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장 수도 (3)
그녀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한쪽 팔이 그녀의 등을 감싸 어깨를 끌어안고, 루시아는 그의 어깨 부근에 머리를 대고 누워있었다. 둘 다 나신이었다. 허리 아래쪽만 얇은 이불로 가리고 있었다. 지난밤 결국 그는 옷을 다 벗어 던졌다.
루시아는 그의 가슴에 한 손을 얹고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바닥에 닿는 그의 가슴과 배 근육의 요철을 즐겼다.
허리를 감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그의 입술이 루시아의 볼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어쩐 일이세요?”
“뭐가?”
“게으름 부리고 계시잖아요.”
그의 입술이 턱 아래 깊은 곳에 닿아 쪽 쪽 입을 맞추었다. 간지러워서 루시아는 몸이 흠칫하며 웃음을 흘렸다.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지.”
아침에 눈 떴을 때 그가 옆에 있는 것이 좋으면서도 낯설었다. 매일은 곤란해도 가끔은 이런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고 말하면 그는 곤란해할까.
루시아는 이 지나치게 부지런한 남자를 조금 더 침대에 묶어두고 싶었다. 그 바람이 행동으로 나타나 손이 계속 움직였다.
탄력 있는 근육이 불거진 가슴을 손바닥으로 살살 만졌다. 단단한 근육의 느낌은 정말 근사했다. 가슴을 탐험하던 손이 뚜렷이 형태를 그리고 있는 복부 근육까지 내려갔다.
탁, 그가 루시아의 손목을 잡았다. 좀 더 만져보고 싶은데. 그의 방해가 야속해서 그를 보았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작은 원망은 사그라졌다.
나른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붉은 눈동자 속에 뜨거운 기운이 맴돌았다. 그가 갑자기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아 품으로 확 끌어안았다.
두 사람 복부가 바싹 맞닿자 알몸인 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얇은 실크 이불뿐이었다. 이미 거대하게 존재감을 키운 그의 중심이 허벅지 안쪽을 찔러왔다. 얼굴을 붉히며 당황해 몸이 경직되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며 그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유혹하는 건가?”
진득한 욕망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루시아는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가 부정하지 않고 그의 가슴에 고개를 묻자 오히려 휴고는 당황했다.
‘왜 이렇게 귀엽게 굴지?’
수줍음이 많은 아내는 날이 환히 밝은 시간에는 그와의 작은 접촉도 부담스러워했다. 평소라면 이런 기회를 마다할 그가 아니었다. 당장 숨 막히도록 키스를 하고 그녀의 하얀 나신에 틈도 없이 흔적은 남긴 후 아래로 눌러 뜨거운 그녀의 몸 안에 들어가…….
젠장! 그는 소리 없이 포효했다. 오전에 도무지 취소할 수 없는 일정이 있다. 차려진 성찬을 두고 나가야 한다니! 끄응. 그는 한숨을 쉬며 미련을 애써 물리쳤다.
“나가봐야 해.”
“…네.”
“더 자. 여행 피로가 아직 풀리지 않았을 테니.”
말을 하면서 그는 좀 찔렸다. 여행 피로가 풀리기 전에 그토록 괴롭힌 건 정작 자신이었다. 푹 쉬게 해줬어야 하는데. 그는 형편없는 자신의 자제심이 한심했다. 혹시 또 탈이 나는 건 아니겠지 걱정스러웠다. 나갈 때 제롬에게 의사를 불러 진료를 받게 하라고 일러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보약도 지어 올리라고 해야겠어.’
그녀는 너무 체력이 약했다.
“네…….”
웅얼거리며 대답하는 그녀의 턱을 들어 입술에 쪽, 입을 맞추고 휴고는 몸을 일으켰다. 협탁 위에 개어 놓여있는 가운을 들어 걸쳤다.
그가 응접실로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루시아는 고양이처럼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거의 정오에 가까웠다.
루시아는 낯선 침실을 둘러보았다. 로암의 익숙함이 여기에는 없었다. 오히려 성보다 천장이 더 낮고 침실은 조금 더 작은데도 광활함이 느껴졌다.
이제는 여기서 지내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아마 기약 없이 꽤 오래 수도에서만 지내게 될 것이다.
점심을 먹고 루시아는 제롬에게 외출 준비를 지시했다.
“오래 못 본 지인을 만나러 가고 싶군요. 그런데 지인은 내 신분을 알지 못해요. 차차 이야기하겠지만 오늘은 놀라지 않도록 눈에 띄지 않는 차림으로 다녀오고 싶어요.”
루시아는 수도에 오면 놀만을 꼭 만나러 가야겠다고 오는 내내 생각했다. 1년이 넘도록 연락 한 번 하지 못했는데 걱정을 많이 했을 것이다. 놀만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도 궁금했다.
“그 전에 마님. 의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의사라니요?”
“주인님께서 의사를 불러 마님께서 오랜 여행으로 무리하셔서 탈이 나지 않으셨는지 진찰하라고 하셨습니다.”
“…….”
루시아는 살짝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가 말하는 ‘무리’가 과연 여행의 피로를 일컫는지 의심스러웠다. 솔직히 그녀가 지금 느끼는 몸의 노곤함은 여행의 피로 때문이 아니었다.
“알았어요. 진료만 받으면 되는 거지요?”
“보약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이 남자가. 잘 먹여 잡아먹겠다는 심보를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루시아는 자신의 몸이 약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겉보기에 뼈대가 가늘어 체구가 작지만 잔병이 없는 건강한 몸이었다.
그런데 그와 결혼하고 나서 체력이 부족해 몸이 허덕인다는 의미가 뭔지 알았다. 그와의 정사는 매우 많은 기력을 소모하게 했다.
처음 신혼 몇 개월까지는 몰랐다. 하지만 개월 수가 누적되어 1년이 훌쩍 넘자 안나 주장한 닷새에 하루가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깨닫고 있었다.
“…그래요. 기왕이면 아주 농축된 영양으로 부탁해야겠군요.”
“외출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마침 헤바 경이 있어서 호위를 맡기면 되겠습니다.”
제롬은 루시아의 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착착 준비했다. 공작가 집사답지 않은 투박한 재질의 옷차림을 하고, 딘도 기사처럼 보이지 않도록 가죽으로 된 갑주만 입어 흔한 호위 차림을 했다. 마차 역시 가문의 문장이 없는 평범한 것으로 준비했다.
루시아가 일러준 방향으로 마차가 달려갔다. 단출한 일행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모르는 비밀 호위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놀만의 이층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차가 멈추었다. 마차에서 내려 놀만의 집으로 향하는 루시아의 뒤를 몇 걸음 뒤에서 제롬과 딘이 따랐다.
루시아는 문을 두드렸다. 필 부인이 뚱한 얼굴로 나와 맞으리라는 기대와 달리 안에서 대답이 없었다. 몇 번을 두드려도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외출한 건가. 놀만은 외출을 좋아하지 않는데. 왜 필 부인이 없지.’
이대로 놀만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기가 아쉬워서 그녀는 문 앞에서 한참 서성거렸다.
“루시아!”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외침이 들려왔다. 다소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는 한 쌍의 남녀 중 여자가 방방 뛰며 손을 흔들었다.
루시아가 기억했던 깡말랐던 여자가 아니었다. 놀라보게 살이 붙은 놀만이 빠르게 루시아를 향해 달려왔다.
“루시아 맞지?!”
“놀만.”
놀만이 루시아를 와락 껴안았다.
“세상에. 이게 얼마만이야. 어디 얼굴 좀 보자. 아유. 더 예뻐졌네. 얼굴 뽀얀 것 좀 봐.”
놀만은 울먹이면서 루시아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이리저리 돌렸다. 공작부인의 귀한 몸을 함부로 대하는 광경을 보기 불편한 제롬과 딘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놀만은 호들갑스럽게 루시아의 얼굴이며 손이며 만지면서 건강해 보이는구나, 다행이다, 다친 곳은 없구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들어가자. 도대체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아, 놀만. 이분은…….”
루시아는 옆에서 뻘쭘하게 서있는 남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놀만과 함께 걷고 있다가 놀만이 먼저 달려가자 뒤를 쫓아왔다.
남자는 아는 척해주는 것이 고마운지 히죽 웃으며 냉큼 놀만 옆으로 붙었다. 놀만은 그를 밉지 않게 흘겨보며 팔꿈치로 툭 그쳤다. 대단히 친밀해 보여 루시아의 눈이 커졌다.
“인사를 잊을 뻔했네. 토마스. 내 약혼자.”
“약혼자요?”
루시아는 놀라 소리쳤다. 놀만은 머쓱하게 웃으면서 토마스에게 간단히 루시아를 소개해 주고 얼른 가라고 쫓아냈다. 토마스는 같이 집에 들어가 대화에 끼고 싶어 하는 눈치가 빤했는데 놀만은 모르는 척했다.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돌아서는 남자는 풍채가 좋고 순한 인상을 지녔다. 루시아의 팔짱을 끼어 끌어당기던 놀만은 훤칠한 두 남자에게 관심을 보였다.
“저 사람들은 누구? 혹시 너도?”
놀만이 루시아에게 야릇한 눈빛을 보냈다. 둘 중 누구야? 그런 눈빛이었다. 휴고가 들었으면 큰일 날 오해를 루시아가 얼른 풀었다.
“아니에요. 내 호위예요.”
“호위? 우와. 루시아. 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우리 할 말이 진짜 많을 것 같은걸. 그런데 함께 온 분들은…….”
“저희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롬의 대답을 듣고 놀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림새만으로 그저 그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말투와 태도의 정중함에서 기품이 묻어났다. 남 밑에서 일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놀만은 무례라는 걸 알면서도 집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을 때까지 두 남자를 자꾸 흘끔거렸다.
문이 닫히자마자 작은 이층집을 주변으로 반경 일정 거리까지 주변을 경계하는 철저한 눈이 깔렸다.
루시아는 오랜만에 다시 보는 놀만의 집을 감상에 젖어 둘러보았다. 꾸밈없이 건조한 응접실 분위기는 변함없었다. 놀만이 차를 내 와서 둘은 소파에 마주앉았다.
“필 부인은 어디 가셨나요?”
“허리가 안 좋아서 그만뒀어. 어차피 나도 곧 떠날 거라서.”
“떠나다니요?”
“아까 봤던 약혼자 말이야. 그 남자 고향으로 가서 결혼하기로 했어.”
“놀만, 축하해요! 언제 가요?”
“모레.”
“모레요? 이틀 뒤에 떠난다고요?”
“그래. 하마터면 우리 못 볼 뻔했어. 네가 올지 몰라서 이 집은 세를 놓으려고 했거든. 혹시 네가 오면 연락을 전해주기로 말해 놓은 참이었어.”
루시아는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놀만은 루시아의 첫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놀만이 준 돈으로 드레스를 마련해서 그를 만났고, 놀만의 조언에 용기를 얻어 공작저를 찾아갔다. 놀만이 아니었다면 루시아는 그와 결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차라리 잘 되었다. 루시아는 귀족과 평민의 삶을 모두 경험했다. 그래서 평민이 바라보는 귀족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
평민에게 귀족은 그들이 사는 세상에 전혀 섞일 수 없는, 땅과 하늘의 격차가 있는 존재였다. 대다수 평민은 공작 정도의 고위귀족은 평생 가도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놀만이 상대방의 신분에 따라 바뀌는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 하지만 루시아의 진짜 신분을 알면 마음의 거리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녀인 루시아와 공주였던 공작부인 비비안의 격차는 너무 컸다.
놀만에게 사실을 계속 숨기기는 괴롭고, 말하자니 그녀와 사이가 벌어질 것이 보여서 루시아는 내내 고민이었다.
이대로 놀만이 알던 루시아로서 놀만을 보내야겠다. 혹시 놀만이 살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보살펴주는 것으로 놀만이 모르게 그녀의 평온한 삶을 지켜주고 싶다.
“사실 나도 결혼했어요.”
“뭐? 정말?”
“결혼하고 급하게 남편을 따라 먼 곳으로 가야 해서 놀만에게 연락을 할 수 없었어요. 미안해요.”
“그랬구나. 아니야. 내가 결혼하려니까 뭐가 그렇게 걸리는 것도 신경 쓸 것도 많은지. 이해해. 그럼 호위가 붙은 것도 남편이?”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놀만이 ‘좀 사는가 본데.’ 하고 감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어떤 남자냐, 몇 살이냐, 어디 사느냐, 어디서 만났느냐,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질문에 루시아는 쩔쩔맸다.
루시아가 대답하기 곤란해하는 기색을 눈치채고 놀만은 굳이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루시아가 결혼한 사람이 평범하지 않은 모양이야.’
놀만은 아까 호위라며 따라왔던 남자들을 떠올렸다.
‘돈 많은 거상이나, 혹은 귀족과 결혼했는지도 몰라. 루시아가 어딘지 모르게 귀한 태가 나기는 했지. 아아. 귀족과 결혼이라. 이거야말로 정말 로맨스구나.’
“남편은 잘해주고?”
“네, 다정해요.”
“돈은 잘 벌고?”
루시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잘 벌어요.”
“밤에 그건…….”
“아우, 놀만!”
“결혼한 유부녀가 뭘 그리 순진한 척해. 할 건 다 했을 거면서.”
놀만은 얼굴이 빨갛게 물든 루시아를 보며 낄낄거렸다. 결혼 선배로서 후배에게 부부의 밤에 관해 조언해 줄 것은 없느냐고 놀만은 루시아를 놀렸다.
루시아가 얼굴을 붉히며 입을 꼭 다물자 놀만은 그걸 보며 또 깔깔 웃었다.
“네가 편지를 보내서 괜찮겠지 생각하려 했지만 사실 중간에는 좀 걱정했어. 묘한 일이 있었거든.”
“묘한 일이요?”
“내 소설 팬이라면서 어떤 여자가 찾아왔는데 누군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내 감으로는 귀족인 것 같았어. 드러내지 않으려고 해도 말투라든가 행동이라든가. 뭔가 다르더라.”
“귀족이라도 팬이 될 수는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 근데 널 찾더라고.”
“…날 찾아요?”
“몇 번 찾아오다가 네 인상착의를 말하면서, 네가 은행 계좌를 만들 때 내가 보증했던 걸 묻더라. 왜 널 찾느냐고 했더니 아는 사람이라 소식을 찾던 중이라고 하더라. 그냥 아는 동생이라고만 했어. 막 캐묻는 건 아니었는데 은근히 네 얘기를 하도록 유도하기에 모르는 척했어. 아는 사람 아니지?”
“모르겠어요. 전혀……. 누군지 감이 잡히지 않아요.”
누굴까. 루시아는 놀만에게까지 찾아와 자신에 관해 물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그녀를 조사하고 있었다.
‘내가 아니라, 그이를 노리는 것인지도 몰라.’
누군가 그녀를 노릴 이유는 없지만, 그의 정치적 정적들은 충분히 그를 노리기 위해 그녀를 이용하려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와요?”
“아니. 갑자기 딱 발길을 끊었어. 수개월은 넘었지. 그 후로는 한 번도 못 봤고.”
루시아는 자세하게 인상착의를 들어서 기억해 두었다. 자신을 조사하려 했으니 분명히 언젠가 접근해 올 것이다.
“왜 그렇게 봐요?”
루시아는 놀만이 한참을 물끄러미 보자 물었다.
“좀 변한 것 같아서.”
“오랜만이니까요.”
“아냐, 그런 거와 달라.”
1년 넘도록 공작부인으로서 아랫사람들을 다루고 북부 사교계 귀부인들을 상대했던 여유와 노련함이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놀만은 예리한 눈으로 그걸 포착했다. 하지만 정확히 뭐가 달라졌는지,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으니까 그냥 뭔가 다르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네가 없으니까 확실히 네가 얼마나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는지 알겠더라. 귀족 사교계 소식을 들으려고 사람을 몇 번 사기는 했는데 네가 해주는 얘기만큼 재미도 없고 정보도 형편없었어.”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있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타란 공작가 소식이었지.”
루시아는 차를 마시다가 목에 걸릴 뻔했다.
“타란 공작이 결혼했대. 혹시 들은 적 있어?”
“그… 글쎄요.”
“하긴 뭐. 우리 같은 사람이야 귀족 누가 결혼하는지 시시콜콜 알지 못하지. 근데 타란 공작의 결혼 소문은 흥미롭거든. 결혼식도 하지 않고 도둑 결혼 하자마자 신부를 납치해서 영지로 끌고 갔대.”
“푹!”
루시아는 결국 입에 머금은 차를 뿜고 말았다.
“왜 그래? 차가 너무 뜨거워?”
“아… 아니에요.”
루시아는 놀만이 건네주는 손수건으로 치맛자락에 흘린 찻물을 닦아냈다.
“어떡해. 얼룩 잘 안 지워질 텐데.”
“괜찮아요.”
“무슨 얘기……. 아, 그렇지. 타란 공작. 아무튼, 근데 공작부인이 된 여자가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의 절세미인이라 공작이 눈이 뒤집혀서 그랬다고 하는데.”
“…….”
루시아는 이제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그 절세미녀 공작부인이 놀만 눈앞에 있는 바로 나랍니다.
“세간에서는 공작이 공작부인을 감금해서…….”
“노… 놀만. 앞으로 여길 떠나서도 소설은 계속 쓸 거예요?”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루시아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불확실해. 수도가 아니면 소설은 잘 팔리지 않으니까 돈이 될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그간 벌어놓은 돈이 있으니까 걱정 없어. 약혼자가 고향에서 집안 대대로 상가를 운영하는데 벌이가 괜찮은가 봐.”
“도대체 어쩌다 그렇게 된 거예요? 놀만은 사랑을 안 믿었잖아요.”
“그러니까 인생은 재밌는 거란다. 하하하.”
장장 몇 시간에 걸친 놀만의 러브 스토리를 듣느라 오후가 훌쩍 지나갔다. 루시아가 듣기에는 그동안 놀만이 쓴 소설에 비하면 굉장히 평범하고 진부한 만남과 연애였지만, 놀만은 세기의 명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풀었다.
정말 놀만의 소설 속에 등장하던 여주인공처럼 사랑에 빠진 모습 그대로였다.
“너는 어때? 행복하니?”
잠시의 간격을 두고 루시아는 ‘네. 행복해요.’라고 대답했다. 미소 짓는 표정에 묻어나는 행복은 거짓이 아니었다. 루시아는 진심으로 그와 함께하는 오늘이 행복했다.
루시아의 진심은 놀만에게 충분히 전해졌다. 놀만은 기쁨과 안도가 섞인 표정을 지었다.
“네 결혼 선물로 하면 되겠다. 이 집. 너한테 증여 처리했거든.”
“이 집을요?”
“은행에 네 계좌가 살아있어서 은행장한테 맡겨서 처리했어. 서류나 세금이나 다 처리했고 그냥 네가 받기만 하면 돼.”
“놀만, 이 집은 놀만이 처음으로 산 집이잖아요. 그런 귀한 추억이 있는 집을…….”
“그러니까 네가 받아줬으면 좋겠어. 이 집의 추억은 너와의 추억이니까. 팔고 싶지 않지만 내가 다시 수도로 언제 올지 알 수가 없거든.”
맞은편에 앉아있던 놀만이 일어나 루시아 옆으로 와서 두 팔로 루시아를 꼭 안았다.
“루시아, 네가 나이보다 철이 들어서 늘 마음에 걸렸어. 꼭 행복해야 한다. 내가 살 곳 알려줄 테니까 남편이 속 썩이면 나한테 와.”
“놀만, 고마워요. 난 놀만이 아니었으면…….”
루시아는 목이 메어 말을 잊지 못했다. 둘은 서로 안아주며 울면서 재회의 기쁨을, 이별의 슬픔을 나누었다.
떠나는 날 배웅하겠다는 루시아를 놀만이 만류했다. 내일은 준비 때문에 온종일 정신없이 바쁘고 모레는 새벽 일찍 떠나니까 그런 수고 할 필요 없다고 사양했다.
놀만은 호위까지 데리고 다닐 정도로 외출이 자유롭지 않은 루시아를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안에서 한참 인사를 나누었는데도 집 앞에 서서 아쉬움을 놓지 못했다.
“잘 부탁합니다. 내가 동생처럼 생각하는 아이예요.”
놀만이 제롬에게 당부의 말을 건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제롬이 조심스럽게 루시아를 보호하듯 마차까지 모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놀만은 생각했다.
‘정말 괜찮아 보이는 남자네. 루시아의 남편이 저런 사람이면 안심이 될 텐데. 어휴, 루시아가 이미 결혼했다니 내 작은 꿈이 날아갔구나.’
놀만은 언젠가 루시아와 연락이 닿으면 약혼자의 남동생을 루시아에게 소개해서 둘을 결혼시킬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래서 아래 동서로 데려와 평생 가까이 살고 싶었다. 나이 어린 루시아가 남자를 잘 몰라서 걱정됐다.
‘이상한 놈에게 붙잡혀 고생하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외로운 루시아가 이제 혼자가 아니라서 안심했다. 아까 떠난 마차가 보이지 않는데도 놀만은 한참 동안 들어가지 못하고 서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 휴고는 그녀의 외출에 관해 말했다.
“외출했다고 들었소.”
“예. 당신께 편지를 전달해 달라고 청한 적이 있는 지인이에요. 기억하세요?”
“기억하오.”
기억할 뿐만 아니라, 파비안이 지난번 보고서를 올린 이후 여류작가를 더 밀착 감시 및 보호를 하고 있었다. 여류작가가 곧 결혼한다는 소식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상대 남자가 일부러 접근한 애먼 놈이 아닌지 신상까지 파악했다.
놀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란 공작가 정보부가 보증하는 수상하지 않은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제게 소중한 친구예요. 수도를 떠난다는데 지낼 곳에서 혹시 무슨 어려움을 겪으면 도와줄 끈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조치하지.”
그의 쉬운 승낙을 받고 그녀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쉽게 부탁을 들어주니까 마음이 들떴다.
“그리고 혹시……. 저에 대해 소문이 돈다는데 아세요?”
“수도에 소문은 언제나 많지.”
“정말 터무니없는 소문이라…….”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포크로 요리만 뒤적이자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에 대해 나도는 소문은 파비안을 통해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소문이란 대부분 터무니없어서 아주 악의적이지 않는 이상은 과민 대응이 오히려 역효과였다.
다행히 그녀의 소문 중에 악질적인 내용은 없었다. 그가 모르는 안 좋은 소문을 그녀가 어디선가 들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그는 심기가 불편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파비안을 불러 족칠 생각이었다.
“소문은 원래 터무니없소. 어떤 소문?”
루시아는 조금 더 머뭇거리다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차마 민망해 제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소문을 설명했다.
“타란 공작부인이 대단한… 미녀라서……. 당신이 절 영지로…….”
“들어봤군. 그게 왜?”
별것 아닌 소문이었다. 그녀가 지극히 불편해하는 기색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는 물었다. 전혀 아무렇지 않은 그를 루시아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을 무슨 납치 감금범처럼 묘사했다고요.”
“나에 대한 소문치고 그 정도면 양호한 편이지.”
루시아는 꿈속에서 그에 관한 별별 소문을 다 들었다. 더구나 그녀는 의도하지 않게 ‘피를 마신다.’라는 소문을 그에게 직접 전해주기도 했다. 당시에 그 말을 듣고 유쾌해하던 그의 반응을 생각하면 그는 자신에 대한 소문에 초연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절 무슨 절세미녀쯤으로 말하고 있어요. 어이가 없어서……. 실제 제가 사교계로 나가면 사람들이 얼마나 수군거리겠어요.”
“왜 수군거린다는 거지?”
왜 이렇게 그가 말을 못 알아듣는지 모르겠다.
“그야 전 절세미녀가 아니니까요.”
“무슨 소리요. 당신은 예뻐.”
루시아는 순간 멍해서 그를 보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재빠르게 시선을 돌리자 고용인들은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표정이 변하지 않는 고용인들이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놀리지 마세요.”
“놀린 적 없어. 예쁘니까 예쁘다는 거지.”
그는 간혹 짓궂게 그녀를 놀리기는 해도 실없는 농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이전에도 같은 말을 한 적 있었지만, 그때는 둘만 있을 때였다.
루시아는 더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오른 얼굴이 화끈거려서 도무지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일어나 식당을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뜰로 나가는 그녀를 강한 힘이 팔을 잡아 멈추게 했다. 어느새 그가 바로 뒤에 있었다.
“비비안, 내가 무슨 실수 했나?”
예쁘다고 하면 좋아하는 것 아니었나. 그의 리스트에는 분명히 그렇게 기록되어 있어서 그녀의 반응에 당황했다. 루시아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창피해서……. 고용인들 앞에서 그러시니까.”
“나 참. 고용인들 앞에서는 만지지도 말고, 이젠 말도 하지 말라고?”
루시아는 그의 허리를 두 팔로 끌어안으며 품에 기대 고개를 푹 묻었다.
“네. 전 그런 거 싫어요.”
대체 고용인들을 왜 신경 써야 하냐고 투덜거리면서 그의 손이 그녀 등을 감싸 마주 안았다. 그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루시아는 품에 고개를 비비며 배시시 웃었다. 행복하니? 묻던 놀만의 말이 떠올랐다. ‘행복해요.’라고 몇 번이고 대답해 줄 수 있었다.
그를 믿자고 생각한 이후부터 그녀는 조금 덜 불안하고 조금 더 행복했다.
‘그놈의 소문. 쓸데없이 놀리는 입을 하나하나 다 잡아 틀어막아 버릴 수도 없고.’
다른 소문은 상관없지만 그와 관련한 여자의 근거 없는 소문, 혹은 과거의 추문이 나돌아서 그녀의 귀에 들어갈까 봐 그는 요즘 걱정이 많았다. 때문에 요즘 파비안은 밤낮없이 소문만 수집하러 다니고 있었다.
수도에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나도록 공작부인이 수도에 왔다는 소문은 퍼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세간의 시선에 시달리지 말고 쉬라고 휴고가 입단속을 했다.
그래서 루시아는 아주 느긋한 며칠을 보내고 있었다. 이 휴식이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동안 누릴 생각이었다.
점심을 먹고 저택을 둘러보다가 뜰로 산책을 나왔다. 입구로 들어오는 대문에서부터 저택 사이에는 꽤 넓은 평지가 있었다. 정원 대신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시야를 가리는 나무들을 잔뜩 심었다. 그 사이로 소로가 쭉 놓여있어서 산책하기에 좋았다.
“오오!”
느닷없이 들려오는 큰소리에 루시아는 깜짝 놀랐다. 적발의 사내가 불쑥 나타나자 루시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 이런 놀랐수? 나요, 나. 우리 무지 오랜만이지요?”
적발의 사내. 로이 크로틴이었다. 그가 내미는 손을 잡으며 루시아는 일어났다.
그녀에게 로이는 특별한 인연이었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로이가 아니었으면 루시아는 절대 휴고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손님을 관리하는 일은 모두 제롬의 몫이었다. 빈틈없는 제롬의 성격으로 봐서 그녀를 제대로 된 손님으로 판단해서 휴고를 만나게 해주었을 리가 없다.
때마침 제롬이 자리를 비웠고 로이가 멋대로 루시아를 휴고와 만나게 해주었다. 만약 그때 만나지 못하고 거절당해 돌아섰다면 다시 찾아갈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 같다. 하늘과 로이가 동시에 도운 일이었다.
“이젠 공작부인이시니 좀 다르게 해야 하나. 근데 내가 그런 거 잘 몰라서요.”
히죽 웃는 로이의 표정에 악의는 없었다. 루시아는 싱긋 웃었다.
“괜찮아요. 편한 대로 해요. 오랜만에 이렇게 만나 반가워요. 감사하다는 말, 꼭 하고 싶었어요.”
“감사? 뭘요?”
“크로틴 경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공작 전하를 뵈었겠어요. 공작부인이 될 수 있었던 건 경 덕분이에요.”
“아니 뭐…….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로이는 겸연쩍어서 턱을 긁적였다. 사실 로이는 루시아가 휴고에게 청혼할 때 파안대소한 일이 마음에 걸렸다. 절대 비웃으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저 상황 자체가 매우 재미있어서 그런 건데 사람들은 늘 로이의 말과 행동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오히려 감사를 듣자 조금 쑥스럽고 기분도 좋았다.
‘대체 이 사람이 왜 그런 악명을 지닌 걸까?’
꿈속에서 로이 크로틴은 미친개로 유명했다. 루시아는 로이와 딱히 접점이 없어서 소문으로만 들었다. 그런데 직접 마주한 로이는 악명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솔직하고 쾌활하며 호의로 대하면 반드시 호의로 보답할 사람이었다.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타란 공작을 둘러싼 소문에 의하면 그는 완전히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한 괴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를 둘러싼 소문만 해도 허무맹랑했다.
꿈속에서 대단히 많은 사교계 소식을 소문으로 접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대부분은 거짓이었을 것이다. 앞으로는 직접 보고 들은 일이 아니면 소문에 귀 기울이지 말아야지, 루시아는 작은 결심을 했다.
“그동안 태자 전하의 호위를 담당했다고 들었어요. 이 시간에 여기 있어도 괜찮아요?”
“괜찮고말고. 난 더는 죽어도 못 하오. 주군 명이래도 더는 못 해! 1년이 넘도록 아무 데도 못 가고 근접 호위를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시오? 그나마도 이따금 덤비는 암살자들을 쳐 죽이는 재미만 없었어도 당장 때려치웠을 거요.”
“…아, 네. 힘들었겠네요.”
“근데 주군은?”
“안 계세요. 나가셨어요.”
“이런. 간만에 주군하고 한판하고 싶어서 달려온 건데.”
“…한판? 공작 전하와 싸우겠다는 거예요?”
“음? 하하하! 싸우는 게 맞긴 하죠. 비무도 싸우는 거니까.”
“아……. 비무. 그거 위험하지 않아요?”
“위험할 건 없소. 아마추어도 아니고. 어설프게 검을 휘두르는 것들이나 위험하지. 비무를 구경한 적 없어요?”
“없어요. 그래도 혹시 전하께서 다치시면…….”
로이가 ‘푸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치다니. 얼토당토않은 말씀 하지도 마쇼. 세상에 주군의 손끝이라도 상하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요.”
‘그가 정말 그렇게 대단한 기사일까?’
그의 체격 조건은 기사를 압도했다. 하지만 실제 그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해서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공방을 운영한 덕분에 기사라는 자들을 조금은 알았다. 고지식하고 단순한 면이 있으면서 가끔 성질이 폭발하면 눈에 뵈는 것 없는 성난 들소처럼 날뛰었다.
‘그는 전혀 기사 같지 않아.’
그에게서는 기사 특유의 거친 모습을 느낄 수 없었다.
‘기사이기 이전에 공작이라서 그런가?’
기사들을 제법 많이 보긴 했어도 귀족인 기사를 접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것도 무려 공작씩이나 되는 기사는.
그래서 살짝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그가 공작이기 때문에 그가 지닌 무용보다 더 소문이 부풀려 난 것은 아닐까. 소문은 본디 허무맹랑하니까 그럴 수 있다.
타란 공작을 아는 사람이 들었다면 기가 막혀 입이 쩍 벌어질 생각을, 루시아는 하고 있었다.
“크로틴 경!”
날카롭게 날을 세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제롬이 굳은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로이는 난처한 표정으로 실실 웃었다.
“안녕, 오랜만.”
제롬은 로이를 매섭게 노려보다가 루시아에게 정중히 말했다.
“마님. 하녀를 대동하지 않고 혼자 다니시면 곤란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 이전에 그런 말을 했었지요. 조심하도록 하지요.”
루시아는 자신의 경솔함을 자책하며 로이에게 살짝 묵례한 후 두 사람을 남기고 저택으로 향했다. 마님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확인한 제롬은 다시 고개를 돌려 로이를 노려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타란 공작가 안주인이십니다. 이렇게 불쑥 나타나서 주변 사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만날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디에 숨은 눈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수도였다. 그리고 수도에서의 온갖 추문은 굉장히 별것 아닌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미안.”
“조심 좀 하란 말입니다.”
“아, 미안하다고. 오랜만에 봐도 참 변하지를 않는구먼. 그냥 나는 공작부인이 반가워서 그런 것뿐이라고.”
“사적인 감정 표현은 그게 무엇에서 비롯되든 남편을 둔 여인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주인님께서 언제까지나 관대하실 거라고 믿지 마십시오. 크로틴 경 때문에 마님을 두고 안 좋은 소문이 나면 굉장히 노여워하실 겁니다.”
“흐음. 하지만 주군은 여자 문제로 화내신 적 없는데.”
“그냥 여자가 아니라 마님이십니다. 말조심하세요.”
새끼를 감싸는 어미처럼 바싹 독이 오른 제롬의 모습이 낯설어서 로이는 눈을 껌벅거렸다.
공작의 여자들에게 무례하게 굴기로는 제롬도 못지않았다. 로이는 대놓고 그런다면 제롬은 은근히 긁는다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는 묘하게 쿵짝이 잘 맞았던 두 사람이었다.
다만, 둘이 그러는 이유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로이는 재미와 심술로 그랬고, 제롬은 자기 본분을 망각해 공작부인이나 된 것처럼 설치는 여자들을 싸늘히 대한 것뿐이었다.
그 점만 제외하면 두 사람은 상극이었다. 고양이와 쥐 같은 관계였다. 재미있는 것은 무력이 훨씬 강한 로이가 쥐이고 제롬이 고양이였다.
로이가 사고를 치면 제롬은 엄청난 잔소리와 비난을 퍼부었다. 휴고에게조차 개기다가 얻어터지기 일쑤인 로이가 제롬에게만은 꼼짝하지 못했다.
제멋대로에 거칠 것 없이 나대고 다니는 로이는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하고 한 치 흐트러짐이 없는 제롬에게 존경심 비슷한 자격지심을 느꼈다.
“주군이 저 여자.”
제롬이 매섭게 노려보자 로이는 얼른 말을 바꿨다.
“공작부인을… 좋아해?”
“예.”
“많이?”
“많이요.”
“으음. 그럼 이전처럼 하면 주군이 화낼까?”
“엄청 화내실 겁니다.”
화내는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겠지. 제롬은 진심으로 로이가 걱정되어 강한 경고를 하는 중이었다. 다른 말썽이라면 주인님은 로이에게 관대했다. 하지만 마님과 관련한 일에서는 절대 용서가 없을 것이다.
“알았어. 뭐, 나도 저 여……. 공작부인이 싫지는 않아.”
“…왜요?”
“뭐랄까. 불쾌한 냄새가 안 나.”
“냄새요? 향수 냄새 말인가요?”
마님은 평소 과하게 향수를 뿌리는 편이 아니었다. 사실 그 점은 제롬도 좋았다. 귀부인들 뿌려대는 향수는 너무 지독해서 두 명만 모여도 냄새가 섞여 머리가 아팠다.
“그건 아닌데…….”
로이는 대체로 어떤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기질을 본능적으로 파악하곤 했다. 아무리 주군의 명이라지만 태자 곁에서 꼼짝없이 호위를 한 건 태자가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얽매인 것을 싫어하는 로이가 휴고 곁에 붙어있는 이유도 비슷했다. 주군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가 가장 컸고, 그다음으로 주군 곁에 있는 사람 중에 특히 싫은 사람이 없어서였다.
“암튼 그런 게 있어. 알았으니까 조심할게. 주군 올 때까지 잠이나 잘래. 어디서 자면 돼?”
“…따라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