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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아-9화 (10/77)

9장 초야 (3)

침대에 누워있던 휴고는 미간에 살짝 주름을 만들며 눈을 떴다. 이미 아까부터 잠에서 깨있던 그의 눈동자에 또렷하게 초점이 잡혔다. 기척에 예민한 그는 루시아가 끙끙대며 일어날 때부터 깨어있었다.

‘대체 뭘 하는 건지.’

침대 아래로 털썩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이후 조용했다. 그는 이불을 걷어내며 일어났다. 자다 깬 사람답지 않은 가볍고 날렵한 동작이었다. 침대를 내려가 빙 둘러 그녀 뒤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는 침대를 붙들고 일어나려고 낑낑거렸다. 그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베푸는 일에 익숙지 않지만 도무지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다가가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어…….”

돌아보는 호박색 눈동자가 크게 떠져서 텅 빈 침대 위와 그를 번갈아 왔다 갔다 했다.

“잠버릇이 험하군. 이 넓은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다니.”

잠에서 깬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근사하다고, 잠시 넋 놓았던 루시아는 재빨리 정신을 챙겼다.

“아… 아니에요!”

그의 한쪽 팔이 감싼 부근에 후끈 열이 날 것 같아서 루시아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기는커녕 오히려 그녀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느끼고 버둥거리기를 포기했다.

“그럼 몽유병인가?”

“물을 마시려고 일어나다가…….”

루시아는 어쩐지 조금 민망해서 고개를 숙이고 작게 중얼거렸다.

“걷는 게… 좀 힘들어서…….”

머리 위에서 작게 그의 한숨이 흘렀다. 성큼 그가 걸음을 옮겼다. 침대 밑에 둥글게 깔린 러그가 끝나는 근처에 벗어둔 슬리퍼를 신고 걸었다. 버적버적 소리가 울렸다.

‘아……. 어제 유리컵을 깨뜨렸지…….’

잊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아마 맨발로 걷다가 유리 조각을 밟았을 것이다.

그는 루시아를 한쪽 팔만으로 안아 든 상태로 테이블 앞에 멈추었다. 그런 다음 물을 따른 유리잔을 건네주었다.

“이번에는 떨어뜨리지 마.”

“…네.”

그는 자꾸 자신을 놀려댔다. 칫, 입안으로 투덜거리며 유리잔을 받았다.

그가 덩치만큼 힘도 세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그는 그녀를 마치 어린아이처럼 가볍게 다루고 있었다. 한쪽 팔로만 엉덩이와 허벅지를 받쳐 들고 있는데 굉장히 안정감이 있었다.

“감사…해요.”

빈 잔을 받아 다시 테이블로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다른 건?”

“…네?”

“화장실도 데려다줄까?”

“아뇨!!”

루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바락 소리쳤다. 마주친 그의 붉은 눈이 어쩐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짙은 검은 머리카락이 평소에 정갈하게 정리된 것과 다르게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는 것이 신기했다. 루시아는 손을 들어 흘러내린 그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의 미간이 살짝 꿈틀했다.

얼떨결에 한 행동이라 조금 부끄럽고 어쩐지 집요한 그의 시선이 버거웠다. 고개를 숙인 루시아는 흠칫했다. 가슴이 반쯤 드러나 유륜이 살짝 보였다. 아까 풀고 대충 느슨히 묶었던 허리끈이 풀어져 있었다. 귓가가 후끈거렸다.

루시아는 재빨리 앞섶을 잡아당겨 가슴을 여미려 했다. 그러나 그가 안고 있는 손에 옷자락이 밀려 잡혔는지 힘을 주어도 가려지지 않았다. 갑자기 그의 손이 덥석 가슴을 쥐었다.

“흡…….”

루시아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켜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붉은 눈에 사로잡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뚫어지게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갑자기 짙어지는 변화를 목도했다. 무서운데 눈을 돌릴 수 없었다.

가슴은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 강하게 움켜잡자 루시아는 헉, 비명을 질렀다. 그는 그녀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대로 가슴을 한입에 물었다.

“아!”

짜릿한 느낌이 등을 타고 흘렀다. 그의 입술이 가슴 둔덕을 삼키고 혀가 유두를 간질였다. 이로 살짝 유두를 물고 혀끝이 유두 끝으로 파고들었다.

“아! 하악!”

테이블에 눕혀져서 루시아는 두 손으로 그의 어깨 옷자락을 움켜잡고 그가 주는 자극에 몸을 떨었다. 딱딱한 테이블이 중력을 거스르고 등에서부터 그녀를 눌렀다. 그는 집요하게 두 가슴을 탐했다. 핥고 물고 빨며 쉴 새 없이 괴롭혔다. 그가 가슴을 빨며 나는 쪽쪽거리는 소리가 너무 민망했지만 몸이 뜨거워졌다.

허리끈이 풀려 바닥에 떨어지고 잠옷은 테이블 위에 펼쳐졌다. 순식간에 나신이 되고 한기가 들어왔다. 오므리는 그녀의 무릎을 열며 그의 다리 하나가 들어왔다. 다리 안쪽을 파고드는 그의 손이 음부를 문지르더니 안쪽으로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으읏…….”

아린 통증에 절로 신음이 나왔다. 그의 거대한 흉기에 상처 입은 그녀의 연약한 살이 아직 아물지 않았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이 몇 번 들어오고 빠져나가자 애액이 흐르며 야한 소리를 냈다. 덕분에 그의 손가락이 좀 더 매끄럽게 드나들었지만 통증은 여전했다.

“아픈가?”

루시아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절하게 그를 보며 울상을 지었다. 아파요. 못 하겠어요. 눈빛으로 애원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그보다 거대하고 뜨거운 끝이 안쪽에 닿자 그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단단한 그의 중심이 연약한 살을 헤집으며 밀고 들어오는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

“쉬이…….”

그는 달래듯 다정한 척 눈시울에 입을 맞추면서 더 깊게 밀고 들어왔다. 깊은 안쪽이 쓸리며 화끈했다.

“으흑…….”

어젯밤 처음 그가 그녀의 생살을 찢고 들어올 때와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속살이 쓰라리고 근육통으로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눈물이 눈시울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무게를 실어 습한 그녀의 속살을 파고들면서 테이블을 디딘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 기가 막히게 좋은 맛이었다. 착 달라붙는 속살이 그를 짜릿하게 자극했다. 입안에서 단맛이 도는 것 같은 느낌에 그가 혀로 살짝 제 입술을 핥았다.

‘사람… 미치게 하는군.’

여자의 눈물, 표정, 끅끅대는 울음, 비명, 달콤한 체향에 부드러운 피부, 순진한 반응과 그의 것을 콱 물고 죄는 속살까지. 그녀의 모든 것이 그를 흥분시켰다. 그는 피 냄새를 맡은 뱀파이어가 된 것처럼 갈증이 났다. 그의 안에 숨어있는 야수가 당장 여자를 거칠게 범하고 성이 찰 때까지 취하라고 으르렁거렸다.

‘안 돼.’

본능대로 날뛰었다가는 한 줌밖에 안 되는 이 여자는 죽는다. 어린 아내는 조금만 세게 잡아도 부서질 것처럼 작고 약한 데다 아직 사내를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못했다. 결혼 다음 날 아내를 죽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우는 루시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작은 입안에 혀를 넣어 샅샅이 그녀의 입안을 탐색했다. 그러면서 고조된 기분을 가라앉히고 날아간 이성을 가까스로 되돌렸다. 길게 이어진 키스는 그녀가 숨을 헐떡일 무렵에야 끝났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가 천천히 빠져나가는 묵직한 감각에 루시아는 신음했다. 아직 끝난 건 아니라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가 루시아의 흐트러진 차림새를 정리해 주고 안아 들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를 침대에 눕혀주었다. 루시아는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숨죽이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쉬워?”

루시아가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안 건드릴 테니까 자.”

그녀는 눈에 띄게 안도하며 느슨하게 몸을 이완시켰다. 그걸 보며 휴고는 쓴웃음을 삼켰다.

‘어린애군.’

한숨이 나왔다. 제 신세가 우습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다. 단단히 성나 풀지 못한 중심이 아팠다. 가라앉게 내버려 두자니 시간이 걸려 괴롭겠고, 혼자 풀자니 그건 또 짜증나고. 그는 자위를 해본 적이 없었다. 여자가 부족한 적 없으니 욕구불만이 될 일이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한숨 쉬는 그의 얼굴을 훔쳐보며 루시아는 감탄하고 있었다. 좀 더 사위가 밝아져서 잘 보이는 그는 확실히 손꼽을 만한 미남이었다.

조각처럼 떨어지는 얼굴선에 좌우대칭이 완벽하게 조화로운 이목구비. 곧게 뻗은 콧대와 날카로운 눈매. 뭐 하나 처지는 구석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타란 공작 앞에 ‘미남’이라는 수식어는 붙이지 않았다.

‘표정… 때문인가…….’

그의 표정은 언제나 무심하고 차가웠다. 눈빛에서도 감정을 읽을 수 없다. 그의 기분이 좋은지 아닌지조차도 그의 얼굴을 보고 짐작할 수 없다. 기사로서 무위가 소문으로 더해져 그는 굉장히 무시무시한 존재로 부상하여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그는 일어나더니 훌쩍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를 기어코 화장실로 가게 만든 장본인이 자신임은 생각도 못 하고 루시아는 그저 눈 호강시켜 주던 잘생긴 얼굴이 사라지자 아쉬워했다.

‘왜 나와 결혼한 걸까…….’

모르겠다. 지금 와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얼마든지 그녀에게 제안한 조건들을 달고 여자를 골라 결혼할 수 있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앞뒤가 안 맞고 허술했다. 그는 이 결혼을 농담으로 비웃으며 거절했어야 하는 것이 옳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그는 심기가 불편했다. 결국 혼자 빼긴 했는데 만족은커녕 찜찜하기만 했다. 왜 여자를, 그것도 결혼한 아내를 옆에 두고 이 짓을 해야 하나. 언제부터 그렇게 신사처럼 굴었다고 답지 않게 배려한답시고 이러고 있나 부글부글 속을 끓이며 침대로 왔다.

여태 잠들지 않고 데굴데굴 굴리던 호박색 눈동자가 자신에게 닿자 그는 짜증이 솟았다. 그러나 표정만으로는 그의 복잡한 심사를 알 수 없었다. 가면을 쓴 것처럼 여전히 무심하고 서늘했으니까.

“아직 안 자고 있었나? 자두지 않으면 힘이 부칠 텐데. 몇 시간 후에는 영지로 출발할 거고 마차 여행은 만만하지 않아.”

“일정에 방해될 일 없을 거예요. 염려 마세요.”

그의 눈길이 야무진 대답을 하는 루시아를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걷지도 못하면서?”

루시아가 새치름하게 입술을 내밀고 그를 빤히 쳐다보자 그가 입모양으로 ‘왜?’라고 물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또 하려고 했잖아요.”

느닷없이 허를 찔린 표정을 짓던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못 걷는 건 내 탓이란 소리군.”

“…못 걷는 건 아니에요. 느낌이… 좀 이상해서 그런 거지…….”

“아침에 의사를 부를게.”

“네?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루시아는 화들짝 놀라 사양했다. 이 민망한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라고? 아무리 의사라 해도 그건 싫었다.

루시아는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하려는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근육의 결림과 하체의 찌르르한 통증에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금세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그녀를 보며 그는 쯧, 혀를 차고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다시 침대로 눕혔다.

“힘들 것 같으면 확실히 말해. 내가 보기엔 오늘 떠나는 건 무리일 것 같으니까.”

“전 정말 괜찮아요. 저 때문에 일정을 바꾸지 마세요.”

“최소 사나흘은 마차를 타고 가야 해. 가는 길에 들를 수 있는 마을은 아마 없을 것이고. 내내 마차 안에서 지내야 할 텐데 할 수 있겠다는 건가?”

“네, 정말 괜찮아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군.”

자신이 한 말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 전부 할 수 있을 것처럼 큰소리쳐 놓고 나중에 변명을 늘어놓는 태도는 곤란했다.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힘에 부친다고 솔직히 밝히면 미리 예방책을 세울 수 있다. 나중에 어쩔 수 없었다고 물러서면 미리 조치할 기회마저도 날려버리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아요, 전 걱정 마세요.’ 말해 놓고 나중에 가서 그때 그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왜 알아주지 않느냐 투정 부리면 그는 그 자리에서 이별을 통보했다. 속에 쌓아두는 자는 꼭 뒤통수를 치기 마련이었다.

“고집이 아니라……. 영지에 대단히 급박한 일이 있는 거잖아요. 제 몸이 조금 불편해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싸늘한 그의 표정에 금이 갔다. 영지의 급박한 사정. 확실히 그런 이유로 그는 약식으로 결혼식을 대체했다. 그 부분을 그녀와 정확히 이야기 나누지 않았지만, 결혼은 약식으로 하고 끝나자마자 영지로 가고.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상황이었다.

차마 그녀 면전에, ‘귀찮아서 그런 거지 영지에는 별일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겸연쩍음을 감추느라 그의 목소리가 조금 친절해졌다.

“…며칠 상간에 큰일이 벌어질 정도로 급한 건 아니야. 오늘 아침 출발은 미루도록 하지.”

루시아는 그를 다시 보았다. 생각보다 이 남자, 고압적이나 냉랭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든 무시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데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알면 알수록 그를 더 모를 것 같았다. 나쁜 사람은 아닌데 좋은 사람도 아니고. 이런 사람인가, 싶으면 저런 사람 같고.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안 돼. 어서 자.”

“영지에서 급한 일 끝나면 바로 수도로 올라오실 거예요?”

이 여자가 진짜. 그가 서늘하게 쳐다봤으나 기가 죽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부터 그를 대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얌전한 듯, 하고 싶은 말은 다 한다. 정말 성가시면 무시해 버리면 그만인데 꼬박꼬박 다 대꾸해 주는 자신도 이상했다.

“한동안 머물며 할 일이 많아. 언제 다시 수도로 올지 아직 예정이 없어.”

태자에게는 2년만 있다 올 거라고 말은 했어도 그의 계획 속에 그건 확정 기간이 아니었다. 얼마든지 더 길어질 수 있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태자 전하께서 흔쾌히 그러라고 하시나요?”

예상 못한 질문이었다. 휴고는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태자와 같은 편에 서있기는 해도 아직 그가 태자를 위해 뭔가 적극적으로 한 건 없었다. 그에게 대놓고 그런 관계를 확정 지어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여자가 권력에 관심 있나? 그는 관심 있게 기억해 두었다.

“흔쾌히는 아니었지.”

퀘이즈는 온갖 협박과 감언이설로 휴고를 꾀려 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딱히 자리 지키고 있지 않아도 북부는 잘 굴러가도록 오랜 세월로 축적된 빈틈없는 행정 체계를 갖추고 있지만 누가 주인인지 확실히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일단 결정 내리면… 바꾸시지 않는군요.”

그의 한 가지 모습만은 뚜렷이 루시아 눈에 잡혔다. 일단 결정하면 흔들림 없이 신속히 추진한다. 서류에 서명한 날로부터 식이 치러질 때까지 고작 한 달이었다. 정말 쉴 새 없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 그야말로 정신을 차려보니 결혼 증서에 서명하고 있었다.

“결정한 후 후회하신 적은 없으세요?”

그의 침묵이 따가웠다.

“…주제넘은 질문이었다면…….”

“없어. 내 손을 떠난 건 미련 두지 않아. 되돌릴 수 없는 일을 붙잡고 있는 건 쓸데없으니까.”

그렇구나. 가슴이 싸하게 저려왔다.

‘버리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겠구나. 일이든, 사람이든, 여자든.’

강하고 오만한 남자. 꿈속에서 봤던 그도 그랬다. 그는 늘 당당했고, 사람들의 경외를 당연하게 받았다. 그를 많이 동경했다. 다가가 말 한마디 붙이기 쉽지 않은 처지라 멀리서 훔쳐보기만 했다. 아마 동경하는 마음 이상으로 이 남자를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남자가 이렇게 손 닿을 곳에 가까이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그의 아내가 되었고, 그의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맑은 눈이군.’

휴고가 자신을 응시하는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를 보며 한 생각이었다. 그녀의 눈 속에는 욕망, 경외, 두려움. 평소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품는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여자들이 그의 아래 누워 그가 주는 권력과 재물과 쾌락에 취해 그를 유혹했다. 어떤 여자도 이렇게 맑은 눈으로 그를 본 적 없었다.

그녀가 독특한 건 성장 환경이 남다르기 때문인가. 대부분의 왕족처럼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부족함 없이 자랐다면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었을까. 어쩌면 평민들과 자란 어린 시절이 영향이 미쳤는지 모른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녀의 맑은 눈은 언젠가 추한 욕망으로 얼룩질 것이다. 그녀가 순수할 수 있는 것은 아직 더러움을 접하지 않아서일 뿐이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늦게 세상에 발을 디딘 것이다.

아둔한 여자 같지는 않으니 성가시게 굴지는 않을 테고, 덤으로 속궁합도 꽤, 솔직히 꽤 좋은 정도가 아니라 기가 막히게 좋았다. 급하게 해치운 결혼 치고 이 정도면 양호했다.

“아무래도 내가 없어야 자겠어.”

“전하께서는요? 더 안 주무세요?”

“평소 기상 시간이야.”

“이렇게… 일찍이요?”

메튼 백작은 항상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일어났다. 아마 평생 새벽 아침은 한 번도 보지 못했을 거라고 의심되는 인사였다. 그렇지만 메튼 백작이 유난히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대개 귀족들은 자정 넘어 취침하고 느지막한 아침에 일어났다. 무도회나 각종 모임이 대개 저녁 늦게 있기 때문이다.

“침대에서는 전하 소리하지 말랬지.”

“…네, 쉽게… 안 나오네요. 입에 안 붙어서 그런가…….”

딴 여자들은 이름을 부르고 싶어서 안달했는데. 이 여자, 은근히 쉽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의 몸에 손을 대는 등의 친밀한 접촉을 전혀 하지 않았다. 같이 밤을 보내고 나면 여자들은 늘 그에게 엉겨 붙었다.

‘어젯밤이 별로였나? 조금 전엔 괜히 건드렸나?’

다른 여자들과 다르긴 했다. 다른 여자들은 그렇게 아파하며 울진 않았으니까.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의심해 본 적 없는 자신의 자부심을 점검해 보기 시작했다.

“비비안.”

그는 절대 속에 말을 담아두는 편이 아니지만 순진한 눈으로 말갛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초야의 감상은 어땠지?’ 하고 물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입에서 나올 대답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봐도 이 여자는 남자의 자존심을 위해 별로인 것을 ‘좋아요.’라고 말해줄 것 같지 않았다.

“…내 이름보다도, 당신 이름을 부를 때 놀라지 않는 연습부터 먼저 해. 아니면 내가 부르는 게 싫어?”

“…불편해요. 그 이름…….”

“안 부를 수는 없잖아.”

“다른 호칭도 있잖아요.”

“다른 호칭? 다른 호칭이라……. 부인? 여보? 자기? 내 사랑? 귀염둥이?”

루시아 얼굴이 벌게졌다. 어떻게 저런 말이 저렇게 자연스럽게 저 남자 입에서 나올 수가 있지?

“골라봐.”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노려보고만 있자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평범한 건 안 좋아하는 모양이군. 나의 햇살이라든가, 영혼의 반쪽이라든가.”

“이름요! 그냥 이름으로 부르세요.”

“음. 아무래도 나도 그게 나은 거 같아, 비비안.”

씨익 웃는 그를 보는 루시아의 표정은 부루퉁했다. 역시 바람둥이가 맞긴 맞구나. 결혼했다고 그가 성실할 거라고 전혀 기대가 되지 않았다. 꿈속에서 그는 결혼 후에 공식적 애인은 없었지만 분명히 숨겨둔 여자는 있었을 거다.

“여기까지. 어서 자.”

“근데요.”

“비비안!”

루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 참, 그가 중얼거리면서 즐겁게 웃는 그녀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평소 몇 시간이나 주무세요?”

“서너 시간쯤.”

“매일이요?”

“가끔은 한두 시간만 눈을 붙일 때도 있고.”

루시아는 놀라 입을 쩍 벌렸다. 공작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이나 가능한 자리였다.

“…죄송해요. 전 아무래도 못 하겠어요. 하루 서너 시간만 자면 죽을지도 몰라요.”

“…언제 당신보고도 그러라고 했나?”

“전하……. 휴……. 당신이 그러시는데 공작부인으로서 제가 늦잠을 잘 수는…….”

그는 재미있어 하는 것인지 어이없어 하는 것인지 낮은 헛웃음을 흘렸다.

“가상하지만 그럴 필요 없어. 지금부터 입 다물고 자.”

그의 손이 루시아의 눈을 덮었다. 커다란 손에 거의 얼굴이 다 가려졌다. 그는 여자의 수다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녀의 재잘거림은 이상하게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꽤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과 다르게 콧소리가 섞이지 않은 맑고 담담한 목소리는 귀에 편안했다.

“귀찮게 해드려 죄송해요.”

“…….”

귀찮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어두워진 시야 속에서 루시아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곧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색색 들리는 숨소리에 손을 치우자 그새 잠든 그녀를 보며 그는 피식 웃었다.

평화롭게 자고 있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그러나 다시 앉아 그녀 쪽으로 몸을 숙였다.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 보드라운 날숨을 들이 삼켰다. 말랑거리는 아랫입술을 살짝 빨아들이면서 혀끝으로 핥았다. 몸을 일으키는 그의 표정이 어쩐지 복잡했다.

* * *

침실이 아닌 응접실에 제롬과 하인 셋이 대기하고 있었다. 침실에는 공작가 안주인이 들어계시니 감히 들어갈 수 없었다. 전(前) 공작부인이 세상을 뜬 날 이후 사라졌던 금남 구역이 새로운 안주인의 등장으로 비로소 부활한 것이다.

목욕을 마친 휴고가 나오자 세 하인이 신속히 움직였다. 수건으로 주인 몸의 물기를 닦고 가운을 벗겨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왔다. 주인의 팔에 동그란 잇자국과 어깨에 붉은 생채기 흔적이 있으나 누구도 눈길조차 주지 않고 빠르게 옷으로 감추어졌다.

세 하인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호흡이 척척 맞았다. 제일 어린 막내가 열일곱 살로 셋은 형제였다. 빈민굴에서 살던 가족 모두가 돌림병을 앓아 형제 셋만 살아남았다.

병 때문에 목소리를 잃은 고아가 된 삼 형제를 제롬이 거두어 교육했다. 기본적인 머리가 있고 성실한 삼 형제는 제롬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이제 더는 가르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일에 능숙했다.

“출발 준비는 완료했습니다. 떠나기 전 최종 점검을 다시 하겠습니다.”

“출발은 내일로 미룬다.”

“예, 전하. 어제저녁에 되돌려 보냈던, 궁에서 나온 시종이 늦게 다시 방문했습니다. 전하께서 주무신다 하였더니 오늘 아침 다시 오겠다 했습니다.”

퀘이즈는 끈질겼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 아마 영지로 내려가도 매일같이 어서 수도로 오라고 징징거리는 서신을 보낼 것이 뻔했다. 귀찮아도 짜증이 나지 않을 정도로만 들러붙는 것도 재주였다.

“오면 돌려보낼 것 없이 데려와. 궁에 다녀와야겠다.”

시간이 남았으니 얼굴 보며 달래야겠다. 차기 왕위를 둔 치열한 다툼이 물밑으로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태자는 태자라는 이유로 1차 목표 대상이었다. 태자의 말에 의하면 쥐뿔도 누리는 건 없으면서 표적만 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가 영지로 내려가는 건 퀘이즈가 많이 양보한 덕인 것은 분명했다.

“다녀올 동안 의사 불러.”

지금껏 공작은 단 한 번도 의사를 찾은 적 없었다. 오죽하면 타란 공작가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이 주치의라고 했을까. 그래서 의사를 부른 목적이 공작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마님께서 편찮으십니까?”

“아니다. 부를 것 없고, 공주가 일어나면 물어봐서 필요하다고 하면 부르도록 해.”

공작은 덧붙였다.

“여의사로.”

“…예, 전하.”

여의사? 제롬 두뇌가 팽그르르 돌아갔다. 왜 갑자기 여의사 타령인지 주인의 숨은 뜻은 좀 더 차분하게 생각해 보기로 하고, 어디서 여의사를 찾을지 고민했다. 미리부터 실력 있는 여의사를 물색해 놔야겠다.

“전하, 파비안입니다.”

문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휴고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파비안이 출근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급한 소식치고 좋은 일은 없는 법이다. 들어오라는 대답에 파비안이 들어와 예를 올리고 서신을 내밀었다.

“북부에서 온 급전입니다.”

서신을 펼쳐 내용을 살피는 휴고 안색이 가라앉았다. 말이 씨가 된 건가. 정말로 영지에서 일이 터졌다. 주인이 오래 자리를 비운 부작용이었다.

머리 검은 짐승은 주인이라는 것을 알려줘도 가끔 밟아주지 않으면 멍청하게도 그 사실을 잊곤 한다. 오히려 야만족이 그런 점에서는 신뢰할 만했다. 확실히 공포를 각인시키면 딴생각을 하지 못하니까.

“기어오르지만 않으면 나는 꽤 너그러운 편 아닌가?”

그의 낮은 중얼거림에 분위기가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제롬과 파비안은 입을 꽉 다물고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대답을 기대해 묻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파비안. 지금 바로 북부 전역에 내가 방문할 것이라 전해라. 이 기회에 쭉 돌아봐야겠군.”

“하오나 그랬다가는…….”

“상관없다. 얼마나 발악할지 기대되는군. 기왕이면 날뛰어 줬으면 좋겠어. 그래야 밟는 재미도 있지.”

“예, 전하.”

파비안은 깔끔하게 대답하고 물러갔다.

“제롬. 나는 곧장 출발하겠다. 넌 마님을 모시고 오도록. 굳이 서둘러 올 필요는 없다.”

“예, 전하.”

제롬은 바로 걸음을 옮겨 밖으로 향하는 공작의 뒤를 따랐다. 말 위에 오른 휴고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타란의 안주인이다. 예를 다해라.”

“명심 거행하겠습니다. 전하.”

박차를 가하며 휴고를 태운 백마는 순식간에 달려나갔다. 수행하는 기사들이 뒤따랐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돌아선 제롬이 다시 한 번 공작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타란의 안주인.”

공작이 별 대단한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안주인께 예를 다해라. 당연한 말을 했다. 근데 그 당연한 말이 휴고 타란 공작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공작은 절대 다른 사람을 챙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겉치레를 하느니 아예 안 하는 사람이다.

‘별 의미 없이 하신 말씀에 내가 의미를 두는 건가.’

두고 보면 알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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