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40화 (41/77)

40장 수도 사교계 (3)

루시아는 모자를 받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풋,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이런 말을 얼굴색 하나 붉히지 않고 할까. 이렇게 노골적인 남자의 유혹을 받는 일은 처음이라 루시아는 그저 웃음이 나왔다.

넓은 장미 정원을 돌아보고 싶어서 왕비의 양해를 얻어 산책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돌풍에 모자가 날아가 당황했고, 낯선 남자가 주워 다가와서 더 당황했다.

곁에 함께 있는 하녀와 왕비가 붙여준 시녀가 든든했다. 저택 밖에서는 절대 혼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제롬의 조언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돌발 상황이 일어날 수 있구나.’라고 루시아는 생각했다.

“모자를 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시아는 이 상황 자체가 낯설어서 웃었지만, 데이빗 눈에는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목소리마저도 아름다우십니다. 저는 라미스 공작가의 데이빗 라미스 백작입니다.”

데이빗이 자신을 소개하자 루시아는 꿈속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라미스 공작의 장남이었다. 파티장에서 여러 번 보았다. 타란 공작 못지않게 추종자들을 끌고 다녔다. 두 남자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파티장에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가끔 그런 날은 두 무리의 집단이 만들어졌다.

루시아는 데이빗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호인처럼 굴지만 오만했다. 타란 공작의 오만함이 당당함과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라면, 데이빗의 오만함은 타인을 아래로 깔아뭉개는 것이었다. 순전히 루시아의 주관적인 시선이었다. 꿈속에서 루시아는 타란 공작을 동경했고 좋아했으니까.

어쨌든 루시아는 데이빗의 웃는 얼굴을 보면 항상 위화감이 들었다. 얇은 가면을 얼굴에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느낌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다가 아주 우연히 데이빗의 본 얼굴을 보게 된 적이 있었다. 대단히 큰 무도회에 참석했다가 북적이는 사람들을 피해 잠시 인적이 드문 구석진 곳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뭐? 그게 정말이야?’

큰소리가 나서 살짝 보니까 데이빗이 어떤 남자와 함께 있었다.

‘정말 아버님이?’

‘예. 아무래도 심중에…….’

이를 아득 가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루시아는 흉하게 일그러진 데이빗의 얼굴을 보고 놀라 다시 숨었다. 살기등등한 표정이 항상 웃고 다니던 평소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그런데 어색함이 없다는 점이 섬뜩했다.

루시아는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 한참을 숨어있다가 조심스럽게 홀에 나갔다. 불안하게 뛰는 심장이 오래 가라앉지 않았다. 메튼 백작과의 결혼 생활이 끝나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꽤 시간이 흐른 후, 루시아가 하녀로 다시 사교계 소식을 접했을 때 라미스 공작은 노환으로 타계하고, 데이빗이 뒤를 이었다고 들었다. 타계한 라미스 공작의 차남이 사고로 죽은 지 꽤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하녀 일을 그만두고 한참 시간이 흘러서 우연히 한 자락 라미스 공작가의 소식을 들은 것이 마지막이었다. 라미스 공작이 반역을 꾀했다가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들었다. 라미스 공작가를 친정으로 둔 왕비와 라미스 공작이 왕으로 세우려 했던 태자는 어찌 되었는지 그 후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뵙는 순간 장미꽃이 사람으로 화한 줄 알았습니다.”

어쩌면 먼 미래에 일어날지 모를 일을 회상하던 루시아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꿈속 기억을 겹쳐 남자를 보자 인상이 달라졌다.

‘혹시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걸까.’

남자의 접근 의도가 의심이 갔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닙니다. 지금껏 이런 미인을 뵌 적이 없습니다. 부디 고귀한 이름을 듣는 영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름을 묻는 것을 보니까 누군지 알고 접근한 것 같지는 않았다. 루시아의 침묵은 데이빗의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했다.

“평소에는 이런 경솔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귀인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 것 같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시어 걷지 않으시겠습니까? 가득한 장미 향에 취하면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어주시지 않을까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데이빗은 저돌적인 청년이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과감히 사랑을 고백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대신 빨리 타오르는 만큼 빨리 식는 편이다. 지금껏 어떤 여자로부터도 거절당한 적 없는 데이빗의 자신감은 충만했다.

데이빗은 자신이 돋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너무 화려해서 오히려 그를 누르는 미녀보다는 청초한 미녀를 좋아했다. 정원의 여인은 완벽하게 그의 취향에 부합했다.

데이빗은 자신의 감정에 푹 빠져서 그들을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루시아가 서있는 방향에서 뒤쪽에 가까운 측면이었다. 루시아는 볼 수 없지만, 데이빗은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볼 수 있었다.

‘저 애는 왜 여기 와서…….’

베스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남동생이 공작부인에게 작업을 거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듣기에 민망해서 절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남동생이 어떻게 여자를 꾀는지 따위는 절대 알고 싶지 않았다.

잠시 공작부인을 정원에 두고 시녀들에게 다과를 준비하라고 지시하는 중에 타란 공작이 나타났다. 공작부인을 찾기에 무슨 다급한 일이 있는가 싶어 서둘러 정원으로 함께 들어왔다가 못 볼 꼴을 보고 말았다.

흘끔 시선을 돌려 옆에 서있는 타란 공작을 올려보았다. 여전히 차가운 공작의 표정에 변함이 없었다. 다행히 크게 노여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저놈을 어떻게 죽일까.’

베스는 남동생을 향한 살인모의가 공작의 머릿속에서 구성되고 있음을 짐작조차 못 했다.

휴고는 아내에게 수작을 거는 잡놈을 보며 수십 가지 살인 방법을 떠올리고 있었다. 차가운 가면 같은 얼굴 속에서 그의 눈에 사납게 불꽃이 튀었다.

휴고는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히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있다는 장미궁으로 향하면서 자신의 등장에 그녀가 놀랄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펼쳐진 광경을 보며 그의 기분은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향기로운 꽃에 파리 한 마리가 꼬이고 있었다. 그가 그동안 품 안에 꼭꼭 숨겨 지킨 꽃이 화사하게 피어 더는 향기를 감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휴고는 이를 사려 물었다. 빌어먹을. 왜 저렇게 예쁜 거야. 그러니까 저런 놈팡이가 꼬이지. 그녀의 사랑스러움은 자신만 알면 되었다. 딴 놈들 기웃거리라고 거금을 처들인 것이 아니었다.

그의 표정은 겉으로 변화가 없으나 속은 분통이 터져서 부글부글 끓어 넘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조금 호흡을 크게 해서 간신히 참았다. 이성을 찾아야 했다. 내궁 안에서 왕의 처남을 죽일 수는 없었다.

‘뭐?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저놈이 정말 눈이 멀어봐야 저런 헛짓거리를 다시는 못 하지.’

같이 정원을 걷자고 열심히 수작을 거는 꼴을 더는 보기 힘들었다. 휴고는 앞으로 나섰다.

루시아는 끈질긴 데이빗의 데이트 신청을 어떻게 거절해야 할까 고민했다. 남자의 구애를 어떤 식으로 거절해야 서로의 체면이 상하지 않는지 북부에 있을 때 케이트에게 배워둘 것을 그랬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선약이 있어 곤란하군.”

익숙한, 그리고 들을 때마다 가슴이 뛰는 목소리가 끼어들자 루시아의 눈동자가 확 커졌다. 어, 하는 사이에 그가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와 루시아의 허리를 한쪽 팔로 감아 품으로 당겼다.

“당신이 어떻게…….”

루시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리를 감싸 안은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내 아내에게 무슨 볼일이지?”

데이빗은 갑작스러운 타란 공작의 등장에 놀라고, 자연스럽게 여인을 품으로 안는 바람에 다시 놀라고, 이어진 타란 공작의 말에는 충격으로 말문이 턱 막혔다.

“아…내. 그러면 공작…부인?”

데이빗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크게 흔들렸다. 자신의 마음을 순식간에 앗은 여인에게는 이미 주인이 있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믿을 수 없어서 데이빗은 멍하게 루시아를 응시했다. 타란 공작의 품이 익숙한 것처럼 안겨있는 모습은 또다시 충격이었다.

데이빗의 시선이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휴고의 눈썹이 꿈틀했다. 저놈에게는 보이기도 아까웠다. ‘눈 돌려!’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참고 음산하게 그를 불렀다.

“라미스 경.”

데이빗의 시선이 자신에게 와 닿자 휴고는 만족했다.

“다시는 내 아내에게 이런 식으로 사적인 접근은 하지 마시오.”

그리고 휴고는 눈빛으로 강하게 말했다.

‘꺼져. 애송이.’

완전히 깔아뭉개는 시선이었다. 데이빗은 울컥했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잠시 한담을 나누었을 뿐입니다. 결혼했다고 여인이 소유물이 되는 건 아닙니다.”

휴고의 귀에는 다시 수작을 걸겠다는 말로 들렸다. 죽으려고 용을 쓴다. 휴고의 붉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짙어졌다. 뒷일이고 뭐고 그냥 죽여버릴까. 최소한 그녀만 없었어도 심각하게 고려했을 것이다. 그녀에게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휴고는 평소 데이빗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혼자 캉캉대는 꼴이 하룻강아지라 상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일로 휴고는 확실히 데이빗을 각인했다.

데이빗이 알았다면 여러 번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지금껏 데이빗은 타란 공작에게 존재감이 없었고, 그나마 미운털이 박혀 존재감이 생겼다. 그 계기는 데이빗이 한눈에 반한 여자 때문이었으며, 그 여자는… 타란 공작의 아내였다.

“라미스 공은 재주도 좋지. 여벌 목숨이 있는 것처럼 세상을 사는 아들을 두었으니.”

휴고는 생애 처음으로 점잖은 협박을 했다.

“뭐… 뭐요?”

데이빗은 호기롭게 상대하려 했다. 그러나 휴고의 무시무시한 살기를 받고 숨이 턱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셀 수 없이 많은 목숨을 앗은 진짜 살기였다. 용맹한 적장도 꼬리를 내렸다. 데이빗이 정면에서 받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데이빗은 파랗게 질려서 벌벌 떨다가 그대로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 꼴을 보며 타란 공작이 입술 끝을 올려 비웃었다. 데이빗은 피가 머리끝까지 몰려 어지러웠다. 분노, 수치, 굴욕. 살아오며 지금껏 느껴봤던 어두운 감정이 극한까지 치달았다.

타란 공작은 공작부인의 손목을 잡아끌고 정원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장미 덩굴 벽이 가려 두 사람의 모습이 금세 사라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데이빗은 기가 막혔다. 왜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베스가 추태를 보인 동생을 향해 다가가며 속으로 혀를 찼다.

“괜찮은 게냐?”

“누님! 저자가 하는 말 못 들으셨습니까? 절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뭘 그렇게까지.”

베스는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휴고의 살기는 오직 데이빗에게만 향해서 베스는 그렇게까지 심각한 상황으로 느끼지 않았다. 그저 심약한 동생이 타란 공작 기세를 견디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러게 평소에 검술 실력을 연마하라 하지 않았니. 라미스 가문이 무가는 아니지만 검을 어느 정도 쓸 수 있어야 기사들의 충성을 받기 쉽지.”

“검술 실력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아무리 안하무인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협박을. 누님은 이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보십니까?!”

협박은 무슨. 베스는 남동생의 과한 표현이 못마땅했다. 사실 베스도 살짝 과하다 생각했지만 데이빗이 방방 뛰니까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뭐든 자기 우선으로 생각하는 남동생의 성품을 알고 있었다.

“네가 먼저 잘못하였지. 공작부인에게 수작을 걸지 않았더냐.”

“제가 그걸 알았느냐고요!”

“아무튼, 그만 일어나라.”

베스는 추한 꼴로 주저앉은 동생에게 인상을 썼다. 데이빗은 이를 악물었다. 자기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을 어쩌란 말인가. 시간이 더 지난 후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났다.

“정말 공작부인입니까?”

“그래. 오늘 입궁해 나와 식사를 함께했지. 그러니 혹여 이후에 다시 보면 무례하게 굴지 말고.”

데이빗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는 정말 낙담했다. 운명의 여자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누님은 왜 저런 미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겁니까. 공주였다면 누님이 먼저 아실 수 있었잖아요.”

“하다 하다 이젠 별소리를 다하는구나. 내가 공주들이 미인인지 아닌지 찾아보라는 말이니?”

베스는 남동생의 우는소리를 냉정하게 잘라냈다.

“급한 일이 아니면 오늘은 그만 돌아가라. 난 아직 손님 대접을 더 해야 하니까.”

“…손님이라면 공작부인 말씀입니까?”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관심에 베스는 쯧, 혀를 찼다.

“타란 공의 경고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구나. 헛된 수작 말고 돌아가.”

“참 나. 기가 막혀서. 결혼한 여인은 다른 사람과 말도 나누지 못한다는 법이 있답니까?”

남편 앞에서 대놓고 부인에게 수작을 거는 짓은 물론 무례했다. 충분히 결투를 신청할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제논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상대를 조롱하려는 고의성이 없다면, 오히려 그런 일로 결투를 신청하는 일이 품위 없는 짓이라고 여겨 비웃음을 샀다.

제논 귀족들의 성 풍속은 대단히 자유로웠다. 남자건 여자건 애인이 있다는 이유가 이혼 사유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남자의 사생아는 물론이고 여자의 사생아에도 관대했다. 결혼하고 연서를 받는 일은 흥밋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데이빗이 보기에 타란 공작의 행동은 추했다. 여자를 구속하려는 짓은 촌뜨기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눈앞에서 부인에게 접근하는 남자를 보면 남편 된 입장에서 기분이 나쁘겠지.”

말은 하면서도 베스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타란 공의 반응은 과했다. 그건 누가 봐도 질투에 휩싸인 남자의 과격함이었다.

‘질투?’

그것만큼 타란 공작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없을 거라고, 베스는 생각했다.

* * *

그에게 단단히 손목이 잡혀 루시아는 끌려갔다. 그가 내디딘 발걸음 간격이 너무 커서 그는 조금 빠르게 걷는 정도였지만 루시아는 종종걸음으로 달려야 했다.

“휴, 무슨 일이에요?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 물으려 했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루시아를 확 잡아당기며 키스하기 시작했다. 사방이 트여있고, 누가 올지 모르는 정원이었다. 루시아는 기겁해서 그를 밀치려 했지만, 턱을 틀어잡은 그의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강하게 비비자 연약한 입술이 쓸리며 얼얼했다. 순식간에 그녀의 입안을 점령한 뜨거운 혀가 치열을 훑고 목 안쪽 깊은 곳까지 건드렸다.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밀어붙이는 격렬한 키스를 루시아는 숨을 할딱이며 간신히 쫓아갔다. 그는 입술을 떼었다가 방향을 바꿔 몇 번이고 다시 겹쳤다. 숨이 턱까지 찰 때 키스가 끝났다. 마무리로 그녀의 입술을 혀로 부드럽게 핥는 그의 붉은 눈동자는 정염으로 가득했다.

“당신 디자이너를 잘라야겠어.”

그가 미련을 놓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에 반복해서 가벼운 키스를 날렸다.

“네?”

“누가 이렇게 예쁘게 하고 나오래. 대충 하고 오지!”

직접 의상실을 방문해서 굳이 값비싼 디자이너를 붙여 준 사람이 딴소리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그의 억지가 터무니없지만, 예쁘다는 말에는 기분이 좋아서 그를 향해 곱게 눈을 흘겼다.

나오기 전에 봤던 거울 속 자신은 그런 대로 예뻐 보이기는 했다. 난생처음 남자의 적극적 구애를 받아보고, 남편도 예쁘다 해주니까 루시아의 자신감이 더욱 커졌다.

“그러시면 안 돼요. 앙뜨가 오늘 아침 일찍부터 얼마나 수고 많았는데요. 제 차림이 가문의 위신 문제라고 당신이 그러셨어요.”

위신 따위 상관없었다. 그녀에게 드레스를 사 입히고 싶었을 뿐이다. 그녀가 추레하게 입고 다니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예쁘게 하고 다니는 것도 싫고. 그는 모순 속에서 방황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자리를 뜨면 어떡해요. 왕비 마마께 무례라고요.”

“이 상황에서 그런 게 중요해?”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데요?”

“그 새……. 그자가 당신한테 집적대잖아!”

“…네?”

루시아는 씩씩대는 그를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떨어진 모자를 주워주었을 뿐이에요.”

루시아도 바보가 아닌지라 아까의 상황이 뭔지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굳이 그에게 남자가 내게 데이트 신청했다고 자랑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단정하지 못한 행실로 공작가 명예를 더럽힌다고 오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긴. 내가 다 들었는데. 그건 여자한테 수작 거는 전형적 수법이야.”

루시아는 그를 새침하게 흘겨보다가 흐응, 중얼거렸다.

“많이 해보셔서 아는군요.”

이야기가 왜 거기로 튀는가. 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럴 때마다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과거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었다.

“아까의 상황이 여자에게 남자가 접근하는 상황이라 친다고 해도.”

친다고 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런 상황이라고!

“제가 그럴 생각 없으면 되는 거잖아요.”

분기탱천했던 휴고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녀의 지극히 담담한 반응이 그의 마음을 풀었다.

“왜 이렇게 과민 반응하세요. 공작가의 명예에 손상 갈 행동은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거 아니야.”

루시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의 말뜻을 깊이 생각하기 전에 정신이 딴 곳에 팔렸다.

그녀의 눈이 자신이 아닌 좀 더 멀리 향하고 있었다. 휴고는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놈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으려고 무작정 그녀를 끌고 오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그들은 장미 정원 중에서 노란 장미가 가득한 구역 한가운데 있었다. 하필. 휴고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그녀가 장미궁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루시아는 북부에서 장미 정원 조성에 실패했다. 제롬이 기를 쓰고 말렸다. 제롬은 주인님께서는 장미꽃을 싫어하시고 어쩌고 열심히 이유를 갖다 붙였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지만, 제롬의 노력이 눈물겨워서 장미 정원은 만들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을 보니까 정말 장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가 보다. 루시아는 모르는 척 화제를 돌렸다.

“왕비 마마께서 다과 준비 중이세요. 함께하실 시간 되세요?”

“…차?”

휴고는 시간이 없었다. 곧 시작할 회의 때문에 가봐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데이빗도 그 자리에 있을 것 아닌가. 그놈이 있는 자리라면 자신이 자리를 지켜야 했다.

“음, 괜찮아.”

두 사람은 정원 바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휴고는 이 망할 장미들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장미라면 이제 아주 지긋지긋했다. 자신이 꽃 따위에 호불호의 감정을 품을 줄은 몰랐다.

루시아는 데이빗이 마음에 걸렸다. 아직 먼 미래의 일이고, 반역이 성공했으면 모를까 어차피 실패해서 죽었다. 하지만 데이빗의 반역이 아주 조금이라도 그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뭐라고 한단 말인가. 꿈에서 봤다고? 당장 일어날 일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가 조금이라도 데이빗을 경계했으면 좋겠다. 그가 방심해서 주변 경계를 게을리 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 데이빗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보면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았다.

루시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듣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추어서 말했다.

“휴, 정말 쓸데없는 질문인데요. 듣고 잊어주세요. 라미스 공작가가 반역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을까요?”

“…반역?”

위험한 질문이었다.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더구나 이곳은 궁이었다.

“제가… 경솔했지요?”

다른 사람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면 그는 아예 무시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체 무슨 의도인가 의심하며 경계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질문에 그는 약간의 우려도 없이 진지하게 답을 생각했다.

휴고는 라미스 공작을 떠올렸다. 그 노인 성품에 그럴 일은 없었다. 한참 나이 어린 자신에게도 꼬박꼬박 공대를 해주는 노회한 정치인이었다. 퀘이즈는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로웠다. 단지 장인이라는 이유로 라미스 공작을 가까이 두는 게 아니다.

“왕의 측근이고, 외손이 셋이나 되는데 그중 하나는 왕이 되겠지. 꽃밭을 제 손으로 망가뜨릴 이유가 없어.”

“당분간 말고. 음……. 그러니까 아까 봤던 라미스 백작이 공작이 되고 나서 먼 미래에요.”

“…….”

데이빗이 공작이 되고 난 이후. 휴고는 그때를 생각하자 조금 전처럼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은 애송이가 철모르고 까부는 걸 못 본 척하고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 그자는 나이가 들고 모략에 능한 정치꾼으로 변화할 터. 그자가 자신에게 날을 세우고 있다는 걸 휴고도 알고 있었다. 그자가 공작이 되어 더 큰 힘을 얻어 그 힘으로 맞서려고 한다면.

‘반역 이전에 내 손에 죽는다.’

휴고는 방심해서 불씨를 남겨놓지 않았다. 라미스 공작과 왕의 체면을 생각해서 지금은 내버려두고 있을 뿐이었다. 워낙 가소로워서 우습게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자 지나치게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공작가를 이어받을 라미스 공작의 적장자였다. 노쇠한 공작이 언제까지 공작가를 지킬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휴고는 데이빗 라미스, 그자에 대한 경계를 마음속에 심어놓았다.

“그게 왜 궁금했지?”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까 그 사람이 당신을 보는 눈초리가 좀…….”

“걱정돼? 내가?”

“…쓸데없는 걱정인가요?”

“그럴 리가.”

휴고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위로 들어서 손등에 키스했다.

“걱정해 주는 건 좋은데, 안 그래도 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는 정말 언제나 자신만만했다. 루시아는 소리 없이 웃음을 흘렸다. 이 남자라면 어떤 위기가 닥쳐도 다 헤치고 나갈 것이다. 든든한 성벽에 둘러싸여 보호받는 기분은 아늑하고 편안했다. 약간의 불안이 모두 사라졌다.

“당신이 집사에게 노란 장미에 관해서 물었다고 들었어.”

이미 정원에서 빠져나왔지만, 휴고는 가득하던 노란 장미가 도통 마음이 쓰여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요. 제대로 마무리하셨다는 말은 집사에게서 들었어요.”

루시아는 웃으며 넘어가려 했다. 노란 장미는 그리 오래 화제로 삼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그런 건 집사에게 묻지 말고 내게 물어.”

“그런 거라면 어떤 거요?”

“궁금한 건 뭐든지.”

“당신이 무척 귀찮을 거예요.”

“안 그래.”

‘딴 놈하고 말할 시간 있으면 나하고 한마디 더 해.’라고 휴고는 유치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충성스러운 집사 제롬조차 딴 놈이 되었다. 그는 예전이라면 생각도 못 했던 유치함을 아직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해도 아주 당당히 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살포시 웃었다. 그가 성실한 남편으로 노력하겠다는 다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의 노력의 흔적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그는 밤마다 다음 날 자신의 일정을 간단하게 말해 주었고, 루시아는 그가 어디서 뭘 하고, 왜 늦는지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날 거라고 의심하지는 않지만, 그의 일정을 아니까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아서 더 마음이 편했다.

휴고의 우려와 달리 데이빗은 돌아가고 없었다. 소궁 테라스에서 왕비와 공작 부부는 차를 마셨다. 베스는 태연한 척하고 있으나 자꾸 타란 공작에게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설마 공작하고 마주 앉아 차를 마실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급한 용무는 해결하셨습니까?”

베스는 공작이 갑자기 찾아온 이유는 공작부인에게 급하게 전할 중요한 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예, 해결했습니다. 아까의 무례는 사죄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공께서 동생이 공작부인께 저지른 무례를 너그러이 봐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따끔하게 야단을 쳐서 돌려보냈습니다.”

베스가 역성을 들었으나 면죄부가 되지 못했다. 이미 데이빗은 휴고의 뇌리에 콕 박혔다. 아주 안 좋은 쪽으로. 휴고는 오늘 안으로 데이빗의 속옷 색깔까지 탈탈 터는 조사를 명할 생각이었다.

루시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여기 왜 왔는지 듣지 못했다. 베스의 시선을 피해 잠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루시아의 눈에 담긴 의문을 읽은 그가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천천히 혀로 윗입술을 핥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루시아가 얼굴을 확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아까의 키스가 떠올라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남자가 정말! 여기가 어디라고.’

눈을 치뜨고 그를 노려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의 뻔뻔함과 여유로움이 정말 얄미웠다.

“공작부인, 더운가요? 얼굴이 붉군요.”

“예? 아……. 괜찮습니다.”

시녀가 들어와 왕비에게 작은 목소리로 고했다. 베스는 알았다며 시녀를 내보내고 묘한 표정으로 타란 공작을 보았다.

“공,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오후 회의 시작이 목전인데 왜 오지 않느냐고 하시는군요.”

“회의가 있으셨어요?”

아까는 그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대체 왜 이렇게 여유 부리는 건데요?! 주변 눈이 있어 비난하는 말을 속으로만 삼켰지만, 그를 보는 루시아의 눈꼬리가 심상치 않게 올라갔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그는 베스에게 인사하고, 루시아에게 ‘잠시.’라는 말을 남기며 테라스를 나갔다. 루시아는 베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베스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물론 부부니까 냉랭하지는 않겠지 생각했지만, 베스 예상과 달리 공작부인은 타란 공을 전혀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못 본 척했으나 둘이 자꾸 시선을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루시아가 테라스를 나가자 그가 기다리고 서있었다. 왕이 사람까지 불러 찾는데 왜 이렇게 늑장일까. 루시아의 속이 탈 지경이었다. 왜 나오라 했느냐고 물으려는데 그가 성큼 다가오더니 갑자기 허리를 확 끌어안았다. 루시아가 화들짝 놀라 그의 어깨를 쳤다. 모셔가려고 기다리던 시종이 눈치 있게 몸을 슥 돌리는 것을 보며 루시아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이이가 정말. 왜 이래요! 다 보잖아요.”

루시아는 목소리를 잔뜩 죽이며 그의 가슴을 힘껏 밀어냈다.

“오늘 늦을 거야.”

“알아요. 어제 말씀하셨잖아요.”

“곧 집으로 갈 거지?”

“네, 왕비 마마와 이야기 끝나면요.”

“잠들지 말고 기다려. 아까 하다 못 한 것, 마저 하게.”

“휴!”

그의 손이 루시아의 턱을 잡고 키스했다. 짧고 진한 키스였다. 루시아는 경악했다. 휴고는 사과처럼 붉게 물든 아내의 볼에 다시 입을 맞추고 그녀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뒤돌아 걸어갔다.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는 루시아의 꼭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늘 집에 가면 다시는 이러지 못하도록 단단히 따질 것이다.

“흠, 흠.”

헛기침 소리에 루시아는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베스가 어느새 와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본 걸까. 루시아는 정말 민망해서 기절하고 싶었다.

‘이거 아무래도. 터무니없는 소문이 아닌 것 같아.’

베스는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공작부인을 보며 생각했다. 사람들은 소문의 초점을 ‘미녀 공작부인’에 맞추고 ‘홀딱 반해 영지로 끌고 내려간 공작’ 부분은 미녀이기 때문에 나오는 결론으로 보았다. 베스는 소문의 전제보다 결론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에게 말해주면 얼마나 놀랄까. 당분간 혼자 알고 있다가 남편이 뒤늦게 알고 놀라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 * *

티파티 날이 다가왔다. 루시아가 참석할 티파티의 주최자, 조르단 백작부인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롬이 정리해서 알려주었다.

나이는 서른여덟 살. 백작과의 사이에 슬하 2남 5녀를 두고 있으며 장남이 얼마 전 열다섯 살 생일에 사교계 데뷔 파티를 열었다. 다섯 명의 딸들 중 셋째를 제외한 넷이 혼외자식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정원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화제를 나누기 좋아하고 노래 솜씨가 빼어나다.

‘…원래 이런 걸 알고 가는 거였어?’

꿈속에서 메튼 백작부인에게는 누구도 사교계 정보를 주지 않았다. 정말 맨땅에 부딪히는 심정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온갖 파티에 참석했다.

‘딸 다섯 명 중 넷이 혼외자식이라고?’

몰랐던 사실이었다. 꿈속에서 기억하던 조르단 백작부인은 인맥이 넓고 다복한 가정을 꾸민 사람이었다. 자식이 많다기에 부부 사이가 정말 좋구나, 순진하게 생각했다.

조르단 백작부인의 평온한 나날에 큰 풍파가 들이닥쳤다. 본래 열 명 규모로 계획한 티파티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온갖 인맥을 동원해서 끼어달라는 사람들 요청이 줄을 이었다. 누구는 빼고, 누구는 넣고. 도무지 열 명만 추릴 수 없었다.

골머리를 앓는 백작부인을 보다 못한 가족이 조언했다. 아예 티파티 규모를 늘리라고.

백작부인은 소규모 티파티만 주로 열었다. 아주 가끔 큰마음 먹고 1년에 한 번 정도 큰 규모로 열기는 했지만. 결국, 예정에 없이 50여 명이 참석하는 티파티로 취지가 바뀌었다.

“티파티, 그거 갈 건가?”

한바탕 정사가 휘몰아친 침실 안은 끈적이는 기운과 야릇한 향으로 가득했다. 휴고는 그녀의 뒷목부터 도드라진 척추를 따라 입을 맞추며 저녁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네, 내일인 걸요.”

“좀 피곤한 자리가 될 것 같던데.”

그는 아내에 관한 한 어떤 변수도 달갑지 않았다.

엎드려있는 그녀의 나신 위로 휴고의 입술이 끈질기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등을 따라 엉덩이로 이어지는 곡선까지 내려왔다.

“사람들이 제게 그렇게 관심이 많은 줄 몰랐어요.”

티파티의 규모를 바꿀 정도였다니. 루시아는 이 일로 제법 놀랐다. 그리고 공작부인이라는 위치가 생각보다 더 대단한 자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체면을 손상하지 않기 위해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사교 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휴고는 쿡쿡 웃느라고 작게 흔들리는 그녀의 하얗고 토실한 엉덩이를 깨물었다. 짧은 비명을 지르며 그녀가 앙탈을 부렸으나 그는 탐스러운 둔덕에 남은 잇자국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가볍게 웃고 넘길 일이 아니야. 내일 자리는 취소하고 입단속 해서 다른 일정을 잡지그래?”

“예의가 아니죠. 그랬다가는 저에 대한 악평부터 돌 거예요.”

묵직하게 그가 위에서 기대왔다. 귓가에서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러면 그들은 입을 함부로 놀린 대가가 뭔지 알게 되겠지.”

휴고의 진심을 루시아는 흘려들었다. 사교계의 소문은 누가 손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불리한 소문이 나돈다고 출처를 찾아내 응징한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 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시도를 그가 최초로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일 티파티에 예정대로 참석하면 애초에 그런 소문이 돌 일 없어요. 취소 안 해요.”

“…고집하고는.”

“흐응…….”

그녀를 위에서 누르며 그는 그녀의 밀처 안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한바탕 쏟아낸 체액으로 촉촉한 내부가 그의 것을 매끄럽게 감싸면서 삼켰다. 그러나 그녀가 엎드려있는 자세라서 진입이 쉽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두 손을 위에서 깍지로 잡아 누르면서 허리에 힘을 실었다.

“몇 시에 끝나지?”

“낮에 시작하니까……. 아……. 해 지기 전에는 끝……. 앗.”

그가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가 빠져나갈 때마다 오싹오싹했다. 단단한 끝이 안쪽의 예민한 부근을 쿡쿡 찔렀다. 루시아는 콱 시트를 움켜잡았다. 위에서 누르는 무게의 적당한 압박이 그녀의 흥분에 일조했다.

“내키지 않으면 중간에 나와. 당신은 그래도 되는 위치야.”

“아앗!”

“윽.”

갑자기 그녀의 안쪽이 확 조이자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삼켰다. 절정을 느낀 내벽이 그의 중심을 꽉 문 채 경련했다. 루시아의 몸이 파들파들 떨리다가 퍼져버렸다. 조임이 어느 정도 풀리자 그가 혀를 찼다.

“몇 번 넣지도 않았어. 벌써 가?”

그녀의 귀가 새빨갛게 물드는 것을 보며 휴고는 키득거렸다.

“이러다 나중엔 손만 대도 가겠어, 부인.”

그가 다시 허리를 움직이자 루시아가 헉 비명을 질렀다.

“자… 잠깐만요. 조금만. 아……. 쉬고……. 아응…….”

그가 짧고 강하게 쳐올렸다.

“혼자만 재미 보겠다?”

“흐윽. 아……. 맨날. 으응……. 괴롭히고…….”

“말은 바로 해야지. 기분 좋게 해주잖아.”

휴고는 그녀의 골반을 잡아 엉덩이를 세우고 뿌리 끝까지 진입했다. 깊은 안쪽을 건드리는 느낌이 짜릿해서 루시아는 눈물이 찔끔 났다.

그의 움직임이 점점 격해졌다. 치고 빠질 때마다 허벅지를 따라 체액이 흘렀다. 그가 진입할 때마다 물이 튀는 젖은 소리가 났다. 절정의 여운이 남은 상태로 그가 가차 없이 밀어붙이자 예민한 내벽이 꿈틀거리며 그의 성기에 착 달라붙었다.

그녀의 입에서 교성이 터졌다.

“아! 하앗! 아앙!”

“후우……. 비비안.”

그가 탁한 음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오싹한 쾌감을 느끼며 몸이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조여드는 내부가 그를 자극하고 그의 움직임은 더 빨라졌다.

“아윽! 하앙! 천천… 천천히잇!!”

휴고는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철저하게 정복해 나갔다. 힘이 들어간 그의 승모근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녀의 샘은 마르지 않고 그녀의 질은 경련을 멈추지 않는다. 좁은 내벽을 파고들어 스치는 느낌에 전율했다. 파정 순간의 아득한 쾌감만큼이나 그의 성기를 애무하는 그녀의 속살이 좋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그녀의 내벽에 성기를 찔러 넣는 순간, 그는 이 여자를 소유했음을 확인하며 희열을 느꼈다. 매일 끊임없이 수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해도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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