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천 만물수리점-17화 (17/218)

에메랄드 하우스(4)

어서 오세요. 만물수리점입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흉물스럽기조차 했던 얇은 옷자락 안에서, 숨 쉬는 것을 잊을 정도로 요사한 몸이 꿈틀거렸다. 한 순간에 모든 감각이 무섭게 집중했다. 눈을 현혹하는 곡선과 입을 마르게 만드는 살결, 몽롱하니 취할 것 같은 향기에 정신이 휩쓸렸다. 나른하기도 하고 시야가 왜곡되며 뇌가 물렁해지는 기분이었다.

잠깐, 뇌는 원래 물렁해.

그 와중에 딴생각이 들었다가 문득 내가 구미호 앞에서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잊고 있던 숨을 들이키며 움찔 물러서자 구미호의 공들여 다듬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러나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다. 귀여운 것을 보는 얼굴이었다. 상자 안에 넣어놓은 햄스터가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나갈 곳을 찾는 모습을 볼 때나 지을 법한 표정이다. 오싹하다. 여우에게 햄스터라면 식전에 먹는 간식거리밖에 안 되겠지.

“묘하구나.”

구미호는 긴 속눈썹을 끌어올리며 아래에서부터 나를 훑어보았다.

“속세에서 벗어나 마음을 닦는 자도 아니고 구름을 거느리며 도를 닦는 자도 아니고 신령한 기운에 엮인 자도 아니건만.”

짤랑…

방울 소리가 들렸다. 발목의 장신구에 매달린 작은 방울이 흔들리며 내는 소리였다. 그녀가 내게 한 걸음 다가온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렇게…”

짤랑…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서로의 몸이 닿을락 말락 가까워졌다. 구미호가 상체를 기울였다. 그녀의 머리가 내 목덜미로 다가왔다.

“향기로운 냄새가 날꼬.”

여우의 숨결을 느끼고 간질거리던 목덜미에 일순간 소름이 확 돋았다. 나도 모르게 팔을 휘둘렀던 것 같다. 움직이고 나서야 내가 세 번이나 연달아 공격했고 그것을 여우가 장난처럼 쉽게 피했다는 것을 알았다.

내 손을 피해 뒤로 훌쩍 물러나 있던 구미호가 고개를 저었다.

“여자 다룰 줄 모르는 남자네. 처음에는 부드럽게 시작해야지.”

“별로 구미호에게 여자에 대해서 배우고 싶지는 않거든. 생간을 교습비로 줘야 할지도 모르잖아.”

맛있는 냄새가 난다는 말까지 들은 마당에 못할 말이 뭐겠어. 내 대담한 대꾸가 의외로 마음에 들었는지 구미호는 생긋 웃었다.

“받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야. 도대체 내가 뭘 주기에 사내들이 간이라도 내놓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렇게 물으며 구미호가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방울 소리가 짤랑 울렸다. 발을 떼는 것과 함께 허리가 살짝 틀어지고 상체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겨우 한 발 움직였을 뿐인데, 숨 막힐 것 같은 유혹의 포자가 휘장 안의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운다. 요물이었다. 말 그대로의 요물이다.

“별로.”

간신히 짧게 대꾸했다.

짤랑…

구미호가 한 발 더 물러났다.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다리와 허리에서 당겼다 풀리는 근육이 호박색 불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공격받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치명적인 요괴인데도 점점 멀어지는 것이 아쉬운 걸 보면 내가 수컷은 맞는 것 같다.

“밖을 봐.”

구미호가 휘장 너머를 가리켰다. 보란다고 냉큼 고개를 돌릴 만큼 내가 허술하지는 않지만 곁눈질로나마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보기는 했다.

거기에는 방에 들어오면서 본 사람들이 있었다. 여자와 술과 향락에 빠져 있던 남자들이다. 구미호는 휘장 앞으로 다가가서 반쯤 투명한 천 너머의 그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행복한 꿈을 꾸고 있어. 아무도 그 꿈에서 깨기를 바라지 않아 억지로 내보내야만 하지. 그러면 저자들은, 다시 여기에 오기 위해 내가 바라는 건 뭐든 갖다 바치는 거야. 돈을 달라면 돈을, 땅을 달라면 땅을, 정보를 달라면 정보를, 간을 달라면…다른 사람의 간을.”

내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구미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물론 더 이상 줄 것이 없어지면 최후에는 제 간이라도 내놓게 되겠지. 하지만 참으로 탐욕스러운 짐승이지 않아? 너희 인간의 사내란. 잠시의 꿈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생명도 아끼지 않거든. 그 탐욕이 나를 배부르게 하지.”

일반화의 오류입니다.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데 아마도 그녀가 지금까지 봐온 인간의 사내란 대부분 그런 자들일 터였다. 공정하게 표본집단을 추출한 뒤에 다시 통계를 내보자고 할까?

“허나 너는 다르다. 다른 자를 대신 데려와도 너와 같은 향기가 나지는 않을 것이야.”

구미호는 그들로부터 내게 시선을 옮겼다. 이쪽을 보는 눈이 어쩐지 섬뜩했다. 그녀가 요괴라서가 아니다. 그 눈에 담긴 것 때문이었다. 갈증이다. 견딜 수 없이 바라는 눈으로 내 피부를 핥고 있었다.

“네 살을 뜯고…”

짤랑…. 여우가 한 발 다가왔다.

“네 피를 마시고…”

짤랑…

“네 간을 먹고 싶구나.”

마지막 말을 토해 낼 때에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인간의 것을 벗어나 있었다. 뱃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듯한 효후(哮吼)가 실려, 듣는 것과 동시에 피부가 저릿저릿 해왔다.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모습 역시 변하고 있었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입이 뾰족하게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밀빛의 피부 위로 누런 털이 부스스 오르고 가는 팔이 우둑 굵어지며 손가락 끝이 삐죽이 자라났다. 노랗게 변한 머리카락 사이로 튀어나온 귀도, 등 뒤에서 넘실거리는 꼬리도, 쭉 찢어진 입 안에서 번득이는 이빨도 더 이상 인간인 체하지 않는 분명한 짐승의 모습이었다.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내 안으로 들어와라.]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구미호가 손을 휘둘렀다. 발끝에 힘을 주고 본능적으로 물러난 순간 갈고리 모양으로 휘어진 손톱이 내 목이 있던 허공을 낚아챘다.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한 것과 동시에 구미호의 다른 손이 반대편 팔을 긁었다. 셔츠가 부욱 찢겨지며 쓰라린 고통이 밀려왔다.

팔 위로 긁힌 상처가 세 줄 생겨났다. 피가 조금 배어나오는 정도였지만 욱신거리는 아픔 자체보다는 그것으로 인해 실감하게 된 위기감이 더 두려웠다.

젠장, 이건 진짜다. 지금까지 막연하게 생각만 해왔던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위험하다. 다치거나 죽게 된다. 다치면 고통스러울 테고 죽으면 모든 것이 허사였다. 그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어리석구나.]

여우의 몸이 번득 움직였다. 속임수도 없이 직선으로 달려들었지만 피하고 자시고 할 틈이 없었다. 코앞으로 날아오는 손톱을 발로 쳐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 몸이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나는 휘장을 찢으며 방 중앙까지 나가떨어졌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뭔가가 위에서 덮쳤다.

쾅!

피한 것은 운에 가까웠다. 죽을힘을 다해 몸을 굴리는 순간 내가 쓰러져 있던 자리에서 대리석 파편이 튀었다. 바닥이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움푹 패어 있었다. 작은 크레이터 한가운데에서 구미호가 손에 묻은 대리석 가루를 털어내며 일어났다.

뭐지? 인간 상대로 저렇게 공격해도 되는 거야? 저 구미호는 아무래도 나를 다져서 먹을 작정인 것 같다.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는 내 뒤에서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쩐 일인가, 여화. 벌써부터 그렇게 무서운 힘을 다 쓰고 말이야.”

“그렇지. 여우로 변한 모습은 참 오랜만이지 않나.”

느긋한 목소리였다.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고 있다는 투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들린 곳은 분명 구미호가 주는 꿈을 맛보던 사내들이 있던 자리였다. 그러니 말을 건 사람들도 그들 중 하나일 것이다.

구미호로부터 사람이 공격당하는 것을 보면서 두려움도 동정도 없이.

눈앞에 나를 잡아먹고 싶어 하는 구미호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나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내가 들은 목소리가 정말로 사람의 것인지 요괴의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거기에는 어딘지 낯익은 얼굴의 중년 남성이 두 명, 여자들의 품에 기대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라는 건 무슨 뜻일까. 함께 지내는 사람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저 사람들을 아는 걸까. 손님도 아니고. 하지만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크릉!”

사나운 포효가 등을 때렸다. 아니 때린 것은 더 단단한, 힘에 속도를 실어 사정없이 후려친 구미호의 주먹이다. 망치로 등을 맞은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내 몸이 바닥에 처박혔다. 마치 몸이 징이 된 것처럼, 충격이 등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지며 부르르 떨었다.

쓰러진 내 어깨를 털이 부스스한 발이 꾹 밟았다.

[미안하게 되었지만 모처럼의 별미라, 오늘은 참기가 어렵구나. 어서 먹고 싶다.]

머리 위에서 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충격 때문에 눈앞이 어지러워서 그 모습이 흐릿하니 번져 보였다.

“그런가. 하긴 그런 날도 있겠지. 일전의 그 친구 때는 꽤 즐겼으니 오늘은 참아주지.”

“주제를 모르고 발버둥치는 꼴이 볼만했지. 죽을 때까지 말이야.”

여우에게 대꾸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다른 쪽이다. 오른편이었다. 목소리도 달랐다. 저 사람들은 뭐지? 도깨비는 아니고, 혼령도 아니고. 그런데 사람인지 요괴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아직 잠이 덜 깨서인가? 아니면 맞은 데가 너무 아파서 그런가.

[양보하는 체 할 것 없어. 내가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꽤 좋아하잖아?]

여우의 목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내 위로 몸을 숙이고 있는 것 같다.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하긴.”

“구경해 볼까요? 여우가 별미를 맛보는 광경.”

이번에는 출입문 옆의 벽에서, 한 명은 젊은이의 목소리였다. 이 방의 사람들은 모두, 다 미친 것 같다. 여우에게 홀리면 이렇게 되는 건가? 아니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죄다 여우같은 요괴나 괴물인 걸까.

[기꺼이…맛있게 먹어줄 테니 구경하시지.]

뾰족한 발톱이 목덜미를 훑었다. 피부 위로 발톱에 긁힌 자국이 붉게 올라오는 기색이 있었다. 벗어나려고 움직여봤지만 꽉 눌린 상체는 꿈쩍도 하지 않고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왼팔이 그나마 자유로웠지만 조금 움직이는 순간 구미호의 손에 허무할 정도로 쉽게 붙잡혔다.

틀렸어. 잡힌 손목에 발톱이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것에 대답하는 듯한 한숨소리를 들었다.

들은 건가? 아니. 들었던 것 같다. 지금이 아니라 좀 더, 혹은 아주 오래 전에.

-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한심해서 못 봐주겠다는 표정을 하고서 한숨에 이어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아닐 리가 없어. 이건 정말 말이 안 돼. 가능할 리가 없잖아.’

나는 대충 그렇게 대꾸했었고. 그러면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딱 잘라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 가능합니다.

언제나 그랬다.

‘어떻게 가능해?’

지겨워 죽겠다고 생각하며 내가 물으면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 제가, 그렇게 가르쳤으니까요.

아…기억이 조금, 나는 것 같다. 지겹고, 힘들고, 다시 돌아가기 싫을 것 같은데, 어쩐지 생각하니까 웃음이 나는 기억이 하나, 방금 떠올랐다. 그 우스울 정도로 진지하던 단정한 얼굴과 함께.

흐린 시야가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여우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혀를 내밀어 주둥이를 핥으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저런 얼굴을 분명 여러 번 봤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 앞에서 굶주리고 있는 것 같은 사나운 표정이라든가, 발톱을 감아쥐며 으르렁거리던 거라든가, 털이 북슬북슬한 꼬리를 움직이는 모습이라든가. 기억이 났다.

나는 여러 번, 여우와 싸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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