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54화 (54/218)

금고 속의 아이들(3)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노앵설. 비밀을 엿보고 잃은 물건을 찾아내는 보물이라?

“백은호, 너 설마…”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더라니 혹시 노앵설을 팔아넘기겠다든가, 네가 이용하겠다든가…

의심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자 내 마음을 읽었는지 백은호는 태연히 대꾸했다.

“딱히 위해를 가하거나 강제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역시 이용하려고 했던 거야. 어린애를?”

내 말에 그는 피식 웃었다.

“겉모습이 어리다고 정말로 어린 요괴일 리가 없고, 만일 어리다고 해도 분별력 없는 것이 아니며, 약한 것은 강한 것에 복종함이 당연합니다. 몇 번을 가르쳐 드려야 기억하실지 모르겠군요.”

그건 요괴나 짐승들의 규칙이고. 너야말로 인간의 규칙을 몇 번이나 가르쳐 줘야 기억할 거냐.

한바탕 잔소리를 하려는데 아래층에서 중2 녀석과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돌아가겠다며 인사를 했다. 남매가 두 아이를 데려다 주겠단다. 약한 것은 어쩌고 하는 말을 듣고 보니 백은호에게 맡기는 것보다는 남매 쪽이 더 믿음직했다.

잠깐 동안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몰라도 수민이는 중2 녀석을 존경어린 눈으로 보고 있고, 여자아이의 모습을 한 요괴 노앵설도 아까 나를 대할 때와는 달리 중2 녀석의 여동생에게 바짝 붙어있다. 아이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는 건가 싶었다.

“수호.”

물어본 적 없어 성은 모르겠고, 중2 녀석의 이름을 부르자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어딘지 어색한 표정이다.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라 나도 어색한 건 비슷했다.

막상 불러놓고 뭐라고 말해야 하나 망설였다. 녀석이 아이들을 데려다 주겠다고 나선 것이나 지난번의 적극적인 모습을 봤을 때나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지난 번 일의 교훈을 기억하라든가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사실 나도 비슷한 실수를 해본 처지로, 뭐라고 잔소리하기도 민망했다. 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할 말을 찾고 있자 녀석은 백은호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알고 있다고요.”

아…똑똑한 놈은 이런 게 편하네.

아이들은 다정하니 우르르 몰려서 작업장을 나갔다. 어제 남매가 왔을 때는 중딩 녀석들은 왜 이 모양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늘은 영 딴판이다. 더 어린 아이들과 함께 있자 의젓해져서 윗사람 노릇을 하고 있는걸 보자니 귀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누구와 함께 있는가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겉모습이 어린아이의 모습이라고 해서 노앵설도 어린 요괴일 리가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가장 적나라한 예를 구미호 여화를 통해 이미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반면에, 겉모습이 요괴의 가장 바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이성에게 특히 호감을 살 백은호나 여화의 외모, 순례 할머니가 만든 옷들을 죄다 걸치고 있던 물레 도깨비, 한 가족의 모습을 보는 것 같던 가택신들, 딸의 모습을 닮았던 도마뱀 여인. 그들의 겉모습은 그들의 내면과 분명히 이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노앵설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한 그녀 역시 내면에 어린아이 같은 것이 있거나 혹은 바라거나 하는 건 아닐까.

“어쨌든 노앵설이 위험한 요괴는 아닌 거지?”

아무래도 아이들끼리 보내는 것이 역시 걸려서 백은호에게 물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요. 감추고 싶은 죄가 있는 사람이라면 노앵설만큼 위험한 요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음…가끔 학원 땡땡이치는 중2 녀석은 약간 위험할지도.

그건 그거고.

중요한 건 노앵설이 한 말인데 금고 안에 있다는 아이들은 도대체 뭘까. 백은호의 말대로라면 혼령이나 요괴는 아니고 살아있는 무엇도 아닐 터다. 노앵설의 말을 듣고 원장 선생님이 울었다고 하니 뭔지 무거운 죄책감을 자극했던 것 같기는 했다.

그 금고 안에는 뭐가 있을까. 노앵설이 말을 해주지 않는다면 직접 열어보는 수밖에 없나? 하지만 무슨 수로…? 고민하는데 거치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서 백은호가 5초에 한 번씩 자세를 바꾸며 기척을 내고 있었다. 나 여기 있다는 티를 뻔뻔하게 내면서 내 쪽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 이 여우가…

백은호라면 분명 방법이 있겠지. 하지만 안 돼. 저러고 있는 걸 보니 부탁하면 뭔가 대가를 요구할 거야. 아, 도깨비들에게 물어볼까. 메밀 요리와 술을 좀 갖다 주면 남의 집 금고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정도는 알아봐 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으로 냉장고를 열었으나…

“없어…?”

안주 칸의 음식들이 텅 비어 있었다. 3층으로 가서 유하에게 말하자 뭔가 짚이는 표정을 했다.

“음식이라면 어제 오후에 새로 넣어뒀으니 부족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은호당의 백사장님이 와 있지 않나요?”

와 있는데 뭐? 유하는 코웃음을 치며 돌아서서 하다가 잠시 멈추었던 설거지를 계속했다. 그리고는 “뭔지 몰라도 그냥 들어줘요. 아니면 계속 귀찮게 할 테니.”라는 말을 한다.

‘계속’이라니, 그건 이미 귀찮게 하고 있다는 말이다. 백은호가 뭘 귀찮게 하고 있다는 거지? 그보다 어제 오후에 넣어둔 음식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아니 잠깐….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가 냉장고를 열어보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으로 당기면 손잡이가 부서질 것 같았다. 백은호를 보자 여전히 이쪽을 외면하고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이 여우 요괴가 진짜….

유하의 말뜻을 알 것 같았다. 냉장고 안에 음식이 없는 것처럼 보인 것도 갑자기 냉장고 문이 열리지 않는 것도 백은호의 술수라는 것이었다. 뭔가 바라는 바가 있는 여우 요괴의 심술이라는 말인데.

“뭐 어쩌라고.”

백은호의 앞에 가서 삐딱하니 묻자 그의 단정한 얼굴이 태연히 내 쪽을 쳐다본다.

“무슨 말씀이신지?”

시치미 떼며 묻는 눈이 요사하니 빛나고 있다. 저도 모르게 휘어진 입가에서 치오르는 요기가 번들거렸다. 감쪽같이 인간인 체하던 그가 잠시 요괴의 모습을 보일 정도로 뭘 원하고 있는 걸까.

“바라는 게 있을 거 아냐. 뭔지 모르겠는데 일단은 들어 보겠다고.”

내 말에 백은호는 요기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을 가늘게 떴다.

“도령의 말씀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사실 바라는 것이라면 저보다는 도령에게 있을 줄로 압니다. 조금 전 다녀간 아이들 때문에 고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비록 짐승으로 태어났으나 인간의 도리를 배워 알고 도령과의 정리가 깊으니, 다소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마땅히 그리해야 할 터입니다. 다만 도령이 염치를 살피는 분인지라 마음에 빚을 남길까 두려우니 그와 함께 저의 작은 소원을 하나 아뢸까 합니다.”

야…그냥 말하라고.

짜증이 솟구치는 것을 참으며 소원이란 게 뭐냐고 묻자 백은호가 대답했다.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노앵설이 그 사람을 찾아낼 수 있도록 도령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아까 봤잖아. 그 녀석, 나한테 말도 안 붙이는 거. 나더러 어떻게 도우라는 거야?”

“방법이 있겠지요.”

백은호가 대꾸했다. 뭐, 생각해 보면 아이들과는 친해 보이니까 전혀 방법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소원이라는 게 의외다.

“너 여우잖아. 그 죽이는 말발로 네가 설득해도 될 텐데?”

“노앵설에게는 여우의 미혹이 통하지 않습니다.”

아…그런 거로군. 여우에게는 손안에 쥐어줘도 쓰지 못할 보물이라는 거였네.

“찾는 사람은 누구인데?”

물었지만 대답해주지 않는다. 이쪽을 외면하고 있어서 표정도 볼 수가 없었다.

“혹시 죽이거나 위험하게 만들 생각…”

“그런 일은 없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어라.

백은호가 약속이라니. 이렇게 쉽게.

하지만 쉽게 약속했어도 그는 진심이다.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도 없겠지.

“알았어. 어떻게든 해 볼게. 그 대신 나도 도와주는 거지? 보육원 원장 선생님의 방 금고 안에 있다는 거 말이야. 노앵설이 말한 다섯 명의 아이들. 그게 뭔지 알아봐 주겠어?”

“쉬운 일입니다.”

내 말에 백은호가 잘난체하는 태도로 말하더니 언제부터 들고 있었는지 모를 서류철 묶음을 내 앞에 척 내놓았다. 한눈에 봐도 낡은, 오래 된 서류 뭉치였다.

“뭐야? 이거.”

“금고 안의 다섯 아이들입니다. 정확히는 그 아이들에 대한 서류이겠습니다만.”

백은호가 담담히 말했다. 잠깐. 그렇다는 건…

“이거, 그 보육원 금고에서 가져온 거야?”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으나

“예.”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언제?”

“말씀하신대로 찾아보던 중에 아이들을 데려오는 김에 금고안도 확인해보면 좋을 듯 해서.”

“안에 안 들어갔다며.”

“예. 원장을 미혹술로 속여서 직접 가져오게 했습니다. 미혹의 효과가 사라지기 전에 돌려줘야 하니 빨리 보셨으면 합니다.”

…이 여우같은 놈…

당한 것 같다. 분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미 말은 입 밖으로 나온 뒤고.

마음속으로 툴툴거리며 서류를 펼쳐보았다. 오래 되어 가장자리가 너덜거리는 것으로부터 종이색만 조금 누르스름해진 것까지, 쌓인 시간이 조금씩 다른 종이들이 다섯 명의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름, 발견되었을 때의 나이, 모습, 특징, 언제 왔으며 어디로 갔는지.

“이거 보육원에 맡겨진 아이들 같은데.”

연도나 담당자는 모두 달랐지만 한결같이 같은 보육원장의 직인이 찍혀 있다. 가장 오래 된 아이는 21년 전, 가장 최근은 7년 전이었다. 입양된 아이도 있고 나이가 차서 내보내진 아이도, 실종 처리된 아이도 있었다.

“이 아이들 말고 다른 아이들 서류도 있었어?”

“금고 안에 있는 서류는 그것뿐이었습니다.”

어째서 이 다섯 명의 서류만 따로 보관해둔 걸까. 그것도 오래 전에 보육원을 떠난 아이들의 것을.

“그리고 서류 외에 다른 것도 있더군요.”

백은호가 덧붙여 말했다.

“장난감 몇 개와 과자, 사탕, 머리핀, 리본, 공책과 연필, 크레파스, 뭐 그런 아이들이 씀직한 물건들이 꽤 쌓여 있었습니다. 놓인 모양으로 봐서는 보관하기 위해서가 아닌 듯 했습니다.”

보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백은호는 고개를 기울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조소라고 해야 할지 어리석은 것을 보며 짓는 실소라고 해야 할지.

“서류를 하나씩 늘어놓고, 그 위에 물건들을 쌓아놓았더군요. 형식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제단’이라고 보는 편이 맞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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