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18화 (19/77)

18장 공작 부부 (6)

첫 티파티는 작은 규모였다. 공작가 봉신들의 부인들, 주로 나이 지긋한 노부인들 대상으로 총 여덟 명을 초대했다. 누굴 초대하는지는 제롬의 조언에 따랐다.

분위기는 내내 화기애애했다. 루시아는 살짝 긴장했으나 막상 자리를 열자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언제든 물고 뜯을 준비가 되어있는 수도 사교계와 전혀 달랐다.

북부에서 타란 공작부인의 자리는 절대적인 우위에 위치해 있었다. 모두 듣기 좋은 말만 하고 루시아의 기분을 맞추느라 여념이 없었다.

루시아가 권위를 앞세워 노부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면 아무리 앞에서는 웃음 지어도 뒤로는 공작부인에 대한 악평이 퍼져나가는 건 순식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시아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수준에서 예의를 다했다.

루시아는 처음으로 자신이 주최자가 되어 티파티를 열었다. 메튼 백작은 사교 활동을 하라고 달달 볶아댔으면서 제대로 지원은 해주지 않았다. 티파티는 한 번 열기 시작하면 정기적으로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한 번만 하고 그만두는 것은 아예 하지 않는 것만 못했다. 정기적인 티파티는 제법 돈이 들었다. 구두쇠 메튼 백작은 돈을 움켜쥐고 달달 떨었다. 그런 주제에 제 몸이 먹고 쓰는 데는 대단히 너그러웠다.

비록 주최자로서의 루시아의 경험은 부족해도 꿈속에서 수년간 셀 수 없이 많은 파티에 참석했다. 주로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거의 듣기만 했고 자리 채우기만 급급했어도 경험은 경험이다. 참석자는 모두 노련한 노부인들이었다. 루시아가 주도하지 않아도 분위기는 잘 흘러갔다.

오히려 어린 아가씨들보다 노부인들 쪽이 다루기 편했다. 아가씨들끼리의 괜한 신경전도 없고, 다들 서로 오래 얼굴을 마주한 사이라 할 말 못 할 말 가릴 줄 알았다. 노부인들의 대화를 경청하면서 간혹 맞장구치고 웃어주면 되었다.

놀란 건 노부인들 쪽이었다. 이제 열여덟 살이라는 어린 공작부인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다들 비슷한 나이의 딸이나 손녀 하나 둘쯤은 있을 나이였다. 공작부인과 비교하자 그들의 자손은 철없는 어린애였다.

‘공주님이라더니 과연.’

‘기품이 있으시구나.’

‘이렇게 의연하시다니.’

루시아는 흔한 공주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왕족이었다. 왕궁 구경하러 수도 다녀오는 것이 큰 행사인 북부 사교계 귀족들에게는 공주라는 신분 하나만으로도 우러러보이는 대상이었다. 그녀가 나이보다 유난히 차분한 모습을 모두 기품 어린 우아함으로 받아들였다.

나이 든 사람일수록 젊은이의 참한 모습에 호감을 갖는다. 타란의 젊은 공작은 영 섣부르게 다가가기 껄끄러운 상대라 비교적 순해 보이는 공작부인이 노부인들 마음에 쏙 들었다.

“조만간 성대하게 무도회 한번 여셔야지요. 손녀 아이가 그걸 꼭 여쭤보라 하더군요.”

“아직 계획 중에는 없어요. 이렇게 부인들 모시고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좋군요. 무도회는 너무 시끄럽고 번잡스러워서요.”

“아주 좋은 생각이세요. 무도회 같은 건 열어봤자 젊은 것들 놀이터만 만들어주는 격이라.”

“그럼요. 술에 취해 새벽까지 비틀대는 모습은 영 좋아 보이지 않지요.”

노부인들은 우르르 찬동했다. 자기들이 젊은 시절엔 어찌 놀았는지 따위는 그들 기억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실례하겠습니다.”

한창 대화가 무르익어 가는 시점에 제롬이 테라스로 들어왔다. 티파티는 여성들만의 자리라 시중드는 사람도 모두 여자뿐이고 남자는 방해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무슨 일인가요, 집사.”

“즐거운 시간을 방해드려 송구합니다, 마님. 주인님께서 마님의 첫 사교 활동을 축하하는 의미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가지고 들어와도 되겠습니까?”

노부인들 표정이 단번에 흥미로 가득 차서 서로 눈을 마주쳤다. 루시아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허락하자 하인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그들 모두 품에 한 아름씩 꽃을 안고 있었다.

붉은 꽃들의 향연이었다. 장미, 튤립, 국화, 제라늄……. 그야말로 종류별 모두 붉은 꽃으로 하인들이 테라스 구석구석에, 일부는 화병에 담아 테이블에도 여기저기 장식하기 시작했다. 테라스 내부는 순식간에 달콤한 꽃향기로 가득해졌다. 족히 수천 송이는 됨 직했다.

“어머나, 세상에.”

“공작 전하께서 이렇게 로맨틱한 분이었다니.”

아무리 나이 들어도 꽃을 좋아하는 여자. 노부인들은 체통을 버리고 환호성을 질렀다. 젊은 날의 설레던 사랑은 시들해진 지금, 예상치 못하게 목격한 로맨스가 그들 열정을 뜨겁게 되살렸다. 기대 안 한 선물을 받은 루시아의 가슴도 두근거리며 뛰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선물 보내시며… 전하라는 말씀은 없으셨나요?”

노련한 집사는 당황하지 않았다.

“부디 오늘의 테마에 어울리는 선물이기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루시아 눈이 살짝 커졌다. 그리고 집사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수고 많았어요, 집사. 감사 인사는 그분께 직접 드리도록 하지요.”

티파티 자리를 파할 때까지 노부인들은 내내 부럽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에게 둘러싸여 루시아의 얼굴은 꽃잎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루시아는 돌아가는 모두에게 모두 꽃 한 다발씩을 품에 안겨주었다. 그렇게 나누어 주어도 여전히 남은 꽃이 많았다. 귀부인들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아름다운 선물에 몹시 감동하며 돌아갔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마님. 귀가하는 귀부인들 안색이 밝은 것을 보아 티파티 자리가 다들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나 역시 즐거웠어요. 제롬도 수고했어요. 그런데 물어볼 것이 있는데요.”

제롬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굳었다. 요즘은 좀 뜸했던 마님의 공격이었다.

“…예. 마님.”

“꽃 선물. 그분이 지시한 것 아니죠?”

“예?”

제롬은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치는 것처럼 되묻고 말았다. 제롬이 대경실색하는 모습을 보며 루시아는 쿡쿡 웃었다.

“나도 처음에는 선물인 줄 알았어요. 제롬이 한마디 붙이지만 않았어도 속았을 거예요. 오늘 테마에 어울리기 바란다니. 그분이 그렇게 섬세한 분이 아니라니까요. 어떻게 나보다 더 몰라요?”

차라리 제롬이 따로 전하는 말은 없었다고 했다면 정말 그가 보낸 선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 그……. 마님. 저기……. 그게…….”

가련할 정도로 버벅거리는 제롬을 루시아는 따뜻하게 위로했다.

“괜찮아요. 선물 고마워요, 제롬.”

“마님! 그게 아닙니다. 정말 주인님께서 선물을 보내려 하셨는데 무엇을 보낼지 고민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꽃으로…….”

“정말요?”

“예, 이건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마님.”

루시아는 흐음, 중얼거리며 안색마저 굳어가는 제롬을 미심쩍은 시선으로 살폈다. 제롬 표정이 애처로워서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알았어요.”

“마님, 정말입니다.”

“알았다니까요. 전하께는 감사 인사 드릴게요.”

제롬은 이젠 다른 의미로 곤란해졌다. 공작에게 직접 감사 인사를 했다가 뭔가 말이 어긋나기라도 하면……. 하지만 이제 와서 또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좋은 뜻이었다고 해도 엄연히 마님을 기만한 행위가 될 수 있었다.

“난 여기 좀 더 앉아 있을래요. 꽃향기가 참 좋네요.”

“…예, 마님. 차를 가져다 드릴까요?”

“이미 많이 마셨군요. 필요한 건 없어요.”

제롬이 물러가고 루시아는 한참 동안 조용해진 테라스에 하릴없이 앉아 꽃향기에 심취했다.

* * *

티파티가 한참인 시간 동안 휴고는 회의 중이었다. 휴고는 봉신, 가신, 기사들과 정기적으로 회의를 했다. 그들 처지에서는 월 1회 정도이지만 회의 상대가 모두 다른 휴고는 최소 주 1회씩은 회의를 할 정도로 회의가 잦았다.

그는 회의 중으로 문제가 제기된 사안의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고서는 회의를 끝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회의에 들어가면 끝날 때 사람들은 진이 다 빠진 표정으로 나오고, 오전부터 시작해서 저녁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오늘 회의 역시 티파티가 모두 끝나고 나서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마무리되었다. 다행히 저녁 식사 시간은 넘기지 않았다.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르지만 뭔가 시작하기엔 어지빠른 시간이라 휴고는 제롬에게 루시아 행방을 물었다.

“마님께서는 테라스에 계십니다.”

아. 티파티.

‘마님께서 여시는 첫 자리인데 축하 선물을 보내심이 어떠신지요.’

이런. 그는 작게 탄식했다. 선물을 보낸다고 해놓고 잊고 있었다. 어제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 오늘은 오전부터 내내 회의라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직 오늘이 지난 것은 아니니까. 오늘 안에만 주면 좀 늦게 줬다고 해도 문제가 될 건 없겠지.

“이 시간까지 티파티 중인가?”

“아닙니다. 끝난 지 한참 되었습니다. 마님께서는 그냥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님 선물에 관해 말씀이 없으시어 제 판단으로 테라스를 장식할 꽃을 보내 드렸습니다.”

“음. 그래? 잘했군.”

역시 그의 집사는 유능했다.

“안사람은 테라스에 있다고 했지?”

공작 뒷모습을 보며 제롬은 차마 마님께서 그 선물을 정말 주인님께서 보내셨는지 의심하고 계십니다, 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건 엄연히 자신의 실수였다. 주인님께 잘못을 숨기다니. 그의 집사 인생 처음이었다. 자괴감에 빠진 제롬을 뒤로하고 휴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테라스로 향했다.

날이 저물어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어가는 테라스에 들어선 순간, 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테이블에 턱을 받치고 눈을 감은 채 앉아있었다. 마치 이 공간만 고요에 먹힌 것처럼 무겁지 않은 평온한 적막이 감돌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의 명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궁금하기도 했다. 생각에 빠진 그녀를 당장 현실로 끌어내고 싶었다. 그녀의 평화로운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마음도 점점 고요해졌다. 너무 편안해서 오히려 숨이 막힌다.

휴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가끔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눈앞이 막막하기도 하고, 정체 모를 뭔가가 조금씩 그를 좀먹고 있는 것 같았다.

결코 유쾌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불쾌하지도 않은. 늘 모든 것이 명확했던 그의 인생에 그녀는 도무지 제자리를 찾을 수 없는 퍼즐 조각이었다.

감겨있던 그녀의 눈이 반짝 뜨였다. 그를 발견한 그녀가 햇살처럼 눈부시게 웃었다.

휴고는 인상을 썼다. 바늘로 콕 찌르는 것처럼 가슴 안쪽이 따끔했다. 자꾸 몸에서 이상 증상이 보였다. 지금껏 질병은커녕 어지간한 상처는 놀라운 회복력을 보이는 몸이라 의사는 필요 없이 살아왔다.

‘…그 늙은이를 불러오라고 해야 하나.’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필립 얼굴을 다시 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달려갔다. 즐거웠던 오늘의 티파티, 향긋한 꽃향기와 서서히 해가 지며 만들어내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노을, 모든 것이 그녀의 기분을 서서히 고조시켰다. 조용한 평화를 즐기며 그 기분이 극에 달했을 때 그가 등장했다. 루시아는 자신의 감격을 그의 품에 달려가는 것으로 표현했다.

“어이쿠.”

갑작스럽게 쿵 부딪쳐 오는 그녀 때문에 그는 잠깐 주춤했다.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꼭 끌어안고 얼굴을 그의 가슴에 비비며 품에 들어왔다. 그는 보드라운 그녀를 품으로 안으며 화답했다. 고개를 숙여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어쩐 일로 안 하던 귀여운 짓을 다 할까. 오늘 티파티에서 배운 것이 이거라면 매일 열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 그녀의 턱을 살짝 잡아 가볍게 키스했다.

“티파티는 즐거웠나?”

“네, 선물 감사해요.”

그의 시선이 신속하게 테라스 여기저기 가득한 꽃을 포착했다. 제롬이 그를 대신해서 했다는 선물이 그녀를 기쁘게 한 것 같아서 그도 흡족했다. 여자들은 대체 왜 꽃을 좋아하는 걸까. 먹지도 못하는 저런 걸.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차피 여자라는 생물 자체를 이해한 적이 없었다.

화사함을 뽐내는 붉은 꽃들에 무심히 시선을 던지던 그의 눈에 꽃 사이에 끼어있는 장미꽃이 들어왔다. 그의 눈매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제게 장미꽃을 보내주세요.”

갑자기 떠오른 그녀의 말 한마디. 그는 몹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 말을 언제 들었지?’

아장아장 발걸음을 떼던 시절까지 떠올릴 수 있는 그의 탁월한 기억력에 오류가 발생했다. 마음이 다급해지니 기억은 더 혼잡해졌다. 불과 몇 개월 전 기억을 되살리려고 그는 고심했다.

‘그래. 계약… 계약하던 날 그녀가 내건 조건이…….’

“제가 제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제게 장미꽃을 보내주세요.”

이런. 빌어먹을.

차가운 얼음물이 머리 위에서 쏟아진 것 같았다. 아니다. 그보다는 더 끈끈하고 온몸을 옭아매는 것 같은, 악취 나는 오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기분 더럽군.’

그 말밖에는 표현할 말이 없었다. 성가신 불쾌함이 아니라 진창에 발목까지 푹 빠져서 겨우 발을 끄집어낼 때 느끼는 정말 짜증나는 불쾌함. 아니야. 그런 것과는 달랐다.

적군의 뒤통수를 쳤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알고 기다리는 놈들을 마주쳤을 때. 아니다. 그것도 아니야. 그는 자신을 사로잡는 이 기분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열심히 고민했지만 도무지 답이 도출되지 않았다.

그녀를 보자 맑은 눈으로 조금 의아한 듯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는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했다.

“꽃……. 그렇게 좋은가?”

“꽃이 좋다기보다는……. 선물을 보내주신 것이 기뻐요.”

그녀의 표정은 밝았고 순수하게 기쁨을 표현했다. 아무래도 단순히 선물의 의미로만 받아들이는 것 같았지만 대놓고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러면 그가 보낸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테고 단순히 선물로만 알고 있었다면 그녀는 실망할 테니까.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군.”

그는 동요하는 마음을 감추고 겉으로는 아주 태연하게 대응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제롬을 향해 작은 앙금을 품었다. 하고 많은 선물 중에 왜 하필 장미꽃이란 말인가. 여러 많은 종류의 꽃 중에 장미가 들어있을 뿐이었지만 휴고의 눈에는 장미만 보였다.

휴고는 몸을 숙여 그녀를 가뿐히 안아 들었다. 루시아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혹스러워 작게 소리쳤다. 그는 테이블에 걸터앉아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두 팔로 꽉 끌어안은 채 그녀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전하……? 휴…….”

“잠시만.”

조금 버둥거리던 그녀가 얌전해지자 그는 생각을 시작했다. 작은 몸의 체온이 품 안에서 점점 따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차분하게 기억을 더듬었다.

‘노란……. 그래……. 노란 장미.’

처음에는 장미꽃만 보고 놀랐으나 당황의 순간이 지나가자 그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눈을 돌리며 아무리 살펴도 노란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여자에게 이별의 의미로 보내는 노란 장미는 이곳에 없다. 그는 안도했다.

여자에게 노란 장미를 보내는 것을 그는 처음에는 몰랐다. 적당히 알아서 하라고 제롬에게 명했을 뿐,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런데 장미를 받은 여자가 그를 찾아와 눈앞에 노란 장미 다발을 내던진 적이 있었다. 몇 번 만나는 중에도 성격이 보통은 아니구나 생각했던 여자였다.

그 일로 휴고는 노란 장미라는 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색깔이 알록달록하면 다 꽃이려니 했던 그가 장미라는 꽃의 종을 인식하게 되었다. 제롬이 왜 하필 노란 장미를 보냈는지는 묻지 않았지만 나름 의미가 있어보여서 하던 대로 하라고 했다.

‘그녀도 노란 장미라는 걸 알고 있나?’

그녀와 계약하며 나눈 대화를 아무리 떠올려봐도 ‘노란’ 장미라고 특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 반응으로 봐서는 오늘의 장미를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별의 장미는 한 다발이었다. 이런 엄청난 꽃 무더기가 아니니까 엄연히 다르다고 그는 정의 내렸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했고, 그는 다시 그날 계약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내세운 조건은 두 장의 서류였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둘이 더 있었다. 사생활의 자유. 절대 그를 사랑하지 말 것.

‘미친놈.’

왜 그런 쓸데없는 사족을 붙였을까. 그는 원래 문서화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면 계약 조건으로 삼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떠본다고 생각해서 맞대응한다는 것이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

사생활의 자유는 별문제가 아니었다. 결혼해서 멀쩡한 아내를 곁에 두고 딴 여자에 눈 돌릴 필요가 없지. 괜히 수고롭게. 가끔 놀 수도 있지, 라고 했던 당시의 생각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었으나 어차피 그는 자신의 모순에 관대한 남자였다.

“절대로 전하를 사랑하지 않겠어요.”

문제는 이거였다. 가슴과 등 앞뒤에서 강한 힘이 누르는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더구나 그녀의 맹세는 2중의 방패를 둘렀다.

그녀는 휴고에게 선언했다. 절대 당신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것이며,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해도 장미꽃으로 거절의 답을 주세요. 그리고 휴고는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이라고 생각해서 흔쾌히 그러마 했다.

‘등신 새끼.’

휴고는 원래 자신을 싫어하지만 그건 혐오에 가까운 감정이지 멍청하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그는 사실 신체와 두뇌의 능력에는 남부럽지 않게 자신이 있었다. 그의 자신감에 쩍쩍 금이 가고 있었다.

“휴, 더워요.”

품 안에서 그녀가 몸을 비틀었다. 그의 팔에서 힘이 빠지자 루시아는 두 손으로 그를 밀어내며 몸을 떼어냈다. 시원한 공기가 살갗에 닿자 후, 작게 숨을 내쉬었다. 더위로 조금 붉게 상기된 그녀를 휴고는 멍하게 내려보았다.

‘이 여자는 날 사랑하지 않아.’

그래주면 고맙지. 과거 그는 여자들을 향해 그렇게 생각했다.

여자의 사랑은 성가시다. 원하지도 않는 마음을 줘놓고 보답해 달라고 앵앵거렸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그가 가진 것들에 기반을 둔 거래였다. 여자는 그가 가진 권력과 재물을 사랑했다. 그들은 공작 휴고를 사랑하는 것이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히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원하는 사람도 공작으로서의 자신이었다. 그런데 점점 그 확신이 흐려지는 중이었다. 그녀는 그가 가진 권력과 재물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몰라.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사람은 본색을 길게는 십수 년 숨기기도 한다. 그의 이성은 그렇게 말하는데 왜 그의 감성은 그녀는 뭔가 다르다고 자꾸 말하는 걸까.

‘그녀가 매달리기는 바라는 건가? 다른 여자들처럼?’

왜? 도무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앞에 있었다.

‘그래서 만약 그녀가 매달리면… 난 어쩌고 싶은 거지?’

그런 일이 발생하면 그건 계약 조건의 불이행이었다. 계약 조건을 지키지 못하면 어쩌기로 했더라.

그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들의 계약에는 대단히 치명적인 빈틈이 있었다. 첫째, 문서화되지 않은 계약은 법적인 효과를 주장할 수 없다. 둘째, 계약 내용 어디에도 조건을 지키지 못했을 때 계약 파기의 구체적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다.

아예 이혼은 없다고 못 박지 않았던가. 이혼의 성가신 과정을 처음부터 차단하려는 의도로 한 말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영리한 선견지명이었다.

‘장미꽃? 그게 뭐. 영원히 장미꽃을 보내지 않으면 어쩔 건데. 또 보낸다고 해도 어쩔 건데.’

한참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의문으로 물들어갔다. 호박색 눈동자를 보며 그의 붉은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그의 아내였다. 누구도 감히 시비하지 못할 그의 여자였다. 혼인증서에 서명한 순간부터 그녀는 그의 그늘에 온전히 묶였다.

‘이 여자는 내 거야.’

도출한 결론이 그는 몹시 만족스러웠다. 사랑이니 뭐니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 자그마한 여자는 결코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여자에 대한 소유욕과 집착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회의가 잘 풀리지 않으셨어요?”

그가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달랐다. 워낙 거칠 것 없는 사람이라 그가 고민하는 문제가 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북부는 넓은 땅이고 그는 많은 사람들 위에 서있으니까 문제 하나 없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사실 루시아는 그에게 조금 샐쭉해 있었다. 아랫사람이 알아서 선물을 챙기게 하다니. 차라리 주지 않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제롬이 강력하게 주장하는 말에 의하면 그가 선물에 대한 생각 자체는 있었다고 하니까 믿어볼까 하는 마음도 살짝 들었다.

그리고 오늘 티파티에서 귀부인들은 어리고 순해 보이는 공작부인이 아무래도 염려스러웠는지 몇 가지 조언을 건넸다.

‘사내란 단순해요. 복잡하게 생각할 거 하나도 없답니다. 꽃 한 송이를 줘도 세상에 그보다 더 귀한 선물이 없다는 것처럼 품에 쏙 안기며 고맙다고 하면 열이면 열 다 넘어간다니까요.’

‘암. 좋아하는 척을 자꾸 해야 선물도 자꾸 들어오지. 그리고 가끔은 우리 남편 수고했네, 힘드시지요, 이런 말로 달래주기도 하면서요.’

인제 보니 그런 식으로 남편 쥐고 살았구먼,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어떻고. 웃음을 쏟아내는 귀부인들 조언 같은 수다를 루시아는 얌전히 앉아 열심히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그의 품에 달려가 안길 때까지만 해도 귀부인들 조언에 따르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저 순수하게 그를 보니까 행복했다. 그런데 귀부인들 조언이 떠오르자 상황이 아주 딱이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꽃 선물에 얽힌 뒷사정은 접어두고 적극적인 감사를 표했다.

“회의는 아무 문제없어. 선물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지?”

잡아먹을 것 같은 그의 눈빛에 루시아는 주춤주춤 그의 무릎에서 내려오려 했지만 그의 팔이 허리를 감았다.

“네…….”

“마음에 들었으면 답례를 해줘야지.”

정말 이 뻔뻔한 남자. 그가 한 선물이 아닌 것을 빤히 알고 있는데 그는 양심의 가책 한 톨 보이지 않았다. 말해 버릴까 싶다가도 그러면 제롬이 혼이 나겠지, 괜히 긁어 부스럼 내어 뭐 하나 싶어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원하는 게 있으세요?”

“있다고 하면. 뭐든 가능한가?”

“제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요.”

그가 귓가에 대고 무언가 속삭이자 루시아의 얼굴이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

“안 돼요!”

“금방 끝낼게.”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근처에 쪽쪽 소리 내며 닿았다 떨어졌다.

“곧 저녁 식사 시간이라고요.”

“그전에 끝낸다니까.”

그가 퍼붓는 자잘한 키스에 그녀는 계속 저항했다.

“못 믿어요.”

“그 말 참 쉽게 나오는군. 언제부터 내 신뢰도가 그렇게 바닥을 쳤지?”

“왜 그런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보세요.”

침대에서 매번 한 번만 더, 이번이 마지막. 그의 꼬임에 설마 하면서도 그녀는 번번이 속았다. 그녀의 앙탈에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작은 영차, 소리를 내며 치맛자락 위로 그녀 허벅지 아래를 받쳐 들어 올렸다.

그녀의 다리를 벌리는 자세로 바꿔서 자신의 허벅지 안쪽을 타고 앉도록 바싹 끌어당겼다. 루시아는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은 것처럼 마주 앉은 자세가 되어 목덜미까지 빨갛게 물들어서 그를 흘겨보았다. 옷이 가로막고 있지만 않으면 결합하는 자세와 다를 것이 없었다. 이미 잔뜩 흥분한 남성의 상징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이 남자, 정말로 여기서 할 셈이었다.

“누가 오면 어떡해요.”

“그 정도로 눈치 없는 집사 아니야. 우리가 여기서 안 나오면 알아서 통제할걸.”

그게 더 창피하단 말이에요! 루시아는 입술을 깨물며 어쩔 줄을 몰랐다. 이미 그의 손 하나는 슬금슬금 치마를 걷어내 안을 더듬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다른 손이 그녀의 등을 받쳐 품으로 당기면서 귓불을 살짝 깨물며 혀로 핥았다.

“처음은 정원에서 하고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날씨가 날씨니만큼 벌레가 있겠더군. 하던 중에 당신이 기절하면 곤란하잖아. 아니지. 상관없으려나. 꼭 벌레 때문이 아니라도 당신은 종종…….”

“…한마디만 더하면 당신 입술을 깨물어버릴 거예요.”

그는 키득거리면서 ‘예, 마님.’ 하고 대답했다. 새침하게 노려보는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추고 붉은 입술을 삼켰다. 훅 풍기는 그녀의 체향이 달았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이용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제시간을 훌쩍 넘긴 늦은 저녁을 먹었다.

* * *

오후의 집무실, 휴고는 제롬이 차를 가지고 들어와 책상에 놓아두고 돌아서는데 말했다.

“앞으로는.”

제롬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다시 책상으로 다가와 얌전히 주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꽃은. 다른 꽃은 상관없지만 장미꽃은 안 돼. 그 꽃이 내 눈에 다시는 보이는 일 없게 해.”

주인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제롬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혹시 어제 마님께 보내드린 선물로 마님과 의가 상하셨나. 하지만 두 분 분위기를 봐서는 그런 것 같지 않았는데. 문득 장미꽃 하니까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전하. 일전에 마님께서… 노란 장미꽃 보내는 일을 제가 하느냐고 물으신 적 있었습니다.”

서명하려던 그의 손이 멈칫한 순간, 펜에서 잉크가 똑 떨어져 서류 아래에서 번지기 시작했다. 그는 살짝 인상을 쓰며 그 서류를 옆쪽으로 밀어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받은 사람이 레이디 로렌스가 맞느냐 물으시기에… 그렇다고 대답을 드렸습니다.”

“…….”

승전파티의 그날, 소피아 로렌스가 질척이던 걸 떼어내는 광경을 그녀는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잊고 있었다. 잊었던 것이 아니라 신경 쓸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말이 정확했다. 그녀가 파렴치한 악당처럼 그를 취급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뭐지?”

그의 목소리에 조금 날이 섰다. 제롬은 아무래도 불편해 보이는 주인의 심기 때문에 눈치를 살폈다.

“왜 마지막이 팔콘 백작부인이 아니냐고 하시기에……. 그건 전하께서 지시하지 않으셨다고 답변 드렸습니다.”

겉으로는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으나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거기서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어떡해! 버럭 외치고 싶은 것을 속으로 삼켰다. 늘 유능했던 집사가 눈치 없는 맹꽁이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보내, 장미.”

“팔콘 백작부인……. 말씀이십니까?”

“당장. 오늘.”

“…예, 전하. 아, 그리고 또 하나…….”

“뭐가 그리 많아.”

휴고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돌아나가는 걸 붙잡아 한마디했더니 기회를 잡은 것처럼 줄줄이 쏟아내고 있었다.

“마님 주치의가 올리는 말씀입니다만. 마님 침실에 드시는 일은 좀 자제하시라고…….”

“뭐야? 그걸 왜 주치의가 상관하지?”

“마님 건강상 이유 때문이라 했습니다. 닷새에 하루만큼은 마님께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마님의 건강. 그가 도무지 저항할 수 없는 절대 과제가 등장했다. 그의 아내는 작고 약했다. 사실 그렇게까지 루시아가 허약 체질은 아니지만 그의 뇌리에는 탈이 나면 아주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박혀있었다. 한 달 넘도록 너무 쉼 없이 몰아치기는 했다. 그렇다 해도 정말 원 없이 해봤으면 적어도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닷새에 하루나. 그는 급 우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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