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20화 (21/77)

20장 공작 부부 (8)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이곳저곳에 부드럽게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그녀의 허리부터 등까지 그의 손바닥이 붙어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가 주는 후희의 나른함에 젖어있다가 루시아는 느닷없이 떠오른 생각에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휴. 오후에 다녀간 레이디 밀튼이 재미있는 말을 했어요.”

“레이디 밀튼……. 요즘 드나드는 밀튼 백작의 여식 말이로군.”

밀튼 백작은 공작가의 봉신으로, 올곧으며 고지식한 성품을 지닌 자였다. 자식 교육 역시 성품만큼 바르다는 정평이라 여식인 밀튼 영애가 아내와 교류가 잦아지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그녀의 북부 생활이 즐거워진다면 바람직하지 싶었다.

“네. 저에게, 혹시 당신이 외출하지 못하게 하느냐 묻더라고요.”

등에서 움직이던 그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눈치채지 못하고 루시아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제가 그럴 리 없다 했지요. 그러니까 저보고 승마를 함께하자고 했어요.”

“…승마?”

“레이디 밀튼이 그러는데 재미있고, 운동도 된대요. 배워도 돼요?”

“…위험할 텐데.”

“그렇게 위험하지 않대요. 여자들이 많이 탄다고 했어요.”

“그렇게 배우고 싶어?”

그는 싫었다. 말 위에 올라 상기된 표정으로 숨을 몰아쉬며 말을 달리는 여자들 모습이 얼마나 사내들 눈을 사로잡는지 그는 경험으로 안다. 요즘 여자들을 위한 승마복을 보면 아주 가관이었다. 몸매 다 드러나게 달라붙는 꼴이 천박하기 짝이 없었다.

과거에 그 역시 딴 남자와 다를 바 없이 보기 좋다고 구경했고, 그는 결코 여자를 조신하거나 헤픈 정도로 구별하는 남자가 아니었지만 그건 이미 과거의 일이었다. 그는 지나간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았다.

“안 돼요?”

루시아가 그의 가슴에 뺨을 부비며 가련하게 눈을 깜빡거리자 그는 ‘뭐든 당신 하고 싶은 대로.’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승마는 안 돼. 애먼 놈들이 곁눈질하는 꼴은 못 본다. 하지만 그녀가 결혼하고 처음으로 하는 부탁이었다. 안 된다고 하면 실망할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았다.

‘여자만 출입할 수 있는 승마 연습장이……. 아마 로암에는 그런 것이 없는 것 같으니까 이참에 하나 만들어야겠군.’

로암뿐만이 아니라 제논을 다 뒤져도 그런 곳은 없었다. 유일한 여성 전용 승마 연습장이 만들어지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먼 훗날 북부 사교계 여성들의 중요한 사교 활동의 장소로 활약할 이곳이 단지 아내를 딴 남자 눈에 보이지 않기 위한 의지에서 출발했다.

“좋아. 대신 어느 정도 말을 몰 수 있을 때까지는 성 안에서 안전하게 익힌다고 약속하면.”

그녀가 승마를 배우는 동안 연습장을 만들어야겠다. 일주일 정도면 될 것이다. 그 안에 못 만들면 승마 선생에게 며칠 더 붙잡아 두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승마 선생도 구해야겠다. 여자로.

“네. 그럼 허락하시는 거죠?”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조심할게요. 감사해요!”

그녀가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와락 안겨 들었다. 혹시 그가 허락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그는 너그럽고 합리적인 사람이니까. 외출 금지라니. 대체 레이디 밀튼은 왜 그런 터무니없는 질문을 한 건지 모르겠다.

얼결에 그녀를 품으로 안으면서 휴고는 얼마 전, 그녀에게 고가의 목걸이 선물을 안겨주었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는 처음으로 여자에게 줄 선물을 고르려고 고심했다. 그녀가 뭘 좋아할지는 모르겠고, 그나마 여자가 보석을 좋아한다는 건 경험으로 배운 일이라 결국 그의 선택은 보석이었다.

그런데 아무거나 주기는 싫었다. 타란의 안주인은 마땅히 특별한 것을 가져야 했다. 보석상들끼리 공유하는 정보지를 있는 대로 취합해서 고르고 골랐다.

그나마 쓸모 있는 것을 찾았다 했더니 이미 주인이 있었다. 눈에 든 물건이 생기자 더 이상 다른 건 안중에 없었다. 돈은 상관없으니 무조건 거래를 성사시키라고 교섭인을 보냈다.

생각보다 물건을 손에 넣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원래 그는 선물을 주고 시찰을 떠나려 했는데 결국 그녀가 받아드는 모습은 직접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귀환하는 길에는 꽤 기대했다. 그녀가 선물을 받고 감격해서 성대한 환영으로 맞아줄 줄 알았다.

그녀는 고맙다고는 했다. 그러나 뭔가 형식적인 감사 인사는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고맙다고 살포시 미소 지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그녀 면전에 대고 진심이 없잖아, 따질 수는 없었다. 그는 조금 기분 상하면서 동시에 머쓱했다.

도대체 왜? 여자는 보석을 안겨주면 보석처럼 눈을 반짝거리는 것이 당연한 반응 아닌가? 그 선물을 고르느라 얼마나 신경을 썼는데 그게 마음에 안 차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줘야 만족할 건가. 그러다 슬쩍 제롬이 전한 말이 가관이었다. 부담스럽단다. 선물 주고 그런 말 들은 건 처음이었다. 어느 수준에 맞춰야 부담이 없는 건가. 그를 새로운 고민에 빠뜨렸다.

그런데 고작 승마를 허락했을 때의 반응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줬을 때보다 더 열렬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기대했던 진심이 담긴 감격의 감사 인사였다. 거금을 쏟아 부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승마 허락만도 못했다.

‘돈은 안 들겠군.’

조금 허탈했다. 전에도 이 비슷한 생각을 한 적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목걸이 구매비용보다 승마연습장을 만들기 위한 제반 비용이 더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회계 속에는 그 비용은 그 비용이 아니었다.

승마 문제를 해결하긴 했지만 그의 솔직한 마음은 언제나 시야에 들어오는 곳에 그녀가 있었으면 했다. 괜한 바람을 넣은 밀튼 백작의 여식이 살짝 괘씸했다. 하지만 덕분에 뭘 해주면 그녀가 좋아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으니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승마 연습장이 완성될 무렵 그녀는 베갯머리에서 종알거렸다.

“휴. 로암 동쪽으로 조금 가면 굉장히 커다란 호수가 있다고 하던데요.”

“음, 크지. 구경하고 싶어?”

그는 언제 시간을 내어 그녀를 데리고 한 번 다녀올까 생각했다.

“이맘때 뱃놀이가 있다고 들었어요. 작은 배 한 척 보유하고 있는 귀족들이 많다던데 당신은 없어요?”

“…없어.”

생전 뱃놀이 따위는 가본 적 없다. 그런 유흥이 있다더라고 들은 기억도 없었다. 아마 들었겠지만 관심 없으니 잊었을 것이다. 물에 배 띄워 그 위에 앉아있는 것이 어떻게 놀이가 될 수 있단 말인지 그건 할 일 없는 놈들 혹은 여자나 하는 짓이었다.

‘배를 사야겠군.’

그는 이미 과거의 자신을 잊었다. 그는 지나간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럼……. 레이디 밀튼이 초대했는데 다녀와도 될까요?”

또 밀튼 백작의 여식이었다. 그는 앞으로 모든 사단의 중심에 밀튼 영애가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위험하잖아.”

“뱃놀이로 사고가 난 적은 없대요. 밀튼 가문이 소유한 배는 매우 튼튼해서 걱정 없다고 레이디 밀튼이 자신했어요.”

“뱃놀이 날짜는?”

“나흘 뒤에요.”

밀튼 백작은 공작가에서 날아온 공지사항을 받아 읽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껏 없던 일이라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막내딸이 며칠 후 뱃놀이 가겠다며 창고에 있던 배를 꺼낸다고 수선스럽게 다니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부르셨어요, 아버지.”

“그래. 성에서 공지가 내려왔는데 네가 봐야겠구나.”

케이트는 부친이 주는 문서를 받아 읽었다.

“…풍속 단속이요? 이게 대체 무슨 뜻인가요?”

“글쎄다. 나도 전하 의중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결론은 호수에서의 뱃놀이를 통제하시겠다는 것 같구나. 지금까지와 크게 다를 건 없을 거다. 다만, 날을 지정해서 오직 여성들만 호수로 갈 수 있게 근방 출입을 통제하는 것인데 난 개인적으로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딸 가진 부모라면 괜찮다고 할 것 같구나. 네가 뱃놀이를 언제 간다고 했지?”

“사흘 뒤에요.”

밀튼 백작은 요즘 딸아이가 공작부인 말벗 노릇을 한다는 건 알지만 자세히는 몰랐다. 둘이 서로 이름을 부를 정도로 가깝다는 것도, 케이트가 열심히 루시아를 불러내 놀려고 하는 것도, 뱃놀이를 같이 간다는 것도 몰랐다. 케이트 역시 굳이 그걸 가족에게 말하지 않았다. 온갖 걱정을 들을 것이 뻔했으니까.

케이트는 단지 루시아와 친구로 사귀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순수하게 봐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케이트는 가능하면 루시아와의 관계를 주변에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두 사람 관계를 친구가 아닌 공작부인이 총애하는 봉신의 딸 정도로 보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마침 통제일이 사흘 뒤구나. 어차피 네가 가서 노는 데는 영향이 없겠지만 알고 있으라고 말해두는 거다. 혹시 그날 사내 녀석들과 어울릴 생각은 아니었겠지?”

“그런 건 아니에요.”

부친의 집무실에서 나오며 케이트는 중얼거렸다.

“…뭐지. 이건.”

사흘 뒤면 공작부인과 함께 뱃놀이하기로 한 날이었다.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절대 아닐 것이다. 여성만 출입 가능한 승마 연습장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긴 했다.

‘설마… 루시아가 감금되어 사는 건가?’

그런 것치고는 공작부인의 얼굴에 그늘은 없었다. 억압받으며 사는 것 같지 않았다. 승마를 전하께서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고 생글생글 웃던 공작부인의 표정은 결코 작위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케이트의 얼굴에 점점 웃음이 떠올랐다.

‘어쩐지 좀… 흥미로운데?’

나중에 공작부부 금실에 관해 소문이 돌아 사람들이 놀라워할 때 케이트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먼저 알고 있었다.

뱃놀이는 즐겁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루시아는 뱃놀이를 다녀와 잔뜩 흥분해서 휴고에게 떠들었다. 휴고는 배를 마련하기로 확고하게 결심했다. 얼마 후 안전을 최고로 보장하기 위해서 값비싼 재료와 기술을 동원한, 고작 뱃놀이에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배 제작에 들어갔다.

“휴. 레이디 밀튼이 오늘 다녀갔는데요.”

또 그 여자. 휴고는 그녀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가 폈다.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은 꼭 들어맞았다. 밀튼 백작의 여식은 그의 중대한 골칫거리로 부상할 것이다. 이젠 예감이 아닌 확신이었다.

“여우 사냥이라는 놀이가 있대요.”

여우 사냥. 그딴 여자들 놀이에 사냥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 자체가 사냥에 대한 모독이었다. 새끼 여우를 잡아 길들여서 숲에 풀어 토끼를 사냥한다는데 과연 여자들이 죽은 토끼를 직접 만지기나 할 수 있을지 의심이었다.

“정기적으로 모여서 여우 사냥을 한다는데 여우는 없지만 구경하러 가보고 싶어요. 레이디 밀튼은 기르던 여우가 있어서 어떻게 하는지 보여준다고 했어요.”

“…숲에서 위험한 야생동물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호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군락을 이룬 숲이 있다는데 거기는 전혀 위험한 동물이 없대요. 가장 큰 육식동물이 여우 정도래요.”

그녀가 말하는 곳이 어디쯤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한 줌 모종을 떼어 심어놓은 것처럼 다른 곳과 뚝 떨어져 군락을 이루는 작은 숲이었다. 그 정도 넓이라면 빙 둘러서 주변을 통제할 수 있었다. 여우 사냥이 정확히 어떻게 하는 것인지 확인해 봐야겠다. 여자들끼리만 가도 과연 안전한 것인지 또한.

“안 돼요?”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 공격이 날이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었다.

“…다녀와.”

“휴. 레이디 밀튼이요.”

그녀의 보드라운 피부를 어루만지며 후희를 즐기던 그의 미간이 꿈틀했다. 이번엔 또 뭔가. 그녀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때마다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뭐지?”

“사흘 뒤가 생일이래요. 자택에서 파티를 연다는데 다녀와도 돼요? 동기 친구들만 초대하는 작은 모임이래요.”

요즘 그녀의 외출이 너무 잦다. 전부 밀튼 백작의 말괄량이 여식 때문이었다.

케이트 밀튼은 밀튼 백작의 고명딸이었다. 아들 넷 이후 태어난 늦둥이 딸이라 밀튼 백작의 딸 사랑은 지극했다. 부친의 관대함 속에서 네 명 오빠들과 뒤섞여 자란 케이트는 말괄량이로 유명했다. 오냐오냐했던 밀튼 백작도 인제 와서는 골치 아파한다는 풍문이었다.

휴고가 봉신의 딸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알 정도로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그 아가씨가 아내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얌전한 아내와 달리 밀튼 백작의 여식은 대단히 활동적이었다. 자신의 활동에 그녀를 끼워 넣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생일을 축하하러 왜 당신이 굳이 가야 하지?”

“생일 축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친구 집에 방문하고 싶은 거예요.”

그녀의 가고 싶어요, 공격이 시작되었다. 휴고는 그녀가 레이디 밀튼 운만 떼어도 뒷골이 지근거렸다. 그래도 지난 전적에 비하면 생일 파티 정도는 아주 양호했다. 여자들만 모이는 자리라고 하니까 그는 선선히 허락했다.

“다녀와.”

“…근데요. 파티 끝나고 밤에 잠옷파티를 한다는데…….”

빌어먹을 레이디 밀튼. 그럼 그렇지. 휴고는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밀튼 백작을 볼 때마다 그대 딸하고 내 아내하고 같이 놀지 못하게 해, 라는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아무리 못마땅해도 어떤 해를 끼친 건 아닌데 이유 없는 트집을 잡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밀튼 백작은 아주 충성스런 봉신이었다. 친구를 사귀는 아내의 즐거움을 빼앗고 싶지도 않았다.

“하루 자고 와도 될까요?”

“당신은 유부녀야. 외박하겠다는 건가?”

“…역시 안 되는 거죠? 파티만 참석하고 돌아올게요.”

그녀는 시무룩한 음성으로 선선히 포기했다. 한 번 더 조르지도 않았다. 그녀의 베갯머리송사는 그의 예측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그를 좌우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선물을 졸라대거나 누군가를 옹호, 혹은 험담하지 않았으나 그보다 훨씬 더 그를 골치 아프게 했다. 차라리 보석을 달라고 해. 쇼핑을 하라고. 그는 몇 번이고 그 말을 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마차를 보낼 테니까 오전 중으로 돌아와.”

그는 낮은 한숨을 쉬며 허락했다.

“그럴게요! 정말 허락하시는 거죠?”

“남편을 독수공방하게 하고 그렇게 신이 나나?”

허리에 두른 그의 팔에 힘이 꽉 들어가자 루시아는 흘끔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루뿐이잖아요……. 영지 시찰로 사나흘씩 자리를 비우기도 하시면서…….”

“그거와 달라.”

“…순 억지.”

휴고는 삐죽이는 그녀의 입술을 덥석 물었다. 놀라 앙탈하는 그녀의 턱을 단단히 잡고 작은 입안 깊숙이 혀를 넣었다. 구석구석 한 번 훑고 입술을 떼자 상기된 표정의 호박색 눈동자가 흐려져 있었다. 그가 그녀의 몸을 돌려 모로 껴안으며 목덜미에 입술을 붙이더니 길게 핥으면서 가슴을 움켜잡았다.

“아!”

“갈수록 말대답이 늘어. 남편 말은 하늘처럼 믿어야 착한 아내지.”

“응……. 하지만…….”

“하지만 또 뭐.”

“너무 착하게 굴면… 매력 없다고…….”

그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안 그래도 근래 톡톡 말대답하는 빈도가 늘었다 했더니 어디서 되지도 않는 조언이랍시고 얻어들은 모양이었다.

“사내를 유혹하는 기술이라도 배워왔나?”

“기…술까지는 아니고…….”

“스승이 누군데?”

“…레이디 밀튼이…….”

아아. 정말 망할 레이디 밀튼.

“스승과 제자가 뒤바뀌었군. 밀튼 백작의 여식은 아직 미혼일 텐데.”

“레이디 밀튼은 매력적인 여성이에요. 배우고 싶어서…….”

붉은 머리의 케이트는 루시아와 정반대의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당당한 말투, 좌중을 휘어잡는 화술을 지녔고 남자들의 구애에 결코 끌려 다니지 않았다.

루시아는 그녀의 모든 것이 부러웠다. 사랑을 아낌없이 주는 부모님, 든든한 오라버니들. 그녀가 갖지 못한 모든 것을 케이트는 갖고 있었다.

“누가 누굴 배워? 당신은 공작부인이야. 북부 사교계 정점이지.”

그는 루시아를 옆으로 눕게 하여 뒤에서 끌어안았다. 가슴을 주무르면서 성난 그의 중심을 그녀의 엉덩이골 사이에 넣고 문질렀다.

“어울려 노는 건 좋지만 밀튼 백작 여식의 말괄량이 짓을 배워오는 건 절대 사양하지. 그랬다가는 외출금지령을 내릴 테니까 정숙함을 잃지 말라고, 부인.”

뒤에서부터 서서히 그녀의 비부를 열며 단단한 그의 성기가 밀고 끝까지 들어왔다. 루시아의 엉덩이와 그의 허벅지가 바싹 맞닿았다. 두 몸이 하나가 되었다. 그가 시작하려고 가득 들어오는 순간이 루시아는 가장 황홀했다. 이 남자를 내 안에 품고 있구나, 만족감이 들었다.

“으응…….”

“당신은 잘하고 있어. 지금까지 하던 대로만 해.”

“네…….”

휴고는 아내의 아주 작은 일탈도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눈이 닿는 곳에 아주 얌전히 있어주어야 한다. 늘 시선을 돌리면 언제나 있던 그 자리에 있는 편안함이 점점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 짧게 쳐올리기를 반복했다. 그리 깊은 삽입은 안 되는 자세지만 그녀가 은근히 이 자세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힘이 덜 들고 자극이 적당하기 때문이었다. 짧게 끊어지는 신음을 흘리며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 불규칙하게 호흡하는 모습이 그를 자극했다.

오늘 밤은 더위가 덜했다. 문득 그는 어느새 여름이 끝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늘 시간이 지독하게 느리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특히 그녀와 보내는 밤은 너무 짧았다.

* * *

제롬은 매일 하는 것처럼 오후의 차 한 잔을 준비해서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일에 몰두한 주인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차만 곁에 두고 나오는데 책상에는 펼쳐진 서류만 가득하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요즘 자주 있는 일이라 제롬은 주인이 있으리라 예상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발코니 창이 살짝 열려있다.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자 난간에 기댄 장신의 사내 뒷모습이 보였다.

요즘 공작은 오후에 일을 하다가 전에는 없었던 게으름을 부렸다. 발코니 아래를 내려다보며 한참을 서있곤 했다. 아래에는 근래 마님께서 부지런히 가꾸는 정원이 색색의 꽃으로 보기 좋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마님은 빈번히 직접 나와 정원을 걸어 다니며 꽃을 살핀다. 그 모습을 주인은 보고 있었다.

주인의 신혼이 초반 반짝 흥미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으나 이제는 아니라는 걸 안다. 방탕하게 놀던 사내가 결혼하고 다른 사람처럼 건실하게 바뀌는 경우가 있다더니 그 사례에 주인이 해당될 줄이야. 그래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주인은 과연 알고 있을까. 마님과 함께 있을 때의 주인의 시선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곧바로 마님께 향하고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기에 간질간질한 똑바른 시선을 놀랍게도 마님은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의외로 마님은 꽤 많이 둔감했다.

두 분 사이는 참 뭔가 미묘했다. 분명히 두 분 사이는 좋았다. 마님은 주인을 향해 깨끗한 미소를 짓고, 그토록 냉랭하던 주인님은 마님을 향해서는 온기가 돌았다. 그럼에도 두 분 사이에는 뭔가 보이지 않는 얇은 막 같은 것이 있었다. 꼬집어 말하기에는 애매하고 막연해서 섣부르게 말로 꺼낼 수는 없었다.

마님이 어디서 뭘 하고, 누구를 만났는지 간략한 보고서를 매일 저녁 주인의 책상에 올리는 건 어느새 일상이 되었다. 그래서 제롬은 더 이상 보고를 미룰 수 없었다. 마님의 건강과 관련된 일이니까 더더욱.

제롬은 조금 망설이다가 발코니로 다가갔다.

“전하.”

“음.”

“마님 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에 휴고는 고개를 돌렸다. 제롬을 응시하다가 그는 제롬을 지나쳐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잠시 기다려도 제롬에게서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주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뭐가 그리 어렵지? 말해.”

“…마님께서 줄곧 달손님이 없으십니다.”

루시아는 제롬과 약속했다. 제롬이 함께하는 자리에서 그녀의 몸 상태에 대해 공작에게 말하기로.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루시아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혹시 마님께서 잊으셨는가 싶어서 제롬이 거론했으나 마님은 당시에 알았다고만 답하고 그 뒤로 다시 침묵이었다.

제롬은 자신이 나서는 일이 어쩌면 월권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인의 건강을 챙기는 일까지 집사의 일이었다. 제롬은 마님을 재촉해 억지로라도 모시고 와서 직접 말씀하도록 하는 것이 더 옳은가 여러 번 고민하다가 결국 그가 주인께 직접 고하는 쪽을 선택했다.

“달손님?”

“여인이 매달 겪는 신체적인…….”

“아, 계속해.”

휴고는 여성의 생리적 구조에 대해 상식적인 수준의 지식으로 숙지는 하고 있었으나 가장 밑바닥에 깊이 잠든 지식이었다. 그는 여자의 월경 주기를 느낄 정도로 한 여자를 줄기차게 만난 적이 없었다. 더구나 그는 여자의 임신 걱정을 해본 적 자체가 없다. 그야말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처음에는 태기가 있으신가 하녀가 의문을 가졌습니다. 주치의 진료를 받으셨으나 태기는 아니었습니다. 마님 말씀에 의하면 달손님이 원래 없으셨고 그런 증상에 관해 주치의 진료를 받으시는 것은 거부하셨습니다. 이미 전하께서 알고 계시는 일이라 그럴 필요 없다고만 하셨습니다.”

“달손님……. 임신이 아닌데 그게 없다는 건 심각한 건가?”

“결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아예 회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니까요. 그걸 확실히 알기 위해 마님이 진료를 받아 보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다니 뭘…….”

“저는 아이를 낳을 수 없어요.”

휴고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

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분명히 그녀는 그런 말을 했었다. 원래 저렇게 간단히 말할 일인가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의 대수롭지 않음에 그 역시 웃어 넘겼다.

그에게 그녀의 임신 여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치 대단한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는 그저 재미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래. 알고 있었다.”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했다. 배 속에서부터 뒤틀린 불쾌함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을 향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분노였다.

“주치의는 뭘 하는 거지?”

“겉으로 드러나는 병증이 아니니 마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시면 의사는 진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지금 불러.”

“…예, 전하.”

주인의 기분이 저조해졌음을 알아차린 제롬은 가타부타 덧붙이는 말없이 바로 물러갔다.

가만히 서서 그는 노기를 참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자신의 불쾌함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차분하게 생각을 짚어갔다.

그녀는 그가 바라는 아주 이상적인 아내였다. 아랫사람들을 적당히 잘 조율하고 정말로 그를 전혀 성가시게 하지 않았다. 뭔가를 그에게 바라지도, 불평도 없었다. 근래 이것저것 요청하긴 했으나 그건 그가 여자들이 뻔히 할 것으로 짐작하는 그런 성가심과 달랐다.

“하아……. 제길.”

그는 무거운 한숨을 뱉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이런 건 정상이 아니다.

그녀가 평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그가 아내에 대해 아는 전부는 파비안에게 받은 몇 장 보고서에 적힌 내용뿐이었다.

그들의 사이는 좋았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화는 즐거웠고 잠자리는 늘 뜨거웠다. 하지만 정말 대화를 나눈 적이 있기는 한가. 그녀가 속마음 한 톨 그에게 드러낸 적 있었나. 그를 향해 그렇게 맑게 웃는 것으로 그녀가 모든 마음을 드러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갑자기 뭔가 떠오른 그는 제롬을 불러 그간 그녀가 지출한 내역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곧 제롬이 서류를 가지고 들어왔다.

“의사는?”

“사람을 보냈습니다.”

“나도 진찰할 때 가보겠다.”

“예, 전하.”

서류를 넘기며 내역을 훑는 그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정원을 가꾸는 데 들어간 비용, 그동안 몇 번 티파티를 열며 들어간 비용을 제외하면 개인적인 용도 사용 내역이 전혀 없었다.

“재단사나 보석상을 부른 적이 한 번도 없나?”

“없습니다.”

“그동안 외출도 여러 번 하고 몇 번 티파티를 열었을 텐데?”

“선대 공작부인들께서 사용하시던 드레스나 타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장신구가 있습니다. 드레스는 그중 골라 고쳐 입으시고, 장신구는 사용 후 보관실에 반납하셨습니다.”

그가 미간을 꾹꾹 눌렀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화가 나는데 왜 화가 나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왜 진즉 보고하지 않았느냐 목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그 말을 해 봤자 집사보고 마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는 꼴이었다.

네가 바란 것 아니었나.

마음속에서 다그치는 울림이 들려왔다. 그랬다. 그가 바랐던 결혼을 했다. 인형같이 자리만 지켜줄 아내를 그는 원했다.

그는 혼적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 결혼은 해야 했으나 남편의 의무는 거추장스러웠다. 그래서 거래를 했다. 그건 계약이었다. 서로의 이익이 충족된 계약.

그녀는 처음부터 필요한 건 공작부인이라는 이름이라고 했다. 당연히 공작부인이 되면 뒤따를 재물과 권력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결혼 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처음부터 그런 건 그녀의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대체 무엇이 그를 불쾌하게 하는가. 그녀가 권력도 재물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왜 문제가 되나. 그에게 손해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계약에 축배를 들어야 한다.

그는 계속 고민했다. 이 더러운 기분의 정체를 알아야 했다. 발밑을 받치고 있던 바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절망이고 불안이었다. 왜 절망하고 왜 불안하지?

그것을 또다시 고민할 때 제롬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치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3권에서 계속>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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