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장 만나는 사람들 (3)
마차가 공작저에 도착했다. 밖에서 하인이 문을 열었으나 휴고는 일어날 수 없었다. 자신의 다리를 베고 아내가 아주 곤히 자는 중이었다.
궁에서 마차에 오를 때만 해도 멀쩡했으나 마차에 올라 얼마 안 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졸더니 그가 그녀의 옆자리로 옮겨 앉아서 기대게 하자 금방 잠들어 버렸다.
‘많이 긴장했겠지. 피곤하기도 했을 테고.’
실수 한 번 없이 큰 무대를 의연하게 감당한 그녀가 대견했다.
오늘 과시하는 것처럼 곁을 지켰으니 누구도 그녀를 섣부르게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북부처럼 사람들 모아놓고 경고하는 방식은 할 수 없었다. 그는 오늘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공작부인의 뒤에는 타란 공작이 있음을 기억하라고.
핀으로 잘 고정해 올린 머리가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 오는 길에 일부가 풀렸다. 휴고는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음미했다. 아내를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이 온화하게 풀려있었다.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랄 만큼 평화로웠다.
그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등을 받치고 다리 안쪽으로 팔을 넣어 안아 들었다. 그녀를 안아 든 채 저택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 침실까지 들어갔다. 침대에 내려놓자 조금 전까지 미동조차 없이 자던 루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휴.”
휴고는 자신을 향해 뻗는 그녀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술을 눌렀다.
“집이야.”
멍하게 그를 보며 몇 번 더 눈을 깜빡이던 루시아의 시선이 점차 또렷해졌다.
“…저도 모르게 잠들었네요.”
잠깐의 단잠 덕인지 머릿속이 한결 개운했다. 휴고는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을 잡아 도와주었다.
“혹시 오늘 저도 모르는 실수한 건 없어요?”
“전혀.”
“후우……. 다행이다.”
루시아는 침대 줄을 잡아당겨 하녀를 부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부터 벗고 싶었다. 하녀는 들어오자마자 저녁 식사에 대해 주인 부부 의중을 여쭈었다.
“생각 없구나. 당신은요?”
“나도 생각 없어.”
하녀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침실을 나갔다.
“아까… 연회장에서요. 라미스 경이 제게 편지를 주려고 했어요. 전 거절했고요.”
연서는 거절했지만, 사교계의 소문은 어떤 식으로 튈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그가 다른 곳에서 왜곡된 소문을 듣기 전에 루시아는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그에게 지나가듯 말했다.
“뭐?”
휴고는 미간을 팍 일그러뜨렸다. 그놈이 감히 자신의 경고를 무시했다.
‘파비안은 대체 뭘 하는 거야.’
그놈을 탈탈 털어 조사하라고 한 지가 언제인데!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는 파비안에게 애꿎은 불똥이 튀었다.
“아무 일 없었으니까 라미스 공작가와 불편한 관계는 되지 마세요.”
타란 공작과 라미스 공작은 함께 힘을 보태서 왕을 보좌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정치는 잘 모르지만, 그쯤은 알았다. 사소한 감정적 문제로 두 세력이 어그러진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별거 아닌 일로 당신 일에 차질이 갈까 봐 걱정이에요.”
“당신이 걱정할 일은 없어.”
예전이었으면 눈에 거슬리면 치웠다. 뒷일 따위는 상관없었다. 공작의 적장자가 아닌 라미스 공작 본인이라고 해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일을 저지르면 뒷감당은 누군가 해야 할 테지만, 그게 뭐. 가문이 어찌 되든 알 바 아니고 시간만 죽이며 사는 그가 세상에 겁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지켜야 할 존재가 있었다. 아내를 세상의 풍파에서 완벽하게 지키려면 가문도, 가문이 가진 권력과 재물도 지켜야 했다.
“하긴, 오죽이나 당신이 잘 알아서 하시겠어요.”
가볍게 웃는 그녀를 보다가 휴고는 등 뒤에서부터 그녀를 끌어안으면서 뒷목에 입을 맞추었다.
“걱정할 필요 없지만, 걱정해도 돼.”
“네?”
그녀가 어떤 고민도 걱정도 하지 않도록 완벽하게 지켜주고 싶으면서도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 주었으면 좋겠다. 자기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알쏭달쏭한 말을 던져놓고 그가 아무 말이 없자 루시아는 그저 웃음으로 넘겼다.
휴고는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목욕을 마친 후 간편한 차림으로 집무실로 들어갔다. 처리해야 할 일은 늘 쌓여있었다. 빠르게 살필 수 있는 서류 몇 가지를 확인하고 결재 서명을 했다. 집무실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이 있었다. 휴고는 여전히 분주하게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주인님.”
제롬이 아닌 중년 여자의 목소리에 흘끗 시선을 들었다.
“무슨 일이냐.”
“마님께서 목욕하시다가 욕조에서 잠이 드셨습니다. 도통 일어나지 않으시어…….”
무리해서 깨울 수 없다면 하녀들이 함께 마님을 끌어 침대로 옮기면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휴고에게 고하러 왔다. 하녀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공작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물러가 쉬어라.’라고 명을 내린 것이다.
잠시 후, 하녀들이 모두 물러간 텅 빈 목욕탕에 그가 들어섰다. 루시아는 욕조에 몸을 담근 채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맑은 물에 잠긴 나신이 뽀얗게 비쳤다.
휴고는 욕조 턱에 걸터앉아 촉촉하게 젖어있는 그녀의 붉은 입술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마치 붉은 물이 손에 묻어나올 것 같아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제 손을 살폈다.
순한 아기처럼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깊이 침잠했다.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어딘가가 뭉클했다.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셔츠를 걷고 두 팔을 물 안에 넣어 그녀를 건져 올렸다. 타월을 깔아놓은 침대에 그녀를 눕히고 또 다른 타월로 젖은 몸을 닦아냈다. 어둑한 침실 안에 그녀의 나신은 달처럼 빛이 났다.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을 느끼면서 이미 그의 하체는 단단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벌어진 그녀의 작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살짝 빨아들이고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다가 핥았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입술을 맛보다가 입안으로 혀를 넣었다.
그녀의 입안은 평소보다 더 열기가 있었다. 그녀의 치열을 훑으면서 입 안쪽 살을 더듬었다. 처음에는 반응이 없던 그녀의 혀가 자꾸 그의 혀와 맞닿으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겨있던 루시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올라갔다. 늘어져있던 두 팔을 올려 그의 목을 감았다. 부드럽게 움직이던 그의 혀가 격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젖은 소리가 울렸다. 그녀의 목에서 희미한 신음이 흘렀다.
“흣…….”
그는 그녀의 입안을 아주 샅샅이 뒤지는 것처럼 때로는 깊게 때로는 얕게 강약을 주며 길게 키스했다. 그의 키스만으로도 루시아는 완전히 달아올라 눈이 흐려졌다.
키스가 끝난 후에도 그의 입술은 쉬지 않았다. 눈, 코, 귓가에 자잘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귓불을 살짝 깨물고 귀 뒤를 핥아 올리고 목선을 따라 연속해서 입술을 붙였다.
축축하면서도 부드럽게 닿는 그의 입술을 느끼며 그녀의 다리 안쪽이 따끔하게 조여들었다. 그곳이 기이한 열기로 간지러웠다.
그의 손이 가슴을 움켜잡자 움찔한 루시아의 입에서 탄식 같은 신음이 흘렀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그의 손가락이 가슴 둔덕을 주물렀다. 가슴이 그의 손아귀에서 야하게 일그러졌다.
휴고는 적당히 손안에 잡히는 말랑한 가슴을 어루만지며 목덜미를 길게 핥았다. 동그란 어깨를 깨물었다가 흔적처럼 남은 잇자국을 혀로 살살 핥고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몸에서 달콤한 향이 진동했다. 맛있다. 모조리 맛보고 싶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살결에 자꾸 혀를 대고 싶었다. 그는 하얀 피부에 붉은 흔적을 촘촘하게 새겼다. 내 것. 내 여자. 강렬한 소유욕과 욕망이 뒤섞여 그를 휘어잡았다.
그는 최고의 성찬을 앞에 둔 미식가가 된 것처럼 조금씩 그녀의 온몸을 삼켰다. 발가락 끝에서 이마에 이르기까지 그의 입술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느릿하게 조금의 쉴 틈이 없이 그의 입술과 혀가 핥고 빨았다.
커다란 손은 부드럽게, 때로는 강하게 그녀의 온몸을 쓰다듬고 주물렀다. 그러면서도 크게 자극을 주는 부분은 무심할 정도로 방치했다. 그녀의 호흡이 가빠지고 몸을 뒤틀며 달콤한 고통에 괴로워했다.
루시아는 진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을 만지고 핥는 그의 애무는 간지럽고 때로는 짜릿짜릿하지만, 그 이상의 자극은 주지 못했다.
애가 타면서 민감한 감각이 일깨워지는 기분은 황홀했다. 괴롭지만 좋았다. 계속 더 해주었으면 좋겠다가도 어서 그의 거대한 상징이 몸을 꽉 채우는 압박을 느끼고 싶었다.
그와의 정사는 언제나 예측불가였다. 애무하는 강도나 들이는 시간이 언제나 달랐다. 적당히 달아오를 정도로만 애무할 때도 있고, 오늘처럼 오랜 시간을 들여 공을 들일 때가 있는가 하면, 간혹 잔뜩 흥분해서 그대로 삽입할 때도 있었다.
그중 어떤 것이 딱 잘라서 좋다 싫다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가 능란하게 그녀의 몸을 굴려대는 것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가 한입에 그녀의 가슴 하나를 삼켜 흡입하는 것처럼 강하게 빨았다. 느릿한 자극에서 갑자기 강렬한 자극을 받은 그녀가 교성을 질렀다. 그의 혀가 빳빳하게 일어난 유두를 감싸고 이 끝으로 살짝살짝 깨물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저절로 허리가 튕겨 올라가고 이미 젖어있던 하체에서 뜨거운 뭔가가 흘렀다. 그가 몸을 일으켜 옷을 벗는 것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가끔은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과감해지지만, 평소에는 그의 맨몸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그의 양손이 루시아의 발목을 잡아 벌리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압도적인 강한 힘이 단번에 좁은 길을 타고 들어왔다.
“하악!”
크게 확대된 동공으로 루시아는 헉헉 숨을 골랐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은근하고 감질나게 건드리기만 하다가 느닷없이 밀려오는 엄청난 자극에 숨이 막혔다. 한껏 예민해 있던 질벽이 갑작스러운 침입자를 거부하는 것처럼 꽉 눌렀다. 휴고는 한숨을 토했다.
“후우……. 힘… 빼. 너무 조이잖아.”
단 한 번 들어온 것으로 루시아는 충만한 만족감과 미약한 절정을 느꼈다. 내벽이 경련하면서 그의 성기를 이리저리 눌러댔다. 휴고는 그녀의 귓가에 키득거리면서 속삭였다.
“아무튼, 야해가지고. 넣기만 해도 당신 몸이 좋아죽는군.”
루시아의 얼굴에 확 열기가 몰렸다. 수치심으로 자극받은 몸이 그를 꽉 죄자 그가 윽,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조금 쌤통이었다. 루시아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허벅지 안쪽에 힘을 주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재밌다. 그녀는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으면서 그와 맞물린 하복부를 콱 깨무는 것처럼 조였다.
“비비안.”
그가 으르렁거렸다. 장난스럽게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을 보며 휴고의 입 끝이 비뚜로 올라갔다. 해보자는 건가. 그는 피식 웃으면서 그녀의 허벅지를 힘주어 잡아 벌렸다. 그가 쑥 빠져나갔다가 퍽 하고 밀고 들어왔다. 쿵 소리가 나는 것처럼 온몸이 저릿하게 울렸다.
“아!”
“정오에 당신 데리러 왔을 때부터 이러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
상대방을 잡아먹을 것 같은 치열한 정사의 시작이었다. 강건하게 기립한 성기가 여린 살을 거침없이 파고들어 자극하는 지점을 긁었다. 그녀의 내벽 주름이 감각근에 착 달라붙어 이래도 견디나 보자는 것처럼 죄고 비틀었다.
그녀의 하얀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고 땀으로 촉촉하게 젖었다. 때로는 가냘픈 교성이, 때로는 자지러지는 비명이 침실 안에 울렸다.
그의 움직이는 근육을 타고 흐르는 땀이 시트로, 그녀의 몸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그의 입에서도 간헐적으로 신음이 흘렀다.
둘 다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서로의 몸만 갈구하며 한 몸으로 뒤섞였다.
“하응……. 응!”
늘씬한 두 다리가 그의 허리를 감았다. 그의 입술은 목덜미를 끈질기게 지분댔고 허리 아래로는 추삽질을 멈추지 않았다. 예민하게 부풀어 오른 가슴이 그의 가슴에 맞닿아 쓸릴 때마다 짜릿한 감각이 온몸을 휩쓸었다.
두 팔로 그의 어깨를 감으려 해도 땀에 미끄러져 자꾸 헛손질을 했다. 그가 무게를 실어 밀어붙일 때마다 루시아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눈에서 열이 나서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저절로 고인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조금만 더! 강렬한 쾌감의 파도가 밀려오기 직전이었다. 그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추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자 붉은 눈동자가 담긴 눈매가 살짝 휘었다.
“아직은 안 돼.”
휴고는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가 파르르 화내는 것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그녀의 손이 땀에 젖은 그의 어깨를 내리쳐 따끔한 통증을 만들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오르가슴을 느끼면 그녀는 빨리 지친다. 그는 아직 만족스럽게 그녀를 맛보지 못했다.
휴고는 땀이 송골송골 맺힌 그녀의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다.
루시아는 애가 탔다. 조금만 더 가면 쾌락의 절정이 앞에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 허리를 움직여 결합한 부분을 비비려 했으나 그가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쥐자 그조차 할 수 없었다.
이기적인 독재자 같으니!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차피 힘으로는 그에게 당할 수 없었다. 삽입만 한 채 그가 움직이지 않자 고조되었던 감각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그런데 그가 쿡 안쪽을 찔러왔다.
“아!”
찡한 자극은 너무 약하고 짧았다. 나른하게 웃고 있는 그가 얄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한 번씩 무겁게 허리를 밀어 올리는 것을 반복한다. 몸이 짜릿하게 떨리는데 거기까지였다. 미칠 것 같았다. 숨을 헐떡이며 늘어져 있다가 그가 살짝 빠졌다가 묵직하게 들어올 때마다 눈을 질끈 감았다.
“…해줘…….”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그녀의 애원에 그의 눈매가 굳어졌다.
“해줘요. 해줘……. 더 강하게 넣어줘…….”
그의 붉은 눈이 확 타올랐다. 살짝 이완된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두 팔을 그녀의 고개 옆으로 디뎌 몸을 지탱하고 그녀의 습한 안쪽으로 내질러 들어갔다. 단단한 기둥이 거칠게 질벽을 찔렀다.
빠져나갔다가 진입할 때마다 마찰하는 자극에 그녀는 흐느꼈다.
“아! 아응!”
두 번, 세 번 밀고 들어오는 강한 자극이 순식간에 그녀를 정점에 올려놓았다.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쾌락이 그녀를 삼켜버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그의 팔을 꽉 잡았다. 발끝부터 정수리 끝까지 모든 말초신경이 곤두섰다. 손끝을 세워 그의 팔을 긁었다. 손톱에 스친 붉은 자국이 줄을 그렸다. 입에서 흐느낌처럼 신음이 나오고 온몸이 덜덜 떨리며 질이 거센 경련을 일으켰다.
그가 움직임을 멈추고 거칠게 호흡했다. 쾌락의 해일이 물러가자 루시아는 그가 사정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울상을 지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하려고. 그가 빠져나가자 루시아는 흠칫 몸을 떨었다.
“엎드려.”
그가 탁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휴. 오늘 나 힘들어요.”
“알아. 금방 끝낼게.”
그는 맨날 지키지 않을 약속을 남발했다.
“그럼 그냥 이대로 하면 안 돼요? 뒤로 하는 건 너무…….”
너무 깊이 들어와서 자극이 심했다. 추락하는 것 같은 감각은 몸이 피곤하면 견디기 힘들었다. 루시아가 칭얼거리자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그녀의 발목을 잡아들었다. 그가 다리를 어깨에 걸쳐 올리려 하자 루시아가 이번에는 울먹거렸다.
“그것도 싫어요. 오늘은 힘든 거 싫어요. 응?”
휴고는 끄응 신음했다. 아내의 체력은 너무 약했다. 사실 루시아는 보통 사람 기준으로 약한 몸은 아니었다. 매일같이 덤벼드는 그를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오히려 보통 이상으로 건강했다. 그러나 휴고의 기준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그는 밤새도록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었다. 못 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다리를 모아 옆으로 내리고 후측위 자세를 잡았다. 깊은 삽입이 안 되어 그가 제일 재미없어 하는 체위. 그러나 적당한 자극을 좋아하는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체위.
그는 자리를 잡아 그녀의 살갗 속에 감추어진 균열을 열며 붉은 속살 안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움직이면서 진퇴를 반복하자 신음하는 그녀의 눈가가 발갛게 물들었다. 자극이 약하긴 하지만, 느끼는 그녀의 표정이 귀여워서 나름대로 묘미는 있었다.
‘체력을 키우는 영약을 구해 봐야겠어.’
휴고는 어떻게 하면 아내를 더 맛있게, 더 자주 잡아먹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잠시 딴생각을 했던 그는 다시 집중했다.
그의 허리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아래에서 그녀의 몸이 흔들렸다. 그녀의 다리 하나를 잡아 벌리면서 다시 정상위로 자리 잡았다. 그는 그녀의 골반을 잡고 강하게 짓쳐 들어갔다.
“아! 흐읏…….”
불그스름한 그녀의 눈시울이 젖어드는 모습이 그의 허리를 뻐근하게 자극했다. 그는 단숨을 몰아쉬었다. 자극이 부족했다. 그녀의 엉덩이 아래를 받쳐 들고 공중에 띄워 뿌리 끝까지 밀어 넣었다. 빠져나간 그가 재차 깊이 들어갔다. 꽉 조이는 속살에 그는 흥분했다.
눈앞이 번쩍하자 루시아는 비명을 질렀다. 그가 다시 강한 힘으로 하복부를 꿰뚫고 들어왔다.
“아! 싫어!”
깊은 안쪽이 자극당하자 루시아는 울음을 터뜨렸다. 오늘은 싫다고 했는데!
그가 이런, 혀를 차며 몇 번 더 파고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참고 파정했다. 잇새로 신음이 터졌다. 눈앞이 아득했다.
몸이 후들거리는 쾌감이 잦아들자 그녀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훌쩍거리는 그녀의 눈가에 자잘하게 키스했다. 잔뜩 뿔이 나서 노려보는 그녀를 열심히 어르고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그대는 마치 사랑에 빠진 것 같군.”
왕의 한마디는 질긴 잔상으로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질펀한 정사의 여운을 즐기며 휴고는 품에 안은 그녀의 등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착 손에 감기는 매끄러운 피부의 감촉을 느끼면서 상념에 잠겼다.
사랑.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혈연 간 끈질긴 감정의 고리는 인정했다. 하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녀가 만나 핏줄보다 끈질긴 유대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 여자는 그저 즐거운 놀이 상대에 불과했다.
그가 가진 권력과 재물에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여자들을 그는 경멸하지 않았다. 가진 것을 주고받는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거래였다. 여자와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 자체는 끊임없는 거래의 연속이었다.
결혼도 그랬다. 시작은 분명히 훌륭하고 손해 볼 것 없는 거래였다. 육체적인 만족은 덤이었다. 아내는 만족스러운 거래 상대였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감정 상태는 곤두박질쳤다가 치솟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불안정 속의 안정이라는 기이한 균형으로 걷기 시작했다. 평온한 충족감과 괴로운 불안감이 공존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휴고는 되짚어 올라가 보았다.
‘방심했어.’
휴고는 그녀에게 완전히 방심했다. 아내에게 경계할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왕족이라지만 왕실과 연대는커녕 일가친척조차 없었다. 권력욕이나 물욕 같은 개인적인 욕망도 없었다.
맹수인 그의 눈에 그녀는 이빨도 발톱도 전혀 없는 작은 초식동물이었다. 형편없이 약하면서 겁 없이 그의 발치에서 평화를 즐기는 그녀가 신기했다. 그녀 같은 존재가 지금껏 그의 곁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경계할 필요 없이 늘어져도 괜찮은 안도감은 대단히 편안했다. 아늑한 평온함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완전히 방심했다.
그가 이상을 느꼈을 때는 이미 그녀에 대한 감정이 물줄기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부정하면 할수록 돌이킬 수 있는 수준을 넘어버렸다. 둑을 쌓아 막을 수 있는 냇물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바다가 되어버렸다.
그의 저주받은 핏줄 속에는 채워질 수 없는 갈증이 잠들어 있었다. 술을 퍼마시고, 여자를 취하고, 사람을 죽여도 해갈되지 않던 갈증을 그녀가 풀어주었다. 동시에 또 다른 지독한 갈증을 안겨주었다.
‘…사랑이라고?’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이 엄청난 변화를, 도무지 그 단어 하나로 정의할 수가 없었다.
“…제가 말이에요.”
잠든 줄 알았던 그녀의 작은 속삭임이 선명하게 들렸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루시아는 연회장에서 봤던 메튼 백작이 자꾸 생각났다. 그자에 대한 공포를 극복했으나 그 대신 분노가 밀려왔다. 그런 천박한 돼지에게 고통을 겪은 사실이 분하고 억울했다. 꿈속과 다르게 그자가 죽지 않을지 모른다 생각하자 이가 갈렸다.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치가 떨렸다.
충동적으로 불쑥 말해 놓고 루시아는 후회했다. 얼마나 뜬금없고 경솔한 말인지. 그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암담했다.
루시아가 말을 꺼내는 순간에 등에서 움직이던 그의 손이 멈칫했으나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그녀가 베개 삼아 기대 귀를 대고 있는 그의 심장 박동 소리는 평온했다.
“어떻게 죽여줄까?”
그는 대단히 대수롭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르는 것처럼 말했다.
“사망 이유는 대단히 많지. 병으로 죽을 수도 있고,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괴한에게 살해될 수도 있고, 치정사건으로 죽을 수도 있고, 죄인으로 죽을 수도 있고. 반역으로 엮으면 가문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고.”
“치…….”
아무래도 그가 자신을 놀리는가 싶어서 루시아는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기분은 풀렸다. 그런 쓰레기를 떠올리며 감정 소모를 할 필요가 없었는데. 자신이 어리석었다.
“누구냐고 안 물어요? 그게 먼저잖아요.”
“누구든 상관은 없지만, 왕이라면 당장은 좀 곤란한데. 시간이 필요하거든.”
루시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미쳤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누가 들으면 당신이 죽어요!”
“누가 날 죽여.”
그가 오만하게 웃었다. ‘왕이라 해도 날 죽이진 못해. 나는 할 수 있어도.’라고 말하는 것처럼. 루시아는 눈앞에 죽음이 닥쳐도 당당할 것 같은 남자를 보며 어쩐지 힘이 빠졌다. 호들갑을 떤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후우, 알았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서.”
투덜투덜하며 그녀가 다시 눕자 휴고는 피식 웃으며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전혀 농담도, 허세도 아니었다. 그녀가 제 심장을 달라고 하면 배를 가를지도 모른다. 정말 그녀가 원하면 왕의 목이 대수일까.
미쳤구나. 그는 쓴웃음을 삼켰다. 이런 건 제정신이 아니었다.
‘뭘까.’
휴고의 붉은 눈이 위험스럽게 빛났다. 그녀의 마음에 어둠을 준 것이 대체 뭘까. 그럴 만한 일을 보고받은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냐고, 누구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심각하게 캐묻는 것보다 농담처럼 넘기는 편이 낫다. 어두운 감정을 그녀가 끌고 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 미워 견딜 수 없어서 당신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그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루시아의 귀로 파고들었다.
“반드시 내게 말해.”
그녀의 마음에 어둠이 있다면 자신이 다 가져갈 것이다.
“…어쩌시려고요?”
“글쎄. 어찌할까?”
그는 느긋하게 중얼거렸지만, 루시아는 어쩐지 그가 무척 위험하게 느껴졌다.
“약속해. 그러겠다고.”
“…그럴게요.”
‘하지만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예요!’ 하고 루시아가 덧붙였다. 농담을 진담으로 듣는다는 둥, 사람이 너무 심각해도 재미없는 거라는 둥 그녀는 종알거렸다. 휴고는 노래를 듣는 것처럼 그녀의 재잘거림을 감상하다가 입술에 쪽 키스하고 품으로 꽉 끌어안았다.
위험했다. 알고 있다. 사내가 여자에게 미치면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지 역사서는 사실을 증거 삼아 경고했다. 애첩에 빠져 나라를 말아먹은 수많은 왕을 얼마나 비웃었던가.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될 날이 올 줄은 진정 몰랐다.
* * *
이튿날, 휴고는 왕의 부름을 받아 오후에 먼저 나갔다. 저녁 무도회 호위 겸 에스코트는 기사 딘이 맡기로 했다.
앙뜨는 휴고가 막 저택을 나설 무렵 도착했는데,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앙뜨를 바라보는 휴고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당장은 시간이 없어서 그냥 가지만, 언제 한 번 의상실을 방문해서 이후 드레스 제작에 참고해야 할 필수 사항을 일러둘 생각이었다. 충고이자 경고가 될 것이다.
자를까 생각도 해봤으나 앙뜨가 만든 드레스는 아내에게 잘 어울렸다. 그녀가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아름답고 숭고해 보이는 건 괜찮았다. 그러나 음심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 휴고는 자기모순 속에서 나름대로 기준을 찾았다.
오늘 앙뜨는 푸른색 공단 드레스를 가져왔다. 오늘 드레스는 어제보다 과감했다. 휴고가 봤으면 기함해서 당장 벗기라고 성질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휴고는 못내 찜찜한 기분으로 왕과 만나는 중이었다.
드레스 상의는 사선으로 교차해서 주름을 넣었다. 오른쪽 허리에서 왼쪽 가슴을 덮어 왼쪽 어깨를 걸치며 등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왼쪽 허리에서 오른쪽 가슴을 덮어 오른쪽 어깨를 걸치며 등으로 넘겼다. 쇄골과 동그란 어깨선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났다.
소매가 없는 대신 푸른 사파이어를 손톱 크기로 가공한 보석 단추로 어깨를 장식했다. 어제의 드레스보다 등은 어깻죽지까지가 하한선으로 덜 드러났지만 가슴 라인은 어제보다 넓고 깊었다. 가슴골이 드러날 정도는 아니어도 아슬아슬했다.
같은 원단으로 허리선을 깔끔하게 감싸주어 늘씬하게 보이는 효과를 만들었다. 치맛자락은 풍성한 느낌을 주기 위해 여러 겹으로 둘러 제작했고 우아한 느낌이 나도록 뒤를 부풀려서 길게 빼주었다. 뒷허리에 커다란 레이스 리본을 달아 장식했다.
전체적으로 단순하면서도 화려한 느낌이 나는 드레스였다. 드레스를 차려입은 루시아는 한 송이의 푸른 장미꽃 같았다. 거울을 보며 루시아는 생각했다.
‘그이가 별로 안 좋아하겠는걸.’
등이 드러난다고 숄을 걸치게 한 보수적인 남편이었다. 무도회장에서 어제처럼 숄을 걸치고 다닐 수는 없었다.
앙뜨의 표정을 보니까 그저 제가 만든 드레스에 감격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슬며시 웃었다. 앙뜨가 찾아온 첫날 홀랑 넘어가 계약서에 사인한 일을 되돌려줄 기회가 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마무리는 공작부인께서 가지고 계신 보물로 하지요.”
루시아는 앙뜨와 드레스에 어울리는 보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앙뜨는 향후 드레스 제작 방향에 참고하기 위해 공작부인이 가진 보석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했다.
세피아 보석상에서 구매한 보석 외에 루시아가 가진 장신구는 그가 선물한 두 개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뿐이었다. 그걸 본 앙뜨는 거의 혼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두 개의 목걸이에 어울리는 드레스를 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화이트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아주 잘 어울릴 겁니다.”
선물 받고 고이 모셔두기만 했던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수백 알의 다이아몬드가 주렁주렁 달린 목걸이는 루시아의 하얀 목덜미를 전부 감쌌다. 깊게 파인 가슴 라인 때문에 다소 썰렁해 보였던 목을 장식하며 푸른 드레스와 원래 한 세트처럼 어울렸다.
‘아주 무거운 목걸이라고 생각했는데.’
처음 선물받아서 목에 걸었을 때는 무게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 다시 착용한 목걸이는 뜻밖에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적당히 묵직한 무게가 안정감을 주었다.
무도회 시작 시각을 조금 넘겨서 루시아는 파티장에 도착했다. 귀부인들이 순식간에 루시아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어머나, 공작부인. 오늘도 아름다우셔요.”
귀부인들은 루시아의 목에서 번쩍거리는 다이아몬드 목걸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격차가 너무 커서 그런지 부러움워하기보다는 감탄성만 나왔다. 어제 공작 부부의 다정함을 목격한 귀부인들은 고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공작의 애정이 담겨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타란 공작부인인가요?”
조금 톤이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요란스럽게 떠들던 여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물길을 가르는 것처럼 사람들이 쫙 갈라지고 그 사이를 따라 한 여자가 걸어왔다. 화려한 금발의 미녀는 도도한 표정으로 콧대를 세웠다. 루시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이제야 만나는군요. 어제는 일찍 돌아가셨던데요.”
국왕의 동복누이 캐서린. 넘쳐나는 공주들 틈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귀한 대접을 받은 진짜 공주님. 왕은 정말로 누이동생을 사랑했다. 정략결혼으로 팔아치우지 않고 복잡한 정치 싸움에 골치 썩을 일 별로 없는 돈 많은 백작가에 시집보냈다. 사치스럽고 복잡한 생각할 줄 모르는 누이의 성격을 파악해서 내린 조치였다.
루시아는 하녀 일을 한 경력도 없이 운 좋게 앨빈 백작가 같은 큰 귀족가에 채용되었다. 하녀가 되어 여주인께 인사를 드릴 때 새삼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루시아가 메튼 백작부인으로 있을 적에 캐서린 공주가 앨빈 백작과 결혼했다. 앞으로 모시게 될 마님은 백작부인이 된 캐서린 공주였다.
캐서린 공주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오라버니의 사랑을 받는 캐서린이 사교계를 누비고 다니는 모습을 항상 부럽게 바라보았다. 똑같은 공주인데 왜 이렇게 처지가 다를까 비관해서가 아니었다.
루시아는 공주로서 자존감을 기를 만한 성장기를 보내지 못했고, 스스로 공주라는 자각이 별로 없었다. 루시아는 화려한 공주의 삶을 사는 캐서린이 부러웠던 것이 아니라 기댈 수 있는 가족이 곁에 있다는 점이 부러웠다.
캐서린은 당연히 루시아를 알아보지 못했다. 알아봐도 시치미를 떼야 하는 처지였다. 메튼 백작부인 비비안은 엄연히 반역한 죄인의 가족으로 도망자 신분이었다. 추적이 없어서 쫓기는 신세는 아니어도 떳떳이 밝힐 수는 없었다.
캐서린은 꽤 까다로운 상전이었으나 지나치게 유난스럽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공과 사가 확실했다. 사교계 경험으로 귀부인의 습성을 잘 아는 루시아는 눈치껏, 묵묵히 성실하게 일했다.
덕분에 캐서린의 신임을 얻어서 모든 시중을 담당하고, 수많은 파티를 따라다녔다. 다른 하녀들의 질시는 받았지만, 고가의 보수를 받으며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었다.
당시 캐서린은 사교계의 여왕이었다. 남편의 부유함과 친정의 든든한 권력을 뒷배로 감히 캐서린의 자리에 도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사람. 타란 공작부인만 빼고. 그래서 캐서린은 타란 공작부인에게 이를 갈았다. 타란 공작 부부 결혼 비사의 출처는 캐서린이었다.
“공주님께 인사드립니다, 비비안입니다.”
루시아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은근히 두 공주의 기세 싸움을 기대했던 귀부인들은 실망했다. 타란 공작부인이 이렇게 쉽게 먼저 물러설 줄 몰랐다. 루시아를 묘한 눈으로 보던 캐서린이 들고 있던 부채를 탁 치며 접었다.
“그렇게까지 예를 차릴 건 없어요. 어차피 공작부인도 공주였고. 따지고 들면 공주보다는 공작부인이 낫죠.”
쌀쌀맞은 목소리에 적대감은 없었다. 캐서린은 딱 한눈에 공작부인이 사교계 자신의 위치를 위협할 상대가 아니라고 감지했다. 캐서린은 타란 공작은 포기할 수 있어도 사교계 여왕 자리는 포기할 수 없었다.
“서로 존재도 몰랐네요. 그래도 자매인데. 하긴 난 지금도 누가 더 있는지 몰라요. 알아볼 생각도 없고.”
“사실 저도 폐하와 공주님 외에는 잘 모릅니다.”
“그 외에는 알 필요 없어요.”
루시아는 살짝 미소 지었다. 정 없어 보이는 말투와 달리 캐서린은 그렇게 차가운 사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