서 고맙다는 그녀가 했던 말이 다시 벅찬 감동으로 다가왔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그녀도 같은 마음으로 느껴서 그 말을 했기를 바랐다.
“비비안. 나도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아.”
“네?”
“그날. 날 찾아와서 청혼해 줘서 고맙다고.”
루시아는 갑자기 숨이 막혔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가득한 애정과 기쁨을 보며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아……. 더는 안 돼.’
눈시울이 화끈했다. 저절로 눈 가득 눈물이 고였다. 당황해 흔들리는 그의 눈을 보았다. 눈을 감았다가 뜨자 흐려진 시야가 맑아지면서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가슴이 벅차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집어삼키는 감동을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흘러서 넘쳤다. 더는 감출 수 없었다.
“사랑해요, 휴.”
가슴 깊은 곳에서 치솟아 저절로 입 밖으로 나왔다. 고백과 동시에 루시아는 깨달았다. 그가 없는 삶을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그는 루시아를 보고 있었다. 잠깐 경직된 그의 붉은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모습을 보았다. 놀람과 의심, 그리고 기쁨. 마지막으로 환희로 떨리는 눈을 보며 루시아는 깨달았다.
‘나를 사랑해. 이 남자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감격으로 온몸이 떨리면서 이상하게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을 계속했던 것 같다. 정면으로 맞서지 못했을 뿐이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루시아는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향해 행복하게 웃었다.
“제게 장미꽃을 주실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