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장 데미안 (5)
휴고는 오후에 집무실에서 열심히 서류 작업을 하다가 코에 스치는 차향에 고개를 들었다. 제롬이 조용히 두고 간 찻잔을 보며 그는 펜을 놓고 등을 기댔다. 찻잔을 들고 잠깐의 휴식을 위해 발코니로 나갔다. 파티 준비 때문인지 정원에 바쁘게 오가는 자들이 제법 많았다.
휴고는 시선을 돌리며 그녀를 찾았다. 정원 구석에서 그녀를 곧 발견했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있는 아이는 데미안이었다.
‘둘이 정말 친하군.’
중얼거리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데미안이 그녀를 곧잘 따르는 것이 신기했다. 그렇게 붙임성 있는 녀석이 아닌데. 고작 몇 주 만에 졸졸 따르는 강아지로 만들어 놓았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제 편으로 만드는 신기한 능력을 갖춘 것 같았다. 집사 제롬 역시 우리 마님, 하면서 절절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정원 파티라…….’
데미안을 그런 자리에 데려가도 괜찮은지 모르겠다. 공작부인이 혼외자를 진심으로 귀애한다고 생각할 만큼 사교계의 귀족들은 순수하지 못했다. 많은 자가 그녀의 의도를 의심할 것이다.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녀에게 넌지시 충고를 건넬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순하면서도 야무진 여자였다.
‘뭘 하는 거지?’
그녀와 아이가 머리를 맞대고 아까부터 쪼그려 앉아있었다. 거리가 멀고 그가 보는 방향에서는 제대로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뭘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둘이 대체 뭘 하는 거야.’
그의 투덜거림에는 ‘날 빼고’라는 말이 빠져있는 것이 그의 진심이었다. 다만, 너무 유치해서 차마 속으로도 말할 수 없었다.
루시아와 데미안은 새끼 여우를 구경하느라 정신을 쏙 빼고 있었다. 커다란 귀를 가진 노란 빛의 새끼 여우는 어색한 발놀림으로 아장아장 걸었다. 두 사람의 발치를 벗어나려 하면 손으로 살짝 가로막았다. 그러면 금방 포기하고 주저앉아 꼬리 물기를 하며 돌기를 반복했다.
“여우치고는 보기 드물게 순하고 얌전한 녀석입니다. 길들이기 쉽겠습니다.”
케이트가 보내준 경력 많은 사육사가 여우를 살펴본 후 말했었다.
“데미안, 이름은 정했니?”
“루시아, 정말… 제가 이름을 지어도 괜찮아요?”
“그럼. 네가 지어주면 기쁠 거야.”
여우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루시아의 부탁을 받고 데미안은 며칠을 고민했다. 온갖 사전을 뒤져보느라 공부도 뒷전이었다.
“그럼……. 아샤.”
“아샤? 의미가 있니?”
“이름처럼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무사히 잘 컸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이름이구나. 아샤.”
루시아는 여우를 들어 데미안에게 내밀었다.
“이름을 지어줬으니 안아봐. 보기만 하지 말고.”
“루시아, 전…….”
“어서, 떨어뜨리겠어.”
손에 잡혀서 공중에 들린 시간이 길어지자 새끼 여우가 버둥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떨어뜨린다는 말에 데미안이 얼른 손을 내밀어 아주 조심스럽게 여우를 받아 안았다.
아샤는 긴 주둥이를 들어 커다란 까만 눈동자를 소년의 붉은 눈과 맞추더니 얌전히 품에 안겼다. 살아있는 작은 생명체의 체온과 빠르게 뛰는 동물의 심장 박동 소리는 데미안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었다. 가슴 벅찬 감동으로 데미안은 부르르 떨었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소년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기분이… 이상합니다.”
“왜?”
“그냥……. 싫은 건 아닌데 불편합니다. 가슴이 좀 따끔따끔하고.”
조금이라도 힘 주면 새끼 여우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어쩔 줄 몰라 하는 데미안을 보며 루시아는 미소를 지었다.
“데미안. 그건 사랑스럽다는 감정이란다.”
“사랑…스럽다?”
“그래. 네가 태어났을 때 네 어머니도 널 안고 분명히 그러셨을 거야. 사랑스러움이 넘치면 가슴이 아프거든.”
흔들리는 눈으로 루시아를 바라보던 데미안은 말없이 한참 여우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우는 품 안에서 꼬물거리다가 편하게 자세를 잡더니 턱을 소년의 팔에 걸치고 있는 대로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을 했다.
데미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루시아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늘 한 점 없이 맑은 아이의 웃음이었다.
무뚝뚝한 소년이 터뜨리는 웃음은 루시아에게 진한 감동을 안겼다. 루시아도 데미안을 마주 보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조금 멀리 떨어져서 그들을 보고 있던 휴고의 붉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휴고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그녀와 아이가 있는 곳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던 그는 둘의 정신이 팔려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발견했다.
‘뭐야 저건.’
두 사람은 조그마한 짐승 새끼가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세상에 다시없을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빠져서 보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자 두 사람 대화 소리가 들렸다.
‘짐승에게 이름이라니. 쓸데없는 짓.’
그가 수년째 타고 다니는 백마는 여전히 이름이 없었다.
‘…루시아?’
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녁 산책길에서 그녀와 아이가 대화하는 중에 흘러나온 ‘루시아’라는 이름을 얼핏 들었을 때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래도 내내 신경이 쓰였는데 이번에는 확실히 들었다.
왜 데미안이 저런 이름으로 그녀를 부를까. 공작부인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하다못해 그녀의 이름도 아니고.
멈추어 서서 생각을 해도 결론을 내릴 수 없어서 그는 다시 걸음을 뗐다. 그러나 그는 두어 걸음 만에 다시 멈추고 말았다. 소년의 햇살처럼 환한 웃음을 보며 그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아릿한 통증을 느꼈다.
‘하…….’
그는 탄식했다.
‘너구나.’
그는 힘없이 웃었다. 소년의 웃음은 그가 형제를 처음 만난 날, 그를 향해 보여준 웃음과 빼닮았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형제는 그가 깨닫지 못했을 뿐 언제나 곁에 있었다.
어느 날 필립이 아직 걸음이 어색한 어린아이를 데려왔다. 한창 전쟁 중에 잠시 로암에 들렀을 때였다.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타란 혈족의 특성 그대로였다. 아이를 고용인의 손에 맡겨 내보내고 둘만 남자 그는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저거 뭐야.’
‘휴고 도련님의 아드님입니다.’
처음에는 기가 막혔고 그 후에는 분노했다. 사내아이라니. 근친이 아니면 타란 혈족의 사내아이는 절대 태어날 수가 없었다.
‘지랄하지 마. 죽은 영감탱이 씨를 데려와 어디서 사기야.’
‘휴고 도련님께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다고 눈을 빛내던 형제를 떠올리며 그는 욕설을 내뱉었다.
‘영감탱이의 수작질이었나?’
죽어서도 벗어나지 못한 건가. 화가 나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아닙니다. 휴고 도련님과 아가씨는 서로 모른 채 사랑에 빠졌습니다. 데미안 도련님은 두 분의 사랑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사랑?! 개소리!’
그는 죽은 형제 녀석에게 욕을 퍼부었다. 병신 새끼. 똑똑한 척은 혼자 다하더니만.
‘제 자식이 태어난 걸 녀석은 왜 몰랐어?’
자식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절대 자살을 택할 녀석이 아니었다.
‘데미안 도련님이 잉태된 사실을 휴고 도련님은 모르고 돌아가셨습니다.’
‘영감탱이도 모르고 뒈졌나?’
‘예.’
그건 쌤통이군, 지옥에서 약 좀 오르겠는데. 중얼거리며 그는 음험하게 킬킬 웃었다.
‘애 이름은 늙은이 네가 지었나?’
‘어찌 감히. 데미안 도련님의 모친께서 지은 이름입니다.’
‘모친?’
그는 이죽거렸다.
‘내 이복누이겠군. 죽었다는 둘이 전부인 줄 알았더니 이복누이가 또 있었어. 그 영감탱이는 몇을 만들어둔 거야?’
‘알고 계신 대로입니다. 다만, 아가씨는 어려서부터 워낙 몸이 약하고 잔병이 잦았습니다.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판단한 돌아가신 공작께서 폐기하기로 하셨습니다. 돌아가신 공작께서는 아가씨가 죽었다고 알고 계셨습니다.’
‘폐기. 하! 그 미친 영감탱이가 충분히 할 만한 짓이야. 그래서 죽어 마땅했을 이복누이가 어쩌다 녀석을 만나 사랑 놀음을 하다가 애를 낳았나?’
‘인연이란 예측할 수 없다고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두 분 인연에 어떠한 간섭이나 의도는 없었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인연? 지랄. 애 엄마는?’
‘산고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원하시면…….’
‘됐어.’
둘이 정말 서로의 관계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정말 둘 사이에 어떤 인위적 개입이 있었는지 아닌지. 어차피 둘 다 죽은 마당에 진실은 알 수 없었다. 죽어버린 인간들의 사정 따위 알 바 아니었다. 늙은이의 헛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보다 그는 당면한 문제에 더 집중했다.
‘그래서 저걸 어쩌라고. 내게 왜 데려왔어?’
형제의 아들이 죽어버린 형제는 아니었다. 그가 죽은 공작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완벽히 별개의 인격을 지닌 개체인 것처럼.
더구나 갓 태어난 사실을 알린 것도 아니고 저만큼 클 때까지 데리고 있다가 이제 데려온 필립의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휴고 도련님의 혈육입니다. 마땅히 거두어 주셔야지요.’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데려가. 눈앞에 알짱거리면 언제 죽일지 몰라.’
그러나 필립은 데미안을 남겨두고 슬그머니 사라졌다. 사람을 풀어도 흔적도 못 찾게 숨어버렸다. 그럼 네놈은 죽을 때까지 꼬맹이 머리털 한 가닥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를 북북 갈며 필립의 데미안에 대한 접근 금지 조치를 발동했다.
시간이 좀 지나서 슬그머니 나타난 필립이 데미안을 만나려고 했다가 그가 심어둔 호위들 때문에 무산되었다는 보고를 들었다. 당시에는 홧김에 한 짓이었지만 참 잘한 짓이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직접 애를 돌볼 여유는 없었다. 가뜩이나 전쟁으로 정신없어서 대충 유모를 구해서 맡기고 그는 다시 전쟁터로 떠났다. 그리고 전쟁 중에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거의 반년 만에 로암에 와보니까 모두 데미안을 그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입으로 데미안이 내 아들이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똑 닮은 외모 때문이었다.
데미안에 대한 그의 감정은 복잡 미묘했다. 형제의 유일한 흔적이자 성가신 짐. 애증까지는 아니어도 소년이 좋은 만큼 싫고 싫은 만큼 좋았다.
그러나 그는 형제를 닮은 소년의 웃음을 보며 깨달았다. 저주받은 타란 가문을 끝내려는 그의 의도에 데미안이 걸림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의 쌍둥이 형제는 타란 혈족에서는 절대 태어날 수 없는 돌연변이였다. 잔인한 광기를 피에 담아 타고나는 타란 혈족답지 않게 선하고 순수하며 생명을 사랑했다.
그런 형제의 피를 데미안이 이어받았다. 데미안이 이끌 타란 가문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할 것이다.
휴고가 다가오는 기척을 데미안이 눈치채고 벌떡 일어났다. 여우는 품에 꼭 안은 채, 갑작스러운 휴고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 시간에 공부하지 않고 노닥거린다고 야단맞지 않을까, 지레짐작으로 겁을 먹었다.
휴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여우를 흘끗 보고 루시아에게 말했다.
“여우 사냥은 구경만 하러 다니는 것 아니었나?”
“그러려고 했는데, 레이디 밀튼이 여우를 한 마리 구해준다고 했어요. 선물 받은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는 데미안의 품에 안겨 눈을 굴리고 있는 하찮은 생물이 못마땅했다.
‘이젠 저런 짐승 새끼까지 품에 끼고 돌 거란 말이지.’
잦은 외출에 데미안, 이제는 여우 새끼까지. 그녀를 온전히 갖는 길은 너무 험난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가둬두고 나만 보라고 하고 싶었다.
“데미안.”
“네? 네!”
휴고가 데미안을 앞에 두고 이름을 정확히 칭한 것은 처음이었다. 데미안을 직접 부를 때는 ‘꼬마’라고, 다른 사람과 대화 중에 데미안을 칭할 때는 ‘녀석’이라고 했다. 미묘한 변화를 데미안도, 휴고도 알아채지 못했다.
“여우 사냥은 사내가 하는 놀이가 아니다. 여자들의 하찮은 놀이지. 여우는 주인께 돌려주어라.”
그는 거만하게 명령했다. 루시아는 기가 막혀 그를 흘겨보았다. 여자들의 하찮은 놀이?!
데미안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재빠르게 안고 있던 여우를 루시아에게 건넸다. 내주는 손길은 아까 소년이 보여준 감동이 무색하게 약간의 미련조차 없었다. 루시아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따라오너라.”
“네.”
소년은 군기 바짝 든 병사처럼 대답했다.
“어디로 데려가세요?”
“남자들끼리 할 얘기가 있어.”
그가 앞서 걸어가자 데미안은 다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루시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재빨리 휴고 뒤를 쫓아갔다. 늘 차분한 소년답지 않게 신이 나 있었다.
“…세상에, 뭐야. 두 남자가 날 따돌리는 거야?”
루시아는 어이가 없었다. 뒤도 안 돌아보는 데미안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허탈하게도 그동안 들인 공은 제 아버지의 말 한마디보다 못했다. 저만치 멀어지는 두 부자를 보며 얼마간 분했던 마음은 금방 가라앉았다. 똑 닮은 크고 작은 두 뒷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유난히 가벼운 발걸음의 데미안이 귀여워서 루시아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부디 내가 질투 나도록 친해졌으면 좋겠네요.”
미소를 지으며 루시아는 일꾼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내일 정원 파티를 위해 아직 마무리할 일이 많이 남아있었다.
막상 데미안에게 따라오라고 했으나 솔직히 그는 아이와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잘 크고 있군, 대충 살펴보기만 했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었다.
“학술원 다니며 불편한 건 없느냐?”
“없습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침묵이었다. 이제 겨우 말을 트는 두 사람은 어색하기만 했다.
“책은 많이 읽고?”
“예, 좋아해서 많이 읽습니다.”
휴고는 데미안을 서재로 데려갔다. 지금껏 출입을 허락한 사람은 그녀뿐이었던 공간이었다.
데미안은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떡 벌리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빠르게 고개가 좌우로 움직였다. 학술원에 있는 엄청난 규모의 도서관은 책은 많아도 멋은 없었다. 개인이 소유하기에는 놀라운 규모와 근사한 분위기에 감탄하는 소년의 눈동자에 황홀한 빛이 어렸다.
“저곳도 서재입니까?”
데미안은 서재 오른쪽의 굳게 닫힌 문을 보며 물었다. 휴고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가 작위를 승계받은 이후 들어갈 수 있었던 곳. 오직 타란 가문의 가주만 들어갈 수 있는 곳. 타란 가문의 모든 진실을 담은 비밀의 방이었다.
“네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곳이다. 쓰레기가 들어있지.”
휴고는 저 방을 데미안에게 물려주지 않을 셈이었다. 언제고 데미안에게 타란의 주인 자리를 물리기 전에 다 태워서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마음먹은 생각이었다. 타란의 비밀은 오직 그가 홀로 끌어안고 끝낼 것이다.
“마음대로 구경해도 좋다. 책이 읽고 싶으면 언제든 와서 읽도록 해라.”
“네! 감사합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구경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했던 소년의 몸은 곧바로 튀어 나가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데미안을 바라보는 휴고의 눈빛에 온기가 있었다.
금세 책 한 권을 빼 들고 독서 삼매경에 빠진 소년을 놔두고 휴고는 서재를 나왔다. 집무실로 들어서다가 ‘루시아’라는 이름이 다시 떠올랐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문고리를 잡고 서있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공작부인이 주최하는 정원 파티에 참석하려고 로암으로 향하는 귀부인의 마차가 아침부터 줄을 이었다. 공작부인은 늘 작은 규모의 티파티만 열고 무도회를 연 적이 없어서 이번 정원 파티가 역대 가장 규모가 컸다.
초대장을 가지고 로암에 입성하는 귀부인의 수는 근 100여 명에 달했다. 노년층에서 미혼 아가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 북부 사교계의 유명 인사와 그렇지 않은 사람, 봉신 가문과 그렇지 않은 가문 등 구성을 다양하게 했다.
오늘 초대장을 받은 사람은 모두 최소 한 번 정도는 공작부인의 티파티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공작부인의 티파티는 소수의 사람과 반복적인 교류가 아닌, 다양한 사람들과의 넓은 만남이 특징이었다. 공작부인의 사교 활동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달랐다. 큰 규모의 화려한 무도회를 꿈꾸는 이들은 아쉬움을 표했고, 기존 사교계의 유력 인사들은 공격적이지 않은 공작부인의 방식에 호의를 표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서 오세요. 와주셔서 기쁘군요.”
루시아는 차례차례 도착하는 귀부인을 맞이하며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끊임없이 들어오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웃어주는 것만으로 정신없었지만, 약간의 틈이 나자 하녀를 불렀다.
“데미안이 늦는구나. 아직 멀었는지 가서 보고 오너라.”
“예, 마님.”
정원에 마련한 널찍한 공간에는 둥근 테이블이 수십 개가 놓였다. 레이스가 달린 하얀 테이블보를 덮고 테이블마다 화병을 놓아 장식했다. 지정 좌석은 두지 않아 자유롭게 앉을 수 있도록 했다.
참석자들은 알아서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테이블을 하나씩 차지했다. 하녀들이 테이블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차를 올렸다. 정원은 여자들의 수다와 웃음으로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바깥 일정을 소화하기에 참 좋은 날씨였다. 햇빛은 적당하고 바람은 거의 없었다. 이미 제법 서늘한 계절에 접어들었으나 오늘따라 포근했다. 한껏 기분이 고양된 귀부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레이디 밀튼. 어서 와요.”
“초대에 감사합니다. 오늘 날씨가 아주 좋군요. 멋진 파티가 될 거예요.”
루시아는 케이트가 혼자 온 것을 확인했으면서 아쉬움을 내보였다.
“마담 미셀은 못 오셨군요.”
“예. 꼭 오고 싶어 하셨는데 요즘 건강이 많이 안 좋으세요.”
코르잔 백작부인은 노환으로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약해지고 있었다. 스승이나 다름없는 분이라서 루시아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언제 한 번 뵈러 가야겠어요.”
“종조모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거예요.”
하녀가 쪼르르 다가와 고했다.
“도련님께서 1층 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양해를 구하고 안으로 들어가는 루시아를 케이트가 걱정스럽게 보았다. 이번 정원 파티에서 데미안을 소개한다는 루시아의 계획은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지만, 루시아의 생각이 확고해서 더 말리지는 못했다.
‘괜찮을까 모르겠네.’
사생아가 작위를 잇는 문제는 남자보다 여자의 태도가 더 단호했다. 적실 자식을 제치고 혼외자가 굴러들어와 뒤통수 맞는 상황은 누구도 원치 않을 것이다.
‘루시아는 공주님으로 태어나 공작부인이 되셨는데. 이상할 정도로 귀부인의 심리를 모르는 것 같아. 심리를 모른다기보다는 욕망에 초연하다고 해야 하나.’
케이트는 대단히 사람을 사귀는 폭이 넓었다. 마음만 맞으면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높은 신분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다른지 비교할 일이 많았다.
귀족 아가씨로 태어나 험한 일 한 번 겪은 적 없이 정해준 대로 결혼해서 귀족 부인으로 사는 전형적인 귀부인들은 시야가 매우 좁았다.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예 몰랐다. 오만하고 까다로우며 자존심 강하고 이기적이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다 비슷비슷했다.
루시아가 그런 귀부인들의 속성을 모르지는 않았다. 대화하다 보면 가끔은 놀랄 정도로 더 예리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동감하며 받아들이는 것과 달랐다.
케이트는 루시아가 신기했다. 그녀 정도의 위치에 있으면서 그녀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고 누군가의 위에 서려 하지 않았다. 겸손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천성이 그러했다. 내숭 없고, 가식 없고, 말 한마디를 해도 상대방을 고려했다. 그래서 케이트는 그녀와 함께 어울릴 때 가장 마음이 편했다.
케이트는 모여있는 손님 중에 유난히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있는 노부인을 보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웨일즈 백작부인은 북부 사교계의 유명 인사였다.
종조모는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아도 실질적인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종조모가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였다.
웨일즈 백작부인은 종조모와 비교해서 모든 것이 극과 극이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웨일즈 가문은 북부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이며 부유했다. 웨일즈 백작부인은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마음껏 휘두르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즐겼다.
‘종조모께서 활동이 뜸해지시니 요즘 더 활개 친다고 하던데.’
승마를 즐기지 않는 웨일즈 백작부인이 승마장을 찾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루시아가 데미안을 승마장에 데려와 사람들에게 소개한다는 말을 듣고 ‘어리시군요. 현명한 조언을 드릴 사람을 곁에 두셔야 할 텐데요.’라고 말했다는 풍문을 전해 들었다.
‘오늘 괜한 분란을 만들지 않으면 좋겠지만.’
케이트는 겉으로 순해 보이는 루시아가 얼마나 야무지고 단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걱정은 되어도 불안하지 않았다.
중앙탑으로 들어간 루시아는 같은 자리를 맴돌며 서성이는 소년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근사하구나, 데미안.”
어른의 것과 형태가 같으나 크기만 작은 연미복을 차려입은 데미안은 나무랄 데 없는 작은 신사였다. 루시아는 연미복을 입힌 부자를 나란히 세워서 양팔에 끼고 파티에 나가보고 싶었다. 여자들이 눈을 못 뗄 것이다. 상상만 해도 흐뭇한 웃음이 나왔다.
“조금… 답답합니다.”
“금방 익숙해질 거야. 손님들 다 오셨어. 어서 가자.”
데미안은 못 박은 것처럼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루시아,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데미안, 넌 앞으로 많은 사람의 앞에 서야 할 거야. 오늘은 그저 시작에 불과해. 전혀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네게 못되게 구는 사람 있으면 말해. 혼내줄게.”
데미안이 물끄러미 보자 루시아는 두 손을 허리에 얹었다.
“내가 못 미덥구나? 좋아. 그럼 네 아버지께 일러줄게. 무서운 분이니까 단단히 혼내주실 거야.”
소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올라왔다.
“가자.”
루시아가 데미안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데미안은 흠칫했다. 제 손을 붙든 손을 응시하고 순순히 따라 걸어갔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었다. 손에서 팔, 루시아의 뒷모습까지 천천히 시선을 이동했다. 빛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눈이 부셨다. 시린 눈부심이 좋아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주최자인 공작부인이 등장하자 소란이 점점 가라앉고 금방 조용해졌다. 루시아는 화려한 차림새로 앉아있는 다양한 연령의 귀부인들을 한 번 쭉 훑어본 후 인사말로 파티 시작을 알렸다.
“오늘 이 자리에 기꺼이 참석해 준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많은 분을 한 자리에 모시는 자리가 처음이다 보니 많은 미숙함이 있겠지만, 부디 즐거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루시아는 오늘 참석한 귀부인 중에서 나이가 많으며 영향력이 있는 몇 명의 이름을 특히 호명해 감사를 표했다. 가장 먼저 이름이 불린 웨일즈 백작부인의 콧대가 올라갔다. 제 이름이 불릴 때마다 귀부인들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를 빌려 여러분께 꼭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답니다. 데미안, 이리 나오렴.”
사람들의 시선에서 비켜있던 데미안이 루시아의 부름에 앞으로 나와 그녀의 곁에 섰다.
“모두 익히 들어 아실 겁니다. 장차 공작가를 이어 타란의 주인이 될 소공자입니다. 아직 어리지만 인사를 나누고 싶어 제가 불렀습니다.”
소년의 등장에 대부분 사람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잠깐의 정적이 지나고 좌중이 술렁였다. 당황하는 쪽은 주로 미혼이나 젊은 부인들이고 나이 든 귀부인일수록 표정이 굳었다.
조금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는 사람이 있었다. 웨일즈 백작부인이었다. 백작부인은 서늘한 표정으로 손을 무릎 아래로 내리고 입을 꼭 다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백작부인에게 몰렸다.
백작부인은 불쾌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으로 침묵할 뿐이었다. 백작부인의 침묵이 점점 길어질수록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정원 파티가 시작할 무렵, 휴고는 집무실에서 서류작업 중이었다. 그는 때마침 차를 가지고 들어온 제롬에게 물었다.
“파티는 잘 진행 중인가?”
“예, 손님이 거의 도착했다고 들었습니다.”
“초대장을 받고 안 온 사람은?”
초대장을 받고 연락 없이 불참하는 짓은 주최자를 모욕하는 행위였다. 겁을 상실하지 않고서야 그럴 리는 없겠지만, 데미안을 소개한다고 하니까 왠지 신경이 쓰였다.
“건강 문제로 불참을 알린 두 명과 조금 늦게 도착한다고 알려온 두 명을 제외하면 전원 참석입니다.”
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갑자기 ‘루시아’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잠깐 잊었다가 곧 다시 떠오르고, 그 이름은 계속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궁금하지만 애한테 물어보기는 싫고, 대놓고 그녀에게 물어보기가 겸연쩍었다. 어쩌면 둘만 아는 서로를 부르는 애칭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 그는 아내를 안지도 못했다. 정원 파티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아예 침실에서도 쫓아내려는 걸 절대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정말 얌전히 끌어안고만 잤다. 불끈거려 잠 못 드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색색거리며 잘 잤다.
그녀는 밤이 외로워 홀로 잠 못 드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돈도 권력도 정력도 아니면 무슨 미끼를 던져야 그녀를 잡을 수 있을까.
“혹시 루시아라는 이름 들어봤나?”
답답한 마음에 하소연처럼 툭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제롬이 ‘예.’라고 대답하자 휴고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들어봤다고? 그게 누군데?”
주인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제롬은 긴장했다. 당연히 주인님이 알고 계시려니 생각하고 무심히 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주인은 몰랐던 것 같다.
‘맙소사, 마님. 왜 주인님께서 모르고 계신 겁니까.’
제롬은 안타까움을 담아 마님을 불렀다.
“…마님의… 아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주인은 말이 없었다. 제롬은 식은땀이 났다. 정말 주인께서는 모르고 있었다. 혹시 이 일로 두 분이 또 지난번처럼 심각하게 싸우시는 건 아닐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안사람이 직접 말해 주던가?”
“아닙니다. 레이디 밀튼이 그 이름으로 마님을 칭하는 것을 우연히 들어서 마님께 여쭈었습니다.”
“…알았다. 나가 봐.”
제롬이 나가고 조용해진 집무실에서 휴고는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멍해있었다.
밀튼 남작의 여식이 알고, 데미안이 알고, 하다못해 제롬까지 아는데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 휴고는 새삼스레 다시 충격을 받았다.
그 여자의 마음은 굳게 빗장을 닫아걸었고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전 절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끝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는 서류와 펜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잡아 책상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바위가 짓누르는 것처럼 가슴이 먹먹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헤매는 것 같았다.
형제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원하는 것이 생겼는데 절대 그가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었다. 닿지 않는 곳에 매달린 과실을 바라보며 목이 타 죽어가는 사람의 절실함이 그의 심정에 비견할까.
크게 몇 번 숨을 쉬어도 꽉 막힌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형제의 죽음 이후 그가 사는 세상은 무채색으로 느리게 돌아갔다. 지루하고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는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덧 그의 세상이 선명하게 색을 입고 멈춘 것 같았던 그의 심장이 박동했다.
그녀를 잃으면 그의 세상은 다시 죽어버릴 것이다.
그의 아내로 있는 이상 그녀는 그를 떠날 수 없다. 그러나 결혼이란 제도가 마음까지 묶지는 못했다. 세상의 어떤 계약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닌 이 상태라면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딴 놈에게 주면? 몸은 그에게 주면서 마음은 딴 놈과 나누면?
그는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아득해지는 기분에 눈을 감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깊이 침잠하던 그를 현실로 끌어올렸다. 대답하기 무섭게 아신이 급히 들어왔다.
“전하, 전염병이 창궐했다는 급보입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친다. 잠시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북부는 워낙 넓은 땅이라 쉴 새 없이 일이 터졌다. 물이 새는 낡은 배를 타고 물 위에 떠있는 것처럼 구멍 하나를 막으면 또 어디선가 물이 들어왔다.
다 내던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고 겨우 의욕을 끌어올렸다.
“이 날씨에 무슨 전염병?”
“수십 명의 영지민이 같은 증상을 호소하며 집단 발병했다고 합니다. 로암에서 말을 달려 서너 시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사태를 더 지켜보지 않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휴고는 즉시 몸을 일으켰다. 정말 전염병이라면 로암으로 번지는 결과는 최악 중 최악이었다.
“즉시 출발하겠다. 기사들 대기시켜. 승마 가능한 의사도.”
“예. 한데 마침 필립 경이 로암에 머물고 있다 합니다만 필립 경에게 준비하라 할까요?”
휴고는 인상을 썼다.
“그 늙……. 필립은 제외. 딴 의사 찾아.”
아신은 대답하고 물러갔다. 그는 서류를 대충 정리하고 잠시 후 집무실을 나왔다. 소식을 전해 들은 제롬이 발 빠르게 주인의 이름 없는 백마를 밖에 대기해 놓았다. 휴고는 다급히 달려오는 기사 중 하나에게 의사를 데리고 뒤따라오라 명하고 기사들 몇 명과 먼저 출발했다.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자리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도, 웃지도, 찻잔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화사한 화장과 옷차림으로 한껏 치장한 여자들이 하나같이 무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괴기스러웠다.
시작은 웨일즈 백작부인이었다. 루시아는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껴 그녀에게 물었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웨일즈 백작부인.”
“오늘의 파티는 여인들의 자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취지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직 아이일 뿐이에요. 비록 사내아이지만, 이런 사례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수도에서는요.”
루시아는 마지막 말을 유난히 강조해서 말했다. 북부 사교계는 수도 사교계에 비하면 규모나 사람이나 비교할 수 없었다. 북부 사교계의 유명인사라고 잘난 척해봤자 어차피 우물 안 개구리.
루시아는 백작부인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 단어를 골라 강하게 경고했다.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어떻겠냐고.
“그리 말씀하시니 드릴 말씀은 없군요.”
웨일즈 백작부인은 일부러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노회한 백작부인은 수도를 거론하는 공작부인의 도발 정도는 우스웠다.
‘역시 본색을 숨기고 있었던 게야.’
티파티에서 내보이는 얌전하고 순한 모습은 역시 거짓이었다. 제법 앙큼하지 않은가. 백작부인은 공작부인이 북부 사교계에 관심이 없는 척하는 모습은 다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공작부인의 신분을 이용해서 사교계를 휘두를 욕심이 없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지금은 소극적으로 탐색하고 있는 과정이 틀림없었다.
‘공작부인의 지위만으로 북부 사교계를 휘어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신분과 서열이 절대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유일한 세상이 있다면 사교계였다. 왕비라는 신분으로 수도 사교계를 지배할 수 없는 것처럼 북부 사교계도 마찬가지였다.
‘공주님 출신의 공작부인이라는 자리는 허울만 좋을 뿐이지.’
공작부인이 조금만 머리를 굴릴 수 있다면 그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백작부인은 수도 사교계에 관심이 많아서 소문에 밝았다. 그래서 현재 수도에 공작부인을 두고 어떤 소문이 나돌아 다니는지 알고 있었다. 소문이 전부 진실은 아니겠지만, 북부 사람들이 모르는 많은 것들을 백작부인은 알고 있었다.
공작부인은 내세울 친척 하나 없는, 수많은 공주 중 하나에 불과했고 공작과의 결혼에는 의문점이 많았다. 신빙성 있는 뒷소문에 의하면 왕과 공작이 무슨 계약을 했을 거라고 했다.
공작부인을 절세미인으로 묘사한 소문을 듣고는 배꼽을 잡았다. 공작 부부의 금실이 좋다는 북부에 나도는 소문도 백작부인은 헛소문으로 치부했다. 백작부인은 타란 공작의 여성 편력을 잘 알고 있었다. 공작은 절대 한 여자에 정착할 사내가 아니었다.
‘공작부인. 그 자리를 오래 붙들고 계시려면 도움이 될 벗을 곁에 두셔야지요. 그런 뒷방 늙은이가 아니라.’
공작부인이 처음으로 만나 가르침을 청한 사교계 인사가 코르잔 백작부인이라는 사실은 제법 화제였다. 웨일즈 백작부인은 그 일로 유감이 있었다. 영향력은 자신이 훨씬 우위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코르잔 백작부인을 대모라 부르며 우러러봤다.
‘고작해야 신부 수업이나 하는 뒷방 노인에 불과한 것을.’
나이가 얼마 더 많다는 이유로 고고한 척 훈계를 늘어놓는 코르잔 백작부인이 꼴도 보기 싫었다. 요즘 눈에 안 띄어 속이 다 시원했다.
웨일즈 백작부인은 오늘 정원 파티에서 어떤 수를 쓰든 자신의 존재를 공작부인에게 부각하려고 했다. 그런데 때마침 공작부인이 아주 좋은 수단을 제공해 주었다. 백작부인은 소공자가 등장한 순간부터 순식간에 계산을 마쳤다.
웨일즈 백작부인은 침묵 시위를 시작했다. 명분은 파티 취지였다. 데미안은 공작이 공표한 후계이며 그걸 공식적으로 문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백작부인이 내세운 명분이 단지 명분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백작부인을 시작으로 나이 든 귀부인들이 함께했고, 눈치 없이 수다를 떨던 젊은 아가씨들은 시간이 지나자 주변을 의식하며 소극적으로 동조했다. 파티 시작을 선언한 지 족히 반시간이 지났으나 사람들은 표정 없는 인형처럼 앉아있었다.
모두가 전부 동조하지는 않았다. 이 상황에서 케이트는 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일부러 소리를 내며 차를 마시고 과자를 먹었다. 그러나 혼자 상황을 바꾸기는 역부족이었다.
웨일즈 백작부인은 케이트가 대적하기 버거운 상대였다. 케이트는 뒤에 종조모님이 버티고 있으니 대놓고 반발할 수 있다지만, 다른 젊은 아가씨들은 그럴 수 없었다.
파티 깨기. 주최자와 참석자 간에 발생하는 힘겨루기 현상이었다. 또는 주최자가 사회적, 도덕적 비난을 받을 만한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 사교계 방식으로 하는 처벌이 파티 깨기였다.
방법은 간단했다. 참석자들은 침묵할 뿐이다. 처벌의 목적이 아닌, 파티 중에 발생한 문제 때문에 비롯된 파티 깨기라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참석자들은 입을 꽉 다물고 불참을 선언했다.
누군가가 주도해서 시작하면 주도자와 비슷한 영향력을 가진 유력 인사가 반박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들은 묵인하며 따르는 것이 규칙이었다.
‘종조모님이 계셨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케이트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파티 깨기는 여자들의 전쟁이었다. 남자의 전쟁에서 볼 수 있는 죽음과 함성은 없었다. 그러나 때로는 더 잔혹하고 살벌했다.
또한, 남자의 전쟁과는 다르게 사교계 힘겨루기에서는 신분과 서열이 절대적이지 않았다. 신분으로 찍어 내려서 상황을 모면하면 서서히 사교계에서 따돌림당하게 되어있었다.
루시아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하녀들은 하얗게 질려서 구석에 몰려있었다. 오히려 이 자리에서 데미안의 표정이 가장 덤덤했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파티 깨기가 일어나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소규모의 티파티나 남녀 구분 없이 많은 사람이 참석하는 무도회에서는 불가능했다. 여자들만 참석하는 적당한 규모의 모임. 딱 오늘과 같은 자리에서 발생하곤 했다.
꿈속에서 경험한 바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로 파티 깨기가 일어난 적은 없었다. 사교계의 알력 다툼, 무리를 짓는 여자끼리의 대립, 불륜을 저지른 주최자를 처벌하기 위해 불륜 상대의 부인이 주도하는 복수. 대부분이 그런 이유였다.
루시아는 파티 깨기가 어떤 식으로 마무리되는지 알고 있었다. 주최자나 참석자가 겉보기만 그럴듯한 화해를 하면 무사히 파티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대개 주최자가 물러났다. 파티가 중간에 어그러지면 큰 망신이기 때문이다.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은 명백했다. 데미안을 내보내면 된다. 그러나 루시아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웨일즈 백작부인은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다. 루시아는 사교 활동에 미련이 없었다. 우아한 척 대화로 물고 뜯는 사교 경험은 꿈속으로 충분했다.
루시아는 서늘한 음성으로 사람들을 돌아보며 선언했다.
“유감스럽지만, 오늘은 여러분과 더불어 즐거운 시간을 나누지 못하겠군요. 이만 자리를 파하겠습니다.”
귀부인들이 술렁거렸다.
“배웅은 하지 않겠어요. 여러분들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군요.”
그녀는 하녀들에게 명했다.
“손님들을 밖으로 안내해 드려라.”
구석의 하녀들이 어깨를 펴고 짐짓 결연하게 대답했다. 마님의 당당함은 고용인들의 자존심을 살렸다. 하녀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귀부인들의 가면이 깨지며 자기들끼리 마주 보았다.
“여러분은 오늘 타란의 안주인이며 공작부인인 나를 기만했습니다.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머지않아 깨닫게 될 겁니다.”
루시아의 차가운 협박은 사교계의 룰에 걸맞지 않았다. 특히 나이 든 여자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도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아무리 공작부인이 사교계에 영향력이 없다 해도 서열을 대놓고 무시하는 짓을 했다가는 뒷감당이 두려웠다.
“언젠가 여러분의 아들, 혹은 손자는 내 아들을 주인으로 모시게 되겠지요. 부모가 자식의 앞날을 망친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로군요.”
루시아는 싸늘하게 일갈하며 몸을 돌려 그대로 중앙탑으로 들어가 버렸다. 공작부인이 사라지자 귀부인들의 술렁거림은 더 커졌다.
“아우,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그러게 말이에요. 좋게 넘어가지 뒷일도 생각 안 하고 저지른대요.”
“공작부인께서 화가 보통 나신 게 아니에요. 원래 평소에 온화한 사람이 화가 나면 무서운 법이거든요. 어쩌실 겁니까?”
파티 깨기를 주도한 웨일즈 백작부인을 비롯한 10여 명의 중장년 귀부인들에게 비난이 집중되었다. 자기들도 동조한 주제에 잘못을 떠넘기고, 그렇다고 웨일즈 백작부인을 비난하는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한심한 작태들이었다.
“크흠.”
뭇시선이 불편한 주도자들은 떫은 표정으로 가장 먼저 자리를 떴다. 웨일즈 백작부인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이런 식으로 될 리가 없는데 어째서…….’
백작부인이 파티 깨기라는 강수를 둔 것은 나름 계산한 바가 있어서였다. 파티 깨기는 아무리 사교 경험이 노련한 사람도 정작 자기 일로 닥치면 혼란에 빠지게 된다.
백작부인은 갓 결혼한 어린 공작부인의 사교계 경험이 부족해서 파티 깨기가 무엇인지도 모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당황한 공작부인은 반드시 소공자를 내보내서 사태를 수습할 거라고 생각했다. 소공자는 공작부인의 친자가 아니니까.
어느 날, 백작부인은 공작부인이 공작의 혼외 자식을 데리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 생각했다.
‘제법이야.’
공작 부부는 허울만 부부였다. 공작부인이 자기 자리를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생각해 낸 한 수가 소공자인 것이 틀림없었다.
공작부인이 소공자를 어여뻐하는 모습은 진심이 아닐 것이다. 어느 정신 나간 여자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제 자식 앞길을 막는 짓을 할까.
공작부인의 빤한 속셈에 장단 좀 맞춰볼까 해서 일부러 어려서 뭘 모르신다는 식으로 비꼬는 말을 흘렸다. 공작부인이 혼외자를 데리고 다니는 행위 그 자체를 불쾌해한다고 남들이 생각하게 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꼭 만나서 긴밀한 대화를 통해야 이루어진다면 그건 아마추어였다. 진정한 프로는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다.
파티 깨기로 공작부인이 못 이기는 척 물러나면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해서 씩씩대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썩 나쁘지 않은 사건이었음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공작부인은 남들이 보기에는 최선을 다했다. 혼외자식을 감싸려다 망신을 자초했다. 누가 봐도 넉넉한 포용력을 지닌 너그러운 어머니였다.
공작부인의 마음이 풀릴 즈음 슬그머니 숙이고 들어가면 된다. 그러면 상했던 공작부인의 자존심도 회복되고 두 사람은 긴밀한 친분을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웨일즈 백작부인의 계산속이 그러했다.
백작부인의 가장 큰 실수는 루시아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잦은 만남을 가졌다 해도 백작부인과 루시아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사상과 신념은 닿을 수 없는 평행선이었다.
지나치게 몇 수 앞을 내다보며 머리를 굴린 북부 사교계의 거물은 제 발등을 제가 찍은 셈이 되었다.
“어떡하지요? 바깥분이 아셨다가는 경을 칠 거예요.”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 뻗으랬다고. 타란 공작께서 어떤 분인지 잘들 아시면서 왜.”
“여자의 사교계 일이에요. 남자가 나서는 건 경우가 아니죠.”
“모든 일이 다 그렇게 경우 따져 일어난답니까? 공작 부부의 금실이 꽤 좋다고 소문이 파다한데. 여자가 속살거리면 어느 남자가 당해요?”
“모르겠네요. 한동안 외출 삼가고 조용히 있어야겠어요.”
“도대체 웨일즈 백작부인은 왜 그리 공작가 후계 일에 파르르 하신대요?”
“모르셨어요? 웨일즈 백작께서 혼외자로 들인 딸을 그렇게 끼고 돌았다잖아요. 결국, 혼외자 딸을 백작가에 시집보냈죠.”
“어머 그럼 백작가와 사돈 맺었다던 딸이…….”
“재미있는 일은 웨일즈 백작부인이 본인 며느리의 눈물을 빼가며 얼마 전에 혼외 손자 둘을 입적하게 했답디다.”
“세상에.”
데미안은 차가운 붉은 눈으로 귀부인이 하는 짓거리를 눈과 귀로 담았다. 소년은 오늘 장차 밟고 올라서야 할 자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목격했다. 루시아가 원했던 방향과는 전혀 달랐지만, 어쨌든 훌륭한 배움을 얻었다.
일부 여자들이 무심코 데미안과 눈이 마주쳤다가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삼삼오오 남아서 떠들던 여자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수가 많이 줄었을 때 데미안도 그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