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공작 부부 (7)
나신의 여체가 미세한 근육으로 뒤덮인 사내의 몸을 쿠션 삼아 기대 누웠다. 그의 어깨를 베고 윗가슴 부근에 뺨을 붙인 루시아는 그의 손이 부드럽게 등 맨살을 쓸어내리는 것을 기분 좋게 음미했다. 그의 가슴에 얹은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피부의 탄탄함이 신기해서 손바닥에 살짝 힘을 가해 눌렀다가 놓는 손장난을 하는 중이었다.
“내일부터 며칠 로암에 없을 거야.”
“어디 가세요?”
“영지 시찰. 앞으로도 한 달에 한 번에서 두 번 정도 돌아볼 예정이야.”
비록 신혼의 단꿈에 푹 빠져있긴 해도 그는 해야 할 일은 잊지 않았다.
“영주가 그런 일도 하나요?”
“당연하지. 질서가 필요하니까.”
주인이 보이지 않으면 언제든 딴 곳에 눈 돌릴 놈들이라 그러기 전에 목줄을 단단히 죄어야 한다. 딴 데 한눈파는 놈들을 지켜보다가 눈을 파내 경고하는 것도 나름 재미나기는 하지만. 그는 그런 거친 표현을 그녀 앞에서 삼갔다.
‘영지 시찰……. 원래 하는 일이구나…….’
꿈속의 남편이었던 메튼 백작은 단 한 번도 영지를 방문하지 않았다. 루시아 역시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가끔 영지에서 세금을 가지고 올라오는 자들 면상에 보고서를 내던지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모습은 몇 번 봤지만.
“오래 걸리세요?”
“사나흘. 길면 며칠 더 걸릴 수 있고.”
며칠은 그가 없구나. 루시아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결혼하고 바로 로암에 내려와서는 한 달 가까이 혼자 지냈는데, 어느새 그가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해졌다. 빨리 돌아오세요. 말하면 그가 성가셔 할까……?
“이틀 뒤 티파티라지?”
루시아의 두 번째 티파티가 이틀 뒤로 잡혀있었다. 첫 티파티 이후 거의 보름 만이었다. 첫 티파티의 성공에 힘입어 루시아는 두 번째 자리를 꽤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가 없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의욕이 사그라졌다.
“네.”
“당신에게 줄 것이 있어. 내일 아니면 모레 도착하겠군.”
“뭔데요?”
“선물. 지난 티파티 때 선물로는 부족한 것 같아서.”
그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지만 루시아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그의 선물에 마음이 설다.
“뭔지 여쭤봐도 돼요?”
“목걸이.”
워낙 담백한 그의 목소리에 루시아는 콩닥콩닥하던 기대감이 조금 식었다. 형식적인 선물 같은 건데 괜히 혼자 기대를 하고 있는 건가. 선물을 주며 밀당을 해본 적 없는 그의 단순한 성격을 루시아는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석. 혹시 싫어해?”
“…보석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럼 됐고. 나 없는 동안 특별한 계획은 없나?”
“이틀 뒤 티파티. 그 외에는…….”
“별일 없다는 거지? 나 없다고 돌출행동 할 생각 말고 얌전히 있어.”
“무슨 돌출행동이요?”
“평소 지내던 대로만 하라는 소리야. 특히 외출은 안 돼.”
갑자기 그가 외출을 언급하자 루시아는 의아했다. 그녀는 로암에 도착한 이래 계속 성을 벗어나지 않고 지냈다. 처음에는 구경하느라 외벽 부근까지 나갔지만 그가 돌아온 이후에는 내성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내성에서만 지내도 필요한 건 모두 준비된 상태라 굳이 나갈 필요가 없었고, 그녀는 활동적인 것보다는 어쩌면 지루할 수 있는 조용하고 변화 없는 생활을 즐기는 편이었다. 딱히 그동안 그에게 외출하고 싶다고 말한 적 없는데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왜요?”
“나가고 싶어?”
내가 없는 동안 내 영역에서 벗어나지 마. 그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였다.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요. 이유를 확실히 말씀해 주셔야 저도 판단을 할 수 있지요.”
“내가 자리에 없으니 안주인이 지키고 있어야지.”
그는 자신이 내놓은 그럴듯한 답변에 만족했다. 꼭 로암 깊은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자리를 지키는 건 아니지만 루시아는 그의 말 속의 빈틈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저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네.”
잠시 그가 아무 말이 없어서 시선을 흘끔 들자 그가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일러둘 말씀 있으세요?”
그가 웃으면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빨아들였다. 순한 표정과 맑은 눈으로 바라보는 말 잘 듣는 아내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며칠 보지 못할 것이 벌써 걱정이었다.
* * *
타란 공작과 기사들이 아침 일찍 로암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필립은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거처는 로암(성) 외벽 안쪽의 구석진 곳이었다. 타란 공작가의 주치의 거처는 원래 내성에 있었지만 7년 전 주인이 바뀌면서 필립의 거처는 밖으로 밀려났다.
거처가 바뀌긴 했지만 공작은 그 외에는 별다르게 필립을 핍박하지는 않았다. 아무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말이 정확했다. 그러나 필립은 자신의 목숨이 휴고의 가느다란 자비심에 기대고 있음을 잊지 않았다. 정확히 표현하면 자비라기보다는 대가였다. 목숨 빚의 대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공작의 모습을 필립은 찬탄했다. 타란 가문의 비밀을 아는 주변인이 쥐도 새도 없이 사라져 이제는 필립 혼자 남았어도 결코 공작의 잔인함을 비난하지 않았다. 타란 공작은 필립의 가문이 그토록 염원하며 매달린 타란 혈통의 결정체였다.
아득히 먼 옛날. 마법이 세상의 질서이던 때가 있었다. 당시 마도 제국은 전 세계를 지배했다. 마도 제국의 중심지가 위치한 곳이 이 제논이었다.
다수의 보통 인간이 존재했고, 그들을 지배하던 소수 귀족이 있었다. 마도 제국의 귀족은 보통의 인간과 다른 우월한 능력을 지닌 종족을 지칭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그 외에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외모를 지녔으나 그들이 지닌 능력은 보통 인간에게는 절대적이고 압도적이었다.
타란은 마도 제국 귀족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귀족은 자기들끼리의 통혼과 근친으로 혈통을 유지했다. 마도 제국은 마법이 지배하는 나라였고, 마법적 힘은 오직 귀족만 보유할 수 있었다. 귀족만 타고난 혈통으로,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힘을 부여받았다.
소수 귀족은 다수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했다. 귀족은 마치 타고나기를 그런 것처럼 하나같이 잔인하고 자비가 없었다. 수천 인간이 달려들어도 귀족 하나를 당해낼 수 없었다. 지배 계급은 공고해지고 인간들의 절망은 깊어갔다. 영원히 이 질서는 깨지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우주에서 날아온 운석 하나가 지표면과 충돌했다. 제법 큰 지진이 발생했지만 충돌 지점이 사람이 없는 황무지라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학자들 몇이 관심을 뒀으나 그런 흥미도 곧 식었다. 그저 그런 기억할 가치도 없는 사건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날을 기점으로 세상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기에 가득하던 마법의 힘이 흩어졌다. 핏줄 속을 흐르던 힘이 사라지자 귀족들은 범인보다 못했다. 보통 인간과 대적할 근력조차 남지 않았다. 착취에 신음하던 인간들이 다수의 힘으로 뭉쳐 들고 일어났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힘으로도 귀족을 당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처음의 두려움이 무시무시한 광기로 변했다. 사냥이 시작되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의 귀족들은 모조리 잡히고, 추적당하고, 색출되어서 형체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으깨어 살해당했다.
마도 제국의 흔적은 파괴되고 불타올랐다. 수십만 권의 책은 재로 변하고 아무 이능을 보이지 않는 마도구들은 쓰레기로 전락했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멀리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날리는 재를 볼 수 있었다.
타란은 귀족이지만 반쪽이었다. 귀족들에게 따돌림당하는 이단으로 평소에 귀족과 유대 없이 제 땅에서 조용히 살았다. 그건 타란 혈통의 먼 조상이 인간의 피가 섞인 혼혈이기 때문이었다. 타란의 혈족은 대대로 마법 능력이 약했고 귀족들은 그것을 수치로 여겼다.
그러나 이변이 발생한 날. 타란의 혈통 속에 잠들어있던 인간의 피가 혈족의 피와 섞이며 오히려 강력한 신체와 두뇌의 능력으로 뒤바뀌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외모가 검은 머리 붉은 눈으로 변화했다.
세상을 휩쓰는 인간들의 광기에서 타란의 남매가 살아남았다. 그들은 조용히 숨어들었다. 오직 가문의 재건과 혈통의 보존을 위해 그들의 존재가 완전히 잊히기를 기다렸다.
기다림의 시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마도 제국의 멸망으로 비로소 인간들의 세상이 시작되었다. 공통의 적을 물리친 인간들은 이제 자기들끼리 패를 나눠 처절하게 물고 뜯기 시작했다. 패자에 관한 기억은 빠르게 사라졌다. 수십 년 만에 마도 제국은 옛이야기가 되었고, 백여 년이 흐른 뒤에는 전설이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대기의 기운이 또다시 변화했다. 운석이 떨어지기 전의 마법의 기운이 완벽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일부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던 마도구들의 이능이 돌아올 정도는 되었다. 인간들은 보물의 발견을 기뻐하며 마도구 발굴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보물탐색가가 최고의 직업으로 각광받았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 숨어있던 타란의 혈족이 기지개를 켰다. 그들은 숨겨두었던 가문의 보물을 꺼내 가문의 재건에 들어갔다. 뛰어난 능력과 카리스마로 세력을 규합해 가문을 세우는 건 금방이었다. 필립은 가문 재건 때부터 함께한 몇 안 되는 인간의 후손이었다. 필립의 집안은 타란 혈통의 보존을 임무로 받아 오직 그것만을 위해 살아왔다.
마도 제국 시절, 귀족과 인간의 사이에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 귀족들에겐 아무 상관없는 문제였지만 호기심 많은 학자들은 ‘왜?’라는 탐구의식을 버리지 못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방법을 알아냈다. 귀족 입장에서는 참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원래 학자들의 연구는 쓸데없는 것이 더 많다.
그 지식 덕분에 태어난 타란의 먼 조상은 이후에도 그 문제에 꾸준히 관심이 있었다. 비밀리에 연구를 계속해서 지식을 쌓았다. 반쪽 귀족이라 인간과 교합해 자식을 낳기 위해서는 여느 귀족과는 좀 달랐다. 연구와 시행착오를 거듭해서 드디어 타란 혈통만의 방법을 찾아냈다.
마도 제국 시절에는 이 방법을 쓸 일이 없었다. 반쪽이라도 귀족은 귀족이었다. 타란 가문의 조상이 혼혈이긴 하지만 이후에는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귀족과 혼인해서 흐려진 귀족의 피를 짙게 하고 귀족의 주류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애썼다.
세상의 모든 귀족이 멸망하자 타란은 인간과 혼인을 통해서만 혈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가문의 지식이 쓸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통의 인간과 결합하면 반드시 딸이 태어났다. 가문을 이으려면 아들이 필요했다. 찾아낸 방법이 근친이었다.
타란의 가주는 이복누이를 아내로 들였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오직 아들 하나. 아들이 다시 가문을 잇기 위해서는 아내감이 필요했다. 아들의 신부를 만들어주는 것은 아버지의 일이었다.
타란 혈통이 아닌 보통의 여자와 결합해서 아이를 낳으려면 준비가 필요했다. 필요한 것은 아직 초경을 시작하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 초경이 시작되면 삼엽쑥을 반년 이상 복용하게 해서 월경을 멈추게 한다. 그 상태로 1년 이상 몸을 정화한다.
장차 아이의 아비가 될 타란 혈통의 사내는 준비된 여자의 처녀를 취해야 한다. 그리고 여자에게 삼엽쑥의 효능을 약화하는 약을 먹여 몸을 원래로 되돌린다. 다시 월경이 시작될 때까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3년. 월경이 시작되기 전까지가 임신 가능기간이었다. 그사이에 여자와 동침해서 아이를 갖게 했다. 임신 없이 월경이 시작되면 그 여자는 실패였다.
이 모든 일은 필립의 가문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했다. 시간이 흐르며 관련된 지식은 필립 가문의 비전이 되어 전해지고, 타란 가문의 가주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게 분리되었다. 이들은 서로 상부상조하며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다.
필립은 쌍둥이 형제가 태어날 때부터 지켜보았다. 공작이 쌍둥이 중 하나를 죽이려 할 때 혹시 모를 패를 남겨두시라 만류했다. 공작은 잔혹한 호기심을 보였다. 하나는 최상의 배경에서 기르고 하나는 최악의 조건으로 생존하게 하면 과연 각각 어찌 자랄까.
공작이 아이 하나를 용병에게 노예로 파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지만 늘 멀리서 지켜보았다. 히우는 모르는 일이지만 어릴 때 필립이 손을 써서 목숨을 건진 일이 몇 번 있었다.
타란 혈통 특유의 잔인한 기질을 전혀 물려받지 않은 온후한 휴고, 철들기 전에 사람을 죽이는 독살스러움을 여지없이 내보였던 히우. 필립은 그들 형제 모두를 사랑했다. 그중에서도 히우에 대한 애착이 더 강렬했다.
대를 이어 내려오며 인간의 피와 섞이면서 자연스럽게 타란의 피는 흐려졌다. 타란 혈족은 점점 인간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태어난 히우는 완벽한 타란 혈통의 결정체였다. 뛰어난 육체, 영민한 두뇌, 강한 정신력, 냉철함과 잔인함. 바라마지 않던 타란 주인의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
공작 역시도 버린 아들을 더 마음에 들어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시 뒤바꾸려는 것을 묵인했다. 그러나 휴고를 죽이는 것에는 반대했다. 휴고에 대한 정이 있기도 했지만 타란 가문에 전례 없는 쌍둥이라서 였다. 패는 그렇게 쉽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세상일은 참 예측이 불가하다. 설마 히우가 휴고를 만나 사람의 마음을 배울 줄은 몰랐다. 태어나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다가 십수 년 만에 처음 만난 형제가 서로를 적이 아닌 목숨보다 귀한 존재로 여길 줄은 몰랐다.
잔인하지만 냉철했던 선대와 비교해 죽은 타란 공작은 탐욕이 강한 편이었다. 그러한 점은 이전의 타란 가주들과 달랐다. 공작은 훌륭한 자식을 얻어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사명을 잊지 않았으나 살아생전 자신이 누리는 절대 권력을 놓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욕심은 언제나 화를 부른다.
지금은 휴고 타란이 된 히우 홀로 살아남았을 때. 필립은 그의 눈빛에서 이글거리는 증오와 환멸을 보았다. 그가 조만간 가문을 조각조각 분해하고 밟아 부스러기로 만들 것이라 직감했다. 데미안이 없었다면 분명히 그리되었을 것이다.
세상 어느 것에도 마음을 주지 않고 언젠가 다가올 끝을 향해서만 걸어가는 그가 안타까웠다. 그는 절대 인정하지도, 믿지도 않을 테지만 필립은 그를 사랑했다. 가족 없는 필립에게 쌍둥이 형제는 손자나 다름없었다.
“경고하는데 내 아내 곁에 접근하기만 해봐.”
그래서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순간적이지만 그에게서 경계를 읽었다. 괜한 엄포가 아니라 새끼를 감싸고도는 어미 같은 예민함이었다. 죽은 휴고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어떤 분이기에.’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뭘 어쩔 생각은 없고, 할 수도 없었다. 그저 공작부인이 어찌 생겼나, 성품은 어떠한가, 확인하고 싶었다. 혹시 공작이 자리를 비운 틈에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움직였지만 내성으로 들어가는 문 근처에 접근하자 어디 숨어 있었는지 남자 서넛이 자연스럽게 앞을 가로막았다.
“들어가서는 곤란합니다, 필립 경.”
필립이 헛, 낮게 탄식했다. 누가 지켜보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날 감시하는 건가?”
“내성으로만 들어가지 않으면 어떤 행동도 제한하지 않습니다.”
“대체 왜? 이유가 뭔가?”
“이유 같은 건 모릅니다. 지시받은 대로 할 뿐입니다. 항거 시 신체적 강제를 동반해도 좋다는 사전 허락이 있었습니다.”
“…알겠네.”
필립은 순순히 물러났다. 내성 안쪽을 향해 쩝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먼 하늘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또 떠나야 하는 건가…….’
마음 붙일 곳이 없으니 한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살아생전 데미안을 한 번 만나보는 것이 소원이지만 예전에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공작은 필립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공작은 가문의 비밀을 모두 혼자만 끌어안고 데미안에게조차도 알려주지 않을지 모른다.
‘집착인가…….’
타란의 혈통에 매달린 그의 가문의 염원은 집착이라 해도 할 말 없었다. 필립의 아버지가, 조부가, 그 위의 선조들 역시 그러했다. 어려서 세뇌처럼 주입받고 이제 다 늙은 노인이 되도록 갖고 살아온 사상이 그리 쉽게 바뀔 수는 없었다.
그는 아마 마지막으로 눈을 감을 때까지 미련을 놓지 못할 것이다.
* * *
제롬이 고급스러운 벨벳으로 감싼 큼지막한 상자 하나를 테이블에 올렸다. 루시아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상자 덮개를 위로 열었다.
“헉.”
옆에서 기웃대며 곁눈질하던 하녀가 비명처럼 숨을 들이켰다. 하녀만큼은 아니었지만 루시아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상자 안에는 눈부시게 화려하고 셀 수 없이 많은 다이아몬드가 주렁주렁 달린 화이트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루시아는 보석의 시세는 잘 모르지만 이건 보석이 아니라 보물이었다. 다이아몬드가 이렇게 흔한 보석이었던가. 보통의 목걸이라면 마땅히 가느다란 금줄에 꿰어 가슴골에서 존재를 뽐내야 할 다이아몬드들이 고작 목을 두르는 줄을 만드는 부속품으로 전락했다. 주인공 격인 큼지막한 다이아몬드는 이것이 진정 유리 조각이 아닌 다이아몬드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이런 물건은 구경도 못 해봤다. 아마 귀부인들은 이런 걸 가지고 있어도 감히 무서워서 어디 나갈 때 목에 걸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감히 만져봐도 될까 하는 마음에 몇 번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목걸이를 잡아들었다. 묵직한 무게감에 손에서 놓칠 뻔했다.
“한 번 걸어보셔요, 마님.”
하녀는 제가 더 신이 나서 냉큼 전신 거울을 가져왔다. 루시아는 목걸이를 걸고 거울 앞에 섰다. 목에서 느껴지는 무게는 마치 누군가 그녀 목을 두 손으로 감아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목덜미가 전부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로 촘촘히 베일을 썼다.
“잘 어울리십니다, 마님.”
제롬이 흐뭇해하며 찬사를 보냈다.
“대체……. 이건…….”
그녀가 예상한 목걸이는 귀엽거나, 혹은 여성스러운 흔한 장신구였다 왕가의 보물로 대를 이어 물려줄 것 같은 이런 귀물이 아니었다.
“정말 이걸… 그분이 구매하신 거예요? 내 선물로?”
“생각보다 시간이 걸려 애석해하셨습니다. 시찰을 떠나기 전에 드리고 싶어 하셨습니다.”
“이건… 너무 과하군요.”
마님의 떨떠름한 반응에 제롬은 당황했다.
“과하지 않습니다, 마님.”
“받는 사람이 부담을 느끼면 과한 선물이지요, 제롬. 전하께 부담스럽다 말씀드리면… 언짢아 하실까요?”
“예.”
제롬은 단호히 대답했다. 주인이 이 선물을 고르며 꽤 즐거워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다. 주인이 여자를 위해 직접 선물을 고른 건 처음이었다. 과거에는 여자가 원하는 물건에 값을 치르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 점을 설명하다가 혹시 주인의 과거 연인들 이야기라도 꺼내 실수할까 봐 제롬은 말할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마님의 유도신문에 넘어간 전적 때문에 극히 말조심을 하고 있었다.
“부담 느끼실 필요 없습니다, 마님. 주인님 입장에서는 전혀 과한 선물이 아닙니다.”
주인님은 부유하십니다. 제롬은 그걸 말하고 싶었다. 루시아는 좀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에게 이런 선물은 머리빗 하나를 사주는 것만큼 대수롭지 않다는 뜻으로.
루시아는 혼자 응접실에 앉아 목걸이가 담긴 상자를 보며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대체 그가 이 선물을 준 속뜻이 뭔가 따져보고 싶었다.
‘그냥 첫 티파티를 축하하는 선물이겠지. 그는 부자니까 작은 반지 하나 선물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몰라.’
첫 번째 가정이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알지 못했다. 아무리 그가 부자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선물할 물건이 아니었다. 이미 타국의 왕족이 예전에 보석 경매에서 낙찰받은 물건을 그는 수소문해 웃돈까지 얹어 구매했다.
돈도 돈이지만 그의 수고가 들었다. 그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어서였다. 그가 지나치게 담백한 태도로 선물을 주는 바람에 작은 오해가 만들어졌다.
‘아니면… 대가……? 그는 나와 자는 걸 좋아하니까…….’
두 번째 가정이었다. 그런데 이건 어쩐지 몸 주고 화대 받는 기분이라 영 기분이 나빴다.
‘습관 같은 걸까? 그는 연인이 많았으니까 여자들에게 선물을 주는 일이 일상이었겠지.’
세 번째 가정이었다. 이 가정도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첫 번째 가정이 가장 무난했다. 더 머리를 굴렸으나 생각나는 건 없었다. 루시아는 특별한 의미를 담은 선물일 것이라는 가정은 아예 배제했다.
루시아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당하기 벅찬 귀한 선물은 잔잔한 수면 상태를 유지하던 그녀 마음에 마구 돌팔매질을 해서 거친 파문을 일으켰다.
그와의 결혼생활은 완전히 예상과 달랐다. 삭막할 줄 알았는데 소소한 기쁨과 행복이 넘쳐났다. 그의 말투는 불친절했고 달콤한 말 같은 건 해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정했다. 딱딱 끊어지는 말투라도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은 하지 않았고, 소문이 우스울 정도로 무섭거나 사나운 사람이 아니었다.
‘약속했는데……. 그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자꾸 마음이 흔들렸다. 이러면 안 돼,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그가 개구지게 웃을 때마다, 그의 팔이 강하게 허리를 감싸 안을 때마다, 그의 입술이 뜨겁게 입 맞출 때마다 그녀의 마음이 갈대처럼 마구 흔들렸다. 그녀는 목걸이 상자를 바라보며 그를 원망했다.
‘왜 이런 걸 줘서… 괜히 사람 기분 이상하게 만들어.’
가슴이 먹먹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잘 버텼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바지 자락 붙들고 늘어질까 겁이 났다. 그러다 어느 날 노란 장미 다발을 받는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는 예의를 아는 기품 있는 귀족이었다. 그래서 루시아에게 아내로서 예를 다하고 있을 뿐인데 그런 친절을 착각해서는 곤란했다. 그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몸은 확실히 좋아하는 것 같지만 그건 단지 육체적 욕망에 기인한 관심일 뿐이었다.
‘정신 차리자.’
그녀는 크게 심호흡했다.
‘지금까지가 딱 좋아. 흔들리지 마. 네 심장은 돌로 되어있는 거야. 이대로 그와 지금까지처럼 지낼 수 있어.’
아직은 괜찮았다. 아직은. 그리고 루시아는 결국 공식 활동에 목걸이를 차고 나가지 못했다. 묵직한 목걸이의 무게는 그녀의 마음마저 짓눌렀다.
* * *
미혼 아가씨들만 초대한 두 번째 티파티의 즐거운 시간이 끝나고 마무리를 하는 중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아가씨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루시아에게 다가왔다.
“케이트 밀튼입니다. 아까 인사를 드렸었지요. 종조모님께 공작부인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코르잔 백작부인께서 제 종조모님이 되시지요.”
“아. 나도 기억이 나는군요. 당시 마담 미셀이 조카 자랑을 하시며 내게 좋은 말벗이 되어줄 것이라 하셨어요.”
“종조모님이요? 믿기 힘들군요. 그분은 언제나 저만 보면 눈썹부터 사납게 올라가시거든요.”
“레이디 밀튼을 귀애하여 그러실 거예요. 레이디 밀튼을 자랑스러워하시는 것 같았어요.”
“제게는 너 같은 말썽꾼을 거둬 주시려나 모르겠지만 혹시 친구라도 삼자 하시면 황송해하며 엎드리라 하시더군요.”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케이트는 호탕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크게 웃더니 오른손을 내밀었다.
“케이트라 불러주세요.”
귀족 아가씨가 인사로 악수를 권하는 건 처음 봤다. 루시아가 조금 놀란 눈을 하자 케이트가 화들짝 놀라 손을 거뒀다.
“이런, 제가 무례를 끼쳤습니다. 버릇이 돼서 종조모님께 야단을 들어도 고쳐지지가 않네요.”
루시아는 쿡쿡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쾌활하고 솔직한 이 아가씨가 루시아는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케이트가 미소 지으며 그 손을 강하게 마주 잡았다.
“나도 이름으로 불러줘요.”
비비안, 이라는 이름을 말하려다 멈칫했다. 그가 그 이름으로 자주 부르는 동안 자꾸 귀에 익어 그런지 옛날처럼 거부감은 많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편치 않았다. 친구에게 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어쩐지 진짜 그녀의 모습을 처음부터 감추는 것 같았다.
“…루시아. 루시아라고 불러요. 어릴 적 이름이랍니다.”
두 사람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기투합했고, 순식간에 친해졌다. 케이트는 소녀 같은 공작부인이 마음에 들었고, 루시아는 활기 가득하고 쾌활한 케이트가 좋았다. 그들은 서로의 모습을 통해 자신에게 없는 부분을 발견했다.
케이트는 이후 자주 로암을 방문해 루시아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 돌아갔다. 케이트는 루시아보다 두 살이 더 많았다. 루시아는 처음 사귀는 또래 친구에게 푹 빠져들었다. 그들이 친한 벗이 되기까지는 열흘이 채 걸리지 않았다.
“혹시 공작 전하께서 루시아가 외출하는 것을 싫어하세요?”
“호호, 그렇지 않아요. 그럴 분은 아니에요.”
아마 이 자리에 휴고가 있었다면 거리낌 없이 싫다고 답했을 것이다. 휴고가 그녀의 외출을 통제하지 않는 건 그럴 이유가 없어서였다. 내성 안쪽에서만 지내는데 나가지도 않는 사람을 나가지 말라고 할 필요가 없으니까.
“이렇게 로암 안에만 계시면 답답하지 않으세요?”
“괜찮아요. 가끔 티파티를 열고, 케이트도 이렇게 자주 와주고.”
“그러지 말고 승마 배워보지 않으실래요? 말 타고 휙 한 바퀴 달리고 나면 속이 뻥 뚫리는 것 같거든요.”
케이트는 지나치게 얌전한 루시아에게 바깥 활동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었다. 세상은 넓고 놀 것은 많다.
“승마……? 위험하지 않을까요……?”
“전혀요. 알고 보면 말만큼 순한 동물이 없어요. 물론 처음부터 속도 내어 달리지는 못하겠지만 꾸준히 타다 보면 금방 늘고. 아. 몸매 가꾸는 운동으로도 효과가 좋아요. 요즘 여자들 사이에 얼마나 유행인데요.”
“그래요……?”
잠시 고민한 루시아가 답했다.
“전하께 허락을 받아볼게요.”
“아아…….”
그의 얼굴을 쓰다듬어 내려오던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며 그의 어깨를 붙들려 했으나 땀으로 미끄러져 침대로 툭 떨어졌다. 손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떨리며 경련하고 있었다. 남자는 신음하며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쾌락의 절정에 치달으며 마구 경련하는 속살이 그의 것을 비틀어 쥐어짰다.
“으응……. 흑…….”
젖은 눈동자에 샘이 차오르는 것처럼 눈물이 톡 고여 주룩 흘러내렸다.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쾌감의 파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붕 떠올라 허공을 부유하던 감각이 깊이 가라앉으면서 아득한 어디론가 떨어지면서 이대로 끝없이 추락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였다. 그의 상체는 그녀의 상체에 밀착해서 움직일 때마다 가슴과 예민하게 곤두선 유두 끝이 그의 가슴을 스치면서 자극했다. 그는 사나운 신음을 흘리면서 그녀의 엉덩이를 두 손 가득 움켜잡고 깊은 샘 안쪽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조금은 느리게. 그의 감각근을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속살을 느끼려는 것처럼.
그는 느리게 움직이다가 조금 속도를 가했다가 다시 천천히 움직이며 감질나도록 그녀를 다그쳤다. 물고 비틀어 깨무는 그녀의 안쪽은 마치 그의 침입을 저항하는 것처럼 격렬했다. 속이며 겉이며 잔경련을 일으키는 그녀의 몸 상태가 그녀가 극한 고조에 이르렀음을 알려주었다. 그는 예민하게 일어난 그녀의 안쪽을 그의 무기로 깊이 찔렀다.
“흐읏……. 휴……. 제발…….”
루시아는 흐느끼며 애원했다. 거칠게 마구 움직일 때보다 더 힘들었다. 한 방울 기력까지 모두 쥐어짜는 것 같이 힘이 부쳤다. 온몸의 모든 감각이 다 일어나서 그의 손이 피부를 부드럽게 쓸어주는 것만으로도 통증처럼 느꼈다.
“후우……. 어떻게 해줘……?”
조금 더 무게를 실어 묵직하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단단히 일어난 그의 성기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그의 것에 착 달라붙어 움직이는 그녀의 안쪽도 끈질긴 건 마찬가지였다. 두 남녀의 성기가 만나 만들어내는 자극적인 움직임과 그것이 동반하는 쾌감은 당사자들에게도 가감 없이 전달되었다. 다만, 그는 감당할 수 있었고,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휴! 아! 싫어! 그만!”
휴고는 자신을 몸 안에 품은 여자가 몸부림치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공포에 질린 것처럼 확대된 동공과 젖은 속눈썹. 그는 고개를 숙여 이제 막 눈에 맺혀 흘러내릴 것처럼 방울진 눈물을 혀끝으로 핥았다. 벌어진 붉은 입술을 입안으로 쪽 빨아들이면서 열기 어린 입안으로 혀를 넣었다.
입 안쪽을 한 번 건드렸다가 끝난 짧은 키스. 그리고 그는 다시 키스를 시작했다. 삼키고 핥고 건드리고 깨물고. 부드럽지만 노골적인 욕망을 숨기지 않는 짙은 입맞춤이었다.
“그만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다시 안쪽 살을 헤집고 들어가고 있었다. 착 감싸오는 속살에 그의 호흡이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흑……. 네…….”
“알았어.”
그녀의 울먹이는 눈동자가 살짝 동그랗게 커졌다. 그의 눈이 휘어지면서 나른하게 웃었다.
“조금만 더 하고.”
그럼 그렇지. 그녀는 또 속았다. 뭐가 그리 억울한지 그녀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이거 위험한데.’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얼굴은 먹잇감을 앞에 둔 배고픈 맹수처럼 허기와 탐욕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눈가를 붉힌 채로 칭얼대기 시작하면 그의 하체는 바로 반응했다. 가뜩이나 흥분한 중심에 더 피가 몰리는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안쪽을 깊이 건드리자 그녀는 인상을 쓰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한입에 삼켜버리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그녀의 반응을 관찰하며 히죽 웃었다. 경험상 그녀가 좋아하는 안쪽 어딘가를 찌르자 파드득 몸을 떨며 교성을 흘렸다. 끊어질 듯 말 듯 작게 흘리는 교성이 그렇게 그를 자극할 수가 없었다.
“한 번만 더 하자.”
그녀는 젖은 눈망울로 숨을 할딱이며 그를 의심스럽게 보았다. 이번에는 안 속아. 그렇게 말하는 눈이었다. 싫다고 앙탈하는 그녀를 눌러 잡아먹는 재미도 좋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다 살살 꾀어 적극적으로 반응하게 하는 맛은 또 특별했다.
“진짜 약속.”
그녀의 눈빛이 온순해졌다. 설마 하면서도 매번 혹시. 그녀는 셀 수 없는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그녀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 진짜, 이 귀여운 것.
“엎드려서 엉덩이 들어.”
안을 채우고 있던 그가 쑥 빠져나가자 그녀의 몸이 흠칫했다. 우물쭈물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아무래도 이대로는 절대 그만둘 것 같지 않은 그의 기세를 느끼고 순순히 몸을 돌려 엎드렸다.
그녀의 하얗고 토실한 엉덩이가 그의 손아귀에서 일그러졌다. 등에서 허리, 엉덩이로 이어지는 탐스러운 곡선을 감상하면서 그는 뒤에서 단번에 밀어 넣었다. 그녀의 몸이 크게 한차례 흔들렸다.
“흐윽…….”
“하아……. 정말 미친다. 내가.”
맛보고 또 맛봐도 도무지 질리지가 않았다. 싫증이 나기는커녕 그녀를 안을 때마다 이런 거였나 새로웠다. 이 천상의 맛을 가진 여자는 그의 것이었다. 누구도 손대지 못한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소유권을 증명하는 표시를 새겨 넣고 싶었다.
요즘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 깊은 곳에 음험하고 끈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결코 드러내지 않는 아주 은밀하고 조용한 어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