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17화 (117/218)

발광충(7)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노인이 이야기를 꺼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거칠어진 숨을 누그러뜨리고 한참을 진정한 다음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느릿느릿 기억을 돌이키며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65년 전, 아득할 정도로 먼 일이었다.

“그때가 늦가을이었소. 추수가 끝나고 얼마 안 되어서인데, 형들을 잡아간 군인들이 다시 마을로 온다는 소리에 나와 동생은 마당에서 타작하던 그대로 집을 뛰쳐나가 산으로 숨었소. 이틀 있다 내려갔더니 마을 안이 온통 난리였지. 남자란 남자는 어린애와 노인 빼고는 다 잡혀 간 거요. 앞집에서는 아직 열네살밖에 안 된 막내아들이 끌려갔다지 않나, 성용이네 아버지는 아들을 못 데려가게 막으려다 맞아서 다리가 부러졌다지 않나…끌려간 사람들 일부는 노역장으로 보내고 일부는 군인이 되고 했다는데 뭘 들어도 소문뿐이었소.”

메마른 목소리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참혹한 이야기를 하면서 노인의 표정은 나무껍질처럼 거칠고 단단했다.

“아들 둘을 어디로 빼돌렸냐며 군인들이 부린 행패에 어머니도 성치 못하셨소. 어머니는 우리를 보고도 반가워하기는커녕 말소리도 크게 못 내셨소. 옆집에서 알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제 아들을 찾아오려고 우리를 고발할지도 모른다고 말이오. 이틀 사이에 세상이 그 지경이 되어 있었던 거요. 우리는 집에서 밥 한 끼만 얻어먹고 누워보지도 못한 채 도로 산으로 갔소.”

형제는 서로의 손을 붙잡고, 어두운 산길을 타서 집으로부터 십리 가량 떨어진 산속 암자에 몸을 숨겼다. 암자라고 해도 쓰러져가는 오두막에 가까운 단출한 건물이었다. 그나마 수년 전 주인을 잃어 잡초가 무성하고, 나무로 만든 부처님 옆에서 무너진 벽을 넘어 칡넝쿨이 자라는 판이었다.

그래도 이슬을 피할 지붕이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그들은 가져간 음식을 아껴먹으며 그곳에 숨어 있었다. 닷새에 한 번 음식을 가지고 오는 정순이가 아니면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정순이는 노인의 정혼녀였다.

“야무진 처녀였지. 우리가 숨은 암자 근처는 귀신이 나온다 도깨비가 나온다 하며 남자들도 밤에는 얼씬하지 않았는데 그런 곳을 겁도 없이 지나다니며 우리를 먹여 살렸다오. 그 집에서도 아버지와 아들 둘이 끌려가고 딸 둘에 열네 살 먹은 막내아들만 남았는데 나중에 듣기로는 아들이 끌려갈까봐 어머니가 막내아들의 팔을 일부러 부러뜨렸다고 했소. 그런 시절이었지.”

말하며 노인의 허옇게 변한 눈이 허공을 더듬었다.

“그런데 두 달쯤 지나서인가, 때가 아닌데 갑자기 정순이가 찾아왔소. 헐레벌떡 달려와서는 우리가 숨어있는 것을 들킨 것 같다며 다른 데로 도망가야 한다는 거였소. 정순이가 먹을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가는 것을 누군가 본 모양이었지. 마을에는 한 무리의 군인들이 죽치고 있고 몇 사람이 암자로 출발하는 것을 봤다는 말에 우리는 함께 더 깊이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갔소. 가면서 정순이가 말하기를, 군인들이 물러가고 안전해지면 암자에 올라와서 불을 켜둘 테니, 그것을 신호로 삼으라 했지”

형제는 길도 없는 산속을 헤맸다. 그 와중에 노인은 어둠속에서 굴러 다리까지 다쳤다. 낮에는 어두운 계곡 안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동생이 산자락을 타고 올라가 암자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이틀 만에 암자에서 빛이 보였다.

“이틀 동안 제대로 못 먹어서 여간 허기진 게 아니었는지, 동생은 빨리 암자로 가서 정순이가 가져다 놨을 음식을 먹고 싶어 했지. 나는 다리가 다쳐서 쉬이 걸을 수 없어 동생더러 먼저 가라고 했소. 괜찮다고 하다가 내가 떠밀자 결국 먼저 갔지. 동생을 보내놓고 천천히 암자로 가는데 반도 못 가서 총소리를 들었소.”

따땅! 하고 울리는 그 소리에 그는 놀라서 주저앉아버렸다고 했다. 총소리가 몇 번을 더 울리고 사람들의 외치는 소리, 산속을 부산히 오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바닥에 납작 엎드려, 그는 머리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소리가 잠잠해지고도 그는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동생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어째서 암자에 군인들이 있었는가 하는 생각보다 들키면 큰일이라는 두려움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

“날이 밝고 나서야 절룩절룩 암자로 찾아갔더니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소. 주변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동생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소. 망연해서 주저앉아 있었지. 그리고 밤이 되는데 저것들이 나타났소.”

노인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유리 등롱을 노려보았다.

“저것들이, 캄캄한 데서 훨훨 날아 암자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소. 처음 암자에 왔을 때도 한두 마리는 보았었지. 반딧불이인 줄 알았소. 여름도 아닌데 웬 반딧불이인가 싶었지만 세상이 이 지경이니 벌레라고 제지경일까. 그러고 말았소. 그런데 저것들이 그 모양으로 떼로 뭉쳐서 훤히 빛나고 있는 거요. 동생이 본 불빛이 이거구나 하고 알았지.”

요괴의 불빛을 보고 정순이의 신호라고 생각한 동생은 암자로 돌아가다 군인에게 들킨 것이다.

다음날 집으로 가본 그는 더 기막힌 소식을 들었다. 정순이가 두 사람이 걱정된다며 산으로 갔다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동생이 군인에게 들킨 그 날의 일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길이 없었소. 암자로 돌아가서 며칠 동안 주위를 헤맸소. 살아있으면 나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시체라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온 산과 온 계곡을 다 뒤졌지. 하지만 없었소. 며칠 만에 다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군인들도 더는 안 오더군. 그리고 한 달 후에 폭격이 있었는데, 산골 마을에 뭐 무서운 것이 있다고 마을 절반이 절단 나고 사람도 많이 죽었지. 우리는 그날로 고향을 떠났소. 그놈의 땅, 산, 쳐다보기도 싫었소.”

마을을 떠나기 전 노인은 마지막으로 한 번 암자에 들렀다고 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동생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 살아있는 동생이 아니라면 죽은 넋이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암자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시 봐도 원망스러운 벌레들이었다.

“한 달이 지났는데 여전히, 멀쩡하게 빛을 내면서 살아있지 않겠소. 저것이 반딧불이건 뭐건 내게는 원수 같았소. 웃옷을 벗어서 후려치면서 다 때려잡으려고 했지. 그런데 아무리 때려잡아도 한 마리도 떨어지는 것이 없었소. 얼마나 분하고 억울했는지 모르오. 밤새 저것들과 씨름을 하다가 다음 날 고향을 떠났소.”

그런데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고향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던 그는 밤만 되면 어둠 속에서 파르스름하게 반짝이는 빛 무리를 발견했다. 어디로 가도 똑같았다.

“가는 곳마다 빛이 보이는 거요. 나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말이오. 처음에는 내가 미친 줄 알았소.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그 빛이 보인다더군. 그래서 오라, 저것들이 내가 죽이려고 했다고 앙심을 품고 따라오는구나 싶었지. 죽이려고 해봤지만 죽일 수도 없고, 쫓아낼 수도 없고, 분한 마음을 참고 내버려 두었소.”

빛들은 그 후로도 쭉 밤만 되면 그의 주변에 나타났다. 노인은 그것을 볼 때마다 동생과 정순이가 생각나서 괴로워했다. 벌레들을 더는 안 봐도 되었던 것은 그로부터 일 년이나 지나고 후였다. 벌레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사로잡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 사람이 있었다.

“한 열 살이나 먹어 보이는 어린 사내아이였소. 빛을 보고 좋아라 하면서 한참을 같이 놀더구먼. 내가 그것들을 질색하니까 사로잡아 담아놓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했소. 대신 그것들을 절대 버리지 말고 가지고 있으라더군. 나는 그것들을 안 볼 수만 있다면, 아니 하루에 한 번만 잠깐 보는 것으로도 어떻게든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소.”

그로부터 노인은 벌레들과 기묘한 동거를 시작했다.

그는 유리 등롱에 가둔 요괴들을 하루에 한 번씩 밤마다 꺼내놓았다. 그때마다 산속에서 들었던 총소리와 땅에 납작 엎드려 떨었던 자신의 못난 모습이 되살아났다. 동생더러 먼저 가라고 밀었던 제 손을 원망하고, 착하고 야무진 정순이를 생각하며 울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미운 대상은 바로 이 벌레들이었다. 등롱 안에서 한가로이 떠다니는, 걱정도 두려움도 없어 보이는 벌레들. 두 사람을 죽게 만들어 놓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바로 이것들.

죄책감을 뛰어넘는 미움을 벌레들에게 쏟아 부으며 그는 수십 년을 그것들과 함께 살았다.

노인의 이야기가 끝나고도 우리는 잠시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적막한 가운데 유리 등롱 속의 요괴들만 둥실둥실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요괴들이 보여준 건 뭐였어요?”

잠시 후 내가 물었다. 나로서는 저 녀석들이 노인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가 궁금했다.

내 질문에 노인의 볼이 일그러졌다.

“그 날…산속에서…”

노인이 본 것은 동생이 군인들에게 들킨 그 날 밤이었다. 마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듯이 동생이 어둠 속에서 산을 타고 올라오는 모습을 그는 봤다. 산길을 따라 늘어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군인들을 봤고 반대쪽에서 동생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뛰는 정순이를 봤다.

발소리에 고개를 돌린 군인을 봤고 창백하게 변하는 정순이의 얼굴을 봤다. 누구냐고 소리치며 총을 겨누는 군인을 봤고 놀라서 우뚝 선 동생을 봤고 살려달라고 소리치면서 달려가는 정순이를 봤다.

정순이를 보고 달려가는 동생을 봤고 그녀를 데리고 도망치는 동생을 향해 총을 쏘는 군인을 봤다. 어둠 속에서 총구의 화염이 번쩍이는 것을 봤고 두 사람이 비틀거리는 것을 봤다. 군인들이 달리는 것을 봤다. 둘이 어둠속으로 까맣게 먹혀들어가는 것을 봤다.

그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암자 위에서, 이 벌레들은.

그리고 자신들이 본 것을 그대로, 노인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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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광충(8)fin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저것들은 요괴요! 수십 년 동안 나를 괴롭힌 원수요! 내가 저것을…저것 때문에…! 그러데 왜 그것을 이제야 내 눈에 보여줘서! 이 다 죽어가는 나를 얼마나 더 괴롭히겠다고!”

노인의 흐린 눈에서 증오가 번득였다. 그것이 눈물과 함께 쏟아졌다. 손자가 어쩔 줄 모르며 할아버지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노인의 고통과 그 위에 더께 앉은 세월은 젊은 그에게 감당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허둥거릴 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궁금했다. 노인과 똑같은 것을 정말로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왜 이제야 노인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며 아픈 기억을 돌이키게 만드는 걸까. 수십 년 동안 잠잠하다가 왜 이제야.

“저…”

그때 마른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할아버지의 옆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연 사람이 있었다. 지금까지 당황한 채로 입을 꼭 다물고 지켜보던 조영천의 여자 친구였다.

그녀는 노인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 무서운 광경을 보고 있는 것처럼 두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몇 번이나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제야 말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고향이, 혹시 응곡…감람골 위에 있는 응곡 아닌가요?”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어깨를 떨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보이지 않는 눈이 번쩍이는 것처럼 보였다.

“처자가 어찌 아나?”

그녀의 질문은 할아버지를 놀라게 했지만 할아버지의 대답은 그녀를 더욱 놀라게 만든 것 같았다. 여자의 얼굴이 옅은 화장기 너머로도 보일 정도로 창백해졌다.

“저, 저는…혹시나 하고…”

하지만 말과 달리 금세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조영천이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는 자신이 비틀거린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 정말 응곡이죠? 감람골에서 응곡 가는 길에 저수지가 있고, 그리고, 그리고…호두나무! 마을 첫 번째 집에 커다란 호두나무가 있고…”

“완석이 집이지! 네가 그걸 어찌 아나. 응?”

할아버지의 말에 창백했던 여자의 얼굴은 이제 홍조를 띠고 있었다.

“할아버지, 저희 할머니요. 이가시고요, 정자 순자를 쓰세요. 이정순.”

이정순? 할아버지의 정혼자였다던 그 정순이라는 처자?

“할머니가 항상 고향 이야기를 하셨거든요. 제가 어릴 때부터요. 그래서 정말 많이 들어서, 직접 가본 것처럼 눈에 환할 정도예요.”

“정순이…?”

노인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론 보이지는 않겠지만.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한참 후에야 그가 눈을 껌벅거렸다.

“정순이가 살아있어?”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자 처녀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건 아니고요…. 실은 두 달 전에 돌아가셨어요.”

“아아, 그 때 그 장례식에 나도 갔었지.”

조영천이 뒤늦게 생각난 듯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정정하시고 기억력도 좋으셔서, 늘 고향 이야기를 하곤 하셨어요.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야 하는데…하고.”

이번에도 노인은 조금 늦게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정순이가 죽었어…?”

“예….”

“정순이가 살아 있었는데…정순이가 죽었구먼….”

노인은 안 좋은 이로 딱딱한 음식을 씹는 것처럼, 그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되씹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삼킬 수 없는 것 같았다.

“정순이가 살아 있었는데…”

노인은 중얼거렸다.

“할아버지 이야기도 자주 하셨어요. 고향에 정혼한 총각이 있었는데 이제 남북으로 갈라져서 다시 못 보게 되었다고…훤칠하니 잘 생기고 사내다워서 마을 처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요.”

그 할아버지 닮았다는 손자로 미루어 짐작컨대 옛날에는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의 기준이 좀 다르지 않았나 싶다. 아니 뭐, 별로 눈꼴시어서 하는 말은 아니고.

“그런데 정순이가 죽었구먼…”

“예…. 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제가 할머니 젊었을 적이랑 많이 닮았대요. 그래서 할머니한테 귀여움 받았어요.”

그녀가 자랑하듯 말했다. 저 커플은 천생연분인 것 같다. 아주 그냥 똑같이 사랑받고 크셨네.

“그래. 참 이쁘고 똑똑한 처자였지. 어지간한 사내놈보다 훨씬 나았어…”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흐린 눈은 수십 년 전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순이는 살아 있었구먼…다행이야…”

노인의 표정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고향을 떠났을 때 이야기는 잘 안 하셔서 모르지만요, 화천 할아버지가 총에 맞으셔서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래서 화천 할아버지를 업고 산을 몇 개나 넘어서 읍으로 갔다가 거기에서 군인들한테 쫓겨났대요.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폭격이 있어서 군인들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더라고. 그래서 갈 수가 없었대요. 그러다 피난민에 섞여서 남쪽으로 가셨다고 해요.”

“화천 할아버지?”

물은 사람은 나다. 내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할머니 동생이신데…징용당하는 걸 피하려고 숨어 있다가 들켜서 군인들 총에 맞았대요. 그때 이야기는 무섭다고 잘 안 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한 번인가 두 번인가 밖에 못 들었어요. 화천 할아버지는 강원도에 사세요. 강원도 화천요. 할머니도 원래 거기 사셨는데 결혼하고 할아버지 따라서 여기로 오신 거예요.”

여자의 얼굴은 이제 화색을 띠고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생각해 보세요. 전 화천 할아버지가 할머니랑 의남매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방금 이야기 하신 걸 들어보니까 어쩌면…”

어쩌면…

그녀는 말끝을 흐렸지만 우리는 모두 뒷말을 알았다.

어쩌면 그가 노인의 동생일지도 모른다. 총에 맞은 정혼자의 동생을 업고 읍으로 갔던 그 처녀는 피난민과 함께 휩쓸려 남쪽으로 내려가며, 그를 끝내 버리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마치 친남매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낯선 땅에서 질기게 살아남았던 건지도 모른다.

“그럼 그 화천 할아버지는 지금…”

조영천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질문을 들은 처녀의 얼굴이 자랑스럽게 반짝거렸다.

“살아계셔요. 화천에서 아주 건강하게 계셔요. 올해로 여든 둘이신데 어찌나 정정하신지 몰라요.”

조영천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가 노인을 돌아보았다.

“할아버지!”

노인은 멍하니, 하얗게 흐린 눈으로 처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아직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 화천 할아버지의 성함이…?”

혹시나 하고 내가 물었다.

“조가시고요, 철자 원자를 쓰셔요.”

“철원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들은 그의 귀로도 이름만은 확실히 들린 것 같았다.

“철원이가…”

“그분 성함이 조철원…맞아요? 할아버지 성함이 조철선이니까 철자 돌림…맞는 것 같잖아?”

조영천이 대답 없는 노인 대신에 여자 친구를 돌아보며 물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철원이가 살아있었구먼…”

노인이 겨우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부터 퍼낸 것 같은 눈물이, 마른 볼 위에 흘러 넘쳤다.

아…그런 거였어.

나는 누군가 알려준 것처럼 모든 것을 이해했다.

조영천이 본 여자 친구의 모습은 사실 여자 친구가 아니었던 거다. 그녀를 닮은, 아니 반대로 그녀가 닮은 거겠지만 어쨌든 그녀와 흡사한 젊은 시절의 정순이인 것이다. 두 달 전 죽은 그녀의 혼백, 그랬던 거겠지.

이승에 남은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그녀가 찾아온 거겠지. 그리고 그녀가 찾아온 것을 이 아이들은 알려주고 싶었던 거다.

알려주기 위해 애썼던 거다.

그렇지?

유리 등롱 속의 빛 무리를 들여다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물었다. 그러나 녀석들은 우리의 이야기 같은 것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수십 년 동안 미움을 받아온 것에도 별로 상관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평화롭게 유유히 등롱 안을 떠다니며, 푸르스름한 빛을 마음껏 밝히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나서 만족한 것 같았다.

이 녀석들은 자신들의 빛 때문에 노인의 동생이 죽을 뻔한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것을 미안하게 생각했을까? 아니면 마냥 단순하게 본 것을 기억하고, 들은 것을 말하고 싶어한 것 뿐일까.

그것을 알고 싶었지만 녀석들과 스무고개로 대화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이제 녀석들은 평화로웠다. 정말로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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