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결혼할까요 (2)
그가 이름뿐인 아내가 필요했던 가장 큰 이유. 그에게는 혼외 아들이 있었다. 어지간한 귀족에게 혼외 자식 한둘은 발에 채는 돌처럼 흔했지만, 그는 혼외 아들을 작위를 물려줄 후계로 삼았다.
제논은 사생아에 관대했다. 혼외자라도 입적하면 적자와 동일하게 취급해 주었다. 다만 혼적에 입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인의 동의를 요했다. 루시아가 알기로 공작과 공작부인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갖지 못한 것인지 갖지 않기로 약속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후자일 것이다.
“절대 전하께 세작을 심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급한 그녀의 변명이 가소로웠다. 세작? 고작 열여섯 번째 공주 따위가?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공작가의 보안을 담당하는 자들은 당장 모두 내일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세작을 심었다 해도 관계없습니다. 계속하세요.”
어찌 알았냐고 다그치면 어쩌나 불안했던 루시아의 예상과 달리 그는 차분하게 응대했다. 오히려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지난번에 만났던 그와 어쩐지 느낌이 달라 의아했다. 생각보다 그는 인내심 강하고 온화했다. 역시 사람은 한 번만 봐서는 알 수 없는 법인가보다. 이야기가 잘 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겼다.
“아……. 네. 그래서… 후계에게 작위를 물리시려면 전하께서 결혼은 하셔야 할 테니까요.”
“그래서. 그 결혼을 공주님과 하자는 겁니까?”
“…네.”
그가 피식 웃었다.
“내게 후계가 있음은 비밀이 아닙니다. 알아내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형식비라 할 수 있겠군요. 그 사실을 빌미로 삼으려는 것이라면.”
“아니에요! 전하를 협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생각은 감히 안 해요. 말씀드렸다시피 전 제안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이 결혼으로 전하께서 얻을 이득을요.”
물끄러미 루시아를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뭡니까? 공주님과 결혼해서 내가 얻을 이득이.”
그의 말투는 건조하고 사무적이었다.
“저는 외가가 없습니다. 결코 전하께서 제 외가에 신경 쓸 일이 없어요. 그리고 전 열여섯 번째 공주라 왕실 내에서의 위치도 보잘것없으니 왕실에 지급할 지참금도 별로 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어쨌든 공주이긴 하니까 겉보기에 아주 별 볼 일 없는 가문과 혼인하는 것보다는 대외적으로 그럴 듯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점은 전하께서 별로 개의치 않을 부분일 것 같지만. 그리고 저는 전하 사생활에 전혀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마음껏 노셔도, 아니, 그러니까 아마 결혼을 하기 전의 생활과 차이가 없으실 거예요. 원하시면 중간에 이혼해도 괜찮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의 표정이 아주 이상해졌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작가 후계에 제가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아이를 낳을 수 없어요.”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대단히 불편한 표정으로 미간을 꾹 눌렀다. 루시아가 지금껏 봤던 중에 가장 많은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도대체가.”
그의 표정이 다시 차갑게 돌아왔다.
“공주님 머리통에 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지 열어보고 싶군요. 정말……. 아니, 다 집어치우고. 정말 공주님은 말씀하신 것들이 제가 이 결혼으로 얻을 이득이라 생각하십니까?”
“…예?”
“하나씩 따져봅시다. 공주님 외가, 결혼하면 아내의 친정이 되겠군요. 타란은 안주인 가문 하나 건사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지 않습니다. 가문의 인척과 친척은 관리처가 따로 있고 제가 신경 쓸 일은 없을 겁니다. 반역이라도 저지르면 모를까. 뭐, 설마 그렇다 해도 처리 못 할 건 없겠군요. 지참금은……. 말했지만 타란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지참금 아끼는 짓 따위 안 합니다. 처가의 가문이 이름이 있건 별 볼 일 없건 그 또한 상관없고. 타란 가문 전통에 이혼은 없습니다. 꼭 가문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죽어야. 아니, 죽어도 안 되려나.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생활 이야기는.”
그는 다시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 하셨는지 대충 짐작은 가는데. 저를 결혼하고 나서 이 여자 저 여자 여기저기 애인이며 첩이며 두고 난잡하게 노는 바닥으로 취급하시는 겁니까?”
“…예?”
루시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하… 하지만 지난번에 제가 들은…….”
“현재 저는 미혼입니다. 미혼 남자가 어떤 연애를 하든 누구도 간섭할 바가 못 됩니다.”
그의 말은 지극히 타당했다.
“그런 단편적인 일로 누군가를 파악하는 일은 어리석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의 비꼬는 것 같지 않은 비꼼은 루시아 심기를 건드렸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결혼하면 오직 아내에게만 충실해서 평생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을 거라고 다짐하신다는 건가요?”
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물론 그건 아니었다. 그는 그런 다짐 따위는 안 한다. 가끔 놀 수도 있지. 그런데 그는 왜 이런 변명을 스스로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공주님이 상관할 자격은 없습니다.”
“네, 물론이죠. 그래도 아니라고는 안 하시네요.”
“기건 아니건. 그건 공주님이 따질 일이 아닙니다.”
“압니다. 누가 뭐래요?”
옥신각신하던 두 사람 사이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루시아는 잠시 흥분해서 저만치 날아간 제정신을 얼른 챙기고 조신하게 입을 다물었고, 그는 괜한 헛기침을 했다. 루시아는 흥분이 가라앉자 시무룩해졌다. 그가 자신과 결혼해서 얻을 이익이 없다면 이 계약 결혼이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그럼… 후계 문제는요? 제가 아이를 못 낳는 건 전혀 전하께 도움이 안 되나요?”
여자가 아이를 못 낳는 건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마치 의상실에서 이 색은 별로인데 저 색은 어때요? 묻는 것처럼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그는 혼란을 느꼈다.
“내가 후계로 삼은 아들이 있는 건 사실이고. 결혼해서 아내가 아들을 낳는다면 조금 골치 아프겠지만……. 그 일까지는 설명할 필요 없겠군요. 아무튼, 그 문제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건 증명할 수 있는 겁니까?”
“…아뇨.”
의사는 진단해도 확언은 해주지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 임신하면 거짓 진단을 내린 의사는 목을 걸어야 하는데 그런 위험을 누가 감수할까.
“증명할 수 없다면 어차피 조건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하아…….”
루시아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면 그녀가 준비한 것은 모두 바닥이 났다. 그럼 꿈속에서 그는 무슨 이유로 그 여자와 결혼했을까. 그래도 무슨 조건이 맞았으니 한 것 아닌가. 어쩌면 계약 결혼 같은 건 다 사교계 헛소문이고 사실은 그 여자와 열렬히 사랑한 건 아닐까? 절망하던 루시아는 번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이건 어떤가요? 전하를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뭐요?”
“절대로 전하를 사랑하지 않겠어요. 제 마음은 제가 가지고 있을게요.”
그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루시아는 멍하게 그를 보았다. 그가 소리 내어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이렇게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제대로 웃어본 적은 있을까 궁금해했던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주님이 제안한 조건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군요.”
재밌다. 이 여자는 정말 재미있었다.
“좋습니다. 그걸 이득으로 치면. 그럼 공주님은 남편이 애인을 두는 것도 괜찮고 언제든 이혼해도 괜찮은 결혼을 해서 대체 뭘 얻으려는 겁니까?”
“전 그냥……. 공작부인이라는 이름을 얻는 걸로 충분해요.”
“공작부인이라고 터무니없는 사치를 허용할 생각 없고, 가문을 이용한 정치 놀음이나 권력 싸움 같은 건 어림없습니다.”
“그런 것은 바라지 않아요. 저는 다만……. 말씀드렸지만 전 열여섯 번째 공주에요. 폐하께서는 제 존재조차도 아마 잊으셨을 거예요.”
그는 ‘그렇지 않을 거다.’ 등의 입에 발린 위로조차 건네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다워서 웃음이 나왔다.
“공주는 왕실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 팔려나갈 준비가 되어있지요. 적당한 지참금만 받으면 왕실에서는 절 아무 곳에든 시집보낼 겁니다. 나이가 얼마나 많든, 몇 번의 결혼 경력이 있든, 얼마나 최악의 평판을 가진 사람이든. 전하께서는 최소한 나이도 젊고 미혼이시잖아요. 팔려나가기 전에… 제가 절 팔고 싶었어요. 그럼 최소한 제가 선택한 것이니까.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덜 억울할 것 같거든요.”
그녀의 눈은 서럽게 우는 것 같았다. 그는 쉽게 타인을 동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사정이 어찌되었든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그녀의 제안은 두서없고 터무니없으며 신뢰할 근거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껏 살아오며 이 정도 재미를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럼 이만. 실례가 많았습니다. 많은 무례를 끼쳤어요. 용서하셨으면 합니다.”
루시아는 일어나 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드는 그녀의 표정은 조금 개운했다. 최선을 다해 부딪쳐 보았다. 일의 성사는 하늘에 달린 것이다. 이 정도면 되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루시아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확답은 못하겠군요. 공주님 말씀대로 이건 인생을 바꾸는 계약이니까요.”
“아…….”
믿기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생각해 본다고 했습니다.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 알아들었어요.”
“일이 성사된 것 같다는 표정이기에, 확인해 본 겁니다.”
루시아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약을 올리는 건지, 괜히 속을 긁는 건지. 정말 이 남자는 뒤집어쓴 껍데기 외에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
“그럼 일단.”
그가 일어나서 자신을 향해 손을 뻗을 때 루시아는 멀뚱히 그를 보며 가만히 서있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턱을 틀어쥐고 그대로 입술이 부딪쳐 왔을 때까지도 루시아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뜨거운 살덩이가 입안을 가르고 들어와 목 안 깊은 곳을 건드리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꼭 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갑자기 시작된 진한 키스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혀가 입안을 가볍게 훑고 지나가며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의 그녀를 보며 웃었다.
“확인입니다.”
“뭘…요……?”
“부부가 되려면 최소한. 살이 닿아 혐오감은 없어야 할 테니까요. 다행히 그렇진 않은 것 같군요.”
“아……. 그…….”
“잠시 있으세요. 궁 앞까지 모셔다 드릴 마차를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그가 몸을 돌려 나가고 루시아는 그대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당연히 결혼해서 부부가 되면 이런저런 일도 다 하는 거고, 조금 전의 접촉 같은 건 당연한 건데. 루시아는 두 손으로 주먹을 쥐고 제 머리를 마구 두드렸다.
“이 멍청아. 넌 정말 말도 안 되는 멍청이야.”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만, 루시아는 ‘결혼’ 그 자체 외에는 생각을 안 했다. 결혼과 수반하는 부부 사이의 일에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막연하게 ‘결혼해도 그는 애인이 있을 테니까 서로 얼굴 몇 번이나 보겠어.’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그와 같은 침대에서 자는 일은 정말 상상도 하지 않았다.
“…이건 어디 가서 상담도 못 해.”
그녀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오그라드는 수치심으로 몸부림쳤다.
* * *
모처럼만에 꽤 시간을 두고 그를 고민하게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결혼…이라.”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이미 결혼 적령기였다. 하지만 그는 당장 결혼 생각이 없었다. 안 그래도 할 일이 산더미다. 아내라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아예 결혼 따위는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자가 부족한 적은 없다.
그러나 녀석을 후계로 삼아 작위를 물려주려면 결혼을 해야 한다. 혼적에 올라간 적자만 작위를 계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해야만 혼적을 작성할 수 있다. 사별하건 이혼하건 결혼은 해야 후계자를 인지할 수 있었다. 제논의 법은 독신남의 양자 입적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직 녀석은 어렸다. 결혼이 당장 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마 언제고 하기는 해야 한다. 녀석을 혼적에 입적할 것을 동의하며, 후계로 작위를 물려줄 것까지 이해할 여자를 찾아서. 그런 점에서 오늘 찾아왔던 공주님은 꽤 구미가 당겼다.
“사생활의 자유라. 그 점도 좋지.”
그는 큭 웃음을 터뜨렸다. 날 뭐로 보느냐 공주에게는 정색했지만, 사실 상당히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문득 반은 놀릴 의도로 키스한 후 새빨갛게 익은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귀엽긴 했다. 좀 신선하기도 했고.
하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다. 공주가 맞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것이다. 배후에 누가 있는지도 알아 봐야겠다. 대체 뭘 노리고 이런 일을 꾸미는지도. 그는 오늘 그녀에게서 들은 모든 말들은 거짓이라고 전제했다.
의심스러울 때는 최악을 가정한다. 그의 좌우명이었다.
“전하, 제롬입니다.”
‘들어와.’ 답하자 문이 열리고 그의 충직한 집사가 들어왔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전하. 오늘과 같은 일이 추후 다시는 없도록 하겠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다. 그렇다고 온종일 녀석을 감시할 수도 없는 거고.”
“이제부터는 그럴 생각입니다.”
잠깐 자리 비운 새에 그런 사고를 칠 줄은 예상 못 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낯선 손님을 데리고 들어와 전하와 단둘이 두다니! 전하께 누를 끼치는 일 없도록 늘 살얼음 밟는 심정으로 수도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제롬은 아주 거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하다가 미친 듯이 화가 치밀었다. 로이를 향해 제롬은 북북 이를 갈았다.
“파비안 들어오는 대로 나한테 오라고 해.”
“예, 전하.”
휴고는 그 공주에 대해 샅샅이 조사해 보기로 결정했다.
* * *
밤이 이슥한 시간, 제롬은 공작저를 방문한 파비안을 맞이했다. 타란 공작의 보좌관인 파비안은 비록 일에 치여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더라도 최선을 다해 시간 외 근무는 기피했다.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라면 파비안은 이 시간에 공작을 만나러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파비안은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는 형제, 제롬의 어깨를 두드렸다. 둘은 한배에서 한날 태어난 쌍둥이 형제이지만, 암청색 눈동자 외에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형제라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이 도리어 깜짝 놀라곤 했다.
“별일 아니니 얼굴 펴. 그냥 좀 전하께서 많이 궁금해하시던 일이라. 어차피 내일은 쉴 거라서 그냥 오늘 보고드리려고. 아직 안 주무시지?”
“안 계신다.”
“뭐야. 밤나들이 가신 거야? 도착하니 파장이라더니, 그 꼴이네. 어쩔 수 없지. 아, 전하께는 내가 왔었단 말 드리지 마. 내일 쉴 거니까 불려 나오고 싶지 않아.”
파비안은 성실한 수하의 자세에서 늘 반걸음 물러나 뺀질거렸다. 제롬은 혀를 찼지만 정말 중요한 일이면 그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뭐라 하지는 않았다. 미련 없이 몸을 돌리려던 파비안이 멈칫했다.
“어디로 가셨어?”
제롬은 잠시 주저했다.
“팔콘 백작부인.”
“팔콘… 팔콘이 누구……. 뭐? 그 여자를 아직 찾으신단 말이야?”
“목소리 낮춰. 다들 잔다.”
“지금 그게 문제냐! 넌 뭐 했어!”
“…하긴 뭘 해. 주인이 누굴 침실로 부르시건 상관할 일이 아니야.”
“상관을 안 하기는! 그 여자는 남편을 셋이나 잡아먹었다고! 무슨 저주가 걸린 여자인지 모른단 말이다!”
“…네가 애냐? 저주라니. 그런 게 어디 있어.”
“로렌스 남작 영애는 어떻게 된 거야?”
“전하 명으로 장미꽃을 보냈지.”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내가 알았으면.”
“알았으면 뭐. 전하 침실에 여자 넣으려고? 주제넘은 짓 하다가는 전하께 죽는다. 넌 목이 몇 개라도 되냐?”
“아, 진짜.”
파비안은 온몸으로 짜증을 내며 머리를 북북 긁었다.
“그 여자 이름만 나오면 왜 그렇게 예민해?”
“말했잖아. 그 여자는 마녀라고. 그런 불길한 여자가 전하 근처에 있어선 안 돼. 전하께서도 벌써 1년 넘도록 그 여자랑 관계를 유지하고 계시잖아. 그 여자 말고 딴 여자는 이런 적 없었어. 틀림없어. 전하는 이미 그 여자한테 홀리셨다고!”
“…장담하건대 전하 앞에서 그 말 했다간 넌 진짜 죽어.”
“알아! 그러니까 닥치고 있잖아!”
이 녀석의 주인께 대한 충성심은 좀 이상한 쪽으로 변질되었다고 제롬은 생각했다. 파비안이 질색하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제롬 역시 공작이 팔콘 백작부인을 가까이하는 것이 썩 유쾌한 건 아니었다. 그녀와 결혼한 남편 셋이 모두 결혼 후 1년도 안 되어 비명횡사했다. 아무 병 없이 건강하다가 사고, 급사 등으로 덜컥 죽어버려서 팔콘 백작부인에게 저주가 걸렸다는 소문은 이미 사교계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고 공작과 팔콘 백작부인과의 관계는 다른 여자들과 좀 달랐다. 공작은 다른 여자들과 교제하는 중에도 간혹 백작부인과 밤을 보냈다. 다른 여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값비싼 선물을 보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끊어지지 않고 두 사람 사이는 이어졌다. 그게 1년이 훌쩍 넘었다.
그리고 3개월 전, 로렌스 남작 영애와 끝난 이후 다른 새로운 여자와 교제 없이 계속 백작부인하고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말을 했다가는 파비안이 더 길길이 날뛸 것이라서 제롬은 그냥 혼자만 알고 있기로 했다.
“나 간다.”
“어쩌려고.”
제롬은 파비안을 붙잡았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얌전히 집에 가겠다는 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주인이 계신 곳으로 보고드리러 가야지.”
기어코 방해하겠다는 말이었다. 파비안은 한 달 전 공주 한 명에 대한 조사를 명받았다. 조사를 하는 내내 왜 이 공주의 인적 사항이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여자다. 그 마녀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파비안은 자신이 들고 있는 보고서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공작은 일을 시키면 결과를 가져올 때까지 별말을 하지 않는데 이번에는 중간에 두 번이나 어찌 되어 가느냐고 물었다. 상당히 관심이 있다는 뜻이었다.
“여기 있어. 내가 다녀오지.”
“…네가?”
“가서 네가 중요하게 보고드릴 것이 있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드릴게. 귀가하신다면 모시고 오고, 나중에 듣겠다고 하시면 너도 그냥 얌전히 집으로 가는 거야. 어쩔래?”
“…좋아. 몇 번 재촉하신 일이라고 꼭 전하께 말씀드려.”
“알았어.”
십중팔구 공작은 귀가를 택할 것이다. 만약 공작이 나중에 듣겠다는 선택지를 택한다면 그때는 제롬도 팔콘 백작부인에 대해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해 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파비안의 말대로 공작과 백작부인의 관계는 상당히 오래 이어졌고, 지금껏 백작부인 외에 어떤 여자도 이런 예는 없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공작이 백작부인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공작은 차갑고 무정한 사람이었다. 공작이 백작부인을 자주 찾는 데에는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 중에 감정적인 것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것이 바로 제롬이 파비안과 달리 백작부인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이유였다.
* * *
널찍한 침대 위에 한 사내가 등에 커다란 쿠션을 받쳐 상체를 약간 들어 올린 상태로 기대 누워서 서류를 들추고 있었다. 사내 위를 타고 오른 나신의 여인이 두 손으로 그의 널찍한 가슴을 짚고 요염하게 허리를 돌리며 헐떡였다.
“하아……. 으응……. 어… 어때요?”
단단히 곧추선 남성을 안으로 품은 여자는 교성을 흘리며 요분질을 했지만, 서류를 넘기는 남자의 표정은 무심했다.
“쓸 만하군.”
“읏……. 응. 너무…한데요. 두 달…이나 걸려… 작성한 건데…….”
아니타는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남자에게 눈을 흘겼으나 그가 ‘쓰레기’라고 말하지 않은 것만으로 상당한 호평을 해준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타는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엉덩이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찧었다. 단단한 것이 안을 깊이 찌를 때마다 그녀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어… 어때요?”
“쓸 만하다니까.”
“그거… 말고요.”
서류를 옆으로 떨구면서 그는 픽 웃었다. 그가 상체를 일으키며 커다란 두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잡자 그의 것을 물고 있는 여자의 안이 죄어들었다.
“이쪽도 쓸 만해.”
“응……. 앗……. 당신은… 점수에 너무 인색해요. 나는 뭐… 당신 점수 매길 줄 몰라 안 하나…….”
“내 점수는 어떤데?”
“쓸 만…해요. 당신도.”
“흐음.”
그는 씩 웃더니 그대로 여자의 허벅지를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여자는 순식간에 눕혀지고 그는 그 위를 타고 올랐다. 그는 강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그녀 안으로 돌진했다. 살이 맞부딪치며 퍽퍽 소리가 나도록 강한 힘에 여자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하윽! 아아! 아악!!”
부드러운 여체가 그에게 매달렸다. 비명처럼 교성을 질러대는 여자의 안으로 들어가며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여자 입에서 죽겠다고 애원하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그는 멈추지 않았다. 언제 나와 마찬가지로 먼저 항복하는 건 늘 여자 쪽이었다.
한바탕 정사가 휩쓸고 지나간 침실은 덥힌 공기가 아직 식지 않았다. 아니타는 넓은 사내의 가슴을 파고들며 만족스럽게 갸르릉거렸다.
탄탄한 근육 아래 손으로 쓰다듬으면 아주 미세하게 느껴지는 흉터의 흔적들이 있었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외모,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숙련된 키스와 애무, 그리고 밤을 새울 정도로 대단한 정력에 격정적인 정사까지. 이 남자의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남자를 만나봤지만 이런 남자는 유일했다.
처음에는 그의 배경에 혹했다. 북부의 지배자로 불리는 타란 가문의 공작이라니. 평생 이런 남자와 언제 자볼 수 있겠나, 이런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그의 신분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그렇게 대단한 남자라는 사실이 사무치게 안타깝다.
아니타는 그가 소피아 로렌스와 끝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파티에서 우연히 마주친 소피아가 흡사 원수라도 보는 것처럼 노려보기에 짐작했다. 아니타는 소피아에게 유감은 없었다. 오히려 소피아 역시 그의 과거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좀 안타까웠다. 소피아 로렌스라면 어쩌면. 그의 마음을 잡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그가 여자에게 잡히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이중적인 마음이 있었다.
타란 공작은 사교계에서 그리 이름 높은 바람둥이가 아니었다. 의외로 사람들은 그의 여성 편력에 대해 잘 몰랐다. 그는 사교계에서 영향력 있는 여성들과 관계를 갖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소피아 로렌스가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다.
소피아는 유명한 미녀이긴 하지만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로렌스 남작가는 그리 권세를 지닌 가문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얼마간 데리고 놀다 버려도 뒤탈이 없다는 의미였다. 아니타는 그가 그런 점까지 계산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와 한때 교제했던 여자들은 평탄한 결혼 생활을 보내지 못했다. 아니타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정말 섹스를 잘했다. 하룻밤에 셀 수 없이 여자를 천국으로 보낸다. 그 맛을 본 이후에 어떤 남자가 만족스러울 수 있을까.
처음에는 그의 권력이나 재력에 혹했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이 남자 자체에 빠져버린다. 그래서 여자들은 그에게 매달리며 집착하고, 결국은 그에게 버림받는다.
그는 차가운 불같았다. 몸은 줘도 마음은 단 한 조각도 주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몸으로만 즐기자 생각했던 아니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마음까지 주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면 이 남자는 그녀를 버릴 것이다. 지금까지 다른 여자들에게 한 것처럼.
그래서 아니타는 자신의 마음을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물질적으로 그가 필요한 것처럼, 서로 이득을 주고받는 관계처럼 행동했다. 다음에 언제 만나느냐 묻지 않고, 오래 연락이 없어도 절대 먼저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그렇게 1년 넘도록 그와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투자해 줄 거죠?”
아니타는 상단을 하나 운영 중이었다. 그동안 간간이 그에게 얻은 조언으로 투자를 해서 제법 재미를 보았다. 이젠 상단 규모가 꽤 커져서 그에게 투자하라며 기획안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상단을 위해 그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실제로 그의 덕을 볼 생각도 얼마간 있었다.
“검토해 보지.”
“뭐예요. 내 상단의 핵심 기밀까지 다 봐놓고 이럴 거예요? 나 더 봉사해야 하는 건가요?”
아니타는 손을 아래로 내려 그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그의 중심을 부드럽게 손에 쥐었다.
“봉사는 내가 하고 있는 것 아니었나?”
“어머. 어쩜 이렇게 자신만만하실까.”
아니타가 조몰락거리는 손에서 그의 것이 힘을 더해 부피를 키워갔다. 그녀는 고개를 그의 가슴에 묻고 작게 도드라진 그의 유두를 빨아들였다. 혀로 유륜 주변을 돌려 핥으면서 그녀는 손으로는 단단해진 그의 것을 쥐었다가 놓으며 자극을 가했다.
“나 뒤로 넣어줘요, 응?”
그가 몸을 일으키자 아니타는 재빨리 엎으려 엉덩이를 세웠다. 그의 손이 등을 누르면서 뒤에서부터 거대하게 일어난 그가 은밀한 길을 타고 깊이 들어왔다.
“하아……. 으응…….”
강하게 밀고 들어왔다 빠져나갈 그의 움직임을 예상하며 혀로 입술을 축이는데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주저하는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아니타는 이를 아득 갈았다. 감히 그와의 시간을 방해하다니. 저년은 당장 내일 채찍질해서 내쫓아버릴 것이다.
“절대 방해하지 말라 이르지 않았더냐! 물러가라!”
“귀인을 찾는 손님입니다. 고할 일이 있다고 뵙기를 청한다고 하십니다.”
그를 찾아온 손님이라고? 아니타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틀어 그를 살폈다. 그가 거절하기를 바랐으나 그는 짧게 생각을 마치고 그녀 안을 채우고 있던 자신을 빼냈다. 묵직한 감각에 아니타는 짧게 신음했다.
“들어오라고 해.”
아니타는 실망을 감추고 바깥을 향해 말했다.
“모시고 오너라.”
얼마 후 침실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왔다. 제롬은 속이 다 비치는 슬립 차림의 여자가 가슴골이 다 보이도록 비스듬히 누워있고, 그 뒤쪽에 상반신을 다 드러낸 채 주인이 앉아있는 것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휴식을 방해드려 송구합니다, 전하.”
“무슨 일이야.”
“파비안이 전하께 고할 중요한 일이 있다며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여러 번 재촉하신 일이라기에 전하의 뜻을 여쭙고자 합니다.”
“알겠다. 나갈 테니 기다려.”
제롬이 물러가고 몸을 일으키는 휴고를 보는 아니타 얼굴이 창백했다.
“가시…려고요?”
“내 옷 어딨지?”
가슴이 미어진다. 잡고 싶었다. 가지 말라고 하고 싶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오늘 밤이 아니라 내일 듣는다고 하늘이 무너지겠는가. 망설임 없이 돌아갈 준비를 하는 그가 야속했다. 하지만 잡을 수 없었다. 매달리면 그는 매정히 뿌리치고 다시는 여기 오지 않을 것이다. 요즘 그가 그녀를 자주 찾아서 자신도 모르게 기대하는 마음이 생긴 것 같다.
갖고 싶다. 이 남자가 너무 갖고 싶다.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겠지만, 너무너무 원해서 피가 마를 것 같았다.
“절 이렇게 달아오르게 하고 그냥 가실 거예요?”
부드럽고 풍만한 가슴을 바싹 밀착했다. 교태 어린 그녀의 유혹에도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가볍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출 뿐이었다.
“내 옷. 가져오라고 해.”
아니타는 붉은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바로 하녀를 불러 잘 보관해 둔 그의 옷을 가져오게 했다. 아니타는 직접 그가 옷을 입는 데 시중을 들었다. 일부러 그에게 밀착하고 애무하듯 스킨십을 했다.
“정도껏 하지.”
그의 한마디에 아니타는 흠칫했다. 그의 눈은 시릴 정도로 감정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유혹하면 열이면 열 뿌리치지 못하고 다 입었던 옷도 벗어던지며 달려드는 것이 대개 남자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남자는 조금 전이 마치 거짓인 것처럼 이렇게 식어버릴 수 있을까. 아니타는 쓴웃음을 지으며 깔끔하게 물러났다. 두 번 다시 이 남자를 보지 못하는 것은 원하지 않으니까.
“다 됐어요.”
아니타는 두어 걸음 물러나서 황홀하게 남자를 감상했다. 장신의 키에 균형 잡힌 몸매는 옷맵시를 돋보이게 했다. 아니타는 그의 몸만큼이나 그의 얼굴도 좋아했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열흘 정도 집을 비울 거예요.”
아니타는 도도하게 말했다. 이런 남자는 붙잡으려 하면 더 빠져나간다. 가끔은 먼저 간격을 벌려야 한다. 가버리는 남자에 대한 약간의 심술도 들어있었다. 하지만 얄팍한 수를 부린 것을 금방 후회했다. 그는 마치 속이 빤히 들여다보인다는 것처럼 웃음으로 대답했다.
아니타는 늘 그런 것처럼 그를 침실 안에서 배웅했다. 절대 그를 쫓아나가 배웅하지 않고, 그가 올 때도 나가서 맞이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걸로 자존심을 지킨다는, 자기 위안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나가고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던 아니타가 천천히 걸어 발코니로 나갔다. 그를 태운 마차가 저 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마차가 사라지고 나서도 꽤 한참 동안 아니타는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