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16화 (17/77)

16장 공작 부부 (4)

그의 손이 루시아 턱을 틀어잡더니 격하게 그의 입술이 맞부딪혔다. 벌어진 입술 안을 가르며 단번에 뜨거운 살덩이가 침입했다. 강하게 흡입하며 입안 깊은 곳까지 건드린다. 혀뿌리가 얼얼할 정도로 그는 그녀의 혀를 휘감아 빨아들였다.

눈앞이 흐려져서 루시아는 눈을 감고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격렬한 키스가 이어졌다. 타액이 뒤섞이고 뜨거운 혀가 맞닿았다. 그는 의자에 앉아있던 루시아를 가뿐히 안아 들고 테이블 위에 앉혔다. 그러는 중에도 두 사람의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조용한 식당에 진하게 두 사람의 혀가 얽히며 내는 끈적이는 소음이 메아리쳤다. 붉은 입술은 그의 입술에 삼켜지고 작은 입안은 그의 혀에 점령당했다. 입안을 거침없이 훑는 그의 키스는 마치 몸 안을 휘젓는 것 같았다. 그의 어깨를 감싸듯 목을 감은 그녀의 두 팔이 가늘게 떨렸다.

길게 이어진 키스가 끝나고 그는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그녀의 입술에 마무리처럼 입을 맞추었다. 그는 턱을 따라가다가 이어서 목에 입술을 붙였다. 그의 손이 옷 위로 강하게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의 다리 하나가 그녀의 무릎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자 루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두 손으로 힘껏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여… 여기서 할 생각은 아니죠?”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휴고는 당혹스러워하는 그녀를 보자 장난기가 치솟았다.

“안 돼?”

“안 돼요!”

“이유. 납득할 만하면 물러나지.”

“바… 밥 먹는 곳에서 이러는 거 아니에요!”

목을 지분대던 그가 잠시 멈추더니 낮게 웃었다.

“그럼 다른 곳은? 복도는 어때?”

“절대 싫어요!”

“정원은? 밖에서 해보고 싶은데.”

“미쳤어요?”

처음 보는 그녀의 격한 반응에 그는 웃음을 참고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왜 안 되지?”

“다른 사람이 볼 수도 있잖아요!”

“볼 사람이 없으면 되는 건가? 성에 있는 자들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내보내면 복도건 정원이건 해도 돼?”

“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루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도 없으면? 그러면 상관없지 않을까. 어차피 침실 안에서도 안 해본 것 없는데. 장소가 바뀌는 것이 무슨 상관이람.

남녀가 결합하는 방법이 그렇게 다양할 수 있다는 걸 지난 한 달 아주 착실히 배웠다. 처음엔 정말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은근히 재미도 있고 자극적이었다.

루시아는 사람들이 왜 이걸 이렇게 열심히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무하고나 뒹굴며 천박하게 노는 짓 따위는 절대 하고 싶지 않지만 두 사람은 부부였다. 침실 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까.

휴고는 그녀가 완전히 기겁하는 모습을 기대했다. 그러나 예상을 벗어나 진지하게 검토하는 모습을 보자 살짝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정말 그녀는 예상치 못한,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간신히 참고 있는 그의 욕망을 간질였다. 며칠은 일이건 뭐건 다 집어치우고 침실에 틀어박혀 만족하도록 그녀를 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녀의 체력이 그걸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이 여자는 대체 왜 이렇게 작은가. 왜 이렇게 여리여리하지. 왜 이렇게 약한 거야. 부서질 것 같아서 세게 잡지도 못하겠다. 자신 때문에 그녀가 다친다면 아주 끔찍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녀는 순진했지만 배우는 것은 아주 빨랐다. 밤마다 그는 가진 바 온갖 기술을 그녀를 상대로 시연했지만 한 번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당혹해하거나 부끄러워하긴 해도 은근히 열심이었다.

‘좋아. 오늘 밤에는 이런저런 걸 해볼까.’

새로운 시도를 상상하자 아랫배에 피가 몰리는 기분으로 그의 중심이 단단하게 일어났다.

“아무…튼 여기는 싫어요…….”

마나님이 싫다는데 어쩔 수 없지. 그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손을 잡아 테이블에서 내려오게 도와주었다. 그의 중심은 풀어달라고 강하게 아우성치고 있었지만 참았다. 그녀와 있을 때 그는 종종 자신의 인내심에 감탄하곤 했다.

아마 눈앞의 여자가 그녀가 아닌, 과거에 데리고 놀았던 여자들 중 하나였다면 의사에 상관없이 그대로 치마를 걷어 올리고 넣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그 여자들은 입으로는 싫다 해도 정말 싫은 건 아니었으니까.

그는 여자를 겁간하지는 않아도 여자들의 의사를 진지하게 고려해 본 적은 없었다. 어차피 그를 만나는 여자들의 목적은 다 같았다. 재물이건, 육체건 결국은 쾌락이었다.

하지만 휴고는 루시아를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었다. 그녀가 싫다고 하는 건 정말 싫은 거다. 그녀가 바라는 건 쾌락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뜻을 존중하고 싶었다.

이런 깊은 뜻은 이 철모르는 아내가 알아주기는 하는지. 테이블에서 내려오며 생글거리는 그녀의 순진한 표정을 봐서는 아무래도 전혀 모를 것 같다.

“산책할 거지?”

루시아는 저녁 식사 후 늘 가볍게 산책을 즐겼다. 그는 여전히 쌓여있는 일거리는 잠시 미루어두기로 했다. 조금 더 그녀 곁에 있고 싶었다. 뜨거워진 몸을 좀 가라앉히기도 해야겠고.

“네.”

“같이 나가지. 방해인가?”

“아뇨, 좋아요.”

루시아는 반색하며 빠르게 대답했다. 그와 산책은 처음이다. 기쁜 내색을 뚜렷이 드러내는 발그레한 그녀 표정을 보고 그는 낮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다.

본격적인 여름은 아직 오지 않아서인지 저녁 바람은 제법 선들선들했다. 그와 나란히 거닐며 루시아는 흘끔거리며 그를 훔쳐보았다. 그녀의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걷는 그의 배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동안 그에게 함께하자고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같이 산책하는 건 꼭 해보고 싶었다. 그와 단지 계약에 묶인 부부가 아닌 연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올해는 정원에 꽃만 가득 심을 생각이에요. 촌스럽겠지만 어차피 처음이니까 그러려니 하겠죠.”

“꽃만 심으면 촌스러운 건가?”

“그럼요. 정원 꾸미기가 얼마나 심오한 세상인데요. 아름다운 정원에는 적당한 조화로움이 필요하거든요. 솜씨 좋은 조경사나 정원사는 정말 구하기 힘들어요. 이미 대부분 다른 가문에 고용되어 있어요.”

“빼내오면 되지.”

“말처럼 쉽지 않아요. 다른 가문에서 거금을 제시하고 제롬을 고용하려 하면 제롬이 응해서 나갈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건 그렇군.”

루시아는 기분이 좋아서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다. 재잘거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도 기분이 좋아졌다. 바쁘지 않으면 종종 그녀와 함께 산책하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지금은 어둡지만 저 나무 아래쪽은 낮에 그늘이 잘 져서 저 아래에서 아침마다 차를 마셔요. 여기에 성이 들어설 때부터 있었던 나무라 수령이 몇 백 년은 훌쩍 넘었을 거라고 하던데요.”

“그런가……?”

휴고는 새삼스럽게 거대한 아름드리나무를 보았다. 그가 어려서부터 살아온 곳이면서 오히려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나무 수령 따위 관심 사항이 아니었으니까.

“괜찮아 보이는군. 처음은 저기가 좋겠어.”

“네?”

“정원에서 하는 처음은 저기로 정했다고.”

“…….”

그를 보며 입을 쩍 벌리는 그녀의 얼굴은 어두워 알 수 없으나 아마 빨갛게 물들어있을 것이다. 그녀의 하얀 얼굴은 신기할 정도로 금방 붉은 사과처럼 익었다. 빠르게 성큼 앞서 가버리는 루시아를 보며 그는 씨익 웃고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서 방금 말한 나무 밑으로 끌고 들어갔다.

마구 버둥거리는 그녀를 나무에 기대게 하고 그 위를 덮치듯 눌렀다. 히익 비명을 삼키는 그녀의 귓불을 잘근 깨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가만히 안 있으면 진짜 한다.”

그녀가 얌전해지자 그는 만족했다. 그리고 루시아는 숨이 차도록 키스한 후에야 그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 * *

공작부부의 저녁 식사 시중을 마무리는 못했지만 두 분만 오붓하게 남겨두고 식당을 나오는 제롬에게 하인이 다가왔다.

“파비안 님이 오셨습니다. 전하께서 언제 집무실에 드실지 알 수 없어 잠깐 집사님 업무실에서 기다리시게 했습니다.”

“잘했다.”

기다리고 있던 파비안과 가벼운 포옹으로 재회 인사를 나누었다. 파비안은 이제 막 수도에서 내려온 참이었다. 공작의 과도한 사냥 때문에 어마어마한 선물을 왕 측에 안겨주어야 했다.

과연 왕이 영지민들 목숨을 안타까워할까. 그건 아닐 거라는 점에 파비안은 제 머리카락을 몽땅 걸 수 있었다. 비록 혼자만의 내기지만 정말 통 큰 제물이었다. 파비안은 절대 농담으로라도 신체를 해하는 내기는 하지 않았다.

“으아, 피곤해 죽겠군. 얼른 전하께 보고 드리고 자러 가고 싶어. 저녁 식사는 끝나신 건가?”

괜한 엄살이 아니라 파비안 눈가에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내가 말씀 전해드릴 테니 그냥 가서 자라. 언제 나오실지 모르니까.”

“왜? 네가 나와있는 걸 보니 식사가 끝나신 거 아니야?”

“두 분이 함께 계시는데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으니까.”

“두 분? 누구?”

아둔한 소리를 하는 형제를 보며 제롬은 혀를 찼다.

“마님이시지. 누구겠어.”

“마님? 마님하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신 거야? 호오. 어쩐 일이시래.”

“전하께서 거의 매일 저녁 마님과 함께 저녁을 드신다.”

“…….”

늘 날카로운 영민함이 번뜩이던 파비안의 표정이 대단히 멍청해졌다.

“정말?”

“정말.”

“언제부터?”

“전하께서 성에 귀환하신 날부터 계속.”

파비안은 몇 번이고 정말이냐 물었고 제롬은 참을성 있게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다. 파비안의 놀라움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제롬 역시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전하 취향이 언제부터……. 아니, 이건 취향 문제가 아니지. 네 말은 전하께서 마님과 매일 저녁 식사‘만’ 하시는 건 아니라는 것 같으니까.”

“거기까지만 해.”

“헉. 진짜구나. 진짜인가 보네. 맙소사. 믿을 수 없어. 같은 여자랑은 세 번 이상 한 침대를 안 쓰시는 분인데, 컥…….”

파비안은 느닷없이 복부에 충격이 오자 배를 움켜잡으며 허리를 구부렸다. 형제의 배에 주먹을 날린 제롬이 이를 악물며 소리를 죽였다.

“닥쳐라. 듣는 귀 많다. 세 번이 어째? 어디서 헛소문을 만들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만큼 대~단하신 분이라는 소리니까. 그분은 남자들의 로망이라고.”

“얼씨구. 그 말 고대로 앨리스에게 전해주마.”

아내의 이름이 거론되자 파비안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 아니. 내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남들이 그런다는 소리라고. 괜히 앨리스한테 이상한 말 하지 마. 그리고 너 형수 이름 자꾸 부를래?”

“형수 같은 소리 하네. 제수씨겠지.”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되는 법. 그러니 당연히 내가 형님이다.”

만날 때마다 늘 결론이 안 나는 싸움을 또다시 반복하는 쌍둥이 형제였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이거야말로 반전인데.”

타란 공작이 공작위 자리에 오른 열여덟 살 때부터 곁에서 측근으로 모시기 시작한 그들은 지난 공작의 화려한 여성 편력을 모두 알고 있었다. 공작이 대놓고 여자들을 유혹하지 않아도 그가 지닌 권력과 재력, 그리고 젊음과 매력에 끌려 끊임없이 여자들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여자들 중 누구도 공작의 마음을 잡지 못했다. 공작에게 여자는 그저 침대를 덥히는 용도였다. 즐겁게 놀다가 여자가 조금이라도 질척대기 시작하면 끝나는 거였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여자가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깔끔한 뒤처리를 하는 것은 물론 그들 몫이었다.

“아직은 모르지. 그 여자만 해도 1년이 넘게 갔는데 뭐. 잠시 신혼이라는 놀이를 즐기고 계시는 것일지도 모르고. 내 생각엔 거의 그런 거겠지만. 흐아암. 그럼 난 가서 자야겠다. 내일 아침 일찍 뵈러 오겠다고 말씀 전해줘.”

이번엔 다르다. 제롬은 애써 설명하지 않았다. 지켜보면 알게 될 일이니까.

파비안이 말한 ‘그 여자’, 즉, 팔콘 백작부인과 공작은 1년 넘게 만났지만 그때도 공작이 그 여자와만 만난 것은 아니었다. 지금과 같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직 한 명의 여자에게만 집중한 적이 없었다.

* * *

다음 날, 코르잔 백작부인이 방문했다. 루시아보다 약간 클 정도의 키와 마른 체구를 지닌 우아한 백발의 노부인이었다. 젊었을 때 꽤 미인이었을 외모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고왔다.

“마님께 인사드립니다. 마담 미셀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만나 뵈어 영광이에요, 마담 미셀. 갑자기 오십사 청해서 무례가 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미셀의 눈썹이 스윽 올라가더니 엄격한 노부인 눈매가 살짝 휘어졌다. 사실 미셀은 여기 오기까지 적잖이 기분이 상해있었다. 공작부인에게 가르침을 주기를 청한다는 형식이긴 했지만 거의 일방적인 공작의 명이었다.

미셀은 대단히 자존심이 강했다. 그녀를 움직이는 것은 권력이나 재물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녀라 해도 공작의 명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들 녀석이 공작가 봉신인 것은 둘째 문제고, 타란의 젊은 공작은 노부인의 자존심을 허허 웃으며 관대히 용납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뻗대다가는 본전도 못 건진다는 걸 알고 있기에 순순히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은근히 기분이 상했는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는 공작부인을 보자 마음이 풀어졌다.

“마님께 가르침을 드릴 수 있다면 큰 영광이지요.”

“감사한 말씀이네요. 부족한 점이 많은 제자라 스승께 큰 심려가 될까 걱정이에요. 이리로 오세요.”

응접실에 마주 앉고 곧 하녀가 차를 내왔다. 루시아는 차를 마시는 미셀을 보며 감탄했다. 차를 마시는 모습이 저렇게 우아할 수도 있구나. 손짓 하나조차 쓸데없는 움직임은 용납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제가 변변히 배운 것이 없어요. 공작가 안주인이라는 자리를 맡기에 부족함이 많아서 전하께 청했더니 코르잔 백작부인을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백작부인을 청해달라고 말씀드렸어요. 대단히 바쁘신 분이라 들었는데 혹여 일정에 방해가 되었다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려요. 아, 혹시 제 말투나 하는 행동이 예의에 어긋나도 말씀해 주세요.”

고집스럽게 꽉 다물었던 미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예절에 관해서는 마님께서는 이미 더 배우실 것이 없습니다. 예의의 본질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지요.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는 마음을 배우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예절이랍니다. 마님께서는 이미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계시니 무엇을 더할 것이 있겠습니까.”

“과찬이세요.”

루시아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미셀은 어여쁜 손녀라도 보는 것처럼 흐뭇하게 웃었다. 공주라기에 어지간히 오만하겠구나 생각했다. 자신이 사교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으니, 기선 제압을 위해 불러들인 것으로 짐작했다.

미셀은 타란 공작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절대로 생각지 않았다. 그녀의 자식이건 손자이건 타란 공작을 귀감으로 삼기를 바라지 않는다. 유능하다고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

공작은 오만하고 독단적이며 사람과의 교류를 하찮게 여겼다. 그나마 사람 보는 눈만큼은 발군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런데 이제 보니 여자 보는 눈도 제법이었다.

‘공작께서 좋은 아내를 얻으셨군.’

수많은 사람들을 봐왔기에 한눈에 어떤 사람인지 눈에 보였다. 공작부인은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이었다.

혹자는 과거 화려했던 공작의 여성편력 때문에 눈부신 미녀와 결혼할 거라 떠들었지만 뭘 모르는 소리였다. 공작은 대단히 냉정하고 이득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남자였다. 그래서 공작의 결혼 소식을 듣고 말 잘 듣고 성가시지 않은 선에서 적당한 수준으로 아내감을 골랐다고 생각했다.

미셀은 결혼한 공작에게 주제넘은 조언을 한마디 꼭 건네려고 벼르고 있었다.

‘공작부인께 사랑을 주세요. 뜨거운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버려두지는 마세요. 안주인이 편안하지 못하면 가문이 흔들립니다.’

애정을 받지 못하는 여자는 자신의 자리에 불안을 느끼고 자존심만 살아서 잔뜩 가시를 세운다. 안주인이 신경을 곤두세우면 집안 분위기도 편치 못했다. 집이 불편한 남자는 밖으로 나돌고 악순환의 계속이었다.

미셀은 자신의 예상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공작부인의 얼굴에는 불안도 우울도 보이지 않았다. 충분한 애정을 받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혼인하신 지 두 달쯤 되셨던가요.”

“네.”

“그럼 이제 외부 활동을 하실 때도 되셨군요. 시작은 가볍게 티파티가 좋습니다.”

“규모는 어느 정도가 좋을까요?”

“시작이니 작아도 괜찮습니다. 열 명 내외로 공작 전하의 봉신들 부인 위주로 초대하시지요. 누구를 초대할지는 집사에게 물어도 되실 겁니다. 공작 전하의 집사는 유능하지요.”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롬은 확실히 유능했다.

“사실 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일이 벅차요. 무도회 같은 것을 반드시 열어야 하는 건가요?”

“공작가 안주인이시라고 해서 반드시 사교계 중심이 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사교 활동이란 적성에 맞아야 하지요. 그렇다고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적당한 정도로만 하셔도 됩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여자들만 초대하는 티파티나 정원파티를 여세요. 인원은 열 명 내외에서 가끔은 서른 명까지 규모를 확대하는 것이 좋지요.”

코르잔 백작부인의 가르침은 대화를 통해 조언을 해주는 방식이었다. 두 시간 가까이 걸친 대화에서 루시아는 몰랐던 것을 배우고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아한 말투에 듣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은 화교술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백작부인에게 루시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마음이 움직인 쪽은 미셀도 마찬가지였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미셀은 루시아의 온화하고 악의 없는 성품에 반했다.

“마님께서 말벗이 필요하시다면 조카아이를 소개해 드리고 싶군요. 행실은 비록 우아하지 못하지만 성품은 밝고 꾸밈이 없지요. 마님께서 북부 생활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도록 그 아이가 많은 도움이 되어드릴 겁니다.”

“감사한 말씀이군요.”

루시아는 생긋 웃으며 말했으나 미셀은 루시아의 주저하는 마음을 예민하게 파악했다.

“마님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리는 제안이었나 봅니다.”

“…솔직히 제 기분을 살피는 친구를 곁에 두는 일이 내키지 않아요.”

“호호호, 마님은 참 솔직하시군요. 케이트는, 아, 그 아이 이름이 케이트랍니다. 케이트가 마님의 기분을 살피는 미덕을 갖추었다면 차라리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워낙 사고를 많이 쳐서 말이지요.”

“사고를 쳐요?”

“얼마 전에는 제 친구의 약혼자가 바람을 피워서 친구를 기만했다며 망신을 주었지요. 글쎄, 구덩이를 파서 말똥을 가득 채워 빠뜨렸답니다.”

“어머나!”

“누군가 그 아이 이름만 말하면 또 무슨 사고를 쳤나 싶어 머리가 지끈거리지요.”

“하지만 조카를 사랑하시는군요.”

미셀은 빙그레 웃었다. 눈에는 조카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매력적인 숙녀분일 것 같아요. 언제고 인사를 나누고 싶네요.”

“마님께 좋은 상담가가 되어드릴 겁니다. 사랑으로 마음 앓는 아가씨들을 상담하는 일이 그 아이 취미거든요.”

“하지만 전 이미 결혼했는걸요.”

“결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에요. 혼인하시기 전에 전하와 얼마간 교제를 하셨나요?”

“교제…요?”

생각해 보니까 그와 교제라고 할 만한 만남은 없었다. 만나자마자 청혼했고, 두 번째 만남에서는 계약서를 나누었으며, 세 번째 만남에서는 빨래를 하다가 그에게 걸려 야단 비스름한 말을 들었다. 그다음엔 혼인증서에 서명했지.

“음……. 결혼 전에 전하를 세 번 뵈었어요.”

찻잔을 든 미셀의 손이 잠시 멈칫하더니 찻잔을 내려놓았다.

“세간에서 전하를 어찌 평하는지 말씀드려도 될까요? 사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상당한 모험이지요. 부군에 대한 험담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마님께서는 전하를 잘 알지 못하고 혼인하신 듯해서 조금 안타깝군요.”

“말씀해 주세요. 마음에 담아두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그럼 먼저, 마님께서 평하는 공작 전하는 어떤 분인지 말씀해 보시겠어요?”

“솔직…히요?”

“네. 솔직히.”

“으음. 그분은… 변덕이 심한 건 아니지만… 멋대로세요. 맺고 끊는 것은 확실하시죠. 고개를 돌리면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으시겠지요. 무심하고 차가운 분이에요.”

“이런, 괜한 말씀을 드렸군요. 마님께서 아주 잘 알고 계시네요.”

타란 공작의 껍데기만 보면 그보다 최상은 없었다. 근사한 외모의 젊은 권력자는 여자들의 환상을 키운다. 타란 공작이 오랫동안 북부를 떠나 있으면서 관심이 시들해졌지만, 한때는 대단했었다. 그때는 공작이 작위를 승계하기 전이었다.

북부 사교계의 과감한 미혼 아가씨들은 몸을 던져 공작가의 젊은 후계를 유혹했다. 그와 하룻밤을 보내는 여자들은 곧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처럼 착각에 빠졌다. 착각에서 벗어나는 건 금방이었다. 여자가 먼저 상처받아 떨어지거나 조금이라도 애정을 갈구하기 시작하면 가차 없이 버려졌다.

미셀의 가르침을 받던 수많은 아가씨들이 그렇게 상처받아 미셀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 덕분에 미셀은 타란 공작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 없으면서 공작의 여성 편력과 무심하고 차가운 본성을 알 수 있었다.

공작부부는 혼인한 지 두 달 남짓 되었다. 신혼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시기였다. 그런데 공작부인은 꽤 정확하게 공작을 파악하고 있었다. 공작부인이 남편에게 푹 빠져있지 않다는 방증이었다. 미셀은 그것이 놀랍고 유쾌했다.

“훌륭하세요. 마님은 자신을 잊지 않고 계시는군요. 여자란 참 슬픈 존재지요. 마음을 주면 그 대상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 대상이 사라지면 홀로 서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답니다.”

루시아는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을 들었으나 그리 기쁘지는 않았다. 루시아가 자신을 잊지 않을 수 있는 건 애초에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편과 지나치게 거리를 두어서도 안 됩니다. 적절한 거리 유지가 참 중요한 것이지요.”

“거리 유지…….”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한 질문을 드릴게요. 전하께서 일주일에 침실은 몇 번이나 찾으시지요?”

“네? 아…….”

루시아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매일… 오세요.”

미셀의 눈이 살짝 커졌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그렇군요.’ 하고 대답했다.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빠진 쪽이 오히려 공작이었다니. 혼자였다면 미셀은 웃음이라도 터뜨렸을 것이다.

순진해 보이는 공작부인이 새삼 달리 보였다. 갖지 못한 것에 더 애가 타는 것이 사내들이라 공작부인이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에 공작이 애가 단 것이 분명했다.

“적당한 거리 유지라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차차 말씀드리지요.”

미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마님께는 더 가르쳐드릴 것이 없는 것 같군요.’

공작부부 사이의 무게추가 시간이 갈수록 공작부인 쪽으로 기울 것이 빤히 보였다. 그건 수많은 남녀 사이를 상담하고 직접 지켜보기도 한 미셀이었기에 가능한 추측이었다. 단 하나 미셀이 도무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대체 이분의 어떤 매력이 공작을 흔들었을까…….’

아내의 마성의 몸에 홀딱 빠져있다는 것을 백작부인은 당연히 알 수 없었다. 빠진 정도를 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미셀은 이후에 정기적으로 방문하기로 했다. 그리고 약 일주일 후 첫 티파티를 열기로 날을 정했다.

* * *

“마님.”

하녀가 조심스럽게, 그러나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회임하신 것이 아닌지요?”

“회임?”

루시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얼토당토않은 말을 한다는 표정이었다.

“두 달 넘도록 달손님이 없으십니다. 혹시 모르니 진찰을 받아보심이 어떠십니까?”

주인의 건강을 살피는 일은 시중드는 하녀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두 달이나 지나서야 주인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음을 발견했다는 것은 심각한 업무 유기였다.

만약 특정한 하녀가 계속 루시아의 시중을 들었다면 알아차리는 것이 훨씬 빨랐을 것이다. 그런데 하녀들은 며칠씩 돌아가며 시중을 들었다. 다른 하녀가 달손님 시중을 들었으려니 했다. 그래도 본연의 직무를 잊지 않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구도 그런 시중을 든 적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녀들은 모두 식겁했다.

가장 먼저 의심되는 쪽은 임신이었다. 공작부부 사이가 뜨겁다는 건 로암의 내성 사람들이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아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루시아는 조금의 흥분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대꾸했다.

“하오나 마님. 그래도 의사를 불러 보이시는 것이…….”

“되었다 하지 않았니.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예. 마님.”

하녀는 물러갔지만 그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마님이 회임했고, 그 상태를 모르는 상태로 두었다가 아기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하녀들은 단단히 경을 치게 될 것이다. 안절부절못하다가 쪼르르 제롬에게 가서 고했다.

“마님. 하녀에게 말을 들어보니 건강에 문제가 있으시다는 것 같았습니다.”

제롬이 와서 말을 꺼낸 순간 루시아의 얼굴에 언뜻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 제롬 뒤에 함께 서있는 하녀에게 그녀의 눈길이 잠시 멈추었다. 매섭게 노려본 건 아니었지만 하녀는 움츠러들었다. 어쩐지 처음 보는 마님 모습에 제롬은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님. 주치의가 마님을 불편하게 해드린 것이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말해 두지만 난 회임한 것이 아니고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이미 전하께서도 다 아시는 일이지요.”

제롬은 잠시 침묵하며 할 말을 골랐다.

“하오나 마님. 마님의 건강에 문제가 발생하면 저희는 큰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주인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이미 처음부터 그에게 아이를 갖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증명할 수 있느냐고만 물었을 뿐 그 이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인제 와서 새삼 그 말이 사실이었다고 말하는 것보다 그건 거짓말이었고 임신할 수 있다고 말하는 쪽이 훨씬 더 그를 놀라게 할 것이다.

“전하께서 아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에요. 하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마님께서 말씀드렸다는 것을 제가 어찌 확인하면 되겠습니까?”

요즘 루시아에게 한없이 순둥순둥해진 제롬이지만 그는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만 좋아서는 젊은 나이에 공작가의 이 엄청난 살림을 꾸릴 수는 없었다.

“…제롬이 있는 자리에서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그걸로 됐나요?”

“예, 마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집사의 일을 한 것뿐이겠지요. 하지만 저 아이.”

루시아 시선이 다시 하녀에게 꽂혔다.

“내게 두 번도 묻지 않고 바로 집사에게 달려갔군요. 나는 내 신변을 감시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지 않아요. 오늘로 내보내세요.”

“…예. 마님.”

하녀는 꺼멓게 죽은 낯빛으로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제롬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하녀는 우선순위를 잘못 두는 잘못을 했다. 마님보다 집사를 위에 둔 행동을 한 것이다. 본인의 책임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경솔했다.

착하고 순한 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맺고 끊는 것이 정확하다 못해 차가웠다. 아무래도 두 분은 천생연분 같았다. 낯선 마님의 모습에도 그저 흐뭇한 집사는 이미 팔불출이 거의 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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