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23화 (24/77)

23장 데미안 (1)

“도련님, 행정 서기관 아신입니다. 기억하시는지요?”

소년은 싱글거리는 아신에게 예의상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흘끔 아래위로 아신을 짧게 훑더니 까닥 고개만 끄덕이고 마차로 휙 들어가 버렸다.

아신은 멋쩍어 뒷머리를 긁적였다.

‘씨도둑은 못 한다더니…….’

찬바람 돌기가 제 아버지 못지않았다. 아마 공작의 어릴 때 모습이 딱 이러할 것이다. 흑발과 붉은 눈동자는 타란 공작의 미니어처였다. 누가 봐도 의심할 필요 없이 소공자는 타란 공작의 핏줄이었다. 혈통 감별 마도구 따위는 필요도 없겠다.

‘후우……. 내 팔자야.’

아신은 장거리 여행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집과 로암만 왔다 갔다 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에 지극히 만족하고 있었다. 꽤 긴 여정을 썰렁한 꼬마와 마차 안에 마주앉아 갈 생각만 하면 벌써 한숨이 났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무척 많이 자라셨습니다. 몰라 뵐 뻔했어요.”

아신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푼답시고 싱거운 소리를 나불거렸다. 그답지 않은 짓이지만, 아신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타란 공작을 빼닮은 작은 타란 공작이 영 껄끄러웠다. 그리고 정말 몰라보게 자란 것은 사실이었다.

‘허어……. 여덟 살이 뭐 이래. 서너 살은 더 들어 보이는구먼. 조카 녀석이 올해 열 살인데 이보다는 작다고.’

2년 전 여섯 살 때에도 소공자는 기골이 장대했다. 그때부터 이미 징조는 있었다. 여우 새끼와 호랑이 새끼는 아예 크기가 다른 것처럼.

‘이렇게 자라니까 그런 덩치로 크는 거겠지. 아예 종이 다른가 봐.’

“…어쩐 일이죠?”

“예?”

한참 만에 열린 소공자의 입이 반가워서 아신은 반색했다.

“날 데리러 올 군번은 아니잖아요.”

“하… 하하.”

그렇지. 그럴 군번은 아니지. 그리고 그 말이 여덟 살짜리 입에서 나올 만한 것도 아니고.

‘날 기억하는 건 그렇다 쳐도… 내 직위도 파악한다는 건가?’

타란 공작가 핏줄에는 뭔가 남다른 점이 있었다. 지금의 타란 공작을 봐도 범인과 달랐다. 아신은 타란 공작을 알기 전까지 문무 겸비라는 단어는 소설책에서나 나오는 말인 줄 알았다. 태생부터 다르다고 생각하면 억울하지만, 차라리 이해가 갔다.

‘원래 세상은 불공평하지.’

그걸 깨달았을 때가 그의 동심이 깨진 날이었다.

“공작 전하께서 명하셨습니다.”

데미안의 커진 눈이 ‘대체 왜?’라고 물었다.

“도련님께서도 소식은 들으셨을 겁니다. 얼마 전 공작가에 안주인이 들어오셨습니다.”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의 소식은 비교적 자세하게 수시로 받았다. 장차 가문을 이어받으려면 돌아가는 사정을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타란 공작의 뜻이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외부 소식과 단절된 기숙학교에 있었다고 해도, ‘그래서 몰랐다.’라는 말 따위는 공작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가문의 소식을 받으면 아예 달달 외워버렸다.

“제 생각입니다만, 두 분이 모자지간이 되셨으니 가족으로서 서로를 알아야 한다고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모자지간이라고?’

데미안은 속으로 아신에 대한 평가치를 하향 조정했다. 아신이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모시는 주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그렇게 섬세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소년과 공작부인이 서로 물고 뜯어도 누구 한쪽이 죽지만 않으면 개의치 않을 것이다. 듣기 좋으라고 미화해서 돌려 말했다면 데미안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었다. 데미안은 그런 말랑한 단어에 설레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다른 말씀은 전혀 없으셨나요?”

“아……. 그……. 도련님께서 어머니께 무례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예를 다하라고…….”

‘그럼 그렇지.’

데미안은 나대지 말고 얌전히 지내다 가라는 공작의 경고를 알아차렸다. 사생아에 불과한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혼적에 오르기 전에는 어디에도 내세울 수 없는 신분이고 혼적에 오르기 위해서는 공작부인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공작의 경고가 없어도 데미안은 새어머니와 맞설 생각이 없었다.

“예뻐요?”

“예? 아……. 저도 몇 번 뵙지는 못한 터라…….”

‘예쁜지 안 예쁜지는 한 번만 봐도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아신의 미적대는 대답에서 데미안은 결론을 내렸다.

‘별로 예쁘지 않나 보네.’

데미안은 새어머니에 대한 관심은 그걸로 접었다. 로암에서 지내는 동안 새어머니와 얼굴 몇 번 마주치면 그만일 것이다. 새어머니가 데미안을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꼴 보기 싫어하면 눈에 띄지 않게 방에 박혀 지내고 목숨을 위협하지만 않으면 어떤 괴롭힘도 견딜 생각이었다.

공작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데미안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할 때가 되었으니 한 것이겠지. 필요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냉정한 부친의 기질을 소년은 파악하고 있었다.

공작의 결혼이 소공자인 자신의 지위를 흔들지 않을 것이라고 데미안은 믿었다. 공작은 좋은 아버지는 아니지만, 소년에게 그런 믿음은 주는 사람이었다.

‘길어봤자 일주일이나 있으려나.’

갑작스러운 호출 때문에 이제 막 시작한 학기가 엉망이 되었다. 오가며 버리는 시간을 포함해서 3주면 될 것이다. 이번 학기를 포기하는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기만 바랐다. 돌아가서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헛된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된다. 마차의 짐칸에는 소년이 챙겨넣은 책이 한가득 있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타란 공작의 결혼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옮겨 사교계를 강타했다.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화제에 올렸다. 누구도 결혼식에 참석했다는 사람이 없으니 소문만 부풀고 호기심은 시들 줄 몰랐다.

퀘이즈 역시 그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돈과 시간을 쏟아부었다. 공작부인이 된 여자가 공주라기에, 대체 누군가 싶어 조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정확한 정보는 이름과 나이가 전부였다. 그나마 결혼하기 전에 잠시 지낸 소궁에서 수발을 든 시녀들을 매수해 인상착의를 알아낸 것이 유일한 수확이었다.

점점 오기가 생겼다. 나름대로 부족할 데 없는 정보 인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그들을 몇 개월 돌려도 정말 뭐 하나 걸리는 것 없이 깨끗했다.

“이거 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퀘이즈는 어이가 없어서 탄식했다.

공주 찾기에 달려든 사람은 퀘이즈뿐만이 아니었다. 왕실 정보부에서 나서서 비비안 공주가 지냈다는 별궁을 중심으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시녀들의 명부 조작이라는 고질적인 병폐가 드러났고, 여관들이 책임지고 엄한 벌을 받았다.

평민으로 살다가 궁에 들어왔다기에 어릴 때 살았던 마을에 사람을 파견했다. 그러나 공주의 모친과 친하게 지냈다는 사람조차 모녀에 얽힌 사정을 아는 이가 없었다.

몇 개월 달달 뒤지고 뒤져서 겨우 공주의 모친이 죽기 전에 궁으로 보냈다는 서신을 손에 넣었다.

“여기도 단서는 없군.”

낡은 종이의 짤막한 편지글을 읽으며 퀘이즈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 월 모 일 왕과 동침했고 공주를 낳았다.’라는 사실 관계 설명 외에 모친의 신분을 짐작할 만한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이름조차 쓰지 않았다.

“설마… 모친이 평민인가?”

살짝 의심이 들었으나 금방 털어냈다. 노친네가 이 여자 저 여자 가릴 것 없이 마구 노는 것 같아도 취향은 있었다. 노동으로 굳은살이 박인 손과 거친 피부를 지닌 평민 여자를 품었을 것 같지 않다.

“크로틴 경. 정말 아는 거 없나?”

퀘이즈는 근접 호위를 하느라 근처에서 떨어지지 않는 로이에게 몇 번째일지 모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없습니다. 알아도 몰라요.”

예의라고는 저만치 치워버린 말투는 언제 들어도 거슬려서 옆에 있던 부관이 인상을 찡그렸다. 다른 자들과 달리 태자는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겉으로는 로이의 무례함에 관대했다.

“딴 건 됐어. 도대체 둘이 무슨 수로 만나서 결혼한 거냐고.”

궁금해서 죽을 것 같아! 충족되지 못한 호기심에 괴로워하는 퀘이즈를 보며 로이는 남모르게 히죽 웃었다.

‘난 알지.’

남이 알고 싶어 발버둥 치는 비밀을 혼자만 아는 일은 꽤 즐거웠다.

“그러고 보니 크로틴 경. 내일 결투한다지.”

“예.”

태자와 적대하는 파벌의 백작이 감히 태자에게 덤비지는 못하고 애먼 로이에게 시비를 걸었다. 로이는 평소처럼 퉁명스레 몇 마디 되받아쳐 줬는데 백작은 자길 모욕했다며 장갑을 내던졌다. 로이는 흔쾌히 응했다. 지금껏 덤벼드는 놈을 피한 적이 없었다.

“살살해야 하나요? 내일 결투 말입니다.”

퀘이즈가 웃음을 터뜨렸다.

“거 새로운 농담인가? 결투가 무슨 장난이야? 내 체면 생각하지 말고 마음껏 싸우게.”

“알겠습니다.”

허락도 받았겠다. 로이는 히죽 웃었다. 직접 나서는 것도 아니고 가문의 기사를 내보낼 것이면서 마치 제가 싸울 것처럼 으스대는 꼴이 정말 꼴불견이었다. 어찌 박살을 내줄까 벼르고 있었다. 분풀이는 대신 결투에 나선 기사가 감당해야겠지만, 주인을 잘못 만난 것도 죄.

다만, 사고를 치면 태자의 체면이 문제가 아니라 주군께 맞아 죽을까 봐 ?팁ㅐ繭撰 태자에게 면책을 받은 것이다.

퀘이즈는 훗날 이날의 대화를 잠깐 회상하곤 했다. 광견 크로틴의 시작이었다.

타란 공작의 결혼 소식을 듣고 꽤 많은 여자들이 가슴앓이를 했다. 아니타는 여느 여자들과 다른 의미로 입맛이 썼다. 이미 세 번이나 결혼한 전적이 있는 그녀는 타란 공작과의 결혼은 꿈도 꿔본 적 없었다. 잊지 않고 가끔 찾아주는 애인으로 만족했다.

‘언제고 새신부가 지겨워지면 그가 연락하겠지.’

그의 결혼이 둘의 관계에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고 없이 배달된 노란 장미를 받고 온종일 넋을 놓고 있다가 열흘 넘도록 몸살을 앓았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자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왜?’

아무리 생각해도 실수한 것이 없었다. 절대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으며 어디 가서 대놓고 그와의 관계를 말하지도 않았다. 입소문이 암암리에 퍼지는 일은 어쩔 수 없지만, 그는 그런 소문에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다. 그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더 몸을 사리고 있던 참이라서 도무지 그의 결별 선언을 납득할 수 없었다.

결혼했기 때문에 애인을 정리한다고? 그는 절대 그런 양심적인 신사가 아니었다. 당장 그의 영지로 달려가 이유를 묻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아주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의 결별 통보를 받고 수도 저택에 들이닥친 여자가 있었으나, 그 후 사교계에서 그 여자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내린 결론은 공작부인이 된 비비안 공주였다. 새신부가 아니타의 존재를 알고 끊기를 종용했을 것이다. 어차피 그는 어떤 여자에게도 미련은 없으니까 아내의 요구를 못 이긴 척 들어준 것이 분명했다.

아니타는 비비안 공주가 누군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조금씩 드러나는 사실이 워낙 흥미로워서 어느새 밤낮으로 비비안 공주 찾기에 골몰했다.

그녀는 어떤 정보부도 포착하지 못한 여자 특유의 시선으로 조사해 들어갔다. 가장 먼저 주목한 건 비비안 공주가 승전 기념파티에 참석한 기록이었다. 별궁에 거의 갇혀 살았다는 공주가 사교 파티에 참석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드레스는? 화장은? 머리는?

아니타는 한동안 사업체도 내버려두고 집요하게 비비안 공주에 대한 것들을 캐고 다녔다. 공주가 시녀 행세를 하며 빈번히 외출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드레스는 아마 직접 나가서 구한 것 같았다. 세상 물정 아무것도 모르는 공주님이 아니었다.

‘미인은 아니야. 절대 그의 취향도 아니야.’

아니타는 테이블에 초상화를 올려두고 한참을 미동 없이 보고 있었다. 뒷돈으로 구한 비비안 공주의 인상착의를 기반으로 제작한 초상화였다.

처음에는 안심했던 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해졌다. 그의 취향은 아니지만, 그래서 오히려 빠질 수 있지 않을까. 사내란 새로운 것에 흥미를 갖기 마련이니까. 시녀 행세를 한 공주라는 특이한 점이 자꾸 신경이 쓰였다.

‘잠시 흥미가 있었다고 해도… 금방 식겠지. 언제고 그는 나를 다시 찾아올 거야.’

그러나 그는 노란 장미를 보낸 여자를 두 번 찾은 적이 없었다. 노란 장미를 받은 이후 아니타는 제대로 잠을 이루는 날이 거의 없었다.

‘의미 없는 결혼이야. 그는 여자를 사랑할 줄 모르는 남자니까.’

비비안 공주의 초상화를 보며 아니타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정착하지 못하는 그가 여자에게 잡히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녀의 오만이었다. 막상 그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리며 뛰었다.

비비안 공주를 실물로 보고 싶었다. 그의 눈에 들 여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얻어서 불안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북부로 가서 그 모르게 확인만 하고 올까?’

게이트를 타지 않으면 수개월의 마차여행을 해야 한다.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북부 게이트를 타려면 타란 공작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아무리 형식적인 승인 과정이라도 그가 혹시 알게 되면 뒷감당이 두려웠다. 언제고 두 사람이 수도에 올라올 테니까 그때를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왜 시녀 행세를 했지? 궁을 나가서 뭘 한 걸까. 궁 밖에 애인이 있었나? …그래. 애인.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

아니타의 비비안 공주 찾기 대장정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공주 얼굴만 확인하려 했던 처음 의도는 이제 남아있지 않았다.

로암 시내를 새카만 마차가 달려갔다. 거무튀튀한 목재로 만들어진 마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흑사자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까만색 마차가 신기해서 사람들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마차를 구경하곤 했다.

마차의 주재료로 사용된 흑목은 강철만큼 단단하면서 화재에 강해서 오래전에는 군선의 재료로 사용되었다는데, 흑목 군락지에 병이 돌아 대부분이 고사(枯死)하는 바람에 지금은 흑목 가격이 같은 무게의 금값을 뛰어넘었다.

휴고는 아내의 안전을 위해 흑목으로 마차를 만들어 주었다. 왕이나 탈 수 있을 법한 마차를 타고 루시아는 종종 외출했다. 검은 마차가 달려가면 이제 사람들은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알았다. 대부분 사람은 평생 가도 얼굴조차 보기 힘든 높은 분이라서 마차가 지나가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마차가 도개교를 건너 성문을 들어설 때 고동 피리 소리가 울렸다. 루시아를 태운 흑목 마차는 계속 달려서 내성의 중앙탑 앞에 멈추었다. 고용인들은 안주인을 맞이하려고 모두 나와있었다.

루시아는 승마를 마치고 돌아오면 개운하게 목욕을 하고 응접실에 앉아 제롬이 타주는 향긋한 차를 마셨다.

“외출은 즐거우셨습니까. 마님.”

“즐거웠어요. 에미리는 정말 착한 아이라서 서투른 내 지시를 잘 따라줘요.”

그녀의 애마 에미리는 휴고가 선물한 순하고 혈통 좋은 암말이었다. 생김새나 윤기 자르르한 털을 보면 좋은 말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멋진 말이라고 칭찬을 들을 때마다 루시아는 어깨가 으쓱했다.

“오늘은 누가 그러더군요. 에미리는 본인의 말 열 마리와도 바꿀 수 없을 거라고. 에미리가 많이 비싼 말인가 봐요.”

“예, 그런 편입니다.”

주인의 선물에 가격을 논하는 일은 예의가 없는 짓이라 제롬은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루시아도 굳이 묻지 않았으나 그가 준 말과 마차가 값을 떠나서 귀한 선물이라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

“언제 오실까요?”

그녀의 마음속에서 그리움이 하루가 다르게 부쩍 자랐다.

“예? 아……. 정확하지는 않지만, 최대 한 달까지는 생각하셔야 합니다.”

“한 달이나……. 영지 일이라는 건 알겠어요. 무슨 일로 가신 건가요?”

그전에는 그가 하는 일에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지만, 이제는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었다.

“주인님께서 이번에 가신 일은 연례행사입니다.”

제롬은 주인께서 갑자기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강조해서 사적인 이유가 절대 없다고 말하고자 했다. 그는 공작 부부의 극적 화해를 모르고 있었다.

“마님께서도 북쪽의 국경이 야만족의 땅과 닿아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들은 구심점이 없는 부족들인데 때때로 국경을 넘어와 약탈합니다. 그들의 준동을 막기 위해서 연 한 차례 토벌대를 파병합니다. 타란 가문의 가주가 토벌대를 이끄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럼 매년 이맘때 항상 떠나는 일정이시겠군요.”

“그동안 전쟁으로 주인님께서 매년 가지 못하시고 기사들만 보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부쩍 약탈이 잦아졌다는 것 같았습니다.”

“계속 불안에 떨어야 하는 북부 사람들은 힘들겠어요.”

“국경에서 가까운 지역이 아니면 별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마시던 루시아가 짧게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세상에! 어떻게 그걸 잊고 있었지! 제롬. 오늘은 그분 생신 아닌가요?”

예전에 제롬에게 물어서 기억해 두었던 그의 생일이 바로 오늘이었다. 계속 외우고 있었는데 그와 싸우느라 깜빡하고 말았다.

“떠나시기 전에 내게 알려주지 그랬어요. 생일인데 축하도 못 받고 야만족과 싸우고 계시겠군요.”

“음……. 마님. 주인님께서는 따로 생일을 챙기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겠지요. 누가 본인 생일을 그렇게 챙기겠어요. 그건 주변에서 해주는 거예요.”

“언급…하는 것도 싫어하십니다.”

“…왜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주인님께서는 생일뿐만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일 같은 개인사를 떠올리기 싫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린 시절에서 떠올리고 싶은 추억이 없다는 건가…….’

그건 참 슬픈 일이었다. 힘든 삶을 살았던 루시아도 절대적인 추억의 순간은 있었다. 입궁 전까지 어머니와 살던 어린 시절은 넉넉지 못했지만 행복했다.

제롬에게 들었던 서쪽 탑에 얽힌 비극이 떠올랐다. ‘끔찍한 일이니까 생각하지도 말고 입에 담지도 말아야지.’ 하고 잊으려고 애썼으나 서쪽 탑을 볼 때마다 자꾸 생각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존속살인이라는 비극적인 사건 자체보다 그런 사건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숨겨진 진실에 마음이 쓰였다.

부모로서 하면 안 될 짓을 하다가 최후를 맞이한 죽은 공작에게 루시아는 동정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

“제롬. 돌아가신 전 공작님을 뵌 적이 없다고 했지요?”

“예. 저는 주인님께서 작위를 승계하실 무렵부터 모셨습니다.”

“왠지 굉장히 냉혹한 분이었을 것 같군요.”

제롬은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단편적으로 들은 말에 의하면 마님 생각과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의 과거는 정말 평범하지 않구나.’

루시아는 자신보다 파란만장한 인생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과거는 쉽게 입에 담지 못할 어둠으로 가득했다. 출산 후 사망한 어머니는 얼굴도 모르고, 아버지는 이해득실을 따져 아들을 버렸다. 하나뿐인 형제는 혈육을 죽였다.

사랑을 배운 적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을 알겠는가. 그의 냉정하고 정 모르는 성격은 자연스러운 형성 과정의 결과였다. 오히려 그는 과거를 딛고 대단히 훌륭하게 성장했다. 그는 차갑기는 해도 삐뚤어진 구석은 없었다.

‘갓난아이를 버리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단지 분란의 소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갓 태어난 어린 아들을 버리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는 순전히 운이 좋아서 선택되었을 뿐이야.’

그가 버려졌다면 존속 살인죄는 어쩌면 그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귀족 가문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끊임없이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지만, 사생아마저도 입적해 키우는 마당에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는 없었다. 알려지면 만인의 손가락질을 받을 짓이었다.

‘그는 타란 가문이 손이 귀하다고 했어. 손이 귀하면 쌍둥이를 더 귀하게 키워야지.’

생각할수록 앞뒤가 맞지 않았다.

‘데미안도 그래. 손 귀한 집안의 귀한 아들이잖아.’

하나뿐인 아들이고 그의 후계였다. 엄하게 키우고자 기숙학교에 보낼 수 있다 쳐도 지나치게 무관심했다.

‘아버지의 정을 받고 자라지 못해서 주는 법을 모르는 걸까?’

루시아는 끊임없이 속으로 묻고 답하며 점점 더 깊은 사고로 들어갔다.

‘그는 여자가 많았어. 사생아가 몇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꿈속에서 그에게 자식이 더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아이를 얻기가 워낙 힘들어서 데미안을 후계로 삼은 건가?’

그러면 그가 루시아의 임신을 거리낄 이유가 없었다. 손이 귀할수록 가능한 많은 자손을 보는 것이 정답이다. 단 하나뿐인 후계자는 무수한 위험을 내포했다. 그래서 귀족들은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 다산을 선호하고 자식들을 경쟁시켜 빼어난 후계를 골라냈다.

그와 언쟁을 벌일 때는 감정에 휩쓸려 그의 말을 냉정히 분석할 수 없었지만, 루시아는 찬찬히 그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자식은 필요 없어.’

‘내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아.’

단지 후계 갈등을 저어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흔적’이라는 표현의 뉘앙스에는 근원적인 혐오감이 담겨있었다.

‘그럼 데미안은? 그가 원하지 않았는데 여자가 임신 사실을 알리지도 않고 낳았나?’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억지로 아이를 떼는 것보다 차라리 출산이 여자 몸에 후유증이 적었다. 많은 사생아가 그런 식으로 태어난다. 루시아 역시 그렇게 태어났다.

‘아니야. 그가 정말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허술했을 리가 없어.’

루시아는 그가 가진 냉정하고 잔인한 구석을 인정했다. 그가 정말 자식을 원하지 않았다면 강제 낙태를 시도했을 것이다. 겨우 낙태? 그는 그보다 더 심한 짓도 할 수 있을걸. 그녀의 이성이 속삭였으나 무시했다. 그녀는 가급적이면 사랑하는 남자의 좋은 면만 보고 싶었다.

‘데미안이 태어났을 때 그의 나이를 따져보면 어린 나이니까 빈틈이 있을 수 있지. 그도 사람이니까 실수는 할 수 있어.’

지난번 싸움으로 그의 내심이 얼마간 드러났기 때문인지 데미안이 사랑으로 태어났을 것 같지 않았다.

‘원하지 않았어도 태어난 아이는 죄가 없잖아. 그는 마치 데미안을 버려둔 것 같아. 대개 남자는 자기 혈육에 대해 진한 정을 느낀다는데……. 진짜 아들이 아닌 것처럼……’

되는 대로 마구 떠오른 생각 중 하나였지만, 갑자기 어떤 강한 의혹이 확 그녀를 덮쳤다.

‘말도 안 돼.’

“마님, 차를 더 올릴까요?”

제롬 목소리에 반짝 깨어나 손을 내려다보자 빈 찻잔을 쥐고 있었다.

“아……. 그래요.”

찻잔이 채워지는 것을 보며 루시아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제롬, 소공자를 본 적 있지요?”

제롬은 움찔해서 루시아의 눈치를 살폈다. 이분이 또 시작인가. 바짝 긴장했다.

“…예.”

“그분과 많이 닮았나요?”

“예. 보시면 놀랄 정도로 아주 빼닮으셨습니다.”

‘내 비약이 너무 심했나……. 하긴 터무니없는 생각이지.’

혈육이 아닌데 후계로 삼아 작위를 물려준다니.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어리석은 망상으로 치부하려 했으나 미진한 뭔가가 자꾸 걸렸다.

“데미안은 언제 공작가에 들어왔어요?”

제롬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무리 마님께 남김없이 모두 말하고 싶어도 한계치는 있었다. 그리고 사실, 소공자에 대해서는 제롬도 확실히 아는 것이 없었다.

“송구합니다, 마님. 도련님의 일은 함부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주인님께 여쭈어 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았어요.”

루시아는 제롬을 다그쳐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뭔가 잡힐 것 같으면서도 아니고, 의혹은 있는데 뭐 하나 확실하게 결론을 낼 수 없어서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밤이 늦어 잠들 준비를 하는 중에 침실로 하녀가 약을 가지고 들어왔다. 안나가 요즘 치료법을 찾느라 열심이라고 들었다. 매우 바쁘게 여기저기 다니는 것 같았다. 치료약 대신에 여성의 자궁에 이로운 보약 위주로 약을 지어 올렸다. 약그릇을 받아서 한 모금 마시자 쌉쌀하고 떫은맛이 났다.

‘그 약의 맛은 꽤 독특했어.’

루시아는 꿈속에서 삼엽쑥에 중독된 몸을 치료하느라 먹었던 약의 맛을 기억했다. 상당히 독특해서 잊을 수가 없었다.

‘바닐라 향. 그런 비슷한 맛이었어.’

다음날, 점심을 먹고 루시아는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마님!”

하녀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표정이 꽤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이니?”

“소… 소공자님이… 오셨습니다.”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주인을 닮은 소년을 보며 제롬은 애써 당혹스러움을 감추고 표정을 관리했다. 그리고 소공자가 모르게 맹렬하게 아신을 노려보았다. 아신이 찔끔하면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정중한 인사를 올리는 제롬에게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당황하는군.’

데미안은 제롬을 멀뚱히 보며 생각했다. 물론 제롬의 완벽한 표정과 태도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제롬만 완벽하면 뭘 하겠는가. 주변에 늘어선 고용인들이나, 아까 성으로 들어올 때 맞이하던 기사들이나 모두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네가 여기 어쩐 일이야, 라고.

“오랜만이군요.”

“먼 길을 오시느라 피곤하셨겠습니다. 점심은 드셨습니까?”

“나중에 하지요. 흔들리는 마차를 계속 탔더니 속이 불편해요.”

“예, 도련님. 그러면 쉬실 수 있도록 침실로 모시겠…….”

제롬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주변이 기이한 침묵에 휩싸였다. 데미안은 누군가의 등장을, 그리고 등장한 인물이 정체까지 예상했다.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데미안도 고개를 돌렸다. 반쯤 열린 응접실 문으로 들어서는 여자는 달려왔는지 어깨가 조금 들썩거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 보이고 자그마한 갈색 머리카락 여자의 등장에 모두 숨을 죽였다.

타란의 안주인. 공작부인이자 소년 데미안의 새어머니였다.

‘우와…….’

데미안을 보면서 루시아는 감탄했다. 소공자가 왔다는 하녀 말을 듣자마자 체통이고 뭐고 달렸더니 숨이 찼다.

‘이렇게 닮을 수가 있을까.’

빼닮았다는 제롬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뿐만이 아니라 이목구비가 마치 공작을 작게 축소해 놓은 것 같았다. 이 아이가 그의 아들이 아니라고 누가 의심할 수 있을까.

‘기가 막히겠지.’

데미안은 크게 뜬 눈으로 자신을 보는 공작부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 결혼했는데 남편에게 사생아가 있다니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설마 후계로 공표된 사실조차 모를까 봐 걱정이었다. 이후 공작부인이 취할 예상 행동을 나열해 보았다.

충격으로 굳어서 그냥 노려본다, 화가 나서 나가버린다, 혐오를 담아 벌레처럼 바라본다, 다짜고짜 일단 뺨을 한 대 친다. 이것들은 하책이었다. 이런 반응을 보일 공작부인은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학술원에서도 대놓고 악의를 보이며 괴롭히려는 녀석들은 수가 빤히 보였다.

그러나 침착하게 감정을 내보이지 않거나 웃으며 아들로 대접해 준다면 이건 상책이었다. 공작부인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건 아주 좋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데미안입니다.”

데미안은 공작부인에게 다가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 반가워요.”

순한 대답이 들려오자 데미안은 흘끗 시선을 들었다.

‘너무 충격을 받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걸까?’

공작부인의 노란빛이 도는 눈동자 속에 그다지 적대감이나 혐오감은 없었다. 감정을 완전히 갈무리할 수 있을 정도의 고단수일지 모른다. 아직은 판단할 수 없었다.

겉모습만으로는 소년의 예측과 달랐다. 공주라기에 오만하고 기품 있는 귀부인을 상상했다. 그런데 오만과 기품보다는 순수와 온화 쪽이었다. 예쁘냐는 질문에 얼버무리던 아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예쁜데.’

“마님. 도련님은 오랜 마차 여정 때문에 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아, 쉬어야지요. 마차 여행이 얼마나 고단한지 알아요. 시간이 점심때인데 식사는 어떻게 했어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 저녁까지 계속 빈속인데 그러면 안 돼요. 한창 성장기인데. 집사. 속에 부담 없는 간단한 요깃거리를 준비해서 들여요. 저녁 식사도 소화가 잘되는 요리로 준비하고.”

“예, 마님.”

잠시 말없이 루시아를 바라보던 소년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하인을 따라 나갔다. 소년이 간 방향에서 눈을 못 떼며 루시아는 두 손으로 발그레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쌌다.

‘아, 세상에. 귀여워.’

그 남자의 축소형이었다. 루시아가 보지 못했던 그의 어린 시절이 저기 있었다. 이목구비며 무뚝뚝한 말투며 차가운 표정도 판박이였다.

“마님?”

제롬은 마님이 충격을 받으셨을까 봐 염려해서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런데 휙 돌아보는 마님의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제롬, 여덟 살이라면서요.”

“맞습니다. 타고난 기골이 남다르십니다.”

“그렇군요. 하긴 그분 아들이 작다면 말이 안 될 것 같아요.”

“괜찮…으십니까?”

“뭐가요?”

“…아닙니다.”

“예상보다 훨씬 귀여운 아이 같아요. 착해 보이고.”

“예?”

마님의 단어 선택은 제롬을 혼란에 빠뜨렸다. 데미안 도련님에게는 절대 귀엽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았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잠깐 그럴 때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절대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고 착하다니. 어딜 봐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공작을 그대로 닮지 않았나. 마님의 눈이 의심스러웠다.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면 불편해할까요?”

“마님께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불편하긴요. 저녁 식사 시간이 기대되네요.”

발랄하게 응접실을 나가는 마님은 흔히 기대하는 보통의 반응과 완전히 동떨어졌다. 결혼한 지 몇 개월 안 된 신혼인데 다 큰 아들이 나타난 비극적인 상황이었다. 마님의 태도는 절대 정상이 아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충격을 받으셔서 제대로 판단을 하지 못하시는 것일지도. 제롬은 마님이 걱정스러웠다.

제롬은 집사 업무실로 아신을 끌고 들어갔다. 시선을 피해서 눈동자가 이리저리 허공을 배회하는 아신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아신 경.”

“뭐 말이오?”

“도련님을 모시러 간다고 왜 제게 일러주지 않았습니까?”

“그야 뭐. 이미 아는 줄 알았지.”

“그런 생각이 들어도 저, 혹은 마님께 말씀드려야 하는 겁니다.”

“…전하께서 그러라는 지시가 없으시기에…….”

제롬은 뒷목을 잡았다. 이제 막 행정관이 된 초짜도 아니고 서기관씩이나 되는 자가 할 말인가. 아신 정도의 경력이면 공작의 성정이 어떤지 파악하고도 남았다. 공작은 과정 없이 결정만 내리고 명령하는 경우가 많고,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말을 꺼냈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수하들끼리 의사소통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관심 없었다.

소통이 안 되어 문제가 발생하면 전부 그들 잘못이었다. 그래서 공작가의 관리들은 자기들끼리 종종 짧은 모임을 마련해서 서로 알고 있는 사실에 구멍은 없는지 점검하곤 했다.

“아신 경에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짚어줘야 합니까?”

다른 데에선 빠릿빠릿한 아신은 이상하게 가끔가다 공작과 관련된 일에서 융통성이 바닥을 쳤다. 제롬이 더 왈왈거리기 직전에 누군가 업무실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빠끔히 문이 열리더니 파비안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뭔 일이야? 오, 아신 경. 오랜만입니다.”

“파비안. 오랜만일세. 그럼 형제간 우애를 나누시게나. 난 이만.”

파비안과 아신은 악수를 하고 가볍게 서로 어깨를 두드렸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살아날 길을 찾은 아신은 쏜살같이 몸을 내뺐다.

“왜 그래?”

제롬이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별일 아니야. 지금 주인님께서 안 계시는데 어쩐 일이야? 야만족 치러 가셨다는 소식을 전달받지 못했어?”

“알아. 다른 거 명받아서 왔어. 도련님이 오신 것 같던데.”

“조금 전에.”

“표정이 어째 안 좋네. 마님께서 많이 언짢아하셔?”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언짢아 하시기는. 얼마나 좋아하는지 발걸음마저 가벼워 보였다. 말해 봤자 파비안이 뭔 헛소리냐는 눈으로 볼 것이라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갑자기 입적 서류를 가지고 오라고 하시기에 뭔 일인가 했더니 도련님이 오셨군.”

“입적 서류?”

“마님께서 동의는 하신 건지 모르겠네. 두 분은 요즘 어때? 전하께서는 아직도 신혼 놀이 중이신가?”

“말조심해.”

제롬이 매우 불쾌한 듯 인상을 팍 찡그리자 파비안은 머쓱해서 어깨를 으쓱했다.

“수도는 별일 없지?”

“그 동네는 늘 별일이 있지.”

파비안은 얼마 전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을 떠올렸다. 태자를 호위 중인 로이 크로틴이 백작 가문의 기사 하나를 반죽음 만들었다. 정당한 결투면 뭐가 문제냐 싶겠지만 이게 참 애매했다. 실력으로 누른 것은 맞은데 방법이 논란이었다.

로이는 검을 뽑지도 않고 기사를 도발했다. 내가 검만 뽑게 만들어도 패배를 인정한다며 상대 기사의 속을 뒤집었다. 그리고 덤비는 기사를 검집채 아주 녹신하게 두들겼다.

그 소식을 듣고 파비안은 처음에 어이가 없었다가 나중에는 배를 잡고 웃었다. 저가 주군께 당한 걸 고대로 남에게 분풀이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과연 정당한 결투인지 문제를 놓고 논쟁이 발생했다. 백작 쪽은 그게 무슨 결투냐고 방방 뛰고, 로이의 배후에 있는 태자 쪽은 실력으로 졌으면 찌그러지라고 비웃었다. 로이는 단번에 사교계 관심의 핵으로 급부상했다.

파비안은 그런 상황이 몹시 재미있었지만, 제롬에게 말해봤자 별로 즐거워할 것 같지 않아서 그냥 혼자만 알기로 했다.

“아. 요즘 소문 하나가 돌더라. 전하께서 지참금으로 내어준 광산 얘기.”

“그게 왜 소문으로 돌아?”

지참금은 마땅히 주고받은 양쪽만 알아야 하는 사적 비밀이었다. 받은 입장은 얼마 받고 딸을 판 격이고, 준 입장은 돈 내고 아내를 사온 격이라 체면을 위해 거론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 예의였다.

“왜 돌겠냐. 말할 사람이야 뻔하지. 왕이 어디서 자랑삼아 말했다가 퍼졌겠지.”

“나 참.”

주책없는 왕을 향해 형제는 혀를 찼다.

“아무튼, 그래서 별별 소문이 다 돌고 있어. 마님이 쳐다만 봐도 남자가 정신을 못 차리는 미녀라서 공작께서 한눈에 반해 광산을 통째로 내주고 누구도 못 보게 영지로 끌고 갔다고들 하지.”

솔직히 마님이 그 정도는 아니잖아? 하며 파비안은 킬킬거렸다. 제롬은 파비안을 노려보며 혀를 찼다. 마님이 어디가 어때서. 괜히 기분이 나빴다.

“마님 정도면 미인이시지.”

“…뭐 잘못 먹었냐?”

파비안이 정색하자 제롬은 겸연쩍어서 헛기침했다.

“사람들이 근거 없이 입을 놀리는 건 곤란해. 전하께서도 언짢아하실 텐데.”

“전하께서는 소문 같은 거 신경 안 쓰셔.”

과연 그럴까. 제롬은 주인께서 마님과 관련한 소문에 무관심하지 않을 거라고 예감했다.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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