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4 회: 습격 -- >
양성소에는 다수의 신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 신도를 모으는 작업을 진행중이었다.
다른 신들이 신앙을 얻는 작업을 하는 가운데 상현이 따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내가 나서면 전력 강화는 불가능해.'
신앙의 특징중 하나는 다중신앙이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가령 A라는 사람의 예시를 들어보자. 그는 스카디도 좋아하고 이시스도 좋아한다. 하지만 신앙은 단 한 명의 신, A가 조금이라도 더 의지하는 신에게 쏠린다.
반씩 쪼개져 양쪽 신에게 전달되는 그런 편리한 개념이 아니었다. 상현이 잠시 고민을 해보니 자신이 신임을 밝히고 전면에 나설 경우 상당한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그렇게 되버리면 다른 신들은 찬밥 신세가 된다는 점이었다.
상현이 대다수의 인지도를 독식해 버리면 안 그래도 빈약한 지구 신들의 전력은 떨이 수준이 되고 만다.
게다가 신앙을 전부 받는다고 해도 전투력이 직접적으로 상승하는 효과를 주는 것은 아니다.
부가적인 효과가 오르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았으니 자신이 전면에 나서면 득보다는 실이 클 것으로 예상됐다.
최후 전쟁에서 마신 다수가 등장할 경우 상현은 주변에서 시간을 끌어줄 동료들이 필요했다.
여전히 모르페우스의 능력으로는 한 명을 가두는 것이 한계였으니 말이다.
미쏠로지 대원들과 신들의 도움을 받아 방어벽을 구성하고 그 사이 마신들을 한 명씩 저격하는 것이 상현이 현재 세울 수 있는 전략중에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아, 오늘도 바쁘신 모양이군."
"안녕하세요."
교관 전용의 펍 앞을 지나가는데 누군가 아는체를 했다.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커다란 컵을 들고 맥주를 마시고 있던 토르였다.
그는 힘과 천둥의 신으로 위대한 망치와 함께 적을 섬멸한다는 제법 유명한 신이었다.
물론 여기까진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펍의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 도저히 강력하다는 이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노쇠했고 천둥소리를 울리긴 커녕 천둥이 치면 심장마비로 죽을 것처럼 보였다.
만일 그가 신화 그대로 강력한 신이었다면 하데스나 포세이돈처럼 몸이 찢겨 조각조각 봉인됐을 테지만 상현이 그를 구할 당시, 그는 봉인석 속에서 조용히 숨만 쉬며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근접계 전사들에게 격투술 교관으로 나서 기술을 전수했는데 학생들의 반응이 대단히 좋았다.
아무리 노쇠했어도 경험은 경험, 스카디보다 훨씬 더 오래살고 무수한 전쟁을 겪은지라 전수할 것이 많아보였다.
대체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물어보니(본래 그들은 최후 전쟁에서 다죽었다는 신화가 남아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살아나게 됐다고 할 뿐이었다.
부활하고 나니 예전의 강대한 육체도 잃어버린지라(이 부분은 상현과 비슷하다) 이제는 힘 좀 센 옆집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었다.
"같이 술 한 잔 하지 않겠는가!"
"오늘은 일이 좀 바빠서요."
상현은 그에게 인사하고서 잰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갔다.
요즘은 하루의 일분 일초가 아까울 정도였다. 최근 상현이 주력하고 있는 것은 디멘션 홀의 빈도를 낮추는 일이었다.
마신들이 기운을 조작해 디멘션 홀을 대량으로 발생시켰다면 그 반대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착수한 작업이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현재 마신들의 한계치와 자신이 가진 한계치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작업을 펼치면 차원을 조절하긴 커녕 몸이 갈가리 찢겨나갈 판이었다.
때문에 상현은 최대한 안전하게, 마력핵과 이시스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밤낮으로 연구를 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작업에 착수한지 한 달, 슬슬 어느정도 성과가 보이고 있었다.
시험삼아 양성소가 위치한 김책에 결계 형식의 방어진을 설치했더니 몬스터 발생 빈도가 13년 전 수준에 가깝게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현재 이 속도가 정상의 속도란 이야기겠지.'
속도를 계산해보니 얼마나 많은 기운이 몰려들어 틈을 교란시키고 있는지 얼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공식에 따르면 마신들이 투여한 기운의 양이 상상 이상이었다.
물론 상현은 이 연구 결과를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알아봐야 절망감 밖에 들지 않을 터였다. 계산식에 따른 마신들이 보유한 마력량은 도저히 미쏠로지 측이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암울한 상황 중에서도 한 가지 희망적인 관측이 있다면 마신들도 공짜로 마력을 불어넣고 있진 않을거란 점이었다.
저렇게 많은 마력을 소비하고 있으니 그들이 세상으로 나오는데 조금 더 시간을 벌 수 있을듯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차원에 대해서 공부해 두는 건데.'
그가 천 년 동안 살았던 크로노마스의 대신전엔 정말 많은 책들이 있었다.
당연히 상현은 그 많은 책들을 다 읽지도 못했다. 그가 주로 읽은 것은 검술 교본들이었고 그것을 숙달시키는데도 바빴다.
수준 높은 신성 검술을 연마하고 신체를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는데 천 년이란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그 당시 너무 검술만 파고 들었던 것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을 때 맞은 편에서 한무리의 학생들이 지나가며 상현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미쏠로지 에리어가 유명한 이유는 세계 최고 랭크 능력자인 환상현의 덕이 컸고 적어도 이 학원에 등록된 능력자라면 당연히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롤모델로 삼는 능력자를 조사했을 때 부동의 1위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환상현이었다.
"예. 수고들 많으시네요."
가볍게 인사하며 그들을 지나치려는데 상현은 뒷목이 뻣뻣하게 당겨지며 전신의 솜털이 쭈뼛서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상현이 양손으로 잡고 있던 가슴앞의 두꺼운 서적들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상체가 옆으로 비틀렸고 동시에 지면을 밟고 있던 발이 솟구치며 자신을 공격한 적에게 날았다.
뜬금없이 단도를 꺼내 목을 노리고 든 습격자의 정체는 다름아닌 방금 전 인사를 건넨 일행의 맨 끝에 있던 평범한 남성이었다.
날카로운 단도를 쥐고 상현의 목을 자르려던 그는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 가슴에 발차기를 얻어맞은 그는 피를 토하며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을 뚫고 나가 밖으로 떨어졌다.
현재 건물의 높이가 3층, 중상을 입어도 이상하지 않을 높이였다.
무슨 능력자가 3층에서 떨어진다고 중상을 입느냐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낙하하면 능력자나 일반인이나 크게 다치긴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 상현을 습격했던 남자는 발차기 한 방으로 의식을 잃었던 것이다.
"현수야!"
"꺄-악!
동료들이 상현에게 발차기를 맞고 밖으로 나가 떨어진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비명을 질렀다.
양성소가 지어지고 1년, 처음 일어난 습격사건에 순식간에 엄청난 인원이 주변으로 몰렸다.
더 심각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상현은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가볍게 착지, 쓰러진 중상자를 들쳐메고 병원으로 달렸다.
금새 수술실의 문이 닫히고 대수술이 시작됐다.
"레벨 3의 방어능력자라고 하더군요. 그나마 피부가 단단하지 않았더라면 교주님 발차기를 맞았을 때 즉사였겠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정석영이 상현의 옆에 앉아있었다. 양성소 내에서 이뤄진 암살시도, 그것은 정말이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누군가 환상현을 노리고 있었다.
"이름은 이현수 나이 20살, 1년 전에 입학해서 이제 겨우 3레벨 능력을 이룬 그저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는 학생입니다. 딱히 교주님과는 어떤 접점도 없구요. 주변의 말에 따르면 성격도 둥글둥글해서 교우관계도 좋았다고 하더군요."
"소름끼치는 공격이었습니다."
"예?"
정석영은 상현의 말에 반문했다.
"아무런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그 학생, 겨우 3레벨 능력자라고 하셨죠. 단검을 휘둘렀을 때 까지도 아무 기척이 없었습니다."
본래 누군가를 공격할 때는 적의라는 것이 생성된다. 아무 적의도 없이 손을 휘둘러서 타인을 공격하는 것은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에야 할 수 없다.
그런데 자신을 공격했던 남성은 아주 조그마한 적의도 없이 손을 휘둘렀다.
때문에 상현의 반응은 늦을 수밖에 없었다. 타인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상현은 누군가의 암습으로부터 엄청난 강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을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다.
"저는 이번 공격이 저 학생의 의지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세뇌를 당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세뇌요? 누가 그런 짓을...."
"글세요. 제가 죽길 바라는 세력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죠."
가장 유력한 것은 잠들어 있는 마신 세력이다. 혹은 그들의 편에 붙은 신들이 수작을 부린 것일 수도 있었다.
미쏠로지에게 앙심을 품은 국가에서 나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모든 것은 저 학생이 깨어나야 알 수 있겠군요."
수술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능력자들이 나타나기 전에 대수술은 긴 시간을 필요로 했지만 현대에 와서는 힐러들이 수술을 도왔기 때문에 수술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술을 끝낸 남학생을 중환자 실로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시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그의 이마에 대고 주문을 읊자 그가 눈꺼풀을 바르르 떨더니 정신을 차렸다.
"정신이 드십니까?"
상현이 묻자 그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는지 눈을 깜빡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여기가 어딘가요?"
"병원입니다. 조금 다치셨거든요."
"제가요?"
그는 자기가 다쳤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가장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날짜가 며칠입니까?"
상현이 묻자 그는 눈을 감더니 끙 하고 입을 열었다.
"13일이요."
"3일 전이군."
정석영이 중얼거렸다. 놀랍게도 남학생의 기억은 3일 전부터 끊겨 있었다. 그 잃어버린 3일 동안 그는 모종의 불쾌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
그가 충격을 받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조사가 진행됐다. 하지만 알아낸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는 평범하게 학과 수업을 듣고 기숙사로 향하던 도중에 봉변을 당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거 문제 있는 거 아닙니까."
레이드를 마치고 돌아온 에딕손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만약 암습이 상현에게 큰 피해를 끼쳤다면 그 뒤의 후폭풍은 엄청났을 것이다.
한국을 세계 1위의 국가로 끌어올리고 양성소를 이만큼이나 키운 것은 전적으로 상현의 공이었다. 던전에 봉인된 신들을 구하고 홀로 발품을 팔아 지금까지 이끌어온 것이다.
"오늘부터 레이드를 중단하고 돌아가면서 오빠 주변을 지키도록 할게요."
한솔이 말하자 상현은 손을 저었다.
"다들 너무 심각하게 그러지 말아요. 보시다시피 상처하나 없잖아요. 저보다는 다친 학생이 문제죠."
"너는 좀 더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어."
종현이 말했다.
"오늘은 운이 좋아서 그랬다지만 저런 미친놈들이 떼거지로 몰려들었다거나, 정말 강한 놈이었으면 어떡할 뻔 했어? 물론 양성소 안에서 난동을 피우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조심할 건 조심해야지."
"알았어요. 조심할 테니까 일단 레이드는 그대로 진행해주세요."
대원들을 진정시키면서도 상현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습격한 이현수라는 학생의 기억이 멈춰있는 것은 3일 전, 그리고 이야기를 종합한 결과 그는 이 양성소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즉, 누군가가 그의 기억을 지우고 수작을 부리는 동안 일어난 모든 일들이 이곳 내에서 일어났을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인간을 가볍게 세뇌시켜 자신을 공격하게 만들 정도의 힘을 가진 적이 양성소 내에 숨어있다는 사실이 자신을 습격할 가능성보다도 훨씬 더 마음에 걸렸다.
그런 위험한 놈이 숨어있는 이곳에 대원들을 남기는 것이 오히려 불편했다. 상현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지금처럼 바깥으로 나가 레이드를 돌아주는 것이 오히려 마음편했다.
회의를 마치고 숙소로 가는 길, 넓게 펼쳐진 화원을 가로지르는데 그 중앙을 막고 있는 여성이 눈에 띄었다.
상현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하고서는 한발자국 물러나며 물었다.
"누구냐."
"감이 무척 좋군."
여성의 목소리는 그대로였지만 다른 이의 말투로 짐작되는 말이 흘러나왔다.
"오전에 보낸 선물은 잘 받았나?"
"선물?"
"내가 준비한 깜짝 선물이라고나 할까."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단 둘이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오직 둘만."
여성의 말에 상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그 조건에 응할 거라고보나?"
"응하지 않는다면 더 멋진 선물을 준비해주지. 미쏠로지 대원들이라고 했던가. 아직 이곳에 머무르고 있더군."
상대가 대원들을 들먹이자 상현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내 대원들을 건들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래? 어떻게? 아레스처럼 목을 치기라도 할 건가. 이거 무서워서 못살겠군."
그는 능청스럽게 웃었다. 세뇌당한 여성이 팔짱을 끼고 깔깔거리는 모습은 몹시 기괴하게 느껴졌다.
"시간을 주도록 하지. 이 나라에 북쪽에 명산이 하나 있다지. 백두산이라고 했던가? 내일 정오 12시, 그곳 정상에서 얼굴을 보기로 하지. 나오지 않는다면...글쎄. 내 말을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그 때 보여주도록 하지, 신중하게 생각하도록 해.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혼자서 오도록."
할말을 다 마쳤는지 그는 입을 다물었고 세뇌가 풀렸는지 여학생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을 깜빡이더니 상현을 발견하고선 깜짝 놀라 물었다.
"아, 안녕하세요. 근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분명 방금까지 길을 걷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는 상현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