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31화 (32/77)

31장 진실 & 거짓 (2)

한동안 쉬었던 루시아는 사교 활동을 재개했다. 그전처럼 가벼운 티파티였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지금껏 하던 것처럼 두루 넓게 사람들을 초대했다. 파티 깨기의 주도자 몇 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빠짐없이 초대 명단에 넣었다.

루시아는 지난 정원 파티에서 협박을 섞어 공작부인의 위세를 보였다. 압박했으니 회유할 차례였다. 그녀는 북부 사교계에서 군림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다는 존재감은 심어둘 필요가 있었다.

“공작부인. 지난번처럼 규모 큰 파티는 언제 또 계획이 있으신가요?”

“그러게요. 그때 전 초대받지 못해서 다음에 꼭 참석하고 싶었거든요. 그때는 저도 소공자님을 소개받을 수 있을까요?”

“아쉽게도 그 아이는 지금 로암에 없답니다. 공부하러 갔어요. 하지만 다음에 기회가 되면 소개하도록 하지요.”

루시아는 웃으며 대답하면서 슬쩍 눈을 돌렸다. 좀처럼 대화에 참여하지 못하고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귀부인들의 안색을 살폈다. 그들은 지난 정원 파티의 참석자들이었다.

이번이 세 번째 티파티인데 사람들 태도가 다 비슷했다. 정원 파티에 참석했던 쪽과 그렇지 않은 쪽, 둘로 나뉘었다. 참석했던 쪽은 모두 어디 불편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오기 싫었으나 억지로 참석한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루시아에게 인사를 건네는 표정에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였다. 루시아는 그들을 나무랄 생각이 없었다. 병사의 명령 불복종이 죽음인 것처럼, 보통의 여자들은 사교계 거물의 행사에 반박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지난 정원 파티 사건을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과할 정도로 눈치를 살폈다.

그에 비해 정원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던 쪽은 오히려 더 과시하는 것처럼 데미안을 화제로 올렸다. 거리낌을 보이기는커녕 은근히 소공자라는 호칭을 빼놓지 않았다. 갑자기 뒤집힌 귀부인들의 태도가 놀라웠다.

‘그이가 정식 입적했다고 공표해서 그런 건가.’

짐작 가는 구석은 그것밖에 없었다. 역시 공작의 위엄은 대단했다.

루시아는 정원 파티 이후 북부 사교계가 엄청나게 술렁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웨일즈 백작부인은 물론이고 당시 정원 파티에 참석했던 사교계의 드센 노부인들이 하나같이 칩거 중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런가 보다 했다. 노회한 노부인들이니 아무래도 공작부인의 자존심을 건드린 일이 걸려서 알아서 몸을 사린다고 생각했다.

타란 공작이 반기를 든 지역의 영주들을 식솔까지 모조리 잡아 죽였다는 소문이 슬그머니 사교계에 퍼지는 중이었다. 북부 귀족들은 타란 공작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해있었다. 그 와중에 터진 정원 파티 사건은 모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공작부인을 망신 주었다고 타란 공작이 노여워하여 모두 불려가 크게 치도곤당했다고 했다. 안주인 체면을 가주 본인의 자존심과 연결 짓는 유형이 있다. 공작 부부의 금실 관련 소문이 사실이건 아니건 타란 공작은 최소한 이런 예에는 속한다는 증명이었다.

본래부터 타란 공작가는 폐쇄적이었다. 대대로 타란 공작은 수도 정계 진출은 물론이고 북부 귀족들과의 친밀한 관계에도 관심 없었다. 존재는 알지만 볼 수는 없는 지배자였다.

타란 공작이 전쟁으로 북부에 없을 때는 북부 귀족들은 보이지 않는 지배자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실력 발휘로 실제로 사람이 죽고, 사교계까지 흔드는 일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다급해졌다. 그들은 지배자의 심경을 파악해서 안전을 보장받고 싶었다.

현재 공작과의 유일한 사적인 끈은 사교 활동을 하는 공작부인뿐이었다. 귀부인들은 남편, 혹은 아버지로부터 특명을 받고 공작부인의 티파티에 참석했다. 루시아가 세 번째 티파티를 열기 직전에는 초대자 명단을 확보하려고 아수라장이었다.

주변이 태풍으로 다 날아가고 있는데 태풍의 핵인 그녀는 고요했다. 그나마 그런 분위기를 소상히 알려줄 케이트는 입을 다물고 지켜보는 중이었다. 딱히 어떤 일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분위기만 들썩거리고 있어서 뭐라 말해주기가 애매했다. 루시아에게 ‘당신 남편이 무서워서 다들 벌벌 떨고 있어요.’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공작부인께서는 날이 갈수록 미모가 더욱 빛을 발하시는군요.”

누군가 흘린 아부를 시작으로 여자들 사이에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어머나. 전 처음 뵐 때부터 공작부인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더랬지요.”

“호호호. 외모만이 사람의 전부는 아니지요. 공작부인께서는 외모 이상으로 더 고운 심성을 지니고 계신 걸요.”

여자들 사이에 불꽃 튀는 경쟁이 붙었다. 뻔뻔하고 혀가 매끄러운 귀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나서서 공작부인을 추앙하고, 차마 나서지 못하는 소심한 여자들은 끼어들 적절한 때를 찾지 못해 우물쭈물했다. 전쟁이었다.

루시아는 그들의 과열된 분위기를 대수롭지 않게 보며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아부 몇 마디에 기분이 좋아 흐느적거릴 만큼 그녀는 뭘 모르는 철부지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은 꿈속에서 아주 질리도록 보았다.

꿈속에서 그녀가 중심이 된 적은 없었다. 변죽 좋은 성격이 못 되어 주변에 둘러싼 추종자가 되지도 못했다. 다만, 멀리서 보면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관찰하며 재미있어 하거나 한심해했다.

‘공작부인 자리가 참 대단하긴 하네.’

루시아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귀부인들도 하나둘씩 입을 다물었다. 공작부인이 겉보기와 다르게 말랑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 있는 자들은 점차 알아차리고 있었다.

“좋은 말들을 해주니 참 감사하군요. 그보다는 요즘 사교계에 재미있는 일은 없나요?”

“제가 말씀드릴게요. 얼마 전에…….”

“그런 건 재미 축에 끼지도 못하지요. 제가 듣기로…….”

이제 여자들은 앞 다투어 사교계 소식에 열을 올렸다.

‘오늘 티파티 분위기는 영 이상한걸.’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후에 단장 엘리엇이 보고서를 제출했다. 지난번 전염병으로 오인한 독버섯 사건 관련 내용이었다. 사건은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문제의 상단을 잡아서 진상을 파악해 보니까 악의는 없었다. 가지고 있던 버섯은 모두 회수해서 폐기 조치했다. 중과실을 인정해 책임자는 처벌하고 상단에는 거액의 벌금을 물렸다.

“다른 피해 마을은?”

“초반에 발견한 두 마을 이후 아직은 없습니다. 상단 행로를 대부분 조사했으니 앞으로 추가 피해는 없을 것 같습니다.”

휴고에게 올라온 보고서는 사건 마무리를 해도 되겠느냐고 확인을 요청하는 문서였다. 문제의 상단은 조사를 진행 중이라 발이 묶여있었다. 휴고가 결재하면 상단은 벌금과 보상금을 지급하고 다시 상단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상당한 지급금을 해당 상단에서 두말없이 내기로 한 터라 더 문제 삼을 일은 없었다. 다만, 한 개의 이름이 휴고 눈에 띈 것이 거래 허가가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상단의 불운의 시작이었다.

“…웨일즈? 상단주가 웨일즈 백작가인가?”

“예.”

소유주가 누구건 상단의 일은 상법으로만 해결함이 원칙이었다. 상거래 문제는 돈으로 해결하면 그만이고 상단이 파산하지 않는 이상 소유 가문에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휴고가 상단주 이름을 이제 알게 된 것도 관련지어 관심을 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휴고의 눈동자에 어두운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녀가 서럽게 울고불고한 정원 파티 사건의 원흉에게 그는 깊은 원한을 품었다. 아내의 당부 때문에 나서지 못한 일이 두고두고 분했다. 건수 하나 잡으면 질기게 물어뜯어 주마 내내 벼르고 있었다.

그는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당시 정원 파티 일을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었다. 당연히 주동자가 웨일즈 백작부인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그 늙은 뱀에게 어떻게 경고를 해주나 하던 중에 기가 막힌 건수가 잡혔다. 그는 근엄한 표정으로 명했다.

“이번 사건은 이대로 가벼이 넘길 수가 없다.”

“하오면.”

“아무래도 이번 일에 어떤 의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해당 상단의 과거 거래 명세와 납부한 세금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조사하라.”

“철저히라 하시면…….”

“아주 탈탈. 먼지가 나오도록 털어.”

엘리엇은 음모나 계략에 둔감한 전형적인 기사였으나 주군께서 뭔가 노리는 바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뭔지는 몰라도 그 상단은 주군께 단단히 찍혔다. 어쩐지 동정심이 들었다.

“예.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공작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수하들은 비교적 공작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공작은 절대 호방한 호인이 아니었다. 대개의 일에 무심하지만, 하나 찍어서 파고들기 시작하면 집요하고 끈질긴 편에 가까웠다. 다시 말해 뒤끝은 길고도 길었다.

데미안이 학술원으로 떠난 지 한 달 반이 지났다. 데미안이 가자마자 바로 편지를 써서 보냈던 루시아는 약 20여 일 후 답장을 받았다. 다시 써서 보낸 편지에 두 번째 답장을 오늘 받았다. 봉투를 여는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용이 가득한 석 장의 편지지가 나왔다. 어머니께, 라고 시작하는 편지 맨 첫 장을 보고 루시아는 부르르 몸을 떨며 편지를 꼭 끌어안았다.

차근차근 편지를 읽어가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편지 내용은 무슨 보고서 같았다. 수업은 무엇을 들었고, 밥은 무엇을 먹었고, 누가 무슨 얘기를 했고. 감정 표현이 전혀 보이지 않는 딱딱한 내용을 읽으며 루시아는 즐거웠다. 그 아이의 생활이 눈에 보였다.

날이 추워지고 있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십시오. 데미안 올림.

짧지 않은 편지가 끝나자 그녀는 크게 아쉬웠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야.”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데미안에게 보내려고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님, 손님이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레이디 밀튼이 왔다면 하녀는 손님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손님이라니, 누구?”

“웨일즈 백작부인입니다.”

루시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연락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무례를 저지르면서까지 백작부인이 찾아온 이유를 모르겠다. 되돌려 보낼까 하다가 무슨 용무인지 들어보고 쓸데없는 소리 하면 쫓아내자고 결정했다.

하녀가 차를 내왔다. 루시아는 제롬을 부르지 않았다. 웨일즈 백작부인에게는 제롬이 타주는 맛있는 차를 대접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 싸늘한 태도로 앉아있는 루시아와 다르게 백작부인은 주눅이 들어있었다. 못 보는 사이에 얼굴이 꽤 상했다. 감기라도 앓은 건가. 루시아는 지난 정원 파티 때와 사뭇 달라진 안색이 의아했다.

“어쩐 일인가요, 부인.”

“갑자기 이렇게 뵙기를 청해 결례를 범했습니다. 공작부인께서는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평안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솔직히 백작부인에게 유감이 있습니다. 처음 마련한 규모 있는 파티였어요. 그런 식으로 끝내는데 부인이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는 걸 부인하진 않겠지요?”

“무슨 드릴 말씀이 있겠습니까. 늙으면 때론 사리 판단 능력이 떨어지지요. 너그러이 봐주십사 이리 찾아뵈었습니다.”

일부러 강하게 나갔던 루시아는 백작부인이 저자세로 나오자 차갑게 굳히고 있던 표정을 풀었다.

“오늘 용건이 그것인가요?”

“예. 사죄드리러 왔습니다.”

웨일즈 백작부인이 이렇게 순순히 숙일 줄은 몰랐다. 나이 많고 사교계 거물이라 루시아는 정면충돌보다는 조금씩 서서히 압박을 가하려고 했다.

‘뭔가 이상한데…….’

유난스럽게 쩔쩔매는 다른 귀부인들 태도가 마음에 걸렸는데 웨일즈 백작부인까지 이렇게 나오자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용건이 그것뿐이라면, 알겠습니다. 부인의 사과는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하지만 오늘은 길게 이야기 나누고 싶지 않군요.”

“아……. 저…….”

“더 할 말이 있나요?”

“공작부인께… 간절히 청할 일이…….”

부탁이라니. 정말 뻔뻔하기도 하지. 루시아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웨일즈 백작부인은 그녀를 대단히 순하고 여리게 본 모양이었다. 루시아는 대책 없이 착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부분에서 꽤 차가운 면이 있었다.

“나는 사사로이 청탁을 받지 않습니다.”

“청탁이 아닙니다, 공작부인. 부디 공작 전하의 진노를 풀어주십시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백작부인은 가문에서 소유한 상단이 현재 처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설명은 길고 자기 변명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복잡한 이야기 속에서 루시아는 핵심을 파악했다.

“상단은 잘못을 저질렀고, 벌을 받은 겁니다. 공작 전하께서 공적으로 처리하신 일을 지금 사적인 감정으로 연결 짓는 겁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작 전하께서 공과 사가 철저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말고요. 다만, 조금 엄한 분이라 약간의 자비를 베풀어 주십사 청을 드리는 것입니다. 늙은 것이 마음이 급해 이리 경우 없이 달려온 것을 부디 용서하세요.”

웨일즈 백작부인이 돌아가고 루시아는 생각에 잠겼다. 원래 처벌받는 자의 입장에서 너그러운 벌은 없다. 들어보니 아무 죄 없는 사람을 트집 잡은 것이 아니었다. 치죄는 북부의 질서를 관장하는 타란 공작의 권한이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 때문에 그들을 더 과하게 벌을 주고 있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자만심이 넘치지 않았다.

‘그는 아랫사람들에게 상당히 엄하구나.’

그녀에게는 그런 면을 전혀 보이지 않아서 생각하지 못했다. 귀부인들이 요즘 자신의 눈치를 자꾸 살피는 것도 아무래도 그래서인 모양이었다. 근래에 그가 몇 번 엄격한 모습을 보일 일이 있었나 보다. 지나가듯 한 번 그에게 물어봐야겠다. 그녀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져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정원에서 산책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녀는 남는 시간에 뭘 할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날 때마다 하는 뜨개질에 푹 빠졌다.

데미안에게 연말 및 새해 선물로 보낼 목도리였다. 부지런히 떠야 얼추 시간을 맞추어 보낼 수 있었다. 정원 가꾸기나 산책을 하지 못해서 남는 시간을 모두 목도리 완성에 쏟아부었다.

목욕을 마치고 그를 기다렸으나 평소보다 시간이 꽤 지나도 그가 들어오지 않았다. 연말이 다가오자 그는 부쩍 바빠졌다. 늦게 침실에 들어오거나, 때로는 하녀를 통해 먼저 자라는 말을 전할 때도 있었다. 그러면 그는 닷새에 하루를 그날로 대체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곤 했는데, 루시아는 그 억지를 들어주지 않았다. 들어주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가 늦을 것 같아서 루시아는 하녀에게 뜨개질 바구니를 가져오라고 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모양을 갖추어가는 목도리를 짜기 시작했다.

“그게 뭐지?”

어느새 휴고가 다가와 그녀의 손에 들린 뜨개질 거리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뜨개질에 정신을 빼앗겨 그가 들어오는지도 몰랐다. 루시아는 얼른 정리해 바구니에 담았다.

“뜨개질이에요. 목도리를 뜨고 있어요. 데미안에게 보내려고요.”

털실로 짠 목도리. 절대 그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그는 추위를 타지 않아서 한겨울에도 특별한 방한복을 입지 않았다. 하물며 아이들이나 하는 털목도리라니.

아마 저것을 선물받을 데미안도 두르고 다니려면 고역일 것이다. 붉은 바탕에 흰색으로 무늬를 넣은 그녀의 선택은 그녀가 얼마나 데미안을 어린애 취급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저걸 겨우내 하고 다닐 데미안 녀석이 좀 안되었다. 저걸 녀석이 정말 하고 다니는지 심어둔 호위를 통해 확인하리라. 그는 사악한 마음을 품었다.

목도리가 갖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는 그녀가 털실 꾸러미를 정리해 담은 바구니를 침대 밑으로 내리는 동작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데미안을 보냈고, 덤으로 여우 새끼도 치웠는데 생각만큼 그녀는 온전히 그의 것이 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딴 데 정신 쏟는 곳이 많은지 모르겠다. 녀석에게 편지라도 오면 며칠은 들떠있는 모습이 확연했다.

‘그 녀석 어머니이기 전에 내 여자라고.’

그는 데미안에게 쏟는 그녀의 관심이 못마땅했다. 딱히 뭐라고 할 수는 없어서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더구나 그녀는 그에게 아직도 아명을 알려주지 않았다.

‘난 내 비밀을 말해줬잖아. 전부는 아니어도.’

꼭 반대급부가 있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왜 데미안 녀석이 아는 것을 나는 몰라야 하는데.’

그 꼬마보다 자신이 못하다는 건 절대 납득할 수 없었다.

“뜨개질은 어릴 때 배운 건가?”

휴고는 요즘 틈만 나면 슬쩍슬쩍 그녀의 어린 시절을 물었다. 기어코 그녀에게서 직접 아명을 듣고 말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대놓고 묻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말해 주면 그녀가 자신에게 어느 정도 마음을 열었다는 증거가 될 것 같았다.

“네. 그래서 솜씨가 별로 좋지 않아요. 어머니 옆에서 건성으로 배웠거든요.”

“어려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고 했지?”

“네. 궁에 들어가기 전까지요.”

“그럼 당신 어머니는 어린 당신을…….”

그는 조금 주저하다가 노골적인 질문을 던졌다.

“보통……. 뭐라고 불렀지? 어머니가 당신을…….”

이건 반칙이 아니다. 대놓고 아명이 뭐냐고 묻지는 않았다.

“어릴 때는 이름보다는 아가, 귀염둥이, 딸, 그렇게 부르곤 하셨죠.”

그가 어머니의 정을 느끼고 자라지 못해 보통 다른 사람의 모자 관계가 궁금한가 보구나. 루시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녀는 미소 지었다.

오늘도 그의 유도 신문은 실패했다. 그는 그녀 몰래 한숨을 쉬며 낙담했다.

“아, 당신께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저와의 약속 잊지 않고 계시죠? 정원 파티 일로 당신이 나서지 않기로 한 약속이요.”

“잊지 않았어.”

“정말이시죠?”

“물론이지.”

그는 당당했다. 그는 양심에 거리낄 어떤 짓도 하지 않았다. 봉신들을 불러 모아 집안 단속 잘하라는 말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윗사람으로서 조언이었다.

그의 대답이 거침이 없어서 루시아는 그의 말을 믿었다. 그녀는 웨일즈 백작부인보다 남편이 훨씬 믿음직했다.

“이상한 말을 들었는데 헛소문이었나 봐요.”

“무슨 소문?”

“당신이 정원 파티 문제로 웨일즈 백작가 상단 사업에 타격을 주신다는, 그런 비슷한 말이었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당신이 얼마나 공과 사를 철저히 구별하는 분인데.”

“…물론이지.”

그는 정말 거리낄 것이 없었다. 독버섯 사건을 일으킨 문제의 상단을 이중 삼중 철저히 조사하고 있으나 그건 공적인 문제였다. 상단 주인이 웨일즈 백작가라는 사실은 그저 덤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시원스럽게 당당할 수 없었다. 그의 떨떠름한 표정을 루시아는 포착하지 못했다.

얼마 후, 웨일즈 백작가문의 상단이 끈질긴 조사에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원래 부과된 징수금은 그대로였지만, 해가 바뀌기 전에 다시 상단 활동을 재개하게 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공작부인의 뒤에 타란 공작이 버티고 있다는 소문이 북부 사교계에서 정설로 굳어지고 있었다.

부관이 심각한 얼굴로 고했다.

“태자 전하. 델링 후작이 정식 항의서를 보내왔습니다.”

퀘이즈는 혀를 차며 건네는 문서를 대충 훑었다. 주절주절 몇 장을 넘어가는 긴 항의서의 결론은 후작의 명예를 모욕한 기사 크로틴을 처벌하도록 내달라는 요구였다. 얼마 전, 델링 후작가 기사들이 로이에게 덤볐다가 몇 개월은 운신 못하게 반죽음된 사건이 있었다.

“떼로 덤볐다가 진 놈들이 뭘 이리 말이 많아. 한 명 상대로 다구리 치는 건 제대로 된 기사의 도라던가?”

시정잡배가 구사하는 은어를 번번이 내뱉는 태자의 말투는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부관은 표정 관리를 하며 말을 이었다.

“저들이 문제 삼는 것은 결투 자체가 아니라 크로틴 경의 언사입니다.”

“저들이 건드리고 싶은 건 크로틴 경이 아니라 나겠지.”

델링 후작은 태자의 반대쪽 세력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였다. 이번 일로 기사 크로틴을 태자에게서 떼어낼 수 있다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여럿이었다. 호위 기사의 방패막이 되어주지 못한 태자의 권위를 흠집 낼 수 있고, 뛰어난 실력의 호위를 떨어뜨려 태자의 빈틈을 노릴 수 있으며, 타란 공작이 내준 호위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으니 두 사람의 유대에 틈을 벌릴 수 있다.

퀘이즈는 바로 옆에 서있는 로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로이는 제 얘기를 하는 줄 빤히 알면서도 남 얘기를 듣는 것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부관은 가끔 로이의 빤질빤질한 면상을 후려갈기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크로틴 경. 기사들 팬 건 뭐라고 안 해. 그건 잘했어. 죽인 것도 아니고 덤볐다 진 놈들이 날뛰는 것은 적반하장이지. 근데 그런 말은 왜 했나?”

“무슨 말이요?”

“기사들보고 후작의 개라고 그랬다며.”

“그렇게 말 안 했습니다. 주인 발이나 핥는 개라고 했지.”

퀘이즈가 끄응 신음했다.

“그 말이 그 말이지. 그래서 델링 후작가 기사들이 덤벼든 것 아닌가. 후작을 모욕했다고.”

“그게 왜 모욕인지 모르겠는데요. 그냥 사실을 말한 겁니다. 기사면 주인의 개지요. 개면 개답게 주인에게 꼬리치고 말 잘 들으면 되는 겁니다. 애먼 시비 걸고 다니기에 한마디 해준 겁니다.”

태자뿐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당황했다.

“기사는 주인의 개? 크로틴 경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가?”

“아무렴요. 전 주군의 개입니다. 짖으라면 짖죠. 왈왈.”

퀘이즈가 폭소를 터뜨렸다. 배를 잡고 테이블을 두드리며 웃어댔다. 그러나 로이 외에 태자를 호위하는 다른 기사들의 표정은 완전히 일그러져서 로이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눈물까지 날 정도로 웃다가 한참 만에 진정한 퀘이즈가 부관에게 말했다.

“들었지? 자네가 크로틴 경이 모욕할 의사가 없었다고 잘 써서 항의 서한은 되돌려 보내.”

“…예.”

확실히 저놈은 미친놈이다. 아니, 미친개인가? 부관은 기사 크로틴은 가급적 건드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니까.

“타란 공이 부럽군. 이런 충성스러운 기사를 두고.”

태자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자신의 기사들을 스윽 스쳐보았다. 잠시 눈이 마주친 기사들이 허공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한데 타란 공은 북부에 틀어박혀 아예 수도에 올 생각을 안 해. 하다못해 공작부인이라도 한 번쯤은 올 줄 알았는데.”

결혼한 지 1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새해를 맞이한 지 두 달이 훌쩍 넘었다. 수도에 살던 공주님이 어찌 그렇게 잘 버티고 있는지 신기했다.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서 혼자만이라도 수도에 잠깐씩 들를 줄 알았다.

직접 비비안 공주를 봤던 자들이 증언한 인상착의를 통해서 공주가 절세미인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문이 사실인가,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정말 그렇게 미녀라 공이 꼭꼭 숨겨두나? 아니면 취향인가? 하지만 과거 교제했던 여자들 보면 전혀 다르던데.’

비비안 공주 찾기는 아주 작은 성과가 있었다. 비비안 공주가 시녀 행세를 하며 외출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더 파고들기는 시간과 돈에 대비해 건지는 것이 없어서 그만 포기했다. 적이라면 샅샅이 뒤져 보겠지만, 아군을 상대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수도에 오면 만나게 될 테니까.

‘시녀인 척 외출이라. 제법 재밌는 짓을 할 줄 알잖아.’

퀘이즈는 있는 줄도 몰랐던 누이동생에게 호감이 생겼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수도에서 파비안은 오늘도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그나마 그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수도에 떠도는 소문을 취합하는 작업이다.

“호오, 이건 또 신선하네. 타란 공작 영지의 성 지하에 악마를 부르는 소환진이 있다고?”

파비안은 낄낄대면서 공작에게 올릴 보고서에 원색적인 소문 전부를 적어 넣었다. 파비안은 수하들로부터 올라온 보고서도 살폈다. 보고서를 들추다가 표정이 굳었다. 여류 소설가 근처에 심어둔 수하가 올린 내용이었다.

공작부인이 되신 공주님의 유일한 지인이라 파비안은 수하를 시켜 정기적으로 놀만을 살폈다. 혹시라도 공작부인과의 관계를 알아챈 누군가가 접근해서 위해를 가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여류 소설가가 공작부인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는지도 확인했다. 즉 감시 겸 보호였다.

“팔콘 백작부인이 여길 왜 찾아갔지? 한두 번이 아니군.”

보고서를 보면 방문 목적은 여류 작가 소설의 팬이라고 했다.

‘이유가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파비안의 날카로운 감이 말했다.

‘아무튼, 괜히 껄끄러운 여자란 말이야.’

그는 예전부터 백작부인이 꺼림칙했다. 세 번 결혼했고, 남편이 다 죽었다는 과거사의 불길함이 싫은 건 부차적 이유였다. 때로는 이유 없이 싫은 사람이 있다. 파비안에게 팔콘 백작부인이 그런 사람이었다.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방법도 있지만, 파비안은 이 내용을 작성하는 보고서에 끼워 넣었다. 그가 유능한 가장 큰 이유는 상황 판단이 빠르기 때문이었다. 공작부인에 관련한 소식을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된다고 그는 판단했다.

공작께서 신혼 놀이를 하는 중이 아니라는 것을 그도 이제는 안다. 공작이 한 여자와 10개월 넘도록 한 침대를 쓰다니. 이건 전대미문이었다.

공작은 바람둥이가 아니었다. 파비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건 그냥 본능적인 욕구 해소였다. 공작은 여자들과 최소한의 감정 교류조차 없었다. 그런 공작이 한 여자에게 정착할 가능성을 생각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파비안은 인생의 신비로움을 느꼈다.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안나와 필립의 꾸준한 교류가 계속된 지 몇 개월이 훌쩍 지났다. 안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필립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지긋한 나이에도 학구열이 높은 안나의 열정을 필립은 기특하게 생각했다.

일주일에 한 번. 안나와 필립은 빈민 의료 봉사를 나갔다. 언제나처럼 뒷골목의 후미진 곳에 간이 치료실을 차려놓고 밀려드는 환자를 받았다. 고되지만 안나는 온갖 다양한 증상으로 찾아오는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실력이 부쩍 늘었다.

“글씨, 이 멍청한 것이 약 만들라고 말리는 삼엽쑥을 처먹었다는 것 아니겄소.”

괄괄한 중년 부인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간이 진료대는 두 개의 탁자를 조금 간격을 두어 그 사이를 얇은 천으로 벽을 만들었다. 그래서 조금 목소리를 높이면 옆에서 소리가 다 들렸다.

안나는 벽 너머에서 들리는, 필립을 찾은 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알고 먹었나. 엄니가 나물 말려놓은 것 있대서 그건 줄 알았지.”

“눈깔이 삐었지. 그게 왜 나물로 보여!”

“그니까 왜 그걸 부엌에 뒀냐고!”

모녀는 주변이 떠나가라 서로에게 목소리를 높이며 옥신각신했다. 삼엽쑥! 안나는 진료를 멈추고 천으로 가린 벽에 시선을 고정했다. 차분한 필립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탈이라도 생겼는가?”

“아이고, 선생님. 이것이 그걸 처먹고 달거리를 안 한다지 않수. 계집애가 계집 노릇 못 해 어찌하나 밤에 잠을 못 자겄소.”

“쳇, 난 안 하니 좋더만.”

“미친것아! 애 못 낳는 석녀가 되고 싶어?”

안나는 벌떡 일어났다. 진료를 받던 환자의 당황한 표정이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안나는 천으로 만든 벽을 들추고 옆 칸으로 들어갔다. 안나에게 잠깐 시선을 준 필립이 환자에게 말했다.

“이렇게 난리를 치면 진료를 봐줄 수 없네. 조용히 하고. 환자는 삼엽쑥을 얼마나 먹었지?”

“한 끼 반찬 정도? 무쳐서 먹었거든요.”

옆에서 모친이 ‘미친 것, 그 쓴 걸 나물이라고 신나서 처먹다니. 내가 사람이 아닌 식충이를 낳았지. 어이구, 내가 못살아.’ 하고 계속해서 구시렁거렸다.

“첫 달거리는 언제 했고?”

“재작년에 했든가?”

“삼엽쑥을 계속 먹은 건 아니지?”

“아뇨.”

“그럼 일시적 현상이니 다음 달에는 다시 달거리를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모친께서도 걱정할 것 없소.”

도통 믿지 못해서 몇 번이고 다짐을 받은 모녀 환자가 끝까지 소란스럽게 굴다가 퇴장했다.

“무슨 일인가, 안나. 문제 있는 환자라도?”

“…아닙니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무료 진료를 마무리하고 날이 저물어 돌아온 두 사람은 필립의 거처에서 차를 마셨다.

“아까… 삼엽쑥을 복용한 환자 말입니다. 전 처음 보는 증상인데 필립은 그런 걸 다 아시는군요. 삼엽쑥의 지혈 효과는 알지만, 그걸로 월경이 멈춘다니. 상처로 나는 피와 월경은 전혀 다른 구조로 이루어지는 현상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드물지만 가끔 발생하는 환자라네. 가난한 자들이 굶주리다가 구별 못 하고 먹는 일이 있지. 하지만 걱정할 건 없어. 일시적 현상일 뿐이고 몸에 별 이상도 없으니까.”

“그럼 혹시 삼엽쑥을 먹고 월경이 아예 멈추는 증상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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