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나이트 레전드-40화 (40/123)

< -- 40 회: 알바리아 거미둥지 -- >

거미들은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일행들이 전력을 다해 거미들을 처리했지만 상현에게 걸리는 부하는 점점 더 과중되고 있었다.

'어쩔 수가 없네.'

방패를 들고 방어에만 전념하던 상현은 결국 본성을 드러냈다. 방패도 엄연한 무기, 쓰기 나름이었다. 왼편의 방패에 마력을 주입해 거대 거미들을 쳐낸 상현은 간격을 만든 뒤 오른손의 방패로 거미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방패 하단부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마력이 주입되자 그것은 더 이상 방패가 아니라 날카로운 무기였다.

츄각-

머리가 터지는 징그러운 소리가 울리며 거미들이 꾸륵 거리며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대체 왜 재생능력자가 된 걸까. 염력이라던지, 공간이동이라던지 좋은게 많은데!'

애꿎은 화풀이를 거미에게 풀며 상현은 순식간에 주변을 거미 피바다로 만들었다. 초록색 피가 얼마나 쏟아져 나왔는지 상현은 수면 위를 걷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흠흠, 다시 검을 들어야겠네."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린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상현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방패를 등에 메고 검으로 교체했다. 역시 천 년을 손에 쥔 검이 손에 익숙했다. 묘한 안정감에 흡족해진 상현의 손이 매섭게 움직였다.

대량의 거미들을 처리하고 난 모처럼의 휴식시간, 핫도그를 파는 포차도 없었고 지정된 숙소도 없었기 때문에 거미동굴에서는 모든 것을 자급자족 해야만 했다.

대원들이 다함께 식사준비를 하는 사이 상현은 조금씩 신성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신성력은 밥을 먹고 난 후 대원들의 머리 위에 부어졌다.

"형, 이게 무슨 의미에요?"

둥그렇게 둘러앉아 체력을 비축하는 대원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돌아다니는 상현을 보며 재후가 물었다.

"나의 특제 축복이라고나 할까."

"어...그거 저도 좀 주시죠."

은근슬쩍 정석영이 와서 세례를 받는 신도처럼 상현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네."

상현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정석영에게도 축복을 부여했다. 자신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의 한도 내에서 끌어올린 가벼운 축복이었다.

상현의 말을 들으며 일행들은 자기암시를 떠올렸다.

'플라시보 효과 같은건가?'

플라시보 효과란 실제로 아무 효과없는 것을 믿는 것으로 효과를 보는 것을 말한다.

어느 환자에게 평범한 알약을 주며 이건 특효약이다! 라고 알려줬더니 정말로 병이 호전됐다든지 하는 효과 말이다.

하지만 일행은 전투에 나서고 난 후 환상현 특제 축복의 효과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

'축복 때문이야? 기분 탓이야?'

미묘하지만 몸이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백종현은 이 모든 것은 마인드컨트롤에 의한 현상이라며 단순한 자기암시 효과로 치부했지만 그렇제 주장한 종현조차 평소보다 기운이 난다고 느낄 정도였다.

상현의 축복은 어둠 속에서 더욱 힘을 발휘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하 거미굴의 컨셉은 어두컴컴한 토굴, 일행은 무서운 속도로 던전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기 전과 먹은 후의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심지어 아래로 내려갈수록 폭탄거미 같은 까다로운 적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진행속도가 더 빨라졌다.

결국 상현이 진짜 축복이 내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백종현은 대체 왜 이 좋은 능력을 썩히고 있었냐며 가볍게 한탄했다.

블랙세이펄에서 축복을 내렸으면 더 좋은 효과를 받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기에 하는 소리였다. 실제로 환상현의 축복은 꽤나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지만 크라켄과 싸우기 전의 상현과 후의 상현의 체력적인 기량은 큰 차이가 났다.

전투를 거듭할 수록 신성에 대한 내성이 생기는 것 같았다. 좋은 현상이라 할 수 있었다. 실제로 크라켄과 싸운 뒤에는 지치긴 했어도 기절까진 가지 않았던 상현이다.

던전 25층, 계속 어두운 토굴이 이어졌기에 시간이 가는 것은 오직 시계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현재 바깥의 시간이 자정 12시, 아침 7시부터 이어진 강행군에 다들 지친 표정이었다.

그런 대원들을 보며 백종현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블랙세이펄을 내려갈 당시 하루에 이동하는 층수의 평균은 20층이었다.

최하층인 101층에 도달하는데 걸린 시간이 5일, 알바리아 거미둥지가 훨씬 더 높은 난도의 던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쾌진격의 속도였다.

이게 다 특훈의 성과라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짐을 풀고 야영을 해야겠군."

조그만 샘이 흐르는 자리를 발견한 백종현은 야영준비를 하자고 제안했다.

곧바로 대원들의 배낭에서 텐트 장비들이 풀어지며 뚝딱뚝딱 베이스캠프가 차려졌다.

"그럼 불침번을 서야 하는데..."

이미 25층의 대부분을 쓸어버렸기에 적이 나타날 확률은 적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위험한 곳에서 불침번을 세우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종현이 불침번을 뽑으려 하는 그 때 상현이 손을 들어올려 그만두라고 고개를 저었다.

"불침번은 내가 서겠습니다."

"혼자서? 그러면 안 되지. 하다 못해 두 명이라도...."

"공격대장으로서 저를 믿으신다면 맡겨주세요."

이런 때에는 은근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상현이었다. 마땅히 할 말이 없었던 백종현은 알겠다며 수긍했다. 대신 졸리면 꼭 자신을 깨우라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행이 다 잠든 사이, 상현은 무기고에서 새로 뽑아온 검을 손질하며 시간을 보냈다. 붉은 불꽃 무늬가 음각된 멋스러운 검은 한국 전통의 장검과 비슷했다.

던전이 이세계(異世界)에서 넘어온 것임을 고려했을 때 디자인이 비슷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상현은 이 검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사용한지 며칠이 채 안되어 골로 보내버린 달빛섬광을 떠올린 상현은 이번에는 최대한 오래 써야겠다며 더 열심히 검을 손질했다.

"오빠, 교대하실 시간이에요."

"벌써?"

검을 손질하고 검술을 점검하느라 몰랐는데 벌써 4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혼자 맡기기엔 불안한데."

"저 정말 열심히 훈련했어요. 믿어주셔도 되요."

"농담이야, 농담."

백종현이 자러 들어갈 때만 해도 교체할 사람을 정하지 않았는데 그가 알아서 손을 써둔 모양이었다. 상현과 교대하기 위해 잠을 깨고 나온 인물은 한솔이었다.

지난 45일간 한솔은 정말 이를 악물고 훈련했다. 대원들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을 때, 그녀는 자진해서 백종현을 붙잡고 추가 훈련을 자청할 정도였다.

이번 훈련에서 가장 많은 땀을 쏟은 인물은 단연 그녀였다. 더 이상 일행의 발목을 붙잡지 않겠다는 일념하에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인내했고 결국 그녀는 성공적으로 훈련을 마칠 수 있었다.

상현 앞에서는 화사하게 웃고 있었지만 적을 만나면 숨통을 찾아 일격필살의 화살을 꽂아넣는 강인한 전사가 된 것이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하품조차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 불침번을 자청한 것도 원래 잠이 없기 때문이었다. 억지로 자야 하나 싶었던 상현이 텐트로 기어들어가려는 찰나 한솔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오빠?"

"응?"

"혹시...아, 아니에요."

"뭔데 그래. 아무런 말이라도 괜찮아."

상현이 뭐든 괜찮다며 말해보라고 했지만 그녀는 결국 입술을 꾹닫고 고개를 흔들었다.

"문제 생기면 바로 깨워. 알았지?"

"네."

상현이 텐트 안으로 사라지자 한솔은 그에게 하려던 마음을 속으로 되뇌었다.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상현이 들어간 텐트를 바라보며 그녀는 그 말을 몇 번이고 속삭였다.

2일차 공략이 시작된 것은 아침 10시였다. 이례적으로 잠을 푹 잤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백종현의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훈련을 할 때는 8시간의 수면 만으로도 충분히 피로를 해소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위협이 도사리는 던전 한가운데를 돌파 중이다.

안전하다면 최대한 힘을 충전하는 것도 전력을 보존하는 방법이었다. 평소보다 두 시간 더 잤기에 개운한 얼굴로 텐트밖으로 나온 그들은 샘의 물을 한 바가지 마시고서 아침을 준비했다.

한국인은 밥심, 밥을 먹고 난 다음엔 상현의 축복이 다시 리필 됐다.

"아이고, 교주님. 저에게도 좀."

정석영은 이제 노골적으로 상현의 축복을 구했다. 그는 일행들 중 상현이 신성력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고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가 신이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신의 힘을 불러내는 샤먼 정도로 생각했지만 말이다.

다들 강력한 자기암시 효과라고 생각하는데 비해 정석영은 그의 신성을 의심하지 않았으니 더욱 매달릴 뿐이었다.

"아, 참고로 여러분에게 미쏠로지 전용으로 채택된 상급던전은 시간 제한이 없습니다."

화염방사기로 거미 통구이를 만들어낸 정석영이 마스크를 벗으며 말했다.

"기존 상급 던전은 한 달의 시간제한을 가지지만 3개 던전은 느긋하게 공략하셔도 됩니다."

정석영의 말에 백종현과 상현이 짤막한 의견을 나눴다. 처음에는 공략 속도를 조금 줄일까 싶었지만 이내 그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공략 시간에 제한을 두지 않은 것은 정부의 배려이지 어느 곳에서나 적용되는 사항은 아니다. 특혜를 염두에 두고 실전에 임하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으니 일단은 정석대로 움직이자는 의견이었다.

"선배, 대원들의 상태는 어때요?"

"아직 멀쩡해. 애들이 이를 악물고 정말 열심히 훈련했거든. 아마 네가 아팠던 탓도 있겠지. 네 말대로 다들 착한 애들이야."

상현은 종현과 나란히 걸으며 곁눈질로 대원들의 상태를 체크했다.

"그나저나 영약을 못먹어서 아쉬울텐데 이번에 복귀하면 꼭 정부에 달라고 해. 네가 달라고 하면 아마 특등급짜리 영약을 구해다 줄거다."

상현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던 그 때 전방에서 작은 소음이 울렸다. 그 소음은 매우 미세해서 오직 상현과 백종현만이 감지할 수 있었다.

구르르르-

무언가가 단체로 구르는 소리, 그 소리를 듣고 적을 파악한 백종현이 뒤로 물러서며 일행들에게 소리쳤다.

"폭탄 거미다!"

폭탄 거미, 터지면 반경 수 미터를 화염체액으로 날려버리는 걸어다니는 수류탄 같은 놈이었다. 체액이 독과 화염이 같이 섞여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수류탄 보다도 악랄한 면이 있었다.

통로를 가득 메우고 구르는 폭탄 거미들의 크기는 약 1미터, 그것들이 열을 맞추고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고 있었다.

만약 저 거미의 파도에 탱커들이 휩쓸린다면 S급 방어구고 뭐고 처참하게 찢겨나가리라.

원거리 딜러들이 실력을 보여줄 차례였다.

"블리자드!"

"뇌광의 화살!"

"일격의 화살!"

뒤로 백스텝을 펼치며 재후와 한솔, 이예나가 무섭게 공격을 날리기 시작했다. 정석영은 능력자들에겐 허락되지 않은 소형 크레이모어를 깔며 물러섰고 일정 선을 거미들이 넘는 순간 크레이 모어가 발동하며 거미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쿠르르릉-

던전의 내구도는 의외로 단단하다는 것이 10년동안의 데이터로 누적된 바, 정석영은 쾌활하게 웃으며 일행에게 수류탄을 나눠줬다.

"맘껏 던져서 스트레스나 풀어보죠!"

쾅 콰쾅!

폭탄거미는 달라붙으면 무서운 놈이지만 방어력은 약해 조그마한 충격에도 쉽게 터져나갔다. 정석영의 수류탄은 아주 특효약이었다.

수류탄과 클레이모어의 위력에 거미들이 연달아 연쇄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끝내주는구만 끝내줘."

정석영이 스스로 벌인 일에 취할만큼 효과는 뛰어났다. 그의 대활약에 일행들이 기뻐하는 것도 잠시, 던전의 천장이 불길하게 쩌적거리며 흙먼지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어?"

설마했던 정석영은 얼굴이 누렇게 똥이 되어 중얼거렸다.

"던전이 무너질리가 없는데?"

"젠장,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쩌저저적-

던전의 천장에 굵직한 금들이 긴 통로를 가르며 생겨났다.

"모두 붙잡아!"

백종현은 재빨리 일행들에게 모일 것을 지시하며 던전이 무너질 것에 대처했다. 던전이 무너졌다는 소리는 그도 들어본 바가 없었지만 실제로 지금 눈앞에서 그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갓 뎀!"

정석영은 소리를 지르며 일행의 틈바구니로 파고들었다.

콰르르르-

"으아악!"

정작 무너진 것은 천장이 아닌 그들의 발밑이었다. 일행은 소리를 지르며 깊은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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