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32화 (33/77)

32장 진실 & 거짓 (3)

찻잔을 입가에 가져가던 필립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눈동자에 떠오른 기광이 빠른 순간에 사라졌다.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흥미롭군. 그런 환자가 있나?”

“예, 아예 무월경 상태가 되었어요. 좀 장기 복용을 했다더군요.”

그동안 안나가 공작부인의 치료법을 찾기 위해 구매한 약초 서적만 수백 권이었다. 시중에 나온 책이란 책은 다 긁어모아 밤을 새워 읽었다. 그뿐만 아니라 로암에 거주하는 의사들을 수소문해서 부지런히 만나러 다녔다. 그러나 삼엽쑥을 먹고 월경이 멈춘다는 증상 자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안나는 차라리 직접 먹어서 실험을 해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미 폐경기에 접어들었다. 부작용을 모르니까 다른 사람을 실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 우연히 환자를 접한 일이 놀랍고 허탈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빈민가를 뒤지고 다닐 것을 그랬다.

안나는 필립이 새삼 존경스러웠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대단한 의술을 익히셨나요? 책에도 나와있지 않은 내용을 대단히 많이 아시잖아요.”

알면 알수록 필립의 의술이 놀라워서 어느 날은 직접 물어보았다.

“방랑기가 있어 돌아다니다 보니까 주워들은 잡다한 것이 많은 것뿐이지.”

필립은 겸양했지만 안나는 그가 오지를 찾아다니며 의료 봉사를 한 노력의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 위대한 의사였다.

“필립. 여행을 다니며 많은 환자를 치료했다고 하셨지요? 제가 너무 부끄러워요. 진정한 의술은 마음으로 행하는 것인데 제 의술의 미천함은 탐욕의 대가로군요.”

“안나, 자네 의술은 훌륭해. 의욕 높고 환자에게 진실하지. 자네가 여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서 안타깝군.”

“과한 말씀이세요.”

안나는 웃음을 물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만약 그때 안나가 필립의 눈을 봤더라면 기이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의 눈동자가 괴괴한 빛으로 일렁거리며 조급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환자가 누군가?”

안나는 망설였다. 환자의 비밀 엄수는 의사의 의무였다. 그러나 안나는 겨우 찾아낸 유일하고 결정적인 단서를 놓칠 수 없었다. 그녀는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으나 쫓기는 심정이었다.

‘괜찮아. 그는 공작가 주치의고 대단한 의술을 지녔어. 빈민들을 찾아다니며 의술을 펼칠 정도로 진정한 의사지.’

왜 그가 감시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공작가에 해를 끼칠 사람이었다면 단지 감시 정도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을 굳혔다. 그래도 선뜻 마님을 구체적으로 입에 담기는 껄끄러웠다.

“사실 저는 그 증상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 처음에 필립을 만나러 왔어요.”

공작부인 주치의가 다른 의사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환자가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안나는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필립에게 고개만 끄덕였다.

“혹시… 초경을 시작할 때부터 복용하셨나?”

“아시는군요!”

안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치료법도 알고 계시나요?”

“다행히 알고 있네.”

“세상에!”

그토록 찾아 헤맨 치료법이 바로 옆에 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솔직히 조언을 구했으면 그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래도 그런 수고에 시간을 쏟은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책을 들이판 노력은 그녀의 실력에 보탬을 주었다.

“환자는 어쩌다 삼엽쑥을 복용하셨나?”

“어릴 때 무지하여 여인 몸의 변화를 제대로 알지 못하셨다는군요. 어린 마음에 지혈되는 약초라고 해서 초경을 수습하려 하셨대요.”

“얼마나 오래 복용했기에?”

“반년 정도 복용했더니 그 후 계속 월경이 없다고 들었어요. 정말 치료가 가능하지요?”

“좀 더 들어보게. 이 증상은 치료되려면 특이한 조건이 필요하지. 처녀가 아니어야 하고, 둘 이상의 남자와 교합한 경험이 있어서는 안 돼.”

안나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증상 자체가 괴이하다 싶더니 치료 조건도 괴이했다. 안나는 공작부인을 치료한 경험 덕에 공작부인의 순결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은밀한 사생활이며 명예가 걸렸다. 잠시 망설였지만 의사가 환자 몸 상태를 민망해하면 치료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의사로서의 신념을 선택했다.

“문제없어요. 환자는 얼마 전 혼인했고, 초야 때 처음 관계를 맺었어요.”

안나는 고집스럽게 환자가 누군지 정확히 칭하지는 않았지만 피차 서로 알아듣고 있었다.

“그럼 치료가 되는 건가요?”

필립은 시선을 조금 내리고 아무 말이 없었다. 안나는 생각에 잠긴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기다렸다. 사실 필립은 격동에 휩싸인 자신을 겨우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는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가능하네.”

“마님을 당장 뵈러 가요. 치료법을 찾았다고 하면 기뻐하실 거예요.”

당장 일어날 것처럼 안나는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입으로 직접 환자가 누군지 거론한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필립은 그녀에게 손짓으로 진정하라고 말했다.

“이 치료법은 우리 가문에서만 내려오는 비전 중 하나라네. 정확한 조제법은 물려받은 노트를 찾아봐야 하는데 당장 가지고 있지 않아. 다른 곳에 두었거든. 자리를 비우고 다녀와야 할 것 같네.”

안나는 안타까웠다. 겨우 잡은 실마리를 놓칠까 봐 조급증이 일었다.

“오래 걸리시나요? 저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자네를 데려갈 수는 없어서 미안하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밀 장소라서.”

“제가 너무 성급했군요. 무리한 요구를 해서 죄송해요.”

“너무 그리 서둘지 말게. 틀림없이 치료법을 주겠네. 그러니 그 사이에는 환자에게 알리지 말게. 괜히 기다리게 할 필요 없지.”

“그렇지요. 언제쯤 돌아오세요?”

“늦어도 일주일 안으로는 돌아올 것이네.”

안나가 돌아가고 필립은 두 손을 깍지 껴서 마주 잡고 고개를 떨어뜨린 채 소파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응접실에서 그림자처럼 앉아있는 인영은 누가 봐도 섬뜩할 만큼 스산했다.

“크흐흐흐…….”

필립이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미친 것처럼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끝이 아니었어! 아직 끝나지 않았어!”

온화한 표정을 잃지 않고 늘 감정을 절제하는 평소의 필립이 아니었다. 눈동자에 핏발이 곤두서고 이마에 혈관이 불거졌다.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표정에 집착과 광기가 덕지덕지 묻어났다. 반쯤 포기 상태로 잠들어있던 집착이 가능성을 발견하자 거세게 들끓었다.

전 공작이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고 새로운 공작이 작위를 승계한 후 어느 날, 필립은 괴한에게 납치를 당했다. 기절했다가 깨어나 보니 지하 감옥이었다. 하루를 꼬박 갇혀있었다. 그리고 나타난 사람은 타란 공작이 된 휴였다.

“늙은이. 네놈이 애새끼 만드는 법을 안다며? 말해봐. 그 저주받을 방을 달달 뒤졌는데 그건 없더라고.”

공작이 되고 나서 처음 만난 휴는 변해있었다. 뿌리 깊은 증오와 혐오가 눈동자에 넘실거렸다. 필립은 그 원인이 ‘저주받을 방’이라 부른, 타란 혈족 비밀의 방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비밀의 방에 들어가셨군요.”

“그랬지. 정말 재밌더군. 죽은 공작부인이 배고 있던 계집애가 장차 내 애를 낳을 예정이었어. 참 안타까운 일이지. 미래의 내 아내가 세상 빛도 못 보고 제 어미 배 속에서 고깃덩어리로 변해 버렸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얼굴이나 확인해 둘 걸 그랬어. 공작부인 배가 제법 불렀으니까 형태는 있었을 텐데 말이야.”

말과 다르게 공작은 구역질 나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대단한 비밀이랍시고 휘갈겨놓은 문서들을 보니까 공작부인은 아들을 낳아야 하니까 평범한 여자는 들인 적 없던데 이번은 내 어미가 죽어서 그랬나? 그래서 딸을 낳으면 예서 키울 수 없을 테니 빼돌렸겠군.”

필립은 긍정처럼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공작부인이 딸을 낳으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은 것처럼 처리해 밖에서 키울 계획이었다. 공작은 제가 생각한 추리를 계속 늘어놓았다.

“그 계집애랑 나랑 나이 차가 있으니 계속 날 혼자 두지는 않을 테고. 뒈진 영감탱이는 미래 내 아들의 신부가 될 딸을 낳아줄 여자와 날 결혼시켰겠지. 그런데 그러면 아들을 낳아줄 귀한 타란 혈족의 여자가 정부인이 아니게 되잖아. 아들은 사생아가 되고. 그런 흠집을 낼 리가 없어.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딸을 낳아준 내 아내는 얼마 안 가 죽게 되었을 거야. 사고든 병이든. 밖에서 잘 자란 내 누이는 내 후처로 들어와 내 아들을 낳겠지. 어때? 내가 잘 때려 맞췄나?”

“…….”

“그런데 어쩌지? 내 이복누이가 다 죽어 버렸으니 영원히 내 아들이 태어날 일은 없을 텐데.”

몹시 유쾌해하는 공작을 보며 필립은 돌아가신 휴고 도련님의 핏줄이 잉태되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지금의 공작이라면 아는 즉시 모자를 죽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딸은 낳을 수 있지. 더러운 네놈들은 내 딸과 날 붙이는 짓도 서슴없이 할 거야. 말해, 늙은이. 이 괴물 일족이 어떻게 혈통을 질기게 이어왔는지. 난 이 땅에 내 피를 이은 더러운 오물을 남길 생각 없으니까.”

필립은 공작이 삼엽쑥에 관한 사실을 알 경우 무슨 짓을 할지 예측했다. 불가능하다 해도 세상의 모든 삼엽쑥의 뿌리를 뽑는 일을 시도할 것이고, 정히 여자가 필요하면 뒤탈 없는 창기를 구해 한 번 품고 죽이거나 같은 여자를 두 번 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는 타란 혈족을 이을 가능성이 사라진다.

“여기 처박혀 평생 햇빛 보기 싫으면 입 다물고 있든지.“

필립은 가문의 비전은 절대 누설할 수 없다고 버티다가 공작의 협박을 못 이기는 척 거짓을 늘어놓았다.

“아이의 아버지가 될 타란 혈족 사내의 피를 내어 1년 이상 꾸준히 복용시킨 여자의 처녀를 취해야 합니다.”

그 터무니없는 말을 공작은 믿었다. 그가 얼마나 타란 혈족을 끔찍한 괴물로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본인의 자발적 도움이 없으면 임신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 공작은 그 후 필립을 철저히 없는 사람 취급했다. 무관심한 틈을 타서 필립은 일의 진행을 멈추지 않았다.

타란 혈족은 대대로 핏줄의 광기를 이어받았다. 그건 살육이나 성욕의 충동을 일으킨다. 공작은 그 정도가 심했고, 형제가 죽은 이후에는 더 심해졌다. 한창인 십 대 후반 언저리에는 살인하거나 계집을 안지 않고는 잠들지 못할 정도였다.

필립은 고아나 걸식하는 어린 계집아이들을 사서 삼엽쑥을 먹여 준비된 몸을 만들었다. 공작 입맛에 맞추려고 철저히 방중술을 가르치고, 공작이 처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가문 비전에 따라 처녀혈이 나오지 않도록 조치했다.

때마침 터진 전쟁은 기회였다. 필립의 접근이 훨씬 쉬웠다. 필립은 준비된 여자에게 파과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진통 효과 있는 마약을 먹여 공작의 막사에 들여보냈다. 살육의 광기에 흥분한 공작은 들이는 여자가 누군지 관심 두지 않고 취했다.

필립의 시도는 늘 실패했다. 임신하려면 한 여자와 꾸준히 관계를 해야 했지만 공작은 싫증을 잘 냈다. 필립이 입막음을 위해 실패한 여자를 죽인 수가 수십이 넘어갔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를 무렵부터 공작은 날뛰던 자신을 조금씩 절제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실컷 피를 봐서 갈증이 얼마간 해소된 것일 수 있고, 스물 중반으로 향하는 나이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화려한 귀족 여자들에게 취미가 들려 그들만 침대로 들였다. 필립이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고아처럼 귀족 여자를 구할 수는 없었다.

죽은 공작이 남긴 딸이라도 있으면 미래 데미안 도련님과의 자손을 노려보겠으나 불행히 타란 혈족의 여자는 모두 죽었다.

폐기되었으나 필립이 죽은 공작 모르게 살려둔 아가씨는 데미안을 낳고 죽었고, 미래의 공작부인으로 키워지던 아가씨는 불의의 낙마 사고로 죽었다. 죽은 공작이 새로 맞아들인 공작부인 태에서 자라고 있던 아가씨는 휴고 도련님 손에 모친과 함께 죽었다.

데미안 도련님의 탄생은 하늘의 도움이었다. 그러나 데미안 도련님에게 신부가 없으면 타란 혈족은 끝난다. 공작의 협조 없이 아가씨를 얻을 길이 요원했다.

그런데 애써 구하지 않아도 준비된 조건을 갖춘 분이 공작부인이 되었다. 확인을 위해서 안나에게 조건이 필요하다고 거짓말을 했다. 완벽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이었다. 하늘은 아직도 타란 혈족의 건재함을 굽어살피고 있었다.

‘머지않아 어여쁜 신부가 태어나실 겁니다. 데미안 도련님.’

그는 어둠 속에서 짙은 미소를 지었다. 필립은 이미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한 다양한 계획을 세워두었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숙원. 그의 핏속에 잠시 잠자고 있던 집요한 집착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하루 걸러 한 번씩 안나가 지어 올린 약을 먹는 일은 이제 루시아의 일상이었다. 보통 저녁을 먹고 한두 시간 후에 하녀가 가져왔다.

루시아는 습관적으로 약그릇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가 놀라며 반사적으로 입을 떼어냈다.

“…바닐라 향?”

다시 약그릇에 코를 바싹 들이밀고 냄새를 맡았다. 틀림없었다. 바닐라 향이다. 꿈속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도 찾지 못한 치료법이었다. 기적처럼 만난 떠돌이 의사는 가문의 비전이라고 했다. 이렇게 쉽게 찾아낼 수 있는 약이 아니었다.

루시아는 하녀를 불러 안나를 데려오라 했다.

“안나, 오늘 들인 약이 지금까지와 다르더군요.”

“예, 새로운 치료약입니다.”

“안나가 찾아낸 방법인가요?”

“…예.”

안나가 누군가의 조언을 받았다고 대답했다면 루시아는 꿈속의 떠돌이 의사와 안나가 만났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나가 찾아냈다는 말은 믿을 수 없었다.

“안나, 나는 약초에 흥미가 있어 잠시 공부를 한 적 있어요.”

그러면서 루시아는 약초의 이름 세 가지를 나열했다. 모두 성분이 강한 편에 속해서 환자의 체질에 따라 살피고 처방에 조심해야 하는 약초들이었다. 의사라면 상식에 가까운 지식이었다.

“그 약초들을 함께 배합해서 약을 지어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나요?”

안나는 뜬금없는 질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닌 지식에 기초해서 성실하게 답했다.

“그것들은 절대 함께 배합해서는 안 되는 약초들입니다. 각각 성질이 다르고 강해서 같이 복용하면 독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요? 그럼 안나는 내게 독을 먹이려고 이 약을 가져왔군요.”

“예?”

독살! 안나의 몸이 차갑게 식으며 팔다리가 뻣뻣해졌다. 자그마한 눈앞의 여인이 갑자기 거대한 강철 벽처럼 느껴졌다.

공작부인은 평소에 아랫사람에게도 적당한 예의를 갖추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공작부인은 안나가 주치의가 되지 않았다면 평생 구경도 하지 못할 어마어마한 고위 귀족이었다.

‘내가 공작부인 심기를 거슬린 것이 있나?’

등에 한기가 들었다. 독살 시도의 의혹을 받은 일개 주치의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았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의심을 품게 한 것이 문제였다.

“이 약에서 바닐라 향이 나는 건 알고 있어요?”

“예, 마님.”

“왜 바닐라 향이 나는지는 알아요?”

“…….”

“내가 말한 세 가지 약초를 배합해서 약을 달이면 바닐라 향이 나요. 안나는 몰랐던 것 같군요.”

“…예?”

“안나가 찾은 치료법이라 했어요.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요?”

루시아는 꿈속에서 떠돌이 의사가 주고 간 치료법으로 월경을 시작한 후, 치료법에 흥미가 생겼다. 약초를 사러 갔을 때 함께 쓰면 큰일 날 약재가 있다는 약재상의 말이 계속 기억에 남았다. 필립이 가문의 비전이라는 노트를 찢어주면서 짓던 쓸쓸한 표정도 자꾸 생각이 났다.

특히 약에서 나는 바닐라 향이 궁금했다. 그래서 호기심에 약초 공부를 시작했다.

그녀의 공부는 전문적인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저 필립이 주고 간 처방전에 쓰여있는 약초의 종류와 효능만 익혔다. 그리고 처방전의 약초를 하나씩 빼면서 배합하는 실험을 반복했다. 그녀는 상식적으로 함께 복용하지 않는 세 가지 약초를 섞어 달이면 바닐라 향이 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안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안나는 약에 어떤 약초가 들어갔는지 몰랐다. 필립이 건네준 약재는 곱게 빻은 가루 상태였다.

“최소 월 1회 이상. 정기적으로 꾸준하게 월경이 시작할 때까지 복용하면 된다네. 복용법은 간단하지.”

“뭐가 들어갔는지 모르는 약을 환자에게 올릴 수 없어요. 처방전도 함께 주셔야지요.”

“우리 집안의 비전이네. 누설할 수가 없어.”

“필립. 저는 의사로서의 필립의 양심과 실력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느 환자가 아니에요.”

“안나. 그러면 내가 직접 환자에게 설명하겠네.”

“그럴 수가 없어요. 필립은 마님께 접근 금지 상태잖아요.”

안나는 치료법을 알았을 때는 흥분해서 잊었던 사실이 필립이 약을 지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떠올랐다. 예전에 집사는 치료법을 얻어도 안나의 치료라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필립의 존재조차도 마님께 언급하지 말라고 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여쭙지 않겠지만, 필립을 마님과 만나게 해드릴 수는 없어요.”

“…내 목을 걸고 장담하지. 정히 걱정되면 자네가 먹어 봐도 괜찮네. 보통 사람이 먹으면 아무 효능이 없는 약이니까.”

“장기 복용이라 하셨잖아요. 장기 복용해야만 문제가 있을 수 있지요.”

“안나, 내가 환자에게 해를 입힐 약을 지을 것 같은가?”

안나는 필립에 대한 신뢰와 의사로서의 양심, 치료하고 싶다는 욕망 속에서 치열하게 갈등했다. 직접 일주일간 약을 먹으며 몸에 이상이 없는지 살폈다. 그러다가 공작의 호출을 받았다.

타란 공작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안나를 불러서 공작부인의 치료가 어찌 되어 가느냐고 물었다. 그러면 안나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치료법을 찾는 중입니다.”

공작은 더 추궁하지 않았고, 알았다는 대답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치료법을 가진 상태로 공작의 부름을 받았더니 압박을 느꼈다. 거금을 받고 주치의 노릇을 하고 있으면서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리고 필립에 대한 신뢰는 안나의 마음속에 대단히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결국, 안나는 약을 공작부인에게 올렸다.

‘내가 미친 짓을 했구나.’

루시아가 약의 성분을 추궁하고 나서야 안나는 깨달았다. 의사가 확신 없는 약을 환자에게 처방했다. 환자가 공작부인이라는 문제 이전에 의사로서 치명적인 판단착오였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마님. 사실은 제 치료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독은 아닙니다. 제가 일주일을 먹으며 확인했습니다.”

안나의 노력과 고뇌가 느껴져서 루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나가 내 상태를 상담했을 정도로 대단히 신뢰한 모양이군요. 누군가요?”

“죄송합니다, 마님. 누군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약을 처방해 준 쪽에서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나요?”

루시아가 생각하건대 꿈속의 떠돌이 의사는 공을 탐할 사람이 아니었다.

“…….”

필립의 존재조차도 말할 수 없는 안나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이 약을 먹을 수 없어요. 믿을 수 없군요. 이해하지요?”

“예, 마님. 제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날 치료하기 위한 마음에서 그랬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다음부터 거짓말은 하지 마요.”

“예, 마님.”

루시아는 안나가 치료법을 찾으면 거부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에게 화가 나있었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알고 나서 마음이 바뀌었다.

그는 지금 아버지가 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면 태어날 아기는 물론 모두에게 비극이었다. 루시아는 그가 바라지 않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다. 태어난 아이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휴고는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고, 루시아는 아버지가 방치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둘 다 정상적인 가정의 결핍을 겪었다. 부족한 그들이 만나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행복할 수도 있어.’

아쉬움은 있었다. 그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고 싶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었다. 꿈속의 고단했던 삶은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꿈이 아니었다면 루시아는 이렇게 긴 인내심을 가지고 먼 미래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안나는 필립에게 약을 거부한 공작부인의 뜻을 전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필립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허허……. 바닐라 향이 나는 약초 배합이라니……. 그걸 안다고?”

필립은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날 공작부인과 만나게 해주게. 그건 틀림없는 치료법이야.”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아시잖아요. 대체 무슨 잘못으로 감시를 받고 있는 거예요?”

“개인적 문제야. 의술과는 관련이 없네. 자네는 이대로 마님의 치료를 포기할 셈인가?”

안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로서는 방법이 없어요. 필립 말씀대로 필립이 직접 마님을 뵙고 설명해 드릴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만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을요.”

“안나, 나는 환자를 앞에 두고 포기할 수 없네.”

“…그럼 공작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여쭈어 볼게요.”

타란 공작은 지금 영지 시찰로 로암에 없었다. 필립은 기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공작이 돌아오면 절대 단둘이 만나게 해주지 않을 것이다.

공작은 삼엽쑥에 대한 비밀을 모르지만, 필립의 처방을 받은 후 공작부인이 임신하면 머리 좋은 공작은 단번에 필립이 수작을 부렸다고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지 못하게 손 쓸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공작부인의 임신에 필립이 개입된 사실을 공작은 몰라야 한다. 그러려면 필립은 공작부인을 만나야 했다. 일단 만나기만 하면 구슬려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환자의 뜻이 우선일세. 환자가 아이를 원하는지가 가장 중요해. 공작 전하께는 이미 혼외자로 들인 후사가 있다는데 공작께서 마님이 낳을 아이를 원하실 것 같은가? 귀족은 비정하다네. 우리 같은 보통 사람과 달라. 아내에 대한 애정과 후사는 철저히 구분하지. 마님도 자식이 있어야 노후를 기대할 것 아니겠나. 자네는 마님이 이대로 영영 자식을 안아보지 못할 일이 안타깝지 않은가?”

필립의 차분하게 안나를 설득했다. 필립에게 적극적으로 마음을 열고 있는 안나는 쉽게 설득당했다.

‘지금은 두 분의 사이가 좋지만.’

본디 귀족들이란 그랬다. 결혼하고서도 남자나 여자나 각자 애인 따로 두고 즐기는 것이 그들의 생태였다.

남는 건 자식뿐이다. 결혼하자마자 사생아를 아들로 입적해야 하는 공작부인이 가엷다고 고용인들은 뒤에서 숙덕거렸다. 안나의 생각도 그들과 같았다.

“제가 마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안나는 이것이 마님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마님, 일전에 말씀드린, 치료법을 알려준 의사가 마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그래요? 만나볼게요.”

“하온데 마님. 그 의사는… 사실 공작가 주치의입니다.”

“공작가 주치의?”

“집사가 일전에 저를 불러서 말했습니다. 공작가 주치의는 요주의 감시 인물이며 마님께서 만나서 안 되고, 존재도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공작 전하께서 내리신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안나의 표정과 말투가 비장했다. 꿈속의 은인을 다시 본다고 기대했던 루시아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럼 안나는 지금 큰 잘못을 하고 있군요. 내게 언급하지 말라고 했다는 명을 어겼어요.”

“알고 있습니다. 책임을 지겠습니다. 하지만 마님. 그 의사는 반드시 마님을 치료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님을 뵙고 설명해 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책임? 어떻게 책임을 지겠다는 건가요?”

“…주치의 자리를 사직하겠습니다. 제가 너무 부족한 것 같습니다.”

“…….”

루시아는 초췌한 안나의 안색을 살폈다. 고민을 많이 한 표정이었다.

“안나, 지난번 약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안나가 본분만 지켰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에요.”

“제가 주제넘은 짓을 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다만 마님께서 치료하시어 어여쁜 아기를 안아 보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루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안나만큼 순수한 열정을 지닌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안나를 좋아했다. 그런데 사람이 요령이 없었다.

“날 만나고 싶다는 공작가 주치의 이름이 무엇이지요?”

“…필립 경입니다.”

“경?”

“남작 작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떠돌이 의사 필립이 공작가 주치의였던가. 작위까지 가진 공작가 주치의가 무슨 이유로 방랑하고 있었을까. 꿈속에서 봤던 필립은 떠도는 생활이 익숙해 보였다. 잠시의 여행자가 아니었다.

‘그때 타란 공작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이가 들어서는 아예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사교계 소식은커녕 세상 돌아가는 일도 잘 몰랐다. 꿈속에서 가장 평온했던 시절이었지만, 새삼 꿈속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더 관심을 두고 부대끼며 살았으면 좋았을걸.

‘왜 그이는 공작가 주치의가 날 만나지 못하게 했을까.’

고작해야 주치의였다. 보기 싫은 자라면 아예 근처에 얼씬 못하게 추방하면 되었다. 굳이 감시의 눈을 심는 번거로운 방법을 택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공작가 주치의면 공작가에 오래 몸담았다고 하던가요?”

“집안 대대로 공작가 주치의라고 들었습니다.”

집안 대대로라는 말을 듣자마자 루시아는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에게 모두 말할 수가 없어. 내가 죽어서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일들이야.”

‘그가 지키고 싶은 비밀. 그걸……. 그 주치의가 아는구나.’

그녀의 감이었다. 이해는 가지 않았다. 정말 그렇다면 주치의는 이미 그의 손에 죽었어야 했다. 그녀가 뭔가 더 추측하기에는 단서가 너무 적었다.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는 그녀가 주치의 필립과 만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는다. 만나더라도 그가 없는 지금을 기회로 그가 모르게 만나서는 안 된다고 그녀의 감각이 경고했다.

“만나지 않겠어요.”

안나가 안타깝게 탄식했다.

“안나. 안나는 의사로서, 그리고 공작가 사람으로서 큰 잘못을 했어요. 의사로서 내게 한 실수는 내가 용서할 수 있어요. 그러나 공작 전하의 명을 어긴 것은 그럴 수 없군요. 사직은 받아들이지요. 다만, 지금 당장은 아니에요. 아마 곧 수도로 올라가게 될 거예요. 수도로 갈 때까지만 맡도록 해요.”

그리고 루시아는 제롬을 불렀다.

“제롬, 주치의 안나가 오늘 내게 공작가 주치의가 날 만나기를 원한다는 말을 전했어요. 하지만 제롬이 예전에 경고했다더군요.”

제롬의 날카로운 시선이 침통하게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안나에게 잠시 닿았다가 다시 마님을 향했다.

“예, 마님. 주인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그분의 명이라면 그럴 이유가 있겠지요. 나는 공작가 주치의를 만날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이 일은 내가 직접 그분이 돌아오시면 말씀드리겠어요.”

“예, 마님.”

“안나는 내게 사직 의사를 표했지만, 내가 반려했어요. 수도에 올라갈 때까지만 주치의 자리를 맡을 거예요. 그러니 추가로 안나를 추궁할 필요는 없어요.”

“예, 마님.”

제롬의 태도는 왕 아래 무릎을 꿇고 준엄한 명을 받는 기사처럼 근엄했다. 마님의 현명한 결단에 제롬은 늘 감탄했다. 이분이야말로 타란 공작을 안에서 든든히 받치는 가모 자리에 부족함이 없었다. 제롬은 자신이 모시는 두 분 주인님을 진정으로 존경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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