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장 데미안 (2)
한숨 자고 일어났으나 여전히 밖은 환했다. 데미안의 침실이 위치한 곳은 중앙탑에 부속한 연결 건물 중 하나로, 원래의 목적은 공작의 자식들을 위한 양육 공간이었다. 최대 열 명의 아이들이 지낼 수 있도록 침실에서 학습실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넓었다.
기숙학교로 떠나기 전까지 소년의 침실이었던 2층 방에서 창밖을 내다보자 아래 펼쳐진 정원이 꽃으로 울긋불긋했다.
‘공작부인의 작품인가.’
어릴 때 봤던 정원에는 항상 초록색이 가득했다. 화사한 꽃은 이 삭막한 공작가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 어색함이 없었다.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향기가 올라왔다. ‘정원 가득한 꽃이 보기 좋구나.’ 하고 생각했다.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정원으로 나갔다. 훨씬 더 짙은 향기가 훅 밀려들었다.
“데미안.”
데미안은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 달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우뚝 멈추어서 다가오는 공작부인을 바라보았다. 몹시 반가워하는 공작부인을 보며 소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반가워하지?’
“푹 잤어요? 일찍 일어났네. 배고프지는 않아요?”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였다. 사근사근한 음성에는 호의가 잔뜩 담겼다. 데미안은 바싹 경계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어마어마한 고단수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혹시 내가 방해했나요?”
“아닙니다.”
데미안은 친모에 대한 기억이 없고, 학술원의 재학생이나 교수나 모두 남자였다. 주방일이나 잡일을 하는 여자들은 중년 여자들이었다. 고용 관계가 아닌 젊은 여자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서 영 껄끄러웠다.
“정원이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잔뜩 꽃만 심어놨는데 괜찮아 보인다니 다행이네요.”
“편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음……. 그래? 난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그게 편해?”
“예.”
“알았어. 산책하는 중이면 같이 잠깐 걸을까?”
“…예.”
함께 정원 소로를 따라 거닐며 루시아는 계속 소년을 흘끔거렸다. 정말 볼수록 신기했다. 그가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이 데미안을 보며 얼마간 충족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딱딱하고 정중한 말투까지도 어쩐지 그와 닮았다.
“기숙학교에 있다고 들었어. 방학인 거니?”
“방학은 없습니다. 외출은 할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다녀가라고 하셔서 온 겁니다. 공작부인께 인사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
데미안은 호칭부터 확연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긴 단번에 어머니라고 불렀으면, 음……. 좀 징그러웠을 것 같기는 해.’
귀족 아이들이 철이 덜 들었을 때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오만방자하고 되바라진 경우가 많았다. 나이가 들어야 속마음대로 표현하지 않는 법을 배워서 겉으로는 의젓한 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데미안은 이제 여덟 살이면서도 기사처럼 군기가 잡혀있었다. 어른인 척하는 징그러운 조숙함과는 뭔가 달랐다.
‘기숙학교의 위력인가. 모든 귀족 아이들을 기숙학교로 보내는 것도 괜찮겠는걸.’
그녀가 그런 생각을 관철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 이 땅의 모든 귀족 아이들에게 천운이었다.
“데미안. 솔직히 말해서 널 당장 아들로 생각하기는 힘들어.”
이렇게 직설적일 수가! 데미안은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루시아를 빤히 보았다.
“너도 그렇지? 날 어머니라고 생각하기 힘들잖아.”
이런 수법은 예상 못 했는데! 데미안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슨 실수를.”
“아니야. 나무라는 게 아니라 당연하다고 말하는 거야. 우리는 이제 막 만났고, 서로를 모르잖아. 낯선 것이 당연해.”
그 남자보다 작은 붉은 눈이 루시아를 보고 있었다. 루시아는 막 세상을 처음 배우는 어린 짐승을 떠올렸다. 소년은 처음 보는 존재를 탐색하는 것처럼 털을 앙증맞게 세우고 있었다. 휴고라는 거대한 맹수의 시선에 익숙한 루시아가 보기에 데미안은 캬릉거리는 것에 불과했다.
‘귀여워. 귀여워.’
그녀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소년의 볼을 살짝 꼬집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괜히 소년이 더 경계할까 봐 루시아는 자제했다.
“너와 난 겨우 열 살 차이야. 내 나이를 따져보면 열 살에 아이를 낳았다는 건데, 그럼 네 아버지는 범죄자가 되는 거지.”
데미안은 가볍게 터져 나올 뻔한 웃음을 얼른 삼켰다.
“그러니까 우리 조금씩 친해보자. 딱딱하게 공작부인으로 부르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 루시아. 내 어릴 적 이름이야.”
“…….”
“앞으로 잘 지내보자. 데미안.”
케이트와 어울리는 동안 루시아는 많은 부분에서 감화를 받았다. 근본적인 성격을 바꾸기는 어려워도 당당한 케이트의 말투를 좋아해서 조금씩 닮아가고 있었다.
데미안은 루시아가 악수를 청하며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공작부인이 뭘 바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굳이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려는 걸까.
데미안은 공작부인과 비교하면 철저한 약자였다. 나이는 어리고 위치는 불안정했다. 더구나 장차 공작부인이 아이를 낳으면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공작부인이 관계 개선을 시도할 이유가 없었다.
“힘들겠니?”
“아닙니다.”
데미안은 공작부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지만……. 아직 상대의 수를 읽을 수 없으니 받는 수밖에.’
데미안은 비록 나이는 어려도 적의를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먼저 이를 드러내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웃음으로 칼을 감춘다면 자신도 그리할 것이다. 아직 데미안은 어리고 힘이 없었다. 숨죽이고 바싹 엎드려 있을 때였다.
‘쉽게 친해지기는 힘들겠네.’
데미안이 제 딴에는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름대로 이런저런 삶의 경험이 많은 루시아의 눈에 어린 아이가 세우는 경계심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지금은 너의 적이 아니라고 말해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아이는 모두를 경계하는 마음부터 배웠을 것이다. 보듬어주는 어머니 없이 부친의 따뜻한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사생아의 처지는 누가 봐도 녹록하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을 거야. 진심은 언젠가는 보이는 법이니까.’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의 아들도 사랑해 주겠다고 루시아는 생각했다.
외출하고 돌아오는 안나의 양손에는 끈으로 묶은 책이 잔뜩 들렸다. 그녀는 요즘 마님의 치료법을 찾기 위해 골몰하고 있었다. 책방을 싹 뒤져서 온갖 약초 관련 서적을 수집하고 책방 주인에게 언제든 책이 들어오면 연락해 달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성문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오면서 안나는 저만치 지나가는 도로시를 발견했다. 내성의 부엌일을 맡아 일하는 중년 부인이었다. 큰 소리로 불러서 인사를 하려다가 도로시가 어떤 남자를 붙들고 호들갑스럽게 아는 척하며 허리를 굽실거리는 바람에 멀뚱히 지켜보았다.
‘차림새로 봐서는 높은 사람 같지는 않은데…….’
그들이 헤어지자 안나는 도로시에게 다가갔다.
“누구에요? 처음 보는 사람이군요.”
“처음 봐요? 하긴. 워낙 역마살 든 분이라서. 공작가 주치의예요.”
“공작가 주치의?”
안나는 성 안에는 자신 외에 의사가 없는 줄 알았다.
“왜 아무도 그런 얘기를 내게 하지 않았지요?”
“아……. 그게…….”
도로시는 난처한 표정으로 주저했다.
“아마 다들 말하기가 조심스러워서 그랬겠죠. 저분이 주인님 눈 밖에 나서 거처도 내성 밖으로 옮기고. 더구나 로암에 거의 안 계시거든요. 몇 년 동안 소식이 없다가 돌아오셨는데 며칠 머물고 다시 떠나셨어요. 이번에는 거의 두 달 만에 오신 거예요. 또 언제 떠나실지 모르죠.”
“치료하다가 무슨 사고라도 있었나요? 그래서 공작님께서…….”
“아유. 그렇지는 않아요. 저분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답니다. 다 죽어간 우리 막내 녀석도 저분 덕에 살았거든요.”
도로시는 공작가 주치의의 뛰어난 의술을 칭송하는 수다를 한참 늘어놓았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몰라요. 높으신 분들 일을 무슨 재주로 알겠어요. 그리고 거처만 옮겼지 그 외에는 자유롭게 나다니고 로암에 돌아오면 환자도 봐주고 하시죠.”
주치의는 비상시에 가장 빨리 달려갈 수 있어야 했다. 안나가 머무는 곳은 그래서 내성 안에 있었다.
공작가 주치의라면서 장기 여행을 떠나고, 공작은 찾지 않고, 거처는 멀리 떨어져있고. 도로시는 공작의 눈 밖에 나서 그런다고 하지만, 의사가 의료 사고가 아니면 밉보일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정말 공작에게 밉보였다면 주치의라는 자리를 유지한 채 성 안에 머무는 거처가 그대로 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속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안나는 다음 날 필립의 거처를 찾아갔다.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자리 잡은 나무집이었다. 근방에 키 큰 나무가 둘러있어서 주변과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뜰에 의자를 내어놓고 노인이 앉아있었다. 안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필립 경 되시지요. 전 공작부인의 주치의 안나라고 합니다. 공작가 주치의가 계시다기에 인사드릴 겸 찾아뵈었습니다.”
노인의 탐색하듯 살피는 시선을 받으며 안나는 어쩐지 오싹했다. 하지만 노인이 부드럽게 인상 좋은 미소를 짓자 그런 느낌은 금방 사라져서 안나는 기분 탓으로 돌렸다.
“반갑습니다. 필립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저도 안나라고 불러주세요.”
“귀한 손님이 오셨군요. 들어오시지요. 차를 내오겠습니다.”
생각보다 필립은 호의적이었다. 안나는 긴장을 풀고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차를 마시면서 그들의 대화는 점점 의학 관련 내용으로 흘러갔다. 둘 다 의사이니까 온종일이라도 함께 떠들 수 있는 공통 화제를 가진 셈이었다.
안나는 대화를 나누며 두 가지에 감탄했다. 필립의 몸에 밴 정중하고 기품 있는 태도와 그가 지닌 의학적 지식이었다.
남작이라는 귀족 신분과 의사라는 직업, 둘 다 나무랄 데가 없었다. 안나는 아무래도 의사다 보니까 의사로서 우수한 필립의 지적 능력에 더 마음이 쏠렸다.
‘이분은 명의야.’
필립의 식견은 감히 안나가 따라갈 수 없었다. 의사는 대개 자기만 아는 독특한 치료법이나 병에 관한 지식 몇 가지를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운을 떼면 필립은 모르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더 쉬운 치료법을 제시해 주었다.
‘이분이라면… 마님의 증상을 알지도 몰라.’
원래 처음부터 안나는 마님의 증상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자 필립을 만나러 왔다. 그러나 마님의 병은 여자로서, 그리고 공작부인의 신분으로서 남들이 알아서는 곤란한 비밀에 가까웠다. 환자의 비밀은 엄수해야 한다. 안나는 의사로서의 양심이 자꾸 걸렸다.
아무리 같은 곳에 적을 둔 주치의끼리라고 해도 선뜻 증상을 말할 수 없었다. 다른 환자라고 둘러대고 물어볼까 하다가 얕은 수작이라서 그만두었다. 안나는 공작부인의 주치의니까 속이 들여다보이는 핑계였다.
결국, 안나는 의학 공부만 실컷 하고 필립의 거처를 나섰다. 그리고 필립을 만나고 돌아오자마자 제롬의 호출을 받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 오시라 했습니다. 필립 경을 만나셨더군요.”
“절… 감시하시는 건가요?”
“아, 오해하지 마세요. 감시는 안나가 아니라 필립 경 쪽이니까요.”
예전에 필립이 내성에 들어오려던 시도를 저지한 일을 공작이 듣고 상당히 불쾌해했다. 주인이 대놓고 기분을 드러내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분명히 뭔가 있다고 제롬은 판단했다. 그래서 필립의 주변에 더 촘촘히 감시의 눈을 붙였다. 제롬이 붙인 감시는 필립이 로암(도시)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발동했다.
제롬은 모르는 일이지만, 필립을 감시하는 또 다른 눈이 있었다. 그들은 데미안 곁에 숨어있는 호위들로 그들은 소공자에게 필립이 접근하는 시도를 막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데미안이 로암에 왔기 때문에 현재 필립은 이중 감시를 받고 있었다.
“만나지 말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도 말할 필요 없습니다. 다만, 필립 경을 마님과 만나게 하거나, 마님께 언급도 하지 마세요. 마님께서 필립 경의 존재를 모르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왜 그래야 하냐고 안나는 묻고 싶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안나는 일개 주치의였다. 위에서 하라면 해야 한다.
“만나는 건 상관없다면… 필립 경이 유능한 의사시더군요. 마님의 치료를 위해 치료법을 조언받는 것은 괜찮은가요?”
제롬은 잠시 생각했다. 필립이 의술이 뛰어난 의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공작도 필립이 사람들에게 의술을 펴는 행위를 막으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 정도면 괜찮습니다. 다만, 마님께서 그건 오직 안나의 치료라고 알고 계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위에서 주시하는 감시 대상과 만나자니 영 껄끄러웠다. 그래서 안나는 며칠 필립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필립이 또 훌쩍 여행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언제 또 만날지 알 수 없었다.
안나는 초조해져서 다시 필립을 만나러 갔다.
“안나, 어서 와요.”
필립은 무척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듯 살가운 표정을 지었다. 안나는 오면서 내내 불안했다. 어떤 사람이기에 위에서 감시하는 건가, 큰 죄라도 지었나, 괜히 나까지 말려들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했으나 필립의 환대를 받고 괜한 죄책감이 들었다.
‘죄를 지었다면 그냥 감시만 하진 않았겠지. 필립 경은 주치의지만 남작이기도 하니까 뭔가 정치적인 문제일 거야.’
안나는 그 후로 꾸준히 필립을 찾아갔다. 의사에게 지식은 곧 재산이나 마찬가지인데 아낌없이 가르침을 주는 필립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필립 역시 늘 혼자였다가 대화가 통하는 친구가 생기자 생활이 한결 즐거워졌다. 다시 여행을 떠나려던 생각을 접고, 안나와 대화를 나누고, 가끔은 함께 성을 나가 빈민들에게 의료 봉사를 했다.
두 사람은 거의 스승과 제자 관계와 비슷하게 유대가 깊어졌다.
데미안이 온 이후에도 로암의 평온함은 여전했다. 루시아의 생활도 달라지지 않았다. 낮에 정원을 돌보고 저녁에는 서재에서 책을 읽었다. 마님이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자 긴장했던 고용인들도 평소대로 돌아갔다.
데미안은 열심히 공부 중이었다. 하루 대부분 시간을 방에서 책만 들이팠다. 소년에게 학술원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끈이었다. 절대 놓을 수 없었다.
삼매경에 빠져있던 소년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잠시 후 들어온 하인이 문치에서 고했다.
“도련님,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알았다.”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 모르고 있었다. 데미안은 미련 없이 책을 덮고 일어났다. 방을 나서서 식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하루 두 번. 점심과 저녁 식사를 공작부인과 함께했다. 그저 같이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뿐인데 데미안은 갈수록 그 시간을 기다렸다.
식당에 도착하자 아직 아무도 없었다. 자리에 앉아 기다리다가 루시아가 들어오자 데미안은 얼른 일어나 의자를 빼내 루시아가 앉도록 도와주었다.
“고마워, 데미안.”
루시아가 미소 지으며 인사하자 데미안은 고개만 살짝 꾸벅하고 제자리로 가서 앉았다.
식사하는 내내 조용했다. 그들 사이에 대화는 거의 없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데미안은 아이답지 않게 과묵했고, 루시아도 수다스러운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루시아도, 데미안도 함께 있는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
식사하다가 데미안이 실수로 포크를 떨어뜨렸다. 얼른 하녀가 다가와 새로운 포크를 놓았다. 작은 실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매끄럽게 흘러갔다.
데미안은 날래게 움직인 하녀를 흘끔 보았다. 자신을 대하는 고용인들의 태도가 부쩍 조심스러워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기숙학교에 가기 전에 로암에서 지낼 때 데미안에게 무례하게 구는 고용인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사생아다 어쩌다 말이 많아도 고용인 입장에서는 까마득히 높은 분이었다. 그러나 의무만 다하는 딱딱한 기계적인 모습이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더 적극적으로 시중을 들어주려는 정성이 보였다.
모두 공작부인의 덕이었다. 공작부인은 데미안에게 호의를 감추지 않았다. 고용인들도 보고 듣는 것이 있으니 한결 데미안에게 조심히 행동했다.
데미안이 공작부인과 마주치는 시간은 하루에 그리 많지 않았다. 식사 시간과 그 후의 산책 정도였다. 공작부인의 호의는 과도하지 않았고, 데미안의 속내를 끄집어내려 하지 않았다. 그 점이 갈수록 데미안의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만약 데미안이 조금 더 나이를 먹었다면 더 마음이 꽉꽉 닫혀 있었겠지만, 이제 겨우 여덟 살이었다. 정이 그리워도 그게 뭔지조차 배우지 못한 어린 소년이었다.
저녁 식사 후에 산책을 함께하자고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같이 걷고 있었다.
“공부에 열심이라지. 기특하네.”
데미안의 귀 끝이 약간 붉어졌다.
“학술원에 돌아가면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방학은 없고 외출이라고 했지. 외출은 아무 때나 나올 수 있는 거야?”
“허가를 받아야 하고 연 30일로 제한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안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언제 오실지 알 수가 없어서 30일 안에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데미안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30일의 제한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공작가에서 그 정도는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이래서는 이번 학기가 날아가게 생겼다.
“데미안, 왜 아버지라고 안 부르니?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셨어?”
“…그건 아닙니다. 싫어…하실 것 같아서.”
“왜 그렇게 생각해. 그건 네 지레짐작이잖아. 아버지라고 불러드려. 절대 싫어하지 않으실 거야.”
“…….”
“그리고 데미안. 내 이름도 안 불러주더라. 일부러 호칭 생략하는 거 내가 모르는 줄 알았지? 날 부를 때 저기, 여기요. 이러는 거 아니지?”
소년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불러줘. 나도 데미안이라고 부르잖아.”
“…예. …루시아.”
다시 귀 끝이 붉어진 소년을 보면서 루시아는 슬쩍 웃었다. 그를 빼닮은 아이는 그를 닮지 않은 점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그가 어릴 때에는 데미안처럼 순진하지 않았을 것 같다. 어릴 때에도 지금처럼 오만했을 그를 생각하니까 풋, 웃음이 나왔다.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제가 밉지 않으십니까?”
“안 미워.”
루시아는 주저 없이 가볍게 답했다.
“내가 널 미워한다고 생각하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데미안. 나쁜 감정은 가장 먼저 본인을 괴롭힌단다. 왜 그런 어두운 감정으로 나를 괴롭히니? 난 널 미워하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어.”
“…….”
하지만 공작부인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그때부터 공작부인의 소년에 대한 호의는 악의로 변할 것이다. 데미안은 공작부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데미안. 난 결혼할 때부터 이미 너를 알고 있었어. 널 인정하는 조건으로 네 아버지는 나와 결혼을 하신 거란다.”
믿을 수 없다.
“그분은 아마 다정한 아버지는 아닐 거야. 그렇다고 그분이 널 미워한다고 생각하지는 마. 표현에 서툰 분이야. 널 미워했다면 후계로 삼지도 않으셨겠지.”
믿을 수 없지만 데미안은 믿고 싶어졌다. 누구도 소년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천박한 사생아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았다. 아버지의 차가운 시선 속에는 무관심만 있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소년의 마음은 점점 세상을 향해 벽을 쌓고 있었다. 그 벽이 더 견고해지기 전에 루시아의 다정한 위로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아버지를 미워하니?”
미움. 감히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데미안은 제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분에 넘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정확한 신분도 모르는 사생아 주제에 귀족 아버지에게 인지받아 무려 공작가 차기 주인 자리를 내정받았다.
“졸업만 해. 그럼 이 자리는 네 거다.”
공작은 데미안을 기숙학교에 보내면서 오직 그것만 조건으로 내밀었다. 터무니없이 쉬웠다. 무서운 아버지 덕에 소년을 향해 치뜨는 시선은 많아도 직접 해를 입히려는 사람은 없었다. 타란 혈족이라고는 공작 외에는 오직 데미안뿐이라 경쟁자도 없었다. 불만은 주제 모르는 짓이었다.
“아닙니다. 존경하는… 분입니다.”
소년이 재학 중인 기숙학교는 각국의 귀족이나 왕족이 모여드는 명성 높은 학술원이었다. 재학 시스템이 다양해서 데미안처럼 10년 넘도록 기숙 생활을 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가장 짧게는 2년 과정도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사람 중에 제논의 타란 공작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얼마 전 마무리된 전쟁에서의 활약 덕분에 오히려 고국인 제논보다 다른 나라, 특히 적국에서 더 유명했다. 아버지는 기사들에게는 거의 신처럼 추앙받는다고 들었다.
데미안은 대단한 아버지를 감히 올려다볼 수도 없었다. 학술원에서 데미안은 출신국은 물론이고 아버지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지냈다. 공작이 숨기라고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데미안은 그런 대단한 사람의 아들이 고작 너냐는 시선을 받을까 봐 그게 겁났다.
소년의 목표는 후계로 지위를 굳건히 해서 언젠가 공작위를 이어받는 것이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 공작이 되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자신은 그저 작위를 이을 후계로서만 필요할 뿐이었다. 그 정도의 쓸모도 없어 버려질까 봐 두려웠다.
아버지의 애정은 바라지도 않았다. 아주 조금만 인정받는 것으로 족했다. 아주 쓸모없지는 않구나, 그 정도로만 봐주어도 바랄 것이 없었다.
“그래. 아들이 아버지를 존경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야.”
루시아는 내내 가슴에 뭔가 얹혀있던 것이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타란 가문의 비극적 사건이 껄끄러워서 부자 사이가 그다지 친밀하지 않은 점을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다.
“어떤 점을 존경해? 대단한 기사라서? 넓은 북부를 다스리는 능력 있는 영주라서?”
“…강한 분이니까요.”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루시아는 동의했다. 하늘 아래 그보다 강한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육체도 정신도 강인한 그는 기대고 싶은 남자였다. 참고 있었는데. 갑자기 또 그가 보고 싶어졌다.
“그래. 그는 강한 사람이지.”
단단하고 굳건하게 서있는 거대한 나무처럼. 그 밑동에 몸을 기대고 그늘에 숨고 싶을 만큼.
“데미안.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니?”
“네.”
“될 수 있을 거야. 네 아버지의 아들이니까.”
“…네.”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와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에 섞인 꽃향기가 아득할 정도로 달콤해서 데미안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말없이 걷는 그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올라와 있었다. 오늘도 평온한 하루였다.
* * *
루시아가 잠시 뜸했던 승마를 다시 시작하려고 나갈 준비하는 중에 케이트가 방문했다. 두 사람은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를 나눴다. 케이트는 그동안 종조모인 코르잔 백작부인의 병수발을 드느라 한동안 오지 못했다.
노환으로 부쩍 기력이 약해진 마담 미셀은 계단에서 넘어져 크게 발목을 접질렸다. 거의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라 가장 어여뻐하는 조카 케이트를 간병인으로 낙점했다. 케이트는 평소 따르던 종조모라서 기꺼이 곁을 지켰다.
“마담 미셀은 좀 어떠세요?”
“다리를 약간 절긴 하시지만, 이젠 곧잘 걸어 다니세요. 루시아를 만나면 보내주신 약 감사하다고 전해달라 하셨어요. 크게 효험을 보셨다고요.”
“도움이 되었다니 기쁜 일이군요.”
마담 미셀은 초반에 자주 로암에 드나들었으나 루시아가 몇 번 티파티를 열고 무난하게 사교 활동을 이어가자 건강상의 이유로 방문이 뜸해졌다. 케이트가 드나들면서부터는 케이트를 통해 전할 말을 주고받는 정도였다.
“오늘 루시아를 만나러 온 진짜 목적은 이거예요.”
케이트는 들고 온 바구니를 테이블에 올렸다.
“지난번 드리기로 약속했던 선물이에요. 열어보세요.”
바구니 덮개를 조심스럽게 열어본 루시아가 탄성을 질렀다.
“어머.”
갑자기 밝은 빛이 들어오자 눈이 부신지 까맣고 커다란 눈이 깜작거렸다. 연한 노란빛 털이 솜털처럼 부스스한 새끼 여우가 커다란 귀를 움찔거렸다.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잠깐 의식했지만, 곧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눈을 감았다. 복슬복슬한 꼬리를 움직여 몸을 둥글게 말아 제 몸을 덮었다. 두 손에 들어올 만큼 자그맣고 사랑스러운 생명체는 순식간에 루시아의 마음을 빼앗았다.
“세상에. 정말 예뻐요.”
루시아는 심장이 두근거려서 두 손으로 가슴을 짚었다. 여우 사냥을 구경 가서 봤던 여자들이 키우는 여우는 이렇게 사랑스럽지는 않았다.
“저도 이렇게 예쁜 녀석은 처음 봤어요. 커도 정말 아름다울 거예요.”
케이트는 루시아에게 여우 사냥용 여우를 한 마리 구해주기로 약속했었다.
“어릴 때부터 자꾸 손을 타야 길들일 수 있어요. 수시로 들여다보세요. 성장기가 오기 전에 주인을 인식해야지 시기를 놓치면 이도저도 아니게 되거든요.”
“그럴게요.”
“여우를 기르기에 유의할 사항은 따로 정리해서 보내 드릴게요.”
“고마워요. 케이트. 이렇게 멋진 선물을…….”
두 여자는 한동안 신나게 여우 사냥을 화제로 대화를 나눴다.
“내 정신 좀 봐. 승마를 가려던 참인데. 케이트도 함께 가지 않을래요?”
“저도 오랜만에 말이 타고 싶네요. 저도 가요.”
“아, 그리고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요.”
루시아는 하녀를 불러 데미안을 데려오라고 했다.
“데미안이 와있거든요. 모처럼 집에 온 거라 언제 소개할 수 있는 자리가 또 있을지 몰라요.”
“누구……?”
“공작 전하의 아들 말이에요. 이젠 내 아들이기도 하지요.”
케이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예?”
“혹시 들은 적 없어요? 내가 알기로 데미안은 후계로 공표되었다고 하던데요.”
“예……. 뭐. 들은 적은 얼핏…….”
공작의 사생아는 북부 귀족들에게 금기어였다. 누가 입단속을 시킨 것도 아닌데 알아서 입조심을 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타란 공작 후계의 존재는 수도 사교계에 전혀 소문이 돌지 않을 수 있었다. 타란 공작은 알아서 하는 입조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북부에서 데미안은 붕 뜬 존재였다.
“부르셨습니까.”
잠시 후 응접실로 들어오는 흑발의 소년을 보며 케이트는 긴장된 숨을 삼켰다. 아직 그녀는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다.
“데미안, 인사하렴. 내 벗, 케이트 밀튼 양이란다.”
데미안은 당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케이트를 무심히 보았다. 자신을 향한 저런 시선과 표정은 워낙 익숙했다. 그동안 공작부인이 보여주는 순수한 호의에 잠시 착각에 빠져있었다.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데미안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레이디 밀튼. 아름다운 숙녀분을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데미안입니다.”
“아……. 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소공자님.”
케이트는 아주 오래전 시내를 걷다가 드레스 자락이 말려 사지를 뻗으며 엎어질 때에도 이처럼 표정 관리가 힘들지는 않았다.
“어쩜, 말하는 것 좀 봐. 정말 의젓하지요?”
옆에서 공작부인이 해맑게 웃으며 하는 말에 마지못해 대답했다. 웃을 수 없는 희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데미안. 혹시 말은 탈 줄 아니? 아니면 망아지를 타야 하나?”
“말을 탈 줄 압니다. 학술원에서 배웠습니다.”
“못하는 게 없구나. 케이트. 대단하죠? 여덟 살인데 승마를 할 줄 안대요.”
“아……. 네. 대단…하시네요.”
여덟 살에 제대로 말을 탈 줄 안다는 것은 분명히 흔한 일은 아니지만, 케이트는 소공자가 여덟 살이라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과연 기사로 이름 높은 타란 공작의 아들이라는 건가.
“데미안. 지금 승마하러 가려는데 함께 가자.”
데미안은 굳어있는 케이트의 표정을 살폈다. 애써 웃고 있으나 달갑지 않은 불청객을 대하는 기색이었다.
“아닙니다. 아직 봐야 할 책이 있어서.”
“공부도 좋지만 한창 뛰놀 나이에 그렇게 방에만 있으면 안 돼. 키 안 큰다?”
키. 민감한 화제에 데미안이 움찔했다.
“아버지만큼은 커야지. 그렇지?”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트. 데미안이 함께해도 괜찮겠지요? 미리 양해를 구하지 않아 미안해요.”
“아니에요. 그런데 루시아. 우리가 가는 승마장은… 여자만 출입이 가능한데요.”
“알아요.”
루시아는 그게 도대체 무슨 문제냐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데미안은 이제 여덟 살이에요. 남자가 아니라고요.”
케이트는 보았다. 아주 잠깐, 일그러지는 소공자의 표정을. 나이답지 않게 곧은 자세로 서서 딱딱한 말투를 구사하는 소년이 갑자기 제 나이로 보였다. 케이트는 살짝 고개를 돌려 풋, 웃음을 흘렸다. 무너진 소년의 자존심이 안 되어 보였다.
루시아는 승마장을 방문한 귀부인들이 인사를 건넬 때마다 데미안을 인사시켰다. 귀부인들은 하나같이 땡감 씹은 것처럼 떫은 표정을 지으며 떨떠름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일부는 루시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일부는 루시아가 세상 물정을 몰라서 어리석다는 시선으로, 일부는 걱정스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유쾌하지 않은 뭇시선을 모를 리 없건만 루시아는 개의치 않았다. 간혹 데미안이 묘한 눈으로 루시아를 보곤 했다.
“이 아이가 에미리야.”
루시아는 애마를 데미안에게 소개했다. 데미안은 말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다가 놀라지 않도록 눈앞에서 천천히 다가가 말 등을 쓰다듬었다.
“좋은 말입니다.”
“말을 볼 줄 알아?”
“좋은 말인지 아닌지 정도만 아는 것이고 전문가는 아닙니다.”
“난 그런 것도 잘 모르겠던데. 에미리는 내 말이라서 가장 예쁜 것이지 다른 말들은 다 똑같아 보여서. 대단하지 않아요? 케이트. 데미안은 아는 것이 아주 많아요.”
뿌듯한 공작부인의 표정을 보며 케이트는 맞장구쳐 주었다. 슬쩍 소공자를 보자 괜히 무안한지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부렸다.
처음에는 루시아가 대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루시아가 무슨 의도로 이러는 걸까 의심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지켜보니 알겠다. 루시아는 속마음과 다른 행동을 꾸며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모자지간이 사이좋게 지내면 나쁠 것 뭐 있나. 케이트는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승마장을 몇 바퀴 돌고 두 여자는 휴게실로 들어왔다. 더 말을 타겠다는 데미안은 아직 밖에서 말을 달리는 중이었다. 휴게실 안은 테이블마다 삼삼오오 여자들이 모여 앉아있었다. 처음 취지와는 다르게 승마장은 점점 여자들의 활발한 사교 장소로 자리 잡았다.
“예상보다 데미안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차갑네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케이트는 듣기만 했다.
“공작 전하께서 직접 공표하신 후계자인데 왜들 그러는 거죠?”
“그건 아마… 암묵적인 질서 때문일 거예요. 입적하면 적자로 인정한다고 법은 명시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입적한 아들이 작위를 물려받은 예는 거의 없어요. 제가 알기로는 공, 후작 가문에서 그런 예가 없을걸요.”
“…그렇군요. 몰랐어요.”
꿈속에서 루시아는 자식이 없어서 백작부인으로 지낼 때 아예 작위 계승 문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가문의 맏아들이 혼외자인 예는 보지 못한 것 같아요.”
“나이로는 혼외자가 장남이라도 입적할 때는 차남 이하로 들어와요. 아무래도 후계가 대부분 장자라는 관행 때문이지요.”
“그럼 만약 입적된 자식 외에 정부인에게서 전혀 자식이 없으면 어찌 하나요?”
“친척 중에서 양자를 들이죠. 대부분이 그렇게 해요.”
이른바 귀족의 자존심이었다. 사생아는 적자로 인정해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하라는 것이다. 왕족이라고 해도 루시아 역시 따지고 들면 사생아인 셈이라 그녀는 기분이 씁쓸했다.
두 사람의 테이블로 나이 지긋한 노부인이 다가왔다. 나이보다 정정해서 누구 못지않게 승마를 즐기는 필리아 백작부인이었다. 여성 전용 승마 연습장이 생기고 백작부인이 입이 마르도록 타란 공작을 칭송하고 다녔다. 의례적 인사를 나누고 백작부인은 두 개의 꽃바구니를 테이블에 올렸다.
“얼마 전 손녀를 얻었답니다. 북부 전통에는 손녀의 건강과 아름답게 자라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아 주변 사람에게 노란 꽃을 선물하지요.”
“어머, 축하해요. 백작부인을 닮아 손녀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랄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도 꽃바구니를 돌리기 위해 백작부인이 돌아서자 케이트가 말했다.
“북부 전통이긴 한데 요즘은 안 하는 사람이 더 많아요. 필리아 백작부인은 이런 속설을 꽤 신뢰하거든요. 노란 꽃을 주는 것이 맞기는 한데 이 꽃을 주는 건 흔치 않죠. 워낙 가격이 나가니까요. 필리아 백작부인이 정말 기쁜가 보네요. 거금을 쓰셨겠어요.”
루시아는 꽃바구니를 바라보며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노란 장미가 탐스럽게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승마하고 돌아오시는 여주인을 맞이하려고 여느 때처럼 고용인들이 모두 나와있었다. 마차에서 내려오는 마님의 손에 들린 노란 장미 꽃바구니를 발견한 제롬이 식겁했다.
“끄억.”
자신도 모르게 괴상망측한 소리를 낸 제롬은 얼른 헛기침으로 무마했다. 눈치 있는 고용인들은 모르는 척했다. 루시아는 얄궂은 표정으로 제롬을 보다가 꽃바구니를 내밀었다.
“선물 받았어요. 필리아 백작부인이 손녀를 얻었다 하더군요.”
“예…….”
꽃바구니를 받아들며 제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롬은 이제 노란 장미라면 꼴도 보기 싫었다. 장미 바구니는 어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우선 집사 업무실에 가져다 놓았다.
루시아와 데미안이 응접실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곁에서, 제롬이 차 시중을 들었다.
“생각해 보니까 정원에 장미가 없어요. 내년 봄에는 장미 정원을 만들어볼까 하는데, 제롬 생각은 어때요?”
제롬의 낯빛이 굳었다.
“장미는… 다시 생각해 보시지요.”
“왜요?”
“…주인님께서 별로…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루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롬을 보다가 데미안에게 말했다.
“데미안. 솔직히 말해 봐. 정원에 장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니?”
“몰랐습니다.”
“거봐요, 제롬. 꽃에 유난히 관심이 있지 않고서는 남자는 그런 거 잘 몰라요. 그분이 꽃의 종류를 구별이나 하는지 의심인걸요. 하나는 확실히 구별하시겠네요. 노란…….”
“흠. 흠”
제롬이 괜한 헛기침을 하자 루시아는 풋,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장미는 심어도 그 색은 제외할 테니까 걱정 마요.”
색깔이 문제가 아니었다. 주인은 장미꽃 자체를 아예 눈에도 보이게 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제롬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솟았다. 데미안이 먼저 제 방으로 돌아가고 나서 제롬은 계속 망설이던 말을 꺼냈다.
“마님. 일전에 말씀하신 노란 장미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보낸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셨지요.”
“그랬지요. 기억해요.”
“주인님 명으로 팔콘 백작부인에게 노란 장미를 보냈습니다.”
아무 대답이 없는 마님의 눈치를 살피며 제롬은 초조했다. 괜히 말했나! 기분이 상하신 건가!
“갑자기 왜요? 만나셨나 봐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제가 마님께서 궁금해하시더라고 말씀드렸더니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무심한 표정으로 루시아는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대답했다. 조금이라도 마님의 기분을 파악하려고 제롬은 안절부절못했다.
루시아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려 했다. 남편이 옛 애인 하나 정리한 일이 뭐 그리 대단해서 기뻐할 일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기분은 말랑말랑 풀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데미안 덕분에 아슬아슬할 정도로만 찰랑거리던 그리움이 다시 샘솟았다.
‘언제 오실까. 보고 싶은데…….’
야만족 정벌을 떠난 지 한 달째 되는 날, 자리를 비웠던 로암의 주인이 귀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