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45화 (145/218)

이매탈(3)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그럼 이거, 치료하는 방법은 있어?”

위험할 수도 있는 요괴라는 건 알았다. 어쨌든 치료법이라도 있을까 하고 물었더니

“굳이 치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요괴의, 그중에서도 특히 식물의 특성을 가진 요괴의 회복력은 매우 뛰어납니다. 몸의 대부분이 소실되어도 작은 조각만으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입니다. 내버려 두어도 저절로 나을 겁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아니던데? 손님 말이,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다음 하루 만에 이렇게 변했는데 그 뒤로 나흘이 지났다고 했어. 나흘 동안 조금도 회복이 안 됐다는 거잖아.”

“나흘정도로는 무리겠지요. 회복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순식간에 제 모습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도령이 탈을 썼을 때 제대로 환상을 보았다고 하니 이대로 사용해도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사용할 때마다 가면역이 양분을 흡수할 테니 천천히 나아지겠지요. 두세 달쯤이면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그럼 내가 굳이 뭘 할 필요는 없다는 거네. 이 물건을 다시 돌려줘도 되나…라는 문제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고맙다고 말한 다음 전화를 끊으려다, 문득 생각났지만 안 한 질문이 하나 남아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질문일 수도 있다. 백은호의 말을 들으며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그렇게 판단했었다. 하지만 그의 설명을 듣다보니 별것 아닌 의문이 조금씩 커졌다.

“백은호, 아까 손님의 이름 말이야…”

결국 전화를 끊으려다 말고 그에게 물었다.

“부모님과 거래하면서 아들 이름도 들었던 거야?”

“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가 되물었다. 질문하기 전 의문과 함께 조금씩 쌓였던 불안이, 그의 반응에 꿈틀 움직였다.

“네가 판 가면역, 그 손님의 부모님이 산 것 아니었어?”

내 질문에 백은호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코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차갑게 비웃는 소리였다.

“과연, 그런 거군요. 물론 아닙니다. 도령이 말한 손님 본인이 직접 와서 사갔습니다.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아내 때문에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그 당시에는 미혼이었으니 그것도 거짓말이었겠지만 저야 손님의 결혼 여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요.”

뭐냐, 넌. 골동품 상인이 손님의 뒷조사까지 하는 거냐?

어쨌든 가면역을 맡긴 손님이 한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조금 망설인 후에 나는 백은호에게 몇 가지 부탁을 했다. 골동품상인인체하는 여우요괴가 내 부탁을 듣고 피식 웃었다.

“그 정도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신세진 일도 있으니 공짜로 도와드리지요.”

지난번이란 소설가의 저택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럼 원래는 돈 받고 도와줬던 거야? 우리 그런 관계였어? 동업자라니까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동행했던 게 약간 억울해지는데.

어렵지 않다더니 과연 백은호는 그날 밤 내가 잠들기 전에 연락을 해 왔다.

“말씀하신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먼저, 아내가 죽었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가면역을 사가고 일 년 후쯤이더군요. 부모는 생존해 있지만 최근 들어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졌다고 합니다. 입원해 있다가 퇴원한지 한 달쯤 된 모양입니다. 병명은 확실치 않습니다.”

너무 오래, 자주 가까이 하면 병에 걸리게 만든다. 가면역은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회사에까지 가져가서 탈을 써보았다는 손님은 병든 기색이 전혀 없는데 부모가 병명도 정확하지 않은 채로 건강이 나빠진 상태라면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 탈은, 내게 왔던 손님이 아니라 사실 그의 부모가 쓰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서비스입니다만…”

어쩐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백은호가 덧붙였다.

“대여 전문이라는 그 회사는 현재 재정상태가 별로 안 좋더군요. 애초에 부모의 방송국 쪽 인맥으로 시작한 것 같은데 인맥이라는 게 화분 속의 식물과 다름없어서 말입니다. 계속 돌봐주지 않으면 시들해지다 결국 죽는 거지요. 부모가 은퇴한 후로 제대로 관리를 못했는지 일이 점점 없어져서 지금은 현상유지도 힘든 것 같습니다. 재정 문제로 부모와도 한두 번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주변에서 나왔을 정도니까 실제로는 더 여러 번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너는 이런 일들이 재미있는 모양이구나.”

즐거운 듯 알려주는 그에게 나도 모르게 말했다. 전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소리도 없었는데 그가 멈칫하며 표정이 굳은 것을 나는 거짓말같이 알아차렸다.

“그렇게 보였습니까?”

백은호가 속삭여 물었다.

그렇게 보여도 상관없는 거 아니었어? 소설가의 저택에서도 그랬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나쁜 감정과 어리석은 선택을 즐기고 있었다. 포도주를 즐기는 것과 비슷했다. 커다란 잔 안에 다룰 수 있는 만큼을 따라놓고 흔들어 빛과 모양과 냄새를 감상했다. 조금씩 맛보고 음미하면서 천천히 취했다.

아니, 취하려 하기보다는…마치 위안을 얻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하지만 내 말이 여우 요괴의 어딘가를 자극하고 있다면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좋았다.

대충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으려고 했지만

“좋은 것을 하나 알려드리지요.”

백은호의 은근한 목소리가 그것을 막았다.

“가면역의 꿈은 탈을 사용하는 사람의 바람과 환상이 기억과 겹쳐 만들어집니다. 만일 바람과 환상을 조절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꿈속에서 그것을 구분할 수만 있다면 분명 보고 들었지만 기억해내지 못하는 일들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끊겠다고 말하려던 입을 다물게 만들어버리는 말이었다. 기억을 볼 수 있다고?

“사람들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어서 말입니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 기억들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압축되어 보관한다고나 할까.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도령의 경우에는…”

그는 뭔가를 더 이야기할 것처럼 보였지만 갑자기 말을 멈췄다.

“조금 다르겠지요.”

그리고는 어쩐지 심술궂은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백은호는 그 말을 작별 대신으로 남기고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이상한 말이었다. 내가 다르다는 것은 기억을 빼앗긴 것에 대한 이야기일까? 산신에게 듣기는 했지만 실감하지는 못하고 있다. 믿지 못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백은호의 말이 확실히 이상했다.

산신인 무진이 말했었다. 나는 수명을 연장하는 대신 기억을 빼앗긴다. 그렇다면 내게는 압축되어 보관하는 기억 같은 것이 애초에 없다는 거다. 조금 다른 정도가 아니잖아. 하지만 딱 잘라 부정하는 것도 아닌 조금 다르다…라니. 미묘하게 여운을 남기는 말이었다.

‘시험해 볼까.’

생각과 함께 시선이 탈을 넣은 서랍에 닿았다.

서랍 안에 넣어버린 것은 저것이 눈에 보이면 다시 쓰고 싶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다. 스스로 환상에서 벗어나지도 못하는데 다시 그런 경험을 하는 건……싫…지는 않은데 역시 안 돼.

안된다고 생각한 순간 내 손은 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여기까지 와서 서랍을 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백은호도 말했지만 바람과 환상을 조절할 수 있다면, 그리고 꿈에서 그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괜찮다는 거였지.

하지만 탈에 달라붙은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희끗하게 변한 푸석푸석한 나무 탈…거기에서 나무껍질과 흙냄새가 뒤섞인 듯한 묘한 향기가…

쾅 소리를 내며 서랍이 닫혔다. 내가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매탈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자 흔들리던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유혹을 받기 전에 재빨리 방에서 나갔다.

마침 외출할 생각이었는지 유하가 계단을 내려가다 나를 보고 손짓했다.

“시장에 가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어요?”

유하가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이라면 가면역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좋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조금 웃으며 천으로 만든 커다란 장바구니를 내게 건넸다.

“배추 두 단에 무도 한 단 사야 해서 짐이 많아요.”

우리는 나란히 밖으로 나갔다. 해가 지고 있어 하늘 한 편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저녁 무렵인데도 아직 더운 걸 보니 이제 정말 여름 같다며 날씨 이야기를 하고, 아는 사람을 만나면 인사를 건네거나 눈짓을 나누며 우리는 시장까지 천천히 걸었다. 아이들이 강아지와 함께 우르르 뛰어다니고 두부 장사의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시장 입구가 자그맣게 보이기 시작했다.

좁은 시장 안의 길을 걸었다. 생선가게, 채소 가게, 고기를 파는 곳 옆에 식당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중 하나 앞에서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내가 물었다.

아니. 내가 아닌데…?

하지만 분명히 내가…

그렇게 물으면서 돌아보았을 때, 내 옆에는 내가 서 있었다. 무슨 소리냐고 묻는 듯한 나를, 나는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려다보았다.

내가 맞는데. 내가 아닌 것 같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건…

나는 나로부터 시선을 떼고 식당의 유리문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어둡게 반사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나와 유하다.

하지만 유리문을 보고 있는 쪽은 내가 아니라 유하였다.

- 물론 도령의 경우에는…조금 다르겠지요.

백은호의 말이 떠올랐다. 바로 조금 전에, 소파에 앉아서 그와 통화할 때 들은 말이다. 나는 그 후에 내 방에서 가면역을 써볼까 갈등하고 있었고 그것을 손에 들고 망설였지만 도로 넣었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식당의 유리문과 시장의 어둡고 복잡한 내부가 흐릿하게 변했다. 그 너머에 겹쳐져서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내 방이다.

나는 방에서 나가지 않았어. 유하와 함께 외출하지도 않았어. 당연하지. 흐린 날씨도 아닌데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지. 그것을 아는 내가 허락할 리도 없고 유하가 그런 부탁을 할 리도 없지.

환상이 현실과 분리되며 두 세계가 겹쳐져 눈앞에 보이고 있다. 꿈 속에서 그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그리고 바람과 환상을 제어할 수 있다면…그렇다면 가능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요동했다. 다시 나를, 아니 내 모습을 하고 있는 누군가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분명히 내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가 아닌 것 같은 사람이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다른 나. 어쩐지 좀 더 여유 있고 더 부드러워 보이고, 그런데도 한편으로 차가운 데가 있어 머뭇거리게 만들고, 가까이 서 있는데도 발 딛은 땅이 유리된 느낌의 나.

도저히 나인 것 같지 않은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내가 나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처음 있는 일인걸.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다니.”

당신은 누구냐고 물을 뻔했다. 하지만 묻지 않아도 알고 있다. 저것은 나다. 나 자신은 아니겠지만 이 기억의 주인이 기억하는 나다. 아니 어쩌면 본래의 나와 더 가까운 자신은 이쪽인지도 모른다. 확신할 수 없었다.

“알고 싶은 것이 굉장히 많을 텐데?”

고개를 기울여 나를 내려다보며 그가 말했다. 장난스러운 미소가 입가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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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탈(4)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알고 싶은 것은 물론 많다. 하지만 알려줄 셈인가?

내 기억은 수명 대신 양이천왕에게 뺏기고 있었을 터였다. 무진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기억을 되찾는 일은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목숨 대신이라니 못 찾아도 할 수 없지.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것은 환상이나 바람 같은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구분할 수 있었다.

이것은 기억이다. 그러나 내 기억은 아니다.

“이건 유하의 기억이지?”

나 아닌 나를 향해 내가 물었다.

“이번에는 제법 똑똑하게 구는걸.”

감탄한 얼굴을 하고서 그가 대꾸했다. 저 말을 백은호가 했다면 분명히 비웃는 것이겠지만 이 남자는 아니다. 진심이었다. 마음속의 생각을 거르거나 다스림 없이 그대로 내던진다. 순수하다고 해야 하겠지만, 그래서 그는 차가웠다.

“어째서 내가 유하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거지?”

어디에서부터 그녀의 기억에 동화되었는지 모르겠다. 길을 걸으면서, 혹은 시장에 들어서면서 나는 문득 그녀로 뒤바뀌어 있었다. 나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눈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었다.

질문이 우스웠는지 낯선 내가 짧은 웃음소리를 냈다.

“아까 한 말은 취소. 여전히 둔하잖아. 너 말이야. 자기 것도 아닌 심장을 가지고 있으면 어쩐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아? 매일매일.”

뭐…?

“무슨…”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대꾸하려 했지만, 그 전에 내가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말한 것은 무진이었다. 그 인간인 체하던 젊은 산신은 내게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 도령은 그분의 심장을 품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체 하시는군요.

심장을 품고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르는 채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다시 같은 말을 듣자 이번에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말은 은유가 아니다.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나도 모르게 손이 가슴 위로,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는 왼쪽 가슴으로 올라갔다. 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닌 심장이 손 밑에서 달칵달칵 움직였다.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알아봐 주기를.

“그래, 거기.”

내 앞의 내가 손을 내밀어 심장 위의 내 손에 겹쳤다.

“여기에는 말이야. 해마다 양이천왕에게 뺏길 수밖에 없는 김해명의 모든 기억이 들어있어. 물론 그 기억은 김해명, 네 것이 아니라 유하의 것이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늘 지켜보고 있는 그녀의 기억이니까 거의 빠짐없는 셈이지. 이것을 가지고 있는 한 너는 언제라도 되찾을 수 있는 거야. 네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시간들의 기억. 하지만 너는 한 번도, 되찾은 적이 없어.”

내 것이지만 낯선 시선이 나를 직시한다. 분명 부드러운 눈매를 하고 있는데도 나는 그 시선이 두려웠다.

“매번 발버둥 치면서 코앞까지 갔다가, 막상 눈앞에 두고서 망설이는 거야. 그럴 수밖에. 이 기억은 네 것이 아니라 그녀, 유하의 것이니까. 그녀의 눈으로 보는 네가 어떤 모습인지 확인하기 두려운 거지?”

무슨 소리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내가 뭘 어쨌다는 건지…

아니, 사실은 알아들었다. 가슴 속에서 내 것 아닌 심장이 알려주고 있었다. 변명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알아들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고 있기라도 하듯이 내 앞의 내가 빙긋 웃었다.

“어때? 한번쯤 남자답게 굴어 보라고. 영원히 자라지 못하는 아이이자 아란 어미의 걸음마저 불러 세운 어리광쟁이 막내가 네 본성일지라도, 너는 이미 14년 동안이나 인간의 몸으로 성장하고 있었잖아. 그 시간을 되찾아. 그러지 않으면……매일매일 부서지면서 도령을 기다린 의미가 없다오.”

그의 목소리는 마지막에 닿자 어린 여자아이의 것으로 변해서 가련하게 울렸다.

아아, 나는 이 목소리를 너무나 잘 알았다. 기억 따위는 없는데도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두근두근. 내 심장이 그녀의 심장과 함께 뛰었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은 따뜻하고 햇살은 물 위에서 금빛으로 반짝였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징검다리 한가운데에 걸터앉아 물장구를 치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안 돼.’

그녀를 향해 걸어가려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환상이며 꿈이다. 그래. 얼마나 바랐던가. 기억이 돌아올 때마다.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내가 했던 어리석은 선택을 돌이킬 수 있기를. 수없이 바라고 소원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시간을 돌이킬 수 있는 힘은 그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가능하다면…

그런 바람이 나를 여기로 데려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분명했던 내 세계의 기억이 희미해졌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고, 그녀의 이름을 지어주고, 그리고…다시는…

안 돼.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주 작았다. 나는 잠깐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가 이내 잊어버렸다. 누구의 목소리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중요하지도 않다.

징검다리를 하나씩 하나씩 뛰어서 건너며 나는 조금 전 목소리를 들었다는 걸 잊어버렸다.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였는지도 잊어버렸다. 징검다리 한 가운데에 앉아 찰박찰박 물놀이를 하는 그녀의 뒷모습만 남아서 어른거렸다. 한 발 한 발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가지 마. 잊어버리지 마.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울렸다. 목소리는 미풍처럼 사라졌고 나는 두려워하며 그녀에게 한 발 더 다가갔다. 곧 그녀도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그 전에…

징검다리를 팔짝 뛰어넘으며 팔을 뻗었다. 잡힌다. 그녀에게 닿지 마. 목소리가 한 번 더 울렸지만 나는 못들은 체했다. 그리고 힘껏 펼친 손끝이 연황색 목면 저고리에 닿으려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탈의 눈구멍 너머로 내 방의 풍경이 보였다.

낮게 소리 지르며 얼굴에 붙어있는 가면역을 떼어냈다. 돌아왔어? 내 방이야? 정말? 환상이 아니고?

조금 전까지 물위에서 징검다리를 뛰었던 기억이 선연했다. 아직 물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정말로 내가 현실로 돌아온 건가? 어떻게?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자 방 한구석에 바짝 붙어 웅크린 채로 나를 보는 나비 요괴가 보였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서 손부터 휘저었다.

“정말 정말 정말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고! 난 정말로 해명이한테 나뭇잎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 탈이 이상한 냄새가 나잖아. 그래서 무슨 맛이 날지 궁금했어. 정말로 딱 하나만, 이파리 하나만 만들어서 맛만 보려고 한 거야. 진짜. 진짜.”

열심히 변명하는 녀석의 손 안에는 이파리 하나가 아니라 한 움큼이 쥐여져 있었다.

“그거 전부 다 이 탈에서 만들어낸 거냐?”

어이가 없어서 묻자 나비 요괴는 재빨리 그것을 입안으로 우겨넣었다. 손에 든 것을 다 쓸어 넣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녀석이 변명했다.

“하아만 앙들러고 행는데 이바리가 먹대로 생겨거…”

먹든가 말을 하든가 하나만 해라.

어쨌든 녀석이 나뭇잎을 만들어내는 바람에 힘이 빨려나간 가면역의 환상이 약해진 것 같다. 덕분에 내가 돌아올 수 있었다면 이번에는 녀석의 식탐에 감사해야 하겠는걸.

내려다보자 나비 요괴 때문에 힘이 거의 사라진 가면역은 예의 묘한 냄새도, 얼굴에 써보고 싶은 충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볍고 푸석푸석한 가면. 그뿐이었다.

창고로 가져가자 영감 도깨비는 뻐끔뻐끔 연기를 내보내다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주 약해져 버려서 이대로는 사람의 생기를 흡수하지도 못할 지경이 된 것 같소, 그려.”

나비 녀석 야무지게도 빨아먹었구나.

“그럼 죽는 거야?”

내 질문에 영감 도깨비가 수염을 실룩거렸다. 그가 곰방대를 들어 창고 한 쪽을 가리켰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걸어가 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언제 이런 게…”

내 중얼거림에 영감 도깨비는 뽀얀 담배 연기를 뱉어내며 웃었다.

“그야 도령이 처음 가져온 바로 그때 아니겠소. 열흘 쯤 기다리면 웬만큼 클 거요.”

정말? 열흘 만에 이런 콩알 만한 게 얼굴에 쓸 수 있을 정도로 커진다고?

고서의 표지에 붙은 채로 작은 대가리를 내밀고 있는 버섯을 보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 버섯 요괴가 포자를 얼마나 날렸는지 모르겠지만 창고 안에서 딱 하나의 포자는 성공적으로 안착한 것 같았다.

“그 약해진 것은 흙에 닿게 두면 버섯 모양으로 돌아갈게요. 아주 천천히, 오랜 시간을 들여서 도로 힘을 찾겠지.”

영감 도깨비가 내 손에 들린 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아, 이 녀석도 죽는 건 아니구나. 과연 질긴 요괴라니까.

“힘을 다시 찾으면 위험하지 않을까?”

현실과 구분할 수 없는 환상에 빠지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은 내가 물었다.

“버섯의 상태에서는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하오. 그것을 먹게 되면 사정이 다르겠지만, 가면역이 되었어도 사람이 의지만 굳으면 그 요기에 저항할 수 있는 법인데 버섯의 모양일 때는 그저 버섯일 뿐이라.”

“먹으면 어떻게 되는데?”

“먹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고 하오. 또 중독성이 있어서 더욱 더 먹고 싶어 하지. 그렇게 자꾸 먹다 보면 노래하고 춤추고 싶어져서 미친 듯이 놀게 된다고 하오만, 그 정도가 될 만큼 많은 버섯이 애초에 없으니 말이오. 잠시 기분만 좋다 말겠지.”

그래? 그렇담 안심이고.

열흘 뒤 고서의 표지에서 자라던 버섯 요괴는 얼굴이 하얗고 양 볼에 붉은 연지가 찍힌 모양의 탈로 변했다. 이매탈의 자식이 각시탈이라니 뭔가 묘했다.

이매탈이 푸석하니 변한 것과 달리, 각시탈은 온전한 모습 그대로였다. 흑단 같은 머리채의 모양이나 하얀 얼굴, 차분하니 내리 뜬 눈매의 여염함이 보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인데 가면역 특유의 요기가 더해져서 이것이 위험한 요괴라는 것을 잘 아는 나조차도 몇 번이나 얼굴에 써보고 싶어 손이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그것을 겨우 참으며 손님에게 연락했다. 연락을 받자마자 곧장 달려온 그에게 각시탈을 내놓았다. 그는 탈을 보면 쓰고 싶어진다는 것을 잘 아는 것 같았다. 제대로 고쳐졌는지만 확인하려는 듯 힐끗 쳐다보고 도로 눈을 돌리려고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갓 제 모습을 갖춘, 요기와 생기가 넘치는 각시탈이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탈을 바라보는 손님의 눈이 기묘하게 번득였다. 그는 탈의 모양이 바뀐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각시탈의 하얀 얼굴에 완전히 홀려서, 그는 안절부절 하며 잔금을 치르고 서둘러 수리점을 나갔다. 어서 돌아가 탈을 써보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가 탈을 다시 부모에게 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들지 않았다. 주기는커녕 달라고 해도 안 줄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가 버섯 요괴의 환상 속에서 헤매게 조금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가면역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의지만 굳으면 유혹에 저항할 수 있다고 영감 도깨비도 말했으니 스스로 빠져나올지 모른다. 아니면 병에 걸릴 때까지 붙잡혀 있을지도. 하지만 자업자득이겠지.

아아, 나 어쩐지 백은호와 조금 비슷한 생각을 해버린 것 같은데. 그 요괴와….

이것은 유하의 기억 속에서 나를 만나본 후유증일까?

- 어때? 한번쯤 남자답게 굴어 보라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놀리듯이 말하던 그 모습과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그 녀석 나인 주제에 조금도 나 같지 않아.

하지만 결정해야 할 순간이 가까워졌다는 것만은 인정해야 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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