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95화 (95/218)

신데렐라(1)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섬을 다녀온 후로 내게는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우선 유리 장식이 없어졌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 침대 밑에 흩어졌다가 밤이면 다시 멋대로 뭉쳐 있곤 하던 그것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아침이면 유리 깨지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 날카롭고 섬뜩한 소리는 오히려 전보다 더 생생하게 들렸다. 바로 내 귀 옆에서 부딪쳐 깨지는 것만 같았다.

다른 하나는 기억이었다.

낮 동안은 전과 다름없이 모든 기억이 몇 개월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밤이 되면, 자야 할 시각에 가까운 깊은 밤이 되면 내 머릿속에서는 혼란할 정도로 많은 기억들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그것은 대부분 단편적인 장면들이었다. 짧게는 몇 초, 길어도 몇 십 분에 불과했다. 그런 짧은 기억이 앞뒤 정황도 모르는 채로 뚝 잘려서 떠올랐다. 대부분은 아주 오래 전이었는데 그 무렵의 나는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 자신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이 시야 위쪽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해명도령의 기억이라는 걸까. 전설 속의 그 꼬맹이가 나라는 것을 아직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서인지 기억들은 내게 낯설었다.

그런 식이라도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유통기한이 있다는 거였다. 다음날 아침이 되면 어젯밤의 기억들은 모조리 리셋 되어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고 밤이 되면 어제와 다른 새로운 기억의 조각들이 랜덤으로 쏟아졌다. 아주 멋대로다.

뭔가 떠오를 때마다 메모해 뒀다가 시간 순으로 정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억이 돌아오는 때가 밤이라 이런 작업을 하는 동안 새벽이 되어버렸고 나는 계속 늦게 잠들었다. 일어나는 시각은 언제나 같았기 때문에 매일 잠이 부족해서, 눈 밑에 다크 서클을 달고 좀비처럼 돌아다니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내 기억의 용량이라는 것은 실로 엄청났다. 아무리 기록해도 좀처럼 기억의 조각들은 연결되지 않았다. 하긴 해명도령이 전설 그대로라면 수천 년을 살았을 터다. 수천 년 분량의 기억이라니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섬에서 있었던 일들은 조금씩 잊혀졌다. 기억의 한 편에 밀쳐두었다는 편이 맞겠다. 원강이 말한대로의 긴 밤이 끝나고 잠에서 깨어난 다음, 백은호나 다른 사람들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 몇 가지나 있었지만 얼떨결에 돌아오고는 기회를 잃었다.

아니, 묻는 것을 내가 피했을까?

백은호에게라면 언제라도 전화로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묘란이 한 말의 의미를 묻고 싶었던 것이다.

-그분도 알고 있나요? 자신을 인간도 요괴도 아니게 만들어버린 자가 누구인지.

그녀는 뭔가를 알고 있었다.

묘란에 의해 변한 노인의 아들은 분명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이되 인간에서 어딘지 빗겨나 있는 기분. 그것은 내가 요괴와 사람과 신의 기운을 확실히 구분하게 되면서부터 스스로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기운을 정확하게 읽게 되자 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 다를 수밖에 없겠지. 보통 사람이 제자리에서 몇 미터를 뛰어오르거나 요괴와 근접하게 싸우거나 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자신에 대해서는 그 다른 점을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유하의 경우에는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기운을 읽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다.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고 깨닫게 된 후였다. 뭐랄까 엿보는 기분으로 기운을 찾아 뒤쫓다가 스스로 창피해져서 그만두고는 했다.

그녀의 기운이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어도 별로 이상하지 않았다. 나처럼 조금 다른 사람이 있을 뿐이라 여겼다. 그리고 또 어딘가에 누군가 더 있겠지 라는. 그러나 섬에서 노인의 아들을 보고 나니 그렇게만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인간도 요괴도 아닌 존재, 천왕의 규칙에서 벗어난 사람. 묘란의 말이 무슨 뜻인지 확인해야 했다.

확인해야 하는데…

두려워서 으르렁거리던 백은호를 떠올리면 물을 수가 없다. 다시 보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다.

뭐…묻는다고 해도 약속이 어쩌고 하면서 빠져나갈 것 같기는 하다.

그런 생각으로 만지작거리던 핸드폰을 침대에 던지는데 밖에서 우르르 달리는 발소리가 났다. 아래층에서 3층으로 조심성 없이 계단을 내달리는 두 명이 있었다. 누구인지 뻔해서 가벼운 짜증이 솟는다.

“남의 집에서 작작 좀 뛰어다녀, 얌마들아!”

소리를 질렀더니 발소리가 줄어드는 대신 “오빠 안 먹는다며!” “내가 언제?” 같은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안 봐도 뻔하다. 유하가 준 간식을 가지고 남매가 다투는 중이다.

쟤들은 내 집이 놀이터고 유하네가 무료 간식소 같은 곳인 줄 아나. 전에는 가끔 수호 녀석만 놀러 와서 유하에게 뭔가 얻어먹고 가더니 요새는 동생인 수영이까지 와서 실컷 먹고 놀다가 가곤 했다. 너희들, 집에 가면 엄마가 굶기니? 내가 대신 아동복지과에 신고해 줄까?

그런데 또 유하는 녀석들이 오는 걸 은근히 기다리는지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음식을 만들어놓았다가 안 오는 날에는 나에게 대신 주곤 했다. 저기요, 내가 고용주 아닌가요? 나를 주고 남은 걸 남에게 주는 게 맞잖아? 왜 내가 잔반처리 같은 걸 해야 하는데?

저 남매가 내 평온한 일상을 깨뜨리고 있다.

더불어 내 간식의 범위도 좁히고 있다. 유하가 요새 간식을 쟤들 입맛에 맞춰서 만든다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집주인의 악쓰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꿋꿋하게 간식을 두고 다투는 녀석들에게 갔다. 그리고 서로 가져가려 다투는 마지막 와플 한 조각을 빼앗아 내 입에 홀랑 넣어버렸다. 뺏어먹어서 그런지 맛있네.

“아저씨!”

남매가 동시에 외쳤다. 이럴 때만 맘이 잘 맞는 남매다.

나를 납치범 보듯 하는 두 녀석들을 쫓아내고 기필코 출입문에 도어락을 설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애들은 갔어요?”

유하가 와플이 담긴 접시를 하나 들고 계단을 내려오더니 작업장이 비어있자 묻는다. 쫓아낸 걸 알면 아량 없는 남자 취급을 하겠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하가 할 수 없다는 듯이 접시를 내게 내밀었다.

맛있으니까 먹긴 먹는데. 어쩐지 슬프잖아!

“쟤들은 집에서 밥을 안 주는 거야, 뭐야. 왜 남의 집 식량을 거덜 내는데.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얼굴 좀 봤으면 싶네.”

먹으면서 투덜거리기는 했다. 그런데 다음날 그 불평이 이루어져버렸다. 정말로 녀석들의 엄마가 수리점에 찾아온 것이다.

그 날도 역시 나는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멍한 채로 어제 적어놓은 메모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 급하게 갈겨써서, 대부분은 내가 썼는데도 썼는지 그렸는지 한글인지 아랍어인지 구분이 안 가는 낙서였다.

그 정체불명의 꼬부랑 문자 속에서 간신히 단어 하나를 찾아내면 거기에서 기억을 유추해낸 다음 분류하는 식이었다. 이게 의미가 있는 건지 그냥 바닷가에서 모래알을 퍼 담는 짓인지 스스로도 확신을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손님이 왔다는 말을 듣고 터벅터벅 내려가 보니 수영이 녀석이 웬 아줌마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에 수호가 규희와 함께 왔을 때도 어머니인가 착각했던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신중하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누구신지…”라고 묻자 수영이 녀석이 흥 하고 콧소리를 냈다.

“보면 몰라요? 우리 엄마잖아요.”

들은 다음 봐도 모르겠는데. 너랑 달리 엄마 쪽은 얼굴도 몸도 마른 편이고 눈도 치켜뜨지 않고 들어오자마자 유하에게 달려가서 먹을 것 내놓으라고 하지도 않잖아.

내게 하는 말을 듣고 엄마의 손이 번개같이 녀석의 목덜미에 닿았다.

“버릇없게.”

딸의 목을 한 손으로 안정적이고 견고하게 잡은 엄마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영이 녀석의 얼굴이 단번에 애처로운 14세 소녀로 변했다. 야아, 너도 엄마 앞에서는 착한 딸이구나. 그런데 수영이 어머니, 지금 딸의 외경정맥을 압박하고 계신 건 아니죠? 그 목은 이제 놓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수영이 엄마는 내 시선을 보고 딸의 목에서 손을 풀더니 나를 향해서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와 함께 말을 건넸다.

“어머, 사장님. 제가 너무 오랜만에 와서 잊어버리셨나 봐요. 재작년에 호랑이 인형 맡기러 왔었는데. 4년 전에도 한 번, 부채 때문에…”

엇…옛날 손님이었어. 큰일이다. 재작년이고 4년 전이고 기억 따윈 없잖아.

“아아, 그러셨구나. 제가 기억력이 영 안 좋아서요. 손님도 많고…”

나름 성업중이랍니다.

다행히 수영이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믿어줬다.

“그럼요. 그렇게 실력이 좋으신데 바쁘실 거예요. 아. 우리 애들이 요새 가끔 여기 놀러 온다면서요? 저야 전부터 단골이었지만 우리 애들은 여길 모르는 줄 알았는데 깜짝 놀랐어요.”

어머니, 가끔이 아닙니다.

“그래도 학원에 갈 시간까지 놀고 있으면 좀 나무라서 보내주세요. 사장님이나 유하씨랑 같이 있으니 안심하는 거지만 학원에서 애들이 안 왔다고 전화 오면 저도 놀라게 돼요.”

아니 이것들이 집에 가서 뭐라고 거짓말을 하는 거야. 학원 갈 시간에 여기 있었던 적은 없잖아! 이 녀석들, 나를 알리바이로 이용해 먹었던 거냐? 수영이 녀석에게 따지려고 했지만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래도 언제 두 녀석을 붙잡아 놓고 제대로 물어봐야겠다.

일단은 죄송하다며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얘들이 내 일상의 평화를 깨뜨리고 간식을 제한하고 이제는 사과까지 시키다니. 억울하다!

“사장님이 뭘 사과해요. 그보다 이것 좀 봐주세요.”

애교스럽게 웃으며 그녀는 가져온 가방을 작업 선반 위에서 뒤집었다. 거꾸로 뒤집어진 가방의 입구에서 우당탕 소리를 내며 신발들이 떨어졌다. 모두 네 켤레였다.

전부 운동화였으며 각자의 짝끼리 운동화끈을 연결해서 이어놓았다. 한 켤레만 빼고는 산지 얼마 안 된 새것이었다. 사이즈도 다 같아 보이고. 여자 것 같은데.

“수영이 신발인데, 이번에는 좀 다른 문제가 생겼어요.”

신발들을 내려다보며 수영이 엄마가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좀 다른 문제? 전에도 두 번 나에게 일을 맡긴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때는 비슷한 문제였던 건가. 아는 게 없으니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수영이 엄마는 원래도 가는 눈을 찌푸려 더욱 가늘어지게 만들면서 네 켤레의 신발을 못마땅한 듯이 노려보았다.

“글쎄 자정만 되면 이 신발들이, 한짝씩만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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