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44화 (45/77)

44장 만나는 사람들 (2)

술기운은 금방 가라앉았다. 휴게실을 나와 복도를 따라 걷는 루시아에게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공작 전하께서 공작부인의 부재가 길어지시니 걱정되어 보내셨습니다.”

쉬러 나온 지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새를 못 참고 시녀를 보낸 그를 주변에서 유별나다고 볼 것 같아서 민망했다.

“한발 앞서 가서 말씀드리게. 가는 길이라고.”

시녀가 꾸벅 인사하고 다시 종종걸음으로 온 길을 돌아갔다.

“주인님께서는 항상 마님만 찾으십니다.”

곁을 따르는 하녀가 말을 보탰다.

“너까지 나를 놀리는 것이니?”

“아닙니다, 마님. 놀리다니요. 보기 좋아서 그럽니다. 저도 나중에 결혼하면 주인님과 마님, 두 분처럼 살고 싶습니다.”

하녀의 부러움 섞인 아부가 듣기 싫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 눈에 그리 좋아 보이는가 싶어서 조금 우쭐했다. 요즘 그와의 사이는 확실히 좋았다. 북부에서 지낼 때보다 얼굴을 보는 시간은 더 줄었는데도 오히려 더 돈독했다. 북부에서와 비교해서 뭐가 다를까 따져 보았지만 딱 집어 말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조차 무척 달콤하게 들렸다.

기분 좋게 걷던 루시아는 맞은편 저만치에서 이야기 나누며 오는 남자들을 보자마자 멈추어 서고 말았다. 곁을 따르던 하녀가 ‘마님?’ 하고 불렀다. 루시아는 방패라도 되는 것처럼 숄을 여민 손을 꼭 쥐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루시아는 숨을 들이마셨다. 이대로 지나치기를 바랐다. 그러나 두어 걸음 거리에서 그중 한 남자가 루시아를 발견하고 탐욕이 가득한 눈을 빛냈다. 온몸에 쭉 소름이 돋았다.

“오오, 공작부인 아니십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분께 인사드릴 기회가 닿아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과도한 호들갑을 떠는 남자의 인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공식 사교계 첫 데뷔인 공작부인의 지나친 무례는 입방아 대상이었다.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추고 치가 떨리게 역겨운 남자의 면상을 바라보았다. 루시아는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루시아의 키를 간신히 웃도는 땅딸막한 체구와 임신부처럼 툭 튀어나온 배를 가진 남자였다. 그의 개기름이 흐르는 얼굴에는 욕심이 덕지덕지 붙었고 히죽히죽 웃는 입에는 비굴함이 가득했다. 어떻게 해서든 권력자에 빌붙고 싶어 안달이 난 눈빛은 교활했다.

꿈에서조차 보기 싫은, 루시아의 꿈속 남편. 메튼 백작이었다.

“저는 메튼 가문의 가주이며 백작위를 승계받은 호리오 메튼이라고 합니다. 아아. 정말 아까부터 멀리서 뵈었지만 이리 가까이 뵈니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하시는군요. 제가 평소 타란 공작 전하를 몹시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타란 공작가 안주인께 인사를 드릴 수 있어 몹시 영광입니다.”

메튼 백작은 비열한 상인처럼 손바닥을 비비며 나불거렸다.

루시아는 자신의 감정을 정의했다. 혐오. 그리고 공포.

꿈속에서 메튼 백작은 절망의 벽이었고 결혼 생활은 암흑이었다. 그나마 루시아가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우습게도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정상적인 결혼 생활이 뭔지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그렇게 숨죽이고 체념하며 살지 못했을 것이다.

꿈속의 기억이 악몽이라면 지금의 결혼 생활은 깨고 싶지 않은 환상이었다. 그래서 메튼 백작을 마주치자 환상이 깨진 것처럼 등이 섬뜩했다.

루시아는 타인에게 어두운 감정을 품는 일이 거의 없었다. 다소 서운하거나 불쾌한 일도 털어버리는 편이었다.

그러나 메튼 백작만큼은 끔찍하게 싫었다. 그래서 삼엽쑥을 먹어서 불임을 자초하고 남편을 찾아가서 청혼했다. 모두 메튼 백작이 그녀에게 드리운 짙은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이자가… 이렇게 왜소했나.’

언제고 메튼 백작과 마주칠 각오는 하고 있었다. 공작부인이 되었어도 마음 밑바닥에 희미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현실에서 마주친 메튼 백작은 너무 형편없었다. 기사를 압도하는 덩치를 지닌 남편에 비하면 난쟁이였다. 꼭 안아주는 그의 넓은 품을 떠올리자 불안이 사그라졌다. 그가 발로 한 번 차면 저 멀리 날아갈 것 같았다.

왠지 눈앞의 남자가 대단히 우스워지고, 점점 공포가 옅어졌다.

“공작부인. 부디 제게 공작 전하께 인사를 드릴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워낙 쟁쟁한 분들이 곁에 계시니 보잘것없는 저 같은 사람은 눈에 차지 않으시겠지만, 공작 전하의 손과 발이 되어 열심히 뛰기를 각오하고 있습니다. 기회만 주시면 훗날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루시아는 종종 메튼 백작의 비정상적일 정도로 권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메튼 가문 정도면 영지가 있고 가문의 역사도 길고 현재 처지에 만족해도 충분히 살 만했다.

‘이자는 여전하구나. 하긴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지.’

메튼 백작은 이리저리 줄을 대려 발바닥에 불나도록 돌아다니긴 했지만, 태자 쪽도 그 반대쪽도 그다지 탐내지 않는 쭉정이였다. 그야말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권력도 재력도 본인이 지닌 능력도 별 볼 일 없었다.

메튼 백작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지만 평생 언저리였다. 수면 밖으로 힘껏 몸을 날려도 그토록 바라던 다른 연못으로 건너가지 못했다.

“서로 초면인데 무례하구려. 공작 전하께 용무가 있으면 직접 말씀드리시오.”

루시아는 정색하며 말했다. 아무리 공작부인이라도 초면이고 나이도 많은 백작위 귀족에게 반하대 말투는 무례했다. 그러나 루시아는 다시는 이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기를 바랐다. 그림자도 보기 싫었다. 이 자와의 끔찍한 인연은 현실에서 더는 없다. 그래서 일부러 무례하게 말했다.

당황, 그리고 불쾌함이 얼핏 메튼 백작의 탁한 눈동자에 스치는 걸 보았다. 꿈속에서 루시아는 백작의 눈이 저럴 때마다 공포에 떨었다. 메튼 백작의 눈이 저런 불쾌하고 탁한 색으로 물드는 날은 제 심사가 비틀어져 패악을 떠는 날이었다.

루시아는 허리에 힘을 주고 거만한 모습으로 보이길 바라며 지나쳐갔다.

가슴이 조금 떨렸지만 막힌 속이 뻥 뚫린 것처럼 통쾌했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루시아는 지금 이 순간, 진정으로 꿈속 악몽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다짜고짜 뺨을 후려쳐도 날 어쩌지 못해.’

루시아의 뒤에는 타란 공작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세파에서 지켜줄 것처럼 든든한 남편이 버티고 있었다. 그가 무적은 아니겠지만, 저런 쓰레기를 치워줄 능력은 충분히 있었다. 저자를 두려워하던 꿈속의 자신은 이제 없었다.

그가 갑자기 보고 싶어서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에게 설명하기 곤란해도 지금 느끼는 이 희열을 나누고 싶었다.

‘저자는 결국 꿈속처럼 비참하게 죽겠지.’

루시아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죽지 않을 수도 있어. 미래가 바뀌고 있으니까.’

결혼 5년 차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왕이 자신을 거스르는 자들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드디어 칼을 빼 들었다. 훗날 피의 100일이라고 불리게 될 환난의 시작이었다.

메튼 백작은 처음에 왕당파에 속하기 위해 열심히 기웃거렸으나 합류에 실패하자 반대 세력에 발을 담갔다. 새가슴 메튼 백작이 진심으로 반역을 계획했을 리 없다. 그럴 배짱도 능력도 없었다. 그저 어떻게 해서든 권력자와 선이 닿아 비빌 작정이었을 것이다.

메튼 백작의 빤한 속내를 반대 세력 쪽에서도 눈치챘다. 서로서로 이용하는 관계였다. 이런 관계에서는 힘이 약한 쪽이 덥석 물릴 수밖에 없다.

메튼 백작은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처럼 빼도 박도 못하게 걸렸다. 그의 억울함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왕이 보기엔 같이 치워버려도 아쉬울 것 없는 떨거지이고, 뒷배라고 믿었던 권력자들은 다 목이 달아난 후였다.

나름대로 유서 깊은 가문이었던 메튼 백작가문은 하루아침에 멸문했다. 백작은 들이닥친 군사들 손에 잡혀서 제대로 재판받지도 못하고 즉결 심판으로 목이 잘렸다. 식솔들 역시 모조리 잡혀가서 얼마 후 참형을 당했다.

그나마 학술원에 있던 막내아들 브루노가 화를 피해 타국으로 망명했다고 아주 먼 훗날 소식을 들었다.

꿈속의 기억을 떠올리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군사들이 들이닥친 그 밤의 기억은 공포 그 자체였다. 당시 피의 100일을 지휘한 선봉장은 타란 공작이라고 들었다.

‘그날 밤 내가 잡혔다면 어쩌면 난 그이 손에 죽었을지도 모르겠네.’

메튼 백작가를 치던 날 밤에도 타란 공작이 군사들을 끌고 왔는지까지는 모르겠다. 그를 직접 보지 못했으니까.

그날 밤은 억압과 해방을 동시에 상징했다. 공포의 밤이었으나 루시아는 자유를 얻었다. 메튼 백작부인이었던 비비안을 버리고 루시아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하늘의 도움이었다. 그 일이 아니었으면 루시아는 꿈속에서 평생 메튼 백작부인으로 살면서 죽을 때까지 고통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잊자. 저자가 죽든지 말든지 나와 더는 관계없어.’

자꾸 저 쓰레기를 기억으로 되살릴 필요 없었다. 그럴 가치가 없었다.

‘…그래도 죽었으면 좋겠어. 아주 비참하게.’

죄 없는 메튼 백작가 다른 식솔들까지 휘말려 죽기 바라지 않지만, 꿈에서 본대로 백작의 죽음을 바라는 어두운 마음이 뭉글거렸다.

“공작부인.”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앞을 가로막는 남자를 보자마자 루시아는 짜증이 솟았다. 팔콘 백작부인, 메튼 백작에 이어 세 번 연속 달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래서 사람 많은 파티가 싫었다. 예기치 않은 일이 자꾸 일어나고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자꾸 보게 된다.

“일전에 인사드린 저를 기억하시는지요. 라미스 공작가의 데이빗 라미스 백작입니다.”

루시아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으나 데이빗 눈에는 불편한 그녀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광채에 눈이 부셔서 자신을 향해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착각했다.

“공작부인의 아름다움을 부족하나마 간단한 시구에 담았습니다. 부디 옥안으로 살펴 평해주시기 부탁합니다.”

데이빗은 장미 정원에서의 그날부터 항상 품에 연서를 지니고 다녔다. 그날의 환상적인 첫 만남 이후 데이빗의 눈에는 언제나 그녀가 눈에 아른거렸다.

당시 그녀의 옥음으로 듣지 못한 이름은 직접 알아냈다. 비비안. 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이름인가. 그녀를 위해 태어난 이름이었다.

결혼했으면 어떤가. 남녀가 마음을 나누는 데 그런 형식적인 조건은 방해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큰 욕심은 없었다. 그저 공작부인과 연서를 주고받으며 조금만 서로 알았으면 좋겠다.

루시아는 봉투를 물끄러미 보았다.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공개된 곳에서 연서를 주고받는 일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취급했다.

몇 가지 규칙은 있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 건 괜찮아도 그 반대 경우는 소문거리가 되었다. 남자가 주는 연서를 받을 때도 직접 받으면 안 되며 하녀, 혹은 옆에 있는 사람이 대신 받아야 했다.

하녀가 ‘받을까요?’라고 묻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루시아는 하녀에게 고개를 저었다.

“라미스 경. 받을 수 없는 마음은 부디 거두어 주시지요. 이미 한 분의 지아비와 해로하겠다고 서약을 했습니다.”

데이빗은 당황했다. 연서는 귀부인의 대외적인 매력을 나타내는 척도라서 거절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내, 혹은 연인이 그런 것을 받았다고 불쾌해하는 태도는 품위 있는 귀족답지 못했다. 오히려 은근히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공작부인. 혹여… 오해하실까 드리는 말씀이지만, 시 몇 구절을 적었을 뿐입니다. 부인의 정숙함에 해가 될 일이 아닙니다.”

“관습에 대해 가르쳐주실 필요는 없겠군요. 제가 받지 않겠다고 죄가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야…….”

“바깥분이 함께하는 자리가 아니면 사적인 대화는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루시아는 기분이 안 좋은 상태라서 직설적으로 대응했다. 데이빗은 운 나쁘게도 시기를 잘못 맞추었다.

인사하고 지나가는 루시아의 모습을 데이빗의 시선이 따라갔다. 수치로 벌겋게 물든 얼굴로 주먹에 힘이 들어가 손에 쥔 봉투가 구겨졌다. 항상 주변을 따라다니는 추종자들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시시덕거리며 지켜보다가 무안한 표정으로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워낙 인간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귀족 사회에서는 항상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악연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 루시아처럼 무안할 정도로 연서를 딱 잘라 거절하는 경우는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 사회에서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망신이었다.

‘어째서 저런 여인이 타란 공작과 결혼했단 말인가.’

데이빗은 배가 아파 죽을 것 같았다. 남편에게 정절을 지키려는 마음마저 그렇게 고귀해 보일 수가 없었다.

데이빗은 파티장에 뒤늦게 도착했다. 이미 도착한 타란 공작 부부는 따로 떨어져 각자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공작부인을 보자마자 설레는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공작부인은 지난번 장미 정원에서 봤을 때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때는 요정 같았다면 오늘은 여신 같았다.

귀부인들이 둘러싸고 있는 공작부인 곁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누님이 곁에 있다가 멀찍이 바라보고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누님의 경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타란 공작을 주인공처럼 떠받드는 사람들 무리로 가고 싶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추종자들과 하릴없이 파티장 근방을 맴돌았다.

더는 추종자들이 지루해하는 기색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파티장으로 들어가려다가 공작부인을 발견했다.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뻤으나 지금은 모든 것을 다 잃은 망국의 왕이라도 된 심정이었다. 데이빗은 무안함과 서글픔을 동시에 느끼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서있었다. 처음 겪는 실연이었다.

‘손에 쥐지 못하는 장난감일수록 더 애가 타는 법이죠. 라미스 경.’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는 아니타가 찬웃음을 지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공작부인을 둘러싼 추문이라…….’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소문에 말려들면 걷잡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퍼지는 소문이 거대하게 살을 붙인다. 타란 가문의 안주인이 사교계를 뒤흔드는 추문의 중심에 서면 과연 타란 공작은 어떤 식으로 나올까. 필요에 따라 여자를 취했다가 버리는 공작이라면 가차 없이 아내를 버릴 것이다.

‘선왕의 수많은 공주 중 하나였다가 공작부인이 되었고, 이혼당한 전 공작부인으로 추락이라.’

제법 구미가 당겼다. 사교계에서 10년은 우려먹을 스캔들이었다. 아니타는 데이빗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언제가 되었든 라미스 공작가의 후계를 이용할 기회가 올 것이다.

* * *

“광견이다.”

“광견 크로틴.”

적발 사내가 등장하자 즐거운 연회장 분위기가 불안하게 술렁거렸다. 로이는 몹시 삐딱한 표정으로 먹잇감을 찾아 어슬렁대는 들개처럼 느릿하게 이리저리 시선을 던졌다. 사람들은 혹시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사색이 되어 고개를 돌렸다.

로이는 태자의 근접호위를 하면서 태자와 동반한 파티나 모임에서 차곡차곡 악명을 쌓아 이제는 사교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호위로 태자 곁에 붙어있으니 태자를 둘러싼 살벌한 파워게임에 원하지 않아도 휘말렸다.

비비 꼬아 말하는 귀족들 화법에 익숙하지 못해서 처음에는 시비 거는 줄도 몰랐다. 비꼬아 말해도 멀뚱멀뚱하게 보자 헛기침하며 물러서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호위하는 초반에는 그런대로 조용했다. 그러자 점차 로이를 무시하며 비웃기 시작했다.

전쟁터에서 떨친 이름은 사교계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타란 공작이 내린 남작이라는 단승 작위를 가지고 있다지만, 원래 출신은 평민이었다. 신분 낮고, 무식하며 어수룩한 기사는 세습귀족이 아니면 사람 취급 안 하는 귀족들이 보기엔 아주 우스웠다.

그러다가 태자와 반목하던 귀족이 로이와 시비가 붙어 장갑을 내던졌다. 로이는 흔쾌히 응해서 아주 녹신하게 두들겨 주었다.

로이는 적성에 맞지 않는 호위를 하면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있었다. 그런데 칼부림을 하고 나자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맛을 들이자 이젠 먼저 시비를 걸고 다녔다. 대부분이 태자 반대쪽 세력이라서 태자는 방관하고 태자의 파벌은 은근히 부추겼다. 로이는 신나게 들쑤시고 다니며 어떨 때는 하루 서너 건의 결투를 했다.

처음엔 멋모르고 결투에 응한 자들은 기사들이 반병신이 되고 나서야 로이가 미친놈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후작가 기사들을 패고 난 후에 ‘기사는 주인의 개’라고 말한 발언이 사교계를 뒤집었다. 그 후 로이는 미친개로 불렸다.

피해를 본 자들이 이를 갈아도 정당한 대결이라 명분이 없었다. 더구나 로이의 뒤에는 태자가 있고 더 나아가서는 타란 공작이 있었다. 사람들은 미친개의 꼬리를 밟지 않기 위해 극도로 몸을 사렸다.

왕이 죽고 로이는 호위 일을 호기롭게 내팽개친 후 후환이 두려워서 한동안 숨어 지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며 실컷 놀다 보니까 심심해졌다. 단순한 로이는 시간이 지나자 주군에게 혼날까 봐 두려웠던 당시의 공포를 거의 잊었다.

오늘 대관식 파티에 사람들이 많이 온다기에 뭐 재밌는 일 없을까, 해서 어슬렁거리며 왔다. 격식 있는 자리라서 로이처럼 갑옷을 입고 들어오는 기사는 없었다. 출입부터 금해야 하지만, 이미 유명한 로이를 근위병은 막지 않았다.

지나가다가 어깨를 툭, 부딪쳤다. 사과하려고 고개를 돌리는데 다짜고짜 중년 귀족이 성질을 냈다.

“눈을 어디 두고 다니는 건가! 이 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갑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말이야. 에잉. 쯧쯧쯧.”

‘호오.’

로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런 시비는 오랜만이라 신선했다. 중년 귀족은 꽤 오래 수도를 떠나 있다가 상경한 지 얼마 안 되어 광견 크로틴의 악명을 듣지 못했다.

“그럼 그쪽은 눈도 없소? 왜 내가 피해 다녀야 하는데? 혹시 장님이라면 내가 사과하리다.”

“뭐… 뭐야!! 이런 무례한 놈이!”

중년 귀족은 주변에서 사람들이 기겁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기사 따위가 자신을 모욕한 것에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놈? 지금 나한테 놈이라고 했어? 말 함부로 하네. 당신, 목이 몇 개야. 앙?”

“뭐… 뭐… 뭐 이런 인간 말종 같은 놈이! 네 이놈! 내가 누군 줄 알고! 네가 감히 이런 무도한 짓을 하고서도 무사할 것 같으냐!”

“댁이 누군데. 그래서 어쩔 건데.”

어서 장갑이나 던져. 로이는 제발 누가 시비를 걸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중년 귀족은 재수 없게 딱 걸렸다. 불량스럽게 웃으며 성큼 다가서자 중년 귀족이 놀라 뒤로 물러섰다.

“저런.”

“쯧쯧, 하필이면.”

발생한 소란에 사람들의 관심이 향했다. 광견 크로틴을 마주치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재난은 내 일만 아니면 상당한 구경거리였다. 사람들은 광견에게 혀를 차면서 은근히 사고를 일으키기를 바랐다. 체면 따지는 사교계에서 광견처럼 화끈한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오늘의 희생양에 동정을 보내는 동시에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에 빠져들었다.

퀘이즈는 뭇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헛기침을 했다. 즉위 축하연이었다. 이대로 사고를 치게 두면 왕의 위엄에 손상이 간다. 놔둘 수 없으나 말리면 과연 말을 들을지 의문이었다. 과거에 중재를 요청하는 자들 말을 못 들은 척해왔던 터라 인제 와서 나서기는 우스운 모양새였다.

“흠, 타란 공.”

좀 말려보지? 네 부하잖아. 퀘이즈는 휴고에게 해결사 역할을 넘기며 슬쩍 발을 뺐다.

휴고는 로이가 이 자리에서 무슨 깽판을 치든지 사실은 별로 관심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자리를 비운 아내에게 향해있었다. 너무 오래 안 오는 것 같아서 시녀를 보냈다. 방금 보냈으면서 시녀가 굼뜨다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휴고는 쯧, 짧게 혀를 차고 걸음을 옮겼다. 모두의 시선이 움직이는 타란 공작에게 향했다.

“과연 광견을 저지할 수 있을까.”

“수하니까 당연하지 않나?”

“하지만 광견이잖아.”

광견은 예측이 불가능했다. 사람들 의견이 분분했다. 곧바로 로이를 저지하러 갈 것이라는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공작은 몸을 틀어 근처의 테이블에서 나이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샐러드를 자를 때 쓰는 날이 무딘 나이프였다. 대체 저걸 왜? 좌중은 의문을 품고 왠지 모를 기대감으로 공작을 주시했다.

휴고는 나이프를 한 손으로 가볍게 위로 몇 번 던졌다 받았다. 그리고 로이의 뒤통수를 향해 던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헉!!”

“꺄악!”

여기저기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로이는 중년 귀족을 쥐를 모는 고양이처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로이의 덩치와 위협에 못 이겨 중년인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거대한 원형 기둥에 등을 기댔다.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로이는 기둥에 한쪽 팔을 디디고 불한당처럼 중년인을 위협했다. 너무 겁을 먹어 장갑을 던질 생각조차 못 하고 있다는 점이 로이의 계산 착오였다.

휴고가 던진 나이프는 로이의 뺨을 스쳐 기둥에 박혔다. 공교롭게도 나이프가 박힌 위치는 기둥에 바짝 기대 부들부들 떨던 중년인의 눈 옆이었다. 남자는 거품을 물며 혼절했다.

중년인이 기절하기 직전에 로이는 볼이 따끔해서 손을 댔다가 묻어나는 붉은 피를 확인했다.

“아씨! 어떤 새끼야!”

로이가 사납게 소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주변은 정적이었다. 모두 얼어붙어 있었다. 정확히 시선이 마주친 휴고는 로이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했다.

‘난 죽었다.’

로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눈앞이 절망으로 어두워졌다. 표정 없는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로이는 몸을 돌려서 주군에게 걸음을 옮겼다. 로이의 유연한 신체는 마치 관절에서 소리가 날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삐걱거렸다. 두 걸음 정도 앞까지 다가가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광경에 숨을 죽였다.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 귀족들은 타란 공작의 강함을 풍문으로 들었을 뿐 실제로 목격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로이의 미친 짓은 꽤 많이 목격했다. 로이의 결투를 구경한 자들도 많았다. 성격은 지랄스럽지만 실력만큼은 발군이라고 모두 인정했다.

아무래도 눈으로 본 것을 더 신뢰할 수밖에 없다. 은연중에 사람들은 어쩌면 타란 공작보다 로이 크로틴의 실력이 더 강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다. 미친 말처럼 날뛰는 로이의 고삐를 잡아채는 일은 아무리 주인이라도 애먹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완벽한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잠시 잊고 있었다. 타란 공작은 전쟁의 흑사자로 불리는 기사였다. 적국에서 위대하다고 더 인정하는 무장이었다. 기세등등하던 광견이 겁먹은 강아지 같았다. 마음 약한 여자들은 야만스럽다고 로이를 비난하던 속마음을 잊고 동정심을 품었다.

“안 보는 새 질 안 좋은 장난을 배웠구나.”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일어나.”

로이는 벌떡 일어났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신병 같았다.

‘맞는다.’

로이는 예감했다. 로이의 예감은 안 좋은 예감일수록 틀린 적이 없었다. 주군이 화내는 건 너무 무서웠다. 제대로 복부를 한 대 맞으면 여파가 족히 일주일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내장 터져 즉사고 자신이라고 해도 일주일은 제대로 식사 못 하고 피똥 싼다고 보면 된다.

시선을 내리고 처분만 기다리던 로이는 각오하던 처분이 없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어…….’

주군 옆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공작부인이었다. 그 와중에 로이는 ‘분홍색 드레스에 푸른색 숄은 뭔가 이상한데.’라고 생각했다.

루시아는 사람들이 몰려있는 틈을 뚫고 그에게 갔다. 로이가 한창 사고를 치는 광경은 보지 못했고, 사람들의 이상한 분위기는 눈치채지 못했다. 오직 그만 시선에 담아 그를 목적지로 곧바로 가느라 주변에 눈 돌릴 틈이 없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전까지 불쾌한 자들과 만나 껄끄럽던 찌꺼기 같은 감정이 사르르 사라졌다. 행복해서 웃음이 나왔다. 곧바로 팔을 뻗어 허리를 감는 그의 손이 든든했다. 그 후에 우두커니 서있는 로이를 발견했다.

“크로틴 경, 오랜만이에요.”

어쩐지 넋이 나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로이가 이상해서 루시아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음……. 즐거운 파티군요. 그렇지 않나요?”

의례적인 인사였다. 큭, 어디선가 웃음이 터졌다. 범인은 왕이었다. 퀘이즈는 껄껄대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왕의 파안대소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웃기 시작했다. 이내 파티장은 왁자한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영문을 모르는 루시아는 당황했다.

‘인사를 한 건데 왜 웃지? 뭘 실수했나?’

휴고는 허둥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품으로 당겼다. 엉거주춤 서있는 로이에게 인상을 쓰며 눈짓을 보냈다. 당장 돌아가 근신하고 있어.

무언의 명령을 알아들은 로이가 얼른 몸을 뺐다. 주군 성격상 나중에 다시 불러서 지난 상황을 따지며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

‘목숨 빚은 잊지 않겠소, 마님.’

로이는 루시아를 찬양했다. 생명의 은인이었다. 희희낙락하며 빠른 걸음으로 부지런히 파티장을 빠져나가던 로이는 멈칫했다. 방금 지나친 여자를 확인하려고 몸을 돌렸다. 여자는 파티장 입구의 사람이 거의 없는 곳에 홀로 서있었다. 낯은 익은데 어디서 봤던 여자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별로 안 좋은 냄새가 나.’

여자는 흥겨운 파티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음울한 기운을 내뿜으며 어딘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모여있어서 정확히 누구를 보는지 알 수 없었다. 하필 그 사람들 중에는 공작 부부도 있었다. 왠지 기분이 나빴다. 로이는 여자를 유심히 보다가 몸을 돌렸다.

기절한 중년인은 시종들 손에 들려 어디론가 실려갔지만 누구도 불쌍한 중년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람들은 타란 공작이 던진 나이프가 박힌 기둥 근처에 모여 수군거렸다.

돌기둥에 자루만 남고 박힌 나이프를 사람들은 경외와 공포를 담아 구경했다. 호기롭게 누군가 나서서 나이프를 빼려고 시도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불려 온 건축전문가는 잘못 건드렸다가는 기둥이 무너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결국, 나이프는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훗날 외국 사신까지도 한 번쯤 구경하고 가는 명물이 되었다.

* * *

오후가 지나 해 질 무렵이 다가올수록 연회장에 사람이 더 많아졌다. 완전히 날이 저물면 지금 한창 준비하고 있을 외궁으로 자리를 옮겨 무도회가 시작될 것이다.

반나절 내내 웃으면서 사람들과 인사하고 이야기하느라 루시아는 얼굴 근육에 경련이 날 것 같았다. 누구와 인사를 했는지 기억도 못 하겠다. 계속 서있었더니 다리가 아파서 푹신한 소파에 기대 누워 다리를 주무르고 싶었다.

오늘 루시아의 사교계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과장을 보태면 사람들은 루시아와 인사를 나누고 싶어서 줄 서서 기다렸다. 마땅히 오늘 주인공이어야 하는 왕과 왕비는 타란 공작 부부에게 관심이 쏠리는 분위기를 용인했다.

“피곤해?”

루시아는 습관적으로 ‘괜찮아요.’라고 답하려다가 ‘조금 지쳤어요.’라고 직전에 대답을 바꿨다. 그에게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돌아갈까?”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그녀의 입에서 지쳤다는 말이 나올 정도면 정말 힘든 것이다. 휴고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품으로 당겼다. 자신에게 기대 그녀의 다리가 디딘 무게를 조금 덜게 도와주었다. 확실히 그녀는 많이 지쳤다. 사람들 많은 곳에서는 접촉을 부담스러워하는 그녀가 순순히 그에게 안기듯 기댔다.

“하지만 아직 무도회는 시작도 안 했는데…….”

“연회장에서 이 정도 자리 지켰으면 됐어. 두 자리 모두 참석하는 건 힘들어. 어차피 무도회 가서도 잠시 얼굴만 보이려 했어. 내일도 있으니까.”

“정말 집에 가도 돼요?”

휴고는 미소 지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집’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돼.”

둘만의 세계에 빠진 공작 부부 주변으로 사람들이 다소 멀찍이 떨어져 서성거리며 다가가지 못했다.

“…대단히 진귀한 광경이지 않소.”

퀘이즈는 보고 또 봐도 여전히 신기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타란 공작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거리낌 없이 애정 표현을! 변고가 일어날 징조인가!’ 남편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베스가 웃었다.

“왕비는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내게 귀띔해 주지 않은 거요.”

“재미있으시라고 그리했습니다. 이런 소소한 일은 폐하께 기분 전환이 되지 않겠습니까.”

퀘이즈는 생글생글 웃는 베스를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내는 아들 셋을 키우면서 점점 억척스럽고 천연덕스럽게 변하고 있었다. 요즘은 후궁을 들일 때 은근히 왕비 눈치를 보게 되었다. 제 어미에게 잘못하면 눈 뒤집혀 달려들 아들이 셋이었다. 늙어서 구박받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점수를 쌓아놔야 했다.

“왕비는 어찌 보시오? 타란 공이 저러는 것이 진짜겠소, 그러는 척하는 거겠소?”

“그것이 중요합니까?”

왕비 말이 맞았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타란 공작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아내에 대한 애정 표현을 했다는 것 자체가 모두에게 무언으로 이르는 말이었다. 이 여자 뒤에는 내가 있으니 감히 허튼짓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물론 타란 공작가 안주인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공작이 대놓고 든든한 방패라고 선언하는 것은 또 격이 달랐다.

“공작부인이 꽤 바빠지겠군.”

“그렇겠지요.”

타란 공작을 공략하기 위한 지름길이 공작부인이라는 사실을 이 자리에 함께하는 모든 자가 알아차렸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공작부인을 향해 이글대는 눈빛을 쏘아대고 있었다.

“한데 캐서린은 뭘 하느라 얼굴도 비치지 않는 거지?”

“이런 자리 싫어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녁 무도회에는 나오겠지요.”

대체 언제 철들지 몰라 걱정인 누이를 떠올리며 퀘이즈는 혀를 찼다. 같은 누이인데 저렇게 다른 것은 어머니가 달라서인가. 그는 예전에도 한 적 있는 생각을 다시 했다. 슬슬 누이의 신랑감을 찾아봐야 할 텐데 마땅한 자리가 없어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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