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와 보물성(9)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시간은 지겨울 정도로 천천히 흘렀다.
핸드폰을 꺼내 시각을 확인할 때마다 1분이나 2분 정도가 지나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카드를 찾으러 다닐 판이었다. 한동안 어두운 곳만 돌아다니던 나는 이제 힌트고 뭐고 아무 곳이나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안경의 남자를 다시 본 것은 성벽로 위를 꼼꼼히 살피며 걷던 때였다. 타구 아래쪽의 돌 틈 사이에 카드 같은 게 끼워져 있지 않나 들여다보는데 한 건물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안경의 남자가 보였다. 그 건물이란 작은 예배당이었다.
예배당은 아성의 가까운 곳에 만들어진 중세식 건축물이었다. 규모는 작다. 그래도 길쭉한 창에 스테인드글라스를 끼우고 첨탑에는 아름다운 청동 장식에 벽 위로 천사상 같은 것도 제법 근사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곳의 문 앞에 서서 그는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예배당에 들어가서 참회할 일을 하기는 했겠지만 설마 그것 때문에 저기 서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약간 회의적으로 생각한 다음 신경 끄고 하던 일이나 계속했다. 하지만 그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성벽로 위에 있으니 안 볼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성탑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서 남자에게로 가보았다.
그는 발소리를 듣고 돌아보더니 안경 안에서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나를 외면했다.
어쩐지 겁먹은 것도 같고, 안절부절 하는 것도 같았다. 채영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가 숨겨놓은 카드를 가져간 것이 잘못은 아니었다. 남이 숨긴 카드를 가져가면 안 된다는 규칙도 없고, 강제로 뺏어간 것도 아니다. 그녀가 숨겨놓았다는 것을 알면서 가져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도의적인 죄책감조차 느낄 필요가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채영의 편에서 봤을 때 어쩐지 얄미웠던 안경의 남자가 오히려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저 모습은 분명히 자신이 한 일이 드러날까봐 쩔쩔매고 있는 태도다.
“여기서 뭐하세요? 아까부터 계속 계시던데.”
그가 안 되어 보이자 내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남자는 나를 힐끗 보더니 우물거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긴 나랑 이야기 할 게 뭐 있나. 공연히 어색한 분위기나 만들었네. 내가 슬쩍 돌아서는데 남자가 갑자기 말했다.
“채영이한테 말 안 하셨더군요.”
나는 약간 어리둥절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고 있다. 내가 채영에게 그가 카드를 가져갔다는 얘기를 안 했다는 거지. 그런데 내가 봤다는 걸 남자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채영이한테…?’
물론 20대 중반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그녀니까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이 남자라면 딸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초면인 사이에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쉽게 이름을 부르게 되는 건 아니다. 게다가 이 소심해 보이는 아저씨라면 더….
“뭐, 여기서 그게 딱히 잘못이라고 할 일도 아니고 채영씨도 마음이 정리된 것 같아서요. 괜히 기분만 나쁘게 만들 필요 없으니까요.”
그리고 말한다고 해서 도로 찾아올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내 대꾸에 남자는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채영이는 낙천적이고 용감한 아이였죠.”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아는 사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아아, 둘이 별로 아는 체 안 해서 모르는 사이인 줄 알았어요.”
이제 보니 아는 사이에 카드를 가로챘단 말이야? 조금 불쌍해 보이려던 남자가 도로 얄미워졌다.
“저도 몰랐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건 어릴 때 모습과 이름뿐이니까요. 채영이도 저를 못 알아보는 것 같더군요. 그래도 옛날 모습이 많이 남아서 금방 기억이 났습니다.”
채영씨가 어릴 때 알았던 사이라는 거네. 어떤 사이지? 옆집 아저씨? 먼 친척? 어릴 때 헤어진 아빠…아니 이건 좀 아침 드라마고.
궁금해 하는 내 마음을 알았는지 몰라도 남자가 덧붙였다.
“제가 처음 담임이 된 반의 학생이었습니다. 12년 전이지만 그때 아이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지요.”
아아…선생님이셨구나. 그러니까 선생님, 제자의 카드를 훔친 겁니까. 어쩐지 호감도 게이지가 더 떨어지는데.
나는 슬슬 그곳을 떠나 다른 곳이나 뒤져보고 싶었지만 남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아이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는데…내가 가르친 것은 다 잊어버렸어요. 쓸데없는 것만 가르쳤으니까요. 학교에서 선생들이 학생들한테 너희들 잘 되라고 하는 말이라며 떠벌이는 거, 그거 다 헛소리입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그걸 가르친 내가, 그 소리 하나도 안 믿으니까요.”
남자는 말하면서 예배당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치형의 나무문을 밀어젖혔다.
예배당 안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색색의 빛으로 아름답게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있어야 할 긴 의자들 대신 다른 것이 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남자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카드를 찾아 성 안을 돌아다니면서 이 예배당도 들어온 적이 있었다. 기억하기로는 긴 의자가 다섯 개씩 두 줄로 놓여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예배당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비었다고 하기에는 예배당 중앙에 놓인 것이 있지만 그것이 의자는 아니다.
그것은 상자였다.
보물 상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각형의 몸체에 원통을 반으로 자른 것 같은 모양의 뚜껑. 뚜껑과 몸체 사이에는 잠금장치 대신 카드투입구처럼 생긴 네모난 홈이 있었다.
보물의 열쇠를 손에 넣으면 상자의 방을 찾을 수 있다더니. 여기가 바로 상자의 방이었을까.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아아, 댁도 아직 젊으니 이해 못할지도 모르겠군요.”
남자는 상자를 내려다보며 주머니 안에서 카드를 꺼냈다. 갑옷을 입고 전차에 탄 남자와 두 마리의 스핑크스가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은 분명 전차였다.
내가 뭐 하러 이 남자에게 왔담. 저런 말이나 들어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나.
처음으로 본 보물 상자나 거기에 들어있을 보물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사라졌다. 남자가 상자를 향해 몸을 구부리는 것까지가 내가 본 장면이다. 나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그곳을 나갔다. 그리고 카드를 찾아다니는 것도 그만두고 식당으로 돌아갔다.
식당에는 백은호와 채영이 함께 있었다. 있을 뿐 아니라 함께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어디서 찾아왔는지 모를 진짜 게임용 카드로 포도알을 걸고 포커를 하는 중이었다. 게임은 주로 백은호가 이기고 있는 것 같은데 열심히 포도알을 모으는 채영과 달리 녀석은 심심하면 하나씩 집어먹고 있어서 자금이 계속 빈약했다.
“아, 해명씨도 같이 할래요? 둘이서만 하니까 재미가 덜하네요.”
채영이 나를 보고 쾌활하게 말을 걸었다. 어차피 카드 찾기도 질렸고…. 나는 포도 한 송이를 들고 끼어들었다. 그리고 체감상 30분도 안 된 시간 만에 한 송이를 다 털려버렸다. 이 사람들 타짜야?
“해명씨는 표정이 다 드러나서 너무 쉬운 걸요.”
채영이 깔깔거리며 나한테서 가져간 포도를 맛있게 먹어치웠다. 잘난 체하는 얼굴로 포도알을 삼키는 백은호 녀석을 보니 약간 배가 아프지만, 모처럼 누군가 밝게 웃는 모습을 보니 포도 한 송이 잃은 것쯤이야.
그러나 내 좋았던 기분은 식당 안으로 또 한 사람이 들어오면서 망쳐버렸다. 안경의 남자다. 예배당에서 뭔가 보물을 얻었을 테니 그걸 가지고 방으로 가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무슨 생각인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식당 안을 둘러보더니 곧장 채영에게로 갔다.
“악마 카드의 아래쪽 그림, 가지고 있는 거 맞지요? 그것과 이걸 바꾸지 않겠습니까?”
그가 말하며 내민 것에 나는 확실히 놀라버렸다. 전차 카드다. 왜 저것을 가지고 있지? 상자를 열어도 열쇠는 남아있는 건가? 아니면 상자를 열지 않은 거야?
채영도 그의 제안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 그렇긴 하지만…그게 제 초대장이라…. 초대장은 남에게 줄 수 없다면서요?”
남자의 말대로 채영이 악마 카드의 아래쪽 그림을 가지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안경의 남자도 초대장이 악마 카드였지. 서로의 초대장이 카드의 짝이 될 때는 어떻게 하는 거지?
“재단 직원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열쇠의 양도 및 공유는 우리에게 맡긴다고요. 완성된 전차 카드를 드릴 테니 악마 카드를 양도해 달라는 겁니다.”
“하지만 왜…악마 카드라는 거, 안 좋은 의미 아니였어요? 전차를 완성했으면서 어째서 그걸 악마 카드와 바꾸시려는 거예요?”
채영이 물었다. 나도 궁금하다. 저 남자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걸까.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해서 믿어지지 않는 거라면, 이 카드를 드릴 테니 먼저 상자를 열어서 보물을 가져가도 좋습니다. 그런 다음 나에게 악마 카드를 주세요. 그러면 되겠습니까?”
터무니없이 좋은 조건이다. 그런 조건으로 제안하는 이유를 몰라 채영은 눈을 깜박이며 망설이고 있었다. 남자가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고 얼굴을 찡그리는 듯한 웃음을 띠었다.
“나는 말입니다. 내게 보내진 이 초대장이 주는 것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성 안에서 내가 찾아낸 카드가 아니라, 소설가가 내게 보낸 카드를 보고 싶습니다. 그 작자가 자신의 놀이터와 같은 이 성 안에서 나를 어떤 배역으로 썼는지 보고 싶다 이 말입니다.”
그가 말하며 전차 카드를 채영의 손에 쥐어주었다. 채영은 난감한 얼굴로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우리를 번갈아보며 잠시 망설였다.
“어떻습니까. 별로 손해 볼 일도 아닌 것 같은데.”
마지막 남은 포도알을 날름 삼키며 백은호가 말했다. 채영은 그를 힐끗 본 다음 게임에서 포도알을 걸던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식당에서 나가는 문을 열자 묘한 일이 일어났다. 식당의 밖은 홀이었는데 그곳에 언제 누가 갖다놓았는지 모를 상자 하나가 있었다.
생긴 모습은 분명 아까 예배당에서 본 그 보물 상자다. 채영은 상자 앞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홈 안에 카드를 밀어 넣었다. 달칵 하고, 상자 안에서 잠금장치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채영은 약간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조그만 도자기 병이 들어있었다. 옛날에 화장수나 약병으로 사용하던 것 같은 백자 용기다. 조그만 입구가 마개로 막혀 있었다. 그것을 꺼내자 병 안에서 뭔가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좋은 향기군요. 사람의 손이 닿지 않고 만들어진 선단과 같은 향기가 납니다.”
식당 안에서 백은호가 말했다. 밖은 쳐다보지도 않고 식탁 앞에 앉아있는 주제에, 상자 바로 앞에 있는 나도 못 맡는 냄새를 맡은 것 같다. 하지만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작은 병에 들어있는 뭔가는 대단히 좋은 약이지 않을까?
채영은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얼굴로 안경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가 마음을 바꾸어서 약병을 가져갈까 걱정하는 것도 같고 뜻밖에 좋은 것이 생기자 어쩔 줄 모르는 것도 같았다.
안경의 남자는 주머니 안에서 자신의 초대장을 꺼냈다. 염소 머리를 한 악마의 그림이 그려진 그것을 내려다보았다가 채영을 바라본다. 채영이 그 말없는 요구에 응하여 자신의 초대장을 내밀었다. 남자가 두 개의 초대장을 겹치는 순간에, 마치 서로 끌어들이는 것처럼 초대장이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림은 완성되었다.
괴물 같다고 할 수 있는 커다란 악마 아래에 여성과 남성의 작은 악마가 사슬로 이어져 있다. 어딘가 어두컴컴한 곳에서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으면서도 꽤나 즐거운 표정의 악마들이었다.
안경의 남자는 잠시 카드를 쏘아보더니 그것을 가지고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나왔던 그 문을 열었다. 그 문밖으로 보이는 광경에 나는 놀랐다.
분명 조금 전까지 긴 식탁과 의자들이 있는 식당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문 너머는 어두웠다. 그러나 거기가 실내가 아니란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밖이다. 식당이 사라지고 바깥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캄캄한 밤이었다.
핸드폰의 시계는 지금이 오후 9시 32분이라고 가리키는 중이지만 이 성은 시각에 관계없이 계속해서 대낮이었다. 반면 식당 문 너머로 나타난 바깥은 밤인 것이다. 가로등이 있어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성의 바깥은 건물 하나 없는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문밖의 정경은 널찍한 공터와 그 너머의 커다란 건물이다. 전국에 수천 개는 될 것 같은 저 익숙한 건축물, 저건 분명히 학교였다.
“나가는 문…이에요?”
채영이 놀라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대로인 것 같다. 열쇠는 보물을 여는 것과 문을 여는 것, 두 가지라고 했으니까. 악마 카드는 문을 여는 열쇠가 된 모양이었다.
“하….”
안경의 남자가 한숨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채영을 돌아보며 말을 걸었을 때, 예배당 앞에서 보았던 그와는 조금 다른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같이 가겠습니까? 윤채영씨.”
조금 더 젊고, 꿈꾸는 것 같고, 온화한 남자가.
“예? 저요? 그래도 되나요?”
열쇠의 양도나 공유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고, 재단의 직원이 말했었지. 남자는 문의 열쇠를 채영과 공유하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채영이 허둥거리며 남자를 따라 문으로 갔다. 그러다 갑자기 돌아서서 달려오더니 내 귀에 속삭였다.
“이건 생각만 한 건데요…”
그녀는 내가 생각해본 적 없는 것을 속삭여 주고는 재빨리 남자를 따라 문을 나섰다. 그들이 나가자 문은 저절로 닫혔다. 내가 다시 그 문을 열어보자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식당과 약간 실망한 얼굴의 백은호가 보였다.
“뭐, 가끔은 재미없는 일도 생기는 거군요.”
이 녀석은 정말 뭘 기대하고 여기에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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