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79화 (179/218)

서천 만물수리점 - 반달빗(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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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놀이터를 휙 쓸고 지나갔다. 놀이기구 위에 얌전히 쌓여있던 눈이 바람에 휩쓸려 날아오자 영숙은 목을 움츠리며 고개를 돌렸다. 눈가루 섞인 바람이 뒤통수에 부딪쳤다.

‘옷을 더 두껍게 입고 올 걸.’

집안에 있을 때는 이 정도면 괜찮으려니 했던 차림이었으나, 추운 바깥에서 네 시간을 보내고 나자 하도 떨어서 허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녀는 감각이 없는 발을 동동 구르며 놀이터 앞 아파트의 7층을 올려다보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오른쪽 두 번째. 706호가 바로 자신의 집이었다.

지은 지 25년이 넘은 복도식 아파트여서 난간 대신 가슴 높이까지 올라오는 벽이 있고 그 너머가 바로 복도였다. 이렇게 바람이 불면서 눈까지 내리면 복도에 눈이 쌓이는 일도 종종 있었다.

지금도 바람이 불때마다 문에 붙은 전단지들이 뜯어질 것처럼 팔락였다.

‘오늘은 안 들리는 게 아닐까.’

아까부터 5분에 한 번씩 열 번은 넘게 한 생각을 그녀는 다시 했다. 이미 네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소리라고는 귀를 벨 것 같은 바람소리만 들었다. 가야금 소리라느니 말하는 사람들의 귀가 도대체 뭘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 아니 내가 남의 취미생활이라고 이해를 해주려고 해도, 세 시간을 넘게 그러고 있으면 정말 민폐 아니에요? 그렇게 크게 틀어놓고 있으면 귀 안 아프세요? 아무리 음악이 좋아도 그렇지 공동주택에서 자기 생각만 하시면 안 되잖아요. 그리고 벨을 누르면 왜 대답도 안 하세요?

퇴근한 지 얼마 안 된 그녀에게 찾아온 807호 새댁은 문이 열리자마자 화난 얼굴로 속사포 처럼 쏘아댔었다. 807호 새댁의 말을 듣고 영숙이 느낀 것은 분노나 짜증이 아니라 공포였다.

처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녀가 지나가면 아파트 벤치에 앉아있던 여자들이 “날이면 날마다 시끄러워 죽겠어. 진짜 어느 집인지.”라거나 “한두 시간도 아니고 너무하죠? 혼자 사는 세상인가.”같은 말을 큰소리로 나눌 때도 그 이야기가 자신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인 줄 몰랐다.

경비실에서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을 때 그녀는 직장에서 도시락을 먹는 중이었다. 집에 없다고 말하자 좀처럼 믿지 않는 목소리로 “그럼 집에 다른 가족은 없어요? 자녀분들이나…” 하고 물었다. 남편은 6년 전에 죽고 아들은 공부 때문에 서울에 있어 한 달에 한 번 올까말까 했다. 딸은 직장에 있을 시각이었다.

옆집 할머니가 “나야 귀도 좀 멀고, 들리는 가락이 싫지는 않으니 괜찮은데 다른 집에서는 뭐라 하더구만.”이라며 넌지시 말해줬을 때도 사람들이 옆집이나 다른 곳에서 나는 소리를 착각한 거라고 생각했다.

- 내가 오죽하면 문에 귀를 대고, 이 집, 옆 집, 그 옆집까지 다 돌아다녔거든요. 바로 이 집에서 나는 소리였다고요. 무슨 CD같은 거를 서너 시간씩 틀어놓고 그러세요?

807호 새댁이 복도에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따지는 동안 옆집에서, 그리고 건너 건너편 집에서도 사람들이 나왔다. 그들의 표정을 본 영숙은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말하는 시간에 자신과 딸은 직장에 있었다고 설명하고 집안에 CD플레이어도 없으며 티브이를 예약해 놓거나 하지 않는다고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거짓말쟁이 취급을 해서 그녀는 미칠 지경이었다. 계속 이런 식이면 고소를 하겠다는 말까지 듣고 나자 영숙도 오기가 바짝 올랐다.

어디 누구 말이 맞나 보자.

그래서 그녀는 직장을 하루 쉬고 평소처럼 나온 다음 자신의 집이 올려다 보이는 놀이터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그 소리를 기다렸다. 가야금 소리 같은 거라고 했었다.

소리가 들리는 때는 오전 10시에서 오후 4시 사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장이나 학교에 가고 아파트가 비어있을 시각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소리가 얼마나 요란한지 1층에서 꼭대기층까지 안 들리는 집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기만 해봐라.’

그녀는 사람들이 말하는 가야금 소리라는 것을 들을 때까지 버틸 작정이었다. 이미 네 시간을 추위 속에서 떨고 있었지만 네 시간이 아니라 열네 시간이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을 거짓말쟁이 취급하며 염치도 모르는 여자라고 욕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뱃속에서 열불이 끓었다. 아파트 안의 사람들이 짜고서 거짓말로 자신을 괴롭히는 게 아닌가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10시쯤이면 들린다고 했는데 벌써 12시가 넘었어. 혹시 이 못된 장난을 하는 사람이 내가 여기에 있는 걸 봤을까? 오늘 아무 소리도 안 들리면 어떡하지? 내일도 일을 쉴 수는 없는데…’

그녀는 복잡한 머리를 휘저었다. 그때였다. 소리가 들렸다.

차 소리 사람소리 바람소리 같은 것과 확실히 다른, 정확한 음을 가진 현을 퉁기는 소리였다. 영숙은 고개를 번쩍 들고 자신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멀어서 잘 들리지 않지만 방향은 확실히 집이 있는 쪽이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사람들 말대로 가야금 같은 현악기의 연주 소리였다. 아련하게 울리는 그 소리는 마치 달리는 그녀의 발소리에 맞추는 것처럼 빠르고 경쾌했다.

놀이터를 가로질러 아파트 건물 안에 들어갈 때까지 연주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타자 소리는 잠시 작아졌다가 7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니 갑자기 크게 들려왔다.

오른쪽!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옆집인 705호로부터 시작되는 복도가 보였다. 거기에서 소리가 쩡쩡 울려온다.

‘옆집일지도 몰라.’

그녀는 기대하며 705호의 문에 귀를 기울였다. 음악소리는 여전히 들려왔지만 문에 댄 오른쪽 귀가 아니라 대지 않은 왼쪽 귀에서 더 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자신의 집인 706호 앞에 서자 그녀의 얼굴은 긴장으로 파리해졌다. 차가운 문에 귀를 대자 퉁! 두둥! 현을 뜯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영숙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문 위에 붙은 호수를 확인했다. 706호. 분명 자신의 집이다.

이 아파트는 출입문을 열면 전실이 없이 바로 거실이 보이는 구조였다. 이 정도로 큰 소리라면 방안이 아니라 거실이었다.

‘누가 거실에 있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도어락의 커버를 올렸다. 숫자를 누르는 손에 감각이 없었다. 문을 여는 소리를 안에서 들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누구인지 모를 침입자와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두려움이 심장을 죄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본능이 두려움과 반대되는 행동을 끌어냈다.

그녀는 문을 힘껏 당겨서 확 열어젖히고 목청껏 외쳤다.

“당신 누구야!”

아주 잠깐, 그녀는 뭔가를 봤다. 거실 한복판에 있는 어떤 모습이었다. 그것이 뭔지를 뇌가 인식하기도 전에 마치 날듯이 눈앞으로 확 달려들었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팔을 내밀어 막은 것도, 옆으로 쓰러진 것도 두려움 때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녀에게 다행이었다. 날카로운 것이 쨍! 하는 소리를 내며 귓전에서 울렸다. 한 번으로 끝이었다. 엉금엉금 기어서 문으로부터 멀어진 그녀는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열렸던 문이 천천히 닫히는 것을 봤다.

쿵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고 나자 뒤늦게 문으로부터 발치까지 이어진 붉은 얼룩을 봤다. 그것이 핏자국이라는 것과, 그 피가 자신의 왼손 소매를 빨갛게 물들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영숙은 뱃속에서부터 솟구치는 비명소리를 냈다.

“103동 706호…”

중얼거리며 수호는 아파트 벽에 적힌 커다란 숫자를 확인했다. 103동. 겨우 찾았다.

아파트 정문 옆에서 102동을 봤으니까 근처에 103동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다음 건물은 107동이었고 그 다음은 106동이었다. 이곳은 열일곱 채나 되는 아파트가 순서 없이 뒤죽박죽으로 섞여서 처음 오는 사람은 찾기 힘들 거라고 듣기는 했었다.

미끄럼틀이 있는 놀이터 앞이라고 했지만 놀이터도 어디에 있는지 안 보였다. 추운 날씨라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어서 경비실에 물어 겨우 찾아온 것이다.

아파트 입구 옆에서 수호는 왼손에 붕대를 감은 50대 여성을 발견했다. 본래도 마른 모양이지만 초췌한 얼굴이었다.

“김영숙씨죠?”

다가가서 말을 건네자 영숙이 불안하게 눈을 깜박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요?”

“전화로 이야기했던…”

“아아, 그러세요. 죄송해요. 젊은 분이라서. 전 더 나이가 드셨을 줄 알았어요. 거기가 꽤…오래 된 곳이라고 들어서요.”

자주 듣는 소리라서 수호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사실 15년째니까 오래 되기는 했고, 자신이 아르바이트 겸해서 일을 함께 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년 전부터지만 그런 것을 시시콜콜 알려줄 필요는 없다.

“가면서 이야기 하시죠. 아직 나올 시간은 아니니까 괜찮겠죠?”

말을 돌릴 겸 엘리베이터를 가리키자 영숙의 얼굴이 굳었다.

“저, 저도 같이…가나요?”

겁먹은 얼굴이었다. 저도 모르게 다친 왼팔을 감싸며 움츠러드는 영숙을 보고 수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는 같이 가는 편이 좋다. 집안이 전과 달라진 데가 있는지, 없던 물건이 생겼거나 있던 것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집주인이 아니면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런 사정을 설명하자 영숙은 마지못해 그를 따라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에 타면서부터 덜덜 떨기 시작하더니 7층에서 문이 열리자 아예 비틀거리며 쓰러지려고 해서 수호는 그녀를 부축하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할 수 없군요. 제가 혼자 가서 사진을 찍어 올 테니 보고 확인해 주세요. 그동안 차에서 기다리시겠어요?”

영숙이 노래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차에 두고 수호는 혼자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에서 오른쪽 두 번째 집. 706호.

디지털 도어록으로 잠겨 있지만 비밀번호는 안다.

문을 열려던 그의 시선이 힐끗 뒤로 돌아갔다. 난간 역할을 하는 문 맞은편 벽에 생긴 지 얼마 안 된 흠집이 나 있었다. 사선으로 길게 그어진 홈이었다. 그것을 손끝으로 훑어본 그가 눈썹을 찡그렸다.

뭔가 불평하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불평할 대상이 없었는지, 그는 말없이 핸드폰을 꺼내 사진만 찍었다. 벽 다음에는 문이었다. 재빨리 비밀번호를 누르고 손잡이를 돌리자 문은 조용히 열렸다.

좁은 거실과 그 끝의 베란다가 곧장 보였다. 안은 텅 비었고 사람이 없는 집 특유의 가구냄새로 차 있었다. 신을 벗지 않은 채로 안에 들어간 그는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어둡다 싶으면 불을 켜고, 방은 물론 옷장이나 냉장고 안까지 꼼꼼히 찍었다.

그런 식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꽤 시간이 흘러버렸다. 안방의 옷장 위를 마지막으로 사진 찍기를 끝낸 수호가 방에서 나가려는 때였다. 투웅 하고, 맑다기보다는 깊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호는 문 손잡이를 잡은 채 우뚝 멈춰 섰다.

다음으로 둥 투둥, 조금 더 빠르게 소리가 이어진다. 두꺼운 현을 퉁겨 울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거실로부터 들려왔다. 수호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10시 4분.

‘착실하잖아.’

한숨 같은 웃음소리를 내고, 그는 손잡이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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