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 난 바늘 나무를 지켜라!(3)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유하가 내 방에 왔다. 인형옷처럼 앙증맞게 생긴 나비 녀석의 옷을 가지고 있었다.
저런 걸 만드느라 늦게까지 못 잤을 거라고 생각하자 기분이 나빠졌다. 나비 요괴 따위는 좀 춥건 말건 벗고 다니라고…아 그건 안 되겠구나. 그래. 유하의 시야를 청정하게 지키기 위해서라도 옷은 필요할 것 같다.
나비 요괴는 내내 조용히 잘 있더니 드레스 룸의 문을 열고 들여다보자 갑자기 휙 뛰쳐나와서 유하의 옷자락에 매달려 징징거렸다.
“유하야아, 나 내일도 여기에서 자라고 하지 마. 해명이가 문을 꽉 닫아놓고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나 밤새 혼자 캄캄한 데서 무서웠어어.”
저게 진짜….
유하는 녀석을 달래며 옷을 내줬다.
달랠 필요 없다고. 거짓말이라고. 괴롭힌 적 없단 말이야. 그리고 백일도 안 된 게 어디서 이름을 막 불러. 내가 네 친구냐!
그런데 항의해봤자 또 나만 나무랄 테지. 지낼 곳을 만들어 놨다며 나비 요괴를 데리고 나가는 유하에게 나는 약간 삐쳤다. 유하나 나비 요괴 따윈 됐고, 나는 배신하지 않고 거짓말 하지도 않는 나무에게 갈 테다.
계단 옆 화분에게 가보니 제법 싹이 풍성하게 돋아나 있었다. 철사를 꼬아놓은 것 같던 말라붙은 나무가 이제는 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잘 자라라. 돈 나무…아니 바늘 나무야. 너밖에 없다.”
어쩐지 상대해주는 가족이 없어서 강아지에게 말을 거는 중년 가장이 된 기분으로 화분에게 중얼거렸다.
유하가 나비에게 만들어준 잠자리는 3층에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뒤편이었다. 맞은편에 작은 창이 있어 빛도 잘 들어오고 유하가 돌보던 화분들을 모아놔서 정원 같은 기분이 들게 꾸며놓았다. 거기에 마른 이끼와 손수건으로 잠자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나비 요괴는 마음에 드는지 그 후로 거기에서만 지내 며칠 동안 나는 녀석의 얼굴을 안 보게 되었다.
그러나 며칠 후, 싫어도 녀석을 찾아가야 할 일이 생겼다.
언제나처럼 일어나자마자 계단으로 가서 화분을 확인한 나는 어제와 달라진 나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잎이 절반이나 줄어들어 있었다.
“뭐야?”
병이라도 생겼나 싶어 다른 잎을 확인해 봤지만 색이 변하거나 시든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혹시 물을 안 줘서 시들어 떨어진 걸까?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나무 아래에는 시든 이파리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딧물도 없고 흙은 촉촉하니 습기가 남아 있었다. 나무 자체에 문제가 생겼다기에는 남아있는 이파리들이 완벽하게 싱싱한 모습이다. 하지만 분명히 풍성하니 잎이 달려있던 어제에 비해 휑하니 빈 곳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나무 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제야 보이는 것이 있다. 얼핏 봤을 때는 감쪽같이 사라져서 원래부터 잎이 없었나 싶은 자리에 본래 잎이 났던 자국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잎을 떼어냈다고 생각했으나…
“가만, 이거…”
몇 개는 이파리의 끝 부분이 떨어져 나가지 않고 조금씩 남아있었다. 그런데 그 남은 부분의 단면이 묘했다.
자르거나 뜯은 흔적이 아니었다. 뾰족뾰족한 자국이 호를 그리며 겹쳐진 모양이었다. 이것과 비슷한 모습을 만들고 싶다면 슬라이스 치즈를 몇 번 베어 먹으면 된다.
그러니까 이파리에 남아있는 자국은, 그 크기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지만 분명 인간의 치아로 뜯어먹은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흔적을 만들어 낼 존재라면 여기에 단 하나뿐이다.
3층으로 올라갔더니 녀석은 마침 화분 가운데에 만들어진 잠자리에 누워서 데굴거리고 있었다.
유하가 준 옷은 고대 그리스식으로 둘러서 고정하게 만들어진 거라 꽃이 만발한 화분 가운데에 있는 녀석의 모습은 마치 신화 속의 요정 같았다.
녀석이 나를 보자 외쳤다.
“악! 해명이다! 해명이 나타났어!”
사람을 늑대취급 하지 마라. 양도 아니고 요정의 탈을 쓴 요괴야.
“뭐야? 여긴 내 집이야! 들어오면 안 돼!”
녀석이 화분 뒤에 숨어서 항의했다. 이 건물은 내 집이거든요. 공짜로 얹혀살면서 너무 당당한 거 아니냐?
“들어갈 생각 없고. 너 바른대로 말이나 해.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둔 화분, 그 나무 잎을 네가 갉아먹었냐?”
내 질문에 나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유하가 먹고 싶으면 아무 거나 먹어도 된다고 그랬어.”
“3층에 있는 화분은 나도 상관없지만 계단에 있는 나무는 안 돼. 그거 손대지 마. 입도 대지 마.”
발도 날개도 더듬이도 대지 마. 좌우간 가까이 오지 마.
나비가 입을 삐죽였다. 크기는 조그맣지만 다 큰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저런 표정 지어봐야 하나도 안 귀여워.
녀석은 대답을 안 했지만 어쨌든 경고를 했으니 3층에서 내려갔다. 더 있다가 유하가 보면 괴롭힌다고 오해할지도 몰랐다.
어쨌든 얄미운 녀석이지만 말귀는 알아먹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분의 나무는 이파리가 더 사라져서, 이제 앙상한 느낌이 들 정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건 위험하다 싶을 정도였다.
3층으로 올라갔더니 화분 위에서 꽃잎을 뜯어먹고 있던 나비 요괴가 나를 보고 후다닥 숨었다.
“야, 너. 내가 계단에 있는 나무 손대지 말랬지.”
“내 집에 들어오지 마!”
화분 뒤에 숨어서 나비 요괴가 소리쳤다.
“그 나무는 귀한 거니까 뜯어먹으면 안 된다고. 너 때문에 나뭇잎이 거의 다 사라졌잖아.”
“몰라. 몰라. 유하가 먹어도 된다고 했어! 저리 가. 저리 가.”
“그거 말고도 나무는 많잖아. 다른 거 먹어.”
“싫어. 싫어. 먹고 싶은 거 맘대로 먹을 거야.”
뭐야, 이 요괴는. 완전히 막무가내잖아.
“안 된다고 했다, 너? 한 번 더 그 나무에 손대면 그냥 확…”
확…어쩔 거야. 조그만 걸 때릴 수도 없고. 멀쩡하니 사람 모양을 하고 있는 걸 묶어 놓을 수도 없고.
“유하야아! 유하야아! 해명이가 괴롭혀!”
나비 요괴가 우는 목소리로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하는 어디 나갔는지 대답도 없었다. 나비 요괴도 그것을 깨닫고 겁먹은 얼굴로 울먹였다.
“유하가 없을 때 나를 잡아먹을 거야? 그리고 유하가 오면 내가 마음대로 밖에 나갔다고 거짓말 할 거지? 유하는 슬퍼하겠지만 난 요괴니까 경찰에 신고도 못하고. 해명이는 나빠…으허헝…”
야.
이 요괴 정말 왜 이래? 애벌레일 때는 다들 평범한 요괴 같았는데 왜 나비가 되니까 이 모양이야? 뭘 어떻게 하면 이런 나비가 되는 거야? 너 혹시 사춘기냐?
“내가 안 잡아먹는다고 몇 번을 말했어? 그리고 지금 하는 말은 그게 아니라 계단에 있는 나무…”
“싫어. 싫어. 안 먹으면 배고파. 해명이 네가 나빠. 어린 요괴를 괴롭히고 있어!”
물론 태어난 날짜를 헤아리면 한 달 조금 넘었을 뿐이지만 너 별로 어리게 생기지 않았고요. 말하는 건 완전히 어린애 같아서 겉모습과 하나도 안 어울…
‘어…?’
밝은 데서 녀석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된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녀석의 얼굴이 굉장히 낯이 익었다. 아니 낯이 익은 정도가 아니라 아는 사람의 얼굴 그대로였다. 작고, 또 긴 머리카락 때문에 낯설어서 잘 몰랐지만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들여다보니 확실했다.
녀석의 얼굴이 나와 똑같았다.
어쩐지 오싹한 동시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뭐지. 이 요괴는 주변 사람의 모습을 흉내 내는 능력이 있는 건가? 아니, 번데기에서 나온 뒤로 쭉 저 얼굴이었던 것 같다. 요괴의 능력으로 외모를 바꾼다든가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뭐야?
나비 요괴는 원래 주변에 있는 사람과 같은 얼굴로 변해서 태어나는 거야? 그렇더라도 왜 하필 나야? 애벌레일 때 돌봐준 선영도 있었고 또 유하도 있잖아. 차라리 유하를 닮았으면 얼마나 좋아!
“왜 또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보는데? 안 잡아먹는다고 거짓말 하고 사실은 나를 어떻게 요리해 먹을까 궁리하고 있는 거지? 그런데 나 정말 하나도 맛없거든? 그리고 독도 있어서 먹으면 몸이 완전 가려워지고 배도 아프고 그리고…”
얼굴 말고도 어쩐지 나와 비슷한 게 더 있는 것 같다.
처음부터 느꼈는데 이 녀석 말투도 나랑 비슷해. 유하를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고
“그리고…그리고 또…”
별로 안 똑똑한 것도 비슷한가?
어쩐지 화낼 기운이 사라진다.
“됐다.”
나는 포기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냥 내가 화분을 잘 감시하는 편이 낫겠다.
화분 옆에서 유하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바늘 나무 돌보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유하가 가르쳐 준 방법은 여느 나무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또 빛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니 내 방에서 키워도 될 것 같았다.
화분을 내 방에다 옮겨놓고, 묘하게 복잡한 기분이 되어 생각에 잠겼다.
왜 유하나 선영을 닮지 않고 나냐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애벌레들이 있을 때 이 방에 주로 드나들었던 건 나였다. 내 방이기도 하고 선영이 애벌레 돌보는 일에 영 재주가 없어서 주로 내가 맡았던 것이다. 내가 낮 동안 돌보고 밤에는 유하와 선영이 번갈아 지켰다.
처음에는 일흔여덟 마리나 되는 애벌레들을 하나씩 돌보느라 정신없었지만 익숙해지자 필요한 일을 재빨리 해내게 되고 미리 대비해 두는 등 요령이 생겼다. 요령이 생기니 돌보는 시간이 단축되고 여유가 났던 것이다. 그 남는 시간 동안 방을 비울 수는 없어서 나는 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대부분의 애벌레들은 서로 뭉쳐서 꾸물꾸물 기어 다녔고 좀 부잡스러운 녀석은 벽을 기어 올라가다 떨어져서 운다거나 기를 쓰고 소파 뒤로 파고들다 끼어서 운다거나 했다. 하지만 한 녀석은 내 발밑을 기어 다니거나 의자를 타고 올라와 내 무릎 위에 엎드려 잠드는 것을 좋아했다. 가끔 키보드 위로 기어 올라가기도 해서 좀 짜증났던 것 같은데.
하지만 애벌레들은 다 비슷하게 생겨서 그 녀석이 누군지 나는 모른다.
그 녀석이 저 나비라면 저런 성격이 되어버린 건 누구 때문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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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 난 바늘 나무를 지켜라!(4)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내 방에 격리 보관된 나무는 다시 나뭇잎이 무성해지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나비 요괴가 괴롭히지 않으니까 잘 자라잖아. 뿌듯한 마음으로 기뻐했으나 그것도 일주일 정도였다. 일주일이 지나자 나무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겉보기에 뭔가 바뀐 것 같지는 않은데 묘하게 힘이 없어 보인달까.
배운 대로 보살피고 있었으니 햇빛이나 물이 부족할 리는 없고, 그럼 양분이 부족한가?
유하에게 물어봤지만 당분간 분갈이를 하거나 따로 양분을 줄 필요는 없다고 한다. 영문을 모르는 채로 이틀이 더 지나자 나무는 확실히 상태가 안 좋아졌다. 나뭇잎이 기운 없이 늘어지고 윤기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하루가 더 지나자 건드리기만 해도 낙엽처럼 떨어지는 잎이 생겼다.
그 지경이 되자 뒤늦게 유하에게 보였지만 그녀도 고개를 저었다. 이틀이 더 지나자 시든 나뭇잎들이 거의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에 윤기 없는 나뭇잎만 몇 개 남았다. 그것도 오늘 내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쯤 되니 결정을 내려야 했다. 화분을 쳐다보며 마지막 잎새를 찍을 것인가, 그냥 백만 원을 포기할 것인가. 그런데 고민이고 뭐고 선택할 방법이 없잖아. 공돈을 포기하고 앙상해진 나무를 다시 원래의 자리로 가져다 놓는 수밖에.
잠시 나를 들뜨게 했던 쉬운 돈벌이의 꿈은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백은호 녀석에게 이 사실을 알려줄까 하다가, 어쩐지 말하면 비웃음이나 당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관뒀다. 녀석에 관해서 별 기억은 안 나는데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드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나 맺힌 게 좀 있는 것 같다.
도로 내놓은 화분은 오가며 눈에 보여도 더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날 화분 앞에 나비 요괴가 있는 걸 봤지만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녀석은 이제 겨우 서너 개 남은 나뭇잎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맛 다시는 거냐?
잠시 내려다보더니 정말로 입을 벌리고 다가가서 가지를 꽉 물었다. 잎만 갉아먹는 게 아니라 가지도 먹는 거였어? 나비 치고는 식성이 참 특이하다고 생각하는데 녀석이 깨문 자리에서 뭔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멀리서 얼핏 봐도 그것은 분명 나뭇잎이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있었다.
녀석이 이 가지 저 가지를 골고루 깨물어주자 물린 곳마다 푸른 잎이 돋아났다. 잠깐 사이에 바늘 나무는 잎이 무성하게 변했다. 나비 요괴는 무성해진 나뭇잎에 얼굴을 파묻고 이번에는 이파리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저건 이를 테면 요리해서 먹는 셈인가…. 멀쩡하게 되살려 놓고 다시 뜯어먹다니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애초에 말라죽어 가던 거니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나비 요괴는 무성해진 나뭇잎을 맛있게 뜯어먹더니 잎을 반쯤 남기고 배부른 얼굴로 가버렸다.
녀석이 떠나고 나서 화분 가까이 가봤더니 돋아난 이파리들은 분명히 실제였다. 혹시 착각이거나 눈속임이 아닐까 조금은 의심했었는데….
그러나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잠시 후 생겼다. 파릇파릇하니 생기 있던 이파리들이 점점 빛을 잃는다 싶더니 이윽고 축 늘어졌다가 금세 노랗게 말라붙어가기 시작했다. 이파리뿐이 아니었다. 가지 역시 더욱 더 가늘고 메마르게 변했다.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요괴라도 와서 나무에 빨대를 꽂아놓고 생기만 쭉 빨아들여 버린 것 같았다.
슬쩍 건드리자 노랗게 변한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가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끝을 조금 꺾자 비스킷처럼 툭 부러졌다. 물기 하나 없이 마른 삭정이가 되어 있었다. 아연해서 내려다보는데 계단 위에서 유하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나와 나무를 번갈아 보더니 다가왔다. 유하가 허리를 숙이고 나무를 살폈다.
“이 나무는 말라죽었네요.”
아아…역시.
하지만 나비 요괴 녀석이 나뭇잎을 뜯어먹고 있을 때만 해도 왕성하게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고. 비록 포기하기는 했지만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돈 욕심…아니 나무에 대한 애정이 되살아나고 있었는데!
“3층의 화분들도 어떤 날은 꽃이 활짝 피고 어떤 날은 빈약할 정도로 말라있고 하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이건 나비 때문이겠지요.”
유하가 조용히 말하고 나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비 요괴에게 화내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녀석에 대해서는 뭐 이제 화낼 생각도 없고, 유하가 이렇게까지 신경써주고 있으니 약간 질투가 나는 것 말고는 유감도 없었다. 게다가 나를 닮았잖아. 나한테 화내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묘했다.
“녀석도 요괴라고 무슨 이상한 능력이라도 있나 보네. 아까 보니까 나무를 물어서 잎이 잔뜩 돋아나게 만든 다음 그걸 다시 뜯어먹더라고.”
“예전에, 비란은 카페 에코에 쓰는 꽃차의 재료를 담당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꽃을 매우 잘 돌봤거든요. 병들거나 시들어가던 나무도 그녀의 손만 닿으면 건강해지고는 했어요. 비란의 종족은 식물에게 영향을 끼치는 종류의 능력이 발달한 것 같아요.”
나비라서 그런가?
“하지만 비란의 아이는 아직 어리니 자신의 힘을 잘 조절할 수 없을 거예요. 게다가 순리를 따르지 않고 성체가 되어버려서, 앞으로 어떻게 자랄지도 장담을 못하겠어요.”
유하는 화분 앞에 쭈그리고 앉아 말라붙은 나무를 잡아당겼다. 조금 흔들어서 당기는 것만으로 나무는 쑥 뽑혔다. 뽑히면서 뿌리가 가닥가닥 부서져 떨어져 나갔다. 뿌리까지 메말라 있는 것 같다.
“잎이 피어나게 하려고 나무 안의 생기를 모두 사용해 버렸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라죽어 버린 것 같네요.”
나비처럼 생긴 주제에 식물에게 엄청나게 위험한 녀석이잖아.
“어린 아이니까 너무 화내지는 말아줘요. 제가 가서 타일러 볼게요.”
“어리기는 뭘, 성체라면서. 생긴 것도 어른 같아가지고 전혀 어리게 안 보이던데.”
이런 와중에도 녀석의 편을 들어주는 유하에게 약간 삐쳐서 내가 투덜거렸다.
“겉모습은 겉모습일 뿐이고요.”
“하는 짓도 얼마나 영악한데. 넌 모르겠지만 번데기에서 막 나온 날 그녀석이 얼마나 거짓말을…아니, 관두자.”
말하다보니 더 짜증이 나서 입을 다물었다. 유하는 내 부루퉁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조금 웃었다. 웃는 얼굴을 보기 드문 그녀여서 나는 화내던 것도 잊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해명, 여기는 당신의 집이고 저 아이는 마음대로 머무는 요괴일 뿐이에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보내도 됐을 텐데 왜 여기에 두는 거예요?”
아직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그녀가 물었다.
“왜는? 그…나비인가 하는 요괴는 그러니까 그런 종족은 엄청 약하다며? 나가면 거미 같은 거한테 잡아먹힐 텐데 쫓아낼 수는 없잖아.”
야아, 생각해 보니까 나 좀 좋은 사람인 것 같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산신에게 데려가라고 하면 됐을 텐데. 나 좀 머리가 나쁜 것 같기도 하고….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그러니 당신을 보고 배우면 저 아이도 조금씩 나아질 거예요.”
유하가 말했다.
마음이 약해서 좋은 사람이라는 건가?
그녀가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는 것이 기뻤다. 그래서 그녀의 말에 반대할 생각은 없었지만, 나는 어쩐지 말없이 긍정하는 것이 거짓말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유하는 3층으로 올라가서 나비 요괴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식물의 생기를 이용해서 꽃이나 잎을 피우게 만들면 결국 해가 될 뿐이니 스스로 자랄 때까지 내버려 두라고. 먹을 것이 필요하면 싱싱한 야채를 사다 줄 거라고도 말했지만 나비 요괴는 발을 동동 구르며 떼를 썼다.
“안 돼. 싫어. 나는 나무가 좋아. 살아있는 나무에서 이파리를 먹고 싶단 말이야. 잘라 온 것은 맛없어. 먹을래! 먹을래! 먹을래!”
유하가 다시 설득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아예 듣지도 않고 머리를 저으며 소리 질렀다.
“싫어! 유하가 나빠! 나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이런 상태니 설득이고 뭐고 없었다. 녀석이 주저앉아서 발버둥치고 울며 떼쓰자 유하도 당황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건 뭐 떼쟁이 어린애잖아.
“으허헝…나 배고픈데. 해명이는 화내고 유하는 나무 먹지 말라고 해. 둘 다 나빠. 엉엉…”
번데기에서 막 나왔을 때는 저렇게 대책 없이 어린 것 같지 않았는데. 얘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나.
녀석은 큰소리로 울다 말고 갑자기 울음을 뚝 그쳤다. 동시에 입 대신 배에서 엄청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꾸루루룩~
우느라 배고픈 것 같다. 울먹울먹 하고 있던 나비 요괴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떼쓰는 울음이 아니라 서러움이 섞인 울음이었다. 눈물을 펑펑 떨어뜨리며 우는 모습에 유하가 어쩔 줄 모르며 달랬지만 효과는 없었다.
솔직히 나는, 다 큰 사내 녀석의 모습을 한 요괴가 애처럼 울고 떼쓰는 게 전혀 조금도 요만큼도 불쌍하게 안 보였다. 하지만 유하가 당황하고 있고, 또 다른 문제가 아니라 못 먹어서 서럽다는데야…
“야, 물어 봐.”
눈물 콧물을 흘리며 우는 나비 요괴에게 손가락을 내밀며 내가 말했다. 녀석이 울다 말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물어 보라고. 너 나뭇가지를 무니까 거기에서 나뭇잎이 나던데. 그리고 번데기에서 막 나왔을 때 내 손을 물었잖아. 그때도 나뭇잎이 났었던 거 기억 나냐? 그러니까 한 번 물어 보라고. 또 그렇게 되는지…아얏!”
이 자식이! 물라고 했더니 정말 꽉 깨물었어. 얼굴을 찡그리며 녀석의 입안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바로 그때 잇자국이 선명하게 난 손가락에서 파란 것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분명히 잎이다. 내 손가락에서 이파리가 돋아나고 있었다.
와아, 설마 했지만.
타원형 푸른 잎들이 돋아난 손가락을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 나비 요괴가 답싹 붙어서 그것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딸꾹질과 콧물 삼키는 소리를 내면서도 열심히 나뭇잎을 먹는 걸 보니 배가 고프기는 꽤 고팠던가 보다.
생기를 이용해서 나뭇잎을 만든다 이거지? 그게 식물이 아니라 사람의 생기라도 관계없는 모양이다.
“맛있냐?”
손가락을 핥을 기세로 나뭇잎을 뜯는 나비 요괴에게 묻자 녀석이 후다닥 떨어지며 입을 훔쳤다.
“벼, 별로…그냥 그래. 배가 고파서 할 수 없으니까 먹어주는 거야!”
아아, 그러셔요?
어쨌든 이걸로 해결책은 생긴 것 같다.
“그럼 말이야. 나무들 괴롭히지 말고 배고프면 앞으로 나한테 와. 뭐, 너 정도 먹일 생기는 나눠줄 수 있으니까.”
“우, 웃기지 마! 내가 뭐가 아쉬워서 너 같은…”
“그럼 마트에서 사 온 상추나 뜯어 먹든지.”
“싫어!”
외치는 순간 녀석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혐오에 가까웠다. 마트 상추가 왜? 삼겹살 싸먹으면 맛있는데.
“그, 그런 것 보다는 네 생기로 만든 잎이 나아. 맛은 별로지만.”
맛이 별로라서 미안하네요.
“아무튼 약속한 거지? 이제부터는 나무의 생기는 건드리지 않는 거다. 저절로 자랄 때까지 그냥 둬야 해. 알았지?”
“알았어. 대신 나는 한창 자라고 있으니까 자주 자주 먹어야 해. 많이.”
어쩐지 무섭게 들리는 말인데. 내 생기를 뽑아먹고 자라겠다는 건가. 그런데 나도 이미 약속을 한 뒤라…
“말려죽이지만 마라.”
피식 웃으며 내가 대꾸했다.
나비 요괴는 약속한 대로 더는 화분의 나무들을 마음대로 자라게 하지 않았다. 내게는 하루에 세 번씩 와서 나뭇잎을 만들어 뜯어먹었다. 보통 슬금슬금 뒤에서 다가와 갑자기 발목을 물어뜯는다든가 손가락을 문다든가 해서 내가 놀라는 모습을 보며 깔깔대곤 했다. 저게 정말로 좋은 요괴가 될지 나는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서 녀석의 몸은 점점 커졌는데, 반면 얼굴은 점점 어려졌다. 정말로 저 녀석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 건가.
2주쯤 지나자 녀석은 열 살 가량의 소년이 되었다. 크기도 인간의 열 살 아이와 비슷해졌다. 날개만 빼면 사람과 구분이 안 갈 정도다. 그 날개도 두루마리 말듯이 돌돌 말 수 있게 되어 옷 안에 숨겼다.
긴 머리는 유하가 땋아서 댕기를 물려놓았다. 거기에 품이 넉넉한 한복을 지어서 입히자 영락없는 조선시대의 사내아이였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이제 어린아이라서 나랑은 다르다는 거다. 멋대로 움직이는 거울을 보는 것 같은 기분 나쁜 느낌이 이제는 없었다. 유하가 녀석에게 무른 것은 여전하지만….
그런데 녀석이 인간 수준으로 커졌기 때문에 더는 3층의 계단 뒤편에 둘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녀석을 내 방에 들여야 했다. 지금까지 쭉 텅 비어 있던, 복층의 침대 맞은편 공간에 녀석을 위한 잠자리를 만들었다.
아침이 되면 나보다 빨리 깨어서 유하를 따라다니며 놀았기 때문에 녀석을 볼 일은 별로 없었지만 대신 자고 있다가 손가락에 나뭇잎이 돋아나곤 했다.
먹성 좋은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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