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장 만나는 사람들 (1)
홀에 들어서자마자 루시아는 수십, 수백 개의 시선이 자신에게 날아와 꽂히는 것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그를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를 지탱해 주는 커다란 손. 혼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곁에는 그가 있다. 약간의 불안이 사라졌다.
잠깐의 정적이 지난 후 술렁이는 소리가 번지면서 점점 커졌다. 루시아는 주변에 시선을 주지 않고 똑바로 앞만 보며 그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휙휙 지나가는 주변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멈추자 루시아도 멈추어 섰다. 그가 몸을 굽히고 고개를 숙인다. 루시아도 따라서 허리를 숙였다.
“일어나시오. 유명한 공작부인을 드디어 보게 되는군.”
‘아…….’
루시아는 고개를 들어 비로소 누구에게 인사를 했는지 알았다. 황금관을 머리에 쓰고 예복을 입은 남자. 오늘 즉위식을 마친 제논의 왕, 헤세 9세. 루시아의 이복 오라버니, 퀘이즈였다. 곁에는 왕비의 관을 쓴 베스가 함께였다.
“사적으로는 짐의 누이가 되지. 아니 그러하냐.”
“황공하옵니다.”
친한 척 말을 건네는 왕이 낯설었다. 루시아의 이복 오라버니는 꿈속에서 그녀를 메튼 백작과 결혼시킬 때도 명령 같은 문서 한 장만 보냈다. 왕에게 유감은 없었다. 그러나 순수하지 않은 왕의 관심은 달갑지 않았다. 왕의 관심 대상은 누이동생이 아니라 공작부인이었다.
꿈속이었다면 루시아는 아마 감격했을 것이다. 당시 그녀는 외롭고 지쳤으니까. 그러나 현재의 루시아 곁에는 든든한 남편이 있었다. 형제의 정을 갈구할 필요가 없었다.
“짐에게 오라버니라 해도 좋다.”
“어찌 감히. 과한 분부 거두어 주시옵소서, 폐하.”
생긋 미소 지으며 허리를 살짝 숙여 대답하는 태도는 형식적인 겸양이 아니었다. 완곡하며 단호한 거절. 퀘이즈는 물끄러미 루시아를 보다가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부부가 똑같이 만만치 않았다.
이런 물건이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별궁에 있는 줄도 모르게 살았다고? 수많은 군상을 살핀 날카로운 눈으로 보건대 맹한 공주님이 아니었다. 눈동자에 총기가 감돌았다. 아주 드물게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오늘 처음 보는 누이가 그랬다.
‘죽은 노인네가 그나마 남긴 건 아들 하나인 줄 알았더니.’
퀘이즈는 루시아를 칭찬하면서도 자화자찬을 잊지 않았다.
휴고는 날카롭게 경계하다가 그녀의 야무진 대처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예쁘고, 착하고, 영리하고, 당차고. 휴고는 아내를 꾸미는 미사여구를 끝없이 늘어놓을 자신이 있었다.
‘어라.’
퀘이즈는 녹을 것 같은 눈으로 제 아내를 보는 타란 공작을 보며 뒷골이 띵했다. 이 놀라움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었다. 살짝 눈이 마주친 왕비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눈을 돌렸다. 왕비는 알고 있었군! 왠지 분했다.
“공이 시켰지?”
“뭘 말입니까.”
“처음 대면하는 누이가 짐에게 이렇게 냉랭하지 않은가.”
“오라버니 노릇을 하셨어야 말이지요.”
가볍게 말을 섞는 두 사람을 루시아는 조금 놀란 눈으로 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그와 왕의 사이는 격의가 없었다.
남편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는 공작부인을 보며 베스가 웃었다. 남편이 좋아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아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타란 공작이 왜 공작부인에게 빠졌는지 알 것 같았다.
* * *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삼삼오오 모였다. 왕과 타란 공작, 내외국의 권력자들이 제법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주변으로는 섣부르게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다.
루시아는 왕비와 신분 높은 귀부인들과 함께 있었다. 왕비의 곁에 루시아가 서있고, 그 주변을 사람들이 에워쌌다. 지금 루시아는 왕비와 거의 동급이었다. 왕당파에 속하는 공·후작가문의 안주인 중에서 참석자는 공교롭게도 루시아뿐이었다. 라미스 공작은 공작부인이 이미 세상을 떴고, 필리프 후작부인은 친정어머니 상중으로 불참, 데캉 후작부인은 건강을 이유로 불참했다.
‘데캉 후작부인이 곧 세상을 뜨겠구나.’
꿈속에서 소피아는 상처한 데캉 후작과 결혼했다. 이번에는 누가 데캉 후작부인이 될지 모르겠다.
사방에서 떠들어대는 여자들의 말에 적당히 대꾸하면서 루시아는 드문드문 남편을 눈으로 좇았다.
‘내 남편.’
저 근사한 남자가 그녀의 남편이었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단연코 그가 제일 멋졌다. 그의 당당함은 왕과 함께 있으면서도 빛바래지 않았다. 꿈속에서도 그는 단연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였다.
칵테일을 계속 홀짝거리면서 루시아는 기분이 좋아졌다. 술기운 때문인지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모르겠다. 실없는 농담에 같이 웃어주고 적당히 말대꾸해 주며 가끔은 그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를 훔쳐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제법 많은 여자가 그에게 흘끔거리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에게 내 남자라고 자랑하고 싶었다. 뿌듯하지만, 한편으로 심술이 났다. 보면 닳으니까 보지 말라고, 그런 유치한 말을 하고 싶었다.
‘아, 저 여자 가슴 크다.’
수도 귀부인들의 차림새는 확실시 북부보다 과감했다. 깊은 가슴골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드레스가 너무 흔해서 나중에는 무감각해졌다. 야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가는 허리에 커다란 가슴을 가진 미녀들이 대단히 자주 눈에 띄었다.
루시아는 자꾸 여자들의 가슴으로 시선이 갔다. 안 보는 척하면서 계속 보고 있었다. 꿈속에서 봤던 그의 여자들은 모두 가슴이 컸다. 그는 큰 가슴을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다.
‘뭘 먹으면 저렇게 가슴만 커질까.’
물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슬쩍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드레스 자체는 꽤 화려했지만, 스타일은 얌전했다. 등이 드러나긴 해도 앞에서 보이지 않아 그런지 야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드레스에 불만은 없었다.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하지만 몸매를 자신 있게 드러내는 여자들의 자신감은 조금 부러웠다.
루시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여자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집중까지는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듣고 있다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휴고는 지루하게 떠드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따금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가 몇 잔째 칵테일 잔을 드는 것을 보며 저러다 취할까 봐 걱정했다. 그리고 그녀가 몸을 돌리는 순간에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속에서 불길이 확 일었다.
‘뭐야. 저건.’
그녀의 뽀얀 등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오는 내내 그녀와 눈만 마주치느라 드레스를 세심하게 전부 살피지 못했다. 등이 저럴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는 앞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흔한 드레스와 다른 앙뜨의 드레스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잘라 버리겠어.’
그는 이를 갈았다. 디자이너를 바꿔야겠다. 돈을 충분히 줬건만 재료비를 아끼자고 등을 저렇게 파놓은 건가! 그의 머리에서 김이 풀풀 솟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내놈은 전부 바닥으로 눈 깔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는 간신히 이성을 찾아 시종을 불렀다.
“숄 하나 가져오게. 귀부인의 어깨에 걸치는.”
난데없는 명이었지만, 시종은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모르는 귀부인 숄을 찾으러 달려갔다.
‘맛있어.’
칵테일은 루시아의 입맛에 맞았다. 그녀는 또 새로운 잔을 집어 들었다.
“어머…….”
주변에서 갑자기 탄성이 들려온다. 루시아가 고개를 돌리는데 어깨 위를 부드러운 숄이 덮었다. 그리고 팔이 쓱 내려와 루시아가 들고 있던 칵테일 잔을 가져갔다.
“많이 마신 것 같소, 부인.”
조금 전까지 저만치 있었던 그가 어느 사이에 바로 뒤에 와 있었다. 루시아는 당황해서 그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루시아의 빈손에 오렌지 주스를 쥐여주었다. 루시아는 눈으로 항의했다. 그는 보란 듯이 빼앗은 칵테일을 단번에 다 마셔버렸다. 그의 움직이는 목울대를 보며 루시아는 저곳에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취했나 봐.’
정말 그의 말대로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
“이건…….”
루시아가 숄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분홍색 드레스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푸른색 숄이었다.
“추워 보여서 그러니 걸치고 있으시오.”
춥기는커녕 오늘 날씨는 더운 편이었다. 루시아는 왜 그러느냐 묻고 싶었지만, 주변에 눈이 있어서 잠자코 숄을 여몄다. 등 뒤에서 반걸음 물러나서 등이 가려지는 모습을 확인하며 휴고는 만족했다.
“그새를 못 참고 부인을 찾으러 간 건가?”
퀘이즈가 유쾌한 음성으로 말하며 다가왔다. 퀘이즈는 내내 타란 공작이 공작부인에게서 눈을 못 떼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퀘이즈를 따라 한 무리의 사람이 우르르 따라왔다. 자연스레 여자들은 다 각자의 남편 옆으로 가서 부부끼리 모여있는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이 무리에 끼고 싶어 안달한 자들이 바깥쪽에 더 넓게 원을 그리며 서있고.
남자들이 끼자 대화는 재미없어졌다. 사소하고 잡스러운 대화를 하던 여자들이 입을 다물고 남자들이 주로 정치가 어떻고, 국제정세가 어떻고 떠들기 시작했다. 루시아는 그런 얘기들이 별로 재미가 없었다.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루시아는 지루함을 참으며 흘끔 그를 보았다. 그는 그리 대화에 많이 참여하는 편이 아니지만, 어쩐지 사람들은 그에게서 뭔가 이야기를 듣기를 원했고, 그가 간혹 입을 열면 모두 집중했다.
무리에 있던 누군가가 어떤 주제를 꺼내자 그 주제로 약간의 논쟁이 벌어졌다. 그는 낄 생각이 없는지 관망하는 식이었고, 분위기는 제재하지 않을 수준까지만 열이 올랐다.
그래 봤자 루시아는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조금 더웠다. 숄을 벗고 싶어서 루시아는 그의 손등을 손끝으로 살짝 두드렸다. 그가 시선을 돌리자 숄을 벗을 것 같은 몸짓을 보였다. 그가 살짝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더운데.’
왜 벗지 못하게 하는 거야. 뾰로통해 있다가 저만치 지나가는 가슴 큰 여자를 보고 슬며시 장난기가 솟았다. 다시 그의 손등을 두드리고 할 말이 있다는 눈으로 빤히 보았다. 그가 몸을 숙여 루시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왜?”
루시아도 그의 귀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고 속삭였다.
“가슴 큰 미녀, 좋아하죠?”
그가 유심히 루시아를 살피더니 다시 귓가에 말했다.
“밑도 끝도 없이 대체 무슨 소리야.”
“남자들은 다 그렇대요.”
“입만 열면 헛소리하는 여자들 말에 귀 기울이지 마.”
휴고는 그녀가 귀부인들에게서 괜히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헛소리하는 여자들 중에 제가 없을 거라는 자신감은 버리시라고요.’
루시아는 살짝 입술을 삐죽였다. 뒷말을 즐기지는 않아도 은근히 꽤 재밌다. 남을 헐뜯는 말만 아니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길 만한 오락으로 수다만 한 것이 없었다. 맛깔 나는 말솜씨를 지닌 부인 한 명만 무리에 끼어도 웃고 떠들면 몇 시간은 우습게 지나갔다.
“당신이 만났던 여자들이 다 가슴 큰 미녀였다던데요.”
정말 그런 말을 들은 건 아니었다. 간 크게 대놓고 그런 이간질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제롬을 통해 입수한 그의 옛 여자들 중에 특별히 눈에 거슬리는 여자는 없었다. 공작부인 곁에 다가와 얼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루시아는 그의 진짜 과거 여자들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꿈속에서 봤던 미래의 그의 연인들이 더 생생한 기억 속에 있어서 신경 쓰였다. 타란 공작이 동반한 여자들의 미모와 당당함이 부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꿈속에서 봤던 공작부인조차 미인이 아니었어도 가슴은 컸다.
루시아는 약간의 취기에 평소보다 기분이 좀 들떠있었다. 그랬기에 작은 심술을 부리며 그를 놀리는 과감한 짓을 할 수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자 루시아가 오히려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당황하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태연할 것 같은 남자가 동요한다. 루시아는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의 팔을 잡아당겨 몸을 숙이게 해서 다시 귓가에 속삭였다.
“설마 정말이었어요?”
기막혀하는 그를 보며 쿡쿡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 담기는 복합적인 다양한 감정 변화를 보았다. 화가 난 것 같으면서도 당혹스러움과 어이없음이 드러나는 보기 드문 진귀한 모습이었다.
‘세상에. 귀엽잖아.’
덩치 큰 이 남자가 사랑스러웠다. 오직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표정이었다. 심장이 간질간질해서 웃음이 나왔다.
휴고는 감히 겁 모르고 자신을 놀린 앙큼한 아내를 보며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다가가 살짝 귓불을 깨물었다. 화들짝 놀라 자신을 보는 그녀의 얼굴이 점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반응에 만족하여 태연하게 다시 고개를 들었다.
‘미… 미… 미쳤어. 이 남자가 정말…….’
루시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뻔뻔한 그를 노려보았다.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짓을!’
루시아는 슬그머니 눈을 돌리다가 헉, 비명을 삼켰다. 주변의 사람들이 아주 묘한 표정으로 공작 부부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표정 관리에 힘쓰는 귀족들이 노골적인 감정을 공공장소에서 드러내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다들 아주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시아는 그와 귓속말을 나누는 행동부터가 사람들 시선을 끈다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술기운 때문에 약간 흥분한 상태였다. 민망해서 얼굴에 불이 날 것 같았다. 우선 이 자리를 피해야 했다. 루시아는 재빨리 도망가려고 했지만, 허리를 감아 당기는 그의 팔이 더 신속했다.
“어디 가시오, 부인.”
귀에 바싹 입술을 대고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루시아는 그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숙녀에게 그런 걸 묻는 건 실례예요. 놔주세요.”
그가 입술 끝을 늘리며 웃었다.
‘안 돼! 하지 마요!’
왠지 모를 불안한 예감에 루시아는 속으로 외쳤으나 이미 그의 입술이 루시아의 입술 위를 꾹 눌렀다가 떨어졌다. 주변 여기저기에서 헉, 하는 숨죽인 비명과 뭔가 바닥에 떨어지며 파삭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주변을 둘러볼 용기는 도저히 안 나서 루시아는 허리를 잡은 그가 손을 풀어 주자마자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달아났다. 정말 누가 봐도 그건 달아나는 거였다.
타란 공작을 중심으로 반경 일정 거리 공간은 마치 다른 세상인 양 기이한 침묵에 잠겼다. 이 사태를 야기한 공작만 홀로 태연자약했다. 지나가는 시종의 쟁반에 다 비운 잔을 내려놓고 새 잔을 집어 드는 움직임도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그는 원래 뻔뻔했다. 무안함, 부끄러움, 이런 단어 따위는 모른다. 그가 누군가의 시선과 생각을 신경 쓰는 경우는 오직 그녀뿐이었다.
“…공작부인과 사이가 좋아 보이는군.”
퀘이즈가 침묵을 깼다.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처음엔 신기했는데 보자 보자 하니까 자신의 즉위 축하연에서 대놓고 둘이 연애질이었다. 눈꼴이 시었다.
“신혼 아닙니까.”
다들 고개를 끄덕이다가 위화감을 느꼈다. 결혼하고 1년 반이 지나지 않았나? 신혼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기엔 모호한 기간이었다. 모두의 의문을 대표해서 퀘이즈가 물었다.
“언제까지가 신혼인가?”
“애가 태어나기 전까진 신혼이지요.”
오호, 과연. 고개를 끄덕이던 사람들은 신혼 기간의 정의 따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바로 어제 결혼을 했다고 해도 조금 전 목격한 행위를 그 누구도 아닌 타란 공작이 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공작 부부가 다정하게 귓속말을 나눌 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논쟁 중이던 이들까지 입을 다물고 시선을 고정했다.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둘은 무슨 이야기를 그리하는지 즐거워 보였다. 아내를 바라보는 공작 눈에 가득한 따뜻함이 놀랍고, 사랑스럽다는 감정을 드러내는 애정 표현에는 그저 입이 떡 벌어졌다.
“…공, 그대는 마치 사랑에 빠진 것 같군.”
과연 폐하.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는 말을 직설적으로 과감히 표현하는 퀘이즈에게 모두 속으로 손뼉을 쳤다. 휴고는 무표정하게 퀘이즈를 바라보았다. 왕의 말재간에 넘어가 소문의 실마리를 제공할 생각은 없었다.
“폐하께서 그런 단어를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타란 공작이 말을 돌리자 주변 사람의 표정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특히 여자들은 더 했다. 사흘 밤낮 떠들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만들 수 있었는데 아까웠다. 가끔은 아예 근거 없는 소문이 있어도 난데없이 만들어지는 소문은 없었다.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있어야 거기에 살을 붙인다. 사교계를 강타하는 소문은 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음? 공은 짐을 대체 어찌 보고. 짐은 로맨티시스트라네.”
뭇 사람들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휴고는 픽 웃었다. 많은 목숨과 피를 발판삼아 오르는 자리가 왕좌다. 그 자리의 주인이 하는 말치고는 상당한 유머였다. 퀘이즈는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 형제들을 죽였다. 아무리 배다른 형제라고 해도 피를 나눈 혈육을 베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휴고가 퀘이즈의 손을 잡은 이유 중에는 그런 과단성이 한몫했다.
“말 나온 김에 공. 이 자리에서 비화 좀 풀어봐. 공의 러브스토리에 관심 많은 이가 한둘이 아니거든.”
왕의 위엄을 깎아내릴 수 있는 언사였으나 그게 퀘이즈의 묘한 매력이었다. 적당히 권위를 벗고 킬킬대며 농을 던지면서도 위엄을 놓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선을 넘지 않는 줄타기에 능했다. 그래서인지 퀘이즈를 지지하는 젊은 귀족이 많은 편이었다.
“됐습니다. 한마디가 백 마디로 변해 나돌 겁니다.”
“공은 소문 신경 안 쓰잖나.”
‘휴고는 가슴 큰 미녀 좋아한다죠?’라고 묻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동안 혹시 그녀에 대해 나쁜 소문이 돌거나, 자신을 둘러싼 헛소문을 듣고 그녀가 오해할까 봐 부지런히 소문을 모았다. 아무래도 그 정도로는 안 되겠다. 쓰레기 같은 풍문에 관심도 두지 않았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단속할 필요를 느꼈다.
* * *
루시아는 휴게실로 도망쳐 들어갔다. 파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널찍한 휴게실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물 한 잔 가져다 다오.”
곁을 따라온 하녀를 심부름 보내고 루시아는 숨을 골랐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술기운이 가라앉을 때까지 쉬어야겠어.’
많이 취한 건 아닌데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들떴다. 실수는 이럴 때 저지른다. 하지만 곧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미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나. 그의 짓궂은 장난을 유도하고 말려든 일 자체가 실수였다.
‘그이가 남의 시선 신경 쓰지 않는 걸 알면서.’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되었다. 아무리 말해도 그가 바뀌지 않으니 자신이 조심했어야 했다. 하녀가 가져온 물을 마시고 숄을 벗자 시원한 공기가 어깨와 등에 닿았다.
‘설마… 등 때문에?’
루시아는 숄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왜 숄을 덮어 주고 벗지 못하게 하나 궁금했는데 이유를 알 것 같으니까 웃음이 나왔다.
‘그가 그렇게 보수적인 남자였나?’
아내, 혹은 연인의 노출을 싫어하는 남자들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가 해당될 줄은 몰랐다. 숄을 구하는 수고를 할 정도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래도 앙뜨에게 불똥이 튀겠다.
‘잘됐네. 이렇게 된 거 앙뜨와 거래하는 데 이용해야겠어.’
앙뜨는 첫 방문에 어마어마한 가격의 영수증을 보내 기함하게 했으면서 이번 대관식 파티 드레스 가격은 상당히 저렴하게 청구했다. 루시아는 승전파티 때 드레스를 구매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대목에는 평소보다 몇 배 비싼 가격이 시세였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사교 데뷔 드레스는 반드시 필요해서 잠자코 있었지만, 조만간 슬슬 어찌 된 일이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공작부인, 휴식을 방해드려 송구합니다. 잠시 인사 여쭈어도 될는지요?”
휴게실은 예법에 구속받지 않는 공간이었다. 왕비가 행차한다고 해서 쉬고 있던 여자들이 일어나 인사할 필요는 없었다. 각자의 조용한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어도 큰 소리를 내면 실례였다. 루시아는 피곤한 상태는 아니라서 휴식을 방해받았어도 그리 성가시지 않았다. 인사를 건넨 여자를 바라보았다.
“앉으세요, 레이디 앨빈.”
“아아, 절 기억하고 계셨군요. 기쁩니다.”
오늘 앨빈 백작은 아내 소피아 대신 미혼 누이동생을 파트너로 데려왔다. 소피아는 그날 이후 칩거 중이었다. 아무리 대관식 파티지만, 만약 오늘 소피아가 나왔으면 루시아는 자신의 경고를 무시한 것으로 간주하려 했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오라버니가 올케의 실수를 꼭 공작부인께 사죄드리기를 원했습니다. 직접 기회가 닿지 않으면 제게 꼭 전해 드리라고 신신당부했지요. 정말 큰 잘못을 했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봐주셔요. 감히 용서를 바라지 않겠습니다. 노여움만 풀어 주시기를 간곡히 청합니다.”
“나는 이미 잊은 일입니다. 레이디 앨빈이 사죄할 필요는 없어요. 앨빈 경의 사과는 받도록 하지요.”
“너그러우신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레이디 앨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공작부인이 정말 용서했다면 ‘백작부인과 언제 만나 담소나 나누자고 전하라.’라고 훗날을 기약해서 금족령을 해제해 주었을 것이다. 형식적인 용서였다. 공작부인의 나이가 어리니까 비위를 맞추며 속을 살살 달래주면 금방 풀어질 줄 알았더니 오산이었다.
루시아는 레이디 앨빈이 휴게실 구석으로 가서 어떤 여자와 대화하는 모습을 무심히 보았다. 대화 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아서 흥미를 잃고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서 여자를 다시 살폈다.
‘저 여자…….’
짙은 밤색 머리카락, 고양이 같은 눈매, 살짝 올라간 입매와 눈 밑에 있는 눈물점. 여자는 놀만을 찾아와서 루시아의 뒤를 캐물었다는 귀족 여자와 비슷했다. 루시아는 하녀에게 저 여자가 누군지 알아오라고 시켰다. 하녀는 나이 든 시녀들을 통해 금방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평소에도 눈치가 비상한 아이였다.
“팔콘 백작부인이라고 합니다.”
“…수고했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아니타를 본 적이 없었다. 얼핏 결혼을 세 번 했다는 백작부인의 소문은 들어봤으나, 팔콘 백작부인은 사교계에 모습을 잘 드러내는 편이 아니었다. 소피아와 그의 대화를 엿듣지 않았으면 팔콘 백작부인이 그의 내연녀였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왜 내 뒷조사를 했을까.’
노리는 대상이 자신인지, 자신을 이용해 그를 노리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소피아처럼 사적인 감정으로 저지른 짓일 수 있지만, 어떤 배후를 뒤에 두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정말 목적이 있다면 언제고 자신에게 접근할 것이다. 만약 저 여자가 무슨 이유에서건 자신에게 접근해 말을 붙인다면 루시아는 그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 * *
공작부인이 휴게실을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는 아니타의 시선이 차가웠다. 지난 1년, 마음고생을 많이 한 아니타의 분위기는 그전과 다르게 변했다. 체중이 줄어 볼살이 빠지면서 인상이 강해지고 인상 못지않게 성미가 강퍅해졌다.
느닷없이 거액의 자금이 예고 없이 빠져나갔다. 이유를 알아볼 여유 없이 뒷수습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간신히 부도는 면했다. 그러나 상단 지분의 대부분이 남의 손에 넘어가 허울 좋은 껍데기만 남았다. 가문 사업의 기반을 무너뜨린 자금 공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타란 공작의 보좌관이 찾아와 잔인한 마무리를 했다.
“해서는 안 될 짓을 하셨더군요. 다른 사람 뒷조사 같은 건 감당할 능력이 없으면 하는 게 아닙니다. 그분이 몹시 노여워하셨습니다. 이후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대가를 치를 각오해야 할 겁니다. 이 정도는 아주 가벼운 경고입니다. 그분은 경고를 무시한 자에게 용서가 없으시지요.”
평소 자신을 마땅치 않게 보는 듯했던 보좌관은 경멸을 담아 비웃으며 주인의 경고를 정했다. 그가 돌아가고 아니타는 모멸감에 기절해서 며칠을 앓았다. 깨어난 아니타의 눈에 독기가 넘실거렸다.
‘여류 작가와 교류를 하고 있었군.’
비비안 공주가 여류 작가를 통해 자신에 대해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타란 공작에게 고자질했을 것이다.
공작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애정 없는 결혼이라 해도 자신에게 소속한 사람을 다른 누군가가 건드리는 일이 불쾌했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에게 가한 처분은 너무 과했다. 공작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중간에서 얼마나 날 나쁘게 말했기에.’
비비안 공주는 공작에게 고자질한 정도를 넘어서 무슨 해코지라도 당한 것처럼 말했음이 틀림없다. 그야말로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은 격이었다. 비비안 공주는 아예 겨냥해서 돌을 던졌고, 자신은 그 돌에 맞았다.
‘이런 식으로 내가 무너질 것 같아? 죽어도 혼자는 안 죽어.’
몰락 귀족의 막내딸로 태어나 반반한 외모 덕에 재력 있는 노상인과 결혼했다. 결혼 후 몇 개월 안 되어 남편이 갑작스러운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아니타는 순식간에 부자가 되었다. 돈이 있으니 신분도 갖고 싶었다. 자신에게 푹 빠진 남작을 이혼시키고 결혼했다. 두 번째 남편은 결혼 반년 만에 낙마 사고로 죽었다.
세 번째 남편은 사업하다가 만난 팔콘 백작이었다. 아니타는 신분이 탐이 났고, 백작은 돈이 필요했다. 서로의 필요 때문에 결혼했다. 결혼 1년 차에 사업차 타국에 나갔던 백작이 열병으로 사망했다.
죽은 남편과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작위를 물려줄 후계를 지정하지도 않았다. 재혼하지만 않으면 법에 따라 아니타가 죽을 때까지 백작부인이었다. 몰락 귀족의 막내딸이 부유한 백작부인이 되었다.
남편들이 죽은 건 그녀의 탓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니타를 저주받았다고 손가락질했다. 편견과 맞서 싸우며 이 악물고 살았다. 자신을 채찍질한 만큼 남에게도 가혹하게 굴었다. 뒤에서 저주와 욕을 들어도 귀를 닫았다. 그만한 독기가 있으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돈과 신분을 갖자 사교계 명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만큼은 뜻대로 되지 못했다. 유명인사는커녕 아니타는 사교계의 외톨이었다. 품위를 따지는 귀부인들은 아니타를 싫어했다. 불길하다고 이유를 붙였으나 아니타가 보기에는 둘러대는 이유일 뿐 사실은 추한 질시였다.
남 뒷말만 할 줄 아는, 잘난 척하는 사교계 귀부인들과 다르게 아니타는 남자들과 대화가 통했다. 함께 경제를 논하고 사업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외모도 매력적이었다.
아니타는 더 보란 듯이 유혹해 오는 남자를 거절하지 않고 때로는 필요하면 유혹하기도 했다. 기혼 미혼 따지지 않았다.
‘날 따돌린다고? 내가 너희 전부를 따돌리는 거야.’
귀부인들을 비웃으며 더 꼿꼿이 고개를 세웠다. 사업은 승승장구하고 다른 여자들과 달리 돈을 쓸 때마다 남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무도회에 나갈 일이 있으면 아주 화려한 보석과 드레스로 꾸몄다.
부유함이 더해질수록 사교계 여자들도 대놓고 아니타를 무시하지 못했다. 콩고물을 얻어먹으려고 달라붙는 여자들도 생겼다.
세상이 우스웠다. 몇몇 추종자들을 데리고 사교계를 누비고 다녔다. 그걸 몇 년 하다 보니까 사교계도 별거 아닌 거 같고 재미가 없어졌다. 그 후로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사교 활동을 하지 않았다. 돈이 불어나는 재미만 한 것이 없었다.
사업을 확장하는 데 더 힘을 쏟았다. 그러다 타란 공작을 만났다. 아니타는 비로소 자신이 모든 것을 얻었다는 충족감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가진 모두를 쏟아부어 만든 자신만의 견고한 성이었다.
힘겹게 쌓은 성을 운이 좋아 공주로 태어나 운이 좋아 공작부인이 된 여자가 말 한마디로 무너뜨렸다. 견고한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무너지는 자신의 성을 보며 아니타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토록 알랑대던 자들이 도움을 청하자 꽁무니를 뺐다. 재물도, 인간도 다 허상 같았다. 절치부심하다가 공작부인이 상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이나 보자.’
공작부인이 참석한다는 티파티 초대장을 구하려고 했다. 가진 인맥과 연줄을 동원했다. 내가 구해 주겠노라 큰소리쳤던 조르단 백작이 멋쩍은 표정으로 딴소리를 했다.
“흠, 아내에게 말을 해봤는데. 흐흠. 아무래도 좀…….”
뒷말을 듣지 않아도 뻔했다. 팔콘 백작부인의 수준으로는 넘볼 수 없는 파티 자리라고 비웃었을 것이다. 결국, 초대장을 구하는 데 실패했고 박탈감과 비참함을 느꼈다. 사업이 건재했다면 이런 수모는 겪지 않았으리라 생각하자 공작부인에 대한 원망이 싹텄다.
축하연 파티장으로 들어서는 공작 부부를 멀찌감치 떨어져 보았다. 변함없는 타란 공작을 보며 가슴이 뛴 것도 잠시, 사람들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입장하는 공작부인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번쩍이는 드레스로 몸을 감고 있었다. 속이 뒤틀려서 더 볼 수 없었다. 자리를 피해 휴게실로 들어갔다.
휴게실에서 레이디 앨빈을 만났다. 레이디 앨빈은 아니타가 꾸준히 공을 들인 인맥 중 하나로 잘난 오빠 덕분에 부족함 없이 자란 철없는 아가씨였다. 가려운 곳 긁어주듯 비위를 살살 맞추는 일은 노련한 장사꾼을 상대하던 아니타에게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레이디 앨빈은 아니타를 친구로 생각했다. 세간의 평이 비록 좋지 않지만 팔콘 백작부인은 여자로서 드물게 사업적 수완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곁에 붙어서 기분을 맞춰주고, 조언을 해줘서 투자로 수익을 얻었다. 그 일로 오라버니에게 칭찬도 들었는데 팔콘 백작부인은 제 공을 내세우기는커녕 오히려 네가 대단하다, 똑똑하다 칭찬했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아니타의 사업이 어려워졌지만, 레이디 앨빈은 오히려 더 자주 교류했다. 이제는 자신이 도울 차례라고 말하며 위로했다. 사실은 솔직한 마음으로 팔콘 백작부인이 한창 잘나가던 때 가졌던 자격지심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둘이 친해지면서 레이디 앨빈은 종종 집안 사정을 떠들었다. 최근 올케와 타란 공작부인 사이에서 일어난 일도 한탄하며 늘어놓았다.
‘보통이 아닌데.’
아니타는 공작부인을 어리고, 세상 험한 줄 모르는 공주님이라고 우습게 봤던 생각을 수정했다.
“레이디 앨빈이 대신해서 진솔한 사과를 해보세요. 일이 잘 해결되면 앨빈 백작께서도 기뻐하시며 레이디 앨빈에게 상을 주실 겁니다.”
아니타의 부추김에 솔깃한 레이디 앨빈이 공작부인에게 접근해서 사과를 건넸다. 그러나 원했던 답을 얻지 못했다. 아니타는 레이디 앨빈을 위로하는 척하며 속으로는 공작부인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만만히 봐서는 안 되겠어. 생각보다 성격이 강해.’
아니타는 공작부인에게 접근하려던 생각을 접었다. 언제고 기회는 있을 것이다. 자신과 공작부인 사이에는 커다란 신분 격차가 존재했으나 신분 차이는 절대적이지 않다. 아니타의 삶이 증거였다.
‘공작부인이 절세미녀? 공작이 푹 빠졌다고? 헛소리!’
아니타는 소문을 믿지 않았다. 아마 직접 눈으로 확인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상태에 이르렀다.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는 아니타는 이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