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결혼할까요 (4)
루시아는 그를 응접실에 두고 옷을 갈아입으러 침실로 들어왔다.
“공주님, 시녀들은 대체 어디 있습니까?”
“음, 그게…….”
따라 들어온 여관들에게 어물어물 상황을 설명하자 다들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시녀 관리의 1차 책임은 여관들이었다. 이 일로 닥칠 후폭풍이 두려운 것이겠지.
옷을 갈아입는데 시중을 들어주는 여관들 손길이 아주 정중했다. 계속 흘끔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가 어떻게 해서든 책임을 가볍게 하기 위해 도움을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루시아는 모르는 척했다. 이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시녀가 일하러 오지 않은 것을 부러 따질 생각은 없지만 나서서 항변해 줄 생각도 없었다.
여관들이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잘못된 일을 걱정해서라기보다는 오늘 그녀를 찾아온 손님이 지나치게 거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들이 무서워하는 건 권력자를 뒷배로 둔 공주님이었다.
응접실 소파에서 그와 마주 앉은 루시아는 여관이 내온 차를 신기해서 바라보았다. 참 재주도 좋다. 별궁에는 이런 차가 없는데 어디서 이렇게 빨리 공수해 온 걸까. 시녀가 타주는 차를 맛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흘끗 시선을 돌리자 응접실 구석에 여관 둘이 대기해 서있었다. 언제든 시중을 들 준비를 하는 것과 동시에 미혼인 공주를 남자와 단둘이 있도록 할 수 없으므로 행하는 당연한 절차였다.
“평안하셨습니까. 아까 보니 건강은 하신 것 같군요.”
공작의 인사에 루시아는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예, 전하께서도 평안하셨습니까. 기별 없이 갑자기 오시어 놀랐습니다.”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지난번 불쑥 그의 공작저를 찾아갔던 일을 그는 지적하고 있었다. 자신이 한 짓이 있어서 할 말은 없지만 이 남자 참 뒤끝 있다.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공대를 해주는구나.’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도 대단한 호의를 입은 것만 같았다. 아마 지난번 그의 뒤바뀐 태도에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으니 저 여관들 말고 공주님 시녀들이 대신 자리를 지키라 하십시오. 믿을 만한 사람으로.”
“예? 아……. 지금 시녀가 없어서…….”
“자리를 비운 겁니까? 한 명도 남김없이?”
정확히 말하면 원래 아무도 없지만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일어났다.
“괜찮으면 잠시 산책하지 않겠습니까?”
루시아는 몇 걸음 떨어져서 대기해 서있는 여관들을 흘끔 보고 그의 제안에 응했다. 산책할 곳이라고 해봤자 별궁 주변의 비좁은 뜰이었으나 다소 멀찌감치 따라오는 여관들에게 두 사람 대화가 들리지 않는 정도의 공간을 잡기는 충분했다.
“왜 시녀들이 할 일을 직접 하지? 외출패 들고 출궁한다고 본인이 시녀라고 착각하는 건가?”
단둘이 되자 그는 바로 말을 놓았다. 보는 눈이 없으면 편한 대로 하는 건 성격인가 보다. 지난번에는 황당했지만 듣다 보니 친밀한 느낌이 나서 이것도 괜찮네, 생각이 들었다.
“…할 사람이 없는걸요.”
“시녀들은 뭘 하고?”
“음……. 그게. 사실… 여기서 저 혼자 지내요.”
“…시녀가 없어?”
“네.”
“이 별궁에서 혼자 지낸다는 건가?”
“네.”
“식사는? 청소는? 그것도 다 직접?”
“…네.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에요. 남을 보살피는 것도 아니고 내 몸 내가 챙기는 건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가 억눌린 음성으로 말하다가 하, 헛웃음을 쳤다.
“언제부터?”
“…몇 년 되었어요.”
“기가 막히는군.”
상주하는 시녀가 없다는 파비안의 보고서 내용이 이런 뜻이었나. 성격이 유별나서 일하는 사람이 자주 바뀌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아무리 별다른 세력이 없는 공주라 해도 왕족이다. 왕족에게 시중들 사람 하나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단단히 잘못된 행정 착오였다. 궁중 행정을 이런 식으로 형편없이 관리하다니. 그의 수하가 만약 일을 이딴 식으로 했으면 두말없이 모가지였다.
“중요하게 하실 말씀이란 건 뭔가요?”
“폐하께 결혼 허락을 받았어. 정확한 날짜는 정해지면 알려주지. 한 달을 넘기지는 않을 거야.”
오전 내내 왕하고 주도권 싸움을 했더니 그는 좀 피곤했다. 평소 찾아보지도 않던 딸을 마치 세상 유일한 금지옥엽인 것처럼 구는 배 속 시커먼 왕을 상대로 팽팽한 신경전을 했다. 결국 그들은 피차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주고받기로 했다.
존재조차도 기억 못 할 것이라 했던 그녀 말처럼 왕은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나는 척 수를 쓰는 것이 빤히 보였다. 휴고는 처음부터 폐하의 열여섯 번째 따님이라 칭하며 단 한 번도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당황한 왕은 끝까지 ‘내 열여섯 번째 여식’이라 부르며 이름을 말하지 못했다.
아마 지금쯤 자신의 열여섯 번째 딸이 누군지 열심히 여기저기 뒤지고 있을 것이다.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닐 이들은 왕이 아닌 아랫것들이겠지만.
왜인지 모르지만 휴고는 왕에게 짜증이 났다. 그전에는 왕을 좋아하진 않았어도 사감은 없었다. 하지만 아비가 되어 오죽이나 못났으면 어린 딸 홀로 남자 혼자 사는 집을 찾아가게 하는가. 지내는 궁에는 제대로 사람이 없어서 공주의 몸으로 직접 세탁하고, 청소하고. 그녀는 왕족이라는 신분에 형편없이 못 미치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녀의 비참했을 마음이 조금은 납득이 가면서 그 양반이 할 줄 아는 거라곤 자식 싸지르는 것밖에 없다고 독설을 퍼붓던 퀘이즈의 말에 동감이 갔다.
“…굉장히… 일 처리가 빠르시군요.”
그의 말을 루시아는 한참 만에 이해했다. 아무리 빨라도 반년은 걸릴 것으로 생각했다. 경악할 속도였다.
“시녀들에 대해서 내가 알아보도록 하지.”
“그러지 마세요. 가만히 두어도 어차피 누군가 책임지게 될 거예요. 전하께서 나서면 더 엄한 벌을 받겠죠. 그러길 바라지 않아요.”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해. 쓸데없는 관용을 베푸는군.”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혼자 지내는 것이 좋았어요. 자유로웠거든요. 궁극적으로는 전하께도 잘 된 일일 걸요.”
“…내게 잘된 일이라?”
“이 결혼. 그런대로 만족하시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빠르게 처리하셨다고 생각해요. 제가 얌전히 궁에 갇혀 사는 공주였으면 전하께 결혼하자는 말은 꿈도 꾸지 못했을 거예요.”
그녀는 참 씩씩했다. 자그마한 몸 어디에서 그런 기운이 나오는 걸까. 그런대로 안주인 노릇은 잘하겠다. 휴고는 어느 사이엔가 타란의 안주인이 된 그녀를 그려보고 있었다.
“결혼을 마치는 대로 북부로 출발하려고 해. 한동안 그곳에서 지내게 되겠지.”
북부. 타란 공작가의 영지.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난다는 척박한 땅.
“결혼식은 약식으로 하려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지?”
약식은 증인 몇 세워두고 혼인 증서에 양 당사자가 나란히 앉아 서명하는 것이다. 아버지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고, 축하받기를 원하는 유일한 사람인 놀만은 어차피 신분 때문에 참석할 수 없었다. 루시아는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네, 괜찮아요.”
여자의 평생 꿈인 결혼식을 형식적 서류 절차로 대체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기겁할 일이지만, 그걸 뻔뻔히 제안하는 사람이나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둘 다 보통의 예는 아니었다.
“전하, 청이 하나 있는데요. 놀만……. 그러니까 전하도 알고 계시는 여류 작가한테 제가 써둔 간단한 편지 한 통만 전해도 될까요? 중요한 내용은 하나도 없고 직접 읽어 확인해 보셔도 돼요. 전하 말씀대로면 북부로 가느라 수도를 떠나면 생각보다 오래 연락을 못 할 테고. 절 많이 걱정할 것 같아서.”
“알았어. 편지 주면 전해줄게.”
어쩐지 조용해서 시선을 돌린 휴고의 눈썹이 꿈틀했다. 엄청난 감격과 환희에 찬 눈빛으로 루시아가 두 손을 모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마치 여자에게 눈부신 보석 목걸이를 선물한 다음 만났을 때 그를 바라보던, 오히려 그보다 더 반짝이는 눈이었다.
“감사해요, 전하. 전하께서는 생각보……. 생각했던 대로 참 좋은 분인 것 같아요.”
그녀는 확실히 그를 무서워하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그를 무슨 파렴치한 악당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것치고는 악당에서 좋은 사람으로 변신하는 데 들여야 할 노력이 참 간단해 보였다.
그는 이 사실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아리송했다. 그건 대단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리 불쾌한 건 아니었다.
‘돈은 많이 안 들겠군.’
그는 약간의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처소는 옮겨야 해. 여긴 너무 외져있고 보안이 허술해. 내가 여길 다녀갔다는 소식은 곧 누군가 귀에 들어가겠지. 날 목적으로 하는 자들은 관심을 둘 테고. 아마 손님이 많아질 거야.”
“…그렇군요.”
“사방팔방 떠들지 말고 얌전히 있어. 찾아오는 손님이라고 넙죽 아무나 만나지 말고.”
어쩜 말을 이렇게 예쁘지 않게 할까. 생각 없는 여자 취급하며 수하 다루듯 명령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에 대해 부드럽게 부풀었던 루시아의 감정이 한순간 가라앉았다. 약간 쌓았던 점수는 다 깎아내려 오히려 0점 아래로 파고들었다.
‘이상하지……. 근데도 싫어지지는 않네…….’
이게 많은 여자들이 매달리는 그의 매력인가. 제멋대로인 그의 무례함이 불쾌하지 않은 점이 신기했다.
“네. 또 일러둘 말씀 있으신가요?”
그는 잠시 틈을 두고 아니, 라고 대답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그녀는 좀 특이했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것 같으면서도 필요할 때는 순종적이고, 그러면서도 비굴하진 않았다. 그는 오기 부리며 꼿꼿이 고개를 드는 치들이 거슬리지만 발이라도 핥을 것처럼 비굴한 자들 역시 경멸했다. 그 사이 균형을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녀는 꽤 만족스러운 계약자였다.
* * *
공작저에 돌아와 집무실로 들어오는 휴고의 뒤를 제롬과 파비안이 따라 들어왔다. 휴고가 벗어 건네는 코트를 받아서 제롬이 물러가자 내내 할 말을 꾹 참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파비안은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대체 어디를 다녀오시는 겁니까. 혼자서 그렇게 언질 없이 훌쩍 다니시지 말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적어도 어디 가시는지만이라도 알려주시는 일이 그렇게 힘드십니까?”
파비안은 감히 휴고에게 잔소리를 쏟아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머리가 허옇게 센 공작가의 충성스런 가신들도 하지 못하는 일이다. 휴고는 가끔 이 녀석 배를 갈라보면 간덩이만 그득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오늘 쉰다고 하지 않았던가?”
파비안은 꼬박꼬박 출퇴근 시간 다 지키고 5일 일하면 하루씩 휴일도 다 찾아 먹었다. 공작을 보필하는 일만큼이나 제 가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나. 파비안에게만 가능할 것 같은 뻔뻔함이었다.
그러면서 몇 달씩 처자식과 헤어져 전쟁터까지 두말없이 따라다니는 걸 보면 제 몸만 빼내는 미꾸라지는 아니었다. 꼭 해야 할 일은 절대 미루지 않지만 실속은 챙긴다. 그런 면에서는 휴고의 우직한 집사인 제롬과 형제이면서 아주 딴판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늘 외출하신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하셨으면 제가 보필했을 겁니다.”
“궁에 다녀왔다.”
파비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이라는 사람이 아무 수행원도 없이 휘적휘적 홀로 입궁이라니. 혹시 공작의 신변에 위험이 있을까 걱정해서는 아니었다. 하늘 아래 공작을 무력으로 해할 존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이곳은 전쟁터가 아니었다. 사람을 해하는 데 검을 제외한 셀 수 없는 수단이 존재하는 곳이다. 아주 사소한 빌미가 어마어마한 눈덩이로 불어나는 중심지였다.
타란 가문은 원래 정치적 정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타란 가문 역사상 최초의 정계 진출이었다. 아직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태자와 손을 잡은 이상 권력의 소용돌이에 발을 내디딘 셈이었다.
태자는 적이 많다. 아주 사소한 틈만 보여도 비집고 들어오려고 사방에서 눈이 벌개져서 주시하고 있다. 그 눈은 타란 공작까지 주시할 것이다. 정치 권력과 밀접한 귀족은 절대 혼자 다니지 않았다. 어떤 사건이 발생할 때 증인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작은 지나치게 무신경한 면이 있었다.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발바닥에 불나도록 뛰어다녀야 하는 사람은 파비안이었다. 공작은 함께 고민하는 척도 해주지 않았다. 다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맡겨둘 뿐이다. 파비안이 공작이 홀로 다니는 일만큼은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였다.
“…태자 전하를 뵈러 다녀오신 겁니까?”
“음? 아……. 간 김에 그럴 것을 그랬군.”
“태자 전하를 뵈러 가신 것이 아니면 무슨 용무로…….”
“결혼한다. 폐하께 허락받고 왔어.”
“…….”
파비안은 숨을 몰아쉬었다. 버럭 소리라도 지르는 무례를 저지를 것 같아서 이를 꽉 물었다.
“그 공주님입니까?”
“음.”
“언제입니까?”
“아마 한 달 안으로.”
한 달?! 파비안은 부글거리는 속을 눌렀다.
전쟁터에서 부관으로, 평소에 보좌관으로, 공작을 옆에서 모시며 항상 실감하는 일이지만 공작은 앞뒤 다 잘라먹고 난데없는 지시를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즉, 결정 과정은 혼자 다 처리하고 결론만 내려 명령하는 것이다.
“영지에는 알리지 마.”
“…예?”
“식 끝내는 대로 바로 북부로 갈 거다.”
그건 또 언제 결정하신 사항이랍니까! 파비안은 한 달 안으로 이삿짐 쌀 생각을 하니 암담했다. 아니다. 그래도 한 달 전에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굳이 번거롭게 영지에서 올라올 것 없지. 그러니 그냥 결혼한다는 소식만 보내도록 해.”
일가의 주인 결혼식에 가신들을 참석하지 말라 하다니. 영지에 있을 몇 얼굴을 떠올리자 동정심이 들었다. 그들이 절절매는 타란 가문의 주인은 독재자였다. 독선적이고 오만하기 짝이 없다.
파비안은 타란 공작을 주인으로서 존경하지만 인간적으로는 얽히기 싫었다. 공작은 타인을 쉽게 짓밟는 사람이었다. 배려나 인간미 따위는 기대도 할 수 없다.
공작부인이 될 공주님에게 연민이 들었다. 그녀가 공작에게 그 어떤 것이라도 보답받기를 기대한다면 결혼 생활은 불행할 것이다.
“섬 하나 있었지? 광산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세인트 제도의 섬 말씀입니까?”
“그래. 그걸 지참금으로 처리해.”
“…전하, 그건 너무 과한…….”
평소답지 않게 파비안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과하다 못해 아주 차고 넘쳤다. 파비안은 조사서를 휴고에게 올리면서 당연히 내용을 알고 있었다. 왕이 존재나 알고 있을지 의심스러운 잊힌 공주였다. 모친의 신분이 불분명한데다 이렇다 할 친척 하나도 없었다.
“왕하고 서로 얘기 끝냈어. 결혼식은 따로 안 해. 약식으로 할 거다.”
“…….”
정말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야합도 아니고 일국의 공작이 결혼식을 안 해? 금지옥엽은 아니라도 어쨌든 공주인데 제대로 된 형식을 갖추지 않고 데려가는 건 왕실을 우습게 보는 처사였다. 광산 날름 받고 그러라 허락한 왕도 웃기는 건 마찬가지였다.
약식으로 결혼식을 대체하는 일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도무지 제대로 결혼식을 할 수 없는 급박한 상황, 즉 전시 중에는 대개 약식으로 한다. 파비안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바로 영지로 내려가시는 겁니까?”
타란 영지는 골치 아픈 야만족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언제나 불안하다. 영지에 급박한 사정이 발생했다는 핑계는 늘 가능했다.
“겸사겸사.”
“…정말 영지에 무슨 일이라도?”
공작은 픽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파비안은 공작을 잘 안다. 영지에 별다른 일은 없다. 결혼식을 안 한다는 건 순전히 공작이 귀찮기 때문일 것이다. 제대로 된 결혼식은 거의 꼬박 한나절이 걸렸다. 그 과정이 하기 싫은 것이 분명했다.
“몇 가지 처리할 일을 정리해서 주겠다. 번거로운 건 싫으니까 소문나지 않도록 하고.”
“예, 전하.”
파비안은 깔끔하게 주인의 명에 승복했다. 파비안은 자기 주제를 잘 알았다. 공작의 옆에서 일의 처리를 돕는 것이 보좌관으로 그가 할 일이다. 그에게 공작의 의사 결정에 관여할 자격은 없었다. 정해진 선을 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 공작을 곁에서 모실 수 있었다.
‘혼적… 때문인가…….’
공작이 왜 이 결혼을 하는지 짐작이 가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가여운 공주님이로군.’
괴물에게 잡혀와 탑 꼭대기에 갇혀 쓸쓸히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공주님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아마 피 한 방울까지 노예근성이 있는 제롬이 알았다가는 감히 주인을 괴물이라 한다고 너 죽고 나 죽자 달려들 것이다.
제롬 녀석은 못 봐서 그런다. 전쟁터에서 공작의 활약을 한 번이라도 봤다면, 아마. 상상만으로 소름이 돋아 파비안은 짧게 몸을 떨었다. 그렇다고 제롬이 그걸 보기를 바라지 않았다. 녀석에게는 타란 공작이 영원히 위대한 주인님으로만 남아있기를 바랐다.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무심한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해서 공주님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여자는 사랑을 먹고 사는 생물이라고 했다. 파비안의 아내가 파비안을 붙들고 새겨놓은 가르침이었다. 남편의 무관심 속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공작부인은 시드는 꽃처럼 말라죽어갈 것이다.
우울한 얼굴로 술에 빠지거나 파티나 사치로 공허함을 채우려 하겠지. 무엇도 장담할 수 없지만 단 하나 장담할 수 있었다. 공작부인이 이후 어떻게 변하고, 비참해지더라도 공작은 관심도 주지 않을 것이다.
* * *
공작이 별궁에 다녀간 그날 저녁에 루시아는 처소를 옮기게 되었다. 거의 내궁 바깥쪽에 위치한 별궁과 다르게 내궁 안쪽에 자리한 아름다운 소궁이었다. 소궁이지만 대부분의 공간을 폐쇄했던 별궁보다 오히려 더 넓었다.
장미궁이라 불리는 이 소궁은 왕이 귀애하는 여인에게 선사한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소궁을 둘러싼 넓은 정원에 장미 덤불이 가득했다. 늦봄이 될 무렵에는 온갖 색의 장미로 가득 차 그 향기가 멀리까지 진동한다고 했다.
아마 루시아가 떠날 때까지는 그 광경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건 아쉬운 일이었다.
소궁에서의 생활은 매우 편안했다. 시녀들이 손발처럼 시중을 들어서 굉장한 호사를 누리는 귀부인이 된 것 같았다. 그의 말과 달리 찾아오는 손님은 없었는데 오직 한 사람만 끈질기게 만남을 청했다.
“아프다고 말씀을 전해주세요.”
오늘은 무려 시종장이 방문을 했다. 루시아는 테라스의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평소처럼 거절했다. 누가 봐도 꾀병으로 핑계를 대고 있어서 머리가 반쯤 허연 시종장이 쩔쩔맸다.
“공주님. 폐하께서 용체가 많이 불민하시어 꼭 공주님이 찾아와 뵈어 주시기를 바라십니다.”
“유감이군요. 어서 건강을 찾으시기를 바란다고 전해주세요. 나도 몸이 좋지 않아 움직일 수가 없네요.”
“공주님.”
“가보세요. 피차 서로 기운 낭비하지 마요. 내가 가지 않을 거라는 건 알잖아요?”
축 어깨를 늘어뜨리며 돌아서는 시종장이 돌아가서 된통 깨질 일은 루시아가 알 바가 아니었다. 이건 아주 사소하지만 아버지를 향한 그녀만의 복수였다. 당신이 나를 한 번도 돌아봐주지 않았으니 나도 당신을 절대 보지 않겠다. 왕이 처음 사람을 보내왔을 때 그렇게 마음먹었다.
어차피 왕은 딸이 보고 싶은 것이 아니다. 타란 공작의 약혼녀가 보고 싶은 것이다. 타란 공작의 약혼녀라는 위명은 실로 대단했다. 고작 열여섯 번째 딸에게 면박을 당하면서도 왕은 감히 그녀를 끌고 가지 못했다.
시중을 드는 시녀들은 타란 공작과의 약혼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왕이 애 닳도록 보자고 하는데 냉랭하게 내치는 공주님에게 대단한 뭔가가 있는 것 같아서 절절맸다.
우스웠다. 하루아침에 그녀의 처지가 바뀌었다. 그가 왜 그렇게 오만한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보면 자신도 곧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 결혼이 다음 날로 다가왔을 때까지도 여전히 누구도 루시아의 약혼 사실을 알지 못했다. 소문을 원치 않아 일부러 취한 조치인 것 같아서 루시아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시녀들이 아무리 살갑게 달라붙어도 루시아는 그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밤이 늦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달빛이 잘 드는 창가에 멍하게 앉아있었다. 마음이 괜히 싱숭생숭했다.
그동안 그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중간에 몇 번 사람을 보내서 필요한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지내는 데 부족함은 없었지만 루시아는 딱 한 번만 원하는 것을 전했다.
‘폐하를 뵙고 싶지 않아요. 보지 않게 해주세요.’
혹시 왕이 약식의 증인으로라도 나타날까 싶어 청한 것이다. 이틀 전에 왔던 사람에게 전한 말이라 그 후 답변은 받지 못했지만, 어쩐지 그가 부탁을 잘 알아듣고 조치해 줄 것 같았다.
오늘 밤은 유난히 달이 밝았다. 아쉬움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남편에게 사랑받으며 아이들과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고 싶은 소망을 막연히 그린 적 있었다.
‘내가 택한 길이야.’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다 해도 절대 후회만은 하지 않으리라. 후회는 꿈속에서 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 *
“정말 이럴 셈인가?”
퀘이즈는 버럭 성을 냈다. 부드러운 회유가 실패하자 이제는 분노 작전이었다. 또 실패하면 다시 회유 작전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요즘 계속 이 과정의 반복이었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갈 겁니다.”
휴고는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방방 뛰는 퀘이즈를 본 척 만 척했다.
“왜 하필 지금인가? 나를 노리는 자들이 시퍼런 칼날을 내 목전에 들이밀며…….”
“그러니까 쓸모 있는 녀석을 호위로 붙여 드리겠다는 것 아닙니까.”
휴고가 영지로 내려간다는 말을 꺼낸 이후로 퀘이즈는 계속 아이처럼 떼를 썼다. 이대론 못 간다, 날 죽이고 가라,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얼핏 들으면 배신당한 연인에 대한 처절한 구애였다.
오히려 지켜보는 태자의 측근들이 민망해할 정도였지만 말하는 퀘이즈나 듣는 휴고나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어차피 북부는 수십, 수백 년 전부터 타란 공작가 땅이었어. 공이 얼마간 자리 비운다고 그 땅 어디 안 가.”
“상가도 주인이 잠시 자리 비우면 탈납니다.”
그동안 전쟁 때문에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다. 잠깐 짬이 나면 퀘이즈가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태자를 도와주기로 약속은 했지만 그는 수도 정계에 모든 걸 던져 뛰어들 생각은 없었다. 그의 터전은 북부였다.
“그래서 기어코 이틀 뒤에 떠나겠다고?”
“그렇다고 계속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내가 이렇게 붙드는데도?”
“우는소리는 그만 좀 하시죠. 제가 없어도 당장 무슨 일은 없을 겁니다. 딱히 제가 있어도 도움드릴 건 없습니다만.”
“왜 없어! 공이 옆에만 있어도 눈치 보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게 좋은 겁니까? 태자 전하 눈치를 봐야지 왜 제 눈치를 봅니까.”
“아무래도 좋다고.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여기저기서 튀어나올 것이란 말이지. 벌써 전리품 두고 얼마나 싸움질하는 줄 알아?”
“전리품이요?”
휴고는 코웃음 쳤다.
“그건 다 제 겁니다.”
“그래, 다 내 거지.”
“제 거라고요.”
“공의 것이니까 내 것이지.”
휴고는 작은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속에 구렁이 수십 마리는 들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휴고는 이렇게 능글대는 태자가 싫지 않았다. 괜히 경계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권력자 중에 휴고를 대하면서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은 퀘이즈가 처음이었고, 현재까지 유일했다. 그래서 태자가 내민 손을 잡았다.
“2년만 있겠습니다.”
“길어! 1년!”
“2년입니다. 그사이 왕위가 바뀌면 또 모르겠군요. 폐하께서 근래 건강이 좋지 않으신 것 같던데요.”
“골골 80이겠지. 며칠 전에도 침전으로 계집을 들였더구먼. 노친네. 아무튼 그쪽 기운만 넘치지.”
곁에 있던 태자의 부관이 민망함에 헛기침했다. 태자는 오히려 잡소리를 끼워 넣은 부관에게 비난의 눈초리를 보냈다.
태자가 왕을 향해 그 양반, 노친네, 망할 부왕, 온갖 거친 소리를 다 하는 걸 측근들은 뻔히 알지만 아무리 들어도 참 적응이 안 되었다. 아마 그 소릴 듣고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사람은 타란 공작뿐일 것이다.
“가 보겠습니다.”
“저녁 먹고 가지?”
“바쁩니다.”
“하여간. 한 번도 붙들리지를 않는군.”
“아. 그리고 저 내일 결혼합니다.”
순간의 정적이 찾아왔다. 태자는 물론이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대로 다 굳었다.
“…뭘 해……? 공이 뭘 한다고?”
썩어도 준치라고. 역시 왕은 왕이었다. 결혼 날까지 새어나가지 않게 해준다고 왕이 약속했는데 태자조차도 모를 정도로 철저히 비밀을 지켰다. 태자도 그래서 매번 노친네 타령하면서도 맘먹고 들이박지 못하는 것이다. 어설프게 받았다가는 오히려 튕겨 나올 것이 뻔하니까.
“말씀은 드렸습니다. 약식으로 하니까 참석은 필요 없습니다. 참고로 하나 더 말씀드리면 결혼할 사람은 공주님입니다.”
“공!”
태자의 외침 같은 부름에도 휴고는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휴고가 나가자마자 떼쟁이 아이처럼 굴던 태자의 기색이 확 변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그의 표정은 야차같이 무시무시했다. 부관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타란 공작이 내일 결혼을 한다는데 내가 왜 그 소식을 인제 와서 본인에게서 들어?!”
“송구합니다.”
부관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당장 어찌 된 일인지 알아오지 못해!!”
“예, 예! 전하!”
시퍼런 안광을 쏟아내며 태자는 사납게 씩씩거렸다.
“공주? 빌어먹을. 공주가 한둘이어야 말이지. 공주에 관심 있었으면 진즉 말을 할 것이지. 내 누이를 줬을 거 아냐.”
휴고가 결혼 상대를 공주라고 말했을 때 그는 어찌 된 일인지 대충 짐작했다.
“…망할 노친네.”
퀘이즈는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나는 세상 일 관심 없다는 초연함으로 무장해 내궁 깊은 곳에 앉아 뒤로는 온갖 일을 다 조종하는 검은 손이었다. 그래 봤자 넌 내 손바닥이다 의기양양할 왕의 얼굴이 떠올랐다.
퀘이즈는 왕을 증오했다. 아주 치가 떨리도록 싫었다.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태자 자리에 퀘이즈를 올려두고, 할 테면 해봐라 가소롭게 보는 것도 분통 터졌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두고 봅시다.’
퀘이즈의 푸른 눈이 활활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