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공작 부부 (1)
빗방울이 투두둑 창문을 때렸다. 응접실에 가득한 차향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오후의 느긋한 티타임이었다. 루시아는 2층 개인 응접실보다는 주로 1층의 손님용 응접실을 애용했다.
널찍한 응접실에 홀로 앉아 차를 마시는 지금 이 순간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이 고즈넉했다.
‘한 달…인가…….’
결혼한 날부터는 한 달, 북부에 위치한 타란 공작가문의 고성(古城) 로암에서 지낸 지는 약 3주가량 되었다. 수도 저택에서 그가 먼저 북부로 떠난 그날 이후 지금까지 그는 소식도 없다.
“마님. 오늘 저녁은 드시고 싶은 건 없으신지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매일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이었다. 루시아는 여기서 먹는 저녁보다 더 호사스럽고 고급스러운 요리를 맛본 적이 없었다.
제롬은 오늘의 간식으로 내온 과자를 먹어 치우는 루시아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처음에 공주님이 공작부인이 되신다는 말을 듣고 내심 걱정을 많이 했다. 까다로운 귀부인 변덕을 어찌 맞추어야 할까, 결혼하자마자 남편에게서 방치된 신부가 일으킬 히스테리를 어찌 감당할까, 뒷골이 지끈했었다.
그런 우려는 이미 로암으로 오는 여정 중에 털어버렸다. 오죽하면 기사들조차 이렇게 모시기 쉬운 분은 처음이라고 감탄했을까.
고작 공작의 정부에 불과했던 여자들조차도 하려던 짓을 공작부인은 전혀 하지 않았다. 고용인들 기세를 누른답시고 하는 일에 괜한 트집을 잡는다거나, 제롬과 기 싸움을 하려 하지 않았다. 알아서 맡기고 주는 대로 받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천성이 맑고 순한 분이었다. 제롬은 이런 분이 공작가 안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기꺼웠다.
부우웅…….
묵직한 고동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아가 놀라 제롬을 보았다. 그리고 제롬이 긴장한 것을 보고 더 놀랐다. 늘 조금의 여유를 지니고 있던 노련한 집사의 긴장은 루시아마저 긴장하게 하였다.
“주인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녀의 가슴이 콩콩 뛰기 시작했다.
“마님께서 굳이 나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일어나던 루시아는 어정쩡하게 반쯤 서있다가 다시 앉았다.
“다른 뜻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혹여 마님께서 놀라실까 봐 그럽니다.”
“놀라…다니요?”
“자세한 말씀을 마님께 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이번 외부 일정이 좀 험한 일이라… 대개 이런 때 귀환하시면 예민하십니다. 바로 목욕을 하러 들어가실 테니 그 후에 뵙는 것이 좋겠습니다.”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는 집사를 배웅했다. 그가 왜 이렇게 오래 떠나있어야 했는지, 정확히 영지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잘 모른다. 이것저것 사소한 것들은 캐고 다녔지만 정작 그가 하는 일은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다만, 우연히 기사들이 나누던 대화를 엿들은 적 있었다.
“죽었다고 봐야…….”
“주군께서……. 용서…….”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일부만 들을 수 있었지만 뭔가 사람들이 죽고 그 일에 공작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 정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야만족 문제일까?’
북부가 야만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건 제논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 야만족이 국경을 넘어 북부 이남의 사람들을 위협하지 못하는 건 모두 타란 공작가 덕이라고 입을 모았다.
‘야만족과 소규모 국지전이 벌어진다면……. 그것도 전쟁은 전쟁이네.’
전쟁은 먼 나라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바로 얼마 전 전쟁이 끝났지만 제논은 참전만 했을 뿐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전쟁터가 된 적은 없어서 직접 전쟁을 피부로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런데 북부는 늘 전시 상황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왜 잊고 있었을까.’
루시아의 남편이 된 휴고 타란 공작은 전쟁의 흑사자로 불리는 남자였다. 베어 죽인 자의 수를 셀 수도 없는 잔인한 학살자다.
* * *
휴고는 한 달 만에 모든 문제를 그의 방식으로 말끔히 해결했다. 졸지에 대부분 행정 인력을 잃고 무법 지역으로 변한 곳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자들의 고충은 휴고가 알 바 아니었다.
원래 그는 오랜만에 북부 전역을 다 돌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러려면 최소 반년 이상은 걸렸다. 그는 너무 길어지는 외유보다 귀환을 택했다. 비를 맞으며 말을 달려오느라 먼지가 섞인 빗물에 푹 젖은 모습으로 휴고는 로암에 당도했다.
“강녕하신 모습을 다시 뵈어 기쁩니다, 전하.”
나열해 서있는 고용인들을 배경으로 제롬은 정중히 예를 올리며 주인을 맞이했다. 공작에게서는 다가가면 베일 것 같은 사나운 기운이 넘실거렸다. 아직 살기가 갈무리되지 않아 그의 손에 죽어간 자들의 잔상이 넘실거렸다.
‘아무리 겪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군.’
제롬은 주인의 이런 모습에 위화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성, 혹은 저택이 생활 공간의 전부인 제롬은 기사로서 활약하는 타란 공작의 모습을 단 한 번도 실제로 보지 못했다.
제롬이 아는 공작은 빈틈없이 딱 떨어지는, 일상생활에서 반듯한 사람이었다. 화를 내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거의 없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정을 수행하는 관리 같았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공작의 다른 모습을 엿보는 순간마다 제롬은 바싹 긴장했다.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따끈한 목욕, 그리고 피로는 푸는 차 한 잔. 그러면 집사가 알고 있는 주인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별다른 일은?”
눈치 빠른 집사는 의례적 인사 속에 숨겨진 정말 주인이 묻고자 하는 것을 잡아냈다. 주인은 이전에는 이렇게 뭉뚱그려 안부를 물은 적이 없었다.
“따로 보고 드릴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마님께서도 평안하셨습니다. 전하를 마중하는 자리에는 제가 나오시지 말라고 전해 드렸습니다.”
“잘했군.”
그가 몸을 돌렸다.
“한 시간 후 회의다. 다들 들어오라고 해. 빠짐없이.”
목욕탕을 향해 사라지는 그의 뒤에 대고 제롬은 대답했다. 그리고 공작부인이 있을 응접실 방향으로 흘끔 시선을 돌렸다. 다 소집하라 하였으니 한두 시간으로 끝날 회의는 아닐 것이다. 간단하게나마 마님과 재회 인사 정도는 나누시면 좋을 것을.
‘당장 적군이 밀어닥치는 것도 아니고 회의는 좀 미루셔도 될 텐데.’
식이 끝나기 무섭게 부인을 영지로 끌고 내려와 성에 처박아놓고 소식 하나 없이 한 달 만에 돌아왔다. 누구라도 지나치다고 비난할 일이었다. 그래도 오자마자 마님 안부를 물은 것이 어딘가. 오랫동안 공작을 모셔온 제롬은 그 정도면 얼마나 대단한 관심인지 알고 있었다.
‘내가 괜한 의미를 둔 건 아닌 모양이야.’
“타란의 안주인이다. 예를 다해라.”
제롬은 공작이 남기고 간 한마디 속에 담긴 뜻을 경고로 유추해 냈다.
“주제 모르고 괜한 텃세 부렸다가는 다 죽는다.”
제롬은 공작의 경고를 무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철저하게 고용인들을 교육했다. 다행히 제롬은 주인의 뜻을 제대로 읽어낸 것 같다. 딱히 의무감 때문만이 아니라 제롬은 안주인이 되신 분을 진심으로 받들었다.
‘파비안은 지금쯤… 수도에 있으려나…….’
아무리 영지 내 일이라지만 영지민도 왕의 백성.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 일을 왕께 고하고 수습하는 협상의 임무를 띠고 파비안은 수도로 갔다. 수도로 가는 길에 파비안은 제롬에게 짧은 서신을 보냈다.
―그분께는 사람 목숨이 너무 가벼워.
파비안의 고뇌가 느껴지는 짧은 한 줄이었다. 제롬은 형제의 고뇌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어 미안했다. 집사인 제롬과 달리 전쟁터를 따라다니며 부관 노릇도 한 파비안은 공작이 수없이 많은 목숨을 앗는 것을 보았다. 직접 본 것과 말로만 전해 들은 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비안이 주인을 ‘폭군’이라 칭하는 것에는 동의했다. 겉으로는 경솔한 발언이라 나무랐으나 내심 같은 생각이었다. 탄압하고 착취해야 폭군이 아니다.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하며 거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면 그게 폭군인 것이다.
바로 얼마 전에도 목격했다. 공작의 갑작스러운 결혼에 기함했어도 누구도 공작에게 불만을 제기하지 못했다. 다들 엉뚱하게 제롬을 붙들고 늘어져서 주인의 결혼에 담긴 뜻을 파악하려고 했다.
제롬 역시 아는 바가 없었다. 파비안은 뭔가 알지도 모르지만 묻지 않았고, 파비안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들은 형제이지만 공과 사는 언제나 구별했다.
‘이 결혼이 전하께 조금이라도 의미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주인의 성정이 아주 조금이라도 유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 * *
접시에 칼이 부딪치는 작은 소음이 조용한 식당에 메아리쳤다. 루시아는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여린 송아지 고기로 구운 최고급 스테이크의 식감을 음미했다.
처음에 먹었을 때는 어찌나 감동이었는지 목으로 넘어가는 게 아까울 정도였는데 고작 몇 번 먹었다고 처음 느꼈던 감동은 파삭하게 바스러져 버렸다. 최고의 맛이라고 머리로는 인정해도 이제 더는 가슴에서 우러나지 않았다. 참 간사한 입맛이었다.
루시아 홀로 앉아있는 식탁은 스무 명쯤은 앉아도 충분할 만큼 길고 널찍했다. 그가 돌아왔지만 오늘 저녁도 루시아는 혼자 식사 중이었다. 소리가 울리는 넓은 식당은 루시아를 제외하면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 중인 하녀 둘뿐이었다.
낮에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만 전해 듣고 해가 지도록 그의 얼굴조차 구경 못 했다. 그는 목욕을 마치자마자 봉신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시작했고, 회의는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예 식사할 생각도 없는지 하인들은 안으로 부지런히 차와 샌드위치를 날랐다. 처음에는 기다리려 했는데 집사가 먼저 드시는 것이 좋겠다고 권해 어쩔 수 없이 조금 늦은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그는 정말 바쁘구나…….’
그와 알콩달콩한 신혼을 보낼 것이라고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집에 사니 자주 얼굴을 마주치고 몇 마디 말이라도 나누며 편한 사이로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했던 생각은 헛된 망상이었다.
한집이라고 해도 생활공간 자체가 다른 이상 우연히 마주칠 일은 의도적으로가 아니고서는 힘들 것 같다.
‘그에게 가족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부모든 형제든 누군가 있으면 그들과 친해지는 노력이라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그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안타까운 것과는 별개로 기숙학교에 있다던 그의 아들이 보고 싶어졌다.
다행히 그녀는 외로움을 타는 편이 아니었다. 나름 꽤 독립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혼자서 뭐든 잘하는 편이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왔다. 다만, 지나치게 무료한 것이 조금 힘들었다.
원래 그녀는 늘 분주했다. 별궁을 쓸고 닦고, 때 되면 식사를 준비하고 가끔은 외출도 하고. 그러면 하루가 순식간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의 생활은 편하다 못해 너무 할 일이 없었다.
접시에는 아직 스테이크가 반이나 더 남아있었다. 그런데 더는 입맛이 돌지 않았다. 진짜 아깝지만 더 먹었다가는 체할 것 같았다.
‘그냥 다 먹어버릴까, 먹고 나서 체해서 밤새 고생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음식을 남기다니, 그것도 이런 최고급 스테이크를. 벌써 사치에 빠져버린 건가.’
복잡한 기분으로 접시를 노려보았다.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아니에요. 오늘도 최고였다고 요리장에게 전해주세요. 그냥 조금……. 오늘은 배가 부르네요. 아까 과자를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루시아는 매번 오후에 내오는 간식을 거의 다 먹어 치우고 저녁도 싹 비웠다. 그런데 오늘은 그 간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롬은 굳이 상기시키지 않았다.
“아직도 비가 오나요?”
“예, 아마 밤새 내릴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비가 안 오면 볼품없는 정원에라도 나가 산책이라도 할 텐데. 유난히 오늘 하루는 길다고 생각하면서 루시아가 일어났다.
“올라가 볼게요.”
“차를 올려 드릴까요?”
“부탁해요. 아, 아니에요. 서재에 있을 생각이에요. 차는 나중에.”
“예. 마님.”
로암에서 루시아의 마음에 드는 곳 중 하나는 휴고의 서재였다. 까마득한 높이의 돔형 천장 서재는 남향 벽이 거대한 반투명 창이라 해질 무렵까지 햇빛이 들어와 내부가 환했다. 다른 삼면 벽은 천장에 닿도록 책장이 꽉 들어찼다. 벽은 세 개의 층으로 나누어서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 너비로 난간이 달렸다. 계단을 통해서 오르내릴 수 있었다.
왼쪽에는 문이 없는 방이 하나 연결되었고, 그 안은 소파와 침대 등으로 쉴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오른쪽의 방은 굳게 잠겨있었다. 제롬의 말로는 타란 공작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 등이 보관되어 있으며 오직 공작만 들어갈 수 있고, 제롬 자신 역시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상상 속에서 그려보던 환상적인 서재였다.
수도 저택에도 비슷한 규모의 서재가 있고 책은 두 권을 구매해서 한 권은 이곳에, 한 권은 수도 저택에 비치한다고 했다. 수도 저택에도 있는 줄 알았으면 가볼 것을. 거의 침대에만 있느라 서재가 있는 줄도 몰랐다.
서재를 채우고 있는 책들은 정치, 경제, 역사, 문학 등 장르가 매우 다양했다. 아마 그의 독서 습관에 편식은 없는 모양이었다. 루시아는 그중에서도 문학을 가장 좋아했다. 그 역시도 문학을 좋아하는지 다른 나라 작가의 번역서도 상당히 많았다.
“어제 읽던 책이……. 찾았다.”
루시아는 감히 이곳의 책을 서재 밖으로 가지고 나갈 엄두는 내지 못해서 오직 서재 안에서만 얌전히 읽었다. 혹시 책에 흘리기라도 할까 봐 서재에 있을 때는 차도 마시지 않았다.
서재에 들어와도 된다고 그에게 직접 허락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집사가 괜찮다고 해서 넙죽 들어오기는 했는데 혹시 그가 불쾌해하는 건 아닐까 조금은 걱정이었다.
서재 특유의 종이 냄새에 파묻혀 책에 빠져들었다. 거의 다 읽던 책이라 30여 분 정도 만에 마지막 장을 넘겼다. 끝, 이라는 마침표를 보면서 루시아는 천천히 표지를 닫았다.
‘괜찮았어. 조금 중간중간 지루하긴 했지만 잔잔하네. 이 작가의 다른 책을 더 읽어볼까.’
루시아는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고 책장을 살펴보았다. 잘 정리된 서재라서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어쩐지 끌리는 제목의 책이 있는데 문제는 그 책이 루시아의 시선보다 꽤 높게 있다는 것이었다. 손을 뻗어보자 간신히 손에 닿았다. 발끝을 올리면 꺼낼 수 있을 것 같다.
‘조금만 더. 조금만…….’
루시아는 낑낑거리며 시도했다. 될 듯 말 듯 애를 태우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진다. 한쪽 팔이 부드럽게 루시아의 허리를 감싸 등 뒤로 단단한 가슴에 기대어졌다. 순식간에 풍기는 특유의 체취에 눈앞이 어지럽다. 다른 한쪽 팔이 루시아가 그토록 힘겹게 공략하던 책을 손쉽게 빼냈다.
“이것?”
머리 위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음성에 루시아는 흠칫했다. 약간 낮고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는 귀에 착 감겼다. 루시아는 반사적으로 그의 품에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체취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지나치게 빨리 깨달은 자신에게 충격을 받았다.
‘기다…렸구나. 이 남자를.’
그녀는 그가 없는 로암에서 잘 먹고 잘 자며 매우 잘 지냈다. 정말 스스로 놀랄 정도로 훌륭히 적응했다. 그래서 그가 없는 동안 그다지 그를 의식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딱히 그를 애타게 그리워하거나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를 보면서 루시아의 심장은 순수하게 환호하고 있었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뛰는 심장이 그에게 들킬까 봐 조심스러웠다.
“감사…해요.”
그가 내미는 책을 받아 품으로 안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데인 것처럼 놀라는 루시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못마땅한 빛이 떠올랐다. 잠깐 허리를 감았을 뿐인데 손에 느꼈던 부드러운 감각이 잔상처럼 남아 주먹을 꽉 쥐었다.
‘회의는 끝난 걸까, 아니면 잠시 휴식 시간인가? 잘 다녀오셨냐고 인사를 해야 하나. 뭐라고 말을 시작해야 하지……?’
순식간에 수십 가지 질문에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나 무엇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목 안으로 삼켰다.
“돌아와서 인사가 너무 늦은 것 같군.”
그가 먼저 대화의 물꼬를 열자 루시아는 막힌 숨이 트였다.
“바쁘신데 당연하지요. 회…의는 다 끝나신 건가요?”
“오늘은.”
“서… 성이 굉장히 근사해요. 너무 넓어서… 하루 만에 다 돌아보지도 못했어요.”
“지내다 보면 어차피 다니던 곳만 다니게 되어있어.”
“아……. 네. 그렇겠지요.”
“저녁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던데.”
“많이 먹었어요. 그게……. 매일 입맛이 마구 돌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오늘은 입맛이 없었다는 건가?”
“예? 아……. 조금은…….”
“맛이 별로였나?”
“주방장 솜씨는 최고예요.”
“누가 불쾌하게 했다거나.”
“정말 정말 친절해요. 모두.”
나른하게 귀에 감기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루시아는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어쩐지 사실은 조금 맛이 없고 조금 불친절했다고 해도 그걸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물론 음식은 맛있었고 로암의 모든 사람들은 친절했다.
그가 조금씩 다가왔다. 주춤거리며 조금씩 뒷걸음질하던 루시아는 결국 책장을 등 뒤에 대고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가 바짝 다가와 한쪽 팔로 책장을 짚고 마치 루시아를 가두는 것처럼 서서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
소리가 들릴 것처럼 거세게 뛰는 심장이 아팠다. 한 달 전의 일이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그의 압도적으로 강한 힘과, 그의 무게에 짓눌린 몸 안으로 파고들던 날카롭던 통증을 떠올리자 오싹했다. 음탕한 여자가 된 것 같아 당혹스러웠다.
“날 봐.”
눈을 피해 시선을 아래에서 이리저리 돌리고 있던 루시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한참 뒤로 꺾어야 할 정도로 그는 루시아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거대했다.
살짝 내리뜬 붉은 눈동자는 피를 머금은 유리알처럼 선명했다. 열정과 뜨거움을 상징하는 붉은색에서 한기가 느껴진다는 건 참 기이한 기분이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핏빛의 눈동자에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나와 있으면 불편해?”
“…불편한 건 아닌데 좀 당황스러워요.”
“무엇 때문에?”
“전… 아무래도 어색한데 전하께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요. 한 달 만에 뵙는 거고…….”
“한 달 만에 왔다고 바가지 긁는 거야?”
“그게 아니라……!”
그가 입술 끝을 늘리며 웃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야릇해서 루시아는 심장이 덜컹했다. 긴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가 고개를 숙여 다가와 바싹 가까이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입술이 닿는 순간 루시아는 쿵쾅거리던 심장이 콱 쥐어 잡혀 멈추는 것 같아서 눈을 감았다.
아랫입술을 살짝 빨아들인 그가 살짝 깨물자 놀라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단번에 깊숙이 그의 혀가 입안을 점령했다. 뜨거운 살덩이가 부드럽게 잇몸을 훑으며 천장을 간질였다. 혀끝이 그의 혀와 얽히자 짜릿한 감각에 목에서 신음이 흘렀다.
그가 루시아의 뒷목을 받치고 더 깊이 키스했다. 타액이 섞이는 질척한 소리에 루시아는 얼굴에서 점점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배회하던 두 손이 자신도 모르게 그의 목을 감자 그의 팔이 강하게 그녀의 허리를 바싹 끌어안았다.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뜨겁지만 청량감이 느껴지는, 어쩐지 정중한 그의 키스가 조금은 더 거칠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타인과 혀를 맞대며 타액을 교환하는 이 행위가 이렇게 기분을 들뜨게 하는 것인 줄 몰랐다.
꽤 긴 키스를 마치고 그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루시아는 달음박질한 것처럼 가쁘게 호흡했다. 정말로 신체적으로 숨이 막혀서 그런 것인지 분위기에 숨이 막힌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반쯤 나갔던 정신은 그가 목덜미를 깨물었을 때 반짝 깨어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그의 다리 하나가 루시아의 무릎을 가르고 들어와 두 사람의 복부가 맞닿아있고 그의 팔은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단단히 안고 있었다.
어느새 떨어뜨린 책은 바닥에서 뒹굴었다. 코앞에 바싹 다가와있는 그의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잔잔했지만 루시아는 그 안에 이글거리는 무언가를 보았다.
갑자기 천장이 빙글 돌았다. 그가 루시아를 안아 들고 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서재와 연결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제 몸을 타고 오르는 그를 멍하게 보던 루시아가 그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을 안으려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잠깐… 잠깐요!”
그는 그 잠깐 사이에 순식간에 루시아의 가슴을 거의 다 풀어헤쳐 놓았다. 선뜩한 차가운 공기가 맨가슴에 닿는 것을 느끼며 그보다 더 섬뜩한 한기를 느꼈다.
‘아픈 건 싫어!’
무서웠다. 루시아는 두 팔을 교차해 가슴을 가렸다.
“씻고… 씻고 나서요.”
루시아 입에서 나온 핑계는 속마음과 달랐으나 막상 해놓고 보니 제법 그럴듯했다.
“목욕했어.”
“저 말이에요. 저!”
“상관없어.”
“전 상관있어요! 전하……. 휴. 제발…….”
아침에는 세수만 했다. 오늘은 비가 와서 날씨가 눅눅해서인지 몸도 눅눅한 기분이었다. 무서운 것도 무서운 거지만 절대 이런 꿉꿉한 기분 상태로 그와 맨몸으로 뒹굴 수 없었다.
그의 눈썹이 스윽 올라가더니 순순히 비켜나 그녀가 일어날 수 있도록 손까지 잡아주었다.
루시아는 재빠르게 옷을 추스르고 일어나 쏜살같이 서재를 빠져나갔다. 늑대에게 목덜미를 물렸다가 간신히 풀려난 토끼처럼 달아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온몸에 들끓어 오르는 욕망을 간신히 내리눌렀다. 울 것처럼 일렁거리는 호박색 눈동자를 떠올리자 간신히 누른 아랫배의 열기가 다시 치밀었다.
어차피 도망갈 곳은 없었다. 그녀의 행동 범위는 오로지 로암 내부일 터였다. 그녀는 그의 아내이니까.
아내.
휴고는 그 단어가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 ‘아내’라는 명칭을 달고 있는 당사자가 그녀라는 점은 더 마음에 들었다.
휴고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뭔가 일이 풀리지 않을 때의 습관 같은 행동이다. 그는 지금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녀를 안고 싶다. 그녀의 좁은 안으로 파고들고 싶다. 뜨겁고 습하던 그 안을 떠올리기만 해도 아랫배가 지끈했다. 그녀에게 욕정하고 있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왜 그러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뗄 수 없는 대단한 미녀는 아니었다. 능숙하게 침대 위에서 즐길 줄 아는 여자도 아니었다. 초야에 그녀는 긴장해서 바들바들 떨었고 아파하며 뻣뻣하게 굳어 끙끙거렸다. 그의 몸에 손을 대면 마치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그와 닿을 때마다 움찔거렸다. 그는 마음껏 욕망을 풀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그녀의 안은 기가 막히게 좋았다. 들어가는 순간의 그 압박과 뜨거움, 파도를 치는 것처럼 그의 것을 물고 자극하는 안쪽이 그를 미치게 했다. 그의 움직임에 애써 따라오려는 그녀의 서툰 자극은 그의 마지막 인내심마저 끊어버렸다.
그는 단 한 번도 침대에서의 일을 침대 밖으로 가져간 적이 없었다. 아무리 뜨거운 정사도 침대에서 내려오면 싹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녀의 잔상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헐떡이던 신음, 그가 안으로 진입할 때마다 그의 어깨를 잡았던 그녀의 손끝에 들어가던 힘, 그의 것을 감싸던 내벽, 눈물 가득한 눈동자. 특히 그의 팔에 앙증맞게 남은 그녀의 잇자국을 볼 때마다 허리가 뻐근해지곤 했다.
그에게 정사의 쾌감은 살육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몸속의 피는 피를 갈구한다. 열기를 식히기 위해 1년 내내 사람을 죽이고 다닐 수 없으니 그는 그걸 여자를 품어 풀어냈다. 그래서 사냥을 할 때는 굳이 여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는 밤마다 그녀가 떠올라 하복부가 욱신거려서 뒤척이기 일쑤였고, 그렇다고 딴 여자를 안아 풀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가 북부 전역을 돌겠다는 계획을 취소하고 서둘러 귀환한 건 그래서였다. 그는 내내 몸이 달아있었다.
그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의 몸이 정말 그렇게 달콤한지. 어설프게 맛봐서 그저 미련이 남아있는 것뿐인지. 후자라면 그저 미련만 사라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전자라면 나름대로 문제였다.
아무리 육체적인 끌림이라 해도 지금껏 그런 이유조차로 그를 흔든 여자는 없었다. 그는 그 무슨 이유에서든 자신을 흔드는 것이 있다는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서재로 나갔다. 아까 그녀가 들고 있다가 떨어뜨린 책을 주워 들었다. 구겨진 책장을 대충 펴서 빈자리에 꽂으려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읽으려던 것 같으니 나중에 가져가겠지.
‘서재에… 계십니다.’
제롬이 어쩐지 망설이며 고하던 이유를 알고 있었다. 평소 그가 서재에 누군가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서재는 외부와 단절된, 유일한 그의 개인 공간이었다. 가끔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숨을 돌릴 곳이 필요했다. 서재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지 않지만, 그가 서재에 들어가있는 동안에는 어지간히 다급한 일이 아니면 보고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서재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다지 언짢지 않았다. 그뿐인가. 서재 침대에서 그녀를 안으려 했다. 이전에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녀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을 결심한 것부터가 이미 그답지 않았다. 거기서부터 뭔가가 어긋나기 시작한 걸까. 이 상태가 좋은지 싫은지조차도 확실하지 않아 그게 가장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전하, 제롬입니다.’ 하는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제롬은 들어오자마자 재빠르게 주인의 안색을 살폈다. 마님께서 서재를 거의 뛰쳐나오다시피 하시더니 침실로 들어가시더라. 목욕물을 준비하러 가던 하녀들이 귀띔해 주었다. 더불어 마님 표정이 어쩐지 굳어있었다는 나름대로 추측도 덧붙였다.
제롬은 마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살피고 있었다. 감시가 목적이 아니라 세심한 보살핌을 위해서였다. 아직 이곳이 낯설 공작부인을 위해서 당분간 그럴 생각이었다. 그건 분명히 공작가 안주인에 대한 집사의 도리에서는 한 걸음 정도 더 앞서 나간 일이었다.
그는 괜한 오지랖이 넓은 사람도 아니고 과잉 충성으로 쓸데없이 기를 소모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하지만 더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런 수고를 하는 건 공작가 새로운 안주인이 흡족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공작가의 평온함을 깨뜨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예민한 사냥개처럼 파악했다.
제롬은 안주인이 들어와서인지 삭막하던 성에 그런대로 활기가 도는 것이 기꺼웠다. 마님 시중을 들게 하려고 하녀들을 다수 들인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사내들만 득실거리던 성에 젊은 여자들이 많아지자 딱딱하기만 했던 하인들의 얼굴 표정도 풀린 것이 눈에 보였다. 벌써 연애질하는 몇이 있었지만 눈감아주고 있었다.
“전하. 마님께 서재에 들어가셔도 된다고 말씀드린 것은 저입니다. 혹여 제가 주제넘었다면…….”
“공작가 안주인으로서 평한다면?”
자신의 사죄에는 가타부타 말이 없고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휴고의 태도에 제롬은 당황하지 않았다. 공작은 듣고 싶은 말을 모두 해주는 친절한 주인이 아니었다.
“어찌 감히 평가를 드릴 수 있겠는가마는 모두 마님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모두?”
‘네가 그런 게 아니라?’ 하고 묻는 것처럼 그는 피식 웃었다.
제롬이 자진해서 추궁하지도 않은 일을 제 잘못으로 말하고 있었다. 혹시 자신이 그것 때문에 그녀에게 화를 냈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아까 회의가 끝나자마자 마님께서 평소와 달리 저녁을 거의 잘 못 드셨다고 쪼르르 와서 전한 것도 제롬이었다.
그 말을 듣고 휴고는 조금 걱정이 되면서도 그녀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마무리는 잠시 미루고 곧장 그녀가 있다는 서재로 올라왔다.
제롬은 유능했고 그 유능함의 핵심은 맺고 끊음이 확실한 태도였다. 그래서 묘한 기분이었다. 제롬은 그의 여자라고 친절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과거에 그가 만났던 귀부인들 속을 은근히 긁어대곤 했다.
그가 교제한 여자 치고 제롬을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여자는 제롬의 얼굴에 주스를 끼얹기도 했다. 제롬의 험담을 휴고의 귀에 속살거리던 여자도 있었다. 물론 잘려나가는 쪽은 제롬이 아니라 여자들 쪽이었지만.
“왜?”
“공작가 안주인으로서 충분한 위엄을 갖추고 계십니다. 아랫사람을 함부로 다루시지 않습니다. 좋고 싫은 기호는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지만 괜한 트집은 잡지 않으십니다. 한편으로 하녀들을 적당히 단속해 하녀들이 지나치게 편하게 생각해 기어오르는 여지도 두지 않으십니다.”
“그래……?”
그건 또 의외였다. 그녀는 왠지 하녀들에게도 그저 마음 좋은 주인이기만 할 것 같았는데 어린 나이에 비해 사람을 다루는 수단이 제법인 모양이었다. 안 그러면 제롬이 저렇게 그녀를 두고 찬사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뭐 하고 있지?”
더 했다가는 아예 제롬이 그녀를 두고 찬가라도 부를 기세라 그만 끊어냈다.
“목욕 중이십니다.”
그의 입술 끝이 만족스럽게 휘었다. 행동이 굼뜨지 않은 점은 확실히 마음에 들었다.
“마님께서 차를 올려달라고 하셨습니다. 두 분 차를 함께 올리겠습니다.”
두 분이 오붓하게 티타임을 즐기며 돈독한 정을 쌓음이 어떤지 슬쩍 주인 속을 떠보았다. 이번만큼은 제롬은 주인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주인이 원하는 건 차 따위가 아니었다.
“올리지 마.”
제롬의 입가가 굳었다.
“방해하지 마라.”
굳어진 제롬의 입가가 풀리더니 대답처럼 고개를 숙였다.
“아침에 깨우러 오지도 말고.”
“분부 받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