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만물수리점 - 반달빗(4)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거기서 뭐하냐? 안 춥냐?”
베란다로 머리를 내민 해명이 수호의 시선을 따라 건조대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아…저거 보고 있었구나. …아? 어? 쟤야?”
해명 도령 주제에 둔한 소리 하지 말라고 쏘아붙이고 싶어도 언제 부적을 사용하게 될지 모르니 말을 아껴야 했다. 수호가 얼굴을 찡그리며 요괴를 노려보는 동안 해명은 조심성 없이 성큼성큼 걸어서 건조대 아래로 갔다.
저러다 공격당해도 다치지는 않을 테니까 하고 내버려 두었으나 의외로 요괴 역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수호를 경계하고 있어서라기보다 해명을 경계하지 않아서, 라는 쪽인 것 같았다.
“야아, 정말 조그맣구나. 난 노앵설 정도인가 생각했는데. 어이, 너 거문고를 잘 탄다며? 듣고 싶었는데 연주 안하고 있어서 서운했어. 지금이라도 들려주지 않을래?”
설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수호는 어이가 없어서 들고 있던 부적을 꽉 쥐어서 구길 뻔했다. 해도 말려야 할 판에 부추기고 있다니. 게다가 요괴가 그런 말을 듣는다고 순순히 연주해줄 리가…없는데 어쩐지 청군여귀의 표정이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 저 요괴가 거문고 타는 것을 즐기지만 그렇다고 거문고를 좋아하는 인간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관련된 전설 중에도 거문고 소리에 이끌려 가까이 갔다가 죽거나 다친 사람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있었다. 게다가 청군여귀를 상대하기가 그렇게 쉬운 거라면 요괴퇴치를 업으로 삼아 온 도사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
“어때? 장구는 없지만 내가 고수 노릇을 해줄 수도 있고.”
해명의 이 말에 요괴의 표정은 분명히 바뀌었다. 표정만 바뀌었을 뿐 아니라 입술을 움직여 “정말?”이라고 소리 내지 않고 물었다. 해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건조대 위에서 파란 치맛자락이 휙 날았다. 작은 몸이 날렵하게 그들을 뛰어넘어 거실에 들어가더니 안방 쪽으로 사라졌다.
‘뭐야? 지금…’
수호는 어안이 벙벙해서 요괴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해명은 좋아라하며 거실로 따라갔다. 금세 안방에서 거문고를 든 청군여귀가 사뿐사뿐 걸어 나온다. 그러더니 치마를 펼치고 앉아 무릎 위에 거문고를 내려놓았다. 그 사이 해명은 주방을 뒤져서 길쭉한 튀김용 대나무 젓가락 하나를 찾아냈다.
왼손 무명지에 골무를 끼우고 오른손에 술대를 잡고 요괴가 해명을 올려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위에서 까만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대놓고 표현하는 것은 아닌데 기대에 차 있다는 것을 수호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해명은 김치통으로 쓰는 것 같은 커다란 플라스틱 밀폐용기를 가져와서는 장구 대신 그것을 퉁 소리가 나게 쳤다. 젓가락으로 장구채를 대신했지만 제법 그럴듯한 소리를 내자 거기에 맞추어 거문고가 맑은 울음을 토해냈다.
아까 들었던 느리고 애조 띤 곡과 달리 가볍고 빠른 곡이었다. 괘를 짚은 왼손이 조금씩 대모로 다가오며 음이 점점 높아지고 술대의 움직임도 함께 빨라졌다. 거문고가 이렇게 높고 맑은 소리를 내는 악기였나 하고 수호는 놀랐다.
다가왔던 왼손이 다시 물러나자 음도 함께 내려앉았지만 속도는 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낮은음이 달음질치듯 이어지는 가운데 맑고 높은 음이 산책하듯 유유히 들려왔다. 단 하나의 술대가 움직임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움직이며 마치 양손으로 연주하는 듯한 소리를 들려주고 있었다.
‘굉장해.’
아까는 홀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애절하면서도 질박한 곡이었는데 지금은 거센 물결에 실려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거문고 소리에 휩쓸려 저도 모르게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듣고 있던 수호는 그 흐름이 절정을 지난 후 점점 느려졌다가 멈춘 후에도 잠시 멍하니 거문고와 요괴를 쳐다보았다.
“멋지다. 다른 연주도 더 듣고 싶은데 그러면 지금 들은 걸 잊어버릴 것 같아서 싫을 정도야. 와아….”
해명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감탄했다. 청군여귀가 마치 사람처럼 볼을 조금 붉히고 뭐라 중얼거렸다. 수호에게 들리지 않았지만 해명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아 물론, 난 시간 많은 걸. 날마다 와줄 수도 있어.”
대답하는 말로 보아 요괴는 해명에게 또 와달라고 한 모양이다. 수호가 즐거운 표정의 사장을 쏘아보았다.
‘날마다 와주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 저 요괴를 쫓아내야 하는 거라니까.’
“그런데 여기는 원래 네가 살던 곳이 아니잖아? 기왕이면 네 집에서 만나고 싶은데.”
다행히 일은 잊어버리지 않은 것 같다. 해명의 말에 요괴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무어라 말했다. 들어보려고 가까이 가자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려 수호를 쏘아보았다. 저 차가운 시선으로 보아하니 호감은 어디까지나 해명에게만 해당되는 것 같다.
해명이 웃으며 “저 녀석은 괜찮아.”라고 말해줬지만 태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요괴가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열심히 말하는 동안 해명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아, 그렇구나.” “응. 그러네.” 같은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역시 우리 생각대로 이 아이는 그 물건을 찾아온 거야.”
요괴와 이야기를 끝낸 해명이 수호에게 전해주었다. 그 물건이란 물론 청군여괴의 생명을 상징하는 어떤 것이다.
“나무 위에 잘 숨겨두었는데 건물 짓느라고 나무를 베어버려서, 그게 잠깐 땅에 떨어져 있는 동안 이 집 가족 중 누군가 주워간 모양이다. 흔적을 따라 여기까지는 왔는데 사람이 없는 동안 집안을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하네. 아마 집에 두지 않고 가지고 다니는 모양이야.”
“그 물건이 뭔데요?”
“손바닥만 한 크기의 반달빗이래. 나무로 만든. 조선시대에 꽤 유명한 얼레빗 장인이 만든 거라, 오래되기도 했지만 예쁠 테니까 분명히 손님에게 물어보면 알 거야. 빗을 찾으면 돌아가겠다고 하니 잘됐잖아.”
싸워서 쫓아낼 필요가 없으니 잘 된 것 같기는 했다. 요괴와 말이 통하니 편하네. 수호는 부러움과 질투를 섞어 감탄했다.
해명의 재촉을 받으며 영숙에게 전화하자 신호가 꽤 울리고 나서야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요. 잠시 후에 다시 전화할게요.”
그 말만 하고서 전화를 끊은 그녀는 말한 대로 잠시 후에 다시 연락해 와서 인수인계를 하던 중이라 통화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제가 간병인 일을 하고 있는데 손이 이렇게 되어서요. 어떻게 계속 하려고 애써봤지만 환자 측에서 컴플레인이 들어와 인계해주던 참이었어요.”
죽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손의 상처가 가벼운 것도 아닌 모양이다. 그녀는 수호에게 청군여귀와 얼레빗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빗을 주면 나가겠다고요? 그게…조선시대에 만든 빗이라고요?”
“예. 청군여귀에게는 생명이 담겨있는 중요한 물건이니까요. 그것만 돌려주시면 잘 해결될 겁니다. 보통 청군여귀가 사람이 사는 곳에 나타나는 일은 거의 없는데 운이 없는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빗은 지금 가지고 계신가요?”
“그게…저는 없는데. 딸 방에서 그런 빗을 본 적이 있는 것도 같고. 딸한테 물어볼게요. 그런데 지금 우리 애가 핸드폰을 수리하려고 맡겨서요. 퇴근하고 나서나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이야기하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영숙이 전화를 끊자 수호는 통화 내용을 해명과 요괴에게 알렸다. 해명이 잘됐다며 좋아하고 요괴는 아까보다 부드러운 시선으로 수호를 보는 것 같았다. 적의를 갖고 있던 상대로부터 호의에 가까운 태도를 끌어냈다고 생각하자 수호도 이런 결과가 싫지는 않았다.
“일도 잘 풀리는 것 같으니, 그럼 전 먼저 갈게요. 미안하지만 아저씨는 버스 타고 가세요.”
“뭐? 왜?”
“오늘 수업 있는 날이거든요.”
“수업? 환한테 가는 거냐?”
“환이 아니라 규자 한자. 임규한. 남의 이름을 맘대로 바꾸면 안 되죠. 제가 유하 누나를 우아 누나라든가 유야 누나라고 불러도 되나요?”
눈살을 찌푸리며 수호가 대꾸했다. 스승이 인간이 된지는 15년이 넘었고 새 이름을 알려준 지도 10년이나 되었는데 해명은 여전히 그를 여우일 때의 이름으로 불렀다.
“시끄러워. 너나 유하더러 전 여친이라고 부르지 마.”
“전부인보다는 낫다고 보고요. 유하 누나나 데려오고 나서 그런 소리 하세요.”
“올 거라니까.”
“그 소리 10년째 들었어요.”
“너야말로 환한테 10년 넘게 배웠으니 그만 하산하지 그러냐.”
수호가 어깨를 으쓱 모으고 그곳을 나가는 것으로 둘의 말싸움 아닌 말싸움은 끊어졌다.
요괴와 함께 남아있는 해명이 별로 기분 좋은 표정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호는 알면서도 이따금 그에게 유하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에 대해 함구하는 것은 수호가 해명에게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불만이었다. 보란 듯이 혼례까지 치르고는 채 몇 달 안 되어서 그녀는 돌연 사라졌다. 해명에게 물어도 “돌아올 거야.”라는 말 밖에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몇 년째 듣게 되자 의문은 불안으로 변하고 불안은 불만으로 바뀌었다. 지금에 와서는 유하에 대한 의문도 의문이지만 자신에 대한 해명의 태도에 더 짜증을 내고 있는 셈이었다.
‘애 취급을 하든지 어른 취급을 하든지 둘 중 하나만 하란 말이야.’
해명이 싫어하는 화제인 줄 알면서도 가끔 유하 이야기를 꺼내는 수호의 내심은 그러니까 복수에 가까웠다.
그러나 복수가 짜증을 가시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연히 기분이 나빠진 채로 스승의 집까지 간 수호는 “흙탕부터 가라앉히라‘며 규한이 정수리를 쥐어박은 후에야 해명과의 말다툼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아프기도 했다.
“네가 묻혀 온 요기는 누구의 것이냐. 또 도령의 집에 갔더냐?”
수호가 면벽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동안 자신의 의자에서 조용히 책을 읽던 규한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안 그래도 매번 스승의 집에 올 때마다 재미도 없는 면벽수련부터 해야 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수호는 질문을 기회 삼아 냉큼 돌아앉았다.
수호가 청군여귀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규한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들었다. 그런 뒤에 사제는 요괴를 직접 보고 느낀 바에 대해서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었다.
규한은 어투가 온유하고 말이 적었다. 수호는 섬세한 외모에 비해 목소리가 굵은 편이었지만 스승을 닮아 나직이 말하는 버릇이 있어서, 두 사람의 대화는 문을 벗어나지 않은 채로 방안에서 떠돌았다.
대화 끝에 청군여귀에 관련된 전설 하나를 이야기해주고 나서, 규한은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집에 온지 한 시간도 안 되었는데 벌써 축객령이었다. 스승과의 수업은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아니어서 수호는 순순히 일어섰다.
“그 옆의 외투를 가져가거라.”
겉옷을 걸치는 수호에게 규한이 말했다. 그가 가리킨 것은 옷걸이에 걸린 회색 모직코트였다. 키가 큰 편인 수호에게도 무릎 아래까지 닿을 정도로 길었다.
“이것까지 입을 정도로 춥진 않은데요?”
어차피 차로 곧장 집까지 갈 생각이었던 수호가 말했으나 스승은 들은 체도 않고, 대화하느라 잠시 덮어두었던 책을 다시 펼쳤다. 더 말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수호는 스승의 외투를 가지고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차에 타자마자 해명의 전화를 받았다.
“아직 요괴랑 같이 있는 거예요? 설마 데리러 와달라는 건 아니겠죠?”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심드렁하게 말했다. 수화기 안에서 “여기 수리점이거든.”하고 대꾸하는 해명의 목소리가 당당하게 울렸다.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내가 아니라 그 청군여귀 때문에, 너 아무래도 거기 다시 가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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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만물수리점 - 반달빗(5)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그 아파트에 다시 가야한다는 것보다 혼자서 청군여귀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수호는 짜증이 일었다.
‘나 없는 동안 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굳이 아저씨 때문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거 수상한데요. 미리 실토할 내용 없어요?”
“없어! 너, 내가 항상 사고만 친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거 안 좋은 버릇이다, 너? 잘못은 내가 아니라 그 아줌마가 한 거라고.”
‘그 아줌마? 손님?’
“너 가고 얼마 안 되어서 집으로 딸이 왔더라고. 손님이 딸과 함께 둘이서 살고 있다고 했지? 아들은 서울에서 유학중이고. 딸은 그동안 청군여귀 때문에 며칠 친구 집에서 잤던 모양인데 옷이랑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려고 잠깐 들렀대. 그래서 만난 김에 빗에 대해 물어봤는데 그 아가씨가 전혀 모르고 있더란 말이지.”
“몰라요?”
“그런 거 본 적도 없다는 거야. 그런데 아무래도 거짓말 같지는 않았거든. 그래서 핸드폰에 대해 물어보니까 고장 안 났다고 하잖아. 딸이 가고 나서 청군여귀랑 같이 이야기를 해봤는데 아무래도 손님이 거짓말을 한 것 같다는 게 우리 결론이었어. 청군여귀는 분명히 집안에 빗이 있었다고 하거든. 그리고 최근에 아들은 집에 온 적이 없고. 그러니까…”
“예? 하지만 빗만 주면 해결될 수 있는 일인데 왜 거짓말을…”
말하던 수호의 머릿속으로 아까 영숙과 통화하던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 빗을 주면 나가겠다고요? 그게…조선시대에 만든 빗이라고요?
그녀는 그때 후임자에게 자신이 하던 일을 인계하던 중이라고 했었다. 손을 다치는 바람에 일을 계속할 수 없어서 직장을 쉬어야 할 형편인 것이다. 수호는 청군여귀가 있는 낡고 좁은 아파트와 손을 다쳤는데도 일을 하려고 출근하던 영숙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청군여귀의 얼레빗은 조선시대에 유명한 장인이 만들었다고 하니 보기에도 아름답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골동품으로서의 가치도 있을 터였다. 빗 때문에 요괴가 자신의 집에 있다면, 그것을 팔아서 다른 사람이 가져가게 해도 되지 않을까. 요괴는 빗을 따라 집을 떠날 테고 자신은 돈을 벌 수 있다…전화를 받던 때에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한 걸까.
수호는 자신이 말하던 중이라는 것을 잊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걱정하고 있었지. 거짓말을 하는 걸 보니 빗을 돌려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내가 직접 손님을 만나서 설득해 보겠다고 안심시키기는 했는데 내가 떠날 때까지도 표정이 안 좋더라고. 그래서 백은호한테 전화했었어. 그녀석이라면 골동품 쪽은 빠삭할 테니까.”
해명도 결국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랬더니 백은호가 귀신 붙은 빗 이야기를 퍼뜨려 놓은 모양이야. 이 바닥 좁으니까 어디에서건 물건이 들어오면 백은호가 금방 알 수 있다고 하네. 뭐 소문 때문에 잘 팔리지도 않겠지만. 그러니까 청군여귀한테 가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 아무래도 예민한 아이라서 실망한 나머지 위험한 짓이라도 할까 걱정되기도 하고.”
요괴가 실망한 것에는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해명의 마지막 말은 수호도 동감이었다. 실망한 요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다. 거문고로 시끄럽게 구는 정도는 요괴의 장난으로 가벼운 편이었다. 가뜩이나 아파트라 주변에 사람도 많으니 자칫하면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
수호는 알았다고 대답한 뒤 곧장 영숙의 아파트로 갔다. 날이 슬슬 저물고 있어서 공기가 더욱 차가워졌다. 차에서 내리던 수호는 스승의 외투를 힐끗 보았다. 20대 중반의 젊은이가 입기에는 부담스러운 디자인의 길고 두꺼운 코트였지만, 저거라도 입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굳이 스승이 챙겨준 옷이기도 하고.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단추를 꼭꼭 잠그고 허리 벨트까지 묶은 다음 그는 종종걸음으로 아파트에 들어갔다.
청군여귀는 늘 하던 습관대로 집안의 높은 곳에 숨어있었지만 수호가 방을 돌아다니며 기척을 내자 안방 장롱 위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처음과 같이 경계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아래로 내려오지는 않는다. 수호는 장롱 위의 그녀를 올려다보며 해명이 한 이야기를 전해줬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해명 아저씨는 몰라도 백은호 아저씨는 믿을 만하니까 말이야.”
수호의 말에 청군여귀가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뭐가?”
수호가 물었지만 그녀는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홱 돌릴 뿐이었다.
“뭐야, 너…혹시 해명 아저씨 무시했다고 화났냐?”
설마 하는 생각으로 물었더니 정말이었는지 청군여귀가 수호를 곱게 흘겨보았다. 삐친 모습을 하면서도 행동에 교태가 있어서 수호는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과연 해명 도령이라는 걸까. 어쩐지 사람보다는 요괴 쪽에서 먼저 그를 알아보는 것 같다.
“농담이었어. 화내지 마. 가족하고 스승님 말고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편하게 느껴져서 그런 거야.”
그의 말에 청군여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여전히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지만 그 표정의 변화만으로도 내심을 느껴서 수호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인지, 상대가 요괴라는 것을 잠시 잊고 그는 아는 사람에게 하듯 말했다.
“일이 해결되고 나면, 수리점에 한 번 놀러와. 아저씨 피리 잘 불어. 거문고와 피리가 어울리나 모르겠지만. 아무튼 거기에서라면 남에게 폐 끼칠 걱정 없이 마음껏 연주할 수 있을 거야. 네가 와주면 아저씨도 기뻐할 거고. 요새 부쩍 쓸쓸해하고 있거든. 본인은 티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인간이 워낙 단순해서 얼굴만 보면 뻔하거든. 뭐 그래서 좋은 거지만.”
그가 말하는 동안 고개를 기울여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청군여귀는 뒤편에서 주섬주섬 거문고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등에 지고 침대 위로 폴짝 뛰어내렸다.
“아니 아니. 지금 연주해달라는 게 아니고.”
수호가 손을 저으며 말하자 청군여귀가 눈을 깜박이며 올려다보았다. 어딘지 서운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수호는 아차 싶었다.
“네 연주가 싫다는 게 아니라. 나도 정말 듣고 싶지만 여기는 아파트라서 옆집이 굉장히 가까워. 큰 소리를 내는 건 실례라고. 남들에게 폐가 되니까, 수리점에 오면 연주해 줄래? 그때 나도 꼭 같이 들을게.”
수호의 설명을 알아들었는지 그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장롱 위로 다시 폴짝 뛰어올라가서 커다란 보자기를 끄집어내더니 그것으로 거문고를 꽁꽁 싸맸다. 마치 이곳에 있는 동안은 연주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왠지 영리한 강아지를 훈련시킨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수호는 피식 웃었다.
‘아…강아지는 실례인가.’
하지만 비슷한 정도로 귀엽다는 생각을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
“꼭 다시 들려줘. 네 연주, 아저씨 말대로 잊는 게 아까울 정도로 훌륭했어.”
수호의 칭찬에 청군여귀가 볼을 붉히면서 고개를 숙였다. 기뻐하며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완연해서 보고 있는 쪽도 쑥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어, 어쨌든 말 전해줬으니까 난 간다.”
수호가 손을 흔들고 돌아서자 청군여귀도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려 배웅하는 것처럼 뒤를 따라왔다. 말없이 친근감을 표시하는 작은 요괴가 귀여워서 수호는 소리 없이 웃었다.
어쩐지, 해명이 요괴들을 좋아하는 게 조금 이해가 되었다.
“그만 들어가.”
이러다 문밖까지 따라 나오면 곤란하다고 생각해서 돌아보며 말리자 그녀는 푸른 치마를 휩싸 쥐며 서서는 물끄러미 수호를 올려다보았다. 수호는 키워본 적도 없는 시츄를 연상하고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내밀었다. 그때였다. 청군여귀의 눈이 커다래졌다.
검은자위의 동그란 모양이 완전히 보이도록 크게 뜬 눈에 놀라서 수호의 손이 멈칫했다.
무엇 때문에 놀랐나 싶어 재빨리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 것도 없다. 등 뒤에는 아직 열리지 않은 출입문이 있을 뿐이었다.
청군여귀가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켰다. 처음에는 놀란 얼굴이었던 것이 두려움과 의문에 섞여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봐…”
수호가 영문을 모르는 채로 다가가자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그녀의 몸이 뒤로 휙 물러났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날렵했던 발이 치마 속에서 엉키며 그 몸은 풀썩 쓰러졌다.
‘뭐야? 갑자기 왜…?’
쓰러진 청군여귀의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그녀가 수호의 손 안에서 약하게 몸부림쳤다. 전신이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머리에 닿았던 손이 끈적거렸다. 손바닥을 보자 붉게 얼룩져서 번들거렸다.
‘피?’
머리에 상처가 있나 확인하려는 순간 그녀의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그것에 놀라기도 전에 청군여귀는 가슴을 들썩이더니 입에서 왈칵 핏덩어리를 토해냈다. 푸른 치마 위로 자주색 얼룩이 확 퍼졌다.
“설마…”
귀에서, 코에서, 입에서 피를 흘리며 부들부들 떠는 청군여귀를 보던 수호가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냈다. 번호와 통화버튼을 누르고 그는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빨리 좀 받아…”
신호가 다섯 번쯤 반복된 후에야 “여보세요.”라는 메마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호는 자기도 모르게 크게 외쳤다.
“김영숙씨?”
귀가 아플 정도로 큰 목소리에 영숙은 얼굴을 찌푸리며 전화기를 잠시 귓가에서 떼어냈다. 그랬어도 수화기에서 “지금 어디세요? 빗! 그거 태우셨어요? 김영숙씨! 빗이요!”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도사라더니 정말 귀신같이 알아차린다고 영숙은 생각했다. 나이가 어려 보여서 사이비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도사가 맞기는 맞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집 짓는 데서 나무 태우고 있길래 거기에 넣었어요.”
그녀는 담담히 대꾸했다.
얼레빗 이야기를 들었을 때 거짓말 한 것에 대한 죄책감은 이제 느껴지지 않았다. 추위 속을 몇 시간이나 돌아다녀서 꽁꽁 언 발처럼 감각이 없어졌나 싶었다.
빗을 꺼내라고 소리치는 도사 청년의 목소리를 그녀는 남에게 하는 말인 것처럼 무심히 들었다. 공사 현장은 그녀가 있는 자리에서 15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빈 드럼통 안에 목재 쓰레기를 얼기설기 넣고 불을 붙인 데다 집어던져서, 아마도 나무 사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버렸을 터였다.
그리고 설혹 손에 닿는 곳에 있더라도 그것을 도로 꺼내올 마음이 없었다.
“왜요?”
그녀가 차갑게 물었다.
“그 빗, 그거 태워버리면 그걸 따라온 요괴도 같이 죽는다면서요. 다 들었어요. 빗을 팔러 가니까 골동품 가게 사장님들이 다들 알고 계시더라고요. 그건 아무도 안 살 테니 그냥 돌려주라고 하대요. 아주 짠 것 같이 한결같이들 말씀하시대요. 그런데 왜요? 내가 왜 이걸 돌려줘야 해요? 내가 이것 때문에, 무슨 꼴을 겪었는데.”
“김영숙씨, 심정은 이해하지만…”
도사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뱃속이 꽉 꼬이는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뭘 이해해! 댁이 뭘 이해해요? 나나 딸이나 이제 동네에서 얼굴도 못 들고 다녀요. 우리 보고 뭐라는 줄 알아요? 귀신 붙은 집에서 사는 미친 여자들이래! 내가 병원에 실려 가는 걸 보고서도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생 쇼를 한다고 하고, 경찰도 증거가 어쩌고 하면서 내 말은 믿어주지도 않아요. 대출금에 아들 등록금에 책값에 생활비에 들어갈 돈은 산더민데 난 손 나을 때까지 일도 못해요! 우리 딸은! 몸도 약한데 쉬지도 못해요. 이제 나 때문에 더 힘들어졌어. 댁이 뭘 이해해! 뭘 알아?”
지나가던 사람들이 놀라서 쳐다보는 것도, 공사장에서 인부들이 힐끗거리는 것도, 그리고 전화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모르고, 그녀는 길거리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수화기로부터 긁어내리는 듯한 울음소리가 넘쳐흘렀다. 수호는 영숙에게 뭐라고 말을 하지도, 그렇다고 전화를 끊지도 못하고 손을 늘어뜨렸다. 그의 앞에서 청군여귀는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온 몸의 구멍에서 피를 쏟아내며 꿈틀거렸다. 얼굴도 옷도 누워있는 바닥도 붉은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해명이 오면 살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전에 그녀가 죽게 될 거라는 것을 수호는 알고 있었다.
10년 동안 스승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술법은 없었다.
아직도 울음소리가 웅웅 들려오는 전화기를 떨어뜨리고 수호는 피 웅덩이 속에서 뒤척이는 청군여귀의 작은 손을 잡았다. 피로 미끈거리는 손이 자신의 손가락을 얽어매듯이 잡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가 가여워서 괴로운 것도 자신의 무능에 화가 나는 것도, 죽어가는 요괴 앞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청군여귀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녀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못 듣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그는 여우도 아니고 해명 도령도 아니니까.
청군여귀는 수호의 손가락을 꽉 쥐고 잠시 그르렁거리는 숨을 쉬다가 이윽고 조용해졌다. 작은 손이 풀려서 툭 떨어졌다.
‘요괴도 사람처럼 죽는구나.’
수호는 멍하니 그렇게 생각했다. 머리 어디쯤이 둔해진 기분이었다. 그는 피투성이로 죽어있는 청군여귀를 물끄러미 보다가 자신의 옷 역시 온통 피로 얼룩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스승님은 추울까봐 이 옷을 주신 것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해명은 식사준비를 하다 수호의 전화를 받았다. 영숙과 만나서 빗을 받아 청군여귀에게 전해줬다는 말에 해명은 잘됐다며 웃었다.
“그런데 좀 곤란한 일이 있어요. 자기가 빗을 돌려줘서 일이 해결된 거니까 돈은 못 내겠다고 하네요. 손님이.”
수호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그 집 사정도 안 좋아 보이던데. 됐으니까 그냥 돌아와.”
그런 식이니까 맨날 손해나 본다는 둥 호구 취급을 받는다는 둥 잔소리를 할 줄 알았지만 수호는 그냥 “예.”하고는 말았다.
“야, 너 많이 피곤하냐? 내가 고기 좀 사줄까? 약오리 맛있게 하는 집 알아뒀는데.”
“집에 갈래요. 다음에 사줘요.”
“그래. 운전 조심하고.”
힘없이 웃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해명은 기분 좋은 얼굴로 가스레인지 위에서 끓고 있는 달걀찜을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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