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장 수도 사교계 (2)
욕실과 침실을 번갈아가며 질펀하고 난잡한 섹스를 했다. 루시아는 완전히 기진맥진했다. 깨끗이 씻어 몸은 보송보송한데 다리 안쪽 깊은 곳의 아릿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와 셀 수 없이 몸을 섞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의 힘과 크기가 버거웠다. 루시아는 그의 몸 위에 완전히 축 늘어졌다.
휴고는 그녀를 제 몸 위에 올려놓고 따끈한 그녀의 체온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뒤 허벅지를 지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만지고 쏙 들어가는 허리선을 어루만졌다. 부드럽고 동시에 끈질긴 손길이었다. 루시아는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어서 그가 몸을 더듬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대관식 날이 잡혔어. 약 한 달 후.”
“생각보다… 늦네요. 원래 대관식은 국장 후 그 정도 기간을 두어야 하나요?”
꿈속에서는 어땠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왕의 죽음, 국장, 새 왕의 즉위로 정신없이 상황이 급변하는 동안 별궁은 딴 세상처럼 조용했다.
“좀 쓸데없는 관습이 있거든.”
왕이 죽었다고 새 왕이 넙죽 왕위를 받는 일은 미덕이 아니었다. 귀족들이 왕을 추대하는 의식을 치르고 새 왕에게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기를 청했다. 관례상 세 번을 거절하고 네 번째에 받아들인다. 새 왕은 ‘그대들의 간곡한 뜻을 받아들여…….’ 어쩌고 하는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허락문을 발표한 후 대관식을 치렀다. 휴고가 보기엔 대단히 쓸데없는 짓이었다.
“한 달이면 여름이 다 갈 거예요. 그러면 구매한 드레스가…….”
“어차피 입을 일은 많아. 당신이 수도에 있다는 사실이 이미 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했어. 당신 앞으로 초대장이 쏟아져 들어오겠지.”
등을 타고 오르듯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루시아는 밀려오는 졸음을 눈을 깜빡거리며 몰아냈다.
“무슨 초대장이요? 파티는 못 여는 것 아니었나요?”
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까지의 파티 개최는 금지한다.
“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파티는 원래 비공식이 더 많아. 지금도 매일 여기저기에서 파티는 열리고 있고. 티파티 같은 건 거의 제한이 없는 편이지.”
“티파티…….”
“대관식까지 외부 활동을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래도 돼요?”
“당신이 내키지 않으면.”
“제가 한 달을 집에서 꼼짝하지 않으면 죽을병에 걸렸다고 소문이 날 텐데요?”
그가 낮게 웃었다.
“당신이 곤란하실 거예요.”
“날 곤란하게 하는 일은 세상에 없어.”
오직 당신만 제외하면. 휴고는 속으로 덧붙였다.
루시아는 생각해 보았다. 어차피 꼭꼭 숨어 살 수는 없었다.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에 노출될 일이 부담스럽긴 해도 겁나지 않았다. 꿈속의 경험, 북부에서의 경험까지 더하면 그녀는 절대 첫 사교계 데뷔에 덜덜 떠는 뭘 모르는 아가씨가 아니었다.
“처음이 대관식 같은 큰 무대인 것보다는 티파티에 나가서 분위기 파악을 하는 편이 더 낫겠어요.”
수도의 티파티는 북부와 분위기가 얼마나 다를지 궁금했다. 꿈속에서 그녀의 주 무대는 무도회였다. 메튼 백작은 루시아에게 무도회에 나갈 것을 종용했기 때문에 힘들어서 낮에는 티파티를 나가고 밤에 무도회를 나가는 두 개 일정을 모두 소화할 수 없었다.
티파티, 특히 10여 명 내외의 소규모 친분을 다지는 티파티는 한 번 나가기 시작하면 정기적으로 꾸준히 나가야 했다. 초대장을 받고 몇 번 빠지면 다시는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이벤트처럼 가끔 여는 사람 수가 많은 티파티(루시아가 열었던 정원파티 비슷한)만 몇 번 가보았다. 그리고 그 몇 번의 티파티에서 파티 깨기를 구경했다. 덕분에 북부에서 파티 깨기를 당하고도 당황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드레스는…….”
“그 얘기는 그만. 환불했다가는 당신 말대로 소문이 쫙 나겠지. 타란 공작가가 곧 파산할 거라고.”
푸훗. 루시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디자이너 말이 당신이 의상실까지 다녀가셨다면서요?”
루시아가 앙뜨에게 혹해 넘어간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 곳을 드나드는 모습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가 직접 의상실에 들러 의상 제작을 부탁했다는 말을 듣고 감동했다. 다정한 부군과 백년해로하는 공작부인이 부럽다는 말을 연발하는 앙뜨의 말에 어깨가 으쓱했다.
“왜 그러셨어요?”
“뭘 하는 데 꼭 이유가 필요한가?”
“말씀 안 하시면 저 편한 대로 생각할래요.”
“…어떻게?”
“제가 남루한 차림으로 공작가 망신시킬까 봐 걱정되어 그러셨다고.”
“아니야. 그런 건 상관없어.”
그녀 편한 대로의 생각이 자신에게 절대 유리하지는 않다는 걸 휴고는 깨달았다.
“그럼요?”
“이유가 없으면 안 되나? 당신에게 사주고 싶었어. 이걸로는 안 돼?”
루시아는 웃으면서 ‘돼요.’라고 답했다. 그가 잠시 후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당신하고 말을 하면 중간에 통역이 필요한 기분이 들어. 뭐가 문제일까.”
“그러게요. 전 안 그런데 뭐가 문제일까요?”
“…….”
그의 침묵에서 뚱한 표정이 떠올라 루시아는 키득키득 웃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뭐가?”
‘당신이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날 좋아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착각할 것 같으니까…….’
그는 루시아가 아무 말이 없자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더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루시아는 정말로 잠이 들었다.
휴고가 말한 대로 초대장이 날아오기 시작하더니 사나흘이 지날 때쯤 조금 과장해서 포댓자루 하나 가득 초대장이 쏟아져 들어왔다.
루시아는 아직 수도 사교계에 공식 데뷔하지 않았다. 대관식까지 공식적 파티는 열 수 없는 시기라서 어느 파티에 참석하건 공식 데뷔는 아니었다. 그녀의 데뷔는 대관식 축하연이 될 것이다. 그래도 사교 활동을 시작하는 첫 자리였다. 어디를 택할지 루시아는 신중하게 골랐다.
사람이 많은 자리를 제외하고 소규모 티파티 위주로 골랐다. 꿈속 기억을 더듬어서 이름을 들어봤구나 싶은 사람이 주최한 자리를 선별했다. 그래도 수십 장이 넘었다.
마지막으로 제롬의 도움을 받아 조르단 백작부인이 여는 티파티로 낙점했다. 백작부인은 소규모 친분 위주 활동을 좋아하는 수도 사교계의 유명 인사였다. 그래서 루시아는 꿈속에서 백작부인의 티파티를 가본 적 없었다.
“조르단 백작부인은 친한 사람들과 모여 소소히 대화 나누기를 선호해서 자주 자리를 마련합니다. 어울리는 귀부인들도 조용한 활동을 취향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롬은 간단하게 백작부인의 정보를 전달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이른바 드센 여자들이 모이는 자리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마님께서 수도 귀부인들과 친분을 다지기 위한 첫 자리로는 부담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날짜는 일주일 후였다. 루시아는 초대에 응한다는 편지를 백작부인에게 보냈다.
* * *
퀘이즈는 대관식을 앞두고 열의가 넘쳤다. 자신이 다스릴 왕국의 모습을 그리느라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뭔가를 했다. 힘이 되어줄 귀족들을 불러 모아 이야기를 나누고, 관리들을 통해 의견을 들었다. 귀족들과 친분을 위해 소규모 만찬회를 열고 기사들의 충성을 다지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혼자 있을 때조차도 사색에 잠겨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퀘이즈가 특히 관심을 쏟는 자기 세력 인물이 몇 있었는데 대표적 인물이 타란 공작이었다. 공적으로, 사적으로 아주 질기게 휴고를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휴고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점심은 퀘이즈와 함께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한담을 나누는 일도 포함이었다.
“공작부인이 수도에 와있다고 하던데, 언제 온 건가?”
“좀 되었습니다.”
“허. 왜 나는 자꾸 공 소식을 다른 사람 입에서 듣지? 우리 자주 보는 편 아닌가?”
“제 안사람 소식을 굳이 폐하께 말씀드릴 필요가 있습니까?”
퀘이즈는 귀족들의 왕위 추대를 받고 관습에 따라 사양한 상태였다. 그래서 아직 즉위하지 않았으나 왕으로 대우했다.
“공 안사람이지만 내 누이도 되지 않나. 언제 한 번 입궁하라고 하지. 누이 얼굴 정도는 알아야지.”
“폐하께서 누이라 아시기 전에 제 아내가 되었으니 공작부인으로 대해 주시지요.”
완곡한 거절이었다. 휴고는 공식적 자리가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 아내를 왕과 만나게 할 생각이 없었다. 퀘이즈는 대단히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특히 속마음을 숨기지 않는 진실한 모습처럼 행동하는 데 탁월했다. 거짓말에 능통하다기보다는 대부분의 진실 속에 아주 작은 것을 숨기는 재주가 있었다. 순진한 아내가 닳고 닳은 정치인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휴고는 퀘이즈를 전적으로 믿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발 물러나 있지만, 내 뒤를 치지만 않으면 먼저 돌아설 일이 없을 것이라는 태도만 확실히 밝혔다. 영리한 퀘이즈는 휴고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주종관계가 아니라 동맹관계였다. 그래도 사람 심리란 멀어지려고 하면 가까이 가고 싶다. 틈 하나 없는 타란 공작보다는 공작부인을 공략할 수 있지 않을까 기웃거리고 있었다. 퀘이즈의 의도를 휴고는 쉽게 간파했다.
아내에게서 아명을 들으려고 어린 시절을 이것저것 묻다가 그녀의 외로움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와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표정은 꿈을 꾸는 것처럼 아련했다. 얼마 전에는 친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서 단단히 탈이 났다. 그녀는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퀘이즈가 혈육의 정을 내세우며 든든한 오라비가 되겠다고 자처하면 마음이 기울 것이다. 아내의 마음에 형제에 대한 정이 생기면 이용당할 수밖에 없다. 휴고가 죽은 공작에게 이용당했던 것처럼. 왕족은 절대, 왕족이 아니라도 권력과 밀접한 자들 사이에 진정한 관계는 없었다. 그녀가 차가운 현실을 깨닫기보다는 가능하면 모르기를 바랐다.
“공은 너무 삭막해. 오후에는 뭘 할 건가? 공과 몇 가지 의견을 나누고 싶은 사안이 있는데.”
퀘이즈는 깔끔하게 물러설 줄 알았다.
“급하지 않은 일이면 다음에 듣겠습니다. 오늘 오후는 일찍 들어가겠다고 벌써 몇 번은 말씀드렸습니다.”
영지에서 올라온 처리하지 못한 일거리가 산더미였다. 왕의 즉위 문제에 매달려 다른 일을 돌아보지 못했다.
“그랬던가.”
퀘이즈는 입맛을 다시며 의뭉스레 시치미를 뗐다.
“그럼 내일 밤에 술 한잔은 어떤가.”
퀘이즈는 거절할 수밖에 없는 제안을 먼저 하고 마지막에 진짜 용건을 꺼냈다. 퀘이즈의 교묘한 수법을 알면서도 휴고는 못 이긴 척 넘어갔다. 어차피 왕과 손을 잡았다면 친하게 지내는 편이 나았다.
“모레는 괜찮습니다.”
“모레라. 그도 좋군. 한데 공은 술 마시는 날을 정해놨나? 왜 되는 날이 있고 안 되는 날이 있는지 모르겠어.”
그야 내일 밤은 닷새째이고, 모레는 닷새의 하루이니까. 누구도 알 수 없는, 휴고가 저녁 일정을 정하는 기준이었다.
휴고는 돌아가는 길에 왕비 베스와 마주쳤다. 왕비 곁에는 데이빗이 함께 있었다. 베스는 방문한 남동생과 담소를 나누다가 그를 배웅하는 길이었다. 휴고는 가벼운 인사를 마치고 지나치려 했으나 베스가 말을 걸었다.
“오랜만입니다, 공. 폐하를 뵙고 돌아가는 길이십니까.”
“예, 오랜만입니다. 마마.”
“공작부인 이야기는 익히 많이 들었습니다. 대관식보다 공작부인의 소식이 더 화제랍니다.”
“하잘것없는 소문일 뿐입니다.”
“소문이 반드시 헛되지만은 않지요. 공작부인이 사교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군요. 부담 없는 오찬 자리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오늘 중으로 초대장을 보낼 터이니 부디 거절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왕의 초대는 거절할 수 있어도 왕비의 초대는 거절하기 어려웠다. 왕은 누이로서 보자는 말이었지만, 왕비는 공작부인으로서 얼굴 한 번 보여달라는 말이었다. 여자들의 사교계 일은 특별한 사정이 없고서는 휴고가 관여할 수 없었다. 거절하려면 아내가 해야 한다. 그러나 왕비의 초대를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안사람이 기꺼이 초대에 응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의례적인 인사 몇 마디로 마무리하고 잠깐의 만남은 끝났다. 타란 공작의 뒷모습을 보며 베스는 ‘여전히 무뚝뚝한 사내로군.’ 하고 생각했다. 태자비 시절에 귀족들은 남녀 가리지 않고 베스에게 접근했다. 어떻게 해서든 태자에게 한 발 걸치려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타란 공작은 단 한 번도 사적으로 말을 거는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남편이 공작과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했다. 대단히 당당하고 오만한 남자였다.
“전하께서는 혹여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으십니까? 장차 이 나라 주인이 되실 분은 전하십니다.”
베스는 어느 날 궁금해서 퀘이즈에게 물었다. 타란 공작의 거만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봤자 왕국 일부 영지의 영주라고 생각했다.
“아무 때나 세운다고 자존심이 아니라오. 만용이지. 먼 미래를 보며 지금 고개를 숙이는 일이 뭐가 대수라고. 타란 공에게 사감은 없소. 사내라면 타란 공처럼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사는 삶이 부럽지. 장인어른께도 잘 일러두시오. 건드려서 이로울 것 없다고.”
남편의 뜻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베스는 타란 공작을 남편의 든든한 우군으로 인정했다. 베스는 복잡한 정치 싸움은 잘 몰랐다.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다.
공녀로 태어나 부족할 것 없이 자라다가 태자비가 되었다. 외가는 권세 있는 공작가문이며, 부친 라미스 공작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이미 아들 셋을 낳아 후계 자리를 든든히 했고, 남편은 베스에게 지고지순하지는 않지만 그녀를 존중해 주었다. 후궁 몇 두는 일 정도는 왕실에 시집온 여자로서 감수했다.
왕실의 여자치고 베스는 평탄한 삶을 살았고, 이 정도면 성공했다. 알아서 제 몫 찾아 먹는 남편을 걱정할 일이 없고, 순조롭게 왕비의 관을 받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베스는 속이 꼬인 구석이 없었다. 모략으로 머리 굴릴 일도 없고, 걱정도 없었다. 그나마 유일한 걱정은 남동생 데이빗이었다.
“너는 어찌 타란 공에게 그리 무례하게 구느냐.”
베스는 데이빗을 나무랐다. 타란 공에게 묵례로 인사 후 한마디 말없이 서있는 데이빗 때문에 베스는 공작과 이야기를 나누며 낯이 화끈거렸다.
“저자는.”
“말조심하여라. 타란 공은 아버님과 같은 위치에 있는 분이다. 왜 이리 경솔한 것이야.”
누님의 꾸중을 들으며 데이빗의 표정에 심술이 찼다. 베스는 한숨을 쉬었다. 장차 공작가를 이어받을 소공자라고 너무 떠받들었다. 장남이라고 무조건 싸고돈 돌아가신 어머니의 잘못이 컸다. 베스는 남동생을 반면교사로 삼아 아들들에게 엄한 편이었다.
“저도 나름대로 잘 지내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타란 공이 무례합니다.”
“데이빗, 무례하다는 표현이 적절치 않구나. 타란 공은 얼마든지 네게 무례해도 된다.”
“누님!”
“긴말하고 싶지 않구나. 언행을 조심하라고 누누이 말했다. 넌 어린애가 아니지 않느냐. 나는 여기까지만 배웅할 터이니 조심히 돌아가거라.”
냉랭하게 몸을 돌려 멀어져가는 베스의 뒷모습을 보며 데이빗은 주먹을 꾹 쥐었다. 여기저기 다 입만 열면 타란 공, 타란 공. 이해할 수 없었다. 데이빗의 부친은 왕의 최측근이고 누님은 왕비였다. 조카는 언젠가 왕이 될 것이다. 마땅히 왕은 누구보다도 데이빗을 신뢰하고 가까이 두어야 했다. 하지만 퀘이즈는 데이빗에게 심드렁했고 타란 공작과 함께 있을 때는 찬밥 취급이었다.
‘그자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데이빗의 속이 비틀렸다.
* * *
모처럼 이른 귀가라서 휴고는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저녁도 같이 먹고 산책도 할 수 있겠지.’
로암에 있을 때는 꼬박꼬박 저녁을 함께 먹었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힘들었다. 뭔가 쓸데없이 분주했다. 집에 가면 해야 할 일이 쌓여있었다. 살짝 마음이 어두워졌다가 그래도 집에 가는 게 좋아서 금세 기분이 풀렸다. 모서리를 돌아 복도가 끝날 쯤에 마주친 사람만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터였다.
‘오늘은 어째 좀 성가시군.’
그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여자, 소피아를 보며 휴고는 생각했다. 가는 걸음을 두 번이나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지나가려는 휴고를 소피아가 불러 세웠다.
“전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개된 자리에서 대놓고 무시할 수 없어서 휴고는 어쩔 수 없이 멈추어 섰다.
“늦었지만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나 또한 축하하오. 백작부인이 되었다고 들었소.”
소피아가 결혼한 앨빈 백작은 거상이었다. 경제 분야에서 앨빈 백작은 중요도가 꽤 높은 인물이었다. 정치, 경제 등 영향력 있는 귀족의 정보는 꾸준히 듣는 편이라, 앨빈 백작이 로렌스 남작 영애와 결혼했다는 소식은 일찍이 들었다.
“…예. 축하… 감사합니다. 오늘은 왕비 마마를 뵈러 입궁한 참입니다.”
소피아가 무슨 용무로 입궁했든 휴고는 관심 없었다. 그의 마음은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소피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지나가는 이들이 눈을 떼지 못했다. 소피아의 미모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눈길을 끌었다. 실연의 아픔을 겪은 후 처연함이 더해져서 남자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결혼했어도 소피아는 여전히 무도회만 참석하면 수많은 남자의 연서를 받았다.
휴고의 눈에는 소피아의 아름다움이 들어오지 않았다. 눈으로는 소피아를 보고 있으나 머릿속은 아내 생각으로 가득했다. 오히려 여자와 말을 나누고 있으니까 그녀가 더 보고 싶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소피아의 애처로운 눈빛은 보이지도 않았다.
차가운 붉은 눈을 보며 소피아는 충격받았다. 항상 ‘혹시’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오랜만에 다시 보면 그도 조금쯤은 옛 추억에 흔들리지 않을까, 기대를 품었다. 소피아의 결혼을 축하한다고 말하는 그의 태도는 여지없이 깔끔했다. 그녀의 오랜 불면의 밤도, 결혼 후에도 놓지 못했던 미련도 오직 그녀에게만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럼 이만.”
주저 없이 지나쳐 가는 그를 보자 소피아는 다급했다. 이걸로 정말 끝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의 마음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알면서도 손은 저절로 그를 붙들었다. 그가 멈추어서 소매를 붙든 소피아의 손을 보다가 얼굴을 보며 노골적으로 성가신 감정을 드러냈다. 소피아는 화들짝 놀라 손을 놓았다.
“행복…하십니까?”
그가 대답 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질문이 그렇게 불쾌했나, 소피아는 생각하다가 볼을 타고 흐르는 뭔가를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그는 저만큼 멀어져가고 있었다. 울고 있는 여자에게 위로 한마디 건네지 않고 가버리는 그는 변함없이 잔인했다.
‘왜 저는 안 되었던 건가요?’
그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소피아는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을 맛보았다. 그에게 달려가 묻고 싶었다. 그가 즉시 영지로 내려가지 않았다면 정말 그랬을 것이다.
실의에 빠진 소피아는 앨빈 백작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포기하는 심정이었다. 다 잊고 싶었다. 도피로 택한 결혼이 행복할 리 없었다. 부자인 남편 덕에 누릴 수 있게 된 풍족함 속에서 소피아는 항상 마음이 헛헛했다. 질긴 미련을 도무지 놓을 수 없었다.
* * *
가 완성된 드레스 일부의 중간 점검을 위해 방문한 앙뜨가 루시아의 입궁 소식을 듣고 흥분했다.
“첫 입궁이시군요! 제가 도와드려야지요.”
“그런 수고까지 할 필요 없네.”
타란 공작이 재방문해서 이중계약서를 제안했다. 엄청난 수익을 보장받은 앙뜨는 의욕이 넘쳤다. 황금은 앙뜨의 예술혼을 불태우는 기폭제였다. 이미 예약한 고객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앙뜨는 요즘 찾아오는 고객은 모두 돌려보냈다. 앙뜨는 타란 공작부인의 전속 디자이너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첫 입궁은 일생일대 단 한 번뿐인 이벤트이지요! 마땅히 특별해야 합니다!”
뭘 하든 처음은 당연히 단 한 번뿐이다. 더구나 굳이 따지면 첫 입궁은 아니었다. 루시아는 공주로서 결혼 전까지 궁에서 살았다. 그러나 루시아는 앙뜨의 열정 가득한 궤변에 밀리고 말았다. 입궁일 아침 일찍 앙뜨가 전쟁터를 향하는 병사처럼 중무장해서 방문했다.
“왕비 마마를 뵙는 첫 자리이니 점잖고 우아한 스타일이 좋겠습니다. 공작부인은 어려 보이시니까 그 점을 보완해야겠어요. 기품 있지만 결혼한 귀부인답지 않은 상큼함을 표현하는 거지요.”
앙뜨는 빛을 받으면 미세하게 반짝이는 비즈로 장식한 연한 보랏빛 드레스를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허리에 밴드를 묶은 효과를 주어 가느다란 허리를 강조하고 허리 아래에 풍성하게 퍼져서 상대적으로 몸매의 아름다운 곡선을 드러냈다. 상체는 몸에 달라붙는 형태로 어깨에서 팔 아래까지는 안이 들여다보이는 레이스로 소매를 만들었다. 가슴골이 드러나는 요즘 유행과 전혀 다르게 오히려 목선은 목 바로 아래까지였지만 전혀 답답하거나 고리타분하게 보이지 않았다.
머리는 틀어 올려서 가늘고 긴 목선을 보였다. 붉은 기운 도는 갈색 머리카락을 작은 하얀 다이아몬드가 박힌 핀으로 고정했다. 마무리는 마술 같은 앙뜨의 화장술이었다. 앙뜨가 귀부인들 사이에 인기가 높은 이유는 드레스 제작 솜씨 못지않게 뛰어난 화장술 덕분이었다.
보랏빛 펄을 눈에 바르고 눈꼬리가 살짝 올라갈 정도로 아이라인을 그렸다. 하얀 피부를 강조하면서 상큼함을 보여주기 위해 홍조를 드러내듯 볼터치를 했다. 거울 속 루시아는 앙뜨가 말한 대로 우아함과 발랄함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신기해. 왜 내가 하면 이렇게 안 될까.’
루시아는 자신을 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꿈속에서 화려한 미인들 틈에 묻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루시아는 생각했다.
‘괜찮은걸. 조금은… 예쁜 것 같아.’
화장이나 꾸민 스타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루시아의 표정이 달랐다. 꿈속에서 루시아는 소극적이며 주눅이 들어있고, 무도회를 즐기기보다는 지쳐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루시아는 밝고 자신감이 있었다. 싱그러운 기운은 그녀를 돋보이게 했다.
입궁하는 마차를 기사 딘이 호위했다. 마차는 내궁 입구에서 멈추었다. 검을 든 외부인은 내궁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내궁 앞에는 루시아를 마중 나온 왕실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루시아가 타고 온 마차는 이곳에서 주인마님이 나오기를 기다려 대기할 것이다. 루시아는 마차를 갈아타고 내궁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공작부인.”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마.”
환대로 맞이하는 베스를 보며 루시아는 기분이 묘했다. 꿈속에서 루시아는 베스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지 못했다. 무리에 섞여서 함께 인사했으나 아마 루시아를 기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왕비의 곁에 붙어 있으려면 비슷한 수준이거나, 노골적으로 찰싹 달라붙을 수 있는 뻔뻔함을 갖추어야 했다. 둘 다 해당 사항이 없었던 루시아는 근처를 뱅뱅 돌기만 했었다.
‘어머…….’
베스는 공작부인을 둘러싼 소문을 거의 믿지 않았다. 선왕의 공주를 여럿 보았지만, 왕실의 핏줄이 절세미인일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그나마 캐서린 공주가 미인 축에 들었지만, 그녀의 모친은 원래 대단한 미인이었다. 선왕의 후궁이었던 돌아가신 시어머니는 젊어서 왕국 최고의 미녀로 유명했고, 선왕의 총애를 가장 오래 받았다. 시어머니의 미모에 비하면 캐서린은 한참 부족했다.
그밖에 다른 공주들 중에 미인은 별로 없었다. 선왕의 후궁들이 못난 외모는 아닌데도 공주들이 대개 친탁을 했다. 그래서 공작부인이 대단한 미인이라는 소문을 웃어넘겼다. 그런데 실제로 보는 공작부인은 베스가 봤던 공주들과 상당히 달랐다.
지금껏 봤던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눈이 가는 고혹적이면서 풋풋한 매력이 있었다. 전혀 어울릴 수 없을 두 모습이 어색함 없이 조화로웠다. 가녀린 체구 때문인지 여자치고 그렇게 작은 키가 아닌데도 사내 품에 쏙 들어가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소문대로 세기의 미녀는 아니지만, 대놓고 그 소문은 완전 엉터리라고 웃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그들은 잠시 소파에 마주 앉아 짧은 대화로 서로를 파악했다.
“이렇게 와주어서 기쁩니다. 공작부인을 꼭 만나고 싶었어요.”
“저도 마마를 뵈어 영광입니다.”
베스가 분명 소문을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루시아는 살짝 얼굴이 달아올랐다.
“공작부인은 정말 차분하군요. 내가 공작부인의 나이 무렵에는 말 한마디 할 줄 몰라 덜덜 떨었답니다.”
베스는 공작부인이 이제 열아홉 살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자신은 그때 공녀의 지위를 누리며 파티를 쫓아다니느라 정신없었다. 결혼하고 태자비라는 지위에 어울리고자 행동을 조심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철이 들었지만, 처녀 때 베스는 놀기 좋아하는 보통 아가씨였다.
“과찬이십니다.”
“말수도 적고. 부군을 닮았군요. 타란 공도 말수가 적으시지요.”
“송구합니다. 제가 말솜씨가 좋지 않습니다.”
“나무라는 것이 아니랍니다. 워낙 주변에 말 많은 사람이 많다 보니 참 편안하군요.”
오찬 자리를 마련해서 루시아를 초대했다기보다는 루시아를 초대하기 위해 오찬을 준비했다. 손님은 루시아뿐이었다. 분위기는 좋았다. 요리는 훌륭했고 대화는 적당히 가벼웠다.
“근래 도는 소문으로는 타란 공이 부인을 위해 어마어마한 보석을 사들였다지요.”
세피아 보석상은 자기들 상품을 자랑하기 위해 타란 공작이 만족하며 대량으로 구매했다고 홍보했다. 광고 효과가 뛰어나서 세피아 보석상의 매출 급증으로 이어졌으며 관계자의 입이 귀에 걸렸다는 풍문이 돌았다.
“소문은 원래 과장되기 마련입니다, 마마.”
루시아가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그래도 아무 근거가 없는 소문은 돌지 않지요. 언제 저택에 초대해 주지 않겠어요? 소문의 보석들을 구경하고 싶네요.”
“황공하옵니다.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마마.”
‘참 맑은 사람이구나.’
베스의 주변은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하며 꿀단지에 침을 흘리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공작부인의 순수한 분위기가 깊이 마음에 와 닿았다.
‘무서운 타란 공 곁에 저런 부인이라. 공작부인은 과연 타란 공과 제대로 이야기는 나눌까? 타란 공 앞에서 겁먹어 덜덜 떠는 건 아니겠지?’
좀 더 은밀한 사생활까지 궁금했다.
‘제대로 부부관계는 할까?’
화려한 전적이 있는 공작이 순진한 아내에게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
“시간이 나면 종종 이렇게 만나러 와주지 않겠어요? 궁에 갇혀 사는 삶이란 가끔은 외롭답니다.”
“초대해 주시면 언제든 뵈러 오겠습니다, 마마.”
‘참 다르네…….’
베스는 또 다른 시누이, 캐서린을 떠올렸다. 캐서린은 굉장히 짙은 향을 풍기는 붉은 장미 같은 여자였다. 캐서린이 드레스와 보석을 사기 위해 써대는 왕실 예산 때문에 퀘이즈가 골치 아파하는 것을 몇 번 보았다.
“즉위하면 그 녀석 소비는 딱 잘라 버려야지. 이거 원, 끝이 없으니. 얼른 시집보내야 할 텐데.”
베스는 남편의 다짐에 회의적이었다. 퀘이즈는 하나뿐인 동복누이를 매우 귀애했다. 캐서린은 아마 선왕의 수많은 여식 중에 제대로 대접받으며 부족함 모르고 자란 유일한 공주일 것이다. 그래서 자존심 강하고 지기 싫어하며 제멋대로였다. 악의는 없는데 하고 싶은 말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상대방 마음을 고려하지 않고 말을 툭툭해서 베스는 캐서린이 던진 말 때문에 은근히 기분이 상한 적이 꽤 있었다. 그래도 나이가 들면서는 조금 나아졌다. 어릴 때는 정말 누구도 손을 못 대는 천둥벌거숭이였다.
캐서린에 비하면 공작부인은 순하고 겸손했다. 말을 할 때마다 신중히 고르는 모습이 보였다.
“누이로 볼 생각 말라고 타란 공이 딱 잘라 말하더군.”
공작부인을 초대해 식사한다고 하니까 퀘이즈가 전한 말이었다. 공작부인이건, 시누이건, 아무래도 좋았다.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베스는 친한 사람만 가끔 불러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는 일을 좋아했다. 근래 자주 부르는 사람은 앨빈 백작부인이었다.
‘둘이 잘 사귀어도 좋을 것 같은데…….’
생각했다가 아차 싶었다. 베스는 타란 공작의 과거 여자관계를 모두 알지 못하지만, 앨빈 백작부인이 과거에 공작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소피아가 워낙 눈에 띄는 미녀라 관심 있는 사람이 많아서 귀부인들과 대화하다가 소문을 들었다.
‘두 사람은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게 하는 편이 좋겠군.’
공작부인이 공작의 옛 여자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차는 장미궁으로 가서 마시는 건 어떨까요?”
베스가 제안했다.
“요즘 장미궁에 꽃이 만발하답니다. 공작부인이 잠시 그곳에 머문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장미궁의 아름다움을 잘 알겠지요.”
“제가 잠시 머물 때는 꽃이 피지 않아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마마 덕분에 구경할 기회를 얻었군요.”
“어머, 그랬나요. 잘 되었네요.”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과 장소는 장미궁이었다.
* * *
언제나 마찬가지로 타란 공작과 왕의 점심 식사가 끝나고, 가벼운 주제로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시종장이 들어왔다.
“폐하, 타란 공작께서 알아보기를 청한 일이 있어 고하려 하옵니다.”
퀘이즈는 식사 시작 전에 휴고가 시종장을 불러 무슨 말을 하는 모습을 얼핏 본 기억이 났다.
“말해 보아라.”
“예, 타란 공작부인께서는 왕비 마마와 점심을 드시고 장미궁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하옵니다.”
“아. 오늘 공작부인이 입궁한다는 소리는 왕비에게 들었지. 입궁한 건지 확인하려 그랬나? 별나기는. 어련히 잘 왔을까.”
휴고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어디를?”
“안사람이 들어왔다니 같은 공간에 있는 김에 보고 오려 합니다.”
궁이라는 거대한 공간이 언제부터 같은 공간이라는 좁은 단어로 묶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퀘이즈는 찻잔을 든 채 생각에 잠겼다.
“설명이 필요하군. 다급히 공작부인에게 전할 말이라도 있나? 그거라면 시종을 시켜도 될 텐데.”
“꼭 전할 말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있다 해도 시종을 왜 시킵니까. 대화는 얼굴 마주 보고 하는 겁니다.”
“…….”
분명 타란 공작은 모국어로 말하고 있는데 퀘이즈에게는 외국어처럼 들렸다. 말하는 겉뜻은 알아듣지만,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게 대화의 정의를 가르쳐주는 건가?’라고 퀘이즈는 생각했다.
휴고는 더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오후에는 회의가 있다. 얼굴 잠깐 보고 올 시간밖에 없었다.
“회의에는 늦지 않게 오겠습니다.”
휙 나가버리는 휴고를 잡을 수 없었다. 퀘이즈는 한참 고민하다가 부관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단순히 이 상황을 해석하면?”
“…타란 공작이 공작부인을 보고 싶어 만나러 간 것 같습니다만.”
“나도 그런 것 같으니까 하는 말이야.”
상황은 알겠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집에 가면 매일 보는 얼굴이 왜 보고 싶은데? 한창 불붙은 연인들이나 하는 짓을 결혼한 지 1년이 훌쩍 넘은, 더구나 타란 공작이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뭔가 심오한 깊은 뜻이 있는지도 모른다. 퀘이즈는 깊은 사색에 빠졌다.
* * *
데이빗은 누님을 만나러 입궁했다가 누님이 손님을 맞아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말을 들었다. 앉아 기다리기 지루해서 누님을 찾아 나섰다. 장미궁으로 가셨다는 말을 듣고 천천히 그리로 향했다.
얼마 전 누님께 야단을 듣고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데이빗은 누님과 소원해지고 싶지 않았다. 만나면 자꾸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해도 베스는 데이빗이 어쩌지 못할 위치에 있는 몇 사람 중 하나였다. 왕비이며 장차 왕의 모후가 되실 누님과 사이가 나쁘면 저만 손해였다.
‘누님은 여전히 날 어린애처럼 보시지만 두고 보라지. 언제고 날 달리 보실 테니까.’
왕이 중요한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자신은 그런 부류 중 으뜸이었다. 대관식 후부터 왕은 본격적으로 여러 가지 일을 벌일 것이다. 중요한 임무를 맡을 선봉장은 반드시 자신이 될 거라고 자신했다. 그때를 위해 데이빗은 부지런히 젊은 인재들을 모으고 있었다. 자신의 노력이 빛을 발할 날이 올 거라고 굳건히 믿었다.
장미궁에 가까워질수록 진한 향이 밀려왔다. 왕이 가장 총애하는 여인에게 내린다는 장미궁은 선왕의 살아생전에는 내내 비어있었다.
‘대관식이 끝나면 마땅히 장미궁은 누님의 것이 되어야 해.’
계속 비어있었던 장미궁에 아주 잠시 공주 하나가 머문 적이 있다고 들었다.
‘그 공주가 타란 공작과 결혼했다지.’
타란 공작 위세가 참 대단했다. 보나 마나 그 공주가 장미궁에서 지내고 싶다고 졸랐을 것이다.
‘공주는 무슨. 왕족이니까 공주라 해주지 귀족이었으면 그냥 사생아잖아.’
데이빗은 타란 공작과 관련된 모든 것을 폄하하고 싶었다.
잠시 딴생각으로 길을 잘못 들어 입구가 아닌 정원으로 들어섰다. 데이빗은 돌아가야 한다는 성가심에 투덜거렸다.
갑자기 바람이 훅 밀려왔다. 여름 바람치고 제법 강해서 바닥 가득 쌓여있던 꽃잎이 회오리가 되어 데이빗을 향해 달려들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찌푸려 바람을 피하고 제대로 시야가 트였을 때, 데이빗은 발치로 날아와 나뒹구는 모자를 발견했다. 레이스로 풍성하게 장식한 모자는 확실히 귀부인의 것이었다. 모자를 집어 들고 일어나 고개를 든 데이빗은 그대로 굳었다.
날아간 모자 때문에 당황하는 여인이 데이빗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호수 표면처럼 여인이 입은 드레스가 빛을 냈다. 햇살이 통과할 것 같은 하얀 피부는 금방 사라질 것처럼 투명했다. 주변 가득 흐드러지게 핀 새빨간 장미꽃잎처럼 유난히 붉은 입술이 선명했다.
데이빗은 환상적인 장미 정원의 분위기와 달콤한 꽃향기와 부드러운 바람과 햇빛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와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여인에게 그야말로 한눈에 반했다.
데이빗은 모자를 들고 여인에게 다가갔다. 사춘기 소년이 첫사랑을 느낀 것처럼 가슴이 마구 뛰었다. 한참 결혼 말이 오가는 약혼녀의 얼굴 따위는 이미 저편으로 날아갔다. 여인의 곁에는 시녀가 있었지만, 안중에 없었다. 여인으로부터 한 걸음의 거리까지 다가가 정중하게 모자를 내밀었다.
“아름다운 귀인의 마음을 담은 모자가 제 발치로 날아왔기에 돌려 드립니다. 부디 담긴 마음을 제가 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