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84화 (84/218)

당신이 잠든 사이에(5)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방은 환했다.

막 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1층의 방 몇 개에만 불이 켜져 있었는데 어느새 누군가 여기까지 불을 켜둔 모양이다. 누가 어느 방을 사용할지 모르고 있을 테니 모든 방에 불을 켜놓았을 터다. 낭비잖아, 이거. 가뜩이나 외딴 섬이라 전기를 어디서 막 퍼올 수도 없을 텐데.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아주 잠깐이었고, 방안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 방을 잘못 골랐나’였다.

안은 잘 꾸며졌고 좋은 향기가 났다. 아래층에서 본 것 같은 호화로운 가구들이 배치되었고 침대에는 깨끗한 이불, 탁자에는 아름다운 꽃이 놓여 있었다. 훌륭했지만, 이 모든 것들이 흑백이었다.

내가 흑백영화 속으로 뛰어든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바닥에는 진한 회색의 카펫, 침대는 중간 톤의 회색 나무, 하얀 시트에 연한 회색 이불, 이불에는 진한 회색과 검은 색으로 꽃이 수놓아졌다. 창문에도 회색 커튼이, 벽도 태피스트리도 회색, 심지어 금속 장식물은 하얀 은이었다.

혹시 내 피부도 흑백으로 바뀐 게 아닌지 걱정되어서 내려다보았지만 물론 그런 웃기는 일은 없었다. 그냥 이 방의 모든 색상이 강박적인 모노톤일 뿐이었다.

벽에 걸린 아름다운 은세공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보자 마치 흑백사진에 인물만 색을 입힌 것처럼 보였다. 뭐 이런 방이 다 있어. 그런데 여기에서 피 흘리는 유령이라도 나타나면 피까지 회색일 것 같아서 좀 안심은 된다. 그럴 리는 없지만….

방에 적응을 하고 나자 문 맞은편에 커다랗게 난 창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낮에는 저 창문을 통해 햇빛이 쏟아지겠지만 지금은 어둠 때문에 유리에 반사된 방안의 풍경이 보였다.

밖이 전혀 안 보인다. 반대로 바깥에서는 이쪽이 잘 보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어쩐지 더 밖이 보고 싶어졌다. 스위치를 내리자 방은 한순간 캄캄해졌다.

‘안 보이잖아.’

생각과 달리 이쪽이 어두워졌다고 해서 바깥이 잘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하긴 날씨가 흐리니까 바깥도 빛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창가에 바짝 붙어서 보려고 해봤지만 이 방과 마찬가지로 모노톤인 어두운 형체만 겨우 구분할 수 있었다.

밤이 되어도 가로등이나 다른 건물의 빛으로 밝은 도시와 달리 여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하늘이 흐리면 별빛마저도 없는 것이다. 밤이란 이렇게까지 어두운 것이었나 싶을 정도로 사위가 새카맣다. 답답한 기분마저 들었다.

볼 수 없다면 느껴보는 수밖에 없다. 다른 방의 사람들 기운을 잘 읽을 수 없는 것은 이미 확인했지만 식물은 어떨까. 지금도 유리창을 넘어서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는 들려오고 있다. 가까운 곳에 나무가 있다면 그 기운을 느낄 수 있어야 했다.

굳이 집중할 필요도 없이, 건물 밖의 나무들은 하나하나 셀 수도 있을 정도로 그 기운이 정확하게 읽혔다. 집중하면 조금 더 멀리 나무들 사이에 있는 작은 동물의 기운까지 잡힐 듯이 느껴졌다. 내 감각에 문제는 없는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옆방의 백은호는 아예 기운이 느껴지지 않고 다른 방의 사람들도 흐릿했다. 집안의 어디에서도 쉽게 기운이 읽히는 곳은 없었다. 건물 자체에, 혹은 방안에 뭔가 방비가 되어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혼자서 잘 모르는 부분을 생각해봐야 의미가 없었다. 역시 백은호와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아까의 털에 관해서도 물어봐야 하고.

그런 생각으로 백은호의 방으로 가봤으나 노크에도 부르는 목소리에도 대답은 없었다. 실례겠지만 문손잡이를 살짝 돌렸는데 잠겨 있었다. 문 잠그고 자는 건가. 전화를 걸어볼까 하고 핸드폰을 꺼내봤지만 수신지역 이탈이다. 이런 외딴 섬이니 당연하겠지.

백은호는 정말로 잘 생각인가. 식당에서 털을 보고도 관심 없는 표정이었고 식사 후로 내내 나른하니 흐느적거린 것 같기는 한데. 그게 관심이 없는 일을 대할 때 백은호가 보이는 태도가 맞나 싶기도 하고. 아냐, 역시 좀 이상해.

확인해 봐야겠다.

문이 잠겨있어도 창문은 열렸을지 몰랐다. 내 방으로 돌아가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창틀이 조금 튀어나와 있고 벽도 장식용 타일을 덧대서 손가락 힘으로 어떻게든 버틸만해 보였다. 이 정도도 내 방의 불을 다시 켜놓은 덕분에 겨우 보였다. 해볼까. 떨어진다고 다칠 높이도 아닌 것 같고.

창틀에 발을 걸고 최대한 팔을 뻗자 옆방의 창이 간신히 닿았다. 잡을 수 있는 곳은 창 옆으로 조금 튀어나온 대리석 조각 정도인 것 같다. 손가락이 버텨주기를 바라며 발을 훌쩍 뗐다. 70센티 정도를 건너뛰어 발은 제대로 창틀을 딛었으나, 튀어나온 대리석을 잡은 손가락이 살짝 미끄러졌다.

‘왁!’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손끝에 힘을 주자 간신히 멈췄는데 대리석이 아니었다면 부서졌을지도 모르겠다. 겨우 균형을 잡은 나는 창에 찰싹 붙어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불이 꺼져서 어두웠다. 내 방과 구조가 비슷하다면 침대는 창에서 좀 떨어진 안쪽 벽에 붙어있겠는데…그런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양쪽으로 가지런히 묶인 커튼이 간신히 보였고 더 안쪽은 그냥 시커멓다. 창문을 열 수 있을까 하고 창틀을 만져보았지만 손잡이는 안에 있고, 문은 안에서 밖으로 열리는 구조였다. 그것도 마치 방문처럼 손잡이를 돌리며 열어야 했던 것이다.

그냥 유리를 확 깨버릴까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다. 나 좀 난폭해진 것 같다. 아냐. 이 섬이 나쁜 거야. 내 성격은 온화하고 관대하다고.

어쩔 수 없어 창문을 살짝 두드리며 백은호를 불러보았다. 밤중이니 큰 소리를 냈다가는 온 집안을 깨울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소용없으면 그냥 돌아갈까 생각했는데 방안에서 뭔가 움직이는 기척이 있었다.

사람 정도의 형체가 시커먼 어둠 속에서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가까워지자 사람의 형체이되, 머리만은 이미 여우에 가까워진 백은호가 희미하게 보였다. 방해받아서 기분 나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달라고 하자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손잡이를 잡고 창문을 확 열었다.

잠깐, 이 창문은 안에서 밖으로…야! 백은호!

열리는 창문에 밀려서 나는 아래로 떨어졌다. 물론 제대로 착지하기는 했지만 귀찮다는 듯이 내려다보는 여우요괴의 얼굴이 보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남의 방을 몰래 들여다보다니 악취미군요. 놀이는 혼자서 하십시오. 늦은 밤이잖습니까.”

백은호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여우는 보통 야행성이잖아! 너 너무 인간에 가까워진 거 아냐? 음, 아니. 지금 모습만 봐서는 여우에 더 가깝지만.

백은호는 제 할 말만 하더니 도로 창문을 탁 닫아버렸다. 백은호 녀석, 아무래도 지금은 나를 상대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뭐 좋아. 그럼 나 혼자 놀면 되니까! 이왕 바깥으로 나와 버린 셈이니 그냥 들어갈 수야 없지. 가볍게 탐험이라도 해볼까. 그렇게 생각하고 발을 뗐지만 막상 어디로 가야할지 감도 안 잡혔다.

어두워서 그런지 방향감각도 없었다. 집의 모양을 봐서는 내 방 창문이 서쪽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보통의 집이 남향이니까 그렇게 생각할 뿐이고. 이런 괴상한 섬에 이상한 목적으로 지은 것 같은 집이 남향일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낮이라면 섬을 조감할 수 있는 높은 곳으로 가보겠지만 그것도 지금은 무리고.

‘어, 그러고 보니….’

어디가 어딘지 몰라도 여기 말고 알만한 곳이 하나 있기는 했다.

- 그리 가면 마을 회관이 나옵니다. 그야 지금은 아무도 안 살아서 회관은 물론이고 마을에도 폐가만 즐비하니까 가봐야 귀…

섬에 막 도착했을 때 정호섭이 그렇게 말했었잖아. 어차피 갈 곳이 없으니 귀신 나올 것 같은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나는 저택으로 왔던 길을 천천히 거슬러 내려갔다. 소나무 숲을 빠져나가니 언덕 아래에서 선착장과 마을로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보이는 것은 없는데 멀리서 철썩 철썩 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게 어쩐지 음산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기억에 의존했어도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맹인처럼 헤매야 할 때였다. 급하면 손전등 대신 쓸 생각으로 핸드폰을 가져왔지만 내가 여기 있다는 광고를 벌써부터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기운을 읽어 식물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길은 구분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이, 몇 시간 바다에 가까이 있어 그런지 몰라도 저 엄청난 양의 물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느낌도 조금은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용신과 어딘지 비슷하고, 끓는 듯한 생기와 가라앉는 듯한 음기가 동시에 느껴지는 복잡미묘한 것이었다. 살아있는 것이 아닌데도 감지가 된다니 묘했다.

하기는 생각해 보면 저 물속에는 엄청난 수의 미생물이 서식하고 있기는 해.

길을 따라 걸은 지 얼마 안 되어서 빈집이 하나씩 나타났다. 보이지는 않지만 집터의 자리만 남기고 나무나 풀이 빙 둘러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식물이 없이 텅 빈 네모난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가까이 가보면 틀림없이 건물이 있었다.

어둠 속이라 어떤 모습인지는 거의 구분이 안 되었다.

처음에는 몇 십 미터마다 한 채씩 있던 건물들이 갈수록 점점 간격이 좁아졌고 나중에는 아예 군락을 이루었다. 산과 산이 겹치면서 생기는 오목한 안쪽 부분에 집들이 둥글게 모인 것이다. 사람이 살지 않아 집터마다 잡초가 무성했지만 나무가 별로 없어 마을의 경계가 확실히 구분되었다.

귀신 나올 것 같은 마을이라고 해도 워낙에 캄캄하니 뭐가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있는지도 보이지 않았고, 사실 귀신이라면 몇 번 만나본 적이 있어서 겁먹을 일도 아니었다. 길을 가늠하며 천천히 마을을 가로질렀지만 귀신은커녕 사람 없는 곳이면 흔한 이매 같은 것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본래 마을이어서 그런가.

마을 뒤편의 산에는 목신이 붙은 나무도 몇 보이고 수풀 사이나 땅굴 속에서 작은 동물들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지만 그뿐이다.

아니, 그건 이상하잖아.

동물들이 왜 다 움직이지 않는 거지. 물론 밤이니까 자는 녀석들도 있겠지만 야행성 동물들은 이 시각이면 한창 돌아다니며 먹이를 구할 때잖아. 하지만 날아다니는 새도 없고 나무 사이를 돌아다니는 작은 짐승도 없다.

마을을 구경하려고 했던 것도 잊어버리고 나는 조용한 산을 향해 다가갔다. 해변에서부터 점점 비탈진 땅 위에 만들어진 마을은 길이라는 게 복잡하고 구불구불하기 짝이 없었다. 길을 따라 가는 것은 포기하고 나는 있는 힘껏 산 쪽으로 도약했다.

그렇게 하자 이동 속도는 빨라졌지만 대신 착지할 때 어디로 떨어지게 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 이어졌다. 어떤 때는 도로 옆의 밭에 발이 푹 박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몸이 준비하기도 전에 담장 같은 곳에 닿기도 했다. 거기에서 굴러 떨어지면 시멘트 바닥일 수도 있고 장독 위나 꽃나무 위일 수도 있었다.

마을을 벗어나자 한결 움직이기가 쉬웠다. 나무와 풀을 구분할 수 있어서 착지할 곳이 가늠이 되었던 것이다. 산은 완만한 선을 그리다가 갑자기 꺾여서 가파르게 치솟았다. 마을과 가까운 완만한 산등성이에는 어디나 밭이 만들어져 있었다. 지금은 풀만 무성하지만 큰 나무가 자라지 않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그 밭들을 뛰어넘어 산 정상에 다가가자 어쩐지 발이 무거워졌다. 지친 걸까? 아니, 그럴 리가. 도시를 가로질러도 멀쩡한 내가 고작 이 정도 거리를 뛰었다고 벌써 지쳤을 리가 없다. 하지만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몸이, 아니 그보다는 중력이 강해진 것 같은 그런 터무니없는 느낌.

땅이 이 몸을 끌어당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기묘한 힘을 뿌리치며 정상까지 올라간 나는 산 너머를 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 상상한 적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 수많은 것들이 뒤엉켜 있는 광경을. 백귀야행? 아니다. 단순히 온갖 귀신들이 몰려다닌다든가 하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이것은 흡사 요괴로 이루어진 소용돌이. 산과 산으로 가장자리를 두른 오목한 골짜기 안에서 파도처럼 오르내리며 날뛰는 요괴들의 연회장이었다.

내가 선 정상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비탈에서부터 있었다. 수없이 많은 불덩어리였다. 크고 작은 불덩이들이 무리를 지어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수백 명의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불을 손에 든 사람 같은 것은 없고 나무 사이를 지나다녀도 불이 옮겨 붙는 일 또한 없다. 그것들은 뱀처럼 길게 산비탈을 가로지르며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그 불덩어리의 행렬을 이리 저리 뛰어넘으며 산과 산 사이를 돌아다니는 거인도 있었다.

산비탈에 서 있어도 머리가 산꼭대기보다 훌쩍 높은 키에 우람한 몸집이었다. 꽤 멀리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앞에 서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큰 몸이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물론 사람은 아니다. 풀쩍 풀쩍 뛸 때마다 어쩐지 땅이 진동하는 것 같았으나 사실 그 큰 발이 딛고 간 자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대로였다.

거인의 발 사이로 새처럼 보이는 것이 휙 날아가고, 짐승의 모습을 했으되 짐승 아닌 것들이 뛰어다니며 뱀처럼 보이는 것이 슬슬 기어 다녔다. 곤충처럼 보이는 것도, 아예 형체를 구분하기 힘든 것도 있었다.

수를 세자면 끝이 없을 것 같고 종류를 따지자면 날이 밝을지도 모르겠다. 한 번도 본적 없는 수많은 요괴들의 도가니였다.

그런데 저것들 중 하나라도 나를 눈치 챈다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기본적으로 요괴는 인간과 그리 친하지 않다. 친절한 요괴도 있지만 극소수이고, 보통의 절반은 인간과 접촉하지 않으려고 하며 나머지 절반은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옛날이야기에서 도사나 법사, 사냥꾼 같은 사람들이 요괴를 만나면 우선 공격하고 보는 것은 그 사람들이 호전적이거나 아량이 없어서가 아닌 것이다.

하긴 반대로 생각하면 요괴 쪽에서는 갑자기 인간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했다든가, 원래부터 인간이 먹이에 불과했다든가 할 뿐이다.

어쨌든 저 수많은 요괴들 가운데에 배고픈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르니 여기 더 있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했다. 슬그머니 뒷걸음을 치는데, 등 뒤로부터 뭔가 바스락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용감한 야행성 짐승이 아니면 호기심 강한 안효정이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으나 거기에는 짐승이나 안효정 대신 커다란 목각 인형이, 달그락달그락 팔을 흔들면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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