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열여덟 살 (2)
투구를 벗자 새카만 머리카락이 후드득 어깨로 떨어졌다. 하인들이 사방에 달라붙어 가죽 매듭 끈을 풀어서 주인의 가슴과 양팔, 양다리에서 갑옷을 벗겨냈다. 그는 전쟁터에서조차 이렇게 꽁꽁 싸매는 무장을 하지 않는다. 골머리를 쑤시는 비명 같은 환호성을 받으며 광대처럼 길거리를 행진하고, 왕의 사병이라도 된 것처럼 줄을 맞추어 사열식을 한 것까지는 간신히 참을 만했다.
“여기저기 그림 같은 것 좀 걸어놓지 그러나? 너무 삭막하잖아.”
그의 신경을 더 거슬리게 하는 존재는 따로 있었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그의 개인 공간까지 멋대로 들어와 평가질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있다는 걸 빤히 보면서도 뻔뻔한 손님은 휘휘 고개를 돌리며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여긴 제 침실입니다.”
“엄밀히 침실은 아니지. 침실에 딸린 응접실이지. 손님을 맞기에 적절한 장소라네.”
“손님을 맞는 응접실은 1층입니다.”
“내가 오늘이 아니면 언제 공의 저(邸)에 와보겠어. 너무 인색하게 굴지 말게나. 내게 좋은 그림이 있지. 몇 점 보내주겠네.”
그는 부글거리는 속을 꾹꾹 눌렀다. 실제로 그의 표정만으로는 그의 속내를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차가운 가면을 쓴 것처럼 그의 붉은 눈동자는 가라앉아 있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그는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연미복을 차려입었다. 저녁부터 시작될 승전 기념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원래 좀 쉬다가 저녁 느지막이 가려 했다. 함께 가자고 쳐들어온 불청객만 아니었으면.
“참석하는 건 오늘만입니다.”
그는 소매의 커프스를 접으며 버튼을 채웠다.
“알았다니까. 근데 파티가 3일이 아니라 5일이라는데…….”
“딴소리하실 겁니까?”
“알았다고. 이봐, 공. 대체 파티가 왜 싫어? 맛있는 술에 요리에, 아름다운 미녀들까지. 즐겨보지 그러나.”
“술은 와인 장에 충분합니다. 딱히 요리를 찾아 즐기는 미식가는 아니고, 여자는 파티에 굳이 가지 않아도 많습니다.”
“거 참. 꼭 그런 이유만이 아니잖아. 공은 날 도와줘야 한다고. 그러기로 했지 않나.”
“정확히는 왕이 되시면 돕기로 했지요.”
“허어, 대체 나 말고 누가 왕이 될 거라고 그러나?”
태자 퀘이즈의 자신만만한 어조에도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왕 되시고 다시 이야기하지요.”
세상일은 모르는 거 아닙니까? 말하는 것 같은 그의 태도에도 퀘이즈는 그다지 불쾌해하지 않고 그저 탄식만 했다.
“공은 정말 새침한 아가씨보다 꾀기 힘들군.”
“집착하는 남자는 인기 없습니다.”
“음? 어? 공, 그거 농인가? 농이지?”
퀘이즈는 반색했으나 그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출발하시죠.”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 불청객을 그의 휴식처에서 내보내고 싶었다.
* * *
구원자나 다름없었던 의상실 여주인은 결국 어쩔 수 없는 장사치였다. 루시아는 드레스와 수선비까지 평소 시세의 무려 두 배나 지급했다. 여주인 말에 따르면 그 가격이 ‘오늘’의 평소 시세였다. 어울리는 구두와 코르셋, 파니에 등등 필요한 것들 모두 일체로 살 수 있어서 수고는 던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입고 갈 드레스는 구했지만, 화장과 머리를 도와줄 미용사를 섭외하는 일은 결국 실패했다.
다행히 루시아는 대충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만질 줄 알았다. 그래도 아마 전문 미용사가 그녀를 봤다면 대체 누가 이 꼴로 해놨느냐 혀를 찼을 것이다.
루시아는 연회장에 들어설 때부터 이미 지쳐있었다. 몇 시간을 정신없이 돌아다녀 다리가 아팠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화장이나 머리를 몇 번이나 고쳤더니 진이 다 빠졌다.
‘이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지 말아야 할 텐데…….’
꿈이 아닌 현실에서 사교 파티에 처음 참석하는 것인데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아아……. 많다. 사람에 치이겠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시장통에 몰린 것처럼 와글와글 떠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놀기 좋아하는 귀족들이라도 나름대로 전쟁 중에는 자제했던 터라, 무척 오랜만에 열린 화려한 궁중 파티에 잔뜩 들떠있었다. 수도의 모든 귀족이 여기 있을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격이 있는 파티일수록 초대장으로 입장객을 제한했다. 귀족들은 자기들끼리도 급을 매겨 끼리끼리 어울린다. 오늘 같은 자리가 아니면 낮은 급의 귀족이 고위 귀족 얼굴을 구경할 기회도 거의 없었다. 그러니 인맥이 필요한 귀족일수록 오늘 기를 쓰고 참석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안면을 터서 그럴듯한 파티 초대장을 얻을 수 있으면 거기서 또 새로운 인맥을 쌓을 기회의 시작이었다.
반짝이는 샹들리에, 넘쳐 쌓여있는 온갖 진미들, 눈부신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한 여인들과 그들을 맴도는 화려한 연미복의 남자들,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선율. 누구나 한 번쯤 그려보는 환락의 밤이 여기 있었다.
예상보다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혹시라도 그를 찾지 못할까 걱정했으나 그건 기우였다. 사람들의 술렁거림과 몰리는 시선을 좇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 그다…….’
휴고 타란.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는 꿈에서 본 기억보다 훨씬 더 환상적이었다. 전쟁의 흑사자라는 위명만 들어오던 사람들이 실제 타란 공작을 직접 보면 열이면 열 모두 놀랐다. 우락부락하고 거친 무인은 없었다. 그는 대단히 준수한, 아니, 그 이상으로 매력적으로 잘생긴 남자였다.
새카만 흑발과 핏빛의 붉은 눈동자의 선명한 대조에 처음 시선을 빼앗기고 나면 그다음으로 수려한 조각 같은 얼굴이 감탄을 자아냈다. 깊이 음영이 지고 높은 콧대가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는 긴 눈매 가운데에서 기가 막히게 균형을 잡아주었다.
차갑게 다문 입술을 벌려 말을 하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강인한 턱 선으로 이어지는 적당히 도드라진 목울대는 그의 남성성을 드러냈다.
루시아는 잠시 입을 벌려 넋 놓고 보다가 재빨리 입을 다물고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그녀의 추한 모습을 관심 있게 본 사람은 없었다.
‘계약 결혼……?’
루시아는 꿀꺽 침을 삼켰다.
‘과연… 할 수 있을까……?’
너무 수준이 높았다. 감히 네가 눈독을 들일 남자가 아니야. 그녀의 양심 비스름한 것이 속삭였다.
퀘이즈는 신나게 휴고를 여기저기 끌고 다녔다. 엄청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과시하고 싶어했다. 퀘이즈의 입장에서 보면 타란 공작은 보물이 맞았다. 손에 넣고 싶어 아주 공을 들이는 중이었다.
둘 중 누구도 우리가 손을 잡았다고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의 풍부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퀘이즈는 그걸 이용했고, 휴고는 묵인했다.
휴고는 지루한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퀘이즈가 왕이 되면 이런 자리에 지속해서 참석해야겠지만 그때는 그때고, 아직은 태자를 위해 그렇게까지 최선을 다할 생각은 없었다.
‘뭐지……?’
그는 아까부터 끈질기게 자신을 주시하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그는 대단히 예민한 사냥꾼이었다. 누군가에게 겨냥당하는 일에 민감했다.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목표의 대상이 되는 것이 찜찜했다. 그는 티 내지 않고 시선의 주인을 찾았다.
‘여자……?’
시선의 주인은 의외로 여자였다. 아무런 특징 없는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빛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성년은 지난 건가 싶을 정도로 앳되어 보였다. 휴고의 시선이 향하면 여자는 안 보는 척 눈을 돌렸지만, 이미 그는 그녀가 계속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여자들이 자신을 뜨겁게 바라보는 시선에 익숙했다. 하지만 갈색 머리 여자의 시선은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뭔가 할 말이 가득한 표정으로, 초조함이 언뜻 묻어나면서 때로는 간절함을 담은 눈을 하고 있었다.
‘할 말이 있으면 오겠지.’
그는 관심을 거뒀다. 그러나 여자의 집요한 시선은 자꾸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이제는 그가 잠깐잠깐 여자가 뭘 하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고, 춤을 추지도 않고 오직 그만 보고 있었다. 아주 잠깐. 짧은 순간이지만, 그가 혼자가 되었을 때 그녀가 한 걸음 내디디려 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 누군가 다가오자 그녀는 이내 다시 물러섰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파티가 끝날 때까지 끝내 여자는 가까이 오지 않았다.
‘도무지… 가까이 갈 수가 없어.’
그는 마치 오늘의 주인공 같았다. 사람들은 절대 그를 혼자 두지 않았다. 같이 있는 사람 중에 평범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미래의 헤세 9세, 태자 퀘이즈는 줄곧 그의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내 끔찍한 결혼의 원흉이 저기 있군.’
배다른 오라비를 보며 루시아는 짧게 감흥을 표현했다. 딱히 태자를 원망하는 마음은 없었다. 비록 반은 같은 피가 흐른다 해도 태자가 루시아를 챙겨줄 의리는 없었다. 배다른 형제 같은 건 원래 남보다 못했다.
결국, 파티가 끝날 때까지 루시아는 말 한마디는커녕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하아……. 어쩌지. 그가 내일도 참석할까?’
그를 과연 내일도 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으나 이번 파티는 그와 대화를 나눌 기회를 엿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루시아는 다음 날도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5일째. 마지막 날이었다. 5일 연속 이어진 파티에도 사람들은 지치지 않는지 홀에 가득했다. 아마 이 파티가 끝나면 체력이 방전되어 한동안 몸져누울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한동안은 사교계가 꽤 한가해질 것이다.
하지만 첫 하루, 이틀에 비하면 사람이 꽤 줄었다. 오늘까지 참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파티광이었다. 혹은 어두운 복도나 눈에 안 띄는 정원에서 함께 즐길 상대를 물색하는 이들이거나.
모든 사람이 파티를 즐기는 건 아니었다. 식욕을 자극하는 성찬들도, 새로운 인연을 트는 일도, 이성과 어울려 은밀한 신체 접촉을 나누는 일도 관심 없이 음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진로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벽 가까이 붙어 무알코올 샴페인을 홀짝이는 쓸쓸한 외톨이는 루시아였다.
5일간 저녁부터 밤까지 서있었더니 다리는 저리고 구두 속 발바닥에서 불이 났다. 바짝 조이지 않았는데도 코르셋은 등과 가슴을 앞뒤로 압박해 숨쉬기가 힘들었다. 코르셋 때문에 배는 고파도 음식은 그저 조금 맛보는 수준이었다.
저렇게 많은 요리들이 먹음직한 냄새를 풍겨도 장식품이나 마찬가지였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일이 번거로워서 지금 한 잔의 샴페인을 들고 입술만 축이며 몇 시간을 버티는 중이었다.
확실히 배가 고프면 우울해지는 건 맞는 것 같다. 루시아는 지금 몹시 우울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뱃가죽이 달라붙을 정도로 배가 고프기 때문인지, 5일간 타란 공작에게 말을 붙이기는커녕 근처에도 못 갔기 때문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어쨌든 두 가지가 거의 동등한 비중으로 그녀를 우울하게 했다.
루시아는 멀찍이 서있는 검은 연미복의 남자를 응시했다. 그의 신체 조건은 사람들 속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했다. 큰 키와 넓은 어깨, 날렵함이 느껴지는 허리까지, 그의 몸은 완벽한 비율과 균형을 드러냈다. 어느 정도 밀착되는 스타일의 연미복 안에 감추어진 그의 몸이 무척 단단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만이 아닐 것이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와 결국 인사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파티는 끝날 것이다. 언제 또 그와의 만남을 시도해 볼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암담했다.
‘그의 얼굴 구경만큼은 원 없이 했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녀는 5일 내내 그를 스토킹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이 짓에 빠져들었음을 인정했다. 그를 시선으로 좇는 일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즐겁게 해주는 근사한 남자였다. 그에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도 재미있었다. 특히 여자들이 가슴을 들이밀며 노골적인 유혹을 하는 모습은 참…….
그는 실로 아름다운 피조물이었지만, 자신의 외모적 매력을 이용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의 표정은 언제나 차갑고 희로애락의 감정이 없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거나, 눈썹을 올리거나, 시니컬하게 웃거나 입술로만 미소 지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사람들은 심기를 살피려고 전전긍긍했다.
그는 존재감으로 사람들을 압도했다. 자연스럽게 주변을 눌러내는 기세를 뿜어냈다. 그건 지배자의 위엄이었고 강자의 여유였다. 그를 멀찍이 보며 감히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타란 공작 외모만 보며 의외라고 고개를 갸웃하지만, 오히려 가까이 대화를 나눈 이들은 공작이 왜 전쟁의 흑사자라 불리는지 이해했다.
강한 수컷 앞에서 주눅이 드는 동종의 수컷과 달리 강한 수컷을 본능적으로 갈구하는 암컷들은 끊임없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루시아는 계속 접근을 시도하는 많은 여자들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는 신분과 재력, 외모와 젊음,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갖추었다. 미혼인 데다가 아직 특정한 상대도 없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 정도의 남자는 없었다. 그는 특등품 중에서도 특특등품이었다. 아마 자신이 조금만 더 자격을 갖추었다면 저 많은 여자들 틈에 끼어들었을 것이다.
‘최소한 가슴만 컸어도 말이지.’
“하아아아아.”
다양한 의미가 담긴 깊은 한숨이었다. 저 멀리 있는 타란 공작과의 간격을 좁힐 가능성이 도저히 없었다.
루시아만큼 지금 이 자리를 힘들어하는, 그 이상으로 지긋지긋해서 미칠 것 같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떨거지들이 대체 언제 입을 닥치고 꺼져줄지 그는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당하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전쟁터가 그리워졌다. 거기라면 얼마든지 다시는 떠들지 못하도록 조용하게 만들어줄 수 있었다. 그에게 악마라 지껄여대던 적장 목을 날려버리는 일에는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당장 근처에 검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는 대체로 자신의 인내심을 믿었지만 완벽히는 아니었다.
휴고의 붉은 눈동자가 한순간 흘낏 한구석을 스쳐 지나갔다. 아주 잠깐이었기에 그가 어떤 여인을 확인하려 한 것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전하군.’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는 아까부터 한자리에서 똑같은 잔을 들고 서있었다. 지난 4일 내내 봤던 연하늘색 드레스는 오늘도 바뀌지 않았다.
그는 사교 파티에 능통하지는 않아도 여인들이 한 번 입은 드레스를 다음 날 연속으로 입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이번처럼 5일 연속 파티라면 최소한 세 벌의 드레스를 마련해서 돌려 입는다. 세 벌의 드레스조차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지독히 가난하다면 오히려 이런 자리에 오지 않는 것이 더 낫다. 그녀는 남들의 비웃음을 살 정도의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돈인가?’
그녀가 그에게 원하는 것이 돈이라면 그냥 와서 달라고 하기를 바랐다. 이유 불문하고 내줄 용의가 있었다. 저 끈질긴 근성에 감탄해서라도.
그는 첫 하루만 참석하려던 원래 계획과 달리 그다음 날도 참석했다. 여자가 또 나타날까 호기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전날과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똑같이 한구석에 서서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매번 똑같은 드레스를 입은 것이 그의 인상에 남기 위한 작전이라면 성공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여자는 두 번째 날에도 결국 다가오지 않았다. 그가 먼저 다가가 말을 붙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승부가 걸린 놀이처럼 느껴졌다.
결국, 그는 5일 연속 파티에 참석하는 기록을 세웠다. 퀘이즈는 몹시 흡족해했지만 태자의 기분을 맞추려고 이런 짓을 한 건 아니었다. 결국 여자는 그에게 오지 못하고 언제나처럼 멀리 거리를 유지했다.
‘아무래도 이 떨거지들 때문이겠지.’
그의 주변에 둘러서서 열심히 떠들고 있는 자들은 나름대로 타란 공작의 기억에 남았다고 기뻐하고 있겠지만, 실상 휴고가 등 돌리면 그의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워질 자들이었다.
‘아무도 없으면 올 것 같은데……. 사람들 눈 닿지 않는 곳으로 피해볼까.’
5일이나 계속 참석한 덕에 그에 대한 폭발적 관심은 그래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렇게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던 퀘이즈도 오늘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실례하겠소.”
휴고가 양해를 구하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자 사람들은 아쉬운 얼굴로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볼일을 보러 가는 것이려니, 그들은 다시 돌아올 공작을 기다리며 자기들끼리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어라?’
이제는 습관적으로 그를 보고 있던 루시아는 돌발 상황에 당황했다. 그는 이리저리 이동하는 편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은 몰려들었다. 그가 갑자기 혼자 어디론가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루시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가 간 방향을 가늠하며 뒤를 따랐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휴고는 느긋하게 걸었다. 이미 기척으로 뒤를 누군가 따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내가 뭐 하는 짓인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자의 말 한마디 듣자고 굳이 자신이 이러는 모양이 꽤 우스웠다. 그는 쓸데없는 호기심에 시간을 낭비하는 편이 아니었다. 이번 경우도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침대로 데려가고 싶은 그런 종류의 관심은 아니었다. 그에게 여자는 두 부류였다. 침대로 데려가고 싶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렇지 않은 여자에게 호기심이 든 건 처음이었다.
‘요즘 좀 무료하긴 했지.’
팽팽한 긴장감, 광기에 휩싸인 병사들의 함성, 뜨겁고 진득한 피의 느낌. 그런 것들이 그리웠다. 잠시 전쟁터를 떠올린 그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어쨌든 지금 그는 여자의 목적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했다.
그는 동쪽의 정원으로 나왔다. 달이 가장 밝게 비치지만 그래서 밀회는 즐기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그나마 숨어서 운우지락을 즐기는 이들이 가장 없을 만한 곳이었다.
아직 물을 채우지 않은 분수대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사방 어느 정도 주변이 트인 곳이었다. 사람이 없으나 으슥하지 않았다. 그는 장소 선택에 만족했다. 바스락, 마른 잎을 밟는 소리에 그는 몸을 돌렸다. 나타난 여자를 확인하자마자, 아주 조금 품었던 즐거움이 날아가 버렸다.
“휴고…….”
풍성한 금발이 달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을 발했다. 미모만큼이나 매혹적인 몸매를 지닌 미녀의 등장에 그는 표정을 굳혔다.
“이름을 허락한 건 과거의 일이오, 레이디 로렌스.”
미녀는 큰 충격으로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중하고 차가운 말투로 그는 선을 그었다. 그의 이름을 부를 자격을 빼앗고 전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젖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소피아는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례하였습니다, 전하.”
“내가 산책을 방해하였소?”
“아닙니다. 제가… 전하께서 이쪽으로 오시기에…….”
“자리를 비켜주면 고맙겠소.”
“잠시면… 잠시면 됩니다. 전하. 제발…….”
그가 낮게 한숨을 흘렸다.
“우리가 나눌 말이 남았던가?”
“…매정하십니다. 어찌 그리 차갑게 자르십니까. 한때는 그래도 마음을 나누었다 믿었습니다,”
울먹이는 미녀의 호소에 그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레이디 로렌스. 난 누구와도 마음 같은 건 나누지 않소. 침대는 나누지만.”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소피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어깨를 들썩였다.
휴고는 위로는커녕 차가운 눈으로 뒷짐 지고 보기만 했다.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가 밤놀이 대상에서 미혼 아가씨들을 제외하기 시작한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번번이 룰을 위반한다. 더 이상 보는 것도 곤욕스러워 등을 돌렸다.
“이야기가 길어져 서로에게 도움될 건 없소.”
소피아는 벽을 세우며 등을 보이는 그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그의 차가움이 믿기지 않았다. 하염없이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점점 원망은 사라지고 뜨거운 감정이 솟았다. 소피아는 달려가 등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한 허리를 두 팔로 감고 너른 등에 고개를 묻었다. 오랜만에 접하는 그의 온기에 가슴이 벅찼다. 그와 보낸 격정적인 밤이 미련으로 달라붙었다. 터질 듯 풍만한 그녀의 가슴이 부드럽게 등을 눌렀으나 그는 앞을 감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무심하게 떼어냈다. 몸을 돌려 한 걸음 간격을 유지하는 그를 보며 소피아는 비참함에 몸을 떨었다. 그는 아주 완벽하게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제가 무얼 그리 잘못하였습니까? 정인께 연모의 정을 고백하였을 뿐입니다. 그 보답이 이별을 선언하는 장미꽃이라니 잔인하십니다.”
“여인이란 참.”
그가 혀를 찼다. 어찌 그리 어리석은가, 말을 하는 것처럼.
“내가 분명히 처음부터 이르지 않았던가. 그대 마음을 잘 간직하라 하였지. 그대는 내게 그러겠다 약조했고. 모른다 할 참이오?”
소피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에게 사랑한다 말을 꺼내면 버려진다는 걸 소피아도 알고 있었다. 소피아 이전에 많은 여자들이 그리되었으니까. 하지만 차가운 저 남자가 다정히 이름을 불러주고 뜨겁게 안아주면 그런 건 다 잊고 말았다.
나는 달라. 나는 그의 인연이야. 나는 특별해.
다른 여자들이 범하는 어리석은 실수를 결국 소피아 역시 답습했다. 소피아는 그의 ’전(前) 여자들’의 하나로 전락했다.
“다시… 시작할 수는 없을까요? 전하. 다시는 마음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다른 여인을 취하셔도 좋습니다. 곁에 있게 해주셔요.”
“그대는 아름다운 꽃이었소. 레이디 로렌스. 나는 정원에서 그 꽃을 꺾어 화병에 꽂아두었지. 하지만 화병의 꽃은 언젠가 시드는 법이라오.”
시들어 버려진 꽃이 되어버린 소피아의 꼭 다문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그녀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그와 연인이 되었을 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는 다정하고 격정적인 연인이었다. 값비싼 선물들을 안겨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침대에서 슬쩍 뭐가 예뻐요, 말하기만 하면 다음 날 그녀의 것이 되었다. 그가 준 목걸이나 귀걸이를 보란 듯 자랑하며 온갖 파티에서 과시하고, 은근히 그와의 관계를 드러내도 그는 뭐라고 하는 적 없었다.
어느 날, 어느 무도회에서 아마도 과거에 그의 여자였을 것이 분명한 여인이 소피아에게 경고했다.
“그의 곁에 하루라도 더 오래 있고 싶다면, 다가가지 마요. 언젠가 장미꽃을 받을 그날까지 즐기세요. 레이디 로렌스.”
당시에는 질투하는 여자의 헛소리로 들어 넘겼다.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소피아는 그에게 너무 깊이 빠져버렸고, 그는 이별을 선언했다. 노란 장미 꽃다발과 함께.
“팔콘 백작부인은 딴 사내가 꺾어 이미 시든 꽃이 아닙니까?”
그에게 이별 선언을 들은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그에게 달려온 이유는 그가 근래 가까이한다는 여자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다. 팔콘 백작부인은 결혼한 남편 셋이 모두 죽은 사실로 유명한 여자였다. 자신을 버리고 선택한 여자가 그런 여자라는 사실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휴고는 슬슬 불쾌해졌다. 그의 시선이 흘끗 풀숲을 향했다. 누군가 아까부터 두 사람 대화를 숨어 듣고 있었다. 휴고는 그 여자일 것이라 확신했다. 그의 애초 목적은 옛 여자의 미련 섞인 투정을 듣는 일이 아니었다. 숨어있는 저 여자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는데 그 약간의 호기심도 이제는 성가셨다.
“내 침실의 일은 그대가 관여할 바가 아니오. 정도를 넘지 마시오.”
“불길한 여인입니다, 전하. 단지 전하의 존체에 해가 미칠까 염려되어 드리는 말씀이어요.”
소피아를 침대로 데려갈 때 그는 꽤 공을 들였다. 여자의 접근에 응한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다가가 춤을 청하고 침대로 유혹한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가 그전까지 즐기던 여자들과 스타일이 다른 미녀였다. 더 아름다웠고 덜 속물다웠다. 이후에는 그 반대되는 여자를 찾을 생각이었다.
“레이디 로렌스.”
그의 목소리가 유독 차가워서 소피아는 흠칫했다.
“난 감정 소모를 싫어하는 사람이오. 그래서 화를 내지 않지. 화를 낸다는 건 상당히 불쾌한 감정 소모거든. 나를 화나게 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오. 지금껏 그 대가는 목숨으로 받았지.”
소피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날 화나게 하지 마시오.”
소피아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창백한 안색으로 그를 보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뛸 듯이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보던 그가 정확히 시선을 한곳에 고정하며 말했다.
“나오시오. 고양이처럼 숨어 엿듣는 건 이제 끝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