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28화 (29/77)

28장 데미안 (6)

루시아가 중앙탑으로 들어오며 뒤를 확인했다. 곧 따라 들어올 줄 알았던 데미안이 없었다. 하녀에게 데려오라 시키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서 머리를 완전히 기대고 눈을 감았다.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안일했어. 파티 깨기라니.’

목은 꺾여도 자존심은 절대 꺾지 않는 귀부인들의 고집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수도 사교계와 확연히 다른 분위기라서 안심하고 있었다.

공작부인이라는 지위를 믿고 자기도 모르게 자만하고 있었나 보다. 사교계에서 지위보다 명성이나 인맥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 어리석게도 간과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였어.’

북부 사교계의 대모라는 코르잔 백작부인의 인품에 깊이 감화받아서 실질적 영향력은 더 강하다는 웨일즈 백작부인을 만나기 전에 기대를 많이 했다. 하지만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티파티에 두어 번 초대한 웨일즈 백작부인은 눈으로 뱀처럼 사람을 훑었다. 괜히 부딪치고 싶지 않아서 좋게 웃어만 주었던 것이 실수였다. 그러니 자신을 우습게 보고 이런 짓을 주도했겠지.

‘만만치 않을 줄은 알았지만.’

그래서 케이트에게 가능하면 꼭 코르잔 백작부인을 모셔와 달라고 부탁했다. 안전 방패를 두고 싶었다. 설마 파티 깨기로 정면 대립각을 세울 줄은 몰랐다. 신중을 기하지 않은 자신의 실수가 뼈아팠다.

‘혼외자가 웨일즈 백작부인의 역린인가?’

노회한 사교계 인사가 감정에 치우쳐서 저지른 짓으로 보기에는 너무 얄팍했다. 굳이 파티 깨기로 루시아를 망신 줘봤자 잃을 것이 더 많았다.

아무리 사교계에서 지위가 절대 조건은 아니라고 해도 적당히 고려하지 않았다가는 뒷감당이 골치 아팠다. 더구나 북부에서 타란 공작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루시아는 웨일즈 백작부인이 괜히 자신의 속을 넘겨짚어서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악당이 악당을 알아보는 법. 사교계 군상들의 행태를 꿈속에서 관찰했어도 계략과 음모에 능한 사람의 심리를 간파하기에는 그녀가 순진했다.

‘사람이 꼭 이성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입적된 사생아가 작위를 이은 적이 없다는 전례. 루시아는 그 문제를 좀 더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북부에서 이런 분위기라면 수도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그가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려는지 궁금했다. 사교 파티에 데려간다는데 그리 대수롭지 않게 그러라고 했던 태도를 봐서 어쩌면 그는 별다른 생각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결정한 일은 반드시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남자니까.

‘데미안이 작위를 이어받는 일은 혼외자의 지위가 변화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지. 사람들이 꺼리는 점은 그거겠지.’

너무 성급했다. 데미안이 곧 학술원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기회를 놓치기 아깝다고만 생각했다. 그동안 승마장에서 안면을 익혔고, 어차피 데미안의 정식 데뷔 자리가 될 수 없는 정원 파티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눈을 떠서 응접실을 둘러봐도 데미안이 보이지 않았다. 데려오라고 하녀를 보낸 것이 언제인데. 두통 때문인지 짜증이 솟았다. 다시 다른 하녀를 불렀다.

“소공자를 데려오라는데 왜 이리 늦는 것이냐.”

하녀가 곧바로 빠른 걸음으로 물러났다가 잠시 후에 들어왔다.

“마님. 들어오십사 도련님께 말을 올려도 대답이 없으십니다. 먼저 마님께 명을 받은 아이가 도련님 곁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습니다.”

“데미안이 밖에서 무얼 하기에?”

“그냥 사람들을 보고 계십니다.”

“…알았다.”

그들을 보며 아이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들어오면 물어봐야겠다. 루시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루시아.”

케이트가 언제 들어왔는지 옆에 앉아 루시아의 손을 잡았다. 루시아는 눈을 뜨고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케이트.”

“아니에요. 제가 전혀 도움되어 드리지 못했네요. 많이 속상해하지 마세요. 꼭 지나야 할 통과의례라 생각하세요.”

케이트는 루시아가 무너진 자존심 때문에 자괴감을 느낄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루시아는 주최자의 자존심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꿈속이지만, 귀족 부인의 수발을 드는 하녀 일까지 해봤다. 그녀의 자존심은 고작 그 정도로 굴욕을 느낄 만큼 알량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미안하지만 케이트. 오늘은 그만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어요. 생각할 것이 많군요.”

케이트는 이해한다고 답하며 다정한 위로의 말을 몇 마디 더 건네고 돌아갔다. 루시아는 계속 주변에서 서성이는 제롬을 불렀다.

“그이는 집무실에 계시나요?”

“아닙니다. 급한 전언을 받으시고 출타하셨습니다. 오늘 안으로 돌아오실지 확실한 답은 없으셨습니다.”

루시아는 약간의 서운함과 안도감을 함께 느꼈다.

“오늘 일은 내가 말씀드릴 테니까 직접 전해 드리지 마요.”

“예, 마님.”

“그리고 안나를 불러 주겠어요?”

지끈거림이 점점 심해져서 아무래도 두통약을 먹어야 할 것 같다. 제롬마저 나가고 루시아는 하녀들도 모두 내보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들어와서 멀찍이 서있는 데미안에게 손짓했다.

“데미안, 이리 오렴.”

데미안이 다가와서 루시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루시아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소년은 남들이 자신을 어찌 보든 상관없었다. 호의적이지 않은 눈으로 흘끔거리며 아무리 숙덕여봐야 직접 위해를 끼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 시선과 뒷말은 워낙 익숙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짓을 루시아에게 하는 것은 싫었다.

데미안은 아직 사교계에 대해 잘 모르고 파티 깨기가 뭔지 모르지만, 아까의 상황이 루시아를 망신 주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분했다. 자신의 미약함이 화가 났다. 만약 아버지가 그 자리에 계셨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아니야, 데미안. 왜 네가 사과를 해.”

루시아는 울컥 감정이 치밀어서 데미안을 일으키다가 품으로 안았다. 처음부터 데미안은 싫다고 했다. 싫다는 아이를 억지로 설득해서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방식을 달리할 것을 그랬다. 파티가 마무리될 즈음 잠깐 소개만 해도 되었는데 너무 욕심을 부렸다.

“미안해, 데미안. 네가 상처받을 걸 생각 못 하고 내 욕심만 부렸어.”

좋은 향을 풍기는 부드러운 품이 온몸을 안아주는 느낌이 좋아서 데미안은 숨을 죽였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루시아가 놀라서 몸을 떼어낼까 봐.

“미안해, 미안해.”

“전… 괜찮습니다.”

데미안은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의미 없는 모르는 여자들의 시선 따위는 아까 루시아가 ‘내 아들’이라는 말을 했을 때 싹 잊었다. 그 말은 아직도 잔상으로 남아 계속 소년의 가슴을 두드렸다.

“네 잘못이 아니야. 데미안. 네 잘못 때문에 사람들이 그러는 게 아니란다. 어른이라고 모두 현명하지는 않아.”

루시아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이어 들려오는 작은 흐느낌을 들으며 데미안은 굳어버렸다. 저 때문에 울지 마세요, 머릿속에만 맴도는 말이 목에 턱 막혀 나오지 않았다.

조금씩 들썩이는 루시아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이마를 기댔다. 소년을 위한 누군가의 눈물은 처음이었다. 목구멍이 죄일 것처럼 따갑고 눈이 후끈거렸다. 아주 조금. 소년의 눈이 젖었다.

우려와 다르게 해프닝으로 끝났다. 집단 전염병이 아니라 집단 식중독이었다. 이 날씨에 전염병이건 식중독이건 둘 다 흔치 않은 일이긴 했으나 공작이 직접 달려올 일은 아니었다. 파발을 띄워 공작을 허탕 치게 한 마을 영주는 안색이 거무죽죽했다.

“독버섯이라고?”

“예, 전하. 이 버섯이 겉보기는 식용 버섯과 같으나 먹으면 복통, 설사, 구토 및 온몸에 붉은 반점이 올라와 흡사 질병 같아 보입니다.”

때마침 데려온 의사가 독초나 독버섯에 정통해서 오자마자 환자 몇 명을 살피고 이것저것 묻더니 남은 음식재료 틈에서 버섯을 찾아냈다. 빠른 시간에 문제는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전염병의 두려움으로 벌벌 떨던 마을 주민들은 느닷없이 나타난 공작이라는 거물에 혼비백산하더니, 공작이 온 지 한두 시간 안에 문제가 해결되자 경이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우리 공작님, 어쩌고 두런두런 떠드는 영지민들의 눈에 경외감이 가득했다.

“근처에 나는 버섯이라면 여기 영지민들이 모를 리 없을 터.”

“예, 전하. 이 근방에 서식하는 버섯이 아닙니다. 좀 더 기후가 찬 북쪽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어찌 된 것인가.”

“바른대로 고해 올려라.”

휴고의 질문을 받은 영주가 포승줄에 묶여 바닥에 코 박고 엎드린 노인을 채근했다. 마을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며 원흉인 버섯을 공급한 상점 주인이었다.

“예… 예. 어… 엊그제 상단을 통해 대량 식재료들을 구매했는데 어찌 된 일이지는 이놈도 잘…….”

“어허! 네놈이 이 사태를 만들지 않았더냐. 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주민들에게 독버섯을 풀은 게야?”

“아이고. 억울합니다. 영주님. 이놈은 추호도 부러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요.”

노인이 눈물 콧물 흘리며 억울함을 토로하는 상황을 지켜보던 관리가 나섰다.

“아무래도 그 상단을 추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대로 버섯을 구별하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채취해서 공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시 추적해 압송해라. 이와 비슷한 피해를 본 경우가 없는지 상단 행로를 따라 조사하고. 의사는 남아서 환자들을 치료하도록. 마을에 풀린 버섯은 전량 회수해서 폐기하라.”

“예.”

여기저기서 한목소리로 답했다.

“전하. 제가 상황 판단을 잘못하여 수고를 끼쳐 드렸습니다.”

영주가 어두운 표정으로 사죄를 올렸다.

“아니다. 빠른 대처가 훌륭했다.”

노여움 살 것을 각오했던 영주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나머지는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예, 전하.”

더는 이곳에 볼일은 없었다. 말을 타고 꼬박 세 시간을 달린 수고가 헛걸음이 되었지만, 전염병이 도는 상황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머지 일을 처리할 사람 몇을 남겨 두고 휴고와 기사들은 로암으로 출발했다.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로암까지 이제 멀지 않았다. 휴고를 비롯한 기사들은 조그만 샘에 모여 말과 사람 목을 축였다. 휴고는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로암에 입성할 즈음에는 꽤 어두워지겠다. 저녁 식사 시간을 맞추거나 혹은 그보다 조금 늦어질 것 같다. 휴고는 딘을 불렀다.

“한발 앞서 가서 내가 도착해도 피리를 불 것 없다고 일러두어라.”

식사 전에 도착하면 좋지만 조금 늦는다면 한창 식사 중에 그녀가 나와서 마중하는 수고를 하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딘이 조금 앞서 출발하고, 잠시 후 휴고와 기사들도 말을 몰아 달리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달려서 휴고를 태운 말이 로암의 내성 안까지 들어가 멈추었다. 말 등에서 뛰어 내리는 휴고를 발견한 하인이 놀라서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잠시 후 제롬이 뛰어 나왔다.

“전하께서 입성하시는 데 어찌 아무런 소식을…….”

“내가 소란스럽게 하지 말라 했다.”

곧바로 집무실로 향하는 휴고의 뒤를 제롬이 따랐다. 잠시 후에는 공작의 시중을 전담하는 삼 형제가 갈아입을 옷을 챙겨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들의 시중을 받으며 휴고는 먼지를 뒤집어쓴 옷을 갈아입었다.

“저녁 식사는?”

“준비 중입니다.”

“내가 늦지 않게 왔군.”

휴고는 곧바로 책상으로 갔다. 의자에 앉으면 가장 잘 보이는 앞에 가지런히 몇 개의 서류가 놓여있었다. 모서리에 붉은색 표지를 달아서 급한 사안임을 표기했다. 숨 쉴 틈도 없군, 그는 중얼거리며 서류 하나를 집어 들어 들추었다.

“정원 파티는 잘 끝났나?”

그 파티 때문에 오늘 온종일 내성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직접 말씀드리겠다던 마님 말씀을 떠올리며 제롬은 ‘예.’ 하고 대답했다.

“저녁 준비 다 되면 불러.”

그는 책상에 반쯤 엉덩이만 걸치고 기댄 채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루시아는 두통약을 먹고 잠들었다가 깨어나서 계속 소파에 축 늘어져 기대있었다. 약을 먹고 한잠 자고 일어났는데도 두통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머리가 아픈 것이 짜증나고 이모저모 기분도 안 좋고 해서 루시아는 계속 침실 소파에 누운 채 훌쩍거리며 울었다. 날이 저물어서야 겨우 두통이 가라앉아 몸을 추스르는데 하녀가 공작의 귀환 소식을 알려왔다.

“뭐? 들어오셨다고?”

루시아는 그가 오늘 안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녀에게 거울을 가져오라고 해서 모습을 비추니까 눈이 벌겋게 부어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눈 찜질을 할 것을 그랬다.

“차가운 물수건을 가져오너라.”

루시아는 임시방편으로나마 찜질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다. 금방 저녁 식사가 다 되었다고 알리러 왔다.

“어떠니? 눈이 흉하니?”

“아까보다 한결 가라앉으셨습니다. 얼핏 보면 잘 모를 것 같습니다.”

식사 시간 중에만 그가 모르면 된다. 저녁을 먹고 그는 다시 집무실로 들어갈 것이다. 밖을 나갔다가 오면 그는 더 바쁘니까. 조금 더 찜질하면 곧 가라앉을 것 같다. 괜히 이만한 일로 울었다고 그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식당으로 내려가자 데미안이 먼저 와있었다. 조금 늦게 휴고가 들어와서 착석했다. 그는 숟가락을 들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순간, 그의 미간이 꿈틀하며 손이 멈칫했다. 그가 숟가락을 탁 소리 나도록 테이블에 내려놓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당혹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갔다. 한 손으로 테이블을 짚어 몸을 숙이면서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녀의 붉게 부은 눈가가 확연하게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가 확 타오를 것처럼 짙어졌다.

“왜 그래.”

루시아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가 이렇게 과민하게 반응할 줄 몰랐다. 혹시 눈여겨본다 해도 무슨 일이냐고 나중에 물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용인들은 물론이고 데미안까지 있는 자리라 못내 민망했다.

“식사 먼저 하시고…….”

그는 자꾸 시선을 피하려는 그녀의 턱을 다시 단단히 쥐고 고개를 들이밀어 더 자세히 살폈다. 그녀의 맑은 호박색 눈동자마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울었나? 왜?

“제롬!”

언제나 준비된 집사 제롬은 즉시 주인이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정원 파티에서 귀부인들이 파티 깨기를 했습니다.”

“파티 깨기?”

“참석자들 다수가 침묵을 고수해 인위적으로 파티를 종료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유.”

“…데미안 도련님이십니다.”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대강의 상황을 파악했다. 알아서 잘 처신하려니, 물러나있지 말았어야 했다. 닳고 닳은 여편네들이 순한 아내를 할퀼지 모른다는 사실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했어야 했는데.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지?”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 안에 사나움이 있었다.

“아무… 아무 짓도.”

그들은 단지 침묵과 싸늘한 표정으로 파티를 거부했을 뿐 직접 루시아에게 무슨 짓을 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불쾌했다. 그러나 울만큼은 아니었다. 그녀의 눈물은 데미안에게 미안한 마음이 원인이었다. 그나마도 이미 실컷 울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왜 그러냐고 물을 때부터 코가 시큰했다. 곁에서 누가 어르면 더 눈물이 나는 아이처럼. 그가 돌아오면 담담하게 오늘 있었던 일을 그에게 설명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루시아의 눈물샘을 건드렸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그녀를 보는 휴고의 표정이 굳어졌다.

휴고는 그녀가 앉은 의자를 뒤로 잡아당겨서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 마치 아이라도 안는 것처럼 한쪽 팔을 허벅지 아래 받치고 한 손은 그녀의 등을 감싸듯 눌러 고개를 가슴에 묻게 했다.

“식사는 2층으로 올려. 데미안, 너는 먹고 네 방으로 가거라.”

“예.”

공작이 루시아를 안고 식당을 나서는 모습을 데미안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오늘 거의 온종일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던 루시아가 걱정스러웠다. 마음이 불편해서 책을 펴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일은 평소처럼 잘 웃는 어머니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휴고는 그녀를 안고 침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그의 너른 가슴에 얼굴을 묻고 루시아는 눈물을 쏟았다. 그의 손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토닥토닥 등을 두드렸다. 흐느끼던 울음은 잦아들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지면서 그녀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정원 파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도 무엇 때문에 이렇게 울음이 터지는지 알 수 없었다. 다정한 그의 위로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를 여의고 궁에 들어온 이후 마음껏 울지 못한 켜켜이 쌓인 설움을 모두 씻어내듯 울었다.

아무 말 없이 등을 쓸어주며 휴고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여린 그의 아내는 속마저 여린 여자가 아니었다. 차돌처럼 단단한 알맹이를 품은 여자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아프게 울까.

할 일 없이 파티만 쫓아다니는 여편네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만지기도 아까운 여자인데 속을 후벼 파? 내 이것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시커먼 분노가 뭉클뭉클 솟았다.

한참이 지나서 루시아는 그의 품에 늘어지듯 기대 훌쩍훌쩍 울음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안아주기만 하고 울지 말라거나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의 태도에서 그녀는 무척 많은 위로를 받았다.

루시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도 시선을 내려 마주쳤다.

“다 울었나?”

루시아는 바깥일을 하고 돌아온 사람을 붙들고 투정을 부린 것 같아서 면구스러웠다. 그래도 원 없이 울고 났더니 어쩐지 홀가분했다.

“세수…해야겠어요.”

눈물로 잔뜩 얼룩진 얼굴을 보이기가 부끄러웠다. 일어나려는 루시아를 그가 붙들면서 물수건을 내밀었다. 우느라 몰랐지만, 그새 하녀가 들어와 눈치 있게 곁에 챙겨두었다.

그녀는 수건을 받아 꼼꼼하게 얼굴을 닦아냈다. 그리고 그의 셔츠 앞이 다 젖어있음을 발견했다.

“저 때문에… 다 젖었네요.”

루시아는 주저하다가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위에서부터 하나씩 풀면서 가슴 근육의 굴곡이 드러나자 점점 손이 떨렸다. 중간까지 하다가 심장이 쿵쿵 뛰어서 손을 놓았다.

“갈아입으실 옷을 가져…….”

그가 루시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놀란 눈으로 마주친 그의 눈동자가 위험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마저 해.”

루시아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그의 단추를 마저 풀었다. 가장 밑의 단추까지 다 풀어 드러나는 맨가슴을 보며 감탄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쓸었다. 손에 탄탄한 피부가 맞닿았다. 유려한 선이 아름다운 근육의 느낌에 가슴이 뛰었다.

갑자기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루시아는 얼른 손을 떼고, 일어날 것처럼 몸을 틀었다. 그러나 팔을 잡아채 당기는 그의 손이 더 빨랐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으며 빠르게 그의 혀가 입술을 핥고 지나갔다. 그는 맛을 보는 것처럼 입맛을 다셨다.

“짜군.”

루시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붉은 눈동자 속에 불꽃이 보였다.

그는 언제나 뜨겁게 원하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으면 그녀의 신체도 민감하게 반응을 시작했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 정도는 귀엽고 순진한 반응이었다. 열이 나고 숨이 가빠지며 다리 안쪽 깊은 곳이 짜릿하게 아팠다.

그의 붉은 눈을 보며 붉은색이 이처럼 차가워 보이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항상 뜨거웠다.

‘당신은 침실을 함께 쓰는 여자를… 항상 그런 눈으로 보나요?’

소피아 로렌스가 처절하게 매달리던 광경이 떠올랐다. 세상에 남자가 타란 공작만 있는 것은 아닌데, 중얼거리며 혀를 찼었다.

그래서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고 함부로 남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피아 로렌스의 심정을 이렇게 절절하게 이해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저런 눈으로 보다가 갑자기 차갑게 보면 과연 견딜 수 있는 여자가 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부풀었다. 오직 자신의 마음이 다하는 곳까지 그를 사랑하겠다는 결심은 이상하게 그가 다정하면 할수록 흔들렸다. 이러다 언젠가 뻥 터져서 매달리는 여자가 될까 봐, 그의 경멸을 받을까 봐 두려웠다.

‘이대로도 좋아.’

지금도 충분히 행복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뜨거운 남편이었다. 더 바라는 건 과욕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 다독였다.

루시아는 그의 어깨에 두 손을 얹어 누르면서 반동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그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갔다. 그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은 낯설면서 기묘한 우월감을 주었다. 루시아는 그의 어깨를 더 누르면서 고개를 내려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가 그녀에게 하듯이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혀로 그의 입술을 핥았다. 조심스럽게 시작한 키스는 점차 도발적으로 변했다. 그가 가만히 있자 오히려 그녀가 더 적극적으로 입술을 문댔다. 입술을 떼며 루시아는 제가 한 짓이 부끄러워서 온몸이 후끈거리는 것 같았다.

“저 때문에 식사를 못 하셨군요. 시장하실 텐데…….”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그가 루시아의 뒷목을 잡으며 사납게 입술을 부딪쳐왔다. 단번에 입술이 삼켜지고 그의 혀가 입안을 점령했다.

거침없이 움직이는 혀의 움직임을 간신히 따라가며 그의 셔츠 깃을 잡은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숨이 막히도록 몰아세우는 키스는 길었다.

그의 입술이 떨어질 때 루시아는 가쁘게 숨을 할딱였다. 치맛자락 안으로 들어온 그의 손이 속옷 안을 파고들어 촉촉이 젖어든 꽃잎을 문질렀다.

“아!”

“밥 소리가 나와?”

날 이렇게 미치게 해놓고? 매끈하게 젖은 속살이 그의 손가락을 꽉 죄었다. 그는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으로 으르렁댔다.

“저도 배…고파요.”

휴고는 푹 한숨을 쉬었다. 그깟 한두 끼 안 먹어도 상관없지만.

“…당신을 굶길 수는 없지.”

그는 간신히 미련을 떨치고 손을 뺐다. 그녀를 그대로 안고 침실과 연결된 응접실로 나갔다. 테이블 위에는 차려둔 두 사람의 식사가 있었다. 식사는 금방 끝났다. 배가 고프다던 루시아는 얼마 먹지 못하고 포크를 내려놓았고, 휴고도 그쯤에서 식사를 마쳤다.

루시아는 하녀를 불러 그가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게 했다. 소파에 앉아 그가 셔츠를 갈아입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그녀는 홀딱 심취했다.

드러나는 그의 상반신을 보면서 그녀는 망상하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 온몸을 핥아 애무하듯 그녀도 그를 눕혀놓고 맛보고 싶었다. 루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망상에서 깨어났다.

‘정말 네가 미쳤구나.’

누군가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옷을 갈아입은 그가 다가와서 옆에 앉았다.

“아직도 기분이 안 좋아?”

“아니에요.”

루시아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의 팔이 넘어와서 그녀의 어깨를 살짝 쥐며 감싸 안았다.

“당신이 위로해 줘서 이제는 괜찮아요. 실컷 울었더니 속도 시원하고. 당신은 그런 경험 없어요?”

“모르겠군. 울어본 적 없어서.”

형제의 시체를 앞에 두고 내장이 가닥가닥 끊기는 것처럼 고통스러워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으나 눈물은 안 나왔다.

“이제 말해 봐. 무슨 일인지.”

“아까 들으셨잖아요. 파티 깨기로 정원 파티는 엉망이 되었어요. 데미안을 소개한 일이 손님들의 거부감을 일으켰어요. 전 양보하기 싫어서 그냥 파티를 해산했어요.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흔한 일인데 눈이 퉁퉁 붓도록 울어? 말해. 또 무슨 일이 있었어?”

“정말이에요. 이번 일은 제가 경솔한 탓도 있어요. 제가 속상했던 일은 다른 일이에요. 데미안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서 미안해서 그랬어요.”

“정말 그것뿐?”

“네, 정말이에요.”

무슨 일이 더 있었다고 해도 그녀의 표정을 봐서는 말할 것 같지 않았다. 나중에 따로 알아보기로 하고 휴고는 지금은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약한 녀석 아니야.”

“네, 당신 아들이니까요.”

휴고는 녀석과 자신을 자연스럽게 하나로 묶는 그녀의 말에 기분이 묘했다. ‘그래. 녀석은 내 아들이지.’라고 당연한 사실을 새삼 상기했다.

“그래도 데미안은 아직 어려요. 당신처럼 강하지 못해요.”

“주동자가 누구였지?”

부드럽게 달래듯 묻는 어조 속에 광폭함이 숨어있었다. 누군지 알면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멱을 딸 것 같은 잔혹함이 그의 붉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넘실거렸다. 평소에는 감추어두는 휴의 본성이 깨어났다. 그는 그녀에게 고통을 준 자를 색출해 피 맛을 보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그러나 그의 눈 속의 서렸던 잔인한 맹수의 본성은 그녀가 고개를 들자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요.”

“…뭘 하지 마.”

“사교계 일은 여자들의 일이에요. 당신이 나서면 안 돼요.”

그가 참견하면 완전히 난장판이 될 것이다. 북부 사교계의 근본이 흔들린다.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마담 미셀은 물론이고 케이트조차도 등을 돌릴 수 있었다.

“…….”

그가 뚱하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루시아는 다급해졌다.

“약속해 주세요. 당신이 나설 일은 없을 거라고.”

“내가 알아서 해.”

“휴! 안 돼요. 저를 위하면 그러지 마요. 당신을 비난하지 못하고 절 손가락질한다고요.”

“누가 감히.”

“휴!”

그녀가 눈동자를 일렁이며 애원했다. 그는 당해낼 수 없었다.

“…알았어.”

“약속하신 거예요?”

“알았다고.”

그는 내심 투덜거렸다. 가만히 두면 안 되는데. 제대로 밟아서 찍소리도 못 하게 만들면 될 것을. 딴 건 몰라도 그는 제대로 밟아놓는 일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녀에게 솜씨를 보여줘서 증명할 수도 없고.

“어떡하려고?”

“아직 생각 중이에요. 서둘러 앙갚음할 생각은 없어요.”

“흐지부지 넘어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당하고 가만있을 바보는 아니에요. 제가 잘 대처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뭐가 그리 복잡하지? 선동한 몇을 끌고 와서…….”

루시아가 고개를 홱 들고 눈꼬리를 세우자 휴고는 입을 다물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런 짓은 절대 하지 마세요. 남자와 달라요. 여자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목이 날아가면 죽는 건 여자나 남자나 마찬가지. 대체 뭐가 그리 복잡한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알았다고 순순히 대답했다. 순한 아내가 앙칼진 표정을 짓는 모습이 괜히 섬뜩했다.

“당신은 정말 내 도움이 필요 없군.”

매달려 징징대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투정 정도는 부려도 좋으련만.

“필요하면 말씀드릴게요.”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자신이 없어도 그녀는 아무 문제없이 잘살 것이다. 그걸 다시 확인한 것 같아서 그는 씁쓸했다.

“데미안이 오기 전에 왜 녀석에 관해 묻지 않았지?”

휴고는 얼마 전까지 그녀가 데미안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이에 대해서 전혀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뜻밖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대하는 마음은 귀여워하는 정도를 넘어섰다.

“당신이 제게 데미안에 대해 먼저 말씀하지 않는데 제가 먼저 그 아이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왜?”

“제가 수도에서 공작저를 찾아간 날, 당신은 제가 데미안을 거론하자 경계하셨어요.”

“…내가 그랬나?”

“결혼한 후에도 아마 제가 데미안에 대해 캐물었다면 무슨 의도로 그런 걸 묻는지 의심하셨을걸요.”

“…….”

허를 찌르는 말이었다. 휴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녀가 데미안에게 관심을 보였다면 절대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가끔, 묘한 부분에서 사람의 마음을 읽는 통찰력이 있었다.

<4권에서 계속>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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