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34화 (35/77)

34장 수도 (1)

루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들고 있던 나이프를 떨어뜨렸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잊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모두 내려놓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이대로 살고 싶었던 자신의 깊은 속내를 비로소 알아차렸다.

“괜찮소?”

“…네. 조금 놀랐어요. 갑작스러워서.”

그녀가 친부의 죽음에 놀라서가 아니었다. 잠시 멈추어있던 시계추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숨 가쁘게 그녀가 본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 그게 이렇게 끔찍한 기분이 들 줄 몰랐다.

왕비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즉, 왕의 모든 자식은 적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아무도 태자가 될 정통을 갖지 못했고, 그래서 누구라도 태자가 될 수 있었다.

왕은 무려 스무 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왕이 죽었을 때 생존해 있는 왕자는 태자를 포함해 다섯 명뿐이었다. 왕의 스물여섯 명의 공주가 대부분 살아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공주는 왕위 계승권이 없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반면에 왕자는 서로를 죽여야 왕의 길에 가까워졌다. 루시아가 작은 별궁에서 평온하게 살아가는 동안에 궁중에서는 살벌한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태자는 훌륭히 살아남은 승리자였다. 그렇다고 다른 경쟁자들을 완전히 제압하진 못했다.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태자는 자신의 세력을 굳건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타란 공작이 필요했다.

최후의 승리자는 태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선봉에 타란 공작이 있었다. 루시아는 복잡한 정치 싸움은 잘 몰랐다. 그래도 앞으로 그가 무척 바빠질 거라는 사실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영지에서의 그도 한가롭지 않았다. 그래도 비교적 관심을 쏟는 대상이 단순했다. 영지를 살피고 회의하고 가끔 시찰을 나갔다. 만나는 자들이 한정적이고 행동반경도 예측 가능한 범위였다.

루시아가 각오했던 것과 다르게 그동안 그는 성실한 남편이었다. 어쩌면 북부의 풍습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른다.

북부 사람들의 풍습은 수도와 다른 점이 많았다. 미혼남녀의 자유로운 성 풍조는 비슷했으나 북부에서는 혼인 후에는 대체로 배우자에게 충실했다.

하지만 수도로 올라가면 그를 유혹할 것들이 매우 많았다. 제논은 성 풍속이 자유로운 나라였다. 특히 수도는 가장 개방적이었다. 결혼했는지는 아무 장애가 되지 못했다.

수도에는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에 개의치 않고 몸을 던질 아가씨들이 넘쳐났다. 그녀는 불안했다. 수도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수도로 가면 그는 식어 버릴지도 몰라. 아름다운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거요. 듣고 있소?”

“네?”

루시아는 깜짝 놀라서 또다시 들고 있던 포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정말 괜찮은가?”

“아……. 네. 죄송해요. 다른 생각을 하다가…….”

“다른 생각?”

“가… 갑작스러워요. 폐하가 원래 그렇게 건강이 좋지 않으셨나 생각하느라고요.”

“원래 좋지 않았다고 들었소. 궁의들의 충고에도 술이나 여색을 탐하는 일을 전혀 자제하지 않았다고 하더군.”

루시아는 왕의 사인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남편에게 치부를 드러낸 것처럼 민망했다. 그녀의 부친은 방탕함으로 죽음을 자초했다.

꿈속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친과의 관계는 전혀 개선되지 않고 끝나 버렸지만, 아쉬움은 없었다.

“언제 올라가세요?”

“새벽에 곧바로 떠날 생각이오. 서둘러야 해서 함께 가지 못하겠소. 부인은 조심해서 뒤따라오도록 하시오.”

“네. 저도 준비가 되는 대로 출발할게요.”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오는 그녀의 손을 그가 잡아끌었다. 얼결에 쫓아가며 흘끔 본 고용인들의 표정은 그러려니 무심했다. 공작 부부의 어지간한 스킨십에 익숙해서 이젠 이 정도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루시아는 왠지 갑자기 창피했다.

정원으로 나가는 줄 알았더니 그는 그녀를 데리고 테라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를 꽉 품으로 안았다. 루시아도 두 팔로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휴? 갑자기 왜…….”

“고용인들 앞에서 이러는 거 싫어하잖아.”

“…….”

싫어하는 것을 알면 다짜고짜 손을 잡아끌고 가거나, 다 보는 곳에서 뺨에 입을 맞추는 짓을 하지 않으면 더 좋을 텐데.

그와 서로 안고 있어서 좋은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은 여름이었다.

“더워요.”

그가 푹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놓았다.

“덥다, 소리 안 하고 좀 참으면 안 되나?”

“더운 걸요.”

“냉정한 여자 같으니라고.”

그가 투덜거리자 루시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를 부드럽게 보던 그는 허리를 당겨 그녀의 볼에 키스했다.

“식사 내내 왜 딴생각이야. 무슨 일 있어?”

“그냥… 좀 복잡했어요. 여길 떠날 생각을 하니까 서운하기도 하고.”

“안 가고 계속 여기서 살까?”

그의 말은 굉장히 유혹적이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터무니없는 말씀 마세요. 수도에 가서 하실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데미안 문제를 태자 전하께서 도와주기로 하셨다면서요.”

“녀석 때문에 나보고 가서 일하라는 소리로군.”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일하는 건 당연해요.”

“녀석이 내 수고를 나중에 알아주기는 할까.”

“그럼요. 데미안은 그걸 모를 아이가 아니에요.”

그래 봤자 녀석은 당신 뒤만 졸졸 쫓아다닐 텐데, 그는 중얼거렸다. 요즘도 꾸준히 둘이 편지 왕래를 하기에 궁금해서 녀석이 보낸 편지를 봤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아침부터 밤까지 일어난 모든 일을 적은 보고서였다.

“데미안은 잘 지내고 있지요?”

“녀석에게 받아보잖아.”

“당신이 알아보는 소식도 있을 거잖아요.”

데미안은 여전히 학술원에서 신분 내역을 밝히지 않고 지냈다. 시타는 배경 도움 없이 실력만으로는 가질 수 없는 자리인데 녀석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지켜볼 뿐이다. 휴고는 어지간한 일에 간섭할 생각이 없었다. 사내아이는 강하게 키워야 한다.

데미안은 신분이 불확실하고 나이는 어리고 실력은 워낙 튀고 붙임성 없는 성격이라 그런지 주변에 껄떡이는 녀석들이 있었다. 괜한 시비로 툭툭 건드려 대는 그런 놈들은 데미안이 나이가 들면 더 늘어날 것이다. 그런 것도 전부 녀석이 감당할 몫이었다.

“물론 잘 지내고 있어.”

며칠 전에 데미안이 시비 거는 녀석들과 붙었다가 상대가 다수라 좀 드잡이를 했지만, 그런 건 휴고가 보기에는 문제에도 속하지 않았다. 어디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병신이 된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상대가 다수라도 그런 허접한 꼬마들에게 맞고 다니다니.’

휴고는 못마땅했다. 데미안은 겉만 멀쩡하고 심약한 형제의 아들이 틀림없었다. 자신이었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그놈들 멱을 다 따버렸을 것이다. 데미안에게 ‘학술원에서 사람은 죽이지 마라.’라고 주의시킨 말은 ‘처리하기 까다로우니까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해라.’라는 뜻을 돌려 말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녀석이 제대로 그 말을 이해한 것 같지 않다.

“녀석은 됐고, 당신이나 조심해서 와. 마차 여행 하면서 더위 먹지 않게 조심하고.”

“알아서 챙겨줄 사람 많은데 무슨 걱정이세요.”

루시아는 그의 가슴에 폭 얼굴을 기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다정함은 더 섬세해졌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꽤 많이 좋아한다고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안은 가라앉지 않았다. 수도에 있는 그의 전 연인들, 그의 매력에 빠져 유혹하며 달려들 미인들, 꿈속에서 그의 아내였던 그 여자까지 발 디딜 곳이 없었다.

‘당신이 날 버릴까 봐 겁나요.’

그를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중심을 잡고 서서 기대지 않고 부담을 주지 않는 사랑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 사랑이 정말 존재하기는 할까. 자신의 오만을 그녀는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어딘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녀 주제에는 불가능한 사랑이었다.

서재에서 책을 읽다가 루시아는 명치를 찌르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책을 덮으며 일어났다. 아까부터 답답한 속이 아프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 내내 음식이 목에 넘어가는 것이 힘들더니만. 아무래도 얹힌 것 같아서 하녀를 불렀다.

“소화제를 가져오너라.”

소화제 정도는 상비약이라서 굳이 의사를 부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소화제를 먹고 나서도 계속 울렁거려서 괴로워하다가 결국에는 다 토해내고 나서야 속이 한결 시원해졌다.

“마님, 괜찮으신지요?”

“그래. 속을 비웠더니 편해졌어.”

그는 내일 떠날 준비로 분주한지 하녀를 보내 먼저 자라고 말을 전했다. 그녀도 내일 중에 짐을 싸고 할 일이 많을 것 같아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휴고는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 집무실에서 나왔다. 갑자기 수도로 가려니까 급하게 마무리할 일이 많았다. 붙잡고 하려면 끝이 없었지만, 새벽부터 말을 달려 수도로 가려면 조금은 자두어야 했다.

‘왜 이런 한여름에 죽어서.’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그녀가 긴 마차 여행으로 몸이 상할까 봐 걱정이었다.

‘1년만 더 살다 죽었으면 좋잖아. 노인네가 몸 생각해 적당히 놀 것이지.’

어디다 말하기 수치스러운 사인(死因)이었다. 여름에 죽은 것도, 하필 지금 죽은 것도 불만이었다.

북부에서의 생활이 어느 정도 자리 잡혀 가는 중이었다. 수도로 가면 또 언제 북부에 신경을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굴러가게 내버려두면 지난번 잡아 죽인 놈들과 똑같은 짓을 할 놈이 또 나타날 것이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 일으키면 또 잡아 죽이면 된다.

그의 고민은 수도에 올라가면 발생할 변수였다. 지금까지처럼 아내를 그의 울타리 안에만 가두어둘 수 없을 것이다. 온갖 잡놈들이 그녀에게 접근할 텐데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직 그녀의 마음을 얻지도, 아명조차도 듣지 못했다.

휴고는 심란한 마음으로 간단히 목욕을 마쳤다. 그리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곧바로 그녀의 침실로 들어갔다. 어두운 침실의 침대 위에 누워있는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그녀의 옆에 누우면서 그녀를 품 안으로 안으려던 그는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작은 앓는 소리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 침실에 불을 밝혔다.

“비비안?”

얇은 이불을 들치고 등을 보이며 누워있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몸을 돌렸다. 손에 닿은 그녀의 몸이 뜨거웠다. 이마에 손을 대자 열이 펄펄 끓는데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는 곧바로 하녀를 부르는 줄을 당겼다.

“비비안.”

그는 몇 번이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그녀의 허리 아래 손을 넣어 품으로 안아 들었다. 그녀의 몸이 축 늘어지자 그는 가슴이 섬뜩했다.

“비비안!”

하녀가 들어오는 기척을 느끼자 휴고는 보지도 않고 버럭 소리쳤다.

“의사 불러!”

“예… 예!”

하녀가 허겁지겁 달려갔다. 깊은 잠에 빠져있던 내성이 하나둘 불을 밝히며 깨어났다.

휴고는 그녀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얹었다. 침대 아래에는 그녀의 시중을 전담하는 하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하녀를 추궁했다. 하녀는 풀이 잔뜩 죽어서 저녁 무렵 마님의 상태를 설명했다.

“저녁 드신 것을 모두 토해내시고 일찍 주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의사를 불렀어야지. 그런 식으로 마님 시중을 든단 말이냐?”

“소… 송구합니다.”

서릿발 같은 공작의 질책이 하녀를 매섭게 몰아쳤다. 하녀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자다가 달려온 안나가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나는 하녀를 통해 증상을 전해 들었다.

“마님 의식이 먼저 돌아오셔야 약을 드실 수 있습니다. 물수건으로 전신을 닦아 열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저녁까지만 해도 멀쩡했다.”

“급체하신 것 같습니다.”

“체한 것이라면 왜 이렇게 열이 나지?”

“체증으로도 고열은 물론이고 몸살도 날 수 있습니다.”

안나는 하녀에게 물었다.

“마님께서 두통이 있다고는 하지 않으셨고?”

“두통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체하는데 두통도 있나?”

“마님께서 평소 편두통이 잦으시어 확인했습니다.”

“…편두통?”

순간 분위기가 싸하게 바뀌었다. 안나는 움찔했다.

“잦다니? 얼마나?”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편두통을 앓으시어 약을 지어 드렸습니다.”

“처음 듣는다. 왜 내가 모르고 있지?”

“마님께서 누구나 흔히 앓는 가벼운 질환이라 굳이 전하께 말씀드릴 필요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증상은 언제부터.”

“어릴 때부터 자주 두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크게 염려하실 바는 아닙니다. 편두통은 흔한 증상이고 마님께서는 심하신 편이 아닙니다.”

안나의 설명은 분위기를 바꾸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어진 공작의 침묵은 무시무시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날 무렵이었다. 하녀들이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나무통과 수십 장의 수건을 가지고 들어왔다.

“다들 물러가라. 내가 하겠다.”

휴고는 그녀를 침대에 바로 눕히고 잠옷을 벗겨냈다. 물에 담갔다가 꼭 짠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식은땀으로 젖은 그녀의 몸을 닦아냈다. 손에 닿는 부분이 뜨거울 정도로 온몸에서 열이 났다.

‘대체 언제부터 열이 오른 것인지 모르겠군.’

고열에 의식이 없는 상태가 오래되면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안다.

‘편두통이라고?’

의사 말대로 흔한 증상이고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아무것도 아닌 일을 자신이 모른다는 것이 화가 났다.

이럴 때마다 그는 도무지 허물 수 없는 그녀와의 벽을 느꼈다. 언젠가는 그녀가 마음을 열어주지 않을까 기대하지만 기다림은 너무 길고 지루했다. 그는 짜증과 초조함을 누르고 계속 수건을 바꿔가며 그녀의 몸을 식혔다.

‘시원해…….’

루시아는 뜨거운 불 속에 갇힌 것처럼 헉헉거리다가 몸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을 느끼면서 조금씩 숨을 쉴 수 있었다. 서서히 의식이 돌아오고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그가 보이는데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비비안.”

다급하게 그가 불렀다.

“…휴.”

그의 목소리를 듣자 루시아는 갑자기 울컥했다. 그래서 그를 향해 매달리듯 손을 뻗었다.

“하아…….”

휴고는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얇은 이불을 덮어주면서 그녀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술을 누르고 손가락과 손등에도 입을 맞췄다. 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빗겨주고 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었다.

그의 눈에 가득한 걱정을 보며 루시아는 속이 울렁거렸다. 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파서 힘들 때 지켜보고 걱정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어준 사람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처음이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흘러 툭 떨어졌다.

그가 안색을 굳혔다.

“밖에 누구 없느냐! 의사는 어디 있나!”

줄을 당겨 부르는 것도 잊고 소리를 지르는 그의 손을 잡았다.

‘괜찮을 거야.’

루시아는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도에 올라가서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 평화와 행복이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막연한 믿음이 생겼다.

“휴. 수도로 가면 당신, 바람피울 거예요?”

“…뭐?”

‘이 여자가 정말 많이 아픈가 보다.’라고 휴고는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전혀 믿지 못하는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자 힘이 쭉 빠졌다. 그녀의 마음은커녕 신뢰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절대 안 그래.”

가만히 그를 보던 그녀가 살짝 웃었다.

“그럼 됐어요.”

‘믿어보자.’

그는 다른 여자가 생겨도 속이고 숨어서 몰래 바람피우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당당하게 말을 하면 했지.

‘이 사람. 거짓말을 잘 못하니까.’

루시아는 몇 번이고 허를 찔려서 난처해하는 그를 보았다. 일방적으로 수하들에게 명을 내리면 그만인 그가 거짓말을 할 일은 없어서 아마 거짓말이 서툰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도에 올라가서 정치 싸움을 하려면 거짓말은 필수일 텐데. 괜찮을까.’

휴고의 차가운 가면은 오직 그녀의 앞에서만 깨진다. 그녀는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어느새 꿈속에서 봤던, 하다못해 결혼 전에 마주했던 그의 모습을 까맣게 잊었다.

‘그럼 됐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이야. 되긴 뭐가 돼.’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휴고는 그녀를 짤짤 흔들며 묻고 싶었다.

마침 안나가 들어와서 루시아와 이런저런 증상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동안 휴고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여자가 이렇게 어려운 존재였나. 정말 몰랐다. 여자는 보석만 주면 모두 해결되는 줄 알았다. 지금까지 어떤 문제도 그를 이렇게 고뇌에 빠뜨리지 못했다.

“소화제와 울렁임을 진정시키는 약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드시고 한숨 푹 주무시면 좋아지실 겁니다.”

약 가져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는 계속 수건으로 그녀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여전히 뜨겁게 오른 열은 내리지 않았고, 호흡이 고르지 않았다. 아픈 사람을 붙들고 긴말은 할 수 없어서 휴고는 당장 다른 생각은 다 멀리 치워버렸다.

“왜 이렇게 미련해? 아프면 사람을 불렀어야지.”

“괜찮아질 줄 알았어요.”

“큰일 날 뻔했어. 의식이 없었다고.”

“새벽인가요? 일찍 떠나셔야 할 텐데 제대로 못 주무셔서 어떡해요.”

“지금 그걸 문제 삼는 게 아니잖아.”

그는 그녀에게 화내지 않기 위해 한껏 목소리를 낮추었다. 화를 낼 만큼 그녀가 잘못한 일은 없었다. 단지 그의 마음이 서운할 뿐이었다.

“자주 아프다며.”

“제가요?”

“두통.”

“아……. 그건 그냥 흔한 거예요.”

“완치할 수 없는 건가?”

루시아가 가볍게 웃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중병 같은걸요. 심각하지 않아요. 자주 배앓이하는 사람과 비슷해요. 어쩔 수 없는 거죠.”

“심각하건 그렇지 않건 난 당신이 아픈 것이 싫어.”

“아프지 않게 조심할게요.”

“뭐라는 게 아니라……. 어디 아프거나 다치면 내게 숨기지 마. 당신 남편으로서 그 정도는 알 자격 있어.”

“그럴게요.”

하녀가 약을 가지고 들어왔다. 휴고는 그녀를 안아 일으켜 약 먹는 것을 돕고 보송보송하게 마른 잠옷을 갈아 입혀 주었다. 약을 먹고 루시아는 곧 잠들었다. 그걸로 한밤의 갑작스러운 소란은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날이 채 밝기 전부터 루시아는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약을 먹은 것까지 모두 토해내고 열이 올랐다가 내리기를 반복하며 끙끙 앓았다. 그녀의 열을 내리느라 휴고는 밤을 꼬박 새웠다. 다시 호출되어 달려온 안나에게 휴고는 분노를 표출했다.

“체한 것이라 하지 않았나? 어찌 된 것인가! 약도 넘기지 못하는데!”

북부 귀족들이 보았다면 불 뿜는 용으로 화한다는 타란 공작의 소문을 떠올렸을 것이다.

처음 접하는 공작의 노기에 안나는 손끝이 저릴 정도로 긴장했다. 그리고 성분을 모르고 올렸던 필립 경의 치료약을 마님과 둘만 알기로 한 일이 천행임을 깨달았다. 공작이 그걸 알았다가는 목이 간당거릴 것 같다는 본능적인 예감이 들었다.

“아… 아무래도 단단히 체하신 것 같습니다. 혹시 마님께서 충격을 받으시거나 매우 놀라는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심리적인 요인이 더해지면 체증이 더 심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왕의 죽음을 전한 것 외에는 평소와 다른 일은 없었다.

‘왕이 죽어서 그녀가 그렇게 충격을 받았다고?’

그가 친부에게 아무 정이 없어서 보통 사람이 부모의 죽음에 품는 감정을 간과했다. 그녀는 어머니 이야기는 곧잘 했으나 아버지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이 그녀의 아버지라는 사실조차 그는 잊고 있었다.

그래도 혈육인데 말 못 할 감정의 찌꺼기가 있을지 모른다. 죽음 소식을 전하는 데 너무 배려가 없었다. 자신의 무신경함에 화가 치밀었다.

루시아는 먹으면 토하기만 해서 이틀 내내 보리차만 마시다가 사흘째 되는 날 겨우 묽게 쑨 미음을 먹기 시작했다. 미음을 겨우 반 그릇 정도 비우고 다시 침대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수도로 올라가는 일에 내가 너무 걱정이 많았나 봐.’

이렇게 단단히 체한 건 처음이었다. 서늘한 손이 이마에 닿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그가 옆에 있었다.

“…열은 이제 좀 내렸군.”

그는 수도로 올라가는 일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곁에 붙어있다시피 했다. 미안하고 고맙고 그의 일에 차질이 생길까 봐 걱정이었다.

“이젠 정말 괜찮아요.”

휴고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괜찮다는 소리가 아주 입에 붙었다. 아픈 사람에게 불편한 감정을 내비치고 싶지 않아서 그는 길게 숨을 내쉬어 속을 가라앉혔다.

“미음을 조금 먹었다며. 속은 편안해?”

“네, 이제는 소화되는가 봐요. 울렁거리지 않아요.”

“다른 불편한 곳은? 식사를 그리 못 했는데 어지럽지는 않나?”

“며칠 안 먹는다고 안 죽어요. 그냥 좀 체한 거예요.”

“죽을병이어야만 병인 건 아니지.”

아플 때에도 그녀는 바라는 것이 없었다. 겁날 정도로 열이 펄펄 끓고 먹은 걸 다 토해내며 괴로워하면서 아프다는 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창백한 환자의 안색으로 그를 볼 때마다 언제 수도로 가시느냐 소리만 반복했다.

당신은 정말 독한 여자라는 말을 그는 몇 번이고 속으로 삼켰다.

‘내가 그렇게 의지가 되지 않는 건가.’

그녀를 곁에서 지켜보기가 애가 탔다.

“수도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재촉이 이젠 한계에 달했다. 서신만 줄기차게 보내던 태자가 참다못해 보낸 사람이 오늘 새벽에 들어왔다. 최소한 국장 기간이 끝나기 전에는 수도에 올라가야 했다.

아픈 그녀를 두고 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는 몹시 짜증스럽지만, 아내가 아프다는 핑계를 댈 수는 없었다. 막말로 죽을병에 걸린 건 아니었으니까.

“전 괜찮아요. 가셔야 하잖아요.”

힘없이 말갛게 웃는 그녀를 보며 그의 가슴이 먹먹했다.

전혀 그를 성가시게 하지 않는 그의 아내. 그런데 부디 성가시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녀가 가지 말라고 붙잡으면 다 때려치우고 곁을 지킬 생각이었다. 내 여자가 아파서 누워있는데 왕이 죽은 것 따위 뭐가 대수인가.

“푹 쉬어.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꼬박꼬박 약 먹고 식사도 챙기고.”

“갈수록 잔소리가 느세요.”

“싫으면 걱정하게 하지 마.”

휴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머리에, 이마에, 그리고 바싹 마른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비비안, 정말 괜찮겠어?”

걱정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하는데도 불안한 눈으로 한참 그녀를 보던 그가 결국 돌아섰다.

문이 닫히고 조용해지자 루시아는 앞이 흐릿해져서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베개로 툭 떨어졌다. 아파서 그런가. 마음이 부쩍 약해진 것 같았다.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많이 아프고 힘들다고 투정부리고 싶었다.

“의지할 대상을 잃은 여자는 무너져 버린답니다.”

마담 미셀이 오래전 해준 말이었다. 백작부인 말은 그른 것이 없었다. 제 발로 서지 못하고 그에게 의지하다가는 그가 떠나가면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마담 미셀이 말한 부부 사이 적당한 거리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정확한 자가 있어서 정확히 잴 수 있었으면 좋겠다.

* * *

“이야, 얼굴 한 번 보기 힘들군.”

과장된 반가움을 표하는 사내를 무심히 본 휴고는 별다른 반응 없이 털썩 앉았다. 그 무례함에도 퀘이즈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저 기분 좋게 웃었다.

“영지에 꿀 발라놨나? 공이 정말 1년이 넘도록 틀어박혀 있을 줄은 몰랐어.”

“영주가 영지를 잘 살피면 어차피 전하께도 좋은 일 아닙니까? 아니, 이젠 폐하이신가요?”

“어차피 그리 될 일이지만 그래도 아직 즉위식은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걸 꼬장꼬장하게 따지고 드는 인사들이 있더라고.”

퀘이즈는 어깨를 으쓱했다. 현재 왕권 대행 중인 그는 당연히 왕위는 자신의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태자가 왕위에 오른다는 명분을 뒤집기란 여간해서는 가능하지 않으니까. 호시탐탐 그의 자리를 노리는 배다른 형제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어도 그는 자신 있었다.

퀘이즈는 무심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는 흑발의 사내를 보면서 꽤 오래전, 자신의 충실한 조력자이자 책사였던 베너프 백작의 조언을 떠올렸다.

“그는 맹수입니다, 전하.”

지난해, 병사한 백작은 정말 아까운 인재였다.

“길들지 않는, 길들일 수도 없는 야생의 맹수입니다. 그를 우리에 가두려 하지 마십시오. 배부른 맹수는 코앞의 사슴도 탐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는 자신을 우리에 가두려는 자들을 적대하고자 기꺼이 전하의 곁에 설 것입니다.”

“그의 충성을 기대하지 말라는 소리인가?”

“불안한 충성보다는 확고한 동맹이 백번 낫습니다. 어떤 왕도 타란 공작가의 충성을 얻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타란 공작가는 건드리지 않으면 절대 웅크린 몸을 펴지 않습니다.”

“…그대 말대로라면 맹수를 등 뒤에 두라는 소리가 아닌가. 목줄도 채우지 말고.”

“전하의 등 뒤에서 덤비는 자들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줄 겁니다. 타란은 원래 가진 것이 많습니다. 전하께서 더 주실 필요도 없습니다. 원래 가진 것을 인정만 해주어도 충분합니다.”

승하한 헤세 8세는 공보다 과가 많은 왕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치세는 상당히 길었다. 그가 가장 잘한 일은 타란 공작가를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헤세 8세는 알려진 것보다 현명한 군주였다.

타란 공작가는 이상한 가문이다. 정확히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건국 시에도 이미 타란 가문은 존재했다.

당시 타란은 제논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우고 왕족 대우로 대공의 지위를 받고 대공령 자치권을 가졌다. 거의 형식적이었으나 왕위계승권까지 있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정계에 진출하지 않았다.

절대 왕권을 추구한 두 번째 왕조 때 모든 대공이 대공의 지위를 빼앗기고 공작 위를 받았다. 대공령은 영지로 격하되었다.

당시 대공들은 반발하다가 멸족의 길을 걸었는데 타란은 순순히 그러겠다고 해서 오히려 왕위계승권을 여전히 보장받았다. 그때도 타란은 정계에 관심이 없었다.

세월이 흐르고 수많은 가문이 생멸을 반복하며 제논에 세 번째 왕조 헤세가 집권했다. 타란은 여전히 건재했으며 왕위계승권을 가진 유일무이한 공작이었다. 왕족이 모조리 죽지 않는 이상은 실현 불가능한 거의 형식적인 순위이긴 하지만, 어쨌든 타란 공작은 거의 왕족 대우를 받았다.

그동안 타란 공작가는 정치에는 전혀 나서지 않았으나 전쟁을 통해 존재감을 더 강하게 드러냈다. 타란이 있기에 제논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왕비나 재상을 몇 번 배출한 다른 공, 후작 가문보다 사람들의 뇌리에 타란은 더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타란은 단 한 번도 왕권에 도전하거나 영지를 넓히지 않았다. 건국 시 받았던 영역 그대로였다. 타란의 영지는 꽤 넓지만, 가장 골치 아픈 부족국가와 국경을 마주했다. 야만족의 수없는 침략 방어는 타란 공작가의 몫이었다. 그 밖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선봉에 서서 다 처리해 주었다.

어떤 왕은 그런 타란 공작가의 드러나지 않은 힘을 두려워해서 적대하기도 했는데 그러면 꼭 말년이 안 좋았다. 헤세 8세는 타란 공작가를 오롯이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길을 택했고, 퀘이즈도 그럴 생각이었다.

“신혼 생활은 어땠나? 공작부인이 영지에 틀어박혀 지내는 걸 답답해하지 않았나 보지?”

새신부가 칭얼대면 못 이겨 두어 번은 수도에 올라올 줄 알았다. 그렇게 발길을 딱 끊을 줄이야. 일간에서는 태자와 타란 공작의 유대가 위험해진 것 아니냐고 제멋대로 추측하기도 했다.

퀘이즈는 반대파가 타란 공작을 영입하려고 무수히 접근함을 알지만 내버려뒀다. 공작은 권력의 향방에 양발을 딛고 줄타기하는 짓을 할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귀찮으니까. 그런 거 안 해도 타란은 건재하고, 타란은 정계에 관심이 없다.

“조용한 걸 좋아해서 그러지 않더군요.”

“별나군.”

같은 누이인데 그렇게 다른 건 어머니가 달라서인가. 퀘이즈의 동복누이 캐서린은 파티광이었다. 아마 드레스와 보석, 그것을 자랑할 파티가 없으면 살지 못할 것이다.

눈만 높아서 결혼할 생각은 하지 않고, 더 나이가 들면 고를 사람도 없다는 말을 들은 척하지 않고 있다. 하긴 누구와 결혼해도 그 허영을 어찌 맞추고 살지 오히려 남편 될 쪽이 걱정이었다.

“공, 결혼 한 번 더 안 할 텐가?”

누이는 타란 공작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공작이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파티광 누이는 일주일이나 두문불출했다.

왕족을 제외하면 일부일처가 법으로 되어있으나 타란 공작은 빠져나갈 구석이 있었다. 공작 정도 되면 한두 명 후실을 들여도 법을 들먹이며 뒷말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누이가 정실이 아닌 후실로 들어간다 해도 퀘이즈는 상관없었다. 타란 공작가 정도라면 불만 없다.

“헛소리하시려고 저 불렀습니까?”

안 그래도 퀘이즈를 보자 앓고 있을 그녀가 떠올라 심란하던 참이었다.

수도에 가면 바람피울 거냐는 그녀의 말이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때지 않는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곳이 수도 소문이라 저도 모르는 소문을 그녀가 듣고 오해하면 어쩌나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퀘이즈의 말은 끓는 기름에 물을 부은 격이었다.

“해보는 말이지. 아무리 공이 결혼했어도 아마 방금 내가 한 제안은 수없이 받을걸.”

휴고가 과하게 정색하자 퀘이즈는 냉큼 발을 뺐다.

“그런 득 될 것 없는 짓을 안 합니다.”

“득 될 것 없다니. 삼처사첩은 사내들의 꿈이지.”

“그 꿈은 전하께서나 이루고 사십시오. 왕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군요.”

퀘이즈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타란 공작은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고 참 애매했다. 여자들은 끊이지 않으면서 잘라낼 때는 가차 없었다.

“그 후계 아들 말이야. 정말 그럴 셈인가?”

“그럴 셈입니다.”

“아니, 이젠 결혼했잖아. 앞으로 아이가 태어날 텐데. 아무리 공의 장자라고 해도 그렇지.”

그래 봤자 사생아 아닌가? 라고 퀘이즈는 입안으로만 삼켰다.

타란 공작의 혼외자 아들이 차기 공작 위를 잇는 데 아무 잡음이 없도록 적극 지지해 주는 것. 그게 퀘이즈가 타란 공작을 정계로 끌어올 수 있었던 조건이었다.

혼외자가 타란 공작의 작위를 이어받는 일은 간단한 듯하면서도 어려웠다. 암묵적인 사회적 관습을 깨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퀘이즈는 타란 공작을 얻기 위한 조건이라면 아주 쉽다고 생각했다. 퀘이즈 자신이 적자가 아니라 그런지 그런 문제에 고루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그가 결혼하자 퀘이즈는 조금 떨떠름했다. 얼굴 한 번도 본 적 없는 반쪽 누이지만 그래도 누이라고, 누이의 자식이 허수아비 취급 받을 일이 괜히 기분 좋지는 않았다.

“…언제부터 제 사생활에 그리 관심이 많으셨습니까? 하실 말씀이 그런 거라면 가겠습니다.”

“아, 알았네. 사람하고는. 결혼해도 여전히 뻣뻣하구먼.”

퀘이즈는 타란 공작의 사생활에 아주 관심이 많았지만, 이쯤에서 일단 접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와 이후 국정의 향방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중추적 인물들이 더 가세해서 이어진 논의는 비공식적이지만, 참여한 사람의 면면을 살피면 거의 국무회의나 다름없었다.

꽤 길게 이어진 논의를 마치고 일어나며 휴고는 아까부터 계속 아는 척하고 싶어 미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적발 사내의 어깨를 탁탁 두드려 주었다.

“수고 많았다.”

그저 좋다고 적발 사내, 로이 크로틴은 히죽 웃었다. 휴고가 가버리고 나서도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몇 번이고 문 쪽을 바라보는 로이를 보다 못해 퀘이즈가 말했다.

“크로틴 경, 정말 내 기사가 될 생각 없어?”

“없는데요.”

처음에 타란 공작이 기사를 호위로 붙여준다고 했을 때는 그 출신이 본디 평민이라는 말에 조금 언짢았다. 더구나 예의 모르고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타란 공작의 측근만 아니었다면 진즉 호위고 뭐고 내쳤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진가가 드러났다. 지난 1년 동안 크로틴 덕에 목숨을 구한 적이 부지기수였다.

날고 기는 암살자들을 크로틴은 마치 벌레 잡듯이 때려잡았다. 그의 엄청난 실력을 알게 된 퀘이즈는 크로틴을 자신의 기사로 들이려고 틈날 때마다 꾀었지만, 크로틴은 생각해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대체 이유가 뭐야? 내 기사가 되면 지금 받는 것보다 많은 봉록과 권력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게 전혀 탐나지 않나?”

“별로 관심 없어요.”

“대체 공작이 무얼 주기에? 기사로서 그를 존경하기 때문인가?”

“좀 더 현실적인 이유죠. 주군이 비무를 해주시거든요.”

“비무? 그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죽을힘을 다해 덤벼도 상대가 다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대는 주군뿐이라서요. 그런 재미는 딴 데서 못 찾죠.”

“…그렇군”

퀘이즈는 살짝 질렸다. 크로틴은 퀘이즈의 기사 중 누가 덤벼도 수십 합을 넘기지 못하는 대단한 실력자였다. 그나마도 적당히 완급을 조절해 준다는 게 빤히 보였다.

제 주변에는 늘 최고의 기사만 있다는 자부심을 느꼈던 퀘이즈의 충격이 컸다. 그리고 곧 인정했다. 자신의 기사들이 약한 것이 아니라 크로틴이 무시무시하게 강했다.

‘그렇게 타란 공이 강하다고?’

퀘이즈는 타란 공작이 전쟁터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을 수도 없이 직접 보았다. 대단하다는 건 알았지만, 양 떼 무리 속에 달려든 범처럼 압도적이라 딱 집어 어느 정도 실력이라고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타란 공이 누군가와 비무하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군.’

타란 공작이 검을 들 때는 적을 죽일 때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참 무시무시했다. 무인은 대개 힘을 과시하기 좋아하는데 타란 공작은 기사임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검을 들지 않은 타란 공작과 마주하면 가끔은 그가 기사라는 걸 잊게 된다.

“비무하면 누가 이기나? 경도 이겨본 적은 있겠지?”

로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태자 앞에서 거리낌 없는 무례한 태도도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했다.

“이겨요? 제가요? 그게 제 인생 목표인데요.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단 말인가?”

“주군은 비무도 사실 잘 안 해줘요. 귀찮다고. 죽이지도 못할 거 뭐 하러 힘 쓰냐고 하시더군요.”

“…….”

“어떨 때는 검을 뽑아서 상대도 안 해주시죠. 검집 채 휘두르면 조심해야 해요.”

“…왜?”

“기분이 별로라는 거니까요. 그럴 때는 비무고 뭐고 그냥 막 패요.”

“…그 대접을 받고도 거기가 좋은가?”

“그야 전 주군이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니까요.”

“패는 것이?”

“그게 신뢰의 증거죠. 주군은 때리는 귀찮은 짓을 하느니 그냥 죽이거든요.”

더 할 말이 없었다. 의외의 수확은 있었다. 타란 공작은 알려진 것보다 상당히 성질이 더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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