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30화 (31/77)

30장 진실 & 거짓 (1)

‘데미안이 갔어.’

루시아는 시무룩했다가 ‘어머니.’라고 불린 기억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제는 듣지 못하잖아.’

그녀는 다시 시무룩해졌다. 루시아는 데미안을 보내고 온종일 극과 극의 감정을 오가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었다.

“마님, 목욕물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하녀는 벌써 세 번째 고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아까부터 속치마 차림으로 침대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알았다.’라고 대답만 하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계속 딴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마님을 자꾸 재촉하는 일이 조심스러워서 하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옆에 서있었다.

갑자기 강한 힘이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리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들어왔는지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늘한 붉은 눈동자가 그녀의 안색을 샅샅이 살폈다.

휴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녀를 보자 가슴이 덜컹했다. 혹시 울고 있나? 숙이고 있는 그녀의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표정이 말짱한 것을 보고 얹힌 것 같은 불편함이 사라졌다.

‘그가 왜 벌써 왔지?’

루시아는 눈을 돌려 하녀를 찾았다. 그러나 하녀는 이미 휴고가 들어올 때 냉큼 사라지고 없었다. 하녀의 재촉을 몇 번 건성으로 들어 넘긴 일이 기억났다.

‘아직 씻지 못했는데.’

루시아는 그걸 말하려고 그의 손에 잡힌 턱을 돌려 벗어났다. 하지만 말을 꺼내기 전에 그의 얼굴이 다가와 입술을 포갰다.

그는 큰 동작으로 덥석 그녀의 입술을 삼키며 양어깨를 잡아 그대로 넘어뜨렸다. 그녀가 놀라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는 단번에 그녀의 위로 올랐다. 한 손이 속치마를 끌어올려 허벅지 위까지 올리고 두 다리 사이에 무릎을 넣어 오므리는 다리를 벌렸다.

진한 키스가 이어졌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놔주지 않았다. 입안을 가득 점령한 그의 혀가 능란하게 움직이며 자극했다. 루시아는 순식간에 그와의 키스에 빠져들었다. 그의 어깨를 두드리던 그녀의 손에서 점차 힘이 빠졌다. 그러나 그의 손이 팬티를 끌어내리자 루시아는 정신이 들었다.

“응!”

그녀가 거센 반항의 움직임을 보이자 흥분한 하체를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바짝 붙이던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빨아들이던 그녀의 말랑거리는 혀를 놔주고 입술을 부드럽게 핥으면서 입술을 뗐다.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흐려진 눈빛의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갈급한 욕망으로 일렁거렸다.

“왜.”

“목욕을 아직…….”

“상관없어.”

“전 상관있어요.”

“그래서. 지금 이 상태에서 목욕하러 가겠다고?”

“네.”

그녀의 표정에는 반드시 지금 당장 목욕하러 갈 거라는 의지가 충만했다. 그가 한숨을 흘렸다.

“당신 일부러 이래?”

“뭘요?”

“…아니야.”

정말 가지가지로 사람 미치게 한다. 그는 몸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그녀를 안아 들어 마치 짐이라도 드는 것처럼 어깨 너머로 걸쳤다.

“꺄아! 휴?!”

그는 한쪽 팔로 가슴께에서 버둥거리는 그녀의 허벅지를 감싸듯 안고 한 손은 어깨에 걸쳐진 그녀의 허리를 누르면서 성큼 걸었다. 그녀가 몸부림쳐 봤자 그의 발걸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가만있어. 씻고 싶다며.”

그는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끓는 물을 받아 부어둔 욕조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와 욕실은 자욱했다. 욕실 문을 열며 들어설 때 안에 있던 하녀가 놀라 달아났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난 몰라.’

하녀의 뒷모습을 보며 루시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는 욕실 바닥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루시아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오히려 그녀의 속치마를 훌렁 벗겨냈다.

“꺄악!”

순식간에 팬티 한 장만 입은 상태가 되어 루시아는 두 팔로 가슴을 가렸다. 그는 한 걸음 떨어진 상태에서 팔짱을 끼고 천천히 그녀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침대 위에서가 아니라 세워놓고 보는 것도 나름대로 절경이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몸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마치 눈으로 애무하는 것 같아서 루시아는 온몸이 후끈거렸다. 그녀는 주춤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눈썹이 스윽 올라가며 멀어진 만큼 다가왔다. 그러자 그녀가 또다시 물러났다. 그렇게 몇 번 뒷걸음질 치자 그녀의 등 뒤로 벽이 닿았다. 더는 도망칠 곳 없는 그녀 앞을 그가 가로막았다. 옆으로 빠져나갈 수도 없도록 팔을 뻗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에게 안기는 것이 처음도 아닌데 지금의 상황과 자신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서 루시아는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시선을 떨어뜨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보며 휴고의 입 끝이 올라갔다. 정말 이 여자는 가지가지로 그를 미치게 한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살짝 옆으로 틀면서 그녀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그리고 다시 입술에만 살짝 입 맞추는 가벼운 키스를 했다. 그다음에는 조금 더 길게 입술을 붙였다. 그다음에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며 입술을 핥았다.

더 깊은 접촉을 바라는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는 기꺼이 그녀의 초대에 응해 그대로 혀를 밀어 넣었다.

“응…….”

가슴을 교차해 가리고 있던 그녀의 두 손은 어느새 그의 어깨를 짚었다. 혀가 얽히며 할짝거리는 소리가 욕실 안에 울렸다. 그는 입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바닥에 내던졌다.

그의 손이 그녀의 복부를 살짝 누르며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가 팬티 안으로 들어갔다. 단단한 손가락이 보들보들한 살집을 문지르다가 균열을 가르고 안을 눌렀다. 키스에 심취해 있던 그녀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수줍은 샘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그의 목을 감고 있던 그녀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끈질기게 탐했다. 작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깨물다가 강하게 빨아들였다. 서두르듯 서두르지 않으며 혀로 그녀의 치열을 꼼꼼하게 훑었다. 동시에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은밀한 길 안쪽을 드나들었다.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매끄러운 액체는 그를 인내심의 한계까지 몰아넣었다. 손가락 한 마디를 품는 그녀의 안쪽은 뜨겁고 좁았다.

그는 그녀의 팬티를 끌어내리면서 한쪽 팔로 허벅지를 감싸 잡아 살짝 들어 올렸다. 갑자기 발아래가 허공에 뜨자 그녀는 더 꽉 그의 목을 부둥켜안고 다리를 흔들었다. 그는 좀 더 그녀를 위로 안으며 팬티를 벗겨냈다. 그는 그녀를 내려놓으면서 벽에 붙은 그녀를 온몸으로 밀착해 눌렀다. 떨어진 입술이 귓가에 닿으며 그의 호흡이 귀에 닿아 소름이 일었다.

“휴. 아직…….”

“준비된 목욕물이 눈앞에 있잖아. 하고 씻든 씻고 하든.”

“그게 어떻게 같은…….”

“한 번만. 당신 남편 말라 죽는다고.”

그의 엄살에 웃음이 나왔다. 루시아는 밀어내던 힘을 빼고 허락처럼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마녀가 따로 없군.’

그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재빨리 그녀의 다리 하나를 팔에 걸었다. 그의 중심은 이미 아까부터 잔뜩 성이 나서 뻐근할 지경이었다. 그는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듯 단번에 강하게 진입했다. 아래에서부터 치닫는 압박감으로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아!”

그는 지그시 이를 물고 정수리를 직격하는 쾌감에 전율했다. 그녀의 안쪽은 언제나 새로운 개척지였다. 몇 번이고 허리를 움직여 조금이나마 익숙해지면 견딜 수 있지만, 맨 처음 넣을 때는 그는 늘 그대로 파정하고 싶은 욕구를 참아야 했다.

그는 허리를 뒤로 뺐다가 다시 위로 쳐올렸다. 그의 움직임에는 조급함이 있었다. 강한 힘으로 그녀의 몸을 꿰뚫을 때마다 그녀의 몸이 아래에서 위로 크게 흔들렸다.

“아! 흐읏…….”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아 매달렸다. 다리 하나로 간신히 바닥을 버티다가 그가 밀어붙일 때마다 발끝이 아슬아슬하게 떨어졌다가 간신히 닿았다. 잠시나마 바닥에 디딜 것이 없다는 작은 불안이 그녀의 쾌감에 일조했다.

거대한 기둥이 그녀의 안쪽 깊은 곳까지 끊임없이 파고들어 왔다. 뜨거운 살덩이가 속살을 할퀴는 느낌이 아릿했다. 단단한 끝이 민감한 부분을 건드릴 때마다 머릿속에서 쩡 소리를 내며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급한 몸짓으로 간절하게 그녀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그녀를 갖는 지금 그녀도 그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목에 매달린 팔에 더 힘을 주어 몸을 끌어올렸다. 그의 목을 더듬어 올라간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입술을 그의 귓가에 붙이고 입술 끝으로 그의 귓불을 물었다. 이 남자를 맛보고 싶다. 혀를 내밀어 목을 따라 귓가로 핥아 올렸다.

“윽……. 비비안!”

그의 몸이 흠칫하면서 나무라듯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반응하지 않고 더 진하게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붙였다. 이를 세워 근육이 움직이고 있는 목을 물었다.

“…이건 당신이 시작한 거야.”

그가 이를 갈 듯 말하며 그녀의 양 허벅지를 잡아 그의 허리를 감게 하고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부유감에 짧은 비명을 지르며 그의 목을 꽉 안았다. 그가 목을 울리며 강하고 빠르게 진퇴 운동을 시작했다.

“흑! 아응! 아아!”

루시아는 비명 같은 교성은 내질렀다.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온몸이 흔들렸다. 일그러지도록 그의 손아귀에 잡힌 엉덩이가 아프고 거칠게 그녀의 어깨를 입술로 문지르고 깨무는 그의 애무가 따가웠다. 동시에 머릿속에 팡팡 터지는 쾌감으로 흐느낌이 터졌다.

욕실 안에 가쁜 호흡 소리, 신음과 비명이 뒤섞여 울렸다. 두 남녀의 나체가 얽혀서 야한 율동을 만들었다. 욕실 가득한 수증기와 땀이 뒤섞여서 그들의 피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는 그녀를 벽에 등을 닿도록 세워둔 상태로 지칠 줄 모르고 그녀의 몸을 열었다. 조이는 질벽을 헤집고 멋대로 움직이는 요망한 안쪽을 그의 무기로 사정없이 문댔다.

“아! 휴!”

루시아는 그에게 매달려 뜨거워지는 눈가를 그의 어깨에 비볐다. 그를 단단히 붙들고 싶지만, 몸에 밴 끈끈한 땀이 마찰을 방해했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두 팔 가득 그를 안았다. 그녀는 온몸을 후려치는 쾌감에 가늘게 떨었다.

“흐읏!”

강렬한 오르가슴이 밀려왔다. 그녀의 허리가 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암흑과도 같은 절정에 완전히 먹혀 순간적으로 의식이 사라졌다. 발끝부터 시작한 뜨거운 기운이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타고 올라왔다. 뜨거운 불이 몸 안을 다 태워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내벽이 격렬한 경련을 시작했다.

그의 몸이 경직되고 억눌린 신음을 토해냈다. 한계에 달한 그의 분신이 그녀의 깊은 안쪽에 정액을 쏟았다. 마구 움직이는 질벽에 눌리고 잡히고 쥐어짜였다. 다리가 흔들릴 것 같아서 그는 벽 쪽으로 좀 더 몸을 기댔다. 뇌를 흔드는 쾌감이 힘들어 그는 눈을 감고 거칠게 호흡했다. 품 안에서 그녀의 몸이 헐떡였다.

“하아… 하아…….”

“후우……. 빌어먹을. 정말 이러다… 죽겠어. 이 여자야.”

안 해도 죽겠고, 해도 죽겠고. 그는 품 안으로 밀착하는 가녀린 여체를 힘주어 안았다. 기운이 빠지는지 늘어지는 그녀를 받쳐 안았다. 서로의 가슴이 닿아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몸을 울렸다. 자신의 심장인지, 상대방의 심장인지 구분할 수 없이 섞이는 박동이 두 배가 되어 감정을 고조시켰다. 그는 뜨거워진 체온이 조금 식을 때까지 얼마간 그렇게 그녀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욕조 안에 들어가 몸을 담갔다.

펄펄 끓던 물이 그동안 식어서 들어가기 적당하게 따뜻했다. 루시아는 가슴께까지 찰랑대는 물속에 앉아 그의 가슴을 쿠션 삼아 등을 기댔다. 찰박이는 물소리 외에 모든 것이 조용했다. 그와 함께하는 평화로움이 행복했다. 세상에 그와 단둘이 있는 것 같은 기분에 나른히 빠져들었다.

“아까 왜 그러셨어요? 화난 것처럼 제 얼굴 살펴보신 것.”

“녀석이 가서 당신이 우는 줄 알았어.”

“울긴요. 공부하러 당연히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건데요.”

새끼 여우까지 덤으로 치워 버렸을 때 그는 속이 다 시원했지만, 데미안과 새끼 여우 둘을 갑자기 다 떨어뜨린 그녀가 상실감이 걱정되었다.

새로 정 붙일 짐승 새끼 하나 구해줘야 하나. 그러기 싫은데. 그는 얼마간 고민을 했다. 그녀가 부탁하면 들어주겠지만 먼저 나서지는 말자고 결론을 내렸다.

“편지 쓰고, 선물도 보낼 거예요. 편지로라도 어머니 소리 듣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요.”

녀석에게 그렇게 많이 관심 두지 말라고. 그는 내심 투덜거리면서 두 손을 앞으로 뻗어 그녀의 가슴을 쥐었다. 그녀가 몸을 움츠렸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와 어깨를 이어가며 가볍게 입맞춤을 반복했다. 두 손은 갈비뼈 부근부터 위로 쓸어 올리듯 가슴을 주무르는 동작을 되풀이했다.

그녀는 작은 한숨을 흘리며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댔다. 그가 고개를 틀면서 숙여서 입술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혀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핥으면서 몇 번이고 짧은 키스를 했다. 가슴을 쥔 손가락이 유두를 잡아 살짝 힘을 주어 문지르자 그녀는 짧은 신음을 흘렸다.

그가 해주는 적당히 부드럽고 자극적인 애무에 빠져들던 그녀는 엉덩이 아래쪽에서 찔러오는 존재를 느끼고 얼굴을 붉혔다. 슬그머니 엉덩이를 앞으로 뺐더니 그가 더 붙으며 아예 노골적으로 닿았다.

조금씩 피하는데도 그가 자꾸 달라붙자 그녀는 손을 등 뒤로 돌려 성가신 그걸 잡아버렸다. 그가 그대로 굳어버리고 그녀도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굳었다.

루시아는 손에 잡힌 그걸 그대로 잡고 있을 수도, 느닷없이 놓을 수도 없었다. 그가 차라리 무슨 반응이라도 보였으면 좋겠는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 당황하고 부끄러워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흘끔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돌렸다.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그의 붉은 눈동자와 똑바로 마주쳤다.

“자… 자꾸 움직여서…….”

그가 짓궂게 웃으면 차라리 낫겠다. 그녀를 직시하는 눈동자 속에 거대한 기운이 사납게 넘실거렸다. 손안에 잡힌 그의 것이 커지는 느낌이 생경해서 루시아는 엄마야, 중얼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생명체처럼 손에서 꿈틀대는 느낌을 견딜 수 없었다.

그녀가 손을 놓자마자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아 몸을 돌리며 잡아먹을 듯 키스를 시작했다.

숨 쉴 틈 없이 그가 키스를 퍼부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온몸을 어루만졌다. 어깻죽지를 감싸 잡으면서 허리 아래로 더듬어 내려왔다. 요란한 움직임에 수면이 파도를 치며 철벅거리는 물소리가 시끄러웠다. 그가 그녀를 마주 안으며 허벅지를 잡아 끌어내렸으나 물의 부력 때문에 미끄러졌다.

그는 한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몸을 일으켰다. 몸을 돌리게 해서 그녀의 손을 이끌어 욕조 턱을 잡게 했다. 그녀의 귀를 잘근 물면서 가라앉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꽉 잡아.”

루시아는 후들거리는 팔로 욕조 턱을 짚었다. 정신없이 밀어붙이는 그에게 휘말려 숨이 가빴다. 그의 손이 뒤에서 허리를 단단히 잡았다. 곧 일어날 충격에 대비해 그녀가 입술을 물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열기 때문에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소름이 돋았다.

“흐윽!”

뒤에서 단번에 관통해 들어왔다. 몸이 크게 흔들린다. 붙잡고 지탱한 팔이 꺾일 것 같아 힘을 주었다. 쑥 빠져나간 그가 다시 강하게 퍽 치닫고 들어왔다. 눈앞이 번쩍했다.

“으응!”

단단한 끝이 깊은 안쪽까지 건드렸다. 빈틈없이 몸 안을 꽉 채우며 안쪽 살이 거칠게 쓸렸다. 그의 성기의 굴곡진 부분이 민감한 부분을 강렬하게 긁어내렸다. 소름이 와득 돋으면서 싸하게 시원한 감각이 전신을 훑었다. 저릿한 통증과 쾌감이 동시에 그녀를 괴롭혔다.

“아응! 휴! 아!”

계속되는 그의 강한 움직임을 견디지 못해 그녀의 팔과 다리가 흔들렸다. 그가 팔 하나를 앞으로 뻗어 그녀의 손 위를 깍지 끼며 누르고 다른 손은 골반을 지탱해 잡았다.

그가 버티는 힘이 아니었으면 그녀는 진즉 힘이 빠져 자세가 무너졌을 것이다. 진퇴를 반복하는 그의 허리짓에 그녀의 몸이 인형처럼 흔들렸다.

그의 윗가슴을 베고 누워 루시아는 손가락 끝으로 그의 가슴 위에서 원을 그리면서 계속 망설였다. 그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물어볼까, 그만둘까. 두 가지 마음이 계속 왔다 갔다 했다.

데미안이 공작가에 온 이후에 생모를 만난 적 있는지, 그런 적 없다면 생모가 원하지 않아서인지, 그가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인지 궁금했다.

아무리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도 배 아파 낳은 친어머니의 애절한 마음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로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가끔은 만나게 해주는 것이 아이 정서에도 좋을 것 같았다.

“휴. 저기…….”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이자 눈을 감고 있던 그가 말했다.

“뭔데.”

“데미안…….”

그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딴 남자 얘기 말고.”

“딴 남자라니요. 지난번에도 그런 말 하시더니. 당신 아들이에요.”

“딸은 아니잖아.”

“…그렇다고 데미안 얘기를 아예 안 할 수는 없잖아요.”

“침대에서는 하지 마.”

그럼 언제. 루시아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밤이 아니면 언제 이야기한단 말인가.

데미안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왜 그는 아버지로서 자애로운 애정을 보여주지 않는지 모르겠다. 표현을 안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는 무관심에 가까웠다. 생각할수록 데미안이 기특했다. 그렇게 착하고 올바르게 크다니.

“그럼 딱 하나만요. 궁금한 것이 있어요.”

“음.”

“데미안의 생모는 데미안이 보고 싶다고 한 적이 없나요?”

“…….”

이건 물어봐서는 안 될 질문인가. 루시아는 긴장했다.

“죽었어.”

“아…….”

루시아는 살짝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데미안을 데려오신 거예요?”

“그런 셈이지.”

“데미안을 보면 데미안 어머니는 꽤 미인이었을 것 같아요.”

“몰라. 본 적도 없어.”

“…네?”

루시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의 표정에 낭패의 기색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본 적도 없다는 말은 이상했다. 싸한 느낌이 그녀의 등을 타고 올라갔다. 본 적도 없는 여자와 어떻게 아이를 만들 수 있나.

그녀의 침묵이 길어지자 휴고는 초조함을 느꼈다. 그는 되돌릴 수 없는 말실수를 했다. 이미 그는 당황한 표정을 그녀에게 보였고, 수습하기에는 침묵이 너무 길었다. 다른 변명을 해봤자 그녀는 믿는 척은 하겠지만 믿지 않을 것이다.

“비비안.”

그녀의 이름을 불러놓고 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디까지 그녀에게 말할 수 있고, 어디까지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머릿속이 마구 엉클어졌다.

“설명하기 곤란하신가요?”

“…….”

루시아는 그의 침묵이 야속했다. 그러나 데미안의 생모와 그가 무슨 관계이건, 그녀는 참견할 자격이 없었다. 결혼 전부터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데미안의 생모와 그의 관계는 결혼하기 전의 옛 과거였다. 더구나 여자가 이미 죽었다고 하는데 더 따지고 들 주제가 못 되었다.

“…주무세요.”

휴고는 가슴에 스산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아서 어두운 허공을 망연히 응시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확연히 선을 긋고 있었다. 심장이 아렸다. 그녀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당혹스러웠던 기분은 차라리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못 들은 것으로 생각하고 넘어가자. 루시아는 그렇게 마음먹고 잠을 청하려 했다. 그런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가 한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모르겠다. 그를 그렇게 빼닮은 데미안이 그의 아들이 아닐 리가 없었다.

하룻밤 불장난이라 기억에도 남지 않았다는 뜻인가. 꼭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 그럴 수 있다. 그래도 자식을 낳아준 여자인데 얼굴도 모른다는 말은 너무했다. 루시아의 속이 밑바닥부터 부글부글 끓었다.

“당신은… 나중에 제 얼굴도 잊으시겠네요.”

그녀는 데미안 생모의 입장을 자신에게 투영했다. 지나간 여자는 자식을 낳아줘도 기억할 가치조차 없다고 그는 말하는 것 같았다. 아이도 낳지 못할 그녀 자신의 가치는 얼마나 형편없을까.

심란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있던 휴고는 갑작스러운 날벼락에 혼이 나갔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몇 번이고 의미를 생각해야 했다.

“…왜 그런 결론이 나와?”

“당신은 자식을 낳은 여자도 기억 못 하는 분이잖아요.”

“그런 게 아니야.”

그녀는 늘 자신에게 되뇌었다. 조급해서는 안 된다. 그를 사랑하는 길은 아주 험난할 것이다. 지치지 않으려면 먼 곳을 바라보며 차분히 할 걸음씩 걸어야 한다. 하지만 그의 무정하고 차가운 면을 접할 때마다 굳건한 의지가 조금씩 바스러졌다. 그의 차가운 심장을 도무지 녹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데미안에게 냉랭하게 군다고 생각할 때도 그랬다. 지금은 그가 단지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알지만, 알기 전에는 그가 애정이라는 감정 자체를 모르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태도에 혼란을 느꼈다. 그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 것은 안다. 어쩌면 꽤 좋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은 아니었다. 사랑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마치 사랑에 흠뻑 빠진 남자처럼 다정하고 부드럽게 굴었다.

가끔 루시아는 그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본 적도 없다는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이에요, 그럼? 본 적도 없는 여자가 당신 아이를 낳을 수 있나요?”

루시아는 말을 하다가 분이 나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휴고도 몸을 일으켰다.

“비비안. 당신 좀 흥분한 것 같은데…….”

“죄송해요. 주제넘게 흥분해서.”

휴고는 머리가 띵 했다. 얼마 전에도 이러는 모습을 봤다. 평소에는 순하다가 기분이 뒤틀리면 말을 비꼬아 상대의 속을 긁는 것 같다. 방심하다가 난데없이 손을 콱 물린 것 같았다. 아픔보다 놀라움이 커서 화가 난다기보다는 그저 황당했다.

“비비안.”

우선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루시아는 몸을 틀어 뿌리치며 그에게 등을 돌렸다. 등을 보이는 그녀를 보는 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루시아는 갑자기 강한 악력에 양어깨가 잡혀 인상을 찌푸렸다. 강한 힘이 그녀를 잡아당겨 던지듯 침대로 눕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루시아가 정신을 차려보니 그가 위에서 그녀를 누르고 있었다. 그가 형형한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에 루시아는 흠칫했다.

“그런 식으로 돌아서지 마.”

“…네?”

“내게 등 보이지 말라고.”

나직하게 말하는 음성에는 고저가 없었다.

‘화가… 났어.’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봤다. 그는 화가 나면 오히려 싸늘하게 가라앉는 것 같다. 왜 화가 났을까.

‘그를 뿌리치고 등을 돌려서? 과거에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한 경험이 있는 걸까?’

“안 그럴게요.”

루시아는 혹시라도 화난 그를 더 자극할까 봐 차분하게 말했다.

“놔주세요. 놀랐다고요.”

“…미안.”

휴고는 자책하면서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녀가 외면하는 모습을 보자 머릿속의 뭔가가 탁 끊어지는 것 같았다. 언젠가 이런 충동적인 행동이 과해져서 그녀를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갑작스러운 소강상태였다. 둘 다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말없이 마주 앉아있었다. 조금 머리가 식자 루시아는 자신이 뜬금없이 그에게 신경질을 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수였다고 사과하고 그만 자야겠다. 괜한 신경전으로 그와 싸울 필요는 없지.’

“…그 녀석. 내 친자식 아니야.”

“…네?”

그가 툭 내뱉은 말이 너무 엄청나서 루시아는 갑자기 어지러웠다.

“데미안 말씀이세요? 그 아이가… 당신 아들이 아니라고요?”

그녀는 방금 들은 말을 다시 한 번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휴고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와 이 문제로 감정 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단단히 오해해 더 최악으로 낙인찍히는 건 싫었다.

“제롬에게 서쪽 탑 일을 물었다지. 내게 형제가 있었다는 이야기 들었지?”

“네.”

“데미안은 내 형제의 아들이야. 촌수 따지면 조카지.”

엄청난 진실 앞에서 루시아는 심장이 쿵쿵 뛰고 입안이 바싹 말랐다. 순식간에 머릿속에 수십 개의 의문이 떠오르는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데미안은… 그 사실을…….”

“녀석은 몰라. 나. 그리고 이제는 당신까지. 그밖에는 누구도 몰라.”

정확히 말해서 한 사람 더, 필립이 알고 있지만 휴고는 거론할 생각이 없었다.

“데미안은… 당신 형님의 아들이란 말씀이군요.”

“…그래.”

둘 중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둘 다 그 문제는 상관없어서 서로 누가 형이니 동생이니 다툰 적은 없었다. 굳이 서열을 나누자면 죽은 형제 녀석이 형 쪽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 적은 있었다. 힘의 우위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 사이의 서열을 꼭 힘으로만 나눌 수 없다는 것을 그는 형제를 만나서 배웠다.

“나중에 데미안에게 알려줄 생각이세요?”

“녀석이 먼저 묻지 않는 한 그러고 싶지 않아.”

“아……. 그럼 저도 지켜야 하는 비밀이네요.”

루시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혼외자가 아니니까 데미안이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잖아. 아니야. 전 공작을 살해한 패륜아의 아들이라는 것보다는 그의 혼외자가 더 낫겠구나.’

그녀는 잠시 든 의문점에 스스로 답을 찾았다.

“서쪽 탑 일을 들었을 테니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그 일은 알려진 바와 좀 달라. 녀석은 막다른 길에 몰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어. 죽은 선대 공작이 자초한 면이 있고.”

루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의 말 속에서 루시아는 많은 것을 보았다. 들은 바로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쌍둥이 형제가 복수를 위해 친부를 살해했다. 그러면 그는 쌍둥이 형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 그는 ‘녀석’이라는 친밀한 단어를 사용했다. 또한, 죽은 아버지를 ‘선대 공작’으로 부르며 ‘자초’라는 표현을 썼다.

루시아는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중에도 친부를 죽인 행위보다 제 자식을 버린 죽은 공작의 냉혹함이 소름끼쳤다. 어쩐지 그의 형제가 행한 짓이 조금도 껄끄럽지 않았다.

“형님과 친하셨군요.”

휴고는 간격을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요?”

“…아주.”

루시아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가족이 아무도 없는 혼자가 아니었다. 비록 현재 이 세상 사람은 아니지만, 사랑을 나눈 형제가 있었다. 외로웠을 그의 어린 시절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그녀는 가슴 따뜻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서 데미안을 당신 아들로 거두셨군요. 형님의 하나뿐인 핏줄이니까.”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군. 데미안과 관련해서 얽힌 일이 많아. 그런데 당신에게 모두 말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내 말은 당신이라서 말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내가 죽어서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일들이야.”

그는 평소보다 길게 말을 늘였다. 루시아는 그에게 다가가 앉으며 두 손을 그의 손등에 얹었다.

“괜찮아요. 당신이 말씀해 줄 수 있는 정도만으로 충분해요.”

누구나 때로는 죽을 때까지 가슴속에만 묻어두는 비밀이 있을 수 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가족이라도 공유할 수 없는 비밀. 루시아에게도 그런 비밀이 있었다. 그녀는 꿈으로 미래를 보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살아보았다. 그것들은 그녀의 가슴에만 묻어둘 비밀이었다.

“당신의 비밀을 누군가 아는 것이 당신께 고통이라면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 비밀은 당신을 고통스럽게 할지도 몰라.”

“만약 그렇다면 당신께 매달려 볼게요. 그럼 그때 다시 생각해 주세요. 제게 말해 줄 수 있는지 없는지.”

“…그래. 그럴게.”

그는 그녀의 팔을 잡아 끌어안았다. 품 안 가득히 꽉 껴안고 그녀의 작은 어깨에 턱을 괴었다. 루시아도 두 팔 가득 그의 등을 감싸고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잠시 말없이 그들은 서로를 안아주었다. 그건 상대에 대한 위로이자 자신에 대한 위로였다.

“데미안은 당신 아들이고, 제 아들이죠. 그건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죠?”

“응.”

“데미안은 부모의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인가요?”

“그렇다고 하더군.”

“그럼 데미안이 자라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알려주세요. 그편이 아이에게도 좋을 거예요.”

“…그래.”

그의 넓은 가슴에 푹 안겨서 루시아는 약간의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난 왜 이렇게 못됐을까.’

진짜 부모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미안에 대한 연민보다, 그가 과거에 사랑하는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 더 크게 기쁨으로 다가왔다.

데미안이 진짜 그의 아들이었다고 알았던 얼마 전과 그의 아들이 아님을 알게 된 지금, 데미안을 귀애하는 마음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저 데미안을 보면서 가끔, 낳아준 어머니가 누굴까, 누구라서 그의 아이를 낳았을까 호기심이 들었다. 동시에 나는 그의 아이를 낳을 수 없겠구나,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그가 자식을 ‘흔적’이라고 꺼리던 말을 이제 이해했다. 그의 진심이었다. 그에게는 비밀이 있고 상처가 있었다. 냉혹한 친부와 친부를 살해한 형제. 그는 핏줄을 남길 경우 혐오하는 자신의 가족사가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공포를 가진 것 같았다. 그녀가 꿈에서 본 미래가 두려워 스스로를 불임으로 만든 것처럼.

‘내가 낳은 아이의 엄마가 되는 일은 없겠구나.’

막연한 포기는 ‘그래도 혹시.’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이유를 아는 포기는 납득이었다. 언젠가 그의 상처가 낫고 아버지가 될 마음의 준비를 할 날이 올 수도,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는 쪽이 마음이 편할 것이다.

‘그래도 엄마는 되었잖아.’

배 아파 낳지는 않았어도 데미안은 그녀의 아들이었다. 그녀는 애달픈 마음을 애써 갈무리했다. 기분을 전환하려고 그의 품에서 떨어져서 그를 올려 보았다.

“어쩐지 데미안이 당신을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언제는 똑 닮았다며?”

“외모는 그렇지요. 근데 속은 전혀 달라요. 데미안은 순하고 착하다고요. 당신한테 순하고 착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잖아요?”

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가 씨익 웃으면서 그녀의 턱 아래에 고개를 들이밀어 키스했다.

“대신 나는 당신에게는 순하고 착하게 굴잖아.”

그가 하는 달콤한 말이 놀라웠다. 루시아는 심장이 간질거려서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느냐는 것처럼 그가 자꾸 얼굴의 이곳저곳에 입맞춤했다. 루시아는 정말 간지러워서 또 웃었다.

“데미안이 당신을 닮은 것을 보니까, 돌아가신 아주버님은 당신과 똑같이 생긴 쌍둥이 형제셨군요. 신기해요. 당신이 둘이었다니.”

“내가 왜 둘이야. 그 녀석은 겉만 멀쩡했지 속은 완전…….”

그녀가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보자 그는 습관 같은 욕설을 삼키고 말끝을 흐렸다.

“…좀 심약했다고.”

루시아는 그 말을 ‘착하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했다. 역시 데미안은 진짜 친부를 닮아 그리 귀엽고 순한 것이었다.

“돌아가신 아주버님 성함을 여쭈어도 돼요?”

그가 한참 아무 말이 없었다.

“말씀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히우.”

“어머나. 당신 이름과 같네요.”

“어디가 같아?”

“히우. 히우. 휴. 빠르게 읽으면 같잖아요.”

“…….”

“휴. 당신의 이름에는 당신과 형님이 모두 있군요.”

크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던 휴고는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비비안.”

“네.”

“비비안.”

“네.”

이 여자가 없으면 나는 아마 죽을 거야. 그는 자신의 심장이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뛰는 심장이 아리게 아팠지만 달콤한 고통이었다.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