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71화 (71/218)

줘도 불만이야(3)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그대 생각 그대 표정 나를 웃게 하오.

나의 기쁨도 작은 슬픔도 그대가 주는 것

나 아직은 주도에 서툴러 벅찰 때도 있소.

조금 천천히 그대를 취하리다.

……지금 내 앞에서 달두꺼비가 R&B를 열창하고 있다. 천계의 노래를 부르겠다며?

You`re my all my everything

어렵지 않게 그대가 느껴지고 있다오.

그 빛깔 그 향기 잃어버리지 말아주오.

진지한 그대 품격이 그대 향취가

내 식도 안에 그대로 전해져 와.

술병에 내가 함께 그려져 있나니.

어디서 들어본 곡인데. 이거 여성아이돌 그룹 샤플리의 노래 아니었어? 그런데 미묘하게 가사가 달라. 심지어 영어 발음이 정확해.

내 알아 볼 수 있다오. 보석 같은 맛

변하지 않게 상하지 않게 지켜주겠소.

진실함에 무뎌진 세상에 길을 열어 보여 주오.

그대 곁에서 취할 수 있게.

You`re my all my everything

어렵지 않게 그대…

달두꺼비의 필이 충만한 R&B를 듣고 있자니 어쩐지 나도 한 잔 마시고 싶어진다. 아무래도 제정신으로 이 두꺼비와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달두꺼비는 묘하게 비브라토가 들어간 목소리로 네 명의 소녀들이 화음을 넣어 부르는 대목까지 잘 소화한 다음 꽤 훌륭하게 마무리를 해냈다. 이상하게 개작된 가사 때문에 내가 좀 어이가 없어서 그렇지 노래는 나쁘지 않았다.

박수라도 쳐줘야 하나. 노래를 마친 두꺼비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여운을 즐기는 동안 망설였다. 그러나 두꺼비는 금세 눈을 번쩍 뜨고 나를 향해 말했다.

“오늘 밤은 참으로 달이 좋구려. 그에 술까지 좋으니 금상첨화라.”

여기에서 달 같은 건 안 보여. 그렇게 말해봐야 분위기만 썰렁해지겠지. “그러네.”하고 대충 맞장구 쳐주자 그 정도 리액션으로도 만족하는지 기분 좋은 얼굴로 술상을 쓱 훑어보았다.

“헌데 술이 동이 났구먼.”

네가 술병을 거꾸로 물고 원샷 해버렸으니까요. 이 주도는커녕 예의도 모르는 두껍아.

“다른 술이라도 줄까?”

예의상 물어본 건데 두꺼비의 금색 홍채 안에서 까만 동공이 열정적으로 반짝거렸다. 안 물어봤으면 서운했을 것 같다. 청주를 한 병 꺼내오자 우둘투둘한 앞발로 답삭 집어 들더니 병째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곧바로 평가했다.

“처음 것보다 술병도 못하고 맛도 못하고 향도 못하니 아니 마신만 못하지 않소.”

공짜로 먹는 주제에 입맛은 까다로워. 아란 어미에 관한 노래를 부탁해야 할 입장이라 아니꼬운 것을 참고 대꾸하려는데 흰 도포자락이 팔락 내 앞을 스쳤다. 물레 도깨비가 나는 듯이 가벼운 걸음으로 두꺼비 옆에 앉더니 보기만 해도 화사한 미소를 띠며 나부시 절했다.

“높으신 이름을 바람결에 듣잡다가 오늘에야 이 눈으로 뵈오니 꿈을 꾸는 듯 하나이다. 이 마음을 담아 소녀가 한 잔 올려도 될른지?”

본색을 아는 내게는 가증스러울 정도지만 모르는 이라면 황진이도 울고 갈 물레 도깨비의 교태에, 달두꺼비의 커다란 입이 헤벌쭉 늘어났다.

“내 앞에 항아님이 계시는가 했네 그려. 그 고운 손으로 따라주면 냉수도 감로주처럼 마시지 않고 어찌 배기랴.”

그러더니 물레 도깨비가 따르면 달두꺼비가 넙죽 마시고, 달두꺼비가 한 잔을 권하면 물레 도깨비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렇게 죽이 맞아 둘이서 술 한 되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순식간에 비워버렸다.

물레 도깨비는 원래가 주당이었고, 달 두꺼비는 이미 한 병을 마신데다 반 되를 더 마셔 놓으니 취한 기색이 완연해졌다. 황금색의 우둘투둘한 피부 위로 불그스레하니 홍조가 돌고 목소리가 꼬부라지는데 그 옆에 찰싹 붙어 앉은 물레 도깨비가 눈웃음을 흘리며 살살 구슬렸다.

“듣잡기로 두꺼비님의 노래는 봉황의 울음처럼 신비하고 귀하여 듣기가 힘들다 하던데, 오늘 소녀가 천운을 만났으니 어찌 청하지 않고 이 기회를 보내겠나이까. 바라건대 두꺼비님의 목소리로 제 귀를 씻어주시어 일생의 자랑이 되게 하사이다.”

저런 말을 잘도 낯색도 안 바꾸고 하는구나. 여자는 요물이라더니. 안 그래도 요괴인데!

그러나 나와 달리 평소의 물레 도깨비를 모르는 달두꺼비는 기분 좋은 얼굴로 벙싯벙싯 하며 몸을 들썩였다. 술기운에 미녀의 칭찬이 더해지니 두꺼비도 춤을 출 모양이다.

“내 노래가 귀하기는 귀하다만, 이 좋은 밤을 어찌 노래 없이 지샐 것인가. 눈으로 월궁항아와 같은 미녀를 보고 입으로는 감로주와 같은 술을 맛보았으니 귀 또한 천상의 소리를 들어 마땅할 것일세.”

설마 또 천상의 어쩌고 하고는 아까 같이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부를 생각인 건 아니겠지? 아니, 부르는 것까지는 좋은데 가사는 고치지 말아줘.

두꺼비를 향해 마음속으로 바라는데 물레 도깨비가 슬쩍 나섰다.

“소녀가 듣기로 두꺼비님의 노래는 한결같이 신묘하나 그 중에서도 아란 어미의 이야기는 감춰진 보석과 같다 하더이다. 소녀가 감히 청해도 될른지요.”

물레 도깨비의 말에 나도 귀가 번쩍 뜨였다. 달두꺼비의 대답을 기다리는 아주 짧은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두꺼비는 물레 도깨비를 힐끗 보더니 흔쾌히 승낙한다. 그리고 이미 들었던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물레 도깨비가 부른 노래 그대로 달두꺼비는 시작했다. 아란 어미와 오로 아배의 이야기가 달두꺼비의 구성진 목소리로 펼쳐졌다.

동쪽 끝과 서쪽 끝에서 태어나 선남선녀로 자라나고, 가약을 맺어 부부가 돼 열두 남매를 낳고,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평화롭게 다스리다가 머리가 새고 주름이 지자 망자들의 땅으로 떠나간다.

떠나는 그들의 뒤에서 자녀들이 울며 애통하니, 어미의 간장이 녹는 것 같아 한 걸음이 산을 움직이는 것처럼 무거웠다.

열두 자녀가 하나씩 부모를 부르는데 첫째의 부름에 한 발을 떼고 둘째의 부름에 두 발을 떼고 셋째의 부름에 세 발을 떼며 저승으로 가던 어미는 열두 번째 막내의 부름에 그만 덜컥,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아직 어린 막내의 울음소리에 발을 떼지 못하던 아란 어미는 저승차사에게 사정하여 길을 멈추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에서, 아란 어미는 막내를 무릎에 뉘고 자장가를 불러 재웠다.

익숙하니 알고 있던 자장가가 두꺼비의 입으로 불려졌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자장 자장.

막내가 잠이 들자 아란 어미는 열두 번째 걸음을 디뎠고, 그로써 그들은 죽은 자들의 세계에 완전히 속해버렸다. 부모를 떠나보낸 열두 남매는 어미의 한 걸음마다 하나씩 멈추어 서서, 열 두 조각으로 찢어진 하늘을 한 조각씩 이고 열두 조각으로 찢어진 땅을 한 조각씩 딛고 열두 나라로 흩어졌다.

“이 다음이 천왕 본풀이로 이어지나, 거기까지 부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겠네.”

달두꺼비가 말했다. 그리고는 천장을 흘끗 보는데 그 눈에는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달이 보이는가 싶었다.

“달이 이지러지기 전에, 불러만 준다면 한 번 더 오겠소마는.”

텅 빈 청자 술병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두꺼비가 말했다.

“그럼 내일.”

내가 대답하자 달두꺼비는 만족스레 웃었다. 그리고 세 개의 다리로 펄쩍, 큰 몸을 띄워 작업장을 가로질렀다.

“그럼 내일.”

나를 돌아보며 두꺼비가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펄쩍 뛰어 사라졌다.

목적을 달성한 물레 도깨비가 입속으로 노랫말을 중얼중얼 외며 창고로 들어갔다. 나 역시 바라던 것을 들은 셈인데 어째서인지 풀린 것은 없고 엉킨 것만 늘어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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