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38화 (39/77)

38장 수도 사교계 (1)

앙뜨가 조수 둘과 수 명의 일꾼을 데리고 공작저를 방문했다. 앙뜨는 잔뜩 들고 온 견본 드레스와 모자, 신발 등을 응접실에 보기 좋게 진열하라고 일꾼들에게 지시했다. 항상 하는 작업이라서 손발이 척척 맞는 사람들은 순식간에 응접실을 의상실 분위기로 바꾸어 놓았다.

디자이너가 왔다는 말을 듣고 2층에서 내려온 루시아는 낯선 공간으로 변신한 응접실에 들어서다 멈칫했다. 마침 작업을 마친 일꾼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앙뜨가 조수 둘을 뒤에 세워놓은 채 깊이 허리를 숙였다.

“공작부인께 인사 올립니다. 작은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는 앙뜨입니다.”

루시아는 앙뜨의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만남은 처음이지만 꿈속에서 워낙 유명했다. 앙뜨는 귀부인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일류 디자이너 중 하나였다. 그러나 백작부인 루시아는 유명 디자이너로부터 드레스를 구매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메튼 백작은 저는 물 쓰듯 돈을 쓰고 다니면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그게 가족이라 할지라도 지독하게 인색했다. 루시아는 몇 벌의 드레스를 유행 따라 수없이 고치며 돌려 입어야 했다.

‘비쌀 텐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거였다. 하지만 사교계에 나갔을 때 여자들은 공작부인이 입은 드레스가 누구의 작품이냐고 화제를 삼아 수군거릴 것이다. 스스로 유행을 창조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었다. 능력이 없다면 유명한 디자이너 도움을 받는 길이 가장 무난했다.

“반갑네. 오늘 날 도와주러 왔다고 들었네.”

“귀인을 뵈어 영광입니다.”

앙뜨는 노골적으로 살피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시선을 돌리면서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재빠르게 공작부인의 전체적인 모습과 분위기를 파악했다. 셀 수 없이 많은 고객을 상대한 경험 덕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오늘 공작저를 방문하기 전까지 앙뜨는 설렘과 긴장으로 두근거렸다. 디자이너로 제법 이름 날린 이후, 고객을 만나기 전부터 이렇게 긴장한 건 처음이었다. 수습 시절 처음으로 가봉했을 때의 짜릿함을 다시 느꼈다.

앙뜨는 세피아 보석상으로부터 공작이 진열 상품을 싹 쓸어갔다는 말을 들었다. 곧 들어올 황금이 눈에 아른거리고 그녀의 오감을 자극하는 로맨티시스트 공작의 등장에 가슴이 뛰어서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사교계의 유명 인사들이 드나드는 앙뜨의 의상실은 온갖 소문이 모여드는 중심지였다. 귀부인의 수다를 엿듣기만 해도 주워듣는 정보가 무궁무진했다. 근래에는 타란 공작부인에 관한 소문이 가장 활발하고 흥미로웠다.

아무리 솔깃한 소문이라도 대부분 거짓과 추측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앙뜨는 의상실의 어린 디자이너들과 다르게 소문에 혹하지 않았다. 그녀는 수많은 화제의 인물이 반짝 등장했다가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공작부인에 관한 소문은 메마른 길에 풀썩거리는 먼지와 같았다. 제대로 공작부인을 본 사람이 없어서 소문이 소문을 낳고 있었다. 공작부인이 정작 등장하면 비 온 다음날 아침처럼 싹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했다.

앙뜨의 생각은 타란 공작이 앙뜨에게 메모지를 쥐여줄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세피아 보석상의 매진 사태에 이르러서는 위태롭게 무너질 기미를 보였다. 그리고 오늘 소문의 공작부인을 보자마자 그녀의 가슴속에서 뭔가 빵 터졌다.

‘어머나 세상에.’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화려하고 육감적이며 도도한 귀부인들이 넘쳐나는 사교계에서 본 적 없는 타입이었다.

뭇사람과 비교해서 앙뜨가 바라보는 세상은 많이 달랐다. 흔히 미인이라 말하는 인형 같은 미모는 너무 진부해서 재미가 없었다. 앙뜨가 정의하는 미녀는 자신의 창작욕을 자극해야 했다. 공작부인은 새로운 소재의 등장이었다. 매력적이고 신선했다.

소파에 마주앉아 하녀가 내온 차를 마시면서 앙뜨의 눈은 쉬지 않고 공작부인을 탐색했다.

“그동안 제작한 드레스를 모은 디자인 북입니다. 마음에 차는 작품이 있는지 훑어 보시지요.”

앙뜨는 제가 만든 드레스를 작품이라고 칭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꽤 두꺼운 책을 무릎에 올려 한 장씩 넘기며 화려한 드레스를 구경하는 루시아의 표정은 차분했다. 표정 그대로 루시아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드레스는 꿈속에서 질리도록 보았다. 그녀는 패션을 잘 알지 못했다. 그냥 덜 화려함과 더 화려함을 구분할 뿐이었다. 무도회에서 입는 드레스는 실용성보다 보이기 위한 용도라 몇 시간씩 입고 있으면 많이 불편했다. 루시아에게 화려한 드레스는 입어서 불편한 옷이라는 느낌밖에 없었다.

‘만만치 않겠는데.’

앙뜨는 타란 공작이 ‘내 아내는 검소하다.’라고 말한 뜻을 이제 이해했다. 대개 귀부인들은 디자인 북을 받아 보면 황홀한 표정으로 열망을 드러냈다. 공작부인의 감정은 너무 잔잔했다. 현재 입고 있는 드레스도 대단히 수수했다. 기본 재질만 고급스러울 뿐 멋을 낸 흔적이 없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으신지요? 부족한 물건들을 선뵈어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니네. 모두 훌륭하고 멋지군. 그저 나는 잘 알지 못해서……. 그대가 전문가이니 적당히 알아서 만들어주게.”

적당히 알아서. 이보다 최악의 고객은 없었다. 앙뜨는 위기의식을 느끼는 동시에 도전의식에 불타올랐다. 공작이 적어준 메모지의 금액이 아른거렸다. 손 뻗으면 잡을 수 있는 황금을 놓칠 수 없었다.

“공작부인의 치수를 확인해도 될는지요?”

앙뜨는 루시아를 전신 거울 앞에 세워놓고 그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그동안 조수들이 공작부인 곁에 달라붙어 줄자로 치수를 재었다. 앙뜨는 조금 멀리 떨어져서 공작부인을 전체적으로 한눈에 담았다. 대강의 치수가 이미 앙뜨의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려 옷을 만들었다.

‘내 드레스가 안 어울려.’

앙뜨는 빠르게 파악했다. 앙뜨의 드레스는 화려했고, 가슴을 돋보이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몸매를 육감적으로 드러내는 형태가 요즘 유행이었다. 그러나 앙뜨가 보기에 그런 디자인을 공작부인이 입었다가는 어울리기는커녕 천박해 보일 위험이 있었다.

‘공작부인은 하얀 종이야. 색을 입히면 달라지는 매력이 있어.’

가냘픈 몸매이니 육감적 매력보다는 가느다란 허리를 강조해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편이 좋겠다. 하얗고 티 없이 맑은 피부는 살짝 색조 화장으로 포인트를 잡아주면 청초하면서 매혹적인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앙뜨의 머릿속에 새로운 그림이 그려졌다. 왕성한 창작욕이 일어났다.

앙뜨는 조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작은 손짓과 눈짓으로 알아듣는 조수들이 손발처럼 움직여 앙뜨가 원하는 것들을 가져왔다. 앙뜨는 현재 공작부인이 입고 있는 수수한 드레스에 레이스 천을 이용해 강조 부분을 넣고, 드레스 형태를 약간 수정하면서 핀을 꽂았다. 마무리로 간단하게 분위기만 바꾸는 부분 화장을 했다. 모든 과정은 아주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루시아를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어떠신지요.”

앙뜨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거울 속으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루시아의 눈이 커졌다. 마치 마법 같았다. 대충 만지고 건드렸을 뿐인데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졌다. 늘 입었던 드레스가 완전히 새로운 옷이 되었고, 거울 속의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아름다웠다. 한마디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뭔가 달랐다.

“공작부인께서는 정말 매력적인 분이십니다. 이 매력을 왜 감추고 계셨는지 모르겠군요.”

루시아는 손으로 제 얼굴을 만지며 감탄 어린 표정으로 거울 속의 모습을 확인했다.

‘좋았어.’

앙뜨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이에나처럼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앙뜨의 사냥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의 귀가가 늦었다. 귀가하는 그를 맞이하는 루시아의 안색이 어두웠다. 시선이 바닥으로 향하고 있고 암울한 기운이 맴돌았다. 휴고는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의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면서 고용인의 시선을 의식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턱을 단단히 잡았다. 자꾸 그의 눈을 피하려는 그녀의 태도가 몹시 거슬렸다.

“왜 그러지.”

“…….”

“제롬!”

날카로운 공작의 부름에 즉시 제롬이 반응했다. 날이 갈수록 새로운 유능함을 개발하고 있는 집사 제롬은 주인 내외분께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연출하기 시작할 때 냉큼 고용인들을 눈짓으로 다 멀리 치워버렸다.

“의상실 디자이너가 다녀간 후로 줄곧 언짢으십니다.”

마님의 기분 상태를 파악하는 일은 이제 제롬에게 어떤 일보다 중요한 우선순위 과제가 되었다.

“당신에게 무례하게 굴었나?”

루시아가 고개를 붕붕 돌렸다.

“그럼 왜. 말해 봐. 뭐 때문에 그렇게 언짢아?”

“…사고를 친 것 같아요.”

“무슨 사고?”

“지… 지금이라도 환불하면 안 될까요? 아직은 될지도 몰라요.”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을 당장에라도 찾아내 멱을 물어뜯을 것 같던 휴고의 기세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휴고는 맡겨달라며 비장하게 말하던 디자이너를 떠올렸다. 자신하던 만큼 제법 능력이 있었다. 그가 그녀를 잡은 손을 놓고 지나쳐가자 이제는 루시아가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얘기하다 말고 어디 가세요. 사고 쳤다니까요! 드레스를 무려 열아홉 벌이나 맞췄단 말이에요!!”

그 드레스에 따른 구두, 모자 등은 당연히 따라왔다. 드레스 못지않은 가격표를 붙인 덤이었다.

190벌도 아니고 열아홉 벌? 깔끔하게 스무 벌도 아닌 애매한 열아홉이란 숫자는 뭔가. 휴고는 앙뜨의 능력치를 하향 조정했다. 앙뜨가 들었다면 몹시 억울해할 것이다. 열아홉 벌을 팔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할, 공작가의 명예까지 들먹였다.

“온종일 땀을 흘렸어. 먼저 씻고 싶군. 이야기는 그 후에 해.”

“당신이 금액을 들으시면 이렇게 태연할 수 없을걸요!”

“내가 놀라지 않으면 뭘 줄 거지?”

“…주다뇨?”

“내기에는 보상이 있어야지.”

“언제 내기한다고 했어요!”

“뭘 줄지 생각해 놔. 내가 목욕하고 나올 때까지.”

사람 말을 좀 들으라고요! 루시아는 항의를 담아 그를 불렀지만 그는 훌쩍 계단 위로 올라가 버렸다. 아, 진짜. 이유 모를 분한 마음에 동동 발을 구르던 루시아는 큼큼, 낮은 헛기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루시아는 당황했다. 앙뜨가 두고 간 계산서가 계속 머릿속에 동동 떠다녀서 고용인의 앞에서 지켜야 할 체면이고 뭐고 다 잊고 말았다. 다행히 고용인들은 언제 흩어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안도하며 제롬을 보자 어쩐지 눈이 웃는 것 같았다.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할까요?”

“…왜요?”

“아직 목욕하지 않으셨고, 이미 주인님께서는 하러 가셨으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확 얼굴을 붉힌 루시아가 시선을 내렸다. 왠지 부끄러웠다. 제롬같이 점잖은 집사가 딱히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닐 것이다. 알지만 뭔가 타이밍이 묘해서. 루시아는 우물쭈물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목욕은 어차피 하려고 했다. 더운 날씨 때문에 몸이 끈적이기도 하고. 그런데 이상하게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루시아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부탁해요.”

“예, 마님.”

제롬은 빙긋 웃었다. 그는 과연 훌륭한 집사였다. 주인의 마음도 읽어낼 수 있는.

* * *

‘내가 아까는 정말 잠시 정신이 나갔었던 거야.’

루시아는 그녀의 돈을 노리는 장사치가 달라붙어 온힘을 다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루시아가 의상실을 방문했다면 긴장을 늦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집이라는 안도감에 기대서 지나치게 안심했다. 객이 주인에게 뭘 어쩌랴. 루시아는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다.

루시아는 로암에서 만난 귀부인들의 아부에 익숙했다. 그래서 누군가의 듣기 좋은 말에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물건을 팔기 위한 장사꾼의 격이 다른 아부를 우습게 본 대가를 치러야 했다. 까다로운 귀부인들의 비위를 맞추는 앙뜨의 화술은 사람의 혼을 쏙 빼놓았다.

앙뜨는 그저 말솜씨만 좋은 장사치가 아니었다. 지닌 기술도 훌륭한 일류였다. 루시아가 입고 있는 단순한 형태의 드레스를 이리저리 손보며 여러 가지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루시아는 체면도 잊고 손뼉을 칠 뻔했다. 앙뜨는 먼저 실력을 보여 루시아의 마음을 현혹했다.

앙뜨가 현란하게 설명하는 패션에 관한 용어나 유행 등은 거의 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얼추 이해가 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앙뜨의 말만 들으면 루시아는 사람들의 눈을 모으는 환상적인 미녀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터무니없는데 들을 때는 굉장히 그럴듯했다.

앙뜨는 루시아가 알고 있는 소문―공작부인이 절세미녀라는―에 관해 말하면서 공작가의 체면을 거론했다. 타란 공작께서 직접 의상실을 방문하실 정도로 대단히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큰소리쳤다.

“공작부인께서는 그저 마음 편하게 사교계에 등장하실 날만 꼽으며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시면 됩니다. 타란 공작께서 세기의 미녀를 아내로 얻으셨다는 소문을 제가 사실로 만들어 드리지요.”

루시아는 은근히 소문을 신경 쓰고 있었다. 남의 시선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녀가 아닌 그를 두고 입방아 찧을 일이 마음에 걸렸다.

“공작부인께서는 아름다우십니다. 다만 보석의 원석처럼 드러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랍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 깊이 숨어있지만, 제대로 된 가공을 하지 않으면 원석은 돌멩이로 전락할 수 있지요. 제가 공작부인을 보석으로 가공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요.”

루시아는 홀린 것처럼 앙뜨가 내민 계약서에 서명했다. 앙뜨가 반드시 사야 한다고 말하는 물건들은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것들이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앙뜨가 돌아가고 나서도 루시아는 휩쓸린 기분에 얼마간 멍했다. 반쯤 나간 정신이 휙 돌아온 때는 오후에 배달된 계약서 사본과 계산서를 확인한 이후였다. 금액을 확인하며 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디자이너의 속살거림에 넘어간 대가가 그처럼 엄청날 줄은 몰랐다. 난생처음 구매한 일류 디자이너의 드레스 가격은 막연히 상상했던 수준이 아니었다.

하녀가 적당히 미지근한 물을 어깨 위에서 쏟았다. 목욕 시중을 드는 하녀의 손길에 영혼 없이 몸을 맡기고 루시아는 계속 드레스 생각에 빠져들었다.

‘도대체 모자랑 구두는 왜 그렇게 비싼 건데. 하물며 장갑까지.’

루시아의 상식으로 모자와 구두는 액세서리였다. 그나마 드레스는 남의 눈이 있어서 구색을 갖추지만 잘 보이지 않는 구두는 흉하지 않은 정도면 된다고 생각했다. 장갑 같은 건 꿈속에서 돈 주고 사본 적도 없다. 드레스를 구매하고 덤으로 받았다.

‘거기다 전부 여름 드레스잖아.’

조금만 날이 서늘해지면 입을 수 없었다.

‘환불해야 해. 그런 거금을 드레스 비용으로 날릴 수는 없어. 어차피 물건을 받은 것도 아니고 맞춤인데.’

원래 루시아는 당장 환불하려고 했으나 제롬이 만류했다. 주인님과 의논해 처리하시라고 조언했다. 물건을 구매했다가 환불하는 일은 체면상 중요한 문제였다. 특히 사치품의 경우는 안 좋은 소문이 날 우려가 있었다.

루시아가 끊임없이 환불을 고민하는 동안에 휴고는 그의 침실에서 목욕을 마치고 그녀의 침실로 들어왔다. 욕실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그는 테이블에 놓인 하얀 봉투를 집어 들었다.

계약서와 계산서. 그는 소파에 앉아 명세를 읽었다. 금액을 확인한 그가 픽 웃었다. 마음껏 써보라고 적어준 금액의 약 1/5 정도였다.

이만큼 쓰게 한 디자이너의 능력을 인정해야 할까, 사기꾼 같은 장사치의 말에 홀랑 넘어가지 않고 방어해 낸 그녀의 방어력에 찬사를 보내야 하는 걸까.

디자이너는 정말 휴고가 써준 금액을 다 쓸 작정이었을 것이다. 돈을 벌 기회를 날리는 건 바람직한 장사꾼의 자세가 아니다. 그런데도 물러섰다. 당시의 현장을 보지 못해 알 수는 없지만 아마 과하게 밀어붙였다가는 한 벌도 팔지 못한다는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휴고의 짐작은 거의 들어맞았다. 앙뜨는 전진을 위해 한 발 물러섰다. 한 번으로 끝날 장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는 안주인의 사치로 말아먹는 귀족 가문을 심심치 않게 보았다. 정작 자신이 오히려 그와 정반대의 이유로 신경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는 타인에게는 절대 인색하지 않았다. 로암에서 정원을 조성할 때 일꾼들에게 평균이 넘는 후한 보수를 지급했다. 그런데 그녀 자신에게만 적용하는 근검절약 정신에 아주 질려버렸다.

영지에서 머물 때는 상관없었다. 그녀의 화장기 없는 뽀얀 피부를 만지는 느낌이 좋고, 진한 향수 냄새 없는 그녀의 상큼한 살 내음이 좋았다. 화려한 옷차림 따위는 더더욱 필요 없었다. 옷은 벗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겨울이 싫었다. 치맛자락이 너무 두껍고 무거웠다. 그런데 그는 원래 끈적이는 여름을 질색했다. 한겨울에 찬바람을 맞으며 말을 타고 달리는 걸 즐겨 하곤 했다. 분명히 재작년 겨울까지만 해도 그랬다.

휴고는 상관없는 문제라 해도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공작부인으로 사교계에 나서야 했다. 겉모습은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쉬운 기준이었다. 그녀가 공작부인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 검소함을 보이면 덕을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뒷말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는 그녀가 그런 너절한 화제의 대상으로 오르내릴 일이 싫었다.

‘디자이너를 한 번 만나야겠군.’

휴고는 디자이너의 능력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만나 계약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이중 계약서를 만들라고 해야겠어.’

진짜 금액을 적은 계약서는 그에게 보내고, 그녀에게는 대폭 줄어든 금액을 적은 가짜 계약서를 보내게 하면 된다. 그는 돈 문제 따위로 그녀가 고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 머릿속에는 그에 대한 문제만 가득 들어있어도 부족했다.

* * *

“에구머니.”

목욕 시중을 들던 하녀가 느닷없이 발랑 자빠져 주저앉았다. 미끄러졌나 싶어서 흘끗 보는데 하녀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루시아는 뭔가 예감이 이상해서 고개를 들었다. 목욕 가운을 걸친 그가 열린 욕실 입구에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기대 서있었다. 너무 놀라 입이 벌어졌다. 그새 하녀들이 냉큼 다 사라졌다. 아주 신속했다.

“…왜 그러세요.”

투명한 물에 다 비칠 자신의 알몸이 신경 쓰였다. 루시아는 몸을 웅크리고 무릎을 세워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너무 늦어.”

“다 했어요. 금방 나갈게요. 그러니까…….”

그가 성큼 다가오자 루시아는 움찔 물러섰다. 그래 봤자 욕조에 가로막혀 등이 눌리도록 바싹 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욕조 턱에 걸터앉아 무릎 사이로 푹 숙인 그녀의 턱밑에 손을 넣어 들어 올렸다.

“왜? 같이 목욕도 하잖아.”

루시아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불만을 담아 그를 쏘아보았다.

“이런 적은 없었잖아요.”

“뭘?”

“목욕 중에 들어오시는 거요.”

“그랬나. 그게 무슨 상관이지?”

“하녀들 보기 창피하단 말이에요.”

루시아는 꿈속 경험 때문에 하녀들이 주인이 안 보이는 곳에서 얼마나 깔깔대며 떠들지 빤히 알았다.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으면 그런 것까지 뭐라 할 수 없지만 신경이 쓰였다. 꿈속에서 하녀로서 마님의 시중을 들다가 이런 민망한 상황을 마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런 광경을 자꾸 아랫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주인의 체면이 상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당신은 이상한 데 신경을 쓴단 말이야. 뭐가 창피한데?”

“보는 눈이 있을 때는 조심하시라고요.”

고용인의 눈을 신경 쓰는 그녀를 휴고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고용인은 손과 발 같은 것이다. 손과 발을 대체 왜 신경 써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기이한 곳에서 나름대로 기준이 높았다. 일꾼을 대할 때도 함부로 하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사람을 대하는 데 너무 순하고 착했다. 그래서 약육강식의 수도 사교계에 그녀를 내놓을 일이 걱정이었다.

성직자가 될 것이 아니라면 착한 사람은 이용당하고 상처받을 뿐이었다. 인간은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꼬리를 마는 족속이었다. 힘 있는 자가 호의를 베풀면 저가 잘나 그러는 줄 기고만장하고, 잔인하게 밟으면 오히려 존경하고 추앙했다. 그녀의 온화함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넘칠 것이다. 그녀가 상처받지 않도록 그가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녀를 지켜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변하는 건 싫었다. 그녀가 계속 이대로이기를 바랐다. 아주 조금만. 그가 품에 안고 달래줄 수 있을 정도까지만 상처받아도 되지 않을까. 그녀가 쓰러지기 바라서가 아니라 가끔은 기댈 곳을 찾았으면 좋겠다. 아니, 가끔보다는 좀 더 자주.

휴고는 무릎을 감싼 그녀의 손을 풀어서 잡아 든 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손가락 끝에도 키스했다. 팔목, 팔등, 팔 안쪽으로 그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가벼운 키스가 이어지면서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는 그녀의 뒷목을 잡아 물에 젖어 촉촉한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열기가 있는 작은 입안에 혀를 넣고, 당황해 물러나는 혀를 휘감았다. 혀에 감기는 말캉한 살의 느낌이 짜릿했다. 목욕물에 섞인 향유와 그녀의 체취가 뒤섞여 취할 것 같았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못하는 그는 그녀를 안으며 종종 이런 것이 취한다는 거구나 느끼곤 했다.

그녀의 할딱이는 작은 호흡 소리를 들으며 그의 하체에 피가 몰렸다. 그녀가 욕조에 앉아 자신을 보며 놀란 토끼 눈을 할 때부터 그는 허리에 뻐근한 자극을 느끼고 있었다. 입술을 떼자 그녀가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 끝났다니까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그녀의 종알거림을 한 귀로 흘리며 그는 느긋하게 웃었다.

“그럼, 보상을 받아볼까.”

보상이라는 단어에 발끈하려던 그녀가 뭔가 깨달았는지 풀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보셨…어요?”

“봤어. 말했지만 당신 남편 부자야.”

“부자라고 거금이 푼돈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지. 보상은 뭘 줄 거냐고.”

루시아는 ‘무슨 보상이요!’라고 항의했지만, 그가 당당하게 같은 말을 반복하며 보상을 요구하자 어쩐지 온종일 끙끙댔던 자신의 고민이 하잘 것 없는 것 같았다.

‘그래. 복에 겨운 고민이지. 누가 나 같은 고민을 하겠어.’

오늘 저지른 거금의 소비에 그는 손톱만큼도 관심을 두는 기색이 없었다. 루시아의 마음을 덮은 먹구름이 서서히 흩어졌다. 어차피 사교계에 나가려면 필요한 여러 가지를 마련해야 했다. 다음번에는 좀 저렴한 디자이너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녀는 휴고와 앙뜨가 합심한 덫에 빠졌지만 그걸 아는 건 훗날의 일이었다.

“뭘 드려요?”

휴고는 대답 대신 물속에 잠긴 그녀의 나신을 발끝에서 천천히 위로 올라가며 눈으로 훑었다. 붉은 눈동자에 담긴 욕망이 선명했다. 루시아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라 붉어졌다.

“점점 갈수록 왜 그러세요!”

루시아가 소리치자, 그는 ‘뭐가?’ 하고 갸웃하면서 그녀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어차피 또 씻어야 할 테니 더 경제적이잖아.”

야하게 웃는 그를 보며 루시아는 울상을 지었다. 반사 작용처럼 그녀의 몸이 반응했다. 허벅지 안쪽이 아프게 당겼다. 그에게 점점 길들고 있었다. 야성을 잃고 애완동물이 되어 주인을 잃으면 더는 살아갈 수 없는, 데미안이 기르는 여우처럼. 어쩌면 이미 그런 상태가 아닐까, 루시아는 생각했다.

그녀를 난처한 상황에 몰아넣고 그는 즐거워 보였다. 그의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쪽은 그녀였고 그는 늘 여유로웠다. 루시아는 그 점이 불만이었다. 무릎을 감싸던 팔을 풀고 욕조를 디디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로 고개를 들이밀어 입술에 키스하면서 아랫입술을 살짝 빨아들였다. 입술을 떼며 바라본 그의 눈이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그를 당황한 모습이 기분 좋아서 배시시 웃었다.

“…….”

휴고는 갈증이 났다. 흰 우유에 붉은 장미꽃잎을 띄운 것처럼 홍조 어린 그녀의 두 볼을 콱 물고 싶었다. 먼저 도발했으니 나중에 딴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한 손으로 동그란 뒤통수를 잡고 보드라운 입술에 키스했다.

벌어진 작은 입안에 혀를 넣고 보들보들한 속살을 끈적이게 핥았다. 도망가듯 움직이는 혀를 잡아 휘감고 치열을 모두 확인하는 것처럼 구석구석 훑었다. 다디단 그녀의 타액을 삼키며 그는 길고 긴 키스를 이어갔다.

처음에는 주춤하던 그녀는 이내 그의 키스에 빠져들어 가느다란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능란한 그의 키스에 적극적으로 반응해 따라오는 그녀는 훌륭한 학생이었다. 가르치는 대로 쏙쏙 흡수하여 첫날밤 아, 하고 입을 벌리던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스킬이 상승했다.

열기를 품은 말캉한 혀를 빨아들이며, 그는 매끄럽게 손에 감기는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다가 허리를 잡아 품으로 당겼다. 물기를 머금은 촉촉한 그녀의 피부는 생크림처럼 부드러웠다. 이 여자는 왜 이렇게 달콤할까. 왜 이렇게 품 안에 안고 있어도 갈증이 날까. 그녀를 다치게 할까 봐, 두렵게 할까 봐 그는 짐승의 욕구를 꾹 눌러내는 것만으로도 항상 괴로웠다.

욕망이 뒤섞이는 짙은 키스를 마치고 휴고는 달뜬 표정의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입고 있던 가운을 벗어 내던졌다. 근육으로 뒤덮인 그의 나신은 빈틈이라고는 없었다. 가운데 우뚝 선 그의 중심은 거대하고 단단해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그걸 뚫어지게 바라보는 루시아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그가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서있는 그를 그녀는 욕조에 앉은 자세로 꼼짝 못하고 올려다보았다. 이글거리는 붉은 눈으로 그녀를 샅샅이 분해할 것처럼 바라보던 그가 탁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이리 와.”

움찔한 루시아는 그의 얼굴과 그의 성난 중심으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강압적인 그의 눈빛에 소름이 돋으며 목이 턱 막히고 귀가 후끈거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물살을 가르고 무릎으로 걸었다. 그녀의 시선은 점점 눈앞으로 다가오는 그의 분신에 고정해 있었다.

그의 바로 아래까지 다가가서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를 올려보았다. 그의 눈이 무언으로 명령했다. 루시아는 그의 명에 복종하며 기립해 있는 그의 분신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쥐었다. 처음 만져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주 가끔, 그리고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여러 번에 걸쳐서 그녀의 손이 제 분신을 쥐게 했다. 이제 그녀는 처음처럼 기겁하지 않는 정도에 이르렀다.

손에 빠듯하게 들어올 정도로 크고 살덩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그가 매일같이 그녀 안을 꿰뚫으며 집요하게 괴롭히는 흉측한 그것에 입을 가져갔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을 그녀는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뭉툭한 끝에 입을 맞추고 혀를 내밀어 살짝 핥았다. 입을 벌려 삼켰다. 그녀의 작은 입으로 모두 삼키기는 무리였기에 윗부분만 입안에 넣고 혀로 굴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잡으며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의 반응은 루시아를 자극해 다리 안쪽이 아프게 죄어들었다. 진한 수컷 냄새에 취한 암컷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의 기술은 형편없었지만 서툴게 혀를 놀리는 것은 그 어떤 훌륭한 기교보다 그를 흥분시켰다. 그저 그의 것을 입에 물고 있는 그녀의 모습 자체로 충분했다. 키스도 못 하던 순진한 어린 아내는 이제 그의 것을 입으로 핥는다. 새하얀 날개를 그의 색으로 물들이는 것 같은 쾌감이었다.

휴고는 머리채를 쥔 손에 살짝 힘을 주어 그녀를 떼어냈다. 그의 것을 물고 핥는 데 심취해 있던 그녀의 입술이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흥분해 상기된 표정과 흐려진 눈이 지독하게 야했다. 휴고는 강한 힘으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이제는 그가 무릎을 꿇어 그녀의 두 허벅지를 움켜잡아 벌리고 비부에 입을 맞추었다. 숲을 헤치고 그녀의 다리 사이 깊이 자리 잡은 꽃잎을 맛보았다. 꽃잎 아래 담뿍 머금은 꿀이 달았다.

여린 살결을 입술로 물고 강하게 빨아들였다. 그녀의 크림 같은 가슴을 탐할 때처럼 입을 움직였다. 갈라진 틈 안으로 혀를 넣었다. 뜨겁고 촉촉한 안쪽이 파고드는 혀에 쉽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그는 쫀득한 살점을 쭉 빨아 삼켰다.

“흣…….”

그녀의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소름처럼 쾌감이 등을 타고 올라갔다. 더 깊이 들어오면 강한 자극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슬아슬한 정도까지만 감각을 유지했다. 다리에 점점 힘이 빠졌다. 그가 단단히 붙들고 있는 덕에 간신히 넘어지지 않았다.

“흑……. 으응……. 읏…….”

루시아의 입에서 흐느끼는 신음이 흘렀다. 온몸이 그가 주는 자극에 집중하느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상체가 그의 어깨 위로 무너지고 두 손은 그의 머리카락을 그러쥐었다. 그에게 온몸의 무게를 다 기대고 있는데도 버거웠다. 주저앉고 싶고 눕고 싶었다.

그녀의 혼을 쏙 빼놓는 키스를 하듯 그는 혀를 놀려 그녀의 촉촉하게 젖은 속살을 입술로 비비고 혀끝으로 훑었다. 그녀의 샘은 향기로운 물을 흘렸다. 맑지만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샘이었다. 바닥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하복부에 단단히 일어난 그의 상징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의 혀는 입구 안을 얕게 들어와 탐색하는 정도에 그쳤다.

꿈틀거리며 제멋대로 움직이는 혀가 주는 자극은 너무 은밀했다. 루시아는 수치심과 흥분이 뒤섞여 몸을 떨었다. 그의 애무는 거침이 없었다. 그녀의 수줍은 비처에 입을 대고 탐욕스럽게 핥았다. 몸에서 흐르는 물을 그가 삼키는 소리를 들으며 어질어질했다. 그녀의 호흡과 신음이 점차 거칠게 변했다. 그의 머리카락을 쥔 손에만 힘이 들어가고 그의 손에 잡힌 두 다리를 이제 더는 그녀의 의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아!”

짧은 절정을 느끼며 그녀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척추를 타며 순식간에 강렬히 짓누르는 감각이 아찔했다. 그의 머리카락을 꽉 쥐었던 손에 힘이 풀리고 숨을 할딱거렸다. 그의 입술이 떨어지고 다리를 지탱하는 힘이 사라지자 그녀의 몸은 그대로 무너졌다.

휴고는 늘어지는 그녀의 몸을 가뿐히 들고 욕조 턱에 걸터앉았다. 곤두선 자신의 분신 위에 그녀의 샘을 맞추고 천천히 주저앉혔다. 쑤욱 매끄럽게 들어간 그의 기둥을 그녀의 좁은 길이 한 번에 삼켰다. 두 사람 입에서 탄식 같은 신음이 터졌다.

루시아는 온몸을 떨며 그의 윗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단단한 끝이 안 깊은 곳을 찌르는 느낌이 오싹했다. 아래에서부터 거대하게 몸을 꿰뚫는 살덩이가 안쪽에서 꿈틀거렸다. 그의 입술이 뒷목과 목덜미에 인을 새겨나갔다. 따끔하고 간지러운 느낌이 어깨를 따라 이어졌다.

잠시 그녀의 몸을 달래던 휴고는 그녀의 골반을 잡아 위로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찧었다. 그는 압도적인 힘으로 지치지도 않고 몇 번이고 그것을 반복했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위아래로 흔들리며 루시아는 교성을 질렀다. 비명이 욕실 안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아! 아응!”

그는 수없이 그녀의 살 속을 짓쳐 들었다. 그녀의 무게가 가하는 힘으로 그의 성기는 질벽을 넓히며 안으로 쑥쑥 들어갔다. 움직임이 커지자 그의 목을 감았던 그녀의 팔은 땀과 물기 때문에 자꾸 미끄러졌다. 출렁이며 흔들리는 그녀의 가슴을 입에 물고 유두 끝을 혀로 파고들자 그녀의 안이 죄어들었다.

그는 능숙하게 그녀의 몸을 뒤로 돌려 자세를 바꿨다. 그를 뒤로 두고 앉은 자세로 그녀의 두 팔이 그의 손에 뒤로 잡혔다. 바뀐 자세는 그녀 안쪽의 다른 곳을 자극했다. 그가 허리를 튕길 때마다 그녀의 시야가 앞으로 튀어나가며 물결치는 수면이 흔들렸다. 그의 허벅지에 앉아있는 그녀의 발은 공중에 떠있었다. 불안정한 자세는 불안함을 가중시키고 그녀를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그가 아래에서 위로 강하게 박아 올릴 때마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공중에 잠시 떠오른 그녀의 몸이 내려앉으면 동시에 거대한 살덩이가 몸을 꽉 채우고 들어왔다. 부상감과 낙하감, 쾌감이 더해져 그녀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하아악!!”

절정이 그녀를 휩쓸었다. 그녀의 몸이 경직하고 동시에 질이 경련했다.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항거할 수 없는 짓눌림을 느끼며 파정했다. 목 깊은 곳에서 울리는 그의 신음을 들으며 루시아는 소스라치는 쾌감을 느꼈다.

절정의 순간이 지나고 그녀는 가쁘게 숨을 내쉬며 몸이 늘어졌다.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그녀의 몸을 그가 붙들었다. 그가 압박이 느껴질 정도로 뒤에서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휴고는 하아, 낮게 한숨을 흘렸다. 조금 더 참으려 했는데 견디지 못했다. 그녀의 떨림이 조금 가라앉자 그는 그녀를 안고 일어났다. 욕실을 나와 침실로 들어갔다.

등에 푹신한 느낌이 들어 루시아는 눈을 떴다. 마주치는 그의 붉은 눈동자의 열기는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의 상체만 침대 끝에 눕힌 채 그는 침대 밖에서 좌위로 자세를 잡았다. 그녀는 그의 손이 허리 아래를 붙들 때 이어질 상황을 예측하고 눈을 감았다. 단번에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흣!”

그가 짧고, 그러나 강하며 빠르게 추삽질을 시작했다. 묵직한 자극이 안을 치고 빠졌다. 그녀의 몸이 작은 흔들림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간헐적인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달리는 것처럼 숨이 가빴다. 아까의 절정 여운이 남아있는 내벽이 안을 건드리는 침입자에 맞서 경련했다. 그가 간간이 탁한 호흡을 뱉었다.

그는 그녀의 다리를 잡아 어깨로 올렸다. 그가 깊이 들어오자 그녀는 시트를 꽉 쥐었다. 자궁까지 닿는 느낌이 오싹오싹했다. 그는 갈수록 그녀가 힘들어하는, 깊은 곳까지 닿는 체위를 이전보다 더 자주, 그리고 길게 했다.

루시아는 그의 집요함이 조금씩 더해진다는 생각이 간혹 들었다. 바닥 모르는 늪처럼 그는 조금씩 그녀를 삼키고 있었다. 자극이 너무 심해서 눈에 눈물이 맺힐 때쯤, 그가 쑥 빠져나가서 그녀의 몸을 뒤집었다.

루시아는 엎드려 시트를 쥐고 한숨 섞인 신음을 흘렸다. 오늘 밤은 또 언제쯤 되어서야 끝이 날까. 허벅지 안쪽 살을 스치며 단단한 성기가 몸을 열고 들어왔다.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