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장 데미안 (4)
정원을 따라 걸으며 데미안이 계속 루시아를 곁눈질했다.
“하고 싶은 말 있어?”
“좀 신기합니다. 전하를 무서워하지 않으시니까…….”
“데미안. 남편을 무서워하는 부인이 어디 있어. 네가 커서 나중에 결혼했을 때 네 부인 되는 사람이 널 무서워하면 좋겠니?”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어린 소년은 아직 그런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소년에게 까마득히 높은 산꼭대기 같은 공작을 루시아가 굉장히 편하게 대하는 모습이 충격이었다.
데미안의 눈에 루시아는 작고 순한 초식동물이었고 공작은 크고 사나운 육식동물이었다. 상극인 두 존재가 어울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년은 혼란을 느꼈다.
“데미안, 아버지가 무섭니?”
데미안은 망설이다가 주저하며 대답했다.
“…네, 조금은.”
“왜? 네게 무섭게 구신 적이 있어?”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네가 아버지를 잘 알지 못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야. 따라 해봐. 아버지.”
“…아버지.”
“옳지.”
루시아는 아이가 기특해서 머리에 손을 뻗었다. 데미안이 흠칫 놀라며 반사적으로 주춤 물러났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던 루시아도 놀라서 움찔했다. 그들 사이에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미안, 나도 모르게. 기분 나빴어?”
“아… 아닙니다. 조금 놀라서…….”
데미안은 지금껏 타인과 그 정도 가까운 접촉을 해본 적이 없었다.
“기분 나쁜 게 아니라…….”
“아이를 칭찬할 때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거든. 네가 싫어하면 하지 않을게.”
조금 우물쭈물하던 데미안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싫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지금 쓰다듬어도 괜찮아?”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는 야생 동물을 향해 나는 너의 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천천히 손을 뻗어서 까만 정수리의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다. 어려서 그런지 아이의 머리카락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몇 번 쓰다듬어 주고 루시아는 손을 뗐다. 첫날 소년을 봤을 때부터 꼭 하고 싶었던 걸 했더니 선물을 받은 것처럼 설다.
볼을 꼬집어보는 건 언제 할까. 루시아가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걷기 시작하자 데미안도 얼른 따라가 옆에 섰다.
“루시아.”
“응?”
“아까 식당에서 왜 화를 내신 건가요?”
“응? 그건 화난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도무지 설명할 수도, 설명하고 싶지도 않아서 루시아는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화제 전환을 할 수 있을지 골몰했다. 마침 머릿속에 때마침 잊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아! 데미안. 파티에서 입을 네 연미복이 없구나. 그걸 생각 못 했어. 혹시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니?”
“없습니다.”
“그래. 있을 리가 없겠지. 내내 학교에 있었는데.”
“루시아, 전 참석하지 않아도…….”
데미안은 이 기회에 어떻게 해서든 발을 빼고 싶었다. 이미 승마장에서 넘치도록 많은 여자의 시선을 받았다.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상관없지만, 루시아를 향해 이상한 눈빛을 하는 것은 불쾌했다. 괜히 자신 때문에 루시아가 그런 대우를 받기를 바라지 않았다.
“아니야. 참석해야 해. 으음…….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지?”
루시아는 가급적 데미안의 의사에 반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지만, 이번 정원 파티에는 반드시 참석시킬 생각이었다. 승마장에 데리고 다니며 인사를 시켰어도 공식적인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정원 파티는 공식적인 사교 모임이었다.
이번에는 규모가 커서 북부 사교계의 유명 인사들을 모두 초대했다. 그런 자리에서 정식으로 데미안을 소개하면 데미안의 위상이 확 달라질 것이다.
물론 데미안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여자들만 참석하는 정원 파티라서 그 자리가 사교계 데뷔는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사교계에 등장할 아이들이 미리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주로 파티 주최자의 자녀들이 그런 특권을 누렸다.
큰 비용과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귀부인들이 굳이 파티를 여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아이가 입을 연미복은 기성복으로 구매해도 될 거야.”
들려오는 목소리에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섰다. 어느새 다가온 휴고가 그들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로암에 와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가깝게 나란히 선 데미안이 멍하게 고개를 들어 거대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정원 파티니까 복장에 그리 까다롭게 신경 쓸 건 없어.”
“다행이에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기성복이라면 데미안이면 열두 살 정도의 것을 구해야 하려나요.”
“녀석은 여덟 살이야.”
“데미안은 보통 여덟 살보다 훨씬 크다고요. 또래와 비교하면 거인이에요.”
휴고가 눈을 내리깔아 데미안을 보았다. 이 조그만 녀석이? 그런 시선이었다.
“장차 당신보다 더 클지도 모르죠.”
“흐음.”
중얼거리는 휴고의 음색이 어딘지 모르게 삐딱했지만, 루시아는 알아채지 못하고 데미안만 눈치를 살폈다. ‘내가 감히 아버지보다 클 수 있을 리 없어.’라고 생각하는 데미안은 혹시 루시아의 말이 아버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까 봐 걱정이었다.
“당신도 어릴 때 또래보다 훨씬 키가 컸을 것 같아요. 그렇죠?”
“기억 안 나.”
또래와 키를 비교하는 팔자 좋은 생활은 하지 못했다. 휴고가 데미안의 나이였을 때 주변에 있던 노예 아이들은 대부분 제 나이조차 몰랐다. 그 역시 죽은 공작에게 납치되듯 로암에 오기 전까지는 정확한 자기 나이를 몰랐다.
“일이 많으신 것 아니었어요? 바로 집무실로 들어가셨을 줄 알았어요.”
“내가 방해한 건가?”
휴고는 뚱한 어조로 말했다.
“원래 오래 나갔다 오시면 더 바쁘시잖아요. 마침 잘됐어요. 데미안이 아직 당신께 정식으로 인사 못 한 것 같던데요. 데미안, 인사드리렴.”
데미안은 머뭇거리다가 루시아의 눈치를 한 번 살피고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숙였던 고개를 들며 슬며시 루시아를 보자 루시아가 입 모양으로 ‘아버지’를 그렸다. 데미안은 용기를 짜냈다.
“…아버지.”
휴고의 눈썹이 스윽 올라갔다. 딱히 그 호칭이 불쾌한 건 아니었지만, 익숙하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혐오와 증오 때문인지 휴고는 한 번도 입 밖에 뱉은 적이 없는 말이었다.
그의 침묵이 좀 길어지자 루시아가 슬쩍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눈을 마주치는 그를 향해서 과할 정도로 생글생글 웃어 무언의 압박을 주었다.
그는 무심하긴 해도 눈치 없는 남자는 아니었다. 휴고는 나지막하게 답했다.
“…그래.”
소년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루시아는 흐뭇하게 보면서 만족했다. 그가 어서 데미안의 귀여움을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이걸로 되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조금씩 천천히.
“산책하실 거예요? 바쁘지 않으세요?”
“산책하려고 나온 거야.”
왠지 자신을 자꾸 쫓아내려 한다는 느낌이 영 못마땅한 휴고가 다시 뚱하게 답했다. 루시아는 오늘 내내 회의하느라 그가 좀 피곤한가 보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럼 셋이 같이 걸어요. 셋이 함께하는 산책이 오늘 처음이군요.”
“…같이?”
휴고가 흘끔 데미안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버지의 눈길이 닿자 소년은 움찔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왠지 이 자리에 자신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종이 다른 초식동물 루시아는 눈치채지 못하는 사실을 비록 새끼에 불과하지만, 기본적으로 육식동물이라는 종이 같은 데미안은 대왕 사자의 으르렁을 민감하게 포착했다.
“전 들어가 보겠습니다. 봐야 할 책이 있어서.”
“데미안, 식사 후 바로 책상에 앉으면 소화도 안 되고 좋지 않아.”
“소화 다 됐습니다. 오늘 꼭 봐야 하는 책입니다.”
데미안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마치 도망치는 것처럼 재빨리 사라졌다. 루시아는 데미안의 뒷모습을 아쉽게 바라보았고, 휴고는 만족감에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 영 쓸모가 없지는 않군.’
소년이 그토록 받고 싶었던 아버지에 의한 인정은 굉장히 쉽게 이루어졌다.
“녀석과 사이가 좋군.”
“친하게 지내라고 데미안에게 오라고 하신 줄 알았는데요.”
서로 얼굴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데미안을 불렀다. 휴고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아직 어리니까 여덟 살짜리 아들을 포용하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데미안도 살갑지 못한 사내아이라서 둘이 친하게 지낼 여지는 없을 것 같았다. 서로 이를 세우지만 않으면 소 닭 보듯 해도 관여치 않으려 했다.
“정원 파티에는 왜 데려가려는 거지?”
“데미안을 사람들에게 소개할 기회가 거의 없으니까요. 당신 아들이고, 이젠 내 아들인데 사람들이 얼굴도 몰라서는 곤란하잖아요.”
“…쉽군.”
“네?”
“당신 입에서 아들이란 말이 참 쉽게 나와서.”
그가 하는 말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어서 루시아는 걸음을 멈추었다. 휴고도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제가 아이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으면 하세요? 혹시 제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아니야. 비비안. 그런 거 아니야.”
휴고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당신이 녀석과 그렇게 잘 지낼 줄은 몰랐어.”
아까 그녀가 데미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순한 강아지처럼 머리를 얌전히 내밀고 있는 데미안이 낯설어서 기묘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느닷없이 떠오른 과거의 기억 한 조각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야! 머리 만지지 말라니까!”
하지 말라고 역정을 내도 툭하면 제 머리를 헤집는 휴고에게 휴는 버럭 소리쳤다. 머리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약점이었다. 적에게 노출되면 죽음과 직결이었다. 손목이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용병은 절대 남의 머리에 손대지 않았다.
“이건 친하다는 표시라니까.”
휴고는 늘 실실 웃기만 했다.
“속없는 새끼. 넌 뭐가 좋아서 매일 쪼개고 있어?”
“웃어. 웃으면 복이 온대잖아, 휴.”
“…쓸개 빠진 놈.”
휴고는 제 머리를 불쑥 휴 앞에 들이밀었다.
“너도 만져봐.”
“치워.”
“해보라니까. 원래 이런 쓰다듬은 부모가 해주는 거래. 근데 우린 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서로가 해줘야지.”
“그딴 거 안 해줘도 되거든.”
“난 해줬으면 좋겠어. 얼른.”
휴는 귀찮아하며 대충 손을 내밀어 휴고의 머리를 한 번 슥 쓰다듬었다. 헤헤 웃는 휴고를 보면서 ‘쓸개 빠진 놈.’ 하고 평소처럼 독설을 던졌다. 하지만 녀석의 머리카락이 손에 닿는 느낌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녀석이 기어오르면 말해.”
“그럴 일 없어요!”
휴고는 되받아치는 그녀를 꽉 안았다. 품 안에 폭 들어오는 작은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품에서 당황한 듯 굳어있던 그녀가 손을 등 뒤로 두르는 것을 느끼며 휴고는 미소 지었다.
가끔 형제의 기억이 떠오르면 그는 달콤한 행복과 저미는 고통을 함께 느꼈다. 그녀의 체온이 몸에 닿자 조금 들뜬 기분이 심장을 헤집는 것 같은 고통을 어느 정도 상쇄했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어. 언젠가는 소개해 줄게.”
어느 날, 형제는 그렇게 말하며 행복하게 웃었다. 형제가 살아있다면 그도 말해 주고 싶었다.
‘나도 그런 여자가 생겼어. 이미 난 결혼은 했지만.’
그날 저녁에 휴고는 집무실에서 대충 오늘 온종일 했던 회의 자료를 정리하고, 파비안의 보고서를 들추어 보았다.
주로 수도에 관한 소식이었다. 주요 권력자들의 움직임이라든가, 타국 거물의 입국 상황이라든가, 주요 인물들 간의 접촉 상황과 거대 상단의 눈에 띄는 거래 현황을 담기도 했다.
가장 뒷장은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이었다. 파비안은 어차피 올려봐야 주인이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아예 올리지 않을 수는 없어서 추록하는 형식적인 보고였다.
파비안은 일하는 방식이 철두철미했다. 형식적인 보고에 불과한 소문 취합에도 빈틈이 없었다. 공작의 심기를 거슬릴 소문이라도 토씨 하나 빼놓는 법이 없었다.
사실, 소문 취합은 파비안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공작이 넘긴 일거리가 넘쳐나서 야근을 반복하면 더 열심히 눈에 불에 켜고 소문을 모으러 다녔다.
부하의 괘씸한 심술을 알지 못하는 휴고는 비교적 자신을 둘러싼 해괴한 소문들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평소처럼 무심하게 소문을 훑어보던 휴고가 미간을 찌푸렸다. 수도에 흘러 다닌다는 그의 지참금 관련 소문이었다.
“쯧.”
휴고는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왕이 그렇게 입이 가벼워서야 원. ‘그 노친네는 위엄 있는 척 잘 걷다가 꼭 삐끗하지.’라고 퀘이즈는 제 부친을 평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삐끗 정도가 아니라 발모가지가 부러지면 참 좋을 텐데 말이네.’ 하고 말하며 암흑가 두목처럼 음험하게 웃었다.
뒤이은 소문을 읽어가던 휴고의 표정이 점점 묘해졌다. 공작부인이 엄청난 미녀라서 남들이 보기 전에 공작이 낚아채 영지로 끌고 갔다는 내용이었다.
“으음…….”
그녀를 절세미인으로 묘사한 소문의 대목에서 휴고는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으나 ‘영 터무니없는 말은 아닌데.’라고 생각했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몰래 결혼했다는 대목에서는 ‘사실 관계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아도 그런 대로 맞는 소리군.’이라고 생각했다.
딴 놈의 시야에서 꼭꼭 감추기 위해서 승마장을 짓거나 뱃놀이를 제한하는 등 그의 노력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공작부인을 영지로 끌고 갔다는 내용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혼하자마자 영지로 온 건 맞으니까.
‘별문제될 소문은 아니군.’
그는 그렇게 판단하며 서류를 덮었다.
루시아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감싸며 침실로 들어왔다. 그가 없을 때는 하녀들이 침실까지 들어와 마무리 시중을 들어 주었는데 그가 오자마자 다들 알아서 침실 문 앞까지만 따라오고 줄행랑이었다.
화장대에 앉아서 머리카락을 꾹꾹 수건으로 눌러가며 물기를 제거했다. 한 달 가까이 남의 손에 맡겨두다가 직접 하려니 더디었다. 아무래도 하녀 여럿이 붙어 등 뒤에서 꼼꼼하게 말려주는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침실 문이 열리며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루시아는 흘끔 그를 보고 다시 화장대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가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와서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놀란 그녀는 들고 있던 수건을 놓쳐 떨어뜨렸다.
“휴! 머리를 더 말려야 해요.”
이대로 자면 내일 아침 사자 머리가 된다고요!
“나중에 해.”
“나중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녀가 뭐라 하건 말건 그는 그녀를 곧장 침대로 데려가 내려놓았다. 여전히 머리 어쩌고 종알거리는 입술을 막아버렸다. 단 과실을 베어 무는 것처럼 그녀의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 바로 혀를 밀어 넣었다. 버둥거리는 그녀의 팔목을 침대로 누르면서 그는 더 깊이 그녀의 입안을 탐했다.
그녀는 아직도 뭘 모른다. 어설픈 반항은 오히려 남자를 부추긴다는 것을. 부드러운 입술에서 단맛이 스미는 것 같아서 혀로 핥았다. 여리고 말랑한 혀를 건드리자 놀라 움찔거렸다.
목욕한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입안에 따끈한 열기가 있었다. 그녀의 내부도 이처럼 따뜻하겠지 생각하니까 아랫배가 지끈했다.
그는 흥분한 하복부를 그녀의 허벅지 안쪽으로 바싹 밀착해 지그시 눌렀다. 어설프게 그녀의 몸을 감싼 목욕 가운을 들추면 곧바로 들어갈 수 있는 아슬아슬한 자세였다.
입구부터 꽉 조일 그녀의 여성을 생각만 해도 하체로 피가 몰렸다. 그녀도 그걸 느꼈는지 자꾸 틀던 몸이 얌전해졌다. 슬며시 잡고 있던 손목을 놔주자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으며 매달렸다.
그의 혀는 적절한 강약을 주며 그녀의 입안을 탐색했다. 새침하게 도망치는 그녀의 혀는 간단히 그에게 제압되었다. 그가 그녀의 입안을 희롱하며 진한 키스를 퍼부으면 루시아는 당해내지 못하고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당장에라도 교합할 것처럼 은밀한 곳에 맞닿은 뜨거운 그의 상징은 짜릿한 불안감을 주며 그녀를 더욱 고조시켰다.
혀뿌리가 얼얼하도록 그의 혀에 휘말려 강하게 빨리는 순간, 루시아는 다리 안쪽이 찌릿해서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들썩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밀착해 있던 그의 성기를 스쳐 문질렀다. 그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입술을 떼었다.
긴 키스에 혼이 나간 표정으로 루시아는 숨을 가쁘게 쉬며 그를 응시했다.
“생각을 해봤는데.”
그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도톰하게 부푼 그녀의 붉은 입술을 보는 눈빛이 이글거렸다.
“당신이 빨리 지치는 건 한 번에 몰아 해서 그런 것 같아. 방식을 바꿔보려고. 한 번 하고 좀 쉬다가 또 하고, 쉬다가 또 하고. 어때?”
빨갛게 물든 얼굴로 루시아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를 향해 인상을 썼다.
“그런 거로 생각 같은 거 하지 마요.”
“그런 거라니. 중요하다고.”
그는 부풀어 오른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그럼 오늘은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 볼까.”
그의 눈빛이 마치 도약 직전의 맹수 같아서 루시아는 긴장된 침을 삼켰다.
“저는… 찬성하고 싶지 않은데요.”
“음……. 그러면 오늘은 시험판.”
“그게 뭐가 달라요!”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녀의 가운 앞섶을 잡아 양쪽으로 벌렸다. 뽀얀 가슴이 출렁 흔들리며 드러났다. 그녀의 몸매를 잠시 눈에 담고 두 손 가득 가슴을 쥐었다. 조금 강하게 힘을 주자 그녀의 몸이 흠칫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배꼽 부근부터 혀를 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길고 긴 밤의 시작이었다.
두 다리가 그의 어깨에 걸려 엉덩이가 들렸다. 그가 깊이 안쪽까지 들어와 자극했다. 몸을 디딘 그의 팔을 잡고 그녀는 그의 성기가 진입해 들어올 때마다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물었다. 강하게 저릿한 느낌이 한 번씩 내부를 칠 때마다 수면의 표면 장력에 몸이 부닥치는 것 같았다.
“아!”
그녀가 미간을 일그러뜨리는 모습을 보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분신을 완전히 다 삼킨 내벽이 자잘하게 경련하며 자극했다. 격하게 마구 찔러 넣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았다. 그녀가 괴로워 보였다.
“힘들어?”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배위 다음으로 오래 지속하기 힘든 자세였다. 그가 깊이 들어와 자궁까지 건드는 감각은 너무 자극이 심했다. 하지만 그는 좋아하는 자세였다. 뿌리 끝까지 그녀의 질벽에 바짝 죄는 느낌은 희열 같은 쾌감을 주었다.
그는 그녀의 발목을 잡아 옆으로 내렸다. 후측위 자세로 허벅지 안쪽을 스쳐서 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조금 얕게, 그리고 속도감 있게 허리를 움직였다.
“으응……. 흣…….”
몸을 옆으로 살짝 돌려 누운 상태로 그녀는 신음을 흘렸다. 적당한 자극이 좋은지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그녀는 약한 자극은 약한 자극대로, 강한 자극은 강한 자극대로 반응이 달랐다. 그녀는 성격만큼이나 얌전한 섹스와 적당한 자극을 좋아하지만, 그는 과격하고 강한 자극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얼마간 괴롭히며 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그가 무척이나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하겠지만 뭘 모르는 소리다. 그가 얼마나 제 욕심을 참아가며 배려해 주는지 그녀는 모른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날뛰었다가는 그녀는 며칠 일어나지도 못하고 몸살을 앓을 것이다. 그는 매일 그녀를 안기 위한 노력으로 아주 섬세하게 자신을 절제하고 있었다. 의사 조언을 충실히 따라 닷새에 하루를 지키는 것도 그의 노력 중 하나였다.
“흐읏!”
그녀의 몸이 한 번 크게 떨리며 내부가 좁게 움츠러들었다. 적당한 자극의 누적으로 적당히 기분 좋은 오르가슴을 느낀 그녀의 몸이 늘어졌다. 그는 그녀의 안에 자신을 묻은 채 내부의 조임이 풀릴 때까지 숨을 몰아쉬며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그는 그녀 몸을 굴려 엎드리게 했다. 편히 엎드린 자세로 누운 그녀를 얼마간 무게를 실어 누르며 그는 뒤에서 짧고 강하게 치고 들어갔다.
“아!”
그는 마치 박자를 주는 것처럼 강하게 들어왔다가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탁, 탁 끊어지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녀는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단단한 끝이 안쪽을 건드릴 때마다 시트를 꽉 쥐었다 놓았다.
“아!”
그의 몸이 위에서 내리누르는 무게마저 쾌감으로 다가왔다. 엉덩이 안쪽 살을 스치며 내부로 파고드는 느낌이 적나라했다. 아픈 건 아닌데 자꾸 비명이 나왔다.
그녀는 때때로 그의 부드러움이 오히려 거칠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건 마치 사나운 짐승이 뒷목을 물고 흔드는 것처럼 그녀를 무력하게 했다. 동시에 그녀를 강하게 열망하는 사내의 욕망이 포효하는 것 같아 짜릿하기도 했다.
루시아는 그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찔러 넣어 만져보았다. 살짝 물기가 있는 머리카락이 손가락을 스치는 느낌이 좋았다. 그의 입술이 목덜미에서 목을 타고 천천히 올라갔다. 팔을 디뎌 그녀에게 기대고 있던 상체를 일으킨 그가 그녀의 눈과 입술에 가볍게 여러 번 입을 맞추었다.
“…데미안 말이에요.”
휴고는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 자신의 허리 쪽으로 감았다. 그녀의 안쪽은 빠져나가기 무섭게 관성처럼 좁아져서 그가 만든 길을 처음으로 되돌렸다. 그러면 그는 다시 빡빡한 속살을 헤치며 진입해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했다. 도돌도돌하게 솟은 돌기가 빼곡한 그녀의 내벽은 끊임없이 그를 자극했다.
“보자마자… 놀랐어요. 당신하고… 굉장히 닮아서. 으응…….”
할퀴면서 빠져나간 그가 단번에 허리를 밀어 올리자 루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내 그가 천천히 속도에 강약을 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고 그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렸다.
“아……. 그… 그래서.”
루시아는 숨을 헐떡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조금 두근…거렸어요. 흡…….”
그가 거칠게 몸을 가르고 들어왔다. 루시아는 그의 어깨에 손톱을 세웠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삼키고 단번에 혀가 안으로 들어와 입 안쪽을 자극했다. 짤막한 키스를 끝낸 그가 목선을 따라가며 어깨까지 입술을 붙였다.
“…그 녀석을 보고 두근거렸다고? …왜?”
“당신…을 보는 것 같아서…….”
“그런 꼬마가 날 닮았다 하기엔 한참 일러.”
“한참은… 무슨. 10년만 있어도 될 텐데요. 아!”
더 대화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강한 움직임을 따라가면서 루시아는 교성을 지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휴고는 베개를 겹쳐 쿠션을 만들어 등에 받쳐 기대앉았다. 루시아는 그의 허벅지에 앉은 채 상체를 모두 그의 복부와 가슴에 축 기대 늘어졌다. 고개를 옆으로 틀어 머리를 가슴에 대고 그녀의 두 팔도, 다리도 힘없이 늘어졌다. 그의 손이 마치 달래는 것처럼 그녀의 등을 아래위로 천천히 오갔다.
뜨거운 열기가 어느 정도 가셨으나 여운은 여전히 남았다. 무엇보다 그의 중심은 아직 그녀의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거대하게 일어난 그의 것은 내부에서 조금씩 꿈틀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루시아는 그가 언제 또다시 움직임을 재개할지 몰라서 조마조마했다.
그가 시도하는 새로운 방식이 그녀는 달갑지 않았다. 잠을 재워주지도 않고 아주 밤을 새울 기세였다.
“데미안을 왜 기숙학교에 보내셨어요?”
귀족 아이들은 어려서 대개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았다. 학술원에 보내는 유행이 일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차남 이하가 열다섯 살 전후에 경험을 쌓기 위한 목적으로 학술원을 택했다. 공부보다는 각지에서 오는 귀족 아이들과 교류하고 인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공작가 후계 신분이 기숙학교 과정을 수료하는 일은 전무했다. 대개 정말 순수하게 공부를 목적으로 학자가 되고 싶으면 택하는 과정이었다.
“내가 신경 써줄 수 없으니까.”
필립이 데미안을 데리고 왔을 때, 휴고는 한창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다. 겨우 시간을 내어 일 년에 몇 번 로암에 들르면 볼 때마다 무럭무럭 자라있는 아이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아버지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그에게 난데없이 나타난 아이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아이에게는 안전한 보금자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아마 데미안이 없었다면 그는 진즉 타란 가문을 내팽개치거나 조각내 밟아버렸을 것이다.
필립이 그런 점을 파악해서 아이를 데려왔나, 생각이 문득 들었을 때는 이미 꽤 시간이 흐른 후였다.
데미안이 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 전쟁의 분위기가 느릿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그의 시간에 여유가 생기고 생각이 많아졌다.
상황을 보니까 전쟁이 더 확대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전쟁이 체질에 맞았다. 북부로 돌아가서 지루한 서류 작업에 치일 생각을 하자 지긋지긋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는 의문을 가졌다. 타란 가문 따위가 어찌 되든 그가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전쟁 때문에 오래 북부를 떠나 있으면서 자신이 북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투박하며 거친 그 땅이 마음에 들었다. 북부가 평온하려면 타란 가문이 건재해야 했다.
후계를 만들어 물려주면 되겠군. 결론을 내린 그는 데미안을 후계로 공표했다. 그는 다른 자식을 얻을 생각이 없고, 아예 남을 데려다 양자로 삼는 것보다는 그의 아들로 알려진 데미안을 후계로 삼으면 반발은 없겠지 생각했다.
그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결정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가신들은 물론이고 북부 귀족들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왜 그런지 알아봤더니 그런 전례가 없단다.
그는 코웃음 쳤다. 전례? 그가 하고자 하면 그때부터 전례였다. 귀족 놈들이 뭐라 찡찡거리든 알 바 아니지만, 오랜만에 본 아이의 눈에 드리운 어둠이 눈에 밟혔다. 아이를 향하는 뭇시선에 마음을 다친 것 같았다.
휴고는 그가 보듬어 키울 수 없다면 차라리 아무 편견 없는 곳에서 바른 교육을 받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구의 시선도 손도 닿지 않는 기숙학교로 보냈다.
루시아는 ‘그 아이가 미워 보낸 건 아니죠?’라고 묻고 싶었다. 거기까지 나가는 것은 과해서 꾹 참았다. 아직 그가 데미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괜히 미리 재단했다가 오히려 그의 감정을 더 악화시킬까 봐 걱정했다.
“이젠 제가 살펴주면 되니까 로암에서 이대로 지내게 하면 안 돼요?”
그의 두 손이 엉덩이를 꽉 움켜잡자 루시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붉은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녀석과 약속했어.”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가느다란 그녀의 몸이 흠칫하자 그의 혀가 살짝 잇자국이 난 목덜미를 부드럽게 핥았다.
“졸업하면 훗날 내 자리를 준다고 했지. 지금 와서 기숙학교 가지 말라고 하면 녀석은 소공자 자리에서 밀려났다고 생각할 거야.”
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게 녀석을 위하는 거라고 생각해?”
“…아뇨. 제가 생각이 부족했어요.”
그의 입술이 짙은 호선을 그렸다. 그가 고개를 바싹 들이밀며 그녀 입술에 가까이 다가갔다.
“귀여워하는 건 좋지만.”
그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정도껏 해.”
루시아는 그의 말을 너무 주제넘게 아이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뜻으로 들었다. 휴고는 아이 문제를 부부의 사적인 시간까지 끄집고 들어오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두 사람의 의사소통에 발생하는 약간의 오해는 지금은 풀어질 수 없었다.
“쉬었지?”
루시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덮었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단단히 붙들어 위에서 아래로 내리찧기를 반복했다. 루시아의 허리가 둥글게 휘어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두 팔을 뒤로 꺾어 그의 다리를 잡아 몸을 지탱하며 그의 거센 율동에 몸이 흔들렸다.
“으응……. 아! 휴!”
몇 번이고 쳐올리며 그녀 안으로 돌진해 들어가던 그가 그녀의 양어깨를 쥐어 앞으로 당기면서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거친 음색으로 그가 속삭였다.
“하아……. 비비안.”
루시아는 그가 한숨처럼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면 오싹 소름이 돋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이제 더는 그가 부르는 비비안이라는 이름이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그렇게 불러줄 때마다 ‘비비안’이라는 또 하나의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았다.
내부가 움츠러들자 그가 신음을 삼키며 그대로 그녀를 침대에 바로 눕혀 위로 올라갔다.
그의 입술이 그녀를 덮쳤다. 그와 동시에 하복부 아래부터 살덩이가 묵직하게 치고 들어왔다. 옆을 딛고 있는 그의 팔을 꽉 붙들며 그녀는 순간의 짜릿함에 몸을 떨었다. 뿌듯하게 안을 채우는 감각이 생생했다. 그녀의 몸은 본능적으로 그를 더 깊이 받아들이기 위해서 허벅지를 열고 엉덩이를 들었다.
숨이 가쁘도록 키스하던 그가 고개를 들고 허리 운동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느리게 움직이다가 느닷없이 빠르게 그녀의 몸 안을 가르고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그의 아래에서 흔들리는 그녀의 입에서는 가냘픈 교성이 흘렀다.
루시아의 눈앞에서 그의 탄탄한 가슴이 움직였다. 쪼개지는 것 같은 잔근육과 작게 솟아있는 유두를 보자 만져보고 싶었다. 그의 허리 움직임이 조금 느려질 때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더듬으며 근육의 움직임을 느껴보았다.
고개를 들어 살짝 혀로 핥았다. 그가 잠깐 몸을 움찔했다. 루시아는 다시 한 번 혀를 내밀어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유륜을 따라 둥글게 핥았다.
그가 작게 욕설을 삼키는가 싶더니 격하게 입술을 겹쳐왔다. 강한 힘으로 퍽퍽 안으로 박아오는 힘에 몸이 아래위로 흔들리고 터지는 비명은 그의 입술에 막혔다.
눈앞이 환해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불꽃이 터지는 것 같기도 해서 지금 눈을 떴는지 감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눈꼬리를 타고 주룩 흐르는 눈물을 그가 핥았다. 머릿속을 모두 태워버릴 것 같은 이 열기가, 힘들지만 좋아서 루시아는 그에게 매달렸다.
그에게 밤새 시달리다가 새벽녘에 겨우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훤하게 밝아있었다. 침대에 축 늘어진 채 루시아는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손끝만 움찔거렸다.
그의 새로운 방식은 집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 달 만에 이틀 연속으로 격한 운동을 했더니 온몸이 노곤하게 욱신거렸다.
그녀는 얕은 수면에 들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모근을 스치는 부드러운 손길이 기분 좋아서 루시아는 눈을 떴다. 언제 들어왔는지 그가 곁에 걸터앉아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고 있었다.
몽롱한 기분으로 눈을 깜박 떴다가 감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마주친 붉은 눈동자가 살짝 휘어지고 그가 상체를 숙여서 루시아의 입술에 키스했다.
“아직 안 일어났다기에 걱정돼서. 괜찮은 거지?”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촉감은 현실이었다. ‘난 정말 이 남자의 얼굴이 좋아.’라고 루시아는 새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의 얼굴이 좋아도 잠을 재우지 않고 괴롭힌 그가 살짝 미웠다.
“…최소한의 양심은 있으셨네요.”
루시아는 그를 비난하면서 항의의 뜻으로 눈을 감았다. 낮은 그의 웃음이 듣기 좋아서 루시아의 입술이 슬며시 호선을 그렸다. 그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빗는 것처럼 쓸어내리자 간지러우면서 소르르 잠이 왔다.
‘머리가 완전히 부스스할 텐데.’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루시아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푹 뒤집어썼다.
“왜 그래?”
“…머리가…….”
“아픈가? 의사를…….”
“아뇨. 그게 아니라.”
루시아는 이불 사이로 빠끔히 눈만 내밀었다.
“어제… 젖은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아서 엉망일 거예요.”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는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여자의 마음이었다.
휴고는 그녀의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로브의 후드처럼 뒤집어쓴 이불을 확 들치고 짧은 비명을 지르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뭐가 어떻다고 그래. 예뻐.”
루시아는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빤히 보았다.
“…바람둥이.”
“…뭐?”
“아니에요.”
휴고는 억울했다. 그녀가 자신의 지난날 행적을 꼬집으면 솔직히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니었다.
“비비안. 내가 무슨 실수 했어?”
“바쁘지 않으세요?”
“말 돌리지 말고. 당신 리스트가 날 그렇게 정의하는 건 알지만, 난데없이 지금 그 말이 왜 나오는 거지?”
“무슨 리스트요?”
“당신이 머릿속으로 내 욕 잔뜩 써놓은 리스트 있잖아.”
“네?”
황망히 되물은 루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리스트가 제 머릿속에 있다고요?”
“꾸준히 한 줄씩 추가하는 거 아니었나?”
루시아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휴고는 뚱한 표정으로 숨넘어가게 웃는 그녀를 보기만 했다. 진지한 얘기 중에 그녀가 왜 그렇게 웃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그 리스트가 언제 추가가 되는 건데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당신이 더 잘 알겠지.”
루시아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궁금한, 보통의 사람이 할 법한 호기심을 이 남자도 갖는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내 욕’이라는 그의 단어 선택도 재미있었다.
‘나한테 잘못한 일이 있다고 인정하는 건가?’
그는 잘못은커녕 실수조차도 인정하지 않을 줄 알았다. 루시아는 그의 새로운 면이 놀라워서 한참을 웃었다.
“그런 리스트 없어요. 그렇게 복잡한 감정을 쌓아두지 못해요.”
“그럼 좀 전에 튀어나온 그 말은 뭐지?”
루시아는 새치름히 대답했다.
“갑자기 그런 말씀 하시니까 그렇죠.”
“무슨 말?”
“예…쁘다고…….”
루시아는 제 입으로 말하기가 민망해서 말끝을 흐렸다. 참하다거나 귀엽다는 말은 들어봤다. 하지만 자신의 외모와 예쁘다는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보고 느낀 걸 그냥 말해도 잘못인가?”
루시아는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평소 그의 말투는 불친절하고 딱딱했다. 그는 달콤한 말을 여자 귀에 속삭이는 바람둥이가 아니라 가진 것이 워낙 많아서 알아서 여자들이 달라붙는 바람둥이였다.
루시아는 손을 뻗어 제 머리를 만져보았다. 역시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엉클어져 있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푸석푸석하고 엉망일 것이 뻔했다.
“예…뻐요? 이 모습이?”
“뭐가 어떻다는 건지 모르겠군. 예뻐.”
그는 안색조차 변하지 않았다. 마치 나무를 보고 ‘이건 나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루시아가 미심쩍은 눈으로 그의 거짓말을 간파하려는 것처럼 계속 바라보았다.
“표현법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당신의 아름다움이 너무 찬란해서 눈이 멀 것 같고…….”
“역시 놀리시는 거죠?”
루시아가 뾰로통하게 말하자 휴고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말을 해.”
“…예뻐요? 제가?”
“예뻐.”
그가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지만, 더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빈말이래도 좋았다. 기분 좋고, 기쁘고, 마음이 간질간질해서 루시아는 그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발그레 홍조가 떠오른 그녀를 보며 휴고는 불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웃지 마. 잡아먹고 싶어지니까.”
루시아가 까르르 웃자 휴고는 피식 웃었다. 사냥을 다녀오기 전보다 그녀는 한결 편해 보였다. 뭔가를 훌훌 털어낸 표정이라서 휴고는 그녀가 털어낸 대상에 자신도 포함되었을까 봐 자꾸 불안했다.
로암을 떠나있는 동안 그녀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떠나기 전에 화해하기를 정말 잘했다고 몇 번을 생각하면서도 미진함이 남은 찜찜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불을 끈 것이 아니라 안 보이게 덮은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나 혼자서만 화해했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여전히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 로암으로 귀환했을 때 나를 외면하면 어떡하나.
차가운 표정으로 무장한 채 그는 속으로는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래서 걱정한 것이 무색할 만큼 잘 지낸 그녀를 보며 안도하는 한편 자신이 없어도 그녀는 괜찮다고 생각하자 가슴 안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이 여자가 갖고 싶었다. 그녀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다.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지?’
당신만은 절대 사랑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여자의 마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까지 그가 고민해 왔던 어떤 문제보다도 어려웠다. 지금껏 가져보고 싶은 적 없었던 누군가의 마음을,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휴고가 경험한 유일한 사랑은 혈육의 정이었다. 그러나 목숨보다 사랑했던 형제는 그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죽음을 택했다. 그에게 사랑은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은 독초였다.
그런 그가 형제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를 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감정의 풋사랑을 알기 전에 너무 많은 육체적 사랑을 경험했다는 것이 그의 비극이었다.
“계속 이러고 계셔도 괜찮아요? 바쁘시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나긋나긋해진 것을 포착했다. ‘그녀는 예쁘다고 하면 좋아한다.’라고 이제 휴고가 머릿속에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한가하지도, 바쁘지도. 일하려면 끝이 없고, 안 하려면 얼마든지 쉴 수도 있지.”
“그래서 안 하려고요?”
“그건 아니지만, 당신이 안달할 필요는 없다는 소리야. 내가 일을 안 하면 곤란한가?”
“…곤란하죠.”
“왜?”
“남편은 아내를 먹여 살려야 하니까요. 그러려면 돈을 벌어야 하잖아요.”
루시아는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즐겁게 웃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곧잘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묘한 눈으로 보다가 웃곤 했다. 루시아는 그가 어떤 지점에서 재미있어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을 먹여 살리는 건 대단히 쉬운 일이군. 돈을 벌어다 줘도 별로 쓰는 것 같지도 않고.”
“쓰고 있어요. 파티를 여는 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요.”
“당신 사적인 소비 말이야.”
“사적인 소비도 하고 있어요. 정원에 심을 꽃도 사고…….”
“드레스나 장신구. 그런 거.”
“쓰고 있어요. 드레스 수선하려면 은근히 돈이 들어요. 장신구는 가문의 보물 창고에 넘쳐나던 걸요. 죽을 때까지 차도 다 못 할 거예요.”
귀부인들이 귀금속들을 부지런히 사 모으는 이유는 그것들이 곧 사재 축적이기 때문이었다. 어지간한 작위의 가문이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귀금속이 어느 정도는 있기 마련이지만 그건 가문의 재산이었다. 귀부인들이 소유한 귀금속은 이혼할 때 위자료와는 별도로 완전하게 자신의 소유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녀와의 대화가 어딘지 모르게 겉돌고 있음을 느끼고 휴고는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해 보았다.
“내 돈을 쓰기 싫은 건가?”
루시아는 그가 한 말의 의미를 해석하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보며 웃었다.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그가 그렇게 섬세한 생각을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의 뜻밖의 모습이 귀여워서 루시아는 계속 웃었다. 이렇게 덩치 크고 주변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는 남자가 귀엽다니.
이건 분명히 데미안과 함께 지낸 부작용이었다. 작은 휴고를 한참 봤더니 커다란 진짜 휴고를 봐도 예전의 위협적 느낌이 많이 반감된 것 같았다. 휴고의 노력 덕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루시아가 승전 파티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그를 떠올릴 수 있다면 지금의 그와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맹수의 제왕이 세상을 향해 포효해도 암컷 앞에서는 순한 것처럼 그 역시 그녀 앞에서는 한껏 기세를 죽이고 있었다.
“왜 웃어.”
투덜거리는 그에게서 존재만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전쟁의 흑사자, 타란 공작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작은 토끼 루시아는 대왕 사자의 발치에 앉아 귀엽다며 까르르 웃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실 줄은 몰랐어요.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원래 불필요한 쇼핑을 좋아하지 않아요.”
“후우……. 그래. 마님께서는 근검절약이 몸에 뱄지.”
“좋은 거잖아요.”
“누가 뭐래.”
절약하는 아내를 나무란다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 ‘쓰라고. 내 돈을 써.’라고 말하는 것도 어쩐지 웃기는 일이다.
아내는 꽉 쥐면 부서질 것처럼 약하면서 바위처럼 강인한 자신만의 주관이 있었다. 그녀는 그런 정 반대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모순이 없었다.
휴고는 그녀를 잡아둘 미끼가 필요했다. 이미 결혼이라는 강한 결속이 둘을 묶고 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개인의 욕망에 기초해서 그녀가 도무지 그를 벗어날 수 없는 뭔가를 찾아야 했다. 욕망만큼 끈끈하게 사람을 붙잡아 둘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돈은 아니다. 그렇다고 권력도 아니었다. 그녀의 사교 활동은 해야 하는 최소한의 선에만 그쳤다. 교류가 잦은 사람이 별로 없고 북부 사교계에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적극적인 친분을 쌓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일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집무실에도 기웃거리지 않았다. 솔직히 휴고는 그녀처럼 물욕도 권력욕도 없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돈과 권력. 둘을 빼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욕망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갖지 않은 밑바닥 계층도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으며 살았다. 그들은 뭘 주고받았을까.
‘아이인가.’
떠오른 생각은 그의 기분을 암울하게 했다. 그는 제 피를 이은 아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를 절대 바라지 않았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어차피 그는 그녀에게 아이를 줄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휴고는 자신이 잘하는 것을 발견했다. 수많은 여자를 통해 검증받았고,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그녀가 자신 없이는 외로워 밤잠을 설치게 만들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일거양득이었다. 좀 본능적이긴 하지만, 원래 욕망이란 본능적일수록 더 탐욕스러운 법. 문제는 그녀도 그걸 좋아하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당신, 나랑 하는 거 좋아?”
“…네?”
“침대에서 만족하냐고.”
그를 바라보던 루시아의 얼굴부터 목덜미까지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부끄러운 말을 던져놓고 뻔뻔한 그의 얼굴을 노려보며 홱 돌아누웠다.
“조금 더 자야겠어요. 당신은 어서 일하러 가세요.”
그녀가 등을 보이며 외면하자 그는 충격받았다. 대답하기도 싫을 정도로 형편없었나! 그는 다급히 이불을 잡아당겼다.
“비비안. 뭐가 문제지? 횟수? 시간? 애무가 부족했어? 아니면 체위가…….”
루시아는 벌떡 일어나 앉아 그에게 바락 소리쳤다.
“충분하니까 그만 좀 해요! 어쩜 그러세요? 어떻게 그런… 그런 말을…….”
사과처럼 뻘건 얼굴로 씩씩대는 그녀를 보던 그가 씨익 웃었다. 당황해서 쩔쩔매는 그녀를 보니 놀리고 싶어졌다.
“흐음. 충분했어?”
루시아는 확 달아오르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만하시라고요!”
“새삼스레 뭘 그래. 이보다 더 야한 말도 하는데.”
“그… 그건 상황이 다르잖아요.”
“침실. 침대 위. 뭐가 다르지?”
“같은 장소라도 시간에 따라 상황이 다른 거예요. 지금은 아침이고…….”
그가 침대 위로 무릎을 딛고 올라오는 모습을 보며 루시아는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더 빨랐다. 어느새 누운 그녀의 위에 올라서 그가 두 팔로 빠져나갈 틈이 없이 가로막고 있었다.
“아침에도 하잖아. 가끔은.”
“그때는… 당신도 늦잠을…….”
“당신 기준은 이상해. 밤부터 해서 아침까지 하는 건 괜찮고, 아침에만 하는 건 안 되고?”
그의 고개를 숙여서 뭐라고 말을 하려는 루시아의 입술을 덮었다. 부드럽게 입술을 쓸어내리며 시작한 키스는 순식간에 격해졌다. 입안을 샅샅이 뒤지는 것처럼 그의 혀가 입천장과 볼 안쪽을 훑고 더듬었다. 잠시 떨어진 입술이 다시 덮쳐왔다. 그의 손이 잠옷을 파고들어 와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예민한 정점을 손끝으로 문지르자 루시아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이봐요, 짐승 씨.”
그의 붉은 눈이 커졌다.
“이 이상 더하면 내일 오자마자 돌아가야 할 손님들에게 당신이 변명해야 할 거예요.”
“하하하. 당신은 정말.”
그가 웃으면서 루시아를 끌어안았다. 그가 크게 터뜨리는 웃음소리에 루시아는 몸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아…….’
루시아는 탄식했다.
‘나 지금 행복하구나.’
행복이 넘치면 가슴이 저리다는 사실을 알았다. 루시아는 눈이 시큰해서 그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