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장 만나는 사람들 (6)
휴고는 루시아를 안고 북적이는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시녀가 두 사람의 안내를 자처했다. 시녀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아까 루시아와 캐서린이 잠시 쉬었던 공주의 휴게실이었다. 루시아는 시녀를 보낸 사람이 캐서린이라는 사실을 알고 아까의 낯부끄러웠던 상황이 다시 떠올라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휴게실로 들어오자마자 휴고는 중앙의 가장 커다란 소파에 그녀를 내려놓고 발치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러지 말라고 루시아가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그녀의 오른쪽 발목을 잡아 구두를 벗기고 뒤꿈치를 살피고 있었다. 벗겨진 살갗에서는 피가 비쳤다.
쯧, 혀를 찬 그가 눈이 마주친 시녀에게 손을 까딱해서 부른 후 짧게 명령했다.
“약.”
시녀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신속히 사라졌다.
“구두가 왜 이 모양이야.”
휴고는 앙뜨와 계약을 해지할 명분을 또 하나 얻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이미 앙뜨와 나눈 계약서는 북북 찢겨있었다.
“종종 있는 일이에요. 구두는 신어서 잠시 걸어보는 걸로는 잘 모르거든요.”
“그런 종종 있는 일을 없애자고 값비싼 디자이너를 고용하는 거 아닌가?”
앙뜨를 비난하는 그의 숨은 뜻을 눈치채고 루시아는 잠자코 있었다. 역시 그는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괜한 트집을 잡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노출에 과하게 민감해서 루시아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가 그렇게 보수적인 남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꿈속에서 봤던 그의 여자들은 다 가슴을 보란 듯이 드러내는 옷을 입고 다녔다.
약과 붕대를 가지고 시녀가 들어오면서 뒤따라 하녀까지 들어오자 루시아는 차분하게 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하녀에게 마차로 가서 여분의 구두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괜찮겠어? 돌아갈까?”
휴고는 그녀의 상처에 꼼꼼히 약을 바른 후 붕대를 감으면서 물었다.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방금 오셨잖아요. 폐하께 인사도 드리지 못했어요.”
볼 때마다 인사하는 왕에게 새삼스럽게 무슨. 휴고는 그냥 이대로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앞으로도 그녀는 사람들 앞에 나설 일이 많을 테고 모든 자리에 그가 동반할 수는 없었다.
그는 쫓기듯 초조한 심정이었다.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는 높은 탑 꼭대기에 그녀를 가두고 싶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맑은 미소를 자신에게만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다 된 거지요? 어서 일어나세요.”
그녀는 누가 들어올까 봐 닫힌 문을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휴고는 다른 사람의 눈을 자꾸 의식하는 그녀가 못마땅했다. 부부의 친밀함을 보여주기 싫어서 그러는 건가. 그는 은근히 이모저모 기분이 상한 터라 그녀에게 약간의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붕대로 감싼 발을 잡아 위로 휙 올렸다.
갑자기 무게 중심이 뒤로 쏠리자 루시아는 뒤에 손을 짚어 넘어지지 않게 몸을 지탱했다. 휴고는 깜짝 놀라 휘둥그레진 그녀의 눈을 보면서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커진 눈과 벌어진 입술로 경악을 드러내는 그녀의 표정이 귀여웠다. 루시아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휴!”
그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짓궂게 웃으면서 이제는 드레스 자락을 올려 종아리 안쪽에 입술을 붙이더니 콱 깨물었다.
“아!”
루시아는 황망해서 비명을 질렀다.
“그놈 누구야?”
“누구요?”
“아까 그놈. 미뉴에트.”
“네? 아……. 잘 몰라요. 무슨 백작가 영랑이라고 했어요.”
“모르는 놈하고 춤을 췄다고?”
“모르는 사람하고 추는 경우가 더 많아요. 그런 거 모르시지 않잖아요.”
루시아는 그에게 잡힌 발을 빼내려고 버둥거렸다.
“앞으로는 거절해.”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놔주세요.”
그가 발목을 쥔 손을 놓자 안심한 것도 잠시, 휴고는 그녀의 곁에 바싹 붙어 앉으면서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귓가에 입술을 붙이며 속삭였다.
“발 정말 괜찮겠어? 내가 당신 안고 다닐까?”
“당신, 정말. 때와 장소를 가리라고 했죠!”
농담으로라도 ‘그럴래요?’라고 말을 받았다가는 이 남자라면 정말 하고도 남을 짓이었다. 루시아는 기겁해서 두 팔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럴수록 그는 더 단단하게 허리를 안았다.
그의 추근거림은 갈수록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침실을 벗어난 지는 옛날이었다.
휴고는 계속 몸을 뒤틀어 벗어나려는 그녀를 더 꽉 안으면서 턱을 잡아 입술을 부딪쳤다. 놀라는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웃었다. 입술 사이로 재빠르게 혀를 넣어 작은 입안을 깊이 훑었다.
입술을 떼자 목덜미까지 붉어진 그녀가 멍하게 그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그는 다시 말랑거리는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 빨아들였다.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그에게 붙들려있던 루시아는 문이 움직이는 것을 눈치채고 화들짝 놀라 그를 있는 힘껏 밀었다.
“누가 왔어요.”
휴고는 짜증이 나서 조금 열린 문을 노려보았다.
“무슨 일인가.”
목소리를 높이자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면서 시종이 쭈뼛거리며 들어왔다. 시종은 몇 번 밖에서 허락을 구했으나 답이 없어서 문을 열고 고개를 디밀었다가 황급히 놀라 물러난 터였다. 아마 공작저 고용인들이었으면 아예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폐하께옵서 공작부인을 염려하시어 의관을 보내셨사옵니다.”
쓸데없는 짓으로 방해하기는. 휴고는 왕의 과한 배려가 성가셨다.
“되었다. 의관까지는 필요치 않은 일이니. 곧 가겠다고 폐하께 고해 올려라.”
시종이 대답하고 나가는 와중에 하녀가 구두를 들고 들어왔다. 구두를 갈아 신는 그녀를 휴고는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정말 집에 가고 싶다. 빨리 빠져나갈 수 있는 핑곗거리가 없을까? 그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마님. 어떤 노귀족이 마님께 꼭 전해달라며 물건을 맡겼습니다.”
하녀는 주인의 눈치를 살피면서 마님께 고했다. 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체 모를 물건을 전달한단 말이냐? 평소에도 이런 식인가?”
주인님의 비난을 받은 하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혼날지 모른다고 생각은 했다. 그런데 일개 하녀에게 매달리는 귀족 노인의 눈이 간절해서 외면할 수가 없었다.
“경망스러운 아이가 아니니 무슨 일인지 들어보고 싶어요.”
휴고는 하녀에게 가져온 물건을 테이블에 올리라고 했다. 하녀가 품에서 꺼낸 물건은 손수건이었다. 남자 손수건이라는 수상쩍은 물건을 보는 휴고의 표정이 상당히 안 좋아졌다.
“마님께서 혹시 이걸 알고 계시는지 여쭈어달라 했습니다.”
하녀는 손수건을 펴서 한쪽 면을 보이게 했다.
휴고가 손수건을 집어 들어 확인했다. 귀족 가문의 인장이 손수건에 찍혀있었다. 독수리의 머리. 휴고가 기억하고 있는 가문 중에 이런 문장을 사용하는 곳은 없었다. 휴고는 손수건에 별다르게 수상한 것이 없음을 확인하고 루시아에게 건네주었다.
인장을 본 루시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걸… 노귀족이 전해달라고 했다고? 다른 말은?”
“본인이 바덴 백작이라고 하셨습니다.”
남부 변방의 귀족, 바덴 백작 가문의 가주 지오 바덴은 무너지는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백작의 어린 시절까지만 해도 집안이 이 정도로 어렵지는 않았다. 역사가 오래된 가문이라서 지역 유지 노릇을 하며 그런대로 작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살았다.
그러나 선친이 무리해서 사업하려다가 잘못되어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가문의 기반을 무너뜨렸다는 자책으로 괴로워하던 선친은 마음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고, 뒤처리는 아들의 몫이 되었다.
바덴 백작이 넘겨받은 유산은 작위와 대대로 살아온 낡은 저택, 그리고 어마어마한 빚이었다.
작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들었다. 매년 왕에게 상당한 세금을 바쳐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빚은 늘어났다. 그래도 한을 품고 돌아가신 부친을 생각하면 도저히 작위를 포기할 수 없었다.
백작은 가문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가족을 돌볼 틈이 없었다. 빚을 줄이고 가문의 회생을 위해 밖으로만 나돌았다. 아내는 묵묵히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두 아들과 딸 하나를 홀로 키우다시피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쓰러졌다. 백작은 아픈 아내의 곁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금방 털고 일어날 줄 알았으나 아내는 얼마 못 가서 세상을 떠났다. 항상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던 아내의 빈자리는 너무 컸다.
두 아들은 그런 대로 아버지를 이해했으나 어린 딸은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을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풀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 빠진 그를 일으켜 세운 계기는 모순적이게도 가문의 빚이었다. 집안을 일으켜야 장차 자식들에게도 이롭다고 믿었다. 백작은 상처받은 딸의 마음을 보듬어줄 시간이 없었다. 큰아들이 어머니 대신 동생들을 보살폈다.
한창 중요한 사업 이야기가 오가던 중이라 한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이에 막내딸이 가출했다. 아들들은 아버지가 걱정할까 봐 알리지 않았다.
철없는 것이 어디 가봤자 아는 친구 집에서 며칠 자다 오려니 해서 며칠은 찾지 않고 내버려 두었단다. 갈 만한 곳을 모두 뒤져도 누이를 찾을 수 없자 오라비들은 그제야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백작은 막내딸이 사라진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실종 소식을 알게 되었다.
백작은 아들 둘과 근 1년 넘게 딸을 찾아 헤맸다. 어디서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잘될 것 같아서 투자했던 상단이 도산했다. 조금 살아나던 가문이 다시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이대로는 아들 둘을 끌어안고 같이 죽겠구나 싶어서 결국 딸 찾기를 포기했다.
그 후로 20여 년. 바덴 백작은 열심히 살았다. 누가 물어도 노력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노력만큼 보답을 주지 않았다. 하는 일마다 자꾸 어그러졌다. 조금 나아지는가 싶으면 다시 제자리였다.
한창 전쟁 중에 남부는 전쟁터에서 그리 멀지 않아서 전쟁 특수를 누렸다. 모두 돈을 버는데 바덴 백작은 그러지 못하는 소수에 들어갔다. 빚은 늘어갔다. 대대로 내려온 저택이 넘어갈 지경에 이르렀다.
어렵게 살면서도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한 적 없는 백작은 큰 결심을 했다. 수도에 사는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백작은 어려서 수도에서 얼마간 유학 생활을 한 적 있었다. 그때 사귀어서 지금까지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유일하게 기댈 끈이었다.
비싼 게이트를 타고 수도로 올 여력이 되지 못해서 바덴 백작은 노구의 몸을 이끌고 수개월의 여정 끝에 수도에 도착했다. 때마침 수도는 새 왕의 즉위식으로 크게 들떠있었다.
친구를 찾아가니까 오랜만에 찾아온 어린 시절 친구를 크게 반기며 머물 방을 내주었다. 차마 아직 친구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친구는 그런 대로 힘깨나 쓰는 백작가 아들이었다. 백작위를 물려받지는 못했어도 내궁에서 열리는 즉위 축하연 초대장을 받을 정도는 되었다.
친구 덕에 처음으로 궁에 들어가 보았다. 축하연에서 백작은 말로만 듣던 높으신 분들을 실컷 구경했다. 무려 왕의 얼굴도 보았다.
난생처음 구경하는 화려한 파티를 즐기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사람들이 오늘 참석할 타란 공작 부부를 화제로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타란 공작은 백작도 아는 유명인이라서 호기심이 들었다.
타란 공작 부부가 입장했다고 사람들이 몰려갈 때 백작도 그 틈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공작부인을 보자마자 백작은 넋을 놓았다.
가슴에 깊은 응어리로 남아있는 가여운 자신의 아내와 잃어버린 막내딸을 모두 닮은, 마치 두 사람을 함께 보는 것 같은 귀부인이 거기 있었다.
어찌 저렇게 닮을 수 있을까. 백작은 멀리서 계속 공작부인을 훔쳐보았다. 친구에게 물어서 공작부인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공주님이셨다고 하더군. 타란 공작과 결혼한 지 1년이 좀 넘었나?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 화제의 중심이야. 안사람이고 딸아이고 집에서 입만 열면 그런 얘기라 아주 성가시다네.’
혹시 했던 마음이 팍 사그라졌다. 공주님이라니. 자신의 딸과 도무지 인연이 없는 신분이었다.
오랜만에 딸을 떠올리며 가슴앓이를 해서 그런지 그날 밤 꿈에서 딸을 보았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린 아가씨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보니 꿈에서 딸을 본 것인지, 낮에 본 공작부인을 본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딸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던 기억에 혼동이 일어났다. 그 정도로 공작부인은 딸을 빼닮았다.
‘오늘도 무도회 초대장을 얻을 수 있겠나?’
백작은 친구에게 부탁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라며 친구는 흔쾌히 승낙했다. 오늘 다시 공작부인을 보면서 백작은 또 넋을 놓았다. 어제 봤을 때보다 더 딸과 닮아 보였다. 남이라면 저렇게 닮을 수는 없었다.
옆을 괜히 몇 번 지나가면서 귀부인들과 이야기하는 공작부인을 남몰래 살펴보았다. 웃는 모습이 딸과 똑 닮았다. 멀리서 볼 때는 알 수 없었던 눈동자 색은 맑은 호박색이었다.
바덴 가문에서 태어나는 호박색 눈의 여아들은 행운의 상징이라고 해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백작은 아내의 눈동자 색에 반했고, 아내를 닮은 동시에 행운의 눈동자를 지닌 딸의 탄생을 그는 몹시 기뻐했었다.
아내와 똑같은, 그리고 딸과 똑같은 호박색 눈동자를 지닌 공작부인. 백작은 가슴이 벅차면서 후벼 파이는 것처럼 아팠다. 설마? 아니겠지. 혹시? 그럴 리 없다. 백작은 고뇌하며 갈팡질팡했다.
다가가서 말을 걸어보고 싶어도 그럴 틈이 없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빼곡해서 낯선 노인이 접근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공작부인이 홀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딸이 첫 무도회에서 춤을 추던 모습과 겹쳐졌다.
나중에 입장한 공작이 공작부인을 안고 파티장을 벗어났다. 백작은 멀리서 뒤를 밟았다. 공작 부부가 점점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자 더 뒤를 따를 수 없었다.
공작부부가 사라진 복도 안쪽을 기웃거리며 한참을 서성거렸다. 그러다 안쪽에서 나오는 낯익은 하녀를 발견하고 백작의 눈이 번쩍 뜨였다. 공작부인이 저 하녀를 불러 말하는 것을 어제와 오늘 여러 번 보았다.
늘 품에 넣어 다니는 인장을 손수건에 찍어 하녀 손에 쥐여주며 부탁했다. 혹시 공작부인이 자신의 딸과 무슨 관계가 있으면 바덴 가문의 존재를 알지 않을까. 한 가닥 미련이었다.
하녀는 곤란해했으나 다행히 손수건을 받았다. 얼마 후 주머니를 들고 돌아온 하녀가 아직 서있는 백작에게 묵례하고 복도 안쪽으로 들어갔다.
백작은 초조한 심정으로, 하녀가 가버린 방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루시아는 손수건을 바라보며 꿈속 기억을 회상했다. 지금으로부터 수년 후 만날 외삼촌 말에 의하면 외조부는 루시아가 스물한 살 무렵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지금 바덴 백작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귀족은 외조부님이 분명했다.
‘상심이 크셨지. 마지막까지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던 저택이 남의 손에 넘어갔으니. 도움을 받으려고 수도까지 다녀오셨는데 잘 안 되었어. 노쇠한 분이 먼 여정으로 기력이 약해지신 이유도 있고.’
돌아가신 외조부님 뒤를 이어 백작위를 받은 외삼촌은 외조부의 차남이었다. 즉, 루시아 어머니의 작은 오빠였다. 원래 작위를 받았어야 하는 장남은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후 불의의 마차 사고를 당했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형님은 처지를 비관하며 술로 연명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외삼촌은 말했다.
루시아는 자신이 일가붙이 없는 고아라고 생각했다가 찾은 외가 친척이 반가웠다. 텅 빈 외로운 마음에 온기가 차는 기분이었다. 외가의 어려운 처지가 마음이 아파서 도움을 요청하는 외삼촌에게 남편 몰래 돈을 마련해 주었다. 메튼 백작을 소개해 달라고 하기에 중간에서 다리도 놔주었다.
‘난 어떻게 해서든 가문을 지키고 싶구나. 작위마저 잃을 수는 없어.’
외삼촌은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못 할 일이 없다고 말했다.
다 쓰러져가는 이름뿐인 백작 가문을 짊어진 외삼촌이 보기에는 메튼 백작은 엄청난 힘을 가진 고위귀족이었을 것이다. 외삼촌은 수도에 눌러앉아 메튼 백작을 매일같이 만나러 왔다. 루시아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으나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도 점점 외삼촌의 표정에는 활기가 돌았다.
그러나 루시아는 점점 메튼 백작부인으로 사는 일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외삼촌에게 이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
‘미안하구나. 너를 도울 힘이 내게는 없다. 나는 네 남편의 도움이 필요해. 네가 참으면 안 되겠니?’
외삼촌의 거절은 큰 충격이었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언덕이라는 믿음은 루시아의 일방적인 착각이었다. 외삼촌은 루시아를 조카가 아니라 메튼 백작부인으로 보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외삼촌이 도울 능력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배신감을 느꼈다. 남편의 눈을 피해서 외가에 여러 번 돈을 보태주느라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데. 외가에 대한 애달픈 마음이 혼자만의 마음이었다고 생각하자 자신이 바보 같고 외삼촌이 원망스러웠다.
외삼촌이 이혼 절차를 돕는 일을 거절한 후 다시 돈 얘기를 꺼냈을 때, 루시아는 마지막으로 돈을 마련해 주면서 인연을 끊었다. 저택에 드나드는 외삼촌을 그 후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메튼 백작 가문이 반역죄로 멸문하고, 외가도 휘말렸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반역자 명단에 바덴 백작 가문이 올라있었다.
루시아는 그저 넋을 놓고 하늘만 봤다. 외삼촌을 원망했으나 죽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니었다. 외삼촌이 얼마나 가문을 살리려고 노력했는지 곁에서 보았다. 메튼 백작의 발이라도 핥을 것처럼 굽실거렸던 외삼촌의 비굴한 모습을 떠올리며 눈물을 쏟았다.
역모라는 오욕을 쓰고 죽은 외삼촌이 과연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차라리 서로 모르는 채 살았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텐데.
루시아는 꿈속에서 회한으로 가슴을 쳤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절대 외가와 연을 맺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비비안.”
루시아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지나치게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었다.
“누구지?”
“…모르는 사람이에요.”
강한 힘이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턱을 잡아 돌렸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유난히 선명해서 루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당신 표정이 어떤지 알아? 말했지. 당신 거짓말이 서툴다고.”
손수건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쉴 새 없이 다양하게 변했다. 하녀를 내보내고 휴고는 그녀가 마음을 추스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가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자 더는 보고 있을 수 없었다. 휴고는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말해. 누구야.”
“…….”
그녀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세운 견고한 벽을 느끼며 휴고는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모르는 자야?”
“…….”
“당신과 상관없어?”
“…….”
그가 아무리 다그쳐도 루시아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외조부의 등장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이렇고 저렇고 그에게 친절하게 설명할 정신이 아니었다.
꿈속에서 외조부의 존재를 알았을 때는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니어서 외조부를 만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외조부가 마치 죽었다가 되살아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죄를 물어야겠군. 감히 공작부인에게 이런 위험한 물건을 보내다니.”
“위험한… 물건이라니요?”
“당신과 상관없는 자야. 신경 쓸 필요 없잖아?”
그의 핏빛 눈이 잔혹하게 빛났다. 루시아는 싸늘하게 말하는 그가 무서워서 왈칵 겁이 났다. 언젠가 그가 지금처럼 차갑고 잔인한 표정으로 돌아설 것 같았다. 깊은 절망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라 주룩 흐르자 휴고는 당황했다. 심사가 삐죽해져서 부리던 심술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비비안. 내가 잘못했어.”
휴고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며 거부하듯 몸을 뒤틀고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휴고는 더 꽉 그녀를 안았다.
“미안해.”
휴고는 몇 번이고 그녀의 귓가에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루시아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휴고는 얌전해진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무서워요”
“안 그럴게.”
그녀에게 겁을 주려던 의도는 없었다. 그저 그녀에게 서운했을 뿐인데. 무섭다는 말에 휴고는 의기소침해졌다. 그는 잠시 후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묻지 않을게.”
휴고는 자신의 비겁함이 한심했다. 얼마나 용렬한가. 자신이 끌어안은 비밀은 그녀에게 말하지 못하면서 그녀의 비밀은 용납하지 못한다니.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에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그녀의 조금 긴 침묵을 그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아마 그분. 제 외조부님일 거예요.”
“당신, 외가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없다고 생각하려고 했어요.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러기를 바라셨거든요.”
루시아의 어머니는 죽는 순간까지 외가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았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외삼촌을 만나고 나서야 외가에 대해 알았다. 어머니는 왜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두고두고 생각했다.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에게 나는 왜 아버지가 없느냐고 떼를 쓴 적이 있었다. 우는 어머니를 보고 루시아도 죄송해서 같이 어머니를 안고 울었다. 잘못했다고 사과드리자 어머니는 말했다.
‘엄마도 엄마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그래, 아가. 네가 엄마를 슬프게 해서 우는 게 아니란다.’
아마 어머니는 철모르는 시절 집을 나와 사생아를 낳아 키우는 자신의 처지가 죄스러워 차마 집에 연락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가뜩이나 어려운 집안 사정을 아니까 루시아는 왕실에 맡기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끝내 외가를 알려주지 않은 진짜 이유를 짐작했다. 홀로 아이를 낳아 키우다가 죽은 막내딸의 비극을 집에 알리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루시아는 그렇게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했다.
“만나고 싶지 않아?”
“그러려고 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어떻게 저를 알아보셨을까요?”
“외조부라면 당신 어머니를 알 테니까. 당신이 어머니를 많이 닮았나 보군.”
“아니에요. 어머니는 저보다 훨씬 아름다운 분이었어요.”
“아름다운 분이었겠지. 당신 어머니니까. 그래도 당신이 더 예뻐.”
루시아는 그의 가슴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알아요? 제 어머니를 보신 적이 없잖아요.”
“안 봐도 알아.”
루시아는 그의 억지에 배시시 웃으면서 다시 그의 품에 얼굴을 기댔다.
“천천히 생각해. 그분과 연락이 닿을 방법은 내가 알아보도록 하지. 언제든 마음이 결정되면 말해. 만나기 싫으면 다시는 당신에게 접근하지 않게 조치하고 만나겠다면 자리를 만들어볼 테니까.”
“…네.”
루시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말없이 바라보자 그가 시선을 마주쳐 왔다. 다정한 남편. 그가 곁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가슴 벅차고 눈시울이 시큰한 감격이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따뜻해서 가슴이 저렸다. 행복했다.
현재에 만족해야 한다는 걸 안다.
‘사랑해요, 휴. 당신을 사랑해요.’
입 밖으로 꺼내자마자 그의 눈동자의 온기가 단번에 식어 버리지는 않을까. 그 한마디가 모든 것을 망가뜨릴까 봐 너무너무 무서웠다. 예전에는 그저 두려운 정도였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짙어지는 공포가 끔찍했다.
‘이 남자 없이는 나는 살 수 없어.’
말라 죽을 것이다. 어두운 창고에 버려진 화분이 잎과 줄기가 바싹 마르는 것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그에게 고백하고 싶었다.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도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 그는 아직 그런 마음을 자각하지 못했어. 두 가지 상반된 확신이 맹렬하게 그녀의 마음속에서 대립했다.
그녀는 도박을 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놀만의 조언대로 질러볼 수 없었다. 도박이 실패하면 후회하며 가슴을 칠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그가 미간을 찌푸리자 루시아는 흠칫 놀랐다. 생각이 읽혔는가 싶어서 가슴이 덜컹했다.
“비비안. 내가 또 뭘 잘못했나?”
그의 손이 눈가를 닦아 주고서야 루시아는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머니 생각이 나서. 감정이 좀 격해졌나 봐요.”
휴고는 루시아가 눈물을 닦는 모습을 불편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태어나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멀미란 이런 것인가 생각했다.
“파티장으로 나갈 수 있겠어?”
“괜찮아요. 염려하지 마세요. 실수하지 않을게요.”
“실수가 걱정되어서가 아니야. 힘들면 애쓸 필요 없어.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해.”
“너무 그렇게 응석 받아주지 마요. 당신 없이 아무것도 못 하는 어린애로 만들고 싶어요?”
그거 정말 좋은 말이군. 휴고는 생각했다.
“부디.”
루시아는 숨이 막힐 것 같아서 크게 호흡했다. 루시아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침을 삼키며 나오려는 말도 함께 넘겼다.
사랑해요.
그녀를 보고 있던 휴고는 지금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친 기분이 들었다.
“비비안.”
“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들 주변을 아슬아슬하게 떠돌던 뭔가를 파삭 깨뜨렸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문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며 휴고는 무척 짜증이 났다. 그는 문을 향해 ‘무슨 일이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까 왔던 시종이 주춤주춤 들어와서 눈치를 살폈다. 쏘아보는 타란 공작의 시선이 사나워서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폐하께옵서 두 분이 언제 오실지 알아오라 하셨습니다.”
“지금!”
휴고는 버럭 받아치고는 씨근거리면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
“…간다고 가서 말씀 올려라.”
루시아는 울어서 망가진 화장을 고친 후 휴게실을 나왔다. 그와 다시 파티장으로 가는 길에 복도를 유심히 살폈지만, 노귀족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을 보며 겉으로 웃어도 루시아는 내내 딴생각 중이었다. 가끔은 집중력이 흐트러져 멍해있는 그녀를 몇 번 그가 자연스럽게 허리를 안거나 등에 손을 얹어서 깨워주었다. 미안함을 담아 그를 보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는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우려하는 표정으로 ‘괜찮겠어? 돌아갈까?’라고 몇 번을 물었고, 루시아는 꿋꿋하게 ‘괜찮아요.’라고 대답했다.
다시 휴게실에서 잠시 쉬고 파티장으로 돌아온 루시아는 어떤 노신사와 짧게 시선을 마주쳤다. 노신사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루시아는 어쩐지 낯선 노인이 낯설지 않았다.
‘저분이구나.’
이상했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았던 아버지처럼 외조부도 별다른 의미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명치끝이 답답하면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코끝이 찡하고 목이 타는 것처럼 아파서 루시아는 숨을 크게 쉬고 허리를 폈다.
꿈속의 노련한 경험이 아니었다면 아마 울음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루시아는 다가오는 귀부인을 향해 웃었다. 공작부인으로서 대외적인 모습을 보여야 하는 자리였다.
루시아는 동요하는 자신의 복잡한 마음을 꾹 눌렀다.
* * *
사내의 상징이 여린 살을 헤집으며 밀고 들어왔다. 숨 막히도록 가득 채우고 들어왔다가 거칠게 빠져나간다. 철썩철썩 살을 부딪치며 그가 허리를 움직여 진퇴를 반복했다.
오늘 그는 좀 거칠었다. 루시아는 그의 성기가 민감한 안을 찌를 때마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손이 루시아의 손을 깍지 껴 누르고 맞물린 하복부를 계속 밀어 올렸다.
두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은 채 루시아의 몸은 크게 위아래로 요동쳤다. 그가 내뿜는 열기가 너무 뜨거워서 맞닿은 피부가 데일 것 같았다. 루시아 입에서 흘러나오는 교성이 비명처럼 커졌다.
“다정하기만 해요? 침대에서도?”
캐서린의 놀리던 말이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지금의 그는 절대 다정하지 않았다. 폭군처럼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가차 없이 안을 꿰뚫고 들어와서 깊은 안쪽까지 점령했다.
좁은 질벽은 변덕을 부리는 것처럼 저항하듯 조여들다가 빠져나가는 성기를 붙잡듯 달라붙었다. 잠깐씩 그의 미간이 좁혀지면서 더 묵직하게 치고 들어왔다.
“흐읏!”
절정에 오른 그녀의 내벽이 그의 것을 꽉 물고 잡아당겼다. 그의 사나운 신음 소리에 이어 뜨거운 것이 안으로 쏟아졌다. 루시아의 온몸이 잔 경련을 일으켰다. 쾌락의 해일이 물러가자 루시아는 온몸의 힘이 쭉 빠져서 헐떡였다.
그러나 그는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뜨거운 내벽에 담그고 있던 자신을 빼내고 루시아의 허리를 잡아 몸을 뒤집었다. 엉덩이를 세우고 허벅지 바깥쪽으로부터 그대로 단번에 깊이 삽입했다. 눈앞이 짧게 점멸했다.
“흑!”
그는 루시아의 도드라진 등뼈를 따라 입술을 비비면서 끈적이는 키스를 했다.
“아!”
단단한 살덩이가 뒤에서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 루시아의 손이 시트를 움켜잡았다. 엉덩이가 강하게 그의 손에 잡혀 일그러졌다. 빠져나간 그가 철썩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박아 넣었다. 몸이 크게 흔들리고 팔이 휘청했다.
저릿저릿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오늘 그녀의 몸은 예민했다. 질이 조여들며 파고드는 그를 꽉 물었다. 그의 숨소리가 더욱 흥분해서 거칠어졌다.
뜨거운 열락의 시간이 지나고, 루시아는 그의 손이 온몸을 어루만지는 후희에 나른하게 빠져들었다.
‘시간을 끌고 오래 고민할 문제가 아니야.’
루시아는 아까 외조부를 스쳐본 후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외조부님을 만나보고 싶어요.”
“알았어.”
그는 간단히 답하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그의 팔이 등을 감싸 힘주어 안아주었다. 온몸이 그와 맞닿아 적당히 압박되고 눌리는 안정감은 모든 불안을 날려주었다.
“그리고… 내일 파티는 나가고 싶지 않아요.”
내일은 즉위 축하 무도회의 마지막 날이었다. 가면무도회를 한다고 하는데 루시아는 내키지 않았다. 이틀 연속 파티를 나갔더니 피곤했다. 자꾸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의외의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이 힘겨웠다. 육체적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그가 허락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대답이 빠르고 쉬웠다.
“그래도 돼요? 즉위 축하연인데…….”
“첫날 축하연을 빼면 무도회는 귀족들 놀라고 만드는 놀이터야. 모두 다 갈 필요는 없어. 앞으로도 파티에 나갈지 말지 당신이 좋을 대로 해.”
“…안 나가고 집에만 있어도 돼요?”
“돼.”
바라는 바였다. 그래주면 고맙지. 휴고는 생각하면서 그녀의 턱 안쪽에 고개를 디밀고 키스했다.
“사교 활동이 힘들면 하지 마.”
그녀는 사교 활동을 즐기지 않았다. 휴고는 북부에서 지낼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들이 보면 지루할 만큼 단조로운 생활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휴고는 그녀의 내향적 일면이 마음에 들었다. 온갖 무도회를 쫓아다니며 사내놈들과 웃음을 섞는 일은 생각만 해도 불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