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시아-3화 (4/77)

3장 결혼할까요 (1)

처음부터 엿들으려던 의도는 없었다. 바쁘게 그의 뒤를 쫓다가 그가 대충 어디쯤 가는지 알면서 걸음을 늦추었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하지?’

암담해서 머릿속이 캄캄했다. 그를 만나겠다는 맹렬한 목적에 눈이 멀어 그 너머를 대비하는 데 소홀했다. 그래도 발은 그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서있는 그를 발견했을 때 루시아는 다시 한 번 망설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에게 기회를 빼앗기고 말았다.

못 본 척 돌아서기에는 이미 너무 가까이 갔다. 움직이면 눈에 띌 것 같아서 그대로 풀숲 뒤에 쪼그리고 앉았다. 생생하게 들려오는 두 사람 대화는 듣고 싶지 않아도 귀에 쏙쏙 들어왔다.

‘레이디 로렌스……? 설마… 소피아 로렌스……?’

소피아는 루시아의 꿈속에 등장한 유명인 중 하나였다. 친분 있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몇 번 본 적은 있었다. 사교계에 미인은 많지만 그녀는 그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이었다. 자연의 먹이 사슬에 비교하면 최고의 포식자였다.

‘소피아 로렌스가… 그의 옛 연인이었단 말이야?’

그에게 애인이 많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거기다 수시로 바뀌었다. 그가 데리고 다니는 여자는 하나같이 가슴은 수박만 하고 허리는 개미만 한 화려한 미녀들이었다. 공통점을 찾자면 성격 나빠 보이는 백치 미인들이었다. 거의 일관된 스타일이라 그의 취향인 줄 알았다.

소피아 로렌스는 전혀 달랐다. 소피아는 한 떨기 백합 같은 미인이었다. 화려한 미인과 나란히 세워도 전혀 눌리지 않는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부친인 로렌스 남작이 여식 교육에 관심이 많아 음전하고 교양 있는 숙녀라고 들었지만.

‘음전한 건 아니었구먼. 좀 노셨어.’

소피아 로렌스는 그녀의 미모에 반한 후작의 구혼을 받아들여 루시아가 결혼해서 사교계 활동을 시작할 당시에 이미 후작부인이었다. 상처(喪妻)한 후작의 재취로 들어간 것이지만, 남작의 여식으로 그 정도면 분에 넘치는 결혼이었다. 그리고 먼 훗날. 아이를 사산하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루시아는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정말 처절하게 매달리는구나.’

소피아 정도의 미녀가 자존심 다 내버리고 저러는 것을 듣고 있자니 참 안타까웠다. 세상에 남자가 저거 하나가 아니랍니다. 말해 주고 싶었다. 물론 세상에 ‘휴고 타란’이란 남자는 하나뿐이지 않느냐, 말하면 할 말은 없겠다.

이런 식으로 적나라하게 그의 연애사를 목격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가장 최악의 순간을.

‘하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옛 연인한테 죽고 싶으냐 협박하는 남자라니…….’

자신이 만약 소피아의 입장이라면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을 것 같았다.

‘이건 정말… 예측을 벗어난 건데…….’

루시아는 그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지만, 모두 주변에서 들은 소문뿐이었다. 개인적인 휴고 타란 공작은 전혀 알지 못했다. 꿈속에서는 그와 단 한 번의 인사조차 나눠본 적 없었다. 늘 멀찍이 보기만 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를 보며 나름 머릿속으로 그리던 그에 대한 이미지가 있었는데, 그게 다 와장창 깨져버렸다. 그는 그녀의 예상을 훨씬 뒤엎을 정도로 무자비했고, 동정심이 없었다.

‘계약 결혼…? 그 말 꺼냈다가는 가당치 않은 소리 한다고 화낼지도 몰라.’

그리고 그가 화가 나면, 대가는 목숨이었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을 때 고맙게도 그가 종지부를 찍어주었다.

“나오시오. 고양이처럼 숨어 엿듣는 건 이제 끝이오.”

루시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주 잠시 더 숨을 죽였지만 아무래도 자신을 칭하는 것이 분명했다. 도망은 글렀다고 생각하고 천천히 웅크린 몸을 펴고 일어났다. 역시 그는 루시아가 있던 방향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엿들으려 한 것이 아니라…….”

“대화를 나누기에는 좀 멀지 않나?”

루시아는 쭈뼛쭈뼛 풀숲에서 걸어 나와 그와 몇 걸음 거리 정도까지 다가갔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정말 엿들으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의도치 않게 그러고 말았지만… 절대 여기서 들은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약속드릴게요.”

“그건 됐고. 할 말이 뭐요?”

“…예?”

“내게 할 말이 있어서 며칠 내내 날 쫓아다닌 것 아니었나?”

그는 대충 여자의 목적이나 듣고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조금 전까지의 흥미는 이미 다 식어버렸다.

‘헉.’

알고 있었어? 계속 스토커 짓한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이야? 루시아는 당황해서, 아니, 창피해서, 둘 중 어떤 감정이 우선하는지 알 수 없어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식은땀이 나려는지 등에 한기가 들었다.

밀랍 인형처럼 굳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여자를 보며 휴고는 기분이 좀 나아졌다. 멀찍이 봤을 때와는 좀 느낌이 달랐다. 차분한 목소리는 맑아서 듣기가 좋았고, 표정은 훨씬 생동감이 있었다. 축 처져있던 모습은 아무래도 피곤해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미인은 아니지만 뭐랄까.

‘귀엽군.’

마치 작은 초식동물 같은. 다람쥐나 토끼 같은? 그는 다람쥐나 토끼 따위를 귀엽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사냥할 가치조차 없는 하찮은 생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모순에는 대단히 관대한 남자였다.

“할 말. 같은 말 여러 번 하게 하지 마시오.”

화내는 건가? 안 돼!

“저기 저는. 그러니까. 계약… 계약을 말씀드리려고.”

“계약?”

휴고는 좀 실망했다. 기대와 달리 매우 재미없는 용건이었다.

“예. 계약입니다. 인생을 바꾸는 계약이요.”

내 인생을. 루시아는 속으로 덧붙였다.

“인생을 바꾸는 계약이라.”

그건 좀 흥미롭군. 그는 흐음, 중얼거렸다.

“자신이 누구인지 소개하는 것이 너무 늦지 않았소?”

“아, 예. 물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말씀드렸듯이 중요한 계약이라…….”

루시아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지금은 이 자리를 벗어나고 나중 일을 생각하고 싶었다.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기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제가 누구인지, 계약 내용이 무엇인지 전부 다요.”

무슨 수작인가 미심쩍어 그녀를 보다가 일단은 호응해 주기로 했다. 그의 기감으로 주변에 그들 외에 사람은 없었지만, 정말 그렇게 중요한 내용이라면 안전을 기하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이득이 될 계약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어쩌자는 거요?”

“제가 공작저로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그는 잠시 생각했다.

“좋소. 언제?”

“훗날 연락드리겠습니다.”

지금껏 그는 수많은 계약을 맺었고, 맺을 것이지만 늘 그는 갑이었고, 앞으로도 갑일 것이다. 그는 갑이 아닌 계약 따위는 맺지 않는다. 그녀가 말하는 계약 역시 먼저 제시한 사람은 그녀이니 이번에도 그가 갑이었다. 그런데 마치 입장이 뒤바뀐 것처럼 행동한다. 둘 중 하나였다. 뭘 몰라 겁을 상실했거나, 정말 고단수이거나.

“지금 나보고, 언제 올지 모르는 연락을 기다리라는 건가?”

루시아는 삐질 등 뒤에 식은땀이 솟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의연하게 되받아쳤다.

“그 정도는 감수하셔야지요. 인생을 바꾸는 계약이니까요.”

그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루시아를 주시했다. 지금껏 그에게 이런 되지도 않는 짓거리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봐도 이 여자는 그에게 사기를 칠 만큼 간이 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겁 많아 보이는 커다란 눈을 해서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는 것이 제법 앙큼했다.

“그 말 그대로이길 바라겠소. 내가 그렇게 관대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거든.”

루시아는 관대한 ‘적’이 없는 거라고 그의 말을 정정해 주고 싶었다. 협박이 생활인 남자였다. 어쩌면 자신은 타란 공작이라는 사람에 대해 처음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하나는 알겠다. 이 남자는 절대 신사가 아니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 * *

루시아는 상담이 필요했다. 누군가와 이 고민을 나누고 싶었다. 그녀 주변에 적절한 사람이라고는 놀만뿐이었다. 놀만은 루시아보다 나이도 많고 ―꿈속 기억까지 따지면 루시아가 훨씬 더 많겠지만― 다양한 소설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삶의 경험과 상상력이 풍부했다. 도움이 될 것이다.

놀만에게 모든 사실을 다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놀만은 루시아를 시녀로 알고 있었다. ‘제가 사실은 공주이고, 타란 공작을 상대로 계약 결혼을 시도하려 하는데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하고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놀만. 내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데요.”

루시아는 최대한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가령 내 인생 앞에 두 가지 길이 있어요. 가만히 두면 왼쪽 길로 갈 것이 분명해요. 어떻게 될지 뻔해요. 죽도록 고통스럽고 힘들 거고요. 그런데 오른쪽 길로 가도록 시도는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시도가 성공할지 실패할지 알 수 없고, 성공하면 오른쪽 길이 어떤 길인지는 전혀 몰라요. 왼쪽 길보다 나을 수도 있지만 더 최악일 수도 있겠죠. 놀만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어요?”

“나라면 오른쪽으로 가보려고 시도할래.”

“…망설이지도 않네요.”

“왼쪽으로 가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안다며. 그것도 행복한 것도 아니라 괴로울 것이라는 사실을. 그럴 거면 질러놓고 보는 거지. 만약 오른쪽 길이 더 괴롭다 해도 내가 선택한 거니까 미련은 없을 거야.”

“미련…….”

“그리고 앞으로 어찌 될지 안다면 얼마나 재미없니? 인생은 원래 예측할 수 없어야 살 만한 거야. 지금 괴로워도 내일은 어쩌면, 이런 희망이 있어야 살 수 있는 거지.”

“우와. 놀만. 마치… 현자 같아요.”

“푸하핫. 현자는 무슨. 내가 원래 내일 같은 거 모르고 사는 사람이잖아. 인생은 도박이야. 한 방이라고.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뭔가를 얻을 수는 없어.”

놀만 말대로 이건 도박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건 도박이다. 만약 이 도박이 성공해서 공작부인이 된다면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혼을 해서 전(前) 공작부인이 된다고 해도 최소한의 품위 유지는 보장받을 것이다. 꿈꿔온 아늑한 이층집 같은 것이 더는 꿈만이 아닐 것이다. 꿈속에서 펼쳐진 그녀의 인생은 너무 고달팠다. 아무 고민 없이 평온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 지르는 거야. 인생은 한 방.’

애써 낸 용기가 사라지기 전에 루시아는 놀만의 집을 나와 곧바로 타란 공작저로 향했다. 길 가던 아무나 붙들고 물어도 알고 있는 공작저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순조로운 건 거기까지였다. 굳게 닫힌 거대한 철창문 앞에 서자 숨이 턱 막혔다. 부푼 용기 주머니가 다시 쪼그라들었다.

‘왜 아무도 없지?’

대체 어찌 된 일인지 공작저 대문 앞에 근위 병사 하나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야 해?’

근위 병사가 누구냐 위압적으로 물으면 어물거리다 오히려 도망쳤을지도 모르면서 막상 아무도 없자 괜히 억울했다. 분풀이처럼 철창문을 확 밀었는데 스윽 문이 열린다.

‘헉……. 열려있네.’

열린 문 안쪽을 몇 번 고개를 들이밀며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명색이 공작저인데 들어가면 곧 누군가 보이겠지 기대했다. 그러나 제법 한참을 걸어도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허술하지? 여기 공작저가 맞기는 한 거야?’

“누구쇼?”

두리번거리며 조심조심 걸어가는 루시아 앞에 불쑥 한 남자가 나타났다. 루시아는 놀라 헉, 숨을 삼키며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남자는 루시아를 놀라게 한 것을 전혀 미안해하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들이밀며 이리저리 그녀를 살폈다.

“보아하니 여기서 일하는 사람 같지는 않은데 여기서 뭐 해?”

건들거리는 태도에 무례한 말투. 막돼먹은 붉은 머리 남자는 겉보기에 그럴듯한 기사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가슴에 흑사자 문양이 선명했다. 루시아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그대는 공작가 기사인가?”

남자는 얼씨구, 이건 뭐야. 중얼거리며 루시아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렇소만?”

“전하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글쎄올시다. 전하는 왜 찾으시오?”

“비록 무례하게 이렇게 갑자기 방문했으나 전하께 말을 전해줄 수 있겠는가? 휴고 타란 공작을 뵙기를 청하오.”

“그래서. 댁은 뉘시오?”

“나… 나는 전하께 중요한 말씀을 드릴 것이 있소. 전승 파티에서 계약을 제안했던 사람이라 전하면 분명히 만나주실 것이오.”

“난 그런 건 모르겠고. 댁은 누구냐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주군께 데려갈 수는 없잖아. 귀족은 아닌 것 같고. 상인인가?”

루시아는 귀가 화끈거렸다. 도무지 지금 차림새로는 공주는커녕 귀족 아가씨라고 주장하기도 힘들었다. 곤욕을 당하고 끌려 내쳐져도 할 말 없었다. 차라리 심부름꾼이라고 말을 전해달라고 할 것을 그랬다. 하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비록 이런 차림이지만 전하를 뵙기에 부족할 것 없는 고귀한 신분이오.”

가만히 루시아를 바라보던 남자가 휙 몸을 돌렸다.

“따라오슈.”

* * *

쾅쾅, 주먹으로 내리치는 소리에 뒤이어 답변을 하지 않았음에도 ‘나, 들어가요.’ 하며 벌컥 문을 열고 적발의 사내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집무실 안쪽 널찍한 책상 앞에 암흑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의 사내가 곧은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는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녀석을 확인하며 시선을 다시 내려서 서류에 서명했다.

“제롬은.”

그의 충직한 집사가 있었다면 저 녀석이 이런 만행을 저지르도록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나간다던데. 이유를 듣긴 했는데 잊어버렸소.”

어지간히 급한 용무였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녀석만 남겨두고 자리를 비웠을 리가 없다. 아마 장시간 자리를 비울 것은 아니라서 방해가 될까 봐 그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것 같다.

“너랑 놀아줄 시간 없다. 혼자 놀아.”

“…참 나. 맨날 철없는 꼬마 취급이라니까.”

그래 봤자 나보다 몇 살 많지도 않으면서. 적발 사내는 구시렁거렸다.

“철없는 꼬마면 혼내기라도 하지.”

“…우와. 대련을 빙자해서 그렇게 두들겨 패고도 그 말이 나오시오?”

“그건 귀여워해 준 거고.”

“아우 씨!!”

씩씩대며 울분을 터뜨리는 반응을 즐거워하며, 휴고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사라졌다. 감정 표현에 인색한 그를 그나마 웃게 하는 건 녀석이었다.

“손님 왔소.”

“오늘 일정에 그런 거 없다.”

그를 만나려고 안달복달하는 사람들을 줄을 세우면 끝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자들을 일일이 다 만나 주었다가는 밤을 새워도 부족하다.

예의는 차린답시고 대개 편지를 보내왔지만, 막무가내로 찾아오고 보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안 된다는 근위병의 경고는 예사로 무시했다. 무조건 응접실을 차지하고 앉아서 근위병에게 고지하고 들어왔으니 반허락은 받은 것이라 주장하는 뻔뻔한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결국, 아예 대문의 병사를 치웠다. 대문을 넘어오면 무조건 무단 침입으로 간주했다. 그렇게 들이닥친 귀족 몇의 목에 검을 겨누어 주었다. 목의 살갗이 살짝 베여 흐르는 피에 혼비백산 달아나더니 그 후에는 누구도 감히 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신 그에 대한 악명은 더 높아져 하늘을 찔렀다.

“되게 재밌는 손님인데. 만나보시죠?”

“아는 사람이냐?”

“그건 아닙니다만 겉으로 보기에는 영 아닌데 본인이 귀한 분이라고 주장합디다.”

적발 사내는 킬킬대며 웃었다.

“그런 것 치고는 차림새도 그렇고 수행원이고 뭐고 없이 혼자인데 되게 당당하오. 재밌지 않소? 대체 뭔 용무로 주군을 보러 온 건지 몹시 궁금하단 말이오.”

눈을 반짝이는 적발 사내, 로이를 보며 휴고는 혀를 찼다. 일하는 중에 난입해 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손님을 만나보라 떼쓰는 꼴이라니. 집사 제롬이 알았다가는 길길이 뛸 일이었다. 제롬이 돌아와 이 사실을 알면 족히 두 시간은 꼼짝없이 붙들려 퍼붓는 비난을 들어야 할 것이 빤한데 곧 있을 일보다는 당장 재미가 중요한 로이다웠다.

안 그래도 심심해 죽겠다고 노래를 부르던 녀석이었다. 안 된다고 하면 그를 무척 성가시게 할 것이다. 마침 그도 끝이 보이지 않는 서류 작업이 지루해지던 참이었다. 잠깐 머리를 식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다른 말은 전혀 없고?”

“그……. 뭐더라. 일단은 여자요.”

당연히 남자일 줄 알고 가볍게 생각했던 휴고가 사납게 눈썹을 추켜세웠다. 로이는 데인 것처럼 움찔하며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전승 파티? 거기서 계약 어쩌고 하던데요. 주군께서 꼭 만나줄 거라고.”

휴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파티 이후 열흘 넘도록 무소식이라 그는 슬슬 그 여자의 의도를 의심하던 중이었다.

“손님은 어디로 모셨지?”

“응접실이요. 아, 혼자 두진 않았소. 하녀에게 차를 갖다 주라고 했지. 내가 그쯤은 아오.”

으스대는 꼴이 퍽 한심해 보였다.

루시아의 맞은편에 두 남자가 앉아있었다. 루시아는 차를 마시는 척하며 계속 그를 곁눈질했다. 정말 그와 이렇게 마주앉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신기했다.

‘진짜… 타란 공작이야…….’

흑발과 피처럼 붉은 눈. 강렬한 색상의 대조에 처음 보는 순간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남자. 그는 한 번이라도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강한 인상을 지녔다. 지난 전승 파티 때 그와 대화한 것이 처음이고, 이렇게 밝은 곳에서 그와 가까이 마주 앉은 것 역시 처음이다.

“내가 집에 있는 줄 알고 온 건가?”

“아… 아닙니다. 안 계시면 말씀만 전하려 했습니다.”

그는 목소리마저도 지독하게 외모와 닮았다. 무겁고 낮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날카롭고 그러면서도 귀에 쏙 들어오게 선명했다. 이 남자는 목소리까지도 근사하구나, 그날 풀숲에 쪼그리고 앉아 그런 생각을 했다.

‘난… 외모며 목소리며. 이런 것들에 정말 쉽게 흔들리는구나.’

꿈속에서도 그래서 호되게 당했으면서 정신을 못 차린다. 겉만 멀쩡한 남자한테 홀딱 빠져 모아둔 재산을 홀랑 날렸었지. 아무리 쓴 대가를 치러도 사람 본성이란 그리 쉽게 변하는 게 아니었다.

‘메튼 백작. 그자 때문인지도 몰라.’

남자라고는 모르고 궁에 갇혀 살다가 남편이라고 처음 접한 남자가 나이 많고, 뚱뚱하고, 짤막한 키와 못난 외모, 거친 목소리를 가졌다. 이후에는 정반대의 남자에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미남이라고 좋은 남자는 아니지만…….’

눈앞의 남자가 증거였다. 이 남자는 나쁜 남자다. 여자 마음을 아주 우습게 가지고 놀았다. 다 알면서도 루시아는 자신이 소피아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 자신을 할 수가 없었다. 저 얼굴로, 저 목소리로 달콤한 말을 해주면 과연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정신 차리자. 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루시아는 흔들거리는 마음을 단단히 잡았다.

“사전 약속도 없이 방문한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뒤늦게 인사드리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저는 국왕 폐하의 열여섯 번째 공주, 비비안 헤세입니다. 고명하신 분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큭.”

루시아가 ‘열여섯 번째 공주’라는 말을 할 때 웃음이 터졌다. 루시아를 안내해 저택 안으로 데려온 적발의 남자였다. 남자의 웃음이 불쾌한 건 아니었지만, 공작가 기사치고는 참 경망스럽군, 생각하다가 적발 남자가 누군지 기억해 냈다.

‘로이… 크로틴’

타란 공작의 충성스러운 수하. 그리고 사람들이 적발의 사내를 칭하는 또 다른 호칭이 있었다. 광견 크로틴. 그가 저지른 만행들은 부풀려진 것이겠지만, 그중 반만 사실이어도 미친개라고 불릴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전하의 귀한 시간을 아끼기 위해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전하께 청혼을 드리러 왔습니다.”

루시아는 말을 끝내자마자 숨을 죽였다. 잠시의 정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미 물은 엎질렀다. 되돌릴 수 없다 생각하니 한편으로 후련했다. 루시아는 계속 그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잠깐 그의 눈썹이 꿈틀했을 뿐 그는 놀랍도록 냉정함을 유지했다. 격렬한 반응은 옆에서 터졌다.

“푸하하하하하!!”

로이가 죽어라 웃기 시작했다. 흡사 미친 것 같은 폭소는 타란 공작이 그를 싸늘하게 노려봐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공작이 그의 뒤통수를 퍽 소리 나도록 내리치고 나서야 비명 소리와 함께 웃음이 끝났다.

“아우욱. 죽일 작정이오?”

뒤통수를 움켜잡고 눈물을 찔끔 달며 로이는 공작에게 사납게 대들었다. 지켜보는 루시아가 겁이 날 정도였다. 저래서 미친개인가?

“시끄럽고. 너 나가.”

“에? 왜요? 조용히 입 닫고 있을게요. 진짜~로.”

입을 합 다무는 로이를 향해 쯧, 혀를 찬 휴고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공주라고?’

휴고는 자신을 공주라고 주장하는 여자를 살펴보았다. 그래도 지난 파티 때는 귀족 아가씨처럼 보였지만, 지금 하고 있는 꼴은 거리 나가면 마주치는 평민 여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 공주?

왕실 족보 따위는 관심 없었다. 아마 왕도 자식들 얼굴을 다 모를 것이다. 한둘이어야 말이지. 그래도 진짜 공주는 맞을 것이라고 전제했다. 거짓으로 꾸며대기에는 터무니없는 신분이었다. 열여섯 번째 공주라는, 이상하게 구체적이기도 하고.

그는 여자를 좋아하지만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건드려 껄끄러울 대상은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그에게 필요한 건 하룻밤 침대를 덥힐 여자였고, 내키면 취했다가 버릴 수 있어야 했다. 공주는 그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첫 순위에 속했다. 애초에 접점조차 만들지 않는다. 그녀가 공주라는 것을 알았다면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맹렬하게 두뇌를 회전시켰다. 도무지 여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파티에서 5일이나 쫓아다니며 계약을 하자더니 갑자기 불쑥 나타나 이제는 제가 공주란다. 그러면서 결혼을 하자는 건 또 무슨 속셈인가.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이리저리 튀는 이 여자의 생각을 도무지 모르겠다. 상대의 의도를 전혀 감조차 잡지 못한 건 처음이었다.

“누굽니까?”

“…네?”

“공주님을 이곳에 보낸 사람. 대화를 나누려면 결정권을 가진 사람과 나눠야지요.”

“제가 공주라고 믿어주시는 건가요?”

루시아는 그가 사람을 기만했다고 화를 낼 것을 각오했다. 온갖 모욕을 받아도 참으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거짓말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거짓말은 절대 아닙니다. 저는… 화내실 줄 알았어요.”

“거짓말이라면 화날 겁니다.”

그녀는 지난 파티에서 엿들은 그의 말이 떠올랐다. 등에 쭉 소름이 돋았다. 화날 거라는 단순한 말로 이처럼 공포를 안겨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짓말 아닙니다. 말씀드리지 못하는 건 있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배후는 없습니다. 결정권은 제가 가지고 있어요.”

“공주님이 여기 오신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비비안 공주가 궁을 나왔다는 것은 누구도 모릅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분명히 공주 비비안의 시녀 자격으로 출궁했다. 공주 비비안은 지금 얌전히 별궁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는 나중에 확인하겠습니다. 지난번에는 계약을 제안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은 전혀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엉뚱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 계약을 제안하는 겁니다. 결혼이라는 인생을 바꾸는 계약을요. 그른 말씀을 드린 적 없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는 화낼 타이밍을 잊고 있었다. 이제 슬슬 부글부글 배 속이 거북해지기 시작했다. 시간 낭비, 헛소리. 그녀는 그가 싫어하는 짓을 골라 하고 있었다. 그는 차갑게 조소했다.

“지금 나와 말장난하자는 겁니까?”

“제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말씀을 드리는지, 갑자기 이런 말을 듣는 전하께서도 불쾌하시다는 것도 이해합니다. 저는 다만 전하께서 저와 결혼해서 얻는 이점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듣고 나서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많은 시간을 빼앗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귀찮게 해드리는 일도 없을 겁니다.”

순한 토끼 같은 인상의 자그마한 여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나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진지한 눈동자는 똑바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승전 파티에서 봤던 간절한 눈이었다. 뭔가를 바라는데 탐욕은 없는 신기한 눈빛이었다. 그래서 승전 파티에서도 내내 신경이 쓰였다.

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어가며 상대해 주는 것도 저 눈 때문이었다. 그는 조금 더 시간 낭비를 해보기로 했다.

“좋습니다. 들어보지요.”

“저……. 그전에. 옆에 계신 분은 자리를 피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니 왜요!”

초롱초롱한 눈으로 앉아있던 로이가 버럭 소리쳤다. 모처럼 재밌는 구경거리를 놓치게 생긴 로이는 거세게 반발했다.

“솔직히 공주님이 여기서 주군이랑 앉아있을 수 있는 것도 순 내 덕이라는 거 아쇼. 이런 식으로 뒤통수치면 안 되는 거란 말이요!”

“음, 감사해요. 그리고 죄송하고요. 하지만 지금부터 드릴 말씀엔 제 개인적인 내용이 들어있어요. 어쩌면 제게 치명적인 내용일 수도 있거든요.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 정도쯤은 이해해 주실 수 있을 거라 믿어요.”

“내가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닐 것도 아닌데……. 근데, 혹시 날 알아요?”

“아? 아……. 음……. 유… 유명하신 분이니까.”

“내가? 내가 그렇게 유명했나…….”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하는 로이를 보며 루시아는 식은땀이 났다. 먼 훗날 그가 유명한 건 분명히 사실이었지만, 어쩌면 지금은 아닐 수도 있었다.

‘잘 다루는군.’

날뛸 것 같던 로이를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단번에 얌전하게 만드는 것을 보며 휴고는 픽 웃었다. 로이는 귀한 아가씨가 상대하기 결코 편한 쪽이 아니었다. 적발에 커다란 체구,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걸러 말할 줄 모르는 무례함에, 큰 목소리는 마치 윽박지르는 것 같다. 하지만 알고 보면 녀석보다 단순한 생명체는 없었다. 고집 센 대형견이라고나 할까. 종잡을 수 없지만 재미있는 여자였다.

“나가 있어라.”

“…쳇.”

로이는 다소 구시렁거리기는 했지만 순순히 나갔다. 막상 둘만 남게 되자 루시아는 살짝 긴장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머릿속의 시나리오를 정리했다. 이건 도박이었다. 그녀는 주사위를 던졌다.

“저는… 전하께 후계로 삼은 아들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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