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25화 (26/77)

25장 데미안 (3)

자정 가까울 무렵이었다. 귀환하는 공작에게서는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주인을 둘러싼 매서운 살기와 피 냄새에 제롬은 기겁하는 내색을 애써 감추었다.

“마님께서는 주무십니다. 도련님이 와계십니다. 특별히 보고드릴 일은 없습니다.”

제롬은 주인이 제일 알고 싶을 만한 일을 간략하게 보고했다. 간단히 고개만 끄덕이며 돌아서는 주인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하녀에게 목욕 준비를 재차 지시했다. 슬며시 몸을 돌려 막 내성을 빠져나가는 기사들 무리를 쫓아갔다.

“헤바 경!”

딘이 걸음을 멈추고 제롬이 빠른 걸음으로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왜 그러십니까?”

딘은 심각한 표정의 제롬을 보며 의아해 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평소 피를 묻히고 돌아오시던 분이 아닌데…….”

“아……. 오다가 근처에서 도적을 만났습니다.”

“로암 근방에 도적이라니요. 그 정도로 치안이 형편없지는 않을 텐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어디서 흘러들어온 놈들인지 모르겠지만, 지나가던 행상인 상대로 강도질을 하다가 주군께 발각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전하께서 직접 치죄하신 겁니까? 잡범이 아니었나 봅니다.”

딘은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전문적인 도적단은 아니었다. 걸식하는 유랑민이 강도질을 하다가 운 나쁘게 걸린 것이다. 치죄? 죄를 묻지도 않았다. 공작은 주저 없이 그 자리에서 다 목을 날려버렸다. 강도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던 행상들은 감사보다는 공포에 질려서 까무러졌다.

도적이라고는 하지만, 개중에는 아직 성년이 안 된 어린놈들도 있었는데 공작은 전혀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그건 처벌이라기보다는 도살이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면서도 새삼스럽게 공작의 잔혹함을 발견하고 흠칫하는 때가 있었다. 바로 오늘처럼.

“별다른 일은 없었다는 말씀이지요?”

“예. 뭐…….”

딘은 어깨를 으쓱했다. 도적 몇이 죽은 일을 별다른 일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야만족을 정벌하시면서 심기가 불편해 보이셨다거나…….”

제롬은 귀환하신 주인과 마님의 사이가 풀어질 수 있을지 단서를 얻고 싶었다. 제롬이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알 수 없는 딘은 고개를 저었다.

딘이 제롬의 머릿속을 읽었다면 헛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야만족을 토벌할 때 주군의 방식은 굉장히 잔인했다. 여느 전쟁에서 적을 죽일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공작의 그런 모습은 오직 함께 하는 정예 기사만이 볼 수 있었다. 아비규환의 참혹한 현장에서 주군의 심기를 살필 여유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고단한 여정이었을 텐데 쉬십시오.”

“예. 그럼.”

휴고는 꽤 오래 욕조에 몸을 담갔다. 몸에 밴 피 냄새를 모두 씻어내려는 것처럼. 그래도 여전히 그의 코 밑에 피비린내가 맴도는 것 같았다.

지금껏 그것이 거슬리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제롬이 주춤하는 모습을 보자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가 자신을 보며 두려워서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상상하자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그전까지 전혀 아무렇지 않았던 찐득거리는 피의 느낌이 불쾌해졌다.

‘고귀한 혈통? 위대한 기사? 개소리.’

껍데기를 벗기면 자신은 사냥꾼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을 사냥하는 학살자.

휴고는 제 핏속을 흐르는 광기를 자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피를 보고 싶다고 끈질기게 그를 다그쳤다. 아마 전쟁이라는 수단이 아니었다면 그는 악명 높은 살인범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의 목뼈가 나가는 둔탁한 느낌에 전율하고 뜨거운 피비린내 속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죽음 앞에 절망하는 자들의 눈빛을 읽어도 죄책감 따위는 모른다. 그는 단 한 번도 악몽조차 꾼 적이 없었다.

타란의 주인은 대대로 위대한 기사였고, 영민한 군주였다. 타란 혈족은 후손에게 뛰어난 육체적 능력과 오성을 물려줄 수 있는 특별한 피를 지녔다. 그래서 타란은 핏줄의 순혈에 집착했다. 필립의 말에 의하면 휴고는 성공작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자랑스러운 적 없었다.

“저주받은 핏줄. 내가 기꺼이 마무리를 장식해 주지.”

휴고는 엄숙하게 작위수여식을 치르며 속으로는 이를 박박 갈았다. 저주받은 타란 가문을 짓밟고 뭉개서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 죽은 선대 공작이 지옥에서 분에 겨워 날뛰는 모습을 그리며 통쾌해했다.

‘늙은이가 데미안을 데리고 오지만 않았어도.’

필립이 데미안을 데리고 나타났을 때 자신의 대에서 끝내려는 휴고의 결심은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말았다.

목욕을 마치고 자신의 침실 문고리만 잡고 서있던 휴고는 고민 끝에 발걸음을 돌려 아내의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의 어둠은 금세 눈에 익었다.

침대로 다가가서 곤히 자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안쪽 어딘가가 이상했다. 먹먹한 가슴이 조금 아픈 것 같기도 해서 어쩐지 계속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는 이불을 젖히고 그녀의 옆자리로 들어갔다. 허리 아래에 팔을 넣고 품으로 당기자 포근한 털 뭉치를 안은 것처럼 부드러운 여체가 감겨왔다. 목덜미에 코를 묻고 풋과일 같은 그녀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눈을 감고 얼마간 있자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이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의 안에는 두 가지 모습의 그가 존재했다. 피에 절어 인간들을 사냥하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타란 공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건 그가 두 가지의 자신을 분리해서 오가기 때문이었다. 오직 그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정신은 육체 이상으로 강인했다.

다만, 아무래도 사냥꾼 히우에서 공작 휴고로 완전히 돌아오기 위해서는 그 반대의 경우보다는 시간이 걸렸다. 살인으로 흥분한 피의 광기가 내뿜는 살기를 가라앉히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평소보다 놀랍도록 빨리 진정이 되고 있었다. 살인의 흥분이 가라앉자 이제는 하복부에서 시작된 열기가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그녀를 끌어안고 자려고 했다. 그런데 따끈한 체온과 코를 스치는 그녀의 향기 때문에 점점 참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만져야지.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며 잠옷 안에 손을 넣었다. 말랑한 가슴을 조심스럽게 쥐었다가 주무르며 그녀의 반응을 슬쩍 살폈다. 혹시 깨어나지 않을까, 기대와 다르게 그녀는 여전히 색색 자고 있었다.

왜 이렇게 잠귀가 어두워. 그는 투덜거렸다. 오랜만에 남편이 돌아와서 만지고 키스해도 쿨쿨 자는 그녀가 못마땅했다. 더는 못 참겠다. 휴고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는 이불을 훌떡 걷어내고 그녀의 발치로 내려와서 가느다란 발목을 쥐고 발등에 입을 맞췄다. 자그마한 발을 입에 넣고 사탕을 굴리는 것처럼 빨다가 발등에서 발목까지 혀로 길게 핥았다.

그의 입술이 복사뼈를 지나 발목을 타고 올라가다가 종아리에 이르러 조금 강하게 빨아들였다. 종아리의 살집이 있는 부분을 이로 살짝 깨물다가 키스했다. 진한 애무에도 그녀는 깨어날 줄 몰랐다.

평소에 일이 많아 침실에 늦게 들어가면 먼저 자는 그녀를 가끔 깨우곤 했다. 이 정도면 깼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깊은 수면에 빠진 그녀를 보자 오기가 생겼다.

그는 허리께로 손을 넣어 자그마한 레이스 팬티를 벗겨냈다. 두 손으로 허벅지를 잡아 벌리자 수줍게 감추어진 꽃잎이 살짝 입을 벌렸다.

하복부가 욱신거려서 그는 인상을 썼다. 당장 들어가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자신의 분신에게 참으라고 타일렀다.

그는 고개를 숙여서 하얗고 여린 허벅지 안쪽 살에 입술을 붙이고 빨아들여서 흔적을 만들었다.

선명한 흔적을 보며 그는 만족감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이 자국을 과연 언제 발견할까. 그때의 표정이 보고 싶었다. 당황하겠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

슬쩍 고개를 들자 여전히 그녀는 숙면 중이었다.

“업어가도 모르게 자는군.”

어디까지 버티나 볼까. 그는 숲 안에 가려진 뜨거운 샘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아랫입술에 입을 맞추는 것처럼 입술 끝으로 살짝 빨아 키스하면서 열기 어린 작은 입 안에 넣듯 혀끝을 안쪽으로 넣었다. 야들한 살집을 핥고 혀끝으로 건드리기를 반복하자 보송보송하게 말라있던 샘에서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체를 자극하는 기이한 열기를 느끼며 루시아는 깨어났다. 잠에 취해 반쯤 정신이 들자마자 느껴지는 허벅지 안쪽 깊은 곳에 가해지는 자극에 비음을 흘렸다. 채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강렬한 자극이 하체 안쪽을 파고들었다.

“흐읏!”

두 다리가 단단히 잡혀 벌어진 채 다리 사이 깊은 안쪽이 쭉 빨렸다. 허리를 흠칫흠칫 떨면서 간신히 고개를 조금 들어 내려다보자 다리 사이에 고개를 묻고 있는 그가 보였다. 루시아는 잠기운에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두뇌를 애써 회전시켰다.

그가 돌아왔나? 언제? 하지만 생각을 오래 이을 수 없었다. 뾰족하게 세운 살덩이가 질구를 건드리다가 안쪽을 쿡 찌르며 들어왔다. 쩌릿한 전율이 등을 쭉 타고 올라갔다. 루시아는 벼락 맞은 것처럼 파드득 떨며 비명을 질렀다.

“아앗!”

그의 혀는 손가락만큼 단단하지는 않으나 그보다 훨씬 섬세한 부분을 자극했다. 루시아는 그 은밀한 자극에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손에 잡히는 시트를 움켜잡고 고개를 흔들며 신음을 흘렸다. 허리가 들썩이며 허벅지를 오므렸으나 그의 손에 잡혀있어 여의치 않았다. 무력하게 두 다리를 벌리고 그의 혀에 유린당했다.

그는 사막을 걷다가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그녀의 샘에서 흐르는 물을 빨아들였다. 촉촉하고 보드라운 살결을 맛보고 혀를 넣어 자극하면서 그녀의 반응을 즐겼다.

샘에서 흐르는 물이 늘어나며 짙은 향을 풍기자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혀끝에 느껴지는 작은 돌기를 파고들 것처럼 혀로 찌르며 이 끝으로 살짝 깨물었다.

“하악! 아! 아응!”

작은 신음이 자지러지는 비명으로 바뀌었다. 그 비명이 이내 흐느낌으로 이어질 때까지 그는 그녀의 음부에서 입술을 떼지 못했다. 입을 맞추고 핥고 빨아 삼켰다. 그녀의 체액에서 풍기는 야릇한 맛과 향을 도무지 끊을 수가 없었다.

부풀어 오른 질 안쪽의 돌기를 삼킬 것처럼 빨자 그녀의 허리가 크게 들썩 공중으로 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휴고는 혀로 아랫배부터 가슴골까지 쭉 핥으면서 그녀의 위로 올라갔다. 그를 멍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몽롱하게 풀려있었다. 좀 더 사위가 밝았다면 홍조 어린 하얀 볼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함이 아쉬웠다.

가슴께까지 밀려 올라간 네글리제 안으로 두 손을 넣어 가슴을 쥐었다. 검을 쥐느라 거칠어진 손바닥에 착 감기는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가슴을 음미하듯 주물렀다.

그녀의 피부는 최고급 실크처럼 매끄러워서 만질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주근깨 하나 없이 뽀얀 그녀의 얼굴만큼이나 그녀의 속살 또한 우유처럼 하얗고 티 한 점 없었다. 옷을 벗기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오직 남편인 자신만 보고 만질 수 있다는 점이 그의 소유욕을 충족시켰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여서 탐스러운 과실을 한입에 덥석 삼켰다. 애무로 자극받아 단단히 일어난 유두를 혀로 간질이며 쭉 빨았다. 그녀의 살에서 달큼한 향이 났다. 할 수만 있다면 다 삼켜버리고 싶은 그런 매혹적인 향이었다.

할딱이는 호흡 소리에 섞이는 신음을 들으며 그는 어찌 이걸 참고 지냈는지 자신의 인내심에 감탄했다. 그는 사냥 첫날부터 지독한 갈증과 허기에 시달렸다. 아무리 야만족을 사냥해도 채워지지 않았다.

이젠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그는 자신의 마음에 묶어두었던 한 가닥 끈마저 끊어버렸다. 휘둘려? 휘둘리면 어때서. 그가 혼자 취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지 그녀가 먼저 그를 쥐고 흔들려고 한 적은 없었다.

그는 한 손으로 늘어진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그의 중심은 이미 아플 정도로 단단히 일어나서 풀어달라고 난리였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다급하게 무게를 실었다. 한 번의 움직임으로 거침없이 그녀 몸 안의 길을 타고 단번에 뿌리 끝까지 들어갔다. 그녀의 몸이 작게 움찔하며 침입자를 받아들였다.

“아!”

“하아…….”

몸을 지탱하며 침대를 디딘 그의 손이 시트를 쥐었다. 앓는 신음이 절로 입에서 흘렀다. 이거였다. 그의 것을 완벽하게 감싸 안으며 죄어오는 그녀의 미끈한 내벽. 조금의 빈틈없이 꼭 맞아 들어가 하나가 된 상태. 습하고 따뜻한 그녀의 안에 완전히 몸을 묻고 그는 완벽한 충족감을 느꼈다.

그의 아래 누운 그녀의 가슴이 작은 움직임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그의 타액으로 젖은 분홍빛 유두가 번들거리고 하얀 가슴은 그가 남긴 흔적으로 울긋불긋했다. 조금 전까지 마구 탐했던 유실은 여전히 그의 입맛을 자극했다.

그는 혀로 유륜을 돌리며 부드럽게 핥았다. 몇 번이고 장난치듯 간질이며 건드리다가 그대로 한입에 쭉 삼켰다.

“읏……. 아!”

입안으로 오물거리다가 강한 흡입력으로 빨아들였다. 느슨하게 혀로 굴리다가 이로 살짝 물고, 강하게 빠는 것을 반복했다.

자극되는지 그녀의 몸이 움찔거리면서 짤막하게 신음을 흘렸다. 더불어 그를 품고 있는 여성 안쪽이 바싹 죄어들었다. 부드러운 가슴을 맛보는 것도 좋지만 더는 가만히 있기 힘들었다.

“허리 감아.”

그의 목소리 끝이 갈라져 나왔다. 그의 집요한 애무에 새된 숨을 내쉬던 루시아는 탁한 그의 저음을 듣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강하게 움직이며 안으로 파고드는 움직임을 기억하는 하복부가 찌릿찌릿하게 죄어들어 그를 꽉 물었다.

억눌린 짧은 신음을 흘리는 그를 보자 루시아는 입안이 마를 것 같았다. 마음이 다급해져서 옆에 딛고 있는 그의 팔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은 머리로 누르는 베개 밑으로 넣으면서 두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았다.

휴고는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잡아 무릎걸음으로 조금 전진하면서 그녀의 허리를 공중에 띄웠다. 아슬아슬 끝만 담근 상태까지 빼내다가 묵직하게 뿌리까지 진입해 들어갔다.

“흐읏…….”

오랜만이라 그런지 그의 것이 더 크게 느껴져 버거웠다. 몸을 꽉 채우며 들어오는 힘에 숨이 턱 막혔다. 그의 팔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살짝 인상을 쓰고 있는 그녀를 보며 그가 말했다.

“천천히?”

루시아가 입술을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느릿하게 빠져나갔다가 천천히 그가 허릿심으로 밀고 들어왔다. 빠듯하게 깊은 안쪽까지 닿는 느낌이 아릿했다. 루시아는 탄식처럼 한숨을 흘렸다.

“아……. 으응.”

단단한 기둥이 몇 번이고 진퇴를 반복하며 안쪽을 마찰했다. 깊게, 그리고 얕게, 강약을 조절하는 움직임이 계속되자 부드럽게 풀린 내부는 곧 그의 것을 흡착하며 빨아들였다.

“하아……. 정말…….”

그가 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잡아먹히는 것 같아. 당신 속.”

그녀가 준비되었다고 느끼자 그는 꽉 눌러둔 자신을 해방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여린 살 속을 헤집고 마구 날뛰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넣고만 있어도 좋지만 움직이면 더 환상이었다. 그의 허리짓에 점점 속도가 실리고 곧 거침없이 퍽퍽 밀어 넣었다.

“아! 아앗!”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아래에서 그녀의 몸이 아래위로 흔들렸다. 강한 힘에 밀려 그녀의 몸이 조금씩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몸을 비틀면서 신음 섞인 교성을 질렀다. 느릿하게 빠져나갈 때는 질벽이 딸려 나가는 것 같고, 강하게 치고 들어올 때는 둔탁하고 묵직한 압박감에 몸이 저릿저릿했다.

젖은 속눈썹에 그의 혀끝이 닿았다. 그가 귓불을 핥으면서 잘근 깨물며 속삭였다.

“당신 느끼는 표정 보면… 미치겠는 거 알아?”

그는 그녀의 몸이 침대 머리까지 밀려 올라가지 않도록 골반을 단단히 잡고 강하게 쳐올렸다. 깊숙이 박힐 때마다 그녀의 눈앞이 번쩍이며 점멸했다. 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호흡이 거칠었다.

“울 것 같은 눈을 하고선… 아래는 쭉쭉 빨아들이지. 윽……. 지금… 좋았어? 이렇게 하면 좋은가?”

“아! 아응!”

“말해 봐. 더 깊이 넣어줄까? 이쪽을 찌르는 게 좋아?”

희롱하는 그의 말에 수치심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그녀의 내부는 그의 것을 적극적으로 끌어당기고 감싸 안았다. 민감한 내벽은 그의 성기에 착 달라붙어 빠져나갈 때는 마치 안쪽도 딸려나갈 것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그녀에게도 엄청난 자극이었다.

“아! 휴! 너무! 으응!”

자극이 너무 강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숨이 막혀왔다. 단단한 그의 성기가 하복부 안을 거칠게 쑤셔대며 긁어내리면 정신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몸을 가를 것처럼 다리 사이 안쪽으로 뜨거운 기둥이 난폭하게 진입했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안쪽 깊은 살이 마찰당하고 비벼질 때마다 그녀는 뇌를 짓누르는 쾌감에 비명을 질렀다. 그의 빠른 움직임에 끊임없이 몸이 흔들리면서 헐떡거렸다.

“하으윽!!”

절정에 치달아 루시아는 고개를 꺾으며 교성을 질렀다. 사납게 물어뜯는 내부의 움직임에 그의 목 깊은 곳부터 거친 신음이 터졌다. 쾌감으로 경련하는 안쪽으로 그는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흐응. 응. 휴……. 잠깐… 잠시만…….”

격렬한 자극에 루시아는 흐느꼈다. 그가 조금만 멈추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녀의 애원이 도리어 그를 자극했는지 그는 오히려 더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녀 안으로 정신없이 박아 들어가는 그의 엉덩이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그의 허리를 감으려던 그녀의 다리가 자꾸 힘없이 미끄러졌다. 그는 그녀의 두 다리 발목을 잡아 어깨로 올렸다. 엉덩이가 들리자 그가 깊게 안으로 들어왔다.

몇 번의 추삽질을 하다가 한 손으로 그녀의 발목을 나란히 잡아 든 채 그의 분신이 여성의 좁은 길을 열며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

“아! 하악.”

힘들어. 그렇지만 좋아. 거침없이 아래에서 위를 찌르고 올라오는 힘도, 잡아먹힐 것 같은 그의 열정적인 움직임도, 흐려진 눈으로 보이는 그의 근육의 움직임도, 간헐적으로 흘리는 그의 낮은 신음을 듣는 것도 모두 좋아서 전율이 흘렀다.

그녀의 몸은 사내가 주는 기쁨을 배웠다. 봉오리가 맺히고 꽃잎이 벌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만개하고 있었다. 황홀한 그녀의 몸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활짝 열렸다. 그에게 세우고 있던 벽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녀의 몸은 더 적극적으로 그의 구애에 반응했다. 그녀의 변화를 그의 몸이 본능적으로 느끼고 반응했다. 그녀는 그를 더 미치게 몰아가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다리를 옆으로 내려 후측위 자세를 잡아 조금 속도를 늦추어 움직였다. 부드럽게 안을 휘젓는 감각에 잠겨서 그녀는 눈을 감고 숨만 할딱거렸다. 움직이던 성기가 예민한 지점을 건드리고 자극할 때마다 그녀의 미간에 살짝살짝 주름이 생겼다.

그는 다시 발목을 잡아 벌리면서 정상위로 자리를 잡았다. 묵직하고 깊게 질 안쪽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다시 그녀의 몸이 강하게 흔들리고 그가 주는 자극에 교성이 터졌다. 그의 어깨에 매달린 손이 미끄러지지 않으려 손끝을 세웠다. 손톱이 어깨를 스치는 따끔한 감각은 잔뜩 부푼 그의 하복부에 한층 더 열기를 불어넣었다.

“흐읏!”

“…큭.”

그의 몸이 순간 경직하면서 그녀의 자궁 깊은 안쪽으로 체액을 쏟아냈다. 뜨거운 것이 안으로 쏟아지는 느낌에 소스라쳐서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질벽이 그의 것을 꽉 물어 비틀었다. 딛고 있던 그의 팔이 휘청하면서 목 안쪽에서 그르렁대는 소리를 흘렸다. 그녀의 몸은 바들바들 떨며 쾌감에 몸부림쳤다.

“하아… 하아…….”

호흡을 몰아쉬는 그녀의 몸 위로 묵직하게 그의 무게가 더해졌다. 완전히 기대지는 않고 그는 팔꿈치로 디뎌 자신의 무게를 덜고 있었다. 적당히 몸을 누르는 그의 무게는 기분 좋은 안정감을 주었다. 루시아는 덜덜 떨리는 손을 그의 머릿속에 찔러 넣었다. 살짝 젖은 그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이 감기는 느낌이 좋았다.

조용한 침실에 두 사람의 가쁜 호흡 소리만 울렸다. 루시아의 숨이 고르게 진정될 즈음에 고개를 묻고 있던 그가 빙글 몸을 돌려 옆으로 누우면서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아 당겼다. 늘어진 그녀의 몸이 딸려가서 그의 품에 밀착했다. 한참을 그렇게 안고 있던 그가 그녀의 입술과 눈시울과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시작했다.

“푸훗. 간지러워요.”

“간지럽지 않은 걸로 해줘?”

휴고는 진득하게 속삭이며 그녀의 귀 뒤쪽을 호흡으로 간질이다가 입술을 붙였다. 그의 손이 등을 따라 허리 아래로 슬그머니 미끄러졌다. 루시아는 살짝 몸을 틀어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떨쳤다. 손바닥에 매끄럽던 피부의 느낌이 사라지자 휴고는 불만스러웠다. 그래서 다시 고집스럽게 그녀의 엉덩이를 잡았다. 루시아는 아예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안 돼요.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한단 말이에요. 아침부터 할 일이 많아요.”

“뭘 하기에.”

“사흘 뒤 정원 파티를 계획하고 있어요. 처음 정원을 선보이는 자리라서 좀 규모를 크게 하려고요. 그래서 내일부터 정원 정리하고 준비하고 이것저것 신경 쓸 것이 많아요.”

“정원 파티? 날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꽃이 있어?”

“늦가을 꽃이죠. 아무래도 봄과 여름만큼 화사하지는 않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정원 파티는 열어보고 싶었어요.”

나 없어도 아주 잘 지냈군. 휴고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눈물 바람으로 지냈기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씩씩할까. 안도감과 서운함이 교차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귀가한 남편보다 파티가 더 중요하다는 거군. 둘 중 뭐가 우선이지?”

또다시 그의 손이 허리께를 쓰다듬으면서 그의 입술이 끈질기게 목을 지분댔다. 루시아는 그의 어깨를 찰싹 내리쳤다.

“억지 부리지 마세요.”

“어허. 어딜 남편 몸에 손을 대.”

짐짓 엄한 척하는 그에게 루시아가 우우, 야유를 보냈다. 휴고는 야릇하게 눈을 빛내다가 그녀를 향해 큰 동작으로 몸을 던지며 덮쳤고, 루시아의 작은 몸이 재빠르게 굴러가며 피했다. 침대가 풀썩거리도록 둘은 엎치락뒤치락했다. 까르르 터지는 웃음소리와 작은 비명이 뒤섞였다. 얼마 못 가 루시아는 숨이 차서 헉헉거리며 그에게 단단히 붙잡혔다.

그는 그녀의 등 뒤에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꽉 끌어안았다. 다리 하나를 그녀의 다리 사이에 넣고 한 손으로는 가슴을 잡으며 뒷목에 입을 맞추었다. 루시아는 꼼짝할 수 없자 빠져나오기를 포기했다.

“가신 일은 잘되셨어요?”

“음. 당신은 뭐 하며 지냈지?”

“별일은 없……. 아니, 있었네요. 데미안이 왔어요.”

아주 잠깐 그의 몸이 경직했다. 그의 품에 완전히 밀착해 있던 루시아는 느낄 수 있었다.

“…알아.”

그에게 데미안은 어떤 의미일까. 루시아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좀 더 느긋하게 그와 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제롬조차도 말을 아끼는 상황이라 섣부르게 접근하기가 조심스러웠다.

데미안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절망하고 냉담한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비뚤어진 감정으로 변해도 이상하지 않을 미성숙한 어린아이였다. 그런데 데미안은 곧고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루시아는 소년이 사랑스럽고 안타까웠다. 데미안 같은 아들이면 내 배로 낳지 않은 자식이라도 열은 키우겠다고 생각했다.

이젠 그가 데미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볼 때였다. 그들이 서로에게 악감정이 없다면 이대로 냉랭한 사이를 유지한 채 세월을 보내서는 아까웠다. 같은 피를 나눈 유일한 관계 아닌가.

“점심 때 시간 어떠세요? 다 함께 식사했으면 좋겠어요. 당신만 괜찮으시면요.”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하면서 루시아는 혹시 그가 거절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 만약 같이 밥조차도 먹기 싫은 부자 사이라면 최악이었다.

“저녁으로 하지. 오전부터 회의야.”

다행히 그는 주저하는 기색 없이 무난하게 대답했다. 루시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무례하게 굴지는 않아?”

루시아는 그의 말에 숨겨진 주어가 데미안이라는 것을 잠깐 생각한 후에 알아차렸다.

‘이 사람. 아들을 잘 모르는구나.’

그가 데미안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런 질문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전혀요. 정중하고 어른스러워요. 예절도 태도도 나무랄 데가 없어요. 데미안과 잘 지낼게요. 그 점은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건 걱정 안 해. 녀석이 기어오르면 말해.”

병사를 굴리는 장교처럼 말하는 등 뒤의 그에게 루시아는 눈을 흘겼다.

“그럴 일 없을 거예요. 당신 안 계시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잘 지냈는데요.”

그녀의 목소리에 점점 잠기운이 묻어났다.

“…우리?”

삐딱하게 묻는 말은 잠에 빠져드는 루시아의 귀에 더는 들리지 않았다.

“인사가 늦었어요. 다녀오셨어요…….”

거의 끝에는 웅얼거리는 그녀의 입술에 그는 키스했다. 얼마 후 색색 고른 호흡 소리를 내며 루시아는 잠들었다.

“다녀왔어.”

다시 한 번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휴고도 눈을 감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루시아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혼자였다. 그의 기상 시간은 매우 이른 편이어서 그가 로암에 있건 없건 루시아는 거의 혼자 아침을 맞았다. 지난밤이 꿈이 아니었다고 말해 주듯 팔다리가 무겁고 나른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팔로 디디며 몸을 일으켰다.

“아…….”

묽어진 그의 체액이 허벅지를 따라 흘렀다. 아무리 겪어도 민망해서 루시아는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조금 진정이 되자 하녀를 불러 목욕 준비를 시켰다.

따끈한 물에 몸을 담갔더니 오랜만의 격한 운동으로 뭉친 근육이 노곤하게 풀렸다. 아침 햇살로 보얗게 빛나는 그녀의 눈부신 피부에는 격렬했던 지난밤을 상징하는 붉은 흔적이 얼룩덜룩했다.

시중을 드는 하녀들은 흘끔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주인님께서 늦게 귀환하셨다더니 오자마자 못 참고 마님 침실에 드셨구나, 목욕을 끝내면 하녀들 사이에 소문이 쭉 퍼질 것이다.

“그이는 집무실에 들어 계시니?”

“회의 중이십니다.”

“벌써?”

“해 뜨기 무섭게 불러들이셨습니다.”

아무래도 그의 밑에서 일하는 자들은 여간 힘들지 않겠다고 루시아는 생각했다. 그는 정말 정력적인 남자였다. 쉴 새 없이 많은 일을 하면서도 가장 기운이 넘쳤다.

어젯밤을 떠올리는 루시아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를 보고 싶은 그리움이 깊어져서 가슴앓이하기 전에 그가 돌아와서 다행이었다.

여전히 그가 자신을 뜨겁게 원해서 행복했다. 그녀의 기분은 물 위에 뜬 꽃잎처럼 가벼웠다.

가족이 된 세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하는 저녁 식사였다. 식당에 데미안이 가장 먼저 도착해 기다리다가 루시아가 들어오자 늘 하던 대로 의자를 빼내 그녀가 앉도록 도와주었다.

“데미안, 아버지는 뵈었니?”

“아직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계속 바쁘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 오늘 많이 바쁘신 것 같더라.”

루시아는 데미안을 위로하면서 살짝 입술을 삐죽였다.

‘아무리 바빠도 잠깐 불러 인사하는 일이 뭘 그리 힘들다고. 그럼 지금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한다는 거잖아.’

그는 정말 무정했다. 데미안이 비뚤어지지 않게 이만큼 큰 것이 대견했다. 오늘은 루시아도 내내 분주해서 늘 함께하던 점심을 아이와 같이 못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점심은 어떻게 했니? 굶은 건 아니지? 내가 오늘 일이 많아서 신경을 못 썼어.”

“먹었습니다. 파티 준비로 바쁘신 것 압니다.”

잠시 후 휴고가 들어왔다. 그의 시선이 데미안에게 잠깐 머물었을 뿐, 짧은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가족의 첫 식사가 시작되었다. 숨 막히도록 조용한 식당에서 루시아는 계속 두 부자를 번갈아 보았다.

‘둘 다 지독하네.’

화기애애한 분위기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데미안이 기숙학교에 간 여섯 살 이후 정말 서로 한 번도 본 적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보는 것이 분명한 똑 닮은 두 부자는 서로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데미안은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했고… 저 사람도 아들이 미웠으면 굳이 후계로 삼진 않았겠지.’

부자의 썰렁한 분위기는 날이 바싹 선 것처럼 차가웠지만, 루시아는 이걸 어쩌나, 하며 걱정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대놓고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도 아니고 루시아가 두 부자와 각각 문제가 없으니까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중간에서 적당히 이어주면 좋아지겠지.’

루시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리해서 관계 개선을 하려다가는 부작용이 더 클 것이다.

데미안이 기숙학교에 돌아가기 전까지 여기서 지내는 시간이 좋은 기억으로 남고, 그가 아들의 존재를 이전보다 더 의식하면 그걸로 되었다. 일단 그걸 첫걸음으로 삼을 것이다.

‘둘을 나란히 놓고 보니 정말 좋네.’

큰 휴고와 작은 휴고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루시아는 그저 둘을 번갈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다.

고용인들은 이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차분하게 식사하는 마님을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원 파티 준비는 잘되어가오?”

식사가 끝나갈 무렵에 그가 물었다.

“네, 순조로워요. 그 일로 드릴 말씀이 있어요. 데미안을 참석시키면 어떨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을 마시던 데미안이 켁, 하는 작은 소리를 냈다. 흘끔 데미안을 본 휴고가 루시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인들 파티잖소.”

“데미안이 남자는 아니잖아요. 이제 여덟 살인걸요.”

잠시의 고요함. 쿡, 휴고가 짧게 웃었고, 데미안의 귀가 붉어졌다.

“당신 말대로 여덟 살은 남자가 아니지. 좋을 대로 하시오.”

“데미안, 어떻게 생각하니?”

“저는!”

데미안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지만, 휴고가 지그시 보자 얌전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와.’

루시아는 부자 사이의 완벽한 힘의 차이를 느꼈다. 평소 데미안은 도무지 여덟 살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른스러웠다. 또래보다 훨씬 큰 덩치와 딱딱하고 정중한 말투, 구사하는 어휘는 어른 수준이고 아이의 치기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루시아는 데미안을 보면서 자신의 여덟 살을 떠올렸으나 제대로 기억조차 없었다. 아마 동네 아이들과 뛰어놀기에 바빴을 것이다.

그러나 휴고의 곁에 있는 데미안은 가릉거리는 새끼 사자였다. 데미안과 비교하면 휴고는 가장 높은 곳에 앉아서 아래를 나른하게 내려다보는 제왕이었다. 휴고의 거대한 앞발이 살짝 짓누르기만 해도 데미안은 켁 소리도 내지 못할 것 같다.

루시아는 두 사람의 현재 관계가 어느 정도는 만족스러웠다.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어려워하는 아들의 모습은 바람직했다. 두 사람 사이가 조금만 개선되면 그녀가 그리는 근사한 부자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상만 해도 흐뭇했다.

‘대왕 사자와 새끼 사자라……. 그러고 보니 타란 가문의 문양이 흑사자였지. 아주 딱 들어맞네.’

“오늘 식사 이후에 일정은 어떻소?”

“별다른 일은 없어요. 읽다가 만 책이 있어서 서재에 가려고요.”

“오늘 꼭 읽어야 하는 책인가?”

“그렇지는 않지만. 손님이라도 오시나요?”

“이 시간에? 그런 무례한 손님은 맞을 필요도 없소.”

“그럼…….”

“소화를 시킬 겸 가볍게 산책하고 목욕을 하시오.”

“…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싶으면 일찍 잠자리에 들라는 소리요.”

휴고를 바라보는 루시아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사람 얼굴이 저렇게 붉어질 수도 있구나.’라고 데미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했다.

“…도대체 애 앞에서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루시아가 시뻘건 얼굴로 애써 목소리를 죽이며 말하자 휴고는 피식 웃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익!”

루시아는 그를 노려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홀을 나가는 그녀의 뒤에 대고 휴고가 물었다.

“어디 가는 거요?”

“산책하러요!”

발소리가 쿵쿵 날 것처럼 루시아는 큰 동작으로 나가버렸다. 데미안은 그녀의 뒷모습을 멀뚱거리게 바라보았다. 소년은 지금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두 분 대화의 어떤 점에서 루시아가 과한 반응을 보이는지 머리 좋은 소년으로서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고민하던 소년은 작은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공작이 꽤 즐거운 것처럼 웃고 있었다. 싸늘한 미소나 비웃음은 보았지만, 공작이 이런 식으로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신기하면서 동시에 충격이었다. 한 자루의 검처럼 매섭던 아버지가 조금은 사람 같았다.

잠시 후 나갔던 루시아가 다시 식당으로 들어왔다.

“데미안, 같이 가자.”

데미안은 흘끔 공작의 눈치를 살피다가 쪼르르 루시아의 뒤를 따라갔다. 졸지에 혼자 남은 휴고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던 ‘우리’라는 단어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데미안을 거리낌 없이 부르는 그녀와 부른다고 당연하게 따라가는 데미안을 보니 그가 없는 동안 둘이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둘의 사이가 험악하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는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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